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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무 일도

~ 성 요한 보스코 사제 기념일 성무일도 ~

 

1월 31일 성 요한 보스코 사제 기념일 아침기도

 

1월 31일 성 요한 보스코 사제 기념일 저녁기도

 

1월 31일 성 요한 보스코 사제 기념일 끝기도

 

 

 

 

 

 

 

 

 

 

 

 

 

 

 

 

 

 

 

 

 

 

 

 

 

 

 

 

 

 

 

 

 

 

 

 

 

 

성 요한 보스코 사제 기념 

 

1815년 토리노 교구의 카스텔누오보 근처에서 태어났다. 어린 시절을 어렵게 보냈다. 사제가 되어 젊은이들의 교육에 온갖 심혈을 기울였고 젊은이들에게 기술 교육과 그리스도인 생활을 가르치는 살레시오회를 창립했다. 신앙을 옹호하는 몇 개의 소품들을 남겼다. 1888년 세상을 떠났다.

 


성 요한 보스코 사제의 편지에서
(Epistolario, Torino, 1959, 4,201-203)

 

나는 언제나 사랑하는 마음으로 일했습니다

 

우리가 무엇보다 생도들의 참된 행복을 찾고 그들이 생활에서 자신의 본분을 다하도록 인도해 주고 싶다면, 우리는 이 사랑하는 젊은이들의 부모를 대리한다는 것을 결코 잊지 말아야 합니다. 나는 언제나 그들을 위해 사랑하는 마음으로 일하고 노력하고 또 사제 직분을 이행해 왔습니다. 비단 나만이 아니고 살레시오회의 회원 전체가 그렇게 했습니다.


자녀들이여, 나는 나의 긴 생활을 통해서 이 위대한 진리에 대해 얼마나 자주 확신하게 되었는지 모릅니다! 참는 것보다 화를 내는 것은 더 쉽고 젊은이들을 위협하는 것은 설득시키는 것보다 더 쉽습니다. 이런 이야기까지 하겠습니다. 즉, 참아 내지 못하고 오만한 성격을 지닌 우리에게 있어서, 반항하는 생도들을 참아 주면서 엄중하게 그리고 온유하게 그들의 잘못을 고쳐 주는 것보다 벌을 주는 것이 더 용이한 일이라는 점입니다.


성 바울로가 초심자들에 대해 지녔던 그 사랑을 나는 여러분에게 천거합니다. 바울로 사도는 그들이 잘 순종하지 않고 자신이 베푸는 사랑에 대해 무관심한 것을 보았을 때 그 사랑은 바울로로 하여금 눈물을 흘리게 하고 그들에게 권고하게끔 해주었습니다.


여러분이 주체 못하는 분노에 따라 행동한다고 생각할 근거를 어느 누구에게도 주지 않도록 조심하십시오. 벌을 줄때 우리가 권위를 주장하거나 또는 분노를 폭발시키려고 행동한다는 인상을 주지 않기 위해 필요하게 되는 그 마음의 평안을 유지하기란 힘든 일입니다.


우리 권하에 있는 이들을 우리 자녀로써 바라보도록 합시다. 명령하러 오시지 않고 순종하러 오신 예수님처럼 그들을 섬기는 자가 되도록 합시다. 지배한다는 그런 인상마저 부끄럽게 생각하고 그들에게 더 잘 봉사하기 위해서가 아니라면 그들에게 지배권을 행사하지 맙시다.


예수님이 사도들을 대하신 방법도 바로 이것입니다. 사도들은 무지하고 예의를 모르고 불충실한 사람들이었지만 주님은 그들을 참아 주셨습니다. 주님은 죄인들도 자비와 애정 어린 지극한 친밀성으로 대하셨습니다. 그것을 본 어떤 이들에겐 놀라움이 되었고 또 어떤 이들에겐 걸림돌이 되었지만 한편 다른 이들은 그분으로부터 죄 사함을 받게 되리라는 희망을 갖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그분은 우리보고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한 자가 되라고 권고해 주셨습니다.


생도들이 진정 우리의 자녀라면 그들의 잘못을 고쳐 줄때, 우리는 온갖 분노를 재거해 버리거나 분노를 완전히 제어한 것으로 보일 정도로 가라앉혀야 합니다. 우리는 분노로 마음의 평화를 잃거나 멸시의 눈초리를 보여 주거나 또는 마음 상하는 말을 하는 일이 없도록 해야 하고, 오히려 잘못을 고쳐 주고 다 잘되게 해주는 참된 부모들처럼 지금은 자비를 베풀고 미래에는 희망을 내주어야 합니다.


특별히 중대한 문제들이 있는 경우에는 절조 없이 말을 뇌까리는 것보다는 겸손과 항구심으로 하느님께 기도하는 것이 더 유익합니다. 절조 없이 말을 뇌까릴 때 그 말을 듣는 사람에게 마음을 상하게 만들고 잘못을 저지른 이들에겐 유익한 것을 하나도 주지 못합니다.

 

[돈 보스코 성인의 발자취를 따라서] 프란치스코 살레시오와 돈 보스코의 인연

 

250여년뒤 신학생 돈 보스코가 주보성인으로 공경,

교회에 대한 충성심, 인내와 온유 등에 큰 매력 느껴

 

 

돈 보스코와 살레시오의 만남은 어떻게 이뤄진 것일까.

 

250여년이나 후대를 살았던 돈 보스코가 살레시오를 알게 된 것은 신학교 시절. 돈 보스코가 신학교를 다녔던 이탈리아 북부 토리노 지방은 살레시오 성인이 살던 당시 사보야 왕국에 속해 있었고, 살레시오 성인이 널리 알려져 있었다. 그래서 돈 보스코는 신학생 때부터 살레시오를 주보로 수호성인으로 공경하며 그를 본받으려 노력했다.

 

살레시오에 대한 돈 보스코의 공경은 그의 사도직 활동 곳곳에서 확인된다. 그는 1844년 가난하고 버려진 아이들을 모아 교육하는 오라토리오('기도하는 곳'이라는 뜻)를 설립하며 '프란치스코 살레시오'라고 이름지었고, 1852년 이탈리아 발도코에 첫 성당을 지으면서 살레시오 성인께 봉헌했다. 또 자기 제자들과 협력자들을 '살레시안'이라 불렀으며, 1884년 수도회 인장을 만들면서 살레시오 성인 모습을 새겨넣기도 했다.

 

돈 보스코는 특별히 살레시오 성인의 두가지 모습에 매력을 느꼈다. 하나는 살레시오의 사목적 활력, 형제들 구원을 위한 열정, 진리를 변호하고 가톨릭교회를 수호하려는 충성심이고 다른 하나는 이같은 열정을 실행하면서 드러나는 인내와 친절, 온유이다.

 

사제로서 특히 가난한 청소년들을 위한 교육사업에 자신을 바친 돈 보스코가 내적으로는 온유와 인내를 간직하면서도 밖으로는 담대함과 용기를 갖고 복음을 전한 살레시오 성인의 삶에 감동한 것은 당연한 귀결일지 모른다. 또 하느님의 섭리이자 안배이기도 하다.

 

그래서일까. 조금은 급한 성격을 가졌던 돈 보스코는 살레시오 성인을 본받으려고 노력하며 그 어떠한 사람도 지극히 존중하며 환대하고, 늘 미소를 머금은 채 한없는 인내와 온유함으로 청소년들을 돌보는 삶을 살았다.

 

두 성인의 영적 만남과 교류는 이렇게 보이지 않게 이뤄졌지만 이제는 전 세계 128개국에 산재한 살레시오회원들을 통해 다시 재현되고 있다.

 

[평화신문, 제777호(2004-06-13), 박주병 기자]

 

[돈 보스코 성인의 발자취를 따라서] (1) 영적 스승 프란치스코 살레시오 유적지

 

가난한 사람 그냥 지나치지 못했던 살레시오

 

 

(사진설명)
1. 프란치스코 살세이오 성인과 요안나 샹탈 성녀가 설립한 마리아 방문회 대성당 전경.

2. 성 프란치스코 성인 유해가 안장된 황금색 부조.

3. 성녀 요안나 샹탈 유해가 안장된 황금색 부조.

4. 마리아 방문회 대성당에서 강종명(살레시오회) 신부와 함께 미사를 봉헌하고 있는 순례단.

5. 안시의 프란치스코 살레시오 성당 내부 전경

 

 

가난하고 버림받은 아이들의 '벗'이자 '아버지'로 살았던 돈 보스코(1815~1888) 성인. 그의 영성과 삶을 따라 사는 살레시오회가 한국에 진출한 지 50돌을 맞았다. 이를 기념해 살레시오회는 순례단을 모집, 지난 5월21일부터 31일까지 프랑스와 이탈리아에 산재한 돈 보스코 성인 관련 성지를 돌아봤다. 이에 동행, 돈 보스코 성인의 발자취를 따라보는 기획 연재를 5주에 걸쳐 마련한다.

 

돈 보스코(본래 이름은 요한 보스코, 이탈리아어로 '돈(Don)'은 신부를 뜻한다) 성인이 가난하고 버림받은 아이들을 자식처럼 사랑하고 돌보며 창설한 수도회가 살레시오회다. 베네딕도회나 프란치스코회처럼 창설자의 이름을 따 수도회 명칭을 정하는 것이 보통이지만 살레시오회는 그렇지 않다. 왜 돈 보스코회가 아니라 프란치스코 살레시오(1567~1622) 성인의 이름을 딴 살레시오회일까. 250년 전에 살았던 살레시오 성인과 돈 보스코는 어떤 인연이 있었던 것일까.

 

의문을 풀기 위해 순례단은 프랑스 안시(Annecy)로 향했다. 스위스 제네바에서 50㎞ 떨어져 있는 안시는 살레시오 성인 유해가 안장된 마리아 방문회 대성당이 자리잡고 있는 성지. 살레시오는 여기서 20㎞ 떨어진 살레시오 성(城)에서 1567년 태어났다. 어릴 때부터 가난한 이들을 보면 주머니를 털어 도와주지 않으면 안달이 날 정도로 착한 심성을 가졌던 그는 안시에서 공부를 하면서 사제성소를 느껴 파리와 이탈리아 파도바에서 교회법, 민법, 신학을 공부하고 1593년 12월18일 사제품을 받는다.

 

당시 프랑스와 스위스, 이탈리아 북부 등지는 지금처럼 다른 나라로 갈라져 있던 것이 아니라 사보야 왕국에 속해 있었고, 종교개혁으로 활성화된 개신교 특히 칼빈파가 융성하던 곳. 이런 시대에 사제가 된 살레시오는 1602년 제네바 주교로 임명되자 개신교에 맞서 다양한 선교활동을 전개, 교회 재건에 앞장선 것은 물론 당시 과부였던 요안나 샹탈 여작(女爵)을 만나 영적 친분을 맺고 가난하고 고통받는 환자와 소녀, 과부들을 돌보는 관상수도회 '마리아 방문회'를 1610년에 설립한다.

 

그는 지금도 신자들에게 널리 읽히는 룗신심생활입문서룘, 룗하느님 사랑의 개요(신애론)룘 등을 저술하고, 1622년 12월 28일 하느님 품에 안겼으며 1665년 교황 알렉산더 7세에 의해 시성됐다.

 

돈 보스코는 신학생 때 이미 살레시오 성인에 심취했다. 살레시오의 저작을 읽었는지는 알 수 없으나 그의 사목방법과 열성적 선교활동에 감동했던 것만은 사실이다. 돈 보스코는 '나에게 영혼을 주고 다른 모든 것은 다 가져가라'는 살레시오 성인의 말을 평생 생활좌표로 간직하며 되뇌었기 때문이다.

 

안시 시내로 접어들자 언덕 한가운데 우뚝 솟은 마리아 방문회 대성당이 한눈에 들어왔다. 1610년 마리아 방문회를 설립하면서 세워진 성당이다. 순례단은 중앙 제대 옆 프란치스코 살레시오 성인의 유해가 모셔진 작은 제단에서 미사를 봉헌했다.

 

중앙 제대 왼쪽에는 프란치스코 살레시오 성인 유해가, 오른쪽에는 살레시오와 함께 마리아 방문회를 설립해 그늘진 이웃을 위해 한 생을 바친 성녀 요안나 샹탈의 유해가 황금색 부조 안에 안장돼 있었다. 평생 자신의 안락함보다 하느님의 말씀을 전하고 가난한 이들에게 따뜻한 사랑을 전하려고 뛰어다닌 노고를 뒤로한 채 하느님 품에 안긴 듯 편안히 누워있는 모습이다.

 

대성당 언덕에서 잠시 중세풍 붉은 벽돌건물로 꾸며진 고풍스런 안시 시내를 내려다본 후 순례단은 시내 중심지에 우뚝 서 있는 프란치스코 살레시오 성인 동상을 지나 예전에 살레시오와 요안나 샹탈의 유해를 모셨던 프란치스코 살레시오 성당으로 향했다.

 

살레시오 성인을 기념해 프란치스코 살레시오 성당이라고 부르는 곳이지만 이곳 중앙 제대 왼쪽에는 돈 보스코가 자신의 수단 자락에 매달리는 천진난만한 아이들 손을 잡고 한없이 자애로운 미소를 짓고 서 있는 성상이 있었다. 다른 한쪽에는 살레시오 성인의 성화가 걸려 있었다.

 

결코 얼굴 한번 본적 없지만 가난하고 버림받은 이들을 위한 사랑을 실천하고, 거룩한 교회의 가르침을 보전하며 하느님의 사랑과 진리를 널리 선포하려고 혼신을 다했다는 점에서 너무나 닮은 두 성인을 번갈아보던 순례단은 감격스러운 듯 누가 먼저라 할 것 없이 무릎을 꿇고 기도를 바쳤다.

 

어느 덧 맑던 하늘에 어둑어둑 노을이 지기 시작하자 순례단은 발길을 옮겼다. 프랑스 국경을 넘어 이탈리아 북부로 접어 들었다. 돈 보스코가 태어나 유년기를 보낸 피에몬테 지방 베키를 방문하기 위해서다. 내일은 또 어떤 감동이 순례단을 기다리고 있을까.

 

[평화신문, 제777호(2004-06-13), 박주병 기자]

 

[돈 보스코 성인의 발자취를 따라서] 돈 보스코 대성당

 

 

(사진설명)
돈 보스코 대성당 내부. 제대 전면 목각 부활 예수상이 인상적이다.

 

 

꼴레 돈 보스코에서 가장 눈에 띈 것은 '돈 보스코 대성당'.

 

돈 보스코 아버지 프란치스코가 머슴으로 살며 아들 요한을 낳았던 농가 집터 위에 세워진 대성당은 방대한 규모를 자랑하는 동시에 윗 성당과 아래 성당이 함께 공존하는 독특한 구조를 갖고 있는 것이 특징이다. 성당 외부 길이는 110m, 원형 돔 높이만 80m에 달한다.

 

성당 입구 정면에는 돈 보스코 동상이 웅장한 자태로 서있고, 내부로 들어서면 제대 뒷 벽면에 나무로 조각된 거대한 부활 예수상(높이 8m, 폭 6m, 무게 3000㎏)이 눈길을 사로 잡는다. 평생 가난하고 소외된 이들의 영혼 구원을 위해 헌신한 돈 보스코 영성을 상징해 부활 예수상을 전면에 배치한 것이다. 또 성당 내부는 거대한 배 안에 들어선 듯한 느낌을 준다. 구원을 표상하는 '노아의 방주'을 형상화했기 때문이다.

 

발걸음을 옮겨 지하성당으로 내려가면 중심에는 청소년 가운데 서 있는 돈 보스코를 그린 벽화가 눈길을 끈다. 아이들과 함께 가을 소풍을 간 그가 활짝 웃고 있는 내용이다.

 

제대 뒤편으로 발걸음을 옮기니 돈 보스코의 유해를 담은 성광이 안치된 작은 단상이 순례객을 맞았다. 현재 돈 보스코 유해는 그가 사제생활을 하던 중심지인 발도코 지역에 세워진 '도움이신 마리아 대성당'에 안치돼 있지만 이 곳은 그의 탄생지임을 기념해 유해 일부가 모셔져 있는 것이다. 세계 전역에서 모인 순례객들과 함께 유해 앞에 무릎을 꿇은 순례단은 "버림받은 아이들에게 한없이 따뜻한 사랑을 베풀었던 돈 보스코의 삶을 본받아 제2의 작은 보스코로 살아가겠다"며 두 손을 모았다.

 

[평화신문, 제778호(2004-06-20), 박주병 기자]

 

[돈 보스코 성인의 발자취를 따라서] (2) 돈보스코 유년기 유적지
 

꼴레 돈 보스코, 매주 7만여명 순례객 찾아와 기도

 

 

(사진설명)
1. 꼴레 돈 보스코 전경. 왼쪽이 돈 보스코 대성당이고, 오른쪽이 살레시오회가 운영하는 기술학교다.

2.돈 보스코가 2살부터 16살때까지 살던 옛 집 앞에서 기념촬영을 하고 있는 순례단.

3. 돈 보스코의 이복형 안토니오가 살던 집 터에 세워진 도움이신 마리아 소성당. 오른쪽 건물이 형 요셉이 살던 집이다.

 

 

돈 보스코의 영적 스승, 프란치스코 살레시오 성인의 성지를 돌아보고 순례단이 향한 곳은 이탈리아 북부 피에몬테 지방 중심 도시인 토리노에서 차로 1시간여 떨어져 있는 베키. 돈 보스코가 태어나 유년기를 보낸 곳이다. 오늘날 이 곳에는 돈 보스코의 생가, 기념성당, 박물관 등으로 꾸며진 '꼴레 돈 보스코'(이탈리아어로 '돈 보스코 언덕'이라는 뜻)가 세워져 있다.

 

순례단이 189년 전 돈 보스코가 태어나 살았던 과거로 여행하듯 언덕을 천천히 올랐다. 1815년 8월16일 아버지 프란치스코와 어머니 마르가리타 오키에나 사이에서 태어난 요한 보스코가 16살까지 살았던 곳이다. 요한은 여기 한 농가의 돌집에서 태어났다. 아버지가 머슴으로 살던 집으로 보스코가 태어난 자리에 현재 '돈 보스코 대성당'이 우뚝 서있다.

 

순례단은 대성당에 앞서 요한이 유년기를 보낸 집부터 순례했다. 요한이 두 살이 채 되기 전 갑작스레 남편을 잃은 엄마 오키에나는 경제적 어려움에 처하자 농가에서 300여 미터 떨어진 곳으로 거처를 옮긴다. 당시 남편 프란치스코가 마굿간으로 사용하려고 사둔 허름한 돌집이었다. 현재 이곳은 당시 모습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다.

 

쓰러질 듯 서 있는 돌집 앞에 서자 어린 요한 보스코가 생활하던 모습이 마치 흑백 영화처럼 펼쳐지는 듯 했다. 요한은 여느 시골 농가 아이들처럼 들판을 뛰놀기도 하고, 가난했지만 엄마 오키에나의 농사일을 도우며 엄마의 포근한 품 속에서 살았을 것이다.

 

눈에 아른 거리는 영상을 뒤로 한채 돌집에 들어섰다. 추운 겨울 요한이 언 몸을 녹이던 작은 마굿간, 온 가족이 모여 숙식을 해결하던 방 겸 부엌을 지나 조심스레 위층으로 올라가자 차가운 돌벽에 자그맣게 난 창 사이로 밝은 빛이 들어오는 골방 하나가 눈에 띄었다. 요한이 사용하던 방이다.

 

그는 아홉살 되던 해 여기서 자신의 일생을 예견하는 잊을 수 없는 꿈을 꾼다. 하루종일 어머니를 도와 농사일을 한 탓인지 저녁기도를 하곤 이내 잠자리에 든 요한은 파아란 잔디에 예쁜 꽃이 피어있는 집 앞 정원에서 조잘대며 즐겁게 노는 아이들과 다른 한쪽에서 두 패거리 아이들이 싸우고 있는 광경을 목격한다. 평소 불의를 보면 결코 그냥 넘어가는 법이 없던 요한은 패거리에게 다가가 준엄하게 꾸짖었고 패거리와 싸움이 붙고 만다.

 

이 때 눈부시게 하얀 옷을 입은 한 남자가 나타나 요한에게 손짓하며 말했다. "주먹으로는 이 아이들을 도울 수 없다. 온유와 친절로 해야 한다." 흠칫 놀라는 요한에게 이번에는 어떤 여인이 나타나 팔로 감싸며 이렇게 말했다. "내가 하는 것을 보렴." 요한이 보니 아이들이 사나운 짐승 때로 변해 으르렁거리다가 그 여인이 손을 내밀자 순하디순한 양으로 변하고 말았다.

 

겁에 질린 요한이 울음을 터뜨지자 여인은 "이곳이 너의 일터다. 겸손하고 꿋꿋하고 강한 사람이 되어라!'는 말을 여러 차례 반복했고, 요한은 꿈에서 깨어났다.

 

요한은 이때부터 자신의 소명을 깨닫고 성모님의 도움에 의지하며 한 평생을 살게 된다. 요한이 꿈 속에서 보았던 집 앞의 정원 그 자리에는 지금 요한의 꿈을 그린 기념탑이 서 있다.

 

순례단은 돌집에서 내려와 요한의 형 요셉이 결혼한 후 살던 집터에 세워진 로사리오 경당으로 발길을 옮겼다. 이 곳은 후에 사제가 된 요한(돈 보스코)이 자신이 돌보는 아이들을 데리고 와 쉬던 장소이자 애제자였던 도미니코 사비오 성인을 처음으로 만난 자리이기도 하다. 잠시 경당에 무릎을 꿇고 기도를 하는 순례단에게 돈 보스코의 수단 자락에 매달려 조잘대는 아이들의 웃음소리가 들리는 듯 했다.

 

또 발길을 옮긴 순례단은 경당 바로 옆에 있는 도움이신 마리아 소성당으로 자리를 옮겨 미사를 봉헌했다. 요한의 이복형 안토니오가 살던 집터에 세워진 성당으로 돈 보스코 탄생 100주년을 기념해 전세계 살레시오회원들이 힘을 모아 지은 것이다.

 

미사를 마치고 성당을 나온 순례단은 깜짝 놀랐다. 꼴레 돈 보스코를 찾은 수많은 순례객 때문이었다. 평일인데도 불구하고 끊이질 않는 행렬을 보며 안내 센터를 찾아 "얼마나 이곳을 찾느냐"고 묻자, "매주 7만여명이 찾아 기도하고 간다"고 했다.

 

돈 보스코가 청년기와 신학생 시절을 보낸 '키에리'로 이동하기 전에 휴식을 취하다 꼴레 돈 보스코를 찾은 이탈리아 여성과 이야기를 나눴다. 대학에서 건축공학을 전공한다는 프란체스카(26)씨는 "200여년 전 인물이지만 이 곳을 찾을 때마다 늘 새롭고 신선한 느낌으로 지금 우리와 함께 살아 있는 돈 보스코를 만나게 된다"면서 "온유와 겸손, 친절로 가난한 아이들의 아버지가 됐던 돈 보스코의 정신을 이어가는 다리가 되는 삶을 살고 싶어 가끔 순례를 하고 있다"고 말했다.

 

[평화신문, 제778호(2004-06-20), 박주병 기자]

 

[돈 보스코 성인의 발자취를 따라서] (3) 청소년기 및 신학생 시절 유적지

 

키에리, 가난에 굴하지 않고 사제 꿈 키우던 곳

 

 

(사진설명)
1. 돈 보스코가 청소년 시절과 신학생 시절을 보낸 키에리 거리. 지금 이 거리는 '돈 보스코 길'로 불린다. 왼쪽에 우뚝 솟은 성당이 성 필립보 네리 성당이다.

2. 돈 보스코가 고학하며 숙식하던 피안타 커피점으로 전경. 현재는 인쇄작업장으로 사용되고 있다.

3. 피안타 커피점 안에 있는 돈 보스코 숙소 전경. 오른쪽이 화덕이 있던 자리다.

4. 어린 요한 보스코가 고학하며 매일 기도하러 다니던 은총의 성모 성당 전경.

 

 

9살 되던 해 자신의 운명을 결정짓는 꿈을 꾼 요한 보스코. 꿈에 나타난 여인이 난폭한 패거리 아이들을 순한 양으로 변화시키며 '온유와 친절로 이 아이들을 도와야 한다'는 말씀을 들은 그는 이 말씀을 가슴 속 깊이 간직하며 사제의 길을 가기로 결심한다.

 

이를 위해서는 공부를 해야만 했다. 하지만 두살 때 이미 아버지를 여읜 요한은 학교 가는 것조차 꿈꿀 수 없었다. 어머니의 힘든 노동으로 하루 벌어 먹고 살기조차 빠듯한 형편이었기 때문. 다행히 이웃집 한 농부의 도움으로 읽기와 쓰기를 배운 요한은 어머니를 도와 바쁜 농사일을 하는 가운데 짬을 내 공부에 열중했다.

 

하지만 이복형 안토니오는 이를 못마땅하게 여겨 늘 요한을 괴롭혔다. 요한의 꿈을 알고 있던 어머니는 이를 안타깝게 여겨 남편이 남긴 얼마되지 않는 돈으로 요한을 카스텔 누오보에 있는 초등학교로 보냈다. 카스텔 누오보는 보스코가 살던 베키에서 20㎞ 떨어진 곳으로 요한은 한 재봉사의 집에 머물며 공부를 시작한다. 이때부터 요한은 학비를 벌기 위해 바느질 기술도 익히고, 오르간도 배우고, 온갖 연장 다루는 법을 체득한다.

 

요한의 청소년 시절은 학교가 끝나면 생계를 위해 노동의 연속이었다. 16살 되던 해 중등학교에 진학하게 된 요한은 대도시 토리노 인근에 있는 중소도시 키에리로 향한다. 이곳은 요한이 사제수품을 받기 전까지 10년간 살며 공부하던 유적지. 순례단은 가난에 굴하지 않고 사제의 꿈을 키웠던 요한의 어린 시절을 떠올리며 키에리로 발길을 옮겼다.

 

중세풍 고색찬연한 건물을 그대로 간직한 키에리에 도착, 시내를 걷던 순례단은 요한이 고학 중에 숙식을 해결하던 피안타 커피점으로 이동하다 거리 한켠에 우뚝 솟은 붉은 벽돌 건물 앞에 멈춰 섰다.

 

성 필립보 네리 성인을 기념해 세워진 '성 필립보 네리 성당'. 신학생 시절 수없이 성당 앞 거리를 걸어다녔던 요한은 이곳에 자주 들러 영성체를 하며 하느님과 일치하는 체험을 했다. 요한이 신학생이던 1830~40년대 당시 교회는 신자들에게 주일과 대축일에만 성체를 영하도록 허용했지만 요한은 하느님께로 향한 강한 사랑을 주체할 수 없어 평일에도 성체를 모신 것이다. 그는 당시 사건을 자신의 회고록에서 이렇게 말하고 있다.

 

"다른 이들이 아침식사를 하러 가는 동안 몰래 필립보 성당에 들어가 영성체를 하고 학교에 갔다. 이런 행동은 규칙으로 금지되어 있었지만 장상들의 묵인으로 평일에도 영성체할 수 있었고, 이는 내 성소의 가장 큰 자양분이었다."

 

오늘날 '돈 보스코 길'이라고 불리는 거리에 서있는 필립보 성당 앞에 잠시 머물며 기도를 바친 순례단은 피안타 커피점으로 발길을 옮겼다. 도보로 10분 거리에 있는 피안타 커피점은 현재 개인이 운영하는 인쇄공장으로 사용되고 있었지만 요한이 쓰던 숙소는 원형 그대로 보존돼 있었다.

 

"키 160㎝ 정도로 왜소했던 요한이 누우면 발이 문 밖으로 삐져 나올 정도였다"고 설명하는 성지관리인 페레로 쥬세페(75)씨의 말을 듣고 들여다 본 요한의 숙소는 방이라기보다는 창고에 가까웠다. 너무 좁고 낮아 고개를 숙여야만 서 있을 수 있는 작은 공간에서 요한은 사제의 꿈을 키워갔던 것이다.

 

커피점원으로 일하는 대신 과자나 빵을 굽던 화덕이 놓여진 이 골방에서 숙식을 해결하던 요한은 방과 후 가게 청소는 물론 설겆이, 커피점 내 당구장 청소 등을 도맡아 하는 힘든 생활을 하면서도 자신의 소명을 한시도 잊지 않았다.

 

가난하고 소외된 아이들을 위한 삶을 살아야 한다는 꿈속 여인의 말을 가슴 속에 간직했던 요한은 키에리에 사는 아이들을 모아 '명랑회'라는 단체를 조직한다. 이는 '신자로서 적합지 못한 행동이나 말을 삼가고 학교와 신앙생활에 충실함'을 목적으로 하는 조직으로 그는 회원들과 함께 매주일 예수회 신부들이 하는 교리수업에 참여하며 방황하는 아이들을 하느님께 인도했다.

 

순례단은 한 10여분을 걸어 '은총의 성모 성당'으로 향했다. '계단의 성모 마리아 대성당'이라고도 불리는 이곳은 요한이 신학교 입학 전 힘들게 공부하던 시절 하루도 빠지지 않고 다니던 성당. 매일 제대 앞에 무릎을 꿇고 성모의 은총과 자비를 간구하며 힘겨운 삶을 이어가던 요한은 이 곳에서 자신의 성소를 다시 한번 확인하고 20살 되던 해인 1835년 드디어 신학교로 들어간다.

 

가난하고 그늘진 청소년들의 아버지로 살기 전 이미 스스로 그들과 같은 삶을 뼈저리게 체험하며 눈높이를 맞춘 삶을 살았던 요한의 어린 시절이 있었기에 미래에 돈 보스코 성인이 될 수 있었다는 사실을 되새기며 순례단은 또 발걸음을 내디뎠다.

 

[평화신문, 제779호(2004-06-27), 박주병 기자]

 

[돈 보스코 성인의 발자취를 따라서](4) 도움이신 마리아 대성당

 

성당 안에 성인의 삶을 영화처럼 꾸며 놓아

 

 

(사진설명)
도움이신 마리아 대성당 내부 제대 앞 전경. 토리노 대교구장 뽈레또 세베리노(가운데) 추기경이 미사를 집전하는 제대 위해 돈 보스코가 도안한 성화가 보인다.

 

 

돈 보스코 사제생활의 중심지이자 살레시오회가 탄생한 본산지인 발도코를 순례하며 가장 인상적이었던 곳은 도움이신 마리아 대성당. 삶의 매순간마다 길을 보여주고 도움을 주신 성모님을 기념해 1868년 세워진 이 성당 내부는 돈 보스코의 삶 전체를 마치 한편의 영화처럼 꾸며놓은 듯하다.

 

성당 중앙 제대를 중심으로 오른쪽에는 보스코가 매일 미사를 집전하던 제단이 그대로 보존돼 있고, 제단 위에는 유리관에 안치된 성인의 유해가 밀납으로 만들어져 안치돼 있다. 이 제단을 끼고 뒤로 돌면 성인의 유해를 자세히 볼 수 있는 공간이 마련돼 있는데, 이곳은 언제나 무릎꿇고 기도하는 순례객 발길이 끊이질 않는다.

 

또 이 제단 바로 옆에는 돈 보스코와 함께 여자 살레시오회를 창설한 성녀 마리아 마자렐로의 유해를 모신 제단이 자리잡고 있고, 맞은편에는 돈 보스코의 애제자였던 성 도미니코 사비오를 유해가 안치된 제단이, 또 그 옆에는 돈 보스코의 영적 지도를 맡았던 성 요한 카파소 신부의 유해를 모신 제단이 있다. 평생 돈 보스코와 함께 가난하고 소외된 아이들에게 따뜻한 사랑을 아끼지 않았던 동료들이 한자리에 누워 있는 셈이다.

 

눈길을 돌려 성당 중앙 제대를 바라보자 제대 뒷벽을 장식하고 있는 대형 성화가 화려한 자태를 뽐낸다. 화가 토마소 로렌조니가 돈 보스코의 지시대로 그린 것으로, 천사에 둘러싸인 동정 마리아가 한손에는 아기 예수를, 다른 손에는 권위를 상징하는 지팡이를 잡고 서있고 사도들이 성모를 우러러 보는 형상이다. 돈 보스코는 이 그림 뒷배경으로 자신의 사목무대가 된 발도코와 토리노 시 전경을 그려 넣도록 했다.

 

발걸음을 옮겨 내려간 성당 지하에는 돈 보스코를 본받아 전 세계 곳곳에서 '또 다른 돈 보스코'로 평생을 살다가 하느님 품에 안긴 수많은 성인, 복자, 순교자들의 유해가 안치돼 있었다. 특히 눈길을 끈 것은 돈 보스코의 뒤를 이어 살레시오회를 이끌어던 첫 후계자 복자 미켈레 루아의 유해. 대리석으로 조각된 채 안치된 루아의 얼굴에 말듯 비치는 미소는 돈 보스코의 미소를 빼닮은 듯했다.

 

대성당을 순례를 마치기 전 순례단은 다시 돈 보스코 유해 앞에 무릎을 꿇었다. 누가 먼저라 할 것 없이 깊은 묵상에 잠긴 순례단의 얼굴에는 성인의 삶을 본받아 주위에 가난하고 소외된 이들의 아픔을 함께 나누겠다는 다짐이 이어지는 듯 평화와 온유 가득한 미소와 평화가 번지는 듯 했다.

 

[평화신문, 제782호(2004-07-18), 박주병 기자]

 

[돈 보스코 성인의 발자취를 따라서](4) 돈 보스코 사제생활 유적지

 

'오라토리오' 시작한 곳에 '피나르디 경당' 세워져

 

 

(사진설명)
1. 돈 보스코 사제생활의 중심지 발도코에 세워진 도움이신 마리아 대성당 전경. 성당 앞 광장에 세워진 돈 보스코 성상이 인상적이다.

2. 피나르디 경당 입구. 돈 보스코가 처음으로 오라토리오를 시작한 곳이다.

3. 돈 보스코 성인 유해가 안치된 제대. 성인은 여기서 매일 미사를 집전했다.

4. 밀납으로 제작, 안치된 돈 보스코 성인 유해.

가난하고 힘겹던 키에리의 고학 생활을 마치고 신학교에 입학, 성소를 키운 요한 보스코는 1841년 6월5일 26살 나이에 드디어 사제가 된다.

 

 

키에리 신학교에서 가까운 토리노 시내에 있는 '원죄없이 잉태되신 복되신 동정 마리아 성당'에서 사제품을 받은 그는 이날 '주어진 시간을 철저히 사용하고, 영혼을 구하는 일이라면 인내와 겸손으로 앞장서며, 영적 스승으로 모셨던 프란치스코 살레시오 성인의 온유와 영성을 따라 살겠다'는 세가지를 하느님께 서약했다. 이는 그가 9살 되던 해 꿈에 나타나 가난하고 소외된 청소년들을 위한 삶을 살 것을 예시한 하느님의 부르심에 대한 응답이었다.

 

사제가 된 돈 보스코는 청소년을 위한 사목에 앞서 3년간 토리노 시내에 있는 '아시시의 프란치스코 성당'으로 다른 새 사제와 함께 사목교육을 받는다. 그는 여기서 첫미사를 봉헌하며 '젊은이들의 수호천사'가 되기로 다시 한번 결심했다.

 

순례단이 찾은 프란치스코 성당에는 그 옛날 돈 보스코가 첫 미사를 집전했던 제대가 그대로 보존돼 있었고, 제대 중앙에는 돈 보스코 성인의 환한 미소를 닮은 꽃다발과 함께 성인의 성화가 놓여 있었다.

 

성당 이곳 저곳을 둘러보던 순례단의 눈길은 중앙 제대 옆 쪽에 있는 제의방에 머물렀다. 이곳은 그간 돈 보스코가 꿈꿔왔던 청소년 사목을 시작하는 출발점이 된 장소이기 때문.

 

성인이 사제가 된 지 6개월이 지난 1841년 12월8일. 원죄없이 잉태되신 복되신 동정 마리아 대축일이던 그날은 유달리 추운 겨울이었다. 미사를 봉헌하려고 제의방에 들어간 돈 보스코는 따뜻한 곳을 찾아 몰래 숨어든 누더기 차림의 소년 바르톨로메오 가렐리가 제의방지기에게 혼줄이 나며 쫓겨나는 장면을 목격한다. 이를 측은히 여긴 돈 보스코는 큰소리를 지르는 제의방지기에게 '이 아이는 제 친구입니다'라고 감싸주며 아이 눈높이에 맞춰 무릎을 꿇은 채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고 음식을 먹인 뒤 '다음 주일엔 너와 같은 처지에 있는 친구들을 데려 오라'며 되돌려 보냈다. 다음 주 네명이 모였고, 그 다음 주에는 그 수가 배로 늘었다.

 

당시 이탈리아는 산업화로 인한 몸살을 앓고 있었다. 도시는 가난에서 벗어나기 위해 일자리를 찾아 몰려온 사람들로 가득했고, 시내 뒷골목에는 오갈데없이 방황하는 아이들이 즐비했다. 가렐리와 함께 매주 돈 보스코를 찾아온 아이들은 모두 거리에 내려버진 이런 아이들이었다. 그는 한시도 지체할 수 없었다. 아이들을 모아 글과 교리도 가르치고 먹을거리도 장만해주었다. 이렇게 시작된 것이 '오라토리오'(ortorio, '기도하는 곳'이라는 뜻)다.

 

순식간에 300여명으로 불어난 아이들과 함께 지낼 공간을 찾을 수 없어 막막하기만 하던 돈 보스코. 그러나 그는 실망하지 않았다. 어려울 때마다 언제나 보이지 않는 손길로 도움을 베풀어주시던 성모님과 하느님의 섭리를 믿었기 때문이다.

 

아니나 다를까. 은인의 도움으로 토리노 인근 발도코에 작은 집을 마련한 돈 보스코는 그곳에서 죽을 때까지 고아, 가난한 청소년, 거리에 버려진 아이들의 친구이자 아버지로 살아간다.

 

순례단은 돈 보스코가 혼신을 다해 청소년 사목에 매진했고, 살레시오회의 본산이 됐던 발도코로 발걸음을 옮겼다.

 

오늘날 발도코에는 돈 보스코 성인의 유해가 안치된 도움이신 마리아 대성당이 웅장한 자태로 세워져 있고, 성당 앞 대광장에는 수단 자락에 매달린 아이들을 따뜻한 미소로 감싸안은 대형 돈 보스코 성상이 자리잡고 있다.

 

발길을 옮겨 대성당 경내로 들어서자, 앞 마당 한켠에 있는 '피나르디 경당'이 눈길을 끌었다. 돈 보스코가 300명의 아이들을 이끌고 발도코의 한 작은 집에서 오라토리오를 시작한 곳에 세워진 경당이다. 돈 보스코는 6년간 여기서 아이들과 살다 공간이 협소하자 인근 부지를 매입, 자신의 영적 스승의 이름을 딴 '프란치스코 살레시오 성당'을 짓는다. 이 성당은 도움이신 마리아 대성당 경내에 그대로 보존돼 있다.

 

돈 보스코는 이를 전초기지로 삼아 아이들이 험난한 세상에서 자립할 수 있도록 각종 교육과 기술을 가르치는 직업학교를 세워 직접 아이들을 가르쳤다. 어린시절 고학하며 구두수선, 재봉, 목공 등 안해본 일이 없었던 그는 아이들에게 훌륭한 스승이었다. 이것이 오늘날 돈 보스코 직업학교의 모태다. 그는 또 이곳에서 청소년 사목에 헌신할 남녀 젊은이들을 모아 살레시오 수도회를 창설, 전세계에 '제2의 돈 보스코'가 버려진 아이들의 어머니 아버지로 살아갈 수 있는 토대를 만들었다.


[평화신문, 제782호(2004-07-18), 박주병 기자]

 

[돈 보스코 성인의 발자취를 따라서](5) 살레시오회

 

올바른 청소년 문화 선도...돈 보스코 사랑 이어 실천

 

 

겨자씨 하나 자라 큰 나무 된다고 했다. 돈 보스코 성인이 남녀 젊은이 몇 명을 모아 청소년 사목과 교육에 헌신하는 살레시오회(1869년)와 살레시오 수녀회(1872년)를 각각 세운 지 130여년. 오늘날 살레시오 수도회는 전세계 128개국에 수도자 3만 4000여명이 활동하고 있는 거목으로 성장했다.

 

아울러 '살레시오회 가족'으로 불리는 돈 보스코 남녀 재속회, 살레시오 협력자회 등을 포함하면, 돈 보스코 영성을 본받아 전세계에서 가난하고 소외된 청소년들을 위해 헌신하고 있는 이들은 수백만명에 이를 정도다.

 

살레시오 수도회가 그간 배출한 성인, 성녀, 복자, 복녀도 많다. 돈 보스코를 비롯해 성인품에 오른 사람만 5명이고 복자 복녀는 47명에 달한다. 또 현재 시복시성 대상자에 선정됐거나 시복시성 작업이 진행 중인 가경자와 하느님의 종도 84명이다.

 

짧은 역사와 달리 수많은 회원과 성인을 배출한 원동력은 과연 무엇일까. 산업화와 물질문명이 급속도로 발전하는 것과 달리 소외되는 계층은 날로 늘어날 수밖에 없는 현실에서 사회는 가난하고 버림받은 이들의 보호자로 나선 돈 보스코와 같은 '사랑과 온유의 사도'가 필요했을 것이다. 돈 보스코와 그 제자들은 이런 시대적 징표를 하느님 뜻으로 받아들여 청소년 사목과 교육에 매진, 세계적 수도회로 성장할 수 있었다.

 

현재 살레시오회는 로마에 총본부를 두고 있으며, 각국 회원들은 청소년들에게 올바른 가치관을 심어주고 꿈과 희망을 제공하는 교육 사업, 저소득층 청소년을 위한 직업·재활 교육 및 지원 사업, 올바른 청소년 문화를 위한 선도 사업 등을  통해 돈 보스코의 사랑을 이어가고 있다.

 

[평화신문, 제783호(2004-07-25), 박주병 기자]

 

성 요한 보스코 (1815~1888)

청소년의 아버지요 스승이며 위대한 교육자

 

 

1815년 8월 15일, 베키에서 태어난 요한 보스코는 일찌기 두 살 때 아버지를 여위고 가난한 홀어머니 말가리다 오키에나의 보살핌을 받으며 다른 두 형제들과 함께 힘든 유년기를 보낸다.


요한 보스코가 아홉살 때 한 꿈을 꾸게되는데 그 꿈은 그의 일생을 계시해주는 것으로 유명하다. 그 꿈을 계기로 요한 보스코는 사제성소에 대한 열망을 갖게 되지만, 가난한 과부의 아들로서 공부를 할 수 있는 여건이 마련되지 않아 남의 집 머슴살이나 상점의 점원 또는 직공 등을 하면서 신부가 되는데 필요한 공부을 길을 찾는다.

 

자연 남들보다 늦게 시작한 공부이지만 천부적인 명석함을 지닌 그는 신학교를 다 마치고 마침내 1841년 토리노 교구의 사제로 서품된다.

 

사제가 된 요한 보스코 신부(일반적으로 ‘돈보스코’라 부름)가 가장 먼저 한 일은 소년원에 수감되어 있는 청소년들을 찾아보는 것이었다. 당시 이탈리아 사회는 공업화가 한창 진행되고 있었으므로 시골에서 일자리를 찾아 도시로 몰려드는 청소년들로 인한 많은 혼란들이 있었다. 도시에 안정적인 거처를 마련하지 못한 시골 출신의 젊은이들은 쉽게 범죄의 상황에 빠져들게 되었고, 교도소는 항상 넘쳐나고 있었다.

 

보스코 신부는 버림받은 청소년들이 그들을 돌보아주고 곁에 있어주고 정직한 주인 밑에서 일할 수 있도록 여건을 마련해주면 정직한 시민과 착한 그리스도인으로 거듭나게 된다는 것을 체험으로 간파한다. 그리하여 보살펴주는 이가 아무도 없는 소년들을 위하여 ‘오라또리오’라 부르는 기숙사를 세워 이들의 의식주를 마련해주고 일자리를 얻는 데 필요한 기술과 공부를 가르쳐주는 일을 시작한다.

 

그의 보살핌을 받는 소년들의 숫자가 점점 늘어나자 보스코 신부는 많은 평신도들을 영입하여 자신의 일을 돕게 한다. 특히 보살핌을 받고 있는 소년들 가운데서 보다 성숙한 젊은이들이 보스코 신부를 적극적으로 도왔으며 이들을 주축으로 하여 수도회를 창설하기에 이른다.


보스코 신부는 마음을 매혹시키는 독특한 방법으로 청소년들을 사랑했다.

 

초창기 오라또리오의 600명이 넘는 소년들은 모두가 제각기 자신이 보스코 신부의 각별한 사랑을 받고 있다는 것을 절실히 느끼고 있었으며, 자신들도 이에 대한 보답으로 보스코 신부를 사랑하지 않고는 견딜 수 없게 되었던 것이다. 이와 같이 느껴지는 각별한 사랑의 친밀감으로 인하여 소년들은 보스코 신부를 ‘돈보스코’라고 부르면서 자신의 삶을 의지하였다.

 

그래서, 처음 수도회 설립의 뜻을 젊은이들에게 밝혔을 때, 많은 젊은이들은 수도자가 된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깊이 파악하지도 않고 단지 돈보스코와 함께 일하는 것이라면 기꺼이 일생을 바칠 수 있다고 하면서 참여하였던 것이고, 이렇게 해서 1854년 살레시오 수도회는 탄생되어 1869년 교황청의 정식 승인을 받는다.


보스코 신부는 살레시오 수도회에 이어 ‘살레시오 수녀회’와 평신도 단체인 ‘살레시오 협력자회’를 창설하여 남여 청소년들을 위한 교육 사도직의 기틀을 확고히 다졌다.

 

청소년들 특히 가난한 청소년들을 위해 학교, 기숙사, 기술학교, 주일학교, 야간학교 등 다양한 교육기회를 제공한 요한 보스코 신부는 19세기의 가장 훌륭한 교육자이며, 동시에 2천 권이 넘는 책을 집필한 놀랄만한 작가이고, 사회변혁의 순간에 교회를 적극적으로 옹호한 효교론자이며, 청소년 교육이라는 새로운 영성을 교회안에 심은 대영성가이기도 하다.

 

“나는 청소년 여러분을 위하여 일하며, 공부하고, 나의 생의 모든 것을 바칠 각오가 되어있습니다.”라는 확신처럼 돈보스코는 자신의 모든 것을 청소년 특히 보다 가난한 청소년들을 위해 다 내어주고 1888년 1월 31일에 선종한다. 그리고 1934년 부활절, 교황 비오 12세에 의해 성인으로 반포되어 ‘청소년들의 아버지요 스승’이라는 칭호를 받는다.

 

[살레시오회  홈페이지에서]

 

[역사속의 그리스도인] 96. 사회운동가 및 제 3 세계(1)  요한 보스코

 

 

교황 비오 11세는 1929년 6월 2일 요한 보스코를 시복했고, 1934년 4월 1일 성인품에 올렸다.

 

평생 청소년들을 위해 산 교육자

그리스도교 사랑에서 '예방교육법' 착안
살레시오 수도회 수녀회 협력자회 창설

 

 

"가난한 청소년들을 위하여 나의 마지막 숨까지 다 바치겠다."

 

교회의 역사 안에서 청소년들을 하느님의 품으로 이끌기 위해 노력한 사람은 수없이 많았다. 하지만 그 중에서도 가장 걸출한 인물을 꼽는다면 단연 돈 보스코라고 불리운 요한 보스코(Bosco, Giovanni, 1815~1888) 성인이 아닐 수 없다.

 

교육의 지침 확립

 

그는 평생 동안 청소년들을 사랑했고 그들을 위해 살았으며 청소년들 역시 그를 진심으로 사랑했다. 평범함 속에서 비범하게 이뤄진 돈 보스코 성인의 이른바 '예방 교육'은 시대를 초월해 모든 교육자들에게 주어진 커다란 교육의 지침이며 선물이었다.

 

그가 실천한 교육 방법과 사업들, 그리고 그가 창설한 기관들은 교육사에서 매우 중요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특히 그는 가톨릭 교육의 전통 안에서 애덕, 특히 젊은이들에 대한 사랑을 독특한 형태로 강조했다.

 

'예방 교육법'이라고 불리우는 그의 교육 방법은 "사랑은 오래 참고… 모든 것을 믿어주고 모든 것을 바라고, 모든 것을 견디어냅니다"(1코린 13, 4~7)라는 바오로 사도의 말씀에 바탕을 둔 것으로서 초자연적이고 그리스도교적인 사랑에서 영감을 받은 것이다.

 

'예방 교육'이란 청소년들이 하느님께로부터 받은 자질과 역량을 모든 차원에서 일깨워 적극 장려함으로써 그들이 전인적으로 성장해 진실된 자기 자신이 되도록 돕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삶의 다양한 상황 속에서 자기 자신이 '삶의 주역'이 되어 '삶을 축제'로 살아가는 행복한 인간을 양성해내는 것이 이 교육의 여정이다.

 

그는 이르기를 "청소년을 사랑하는 것만으로 충분하지 않다"며 "그들이 사랑받고 있음을 느끼게 해야 한다"고 말하곤 했다. 이처럼 그가 말하는 예방 교육법의 근본적인 원리는 바로 '감응하는 사랑'이다. 이러한 교육은 젊은이들 스스로 자신들의 내부로부터 성숙하고 성장하는 것을 의미한다.

 

꿈 통해 사제성소 받아

 

성인이며, 살레시오 수도회와 살레시오 수녀회를 설립한 청소년 교육의 선구자, 요한 보스코는 1815년 8월 16일 이탈리아 사르데냐 왕국 피에몬테의 베키(Becchi)라는 작은 마을에서 가난한 농부의 집에서 태어났다. 어렸을 때 아버지가 사망해 어머니로부터 깊은 신앙과 확고한 의지를 이어받았으며, 특히 어머니는 가난 속에서도 자녀들의 종교 교육에 각별한 관심을 기울였다. 이러한 어머니의 영향으로 성인은 훗날 수많은 역경 속에서도 하느님의 뜻을 받아들이고 기쁨과 희망 속에서 살아가는 법을 배웠다.

 

보스코의 일생에서 삶의 근본적 결단을 내리게 된 계기가 있었다. 9세 때 초등학교에서 읽기와 쓰기를 배우던 그는 어느날 꿈을 꾸는데, 이 꿈을 통해 자신의 일생을 통한 소명의식을 느끼게 된다. 1858년 살레시오회를 창립하기 위해서 교황 비오 9세를 알현했을 당시 그는 이 꿈을 통해 초자연적인 계시를 받게 됐다고 말했다.

 

이 꿈을 통해 사제성소에 대한 열망을 갖게 된 그는 어려운 생활 환경 속에서 공부를 할 수 있는 여건이 되지 못했기에 일을 하면서 틈틈이 공부를 했고 남들보다 늦게 공부를 시작해야 했다. 하지만 천부적으로 명석했던 그는 신학교를 다 마치고 나서 1841년 마침내 토리노 교구의 사제로 서품된다.

 

청소년 교화에 평생 봉헌

 

사제가 된 후 가장 먼저 한 일은 소년원에 수감된 청소년들을 찾아나선 일이다. 당시 이탈리아에서는 공업화가 한창 진행 중이어서 도시에는 시골에서 일자리를 찾아 모인 청소년들이 많았다. 이들은 열악한 환경 속에 살면서 범죄에 빠지게 되고, 교도소는 항상 이런 젊은이들로 넘쳐나고 있었다.

 

보스코 신부는 도시의 뒷골목을 배회하는 청소년들, 본의 아니게 교도소에 수감된 청소년들, 전쟁 고아들, 공장에서 비인간화돼가고 있는 수많은 젊은이들에게 관심을 기울이고 그들을 돌봤다. 청소년들의 수가 점점 늘어나자 보스코 신부는 1846년 토리노시의 서북쪽에 정착해 한편으로는 주일학교를 시작하고 한편으로는 견습생들을 가르쳤다.

 

이 사업이 자리를 잡아감에 따라 그는 많은 평신도들을 영입하고 동시에 교황 비오 9세의 권고에 따라 1859년 18명의 제자들에게 수도서원을 하도록 했고 수도서원으로 기초를 다진 성 프란치스코의 살레시오 수도회는 1869년 정식으로 교황청으로부터 수도회 인가를 받았으며, 1871년에는 회헌 인가를 받았다. 이듬해에는 살레시오 수녀회, 1876년에는 살레시오 협력자회를 창설했다.

 

평생을 청소년들을 위해 살았던 그는 1888년 1월 31일, 자신의 임종을 지켜보던 회원들에게 마지막 말을 남기고 72세를 일기로 선종했다. "모든 사람들에게 선을 행하고 아무에게도 악을 행하지 마십시오!... 나의 아이들에게 천국에서 기다리겠다고 전해주시오."

 

[가톨릭신문, 2006년 8월 20일, 박영호 기자]

 

성 요한 보스코 사제 기념일

 

 

성 요한 보스코 사제(1815-1888년)는 이탈리아의 가난한 농부의 아들로 태어나 평생을 청소년들의 교육을 위하여 봉헌한 청소년 교육의 선구자였습니다. 그는 살레시오 수도회와 수녀회를 설립하여 가난하고 불우한 청소년들의 사회적 재활을 위해 부단히 노력하였습니다. 당시 이탈리아에서는 산업화가 급속히 진전되면서 국민 교육과 기술 교육의 문제가 시급해졌습니다. 이로 말미암아 인구의 도시 집중과 빈민굴의 형성, 비참한 노동 조건 등 사회적인 문제가 발생하면서 가장 보호받지 못하고 내버려진 이들이 바로 청소년들이었습니다.


보스코 성인은 뒷골목에서 방황하는 소년들과 전쟁고아들, 교도소에서 만난 수많은 청소년들, 공장에서 기계 부품으로 전락한 소년 노동자들에게 관심을 가지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는 오갈 데 없는 100여 명의 소년들과 함께 근 1년 동안 돈도 거처도 없이 옮겨 다니는 가운데 위기에 처한 소년들과 출감 소년들을 모으기 시작합니다. 이들은 대부분 하층 계층의 자녀들로서 그대로 방치하였다가는 생명의 위험에 처하거나 범죄에 곧바로 노출될 아이들이었습니다.


보스코는 이들에게 하느님 아버지의 따뜻한 사랑이 어떤 것인지 체험하게 하면서 사회적으로 재활할 수 있도록 기술을 가르쳐 주었습니다. 보스코 성인의 교육 사목이 성공하게 된 이유는, 철저한 가족 정신 아래 청소년들을 믿어 주고 희망으로 기다려 주며, 자신이 사랑받고 있음을 알게 해 주는, 신망애 향주 삼덕을 바탕으로 한 ‘예방 교육법’ 때문이었습니다.


‘청소년들의 아버지’ 요한 보스코 성인의 교육 철학은 믿음과 희망 그리고 사랑을 몸소 체험한 그의 가정에서부터 시작합니다. 그는 비록 가난하고 아버지를 일찍 여읜 가정에서 자라났지만, 어머니의 남다른 헌신과 사랑 그리고 하느님에 대한 굳은 신앙은 그를 청소년의 아버지로 자라게 해 주었습니다. 가정은 하느님의 현존을 체험할 수 있는 가장 중요한 사랑의 공동체입니다.

 

[매일미사, 2007년 1월호에서]

 

[우리의 영원한 귀감, 영성의 대가들] 성 요한 보스코 (1)

박재만 신부(대전 대흥동본당 주임)


성 요한 보스코(1815~1888)는 「예방 교육」이라는 청소년 교육방법을 개발하여 가난하고 소외된 청소년들 사목에 일생을 바쳤다. 그는 바람직하지 못한 행동을 개선하도록 돕는 것이 교육에서 중요하다는 것을 알았다. 그러나 그는 한 걸음 더 나아가 바람직하지 않은 행동을 예방하는 것이 더 중요한 것임을 깨닫고 그것을 그의 교육의 목표로 삼았다. 그는 이성, 종교, 사랑이라는 세 가지 원칙을 교육의 기반으로 삼았다.

요한 보스코는 당시보다 더욱 혼란스런 상황에 살고있는 오늘의 청소년들을 위한 교육과 사목에 여전히 많은 것을 제시하고 시사하는 길잡이이며 언제나 그 정신과 자세에 있어 본받아야 할 모델이다.


1. 생애

요한 보스코(흔히 돈 보스코라 불란다. 「돈」은 사제에게 붙이는 존칭이므로 보스코 신부님이라는 뜻이다)는 1815년 8월 16일 이탈리아의 토리노 근처의 작은 마을베티에서 농부였던 아버지 프란치스코와 어머니 마르가리타 사이에서 태어났다. 요한 보스코는 아버지를 겨우 두 살 때 여의었고 훌륭한 신앙심과 고결한 정신을 지닌 어머니로부터 좋은 가정교육을 받으며 자랐다.

가난 때문에 학교에 다닐 수 없었던 요한은 어려서부터 집안일과 농사일을 거들고 있엇지만 언제나 공부하고 싶은 소망을 버릴 수 없었다. 9살 되던 해 그는 일생동안 머리에서 지울 수 없는 꿈을 꾸게 되었는데 그것을 자신의 미래의 사명을 예시한 중요한 꿈으로 여기게 되었다. (한 남자와 그의 모친인 고귀한 부인이 나타나 요한이 장차 수행해야 할 과제를 알려주는 꿈이다. 뒤에서 자세히 설명한다). 그 꿈을 꾼 이후 요한은 자신의 사명을 수행하기 위한 능력을 갖출 수 있도록 교육을 받아야겠다는 결심을 더욱 굳혔다.

1830년 15세의 요한은 마을 본당에 새로 부임한 칼로쏘 신부한테서 라틴어를 배우기 시작했다. 안타깝게도 얼마 안되어 그 신부가 세상을 떠나게 되었고 계속 공부하고 싶었던 요한은 집에서 20리 가량 떨어진 카스텔 누오보 학교에 다녔다. 다름해 그는 키에리에 있는 중등학교에 입학했다. 명석한 두뇌와 열성적 노력으로 그의 성적은 우수했다. 그는 또한 라틴어, 이탈리아어 문학서적들을 즐겨 탐독했고 놀이와 오락에도 흥미를 가졌다. 그는 가수, 배우, 즉흥시인, 마술사 등으로 불렸을 정도로 다재다능했고, 학생들의 대장 역할을 할 만큼 지도력도 갖추고 있었다. 그는 강론이나 교리시간에 들은 얘기나 책에서 읽은 이야기들을 아이들에게 재미있게 들려주어 재담꾼으로 통하며 인기가 좋았다. 그는 장터에서 곡예사나 광대들의 공연을 예리한 눈썰미로 보고 흉내내며 익힌 재치있는 곡예, 줄타기, 마술 등으로 마을 사람들을 매우 즐겁게 해 주었다. 그가 공연 전에 관중에게 대가(代價)로 요구한 것은 묵주기도와 함께 성가를 부르고 때론 본당신부한테서 들었던 강론 한 토막을 상기시키며 듣도록 하는 것이었다.

중등학교 4년 동안 공부하기 위해서 필요한 경비를 마련하고자 그는 여러가지 일을 해야했다. 그는 가정교사, 대장장이, 제화공 그리고 목수로도 일을 하였다. 이러한 경험들은 그가 훗날 직업학교를 설립하여 청소년들에게 유망한 기술을 습득시켜 급속히 산업화되어 가는 사회에 적응하도록 돕는데 소중한 밑바탕이 되었다. 이렇게 여러가지 직업들을 두루 경험한 덕분에 그는 청소년들의 어려움과 문제점들을 깊이 이해하면서 그들을 대하고 도울 수 있었던 것이다.

1836년에 요한 보스코는 키에리 대신학교에 입학했고 그곳에서 사제직을 준비하면서 5년간 공부하였다. 그는 철학과 신학 뿐 아니라 외국어들을 습득했고 고전작품들을 읽으면서 폭넓은 교양을 쌓기도 하였다. 그리고 부지런히 강론, 교리 강의 등을 위한 사목 자료들을 수집했고 틈틈이 글을 쓰기도 했다. 그는 신학교에 다니는 동안에도 어린이들을 모아놓고 이야기를 들려주었고 노래와 놀이 등으로 오락시간을 마련해 주었으며 학교공부를 도왔고 교리를 가르쳐 첫 영성체를 준비시켰다.

그는 얼마동안 몬탈도 예수회 학교 학생들을 지도하며 희랍어를 가르치면서 예수회의 교육방법을 접할 수 있었다. 그러나 그때의 실습중 그는 자신이 상류층 자녀들의 교육을 위해 부름받지 않았다는 것을 인식하게 되었다. 오히려 그는 가난하고 소외된 젊은이들의 교육을 위한 소명을 절실히 느꼈다.

1841년 6월 5일 요한 보스코는 사제 성품을 받았다. 서품 후 그는 영적 지도자 카파소 신부의 조언에 따라 3년 동안 콘비토 신학교에서 사제학교를 수료하였다. 거기서 그는 정규과목 이수 외에 병원과 감옥 방문, 주변 본당의 사목지원 및 청소년들의 교리교육 등 부지런히 사도적 활동을 수행했다.

요한 보스코 신부는 사제 성품을 받던 해 12월에 한 성당의 제의방에서 고아 소년 바르톨로메오 가렐리를 만나게 되는게 그것이 그의 교육 사업의 하나인 오라토리오(젊은이들의 교육의 집)의 출발점이 되게 하였다.

1848년 이탈리아에서 1차 독립운동이 일어나게 되는데 토리노 시에서는 집도 일자리도 없는 청소년들이 먹을 것을 찾아 거리를 헤메게 된다. 보스코 신부는 그들을 위해 두 번째 오라토리오 그리고 곧 이어 세 번째 오라토리오를 세우게 된다. 보스코는 작업장을 만들어 젊은이들에게 구두 제작, 양재, 목공기술을 가르쳤으며 교회 관련 팜플렛과 교리교육 자료들을 찍어내는 인쇄소까지 차려 인쇄 및 제본의 기술을 가르쳤는데, 이러한 것들이 몇 년 후엔 공업학교로 발전하게 되었다. 교육사업이 번창해 가던 1845년 7월에 콜레라가 리구리아 지방으로부터 시작하여 토리노까지 번져오자 보스코는 44명의 젊은 봉사원들과 환자들을 돌보았다. 그것은 많은 환자들을 살려내는 업적과 함께 그를 도와 일하는 사제와 수사들의 숫자를 늘어나게 하는 결과를 가져왔다.

요한 보스코는 그가 교육시키고 있던 젊은이들 중에서 그의 사업의 협력자들을 찾아내어 그들을 척 구성원으로 1859년 살레시오회를 창설했고 점차 광범위한 선교 및 교육사업을 전개하여 나아갔다. 1860년 7월 30일에는 루아 미카엘이 사제성품을 받음으로써 보스코가 교육한 젊은이들 중에서 최초의 사제가 태어났다. 1863년 살레시오회의 사업이 처음으로 토리노 밖에서 태어났다. 그것은 미라벨라 몽훼라토의 소신학교였다. 그 뒤를 이어 여러 지역에 오라토리오들이 세워졌다. 요한 보스코 생존시 이미 6개국에 64개의 수도원이 설립되었고 회원은 770여명이나 되었다. 1872년엔 살레시오 여자 수도회인 「도움의 마리아의 딸 수도회」가 창설되었다. 그리고 1875년 11월 11일엔 남미로 떠나는 10명의 살레시오회원들에게 십자가를 수여함으로써 해외 선교활동이 시작되었다. 이로써 보스코의 교육사업과 선교사업은 젋게 세계로 뻗어나갈 수 있게 된 것이다. 요한 보스코는 같은 해에 그가 「살레시오회 외부 회원들」이라 부르던 「협력자회」를 조직하였다. 그들은 청소년들의 구원을 위해 일하는 요한 보스코의 사업의 협력자들로서 기도와 함께 경제적인 도움을 베풀었다.

1888년 1월 31일 새벽 72세의 요한 보스코는 미소를 지은 채 평온히 세상을 떠나 하느님의 품에 안겼다. 그는 임종 직전 침대 주변에서 지켜보고 있던 살레시오회원들에게 다음과 같은 마지막 말을 남겼다. 『모든 사람들에게 선을 행하고 아무에게도 악을 행하지 마십시오. 나의 아이들에게 천국에서 기라디겠다고 전해주십시오』

요한 보스코는 1929년 6월 2일 교황 비오 11세에 의해 시복되었고 1934년 4월 4일 시성되었다. [가톨릭신문, 2000년 10월 29일]


[우리의 영원한 귀감, 영성의 대가들] 성 요한 보스코 (2)


2. 영성사 안에서의 기여

1) 요한 보스코의 영성에 크게 영향을 미친 영성가들은 프란치스코 드 살, 로욜라의 이냐시오, 아빌라의 데레사, 필립보 네리, 빈첸시오 아 바오로, 알퐁소 드 리구리 등이었다. 보스코는 젊은이들을 교육하는 사도직에서 온유함과 인내가 요구되었기에 온유와 애덕의 사도 성 프란치스코 드 살을 본받고자 하였으며 로욜라의 이냐시오로부터는 악에 대항하는 열정적 싸움과 하느님의 더 큰 영광을 위한 노력을 배우고자 하였다. 그는 그의 교육 영성을 형성하고 실현하는 데 있어 성 필립보 네리의 기쁨의 정신과 교육 방침을 많이 참고하였으며 성 알퐁소 드 리구리의 윤리적 가르침을 적용하였다. 그는 또한 아빌라의 성녀 데레사로부터 하느님께 대한 깊은 사랑과 헌신 그리고 한결같은 평온함을 본받고자 하면서 청소년들을 교육 하였다.

2) 요한 보스코는 청소년 사목을 위한 하느님의 부르심을 깊이 인식했고 그 소명에 적극적으로 응답하면서 투신하였다. 요한 보스코는 17세기 스페인과 프랑스에서 발전했던 관상적, 학문적 영성을 잘 알고 있었으나 그 보다는 활동적, 실천적 영성이 하느님께서 부르시는 소명에 응답하는 길임을 깨닫고 그것을 택했다. 그의 시대는 사회 상황의 변화와 산업 혁명으로 인구의 도시 집중, 통일 국가에 대한 열망, 유럽 식민지 팽창 등으로 인해 정치, 경제, 문화 등이 급속히 변화하고 혼란스러워 많은 젊은이들이, 특히 가난하고 소외된 계층의 젊은이들이 방황하고 있었다.

요한 보스코는 그들을 교육하고 선도해야 할 사명감을 일찍부터 자각했고 준비하였으며 그에 온힘을 기울였다. 한편 그는 성령의 도구로서 활동하는 데 요청되는 적절한 카리스마를 풍성히 받았었 기에 그의 사도직은 더욱 성공적 결실을 얻을 수 있었다. 무엇보다 그는 그들을 극진히 사랑했으며 근본적으로 인간적 가치들을 존중 하면서 그들로 하여금 현실생활에 필요한 존재들이 되도록 복음 정신에 입각하여 교육하였다.

3) 요한 보스코는 '예방 교육방법' (preventive system)을 도입하여 젊은이들 교육과 지도에 힘썼는데 이 교육방법은 교육사에 획기적 으로 공헌했을 뿐 아니라 영성사 안에서 독특한 교육 영성의 장을 이룩하였다. 그리스도를 본받는 참된 인간적. 영적 양성을 목표로 한다. 이 교육의 원리와 방법은 이성(理性), 종교 그리고 사랑이라는 세 단어로 요약 표현될 수 있다.

4) 요한 보스코의 예방 교육의 체계는 여러 교육 사상을 받아들여 독창적으로 종합한 것이다. 그의 교육 체계엔 무엇보다 인간의 본성과 교육, 영성 등에 관한 교회의 가르침이 바탕이 되었다. 다른 하나의 영향은 당시 피에몬테에서 성행하던 얀센주의적 교육 사상이다. 요한 보스코는 원죄로 인해 인간 본성이 완전히 타락했다고 주장하면서 지나치게 엄격하고 금욕적이던 얀센주의자들과의 논쟁에 많은 시간과 정력을 쏟았지만 무의식적으로 그들의 개념과 교육방법 중 일부를 수용하였다. 인간의 나쁜 성향을 억제시키는 데 도움되는 방법과 규율, 교육자의 임무에 대한 규정으로서 늘 깨어있는 자세, 청소년들이 죄를 범할 수 있는 기회를 없애기 위한 적극적 대책 등 긍정적 요소들을 채택하였다. 그러나 그들의 실천 방법과는 달리 보스코는 청소년들이 즐겁게 지내고 스스로 여러 방법으로 표현하기를 바랬으며 필요시에만 그들을 통제했다. 그는 얀센주의자들이 거부했던 애정, 관심, 경쟁, 창의력 같은 인간적 수단을 교육에서 사용하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았다.

그는 또한 루소의 교육 이론으로부터 영향을 받았다. 얀센주의자들과 달리 루소는 인간이 본래 선하게 태어났으나 사회가 인간을 악하게 만들기 때문에 아이들을 사회에서 격리시켜 자연상태에서 양성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요한 보스코는 원죄 교의를 받아들이면서도 자연주의 철학자 루소를 닮아갔다. 그는 수많은 창의적 가르침을 활용했고 가능한 한 교육에 많은 즐거움의 요소를 도입하며 산책이나 소풍, 인생경험, 독서를 통해서 필요한 교훈을 가르쳤다. 그는 또한 학생들의 개성을 존중하고 자발성을 북돋아 주었다. 그러나 루소와 달리 그는 인간이 본성적으로 선하며 저절로 진리와 선을 지향한다고 믿지는 않았다. 그는 인간이 교육적으로 개발할 수 있는 착한 본성을 지니고 있음을 인정했지만 교육자가 통제할 수 없는 악한 성향도 동시에 가지고 있다고 보았다.

요한 보스코에게 미친 또 하나의 영향은 당시 교육 사상과 활동의 중심지였던 토리노 대학에 만연되어 있던 자유정신이었다. 특히 그의 친구이며 교육 사업을 도와 준 철학자 안토니오 로스미니에게서 교육 철학적 영향을 받았다. 실로 보스코의 주요 교육 방법들이 로스 미니의 논문에서 발견된다. 요한 보스코는 로스미니 교육철학의 원칙 들을 그의 예방 교육의 근본 요소인 이성, 종교, 사랑으로 새롭게 발전 시켜 정리했다. 그의 교육활동의 핵심은 전인적 그리스도 중심주의이다.

5) 평생 부지런히 일하며 청소년들에게 근면의 모범을 보인 성 요한 보스코는 또한 청소년 견습공들의 수호 성인이다.

그는 농촌에 태어나 어릴 때부터 집안일과 농사일을 도우며 일을 배우고 몸에 익혔다. 그는 또한 기술자들이 많이 살던 카스텔 누오보 에서 자라면서 대단한 호기심을 가지고 장인(匠人)들의 일솜씨를 지켜 보았고 어깨 너머로 그것들을 배웠다. 두뇌가 명석했고 눈썰미가 좋았 으며 재주가 비상했던 그는 기술자들의 솜씨를 암기했다가 곧잘 모방 하였다. 그러한 눈썰미와 일솜씨는 그가 중등학교 시절 학비를 마련 하는데 큰 도움이 되었다. 그는 대장장이, 제화공, 목공일들을 닥치는 대로 해야했던 것이다. 그러한 경험들은 뒷날 가난한 젊은이들이 겪고 있는 어려운 사정을 공감적으로 이해하며 도울 수 있게 되었고 직업 학교를 세워 그들에게 기술을 습득시켜 사회에 적응하도록 돕고 고무 하는 데 원동력이 되었다.

그는 살레시오회원들 뿐 아니라, 그의 젊은이들에게 열심히 일하도록 가르치고 독려했을 뿐 아니라 언제나 몸소 그들에게 근면의 모범을 보였다. 그는 노년에 이르러서도 일을 줄이거나 중단하지 않았다. 그가 지상 생애를 마친 후에도 젊은이들을 가르치는 그의 사명은 끝나지 않았고 그의 동료들이며 분신들인 살레시오 회원들에 의해 전 세계에서 지속되어 왔으며 오늘도 여전히 점점 확대되고 발전하고 있다.

교황 비오 12세는 한 교서(1958. 1.17)를 통해 성 요한 보스코를 청소년 견습공들의 수호성인으로 선포했다. "이탈리아 정부의 노동 및 사회 보장부 루이지 구이 장관은 성 요한 보스코를 청소년 견습 노동자들의 천상 수호자로 선포해 줄 것을 겸허하게 청원하였습니다. 성인은 출중한 인물이며 교회와 사회에 위대한 공적을 끼친 분으로서 진보의 최전선에 스스로 나서서 무수한 젊은이들에게 각종 직업 교육을 시켰으며 정직 하고 경건한 생활을 가르쳤던 것입니다. 성 요한 보스코를 하느님 앞에서 이탈리아 청소년 견습공들을 위하여 천상 수호자로 택하고 선언하며 영구히 선언하고 확정합니다." [가톨릭신문, 2000년 11월 5일]


[우리의 영원한 귀감, 영성의 대가들] 성 요한 보스코 (3)


3. 예방 교육

요한 보스코가 헌신적으로 봉사한 사도직은 젊은이들의 참된 인간적.영적 양성을 위한 종교 교육이었다. 그는 교육의 이론 가라기보다는 교육실천가로서 참신하고 획기적인 교육 방법을 도입하여 젊은이들의 교육과 지도에 크게 공헌하였다. 그것이 바로 '예방 교육 방법' (preventive system)이었다. 훌륭한 그리스도교 가정에서처럼 그들이 교육받을 수 있는 가족적인 교육 환경을 만들고, 형제적 친밀감으로 그들의 삶을 함께 나누며 또한 온화하지만 단호하게 그들을 선으로 이끌고 그들의 마음과 정신을 사로잡기 위하여 그들이 사랑하는 것을 같이 사랑하는 것이다. 이런 것들이 요한 보스코가 교육에 도입하고 적용한 혁신 방법이었다.

1) 예방 교육의 기본적 원리

요한 보스코의 예방 교육은 강압적인 것으로 여긴 기존 교육에 대응하여 발전시킨 것으로서 악을 사전에 막는 것을 목표로 한다. 그것은 약보다 위생을, 치료보다 예방 건강을 중시하는 현대의학의 발전적 경향과 유사한 것이라 할 수 있다. 그에 의하면, 강압적 방법은 학생들이 규칙을 위반하거나 잘못 처신 했을 때 그들을 처벌하거나 강제로 가르치는 것이고, 예방적 방법은 친절로 그들이 규칙을 잘 지키도록 돕고 목표 달성을 위해 그들에게 가장 적당하고 효율적 수단을 제시하는 것이다. 이 교육의 첫 원칙은 하느님께 대한 경외심을 학생들의 마음에 넣어주는 것이고 교리 교육과 윤리 교육을 통해 선에 대한 애착과 악에 대한 혐오감을 그들의 마음에 스며들게 하는 것이다. 학생들을 적절하고 현명한 충고에 의해 그리고 실천적 신앙생활을 통해 성성에 이르는 길로 들어서게 하는 것이다. 학생들의 학업, 노동 그리고 그들의 놀이에서 도 언제나 친절한 도움을 준다.

그는 바람직한 인간성 형성을 위해서는 무엇보다 젊은이들의 나쁜 습성, 악의 유혹을 예방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이러한 예방은 엄한 벌 이나 책망보다 친절한 사랑과 적절하고 현명한 충고, 신심을 실천 하도록 돕는 데 있다고 확신하며 사랑, 이성, 종교를 예방 교육 방법의 원칙으로 삼았다. 그리고 교육 목표는 '예수님을 닮은 사람' 즉 인간적.영적으로 성숙하는 전인(全人)양성이었으며, 그 교육의 영성은 아이들을 사랑하시어 언제든지 기꺼이 받아들이신 예수님의 사랑을 본받는 것이었다. 그의 교육의 많은 결실 중 손꼽을 수 있는 하나는 소년 성인 도메니코 사비오를 배출한 것이라 할 수 있다.

가) 이성(대화와 합리적 설득)

요한 보스코에 의하면 이성은 교육자가 피교육자를 순응하도록 이끌고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끊임없이 적용하고 가르치며 실천해야 할 방법 중의 하나였다. 교육자는 젊은이들 스스로가 올바른 분별력을 통해 학업 뿐 아니라 규율 준수나 부과된 벌, 나쁜 습성의 교정 또는 전례와 성사 생활의 의미, 실천의 당위성 등을 순수하게 받아들이도록 합리적 방법으로 가르치고 인도해야 한다. 그러할 때 그들이 자발적으로 규율 준수 뿐 아니라 부과된 모든 과제를 기쁜 마음으로 받아들이고 실천하게 된다.

나) 종교(복음적 신앙 교육)

요한 보스코는 예방 교육에서 신앙 생활의 중요성을 특별히 강조했다. 젊은이들이 하느님을 경외하고 사랑하며 기도하면서 살아간다면 악습 예방은 물론이고 올바른 생활에 능동적이고 적극적일 것이기 때문이다. 그는 특히 교육 사목 체험에서 젊은이들이 고해 성사와 성체 성사를 합당하게 자주 받으면 그들의 인간적.영적 형성에 효과적 결실을 얻는 다는 것을 확신했다. 이러한 생활에서 교육자의 솔선 수범이 참으로 중요하다.

다) 사랑

요한 보스코의 예방 교육은 사랑에 기초한 것이다. 그의 교육은 오래 참고, 친절하며 모든 것을 덮어주고 모든 것을 견디어 내는 사랑(1고린 13, 4~7 참조)에 대한 바오로 가르침에 토대를 둔다. 예방 교육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젊은이들과 함께 생활하고 그들과 어울리면서 그들을 있는 그대로 인정해 주고 존중해 주며 그들의 잘못과 연약함까지 이해하는 자애로운 모습을 보여주는 것이다. 그는 교육자와 피교육자의 애정 어린 협력 관계이므로 사랑을 그의 교육의 최고 원리로 여겼다. 그러므로 중요한 일은 젊은이들을 사랑해야 할뿐 아니라 그들이 사랑 받고 있다는 사실을 알도록 하는 것이다. 이를 위하여 보스코는 그들 가운데 좥현존하는 것좦과 그들을 위해 '항구하게 일하는 것' 을 사랑 교육의 두 원리로 채택하였다.

2) 특성

요한 보스코의 교육은 언제나 복음적 사랑 속에서 자유롭고 즐겁게 행해 졌으며 평화롭고 신뢰에 찬 가족적인 분위기를 지향하며 이루어졌다.

가) 가족 정신

가족 정신은 복음적 연대성을 의미하는 것으로서 그의 교육의 근본 이상 이며 지도 이념이었다. 이러한 정신은 오라토리오에서 볼 수 있는 것으로서 요한 보스코는 젊은이들과 협조자들 가운데서 아버지로 살았다. 그는 오라토리오를 대 가정처럼 운영했고 평화로운 기쁨이 그 공동체를 감싸 도록 하였다. 그 안에서 젊은이들에게 규율과 바른 행위에 어울리는 자유가 부여되었다. 그러한 가족 정신 안에서 기쁨이 체험되었으며 마음의 개방이 가능해졌다. 따라서 젊은이들은 그 안에서 보호와 사랑을 받고 있다고 느낄 수 있었다.

나) 만남과 대화

가족적 분위기에서 이루어지는 만남과 대화는 젊은이들을 잘 이해하고 그리스도의 사랑을 보여주는 길이다. 요한 보스코는 개인적인 만남과 대화의 시간들을 영성지도의 기회로 적절히 이용했으며 흔히 고해성사로 끝나도록 했다.

그는 또한 밤 인사(Buona notte) 시간을 교육의 좋은 기회로 활용하였다. 그것은 학생들이 잠자리에 들기 전에 짧게 사랑의 인사를 표현하는 것인데 그 내용은 주로 일상생활에서 도움되는 교훈이나 명언 혹은 감명을 주는 일화들이었다. 그리고 그는 율동으로 구성된 오락에 큰 중요성을 부여하며 항상 즐겁게 그들과 어울렸으며 그런 기회에 자연스럽게 조언해 주기도 했다.

다) 효율적 처벌과 훈계

그는 가능하면 처벌보다는 칭찬을 통해 그들이 올바른 행동을 계속 실천 하도록 하였다. 그러나 처벌해야할 경우엔 그 벌이 감정적 화풀이가 아니라 오직 학생 자신이 나쁘게 행동했기 때문에 교육적으로 주어지는 것임을 알도록 해야한다고 가르친다. 그는 훈계나 처벌을 하기 위해서는 먼저 초기의 감정이 가라앉길 기다렸다가 마음을 열고 산보를 청하거나 일이나 놀이에 초대하여 대화하면서 진상을 규명하였다. 그는 학생들이 이성과 신앙으로 자기 잘못을 깨달을 수 있도록 인내와 신중함 을 기울여야 한다고 여겼다. 또한 꾸중은 개인적으로 해 대중 앞에서 모욕을 당하지 않도록 하였다. 그리하여 요한 보스코는 '귓속말' 이라는 독특한 방법으로 효율적인 권고와 훈계를 하였다. [가톨릭신문, 2000년 11월 19일]

 

[영성의 향기를 따라서] 살레시오회(상)

 

 

사진말 = 지난해 사제수품식 때 새 사제들이 성찬의 전례를 거행하고 있다(사진 위). 서울 대림동에 있는 직업학교 목공소에서의 작업 장면.

 

 

창설과 역사

 

청소년의 아버지요 스승이며 위대한 교육자인 요한 보스코. 청소년 교육이라는 새로운 영성을 교회 안에 뿌리내린 그는 '성 프란치스코 살레시오회'를 창설해 세계의 수많은 청소년들에게 그리스도교의 정신과 사랑을 심어줬다.


1815년 8월 15일 이탈리아 토리노 베키지역 가난한 농가에서 태어난 요한 보스코는 아홉 살 때 꾼 꿈을 계기로 사제성소에 대한 열망을 가졌다. 생계를 이어가기 위해 도시로 나와 상점의 점원이나 공장의 직공 등의 일을 했지만 사제가 되고자하는 노력은 게을리하지 않았다. 어려운 가정형편 때문에 남들보다 몇해 늦게 신학교에 들어갔지만 그는 마침내 1841년 토리노 교구의 사제가 됐다.


당시 공업화가 한창이던 이탈리아는 시골에서 일자리를 찾아 도시로 몰려드는 청소년들이 많았고 도시에 안정적인 거처를 마련하지 못한 젊은이들은 쉽게 범죄를 저질렀고 교도소는 항상 넘쳐나고 있었다. 이 때 요한 보스코 신부는 바르톨로메오 가렐리라는 고아를 만나면서 가정과 사회로부터 소외되고 버림받아 신앙의 안내자를 필요로 하던 젊은이들을 주일마다 성당으로 초대해 함께 놀면서 교리를 가르쳤다. 날이 갈수록 이같은 청소년들은 늘어났고 요한 보스코 신부는 '오라토리오'라는 기숙사를 세워 이들의 의식주를 해결해주고 일자리를 얻는데 필요한 기술과 공부를 가르쳐줬다. 이때 오라토리오에서 함께 생활하던 600여명의 청소년들 모두 그의 각별한 사랑을 느낄 만큼 보스코 신부는 학생 하나 하나에게 애정을 쏟으며 사랑을 베풀었다.


"나는 청소년 여러분을 위하여 일하며, 공부하고, 나의 생의 모든 것을 바칠 각오가 되어있습니다"라고 했던 보스코 신부는 오라토리오의 청소년들이 점차 늘자 이들을 더 잘 보살피기 위해 1864년 수도회를 창설했다. 당시 보살핌을 받고 있던 청소년들 가운데 성숙한 젊은이들이 함께 했던 살레시오회는 수도자가 되기보다 항구한 사랑을 베풀어주는 보스코 신부와 함께 일하는 것이라면 기꺼이 한평생을 바칠 수 있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특히 가난한 청소년들을 위해 학교, 기숙사, 기술학교, 주일학교 등 다양한 교육 기회를 제공했던 보스코 신부는 자신의 이상대로 젊은이들을 교육하기 위해서는 신학교시절부터 존경해왔던 살레시오 성인의 영성으로 살아야 한다고 판단하고 수도회 명칭을 '살레시오회'라고 정했다.


살레시오 성인은 17세기 제네바의 주교로서 칼빈주의에 맞서 가톨릭의 진리를 선포하며 샤블레라는 지역에서 수많은 개신교도들을 가톨릭으로 개종시켰다. 세상 안에서 분주하게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용기를 불어넣어 완덕의 길을 제시하며 성화의 길로 이끈 살레시오 성인은 온유와 사랑의 방법으로 사람들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1869년 교황청의 정식 승인을 받은 살레시오회는 창설자 보스코 신부의 정신을 따라 끊임없는 인내와 사랑으로 사회로부터 버림받은 청소년들을 끌어안으며 그리스도교의 정신을 실천했다. 1868년 '살레시오 오라토리오 출신자회'를 탄생시킨 보스코 신부는 1872년 살레시오 수녀회를 창설하고 이어 평신도 단체인 살레시오 협력자회를 창설해 청소년들을 위한 교육 사도직의 기틀을 확고히 다졌다.


자신의 모든 것을 청소년들에게 다 내어준 보스코 신부는 1934년 교황 비오 12세로부터 성인으로 반포됐으며, 요한 바오로 2세로부터 '청소년들의 아버지요 스승'이라는 칭호를 받았다. 실천적인 사랑과 교육으로 19세기의 가장 훌륭한 교육자이며 2천권이 넘는 책을 집필한 보스코 신부는 사회변혁의 순간에 교회를 적극적으로 옹호한 호교론자로서 교회 안에서 큰 영성가로 남아있다. 세계 곳곳으로 뻗어나가 보스코 신부의 정신을 살고 있는 살레시오회는 학교, 기숙사, 성당, 기술학교 등을 갖춘 살레시오 공동체를 설립하면서 청소년 교육의 새로운 장을 열고 있다.


또한 살레시오회는 1954년 6·25의 아픔을 안고 살던 한국에 진출해 현재까지 살레시오 중·고등학교를 비롯해 많은 오라토리오 공동체를 운영하면서 이 땅에서 요한 보스코 신부의 청소년 교육을 전개해나가고 있다.

 

[가톨릭신문, 2001년 8월 5일, 이진아 기자]

 

 

살레시오회(중)

 

 

사진말 = 돈보스꼬 정보센터 전경(사진 위)과 중국 연길 직업학교 졸업식 장면.

 

 

청소년 사목을 위해 적극 투신했던 요한 보스코 성인의 영성은 젊은이들을 교육하면서 채택되고 체험된 영성이라 할 수 있다. 어린 시절 자신의 경험을 통해 종교 교육의 중요성을 깨달았던 요한 보스코 성인은 젊은이들에게 세상 삶을 위한 실제적인 도움을 주면서 그들을 성화의 길로 이끌기 위해 노력했다.


'예방교육'이라는 영성을 통해 교육사에 크나큰 공헌을 남겼을 뿐 아니라 영성사 안에서 교육 영성이라는 새로운 장을 마련한 요한 보스코 성인은 그리스도를 본받는다는 참된 인간적, 영적 양성을 교육을 목표로 했다.


이성과 종교, 친절한 사랑으로 이루어진 예방교육은 훌륭한 그리스도교 가정에서처럼 그들이 교육받을 수 있는 가족적인 교육환경을 만들고, 형제적 친밀감으로 그들의 삶을 함께 나누며 그들의 마음과 정신을 사로잡기 위해 그들이 사랑한 것을 같이 사랑하는 것이다.


그는 이성으로 젊은이들의 마음을 이해하고, 종교로 젊은이들에게 하느님의 사랑을 심어주며, 친절한 사랑으로 그들의 인격을 존중해 하느님과의 사랑을 매일의 삶 안에서 살아갈 수 있도록 이끌어주길 당부했다.


젊은이들과 대화하고 통교하는 힘은 이성에서 비롯된다고 말한 그는 청소년들을 교육하기에 앞서 교육자 자신이 스스로의 성격을 다스리도록 권고했다. 보스코 성인 자신도 그의 급한 성격과 과민함을 온유와 사랑으로 다스리며 젊은이들에게 열린 마음으로 한발짝 다가설 수 있었다. 청소년들을 교육하기 위해 엄청난 인내심을 가졌던 보스코 성인은 자신의 감정을 먼저 다스림으로써 젊은이들이 스스로 깨달을 수 있는 시간을 제공했다. 그는 젊은이들을 꾸짖을 때 화난 목소리나 몸짓을 지녀서도 안되고 마음을 흥분시킨다거나 모욕적인 언사를 내뱉지 말라고 당부하며 이것이 바로 참다운 아버지의 모습을 보여주는 유일한 방법이라고 말했다.


요한 보스코 신부는 예방교육에 있어 이성과 아울러 신앙생활, 즉 종교의 중요성을 특별히 강조했다.
그는 젊은이들이 하느님을 경외하고 사랑하며 기도하면서 살아간다면 악습 예방은 물론이며 올바른 생활에 능동적이고 적극적으로 참여할 것이라고 했다. 또 그는 어릴 적 경험으로 미루어 볼 때 화해성사와 성체성사는 젊은이들의 영적생활에 힘을 준다고 확신했다. 이 때문에 보스코 성인은 젊은이들의 영혼을 구하기 위해 매일미사, 성체강복, 성체조배 등 조기 신자교육을 제공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성모신심이 특별했던 그가 예방교육의 세 번째 요소로 언급한 것은 친절한 사랑이다. 이 사랑은 "사랑은 오래 참고 친절합니다. 사랑은 모든 것을 믿고 바라고 견디어 냅니다"(1고린 13, 4. 7)라는 바오로 사도의 가르침에 토대를 두고 있으며 모든 살레시안은 젊은이들의 마음을 얻기 위해 그들에게 사랑받도록 해야한다고 했다.


예방교육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젊은이들과 함께 생활하고 그들과 어울리면서 그들을 있는 그대로 인정해주고 존중해주며 그들의 잘못과 연약함까지 이해하는 자애로운 모습을 보여주는 것이다.
보스코 성인은 젊은이들의 영혼구원을 위해 매일 미사와 성체조배 때 젊은이들 한명 한명을 기억하며 기도했고 또 신심이 약하고 반항적인 젊은이들을 위해 언제나 기도했다.


요한 보스코 신부는 예방교육과 함께 가족정신을 중요시했다. 그의 교육은 언제나 복음적인 사랑 속에서 자유롭고 즐겁게 행해졌으며 가족적인 분위기를 지향하며 이뤄졌다. 이러한 정신은 오라토리오에서 볼 수 있는 것으로서 요한 보스코 성인은 젊은이들과 협조자들 가운데서 아버지로 살았다. 그는 오라토리오를 대 가정처럼 운영했기 때문에 젊은이들이 그 안에서 보호와 사랑을 받고 있다고 느낄 수 있었다.

 

대장장이, 제화공, 목공일 등을 닥치는 대로했던 그는 훗날 가난한 젊은이들이 겪고 있는 어려운 사정을 깊이 이해하며 도울 수 있게 됐고 직업학교를 세워 그들에게 기술을 습득시켜 사회에 적응하도록 돕고 고무하는 데 원동력이 됐다. 그는 살레시오회원들 뿐 아니라, 그의 젊은이들에게 열심히 일하도록 가르치고 독려했으며 언제나 몸소 그들에게 근면의 모범을 보였다. 그가 생애를 마친 후에도 젊은이들을 가르치는 그의 사명은 끝나지 않았고 그의 동료들이며 분신들인 살레시오 회원들에 의해 전 세계에서 지속되어 왔으며 오늘도 여전히 점점 확대되고 발전하고 있다.

 

[가톨릭신문, 2001년 8월 12일, 이진아 기자]

 

 

살레시오회(하)

 

 

사진말 = 돈보스꼬 직업학교에서 교육받고 있는 청소년들(사진 위)과 살레시오 교육회관에서 펼친 여름캠프 장면

 

 

사도적 실천

 

살레시오회는 1954년 한국 청소년들을 위한 교육수도회의 필요성을 절실히 느꼈던 당시 광주대교구장 헨리 대주교에 의해 초청된 이후 오늘날까지 요한 보스코 성인의 예방교육을 전개해 내가고 있다.


초창기 일본에서 활동 중이던 선교사들이 한국으로 파견돼 살레시안 교육을 펼쳐나갔으며 89년 광주 일곡동으로 이전한 살레시오 중고등학교는 현재까지 2만여 명의 졸업생을 배출했다. 57년 노기남 대주교의 초청으로 서울 도림동성당의 사목과 운영을 맡았던 살레시오회는 63년 도림동성당 관할지역인 대림동에 근로청소년들을 위한 기숙사와 신학원을 설립했고 구로공업단지를 관장하는 구로3동에 본당을 신설, 운영했다.


요한 보스코 성인이 그러했던 것처럼 살레시오회는 더 가난하고 어려운 청소년들을 위해 1970년 서울 영등포구 신길6동에 돈보스코 직업학교를 설립, 젊은이들에게 기계기술을 가르치고 공단지역 근로자들을 대상으로 다양한 사회, 문화, 교육을 실시했다. 아울러 살레시오회는 가톨릭노동청년회나 소년원 사목활동도 함께 펼쳐나갔다. 이같은 교육을 통해 살레시안들은 청소년들이 사회생활에 필요한 책임감 및 자립정신을 갖게하고, 개인적으로는 사랑을 나눠주는 사람으로 성장할 수 있도록 도왔다.


또 청소년들의 인성교육을 위한 수련회 활동을 국내에서 처음으로 시작한 살레시오회는 80년 전남 영광군 해변 청소년 캠프장 마련을 비롯, 서울 양천구 신월동에 살레시오 교육회관을 설립했다. 입시위주의 교육현실 속에서 학생들의 인성교육을 돕고자 시작된 살레시오교육회관의 프로그램들은 청소년들에게 큰 영향을 주었을 뿐 아니라 교육적 가치가 높이 평가돼 전국적으로 확산, 실시됐다.


서울, 대전, 충남, 강원도 등지에서 교육회관, 수련원을 운영하고 있는 살레시오회는 각각 지역마다 차별화된 프로그램을 운용, 청소년들의 필요에 따라 교육회관과 수련원을 활용할 수 있도록 하고 있다. 특히 서울 교육회관에서는 인성교육, 리더쉽, 자원봉사학생교육, 가족피정 등을 실시하고 있고, 대전에서는 음악, 역할극, 명상 등 상호학습과 체험학습 위주의 교육을 전개하고 있다.


오라토리오라는 공동체를 이루며 가족애와 사랑을 실천해온 살레시오회는 결손가정 청소년들을 위한 소규모 복지시설인 '나눔의 집'을 85년부터 시작, 현재 서울과 광주, 대전, 춘천에서 20여개의 소공동체를 운영하고 있다.


현재 청소년들의 매스컴 교육에 선두적인 역할을 하고있는 살레시오회는 94년 돈보스코정보문화센터를 설립해 출판, 영상 및 컴퓨터 등 첨단분야의 청소년교육을 펼치고 있으며 일선 사목자들을 대상으로 커뮤니케이션 분야의 청소년 이해를 넓혀주는 '청소년사목전문학교'도 실시하고 있다. 미디어교육부, 문화교육부, 인터넷기획부 등으로 구성된 정보문화센터는 매년 청소년창작영화제를 개최해 청소년들의 방송제작교육을 체험적으로 실시하고 있으며 방학을 이용해 전국을 순회하면서 영상캠프를 전개하고 있다. 67년부터 근로 청소년들의 야학 및 문화강좌를 제공하기 위해 시작된 교육부는 지역 청소년들과 주민들의 문화활동 및 취미생활을 도울 수 있는 다양한 프로그램을 실시해오고 있다. 현재 양질의 프로그램을 제공하고 있는 문화센터는 컴퓨터 교실을 포함해 영어, 논술, 만화, 연극, 과학교실, 바이올린 등 17개 과목이 개설돼 있으며 성인들을 위해 영어, 일어회화, 핸드니트, 퀼트, 손바닥정원 들을 제공하고 있다.


현재 독자적인 서버 구축으로 포털사이트(www.ibosco.net)를 운영하고 있는 살레시오회는 다양한 청소년교육사업을 온라인으로 연결해 시너지 효과를 얻어내고 있으며 청소년인터넷방송도 함께 운영하고 있다.


이밖에도 80년부터 아프리카 등지에 선교사를 파견해온 살레시오회는 96년 중국 연길지역을 한국관구의 선교지로 선정, 2년 뒤 현지에 공업기술고등학교를 세워 중국 청소년들에게 기술교육을 통한 복음화 활동을 전개하고 있다.


지난 99년 한국진출 45년만에 정식관구로 승격된 살레시오회는 한국에서는 108명(수련자 포함)의 성직·수도자들이 요한 보스코 신부의 정신을 실현, 공동체를 꾸려가고 있으며 전세계에서는 1만7000여명의 수도자들이 활동하고 있다.

 

[가톨릭신문, 2001년 8월 19일, 이진아 기자]

 

 

 

[수도 영성] 살레시오회*
 
나에게 영혼을 달라
 
양승국 스테파노 살레시오회 수사신부
 
 
왜 살레시오 수도회인가?
 
많은 사람들이 던지는 질문이다. “왜 창립자 돈(don : 사제란 뜻의 이탈리아어) 보스코의 이름을 따 ‘돈 보스코 수도회’라고 하지 않고 ‘살레시오 수도회’라고 지었나요?”
 
돈 보스코에게 프란치스코 살레시오(프란치스코 드 살, 1867-1622년) 주교는 각별한 인물이었다. 돈 보스코(1815-1888년)보다 앞서 살았던 프란치스코 드 살은 당시유럽 교회 안에서 널리 공경되던 성인이었다. 특별히 그가 남긴 겸손과 온유, 친절과 인내, 사목적 열정과 낙관주의는 돈 보스코에게 큰 매력으로 다가왔고, 결국 돈 보스코는 수도회를 창립하면서 수도회 수호성인으로 정했을 뿐 아니라, 수도회 이름조차 살레시오회로 명명하게 된다.
 
 
돈 보스코는 누구인가?
 
누군가와 사랑에 빠질 때 나타나는 한 가지 현상이 있는데, 아이들 표현대로 ‘살짝 맛이 간다.’ 거금을 들여 선물공세를 펼치기도 하고, 잠깐의 만남을 위해 천리 길도마다 않고 달려간다. 이런 모습을 보고 사람들은 ‘눈에 콩깍지가 꼈다.’고 한다.
 
돈 보스코가 그랬다. 그는 한마디로 ‘청소년에 미친’ 사람이었다. 실제로1841년 사제가 된 돈 보스코에게는 여러 ‘물 좋은’ 곳에서 ‘스카우트’ 제의가 들어왔다. 그러나 돈 보스코는 모두 마다하고 길거리를 방황하는 청소년들 사이로 내려간다. 이런 그를 두고 동료 사제들은 미쳤다고 했다. 교구 관계자들은 그를 강제로 정신병원에 입원시키려고까지 하였다.
 
돈 보스코가 살았던 1800년대 토리노시 주변의 상황은 혼돈 그 자체였다. 급격한 산업화 과정을 거치면서 수많은 농촌인구들이 도시로 유입되었고, 많은 도시빈민이 양산되었다. 하루하루의 생존조차 기약할 수 없는 상황에서 부모들은 자녀들의 교육에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수많은 청소년들이 일터로 나서야 했는데, 그 과정에서 청소년들은 유해한 환경에 노출되었고 노동착취의 대상으로 전락했다.
 
“가난한 청소년들을 위해 나의 목숨까지 다 바치겠다.”는 열망을 지닌 돈 보스코는 토리노 거리를 뛰어다니며 청소년들을 만나고, 오라토리오에 초대하고, 그들과 동고동락하면서 자신만의 독특한 교육경험을 쌓아나가기 시작하는데, 이를 ‘예방교육’이라 일컫는다.
 
 
청소년들과 함께 성화의 길로
 
제2차 바티칸 공의회는 성화의 길이 모든 그리스도인에게 활짝 열려있음을 만천하에 공표했다. 성인이 되는 길은 더 이상 성직자나 수도자의 전유물이 아님을 명확히 했다. 성화의 길은 하느님 백성이면 누구나가 다 접근 가능한 보편적인 길임을 천명한 것이다.
 
이런 측면에서 돈 보스코는 시대를 앞서 산 성인이었다. 그는 성화의 길이 그렇게 어려운 것이 아니라는 것을 자주 강조했다. 실제로 수많은 그의 청소년들과 제자들이 돈 보스코가 제시한 아주 쉬운 방법을 통해 성덕의 길로 나아갔다. 돈 보스코는 이제 겨우 열두 살, 열세 살 된 자신의 청소년들에게 이렇게 말하곤 했다.
 
“애야, 너는 성인(聖人)이 될 수 있단다.” 깜짝 놀라 반문하는 청소년들에게 돈 보스코는 이렇게 대답하곤 했다.
 
“애야, 성인이 되는 길은 결코 어려운 일이 아니란다. 하루하루 기쁘게 사는 것, 네게 날마다 주어지는 일과를 충실히 행하는 것, 정성껏 미사에 참석하는 것, 고해성사를 잘 준비하는 것, 그것만으로도 너는 충분히 성인이 될 수 있단다.”
 
 
‘나에게 영혼을 달라’
 
돈 보스코는 1835년 키에리 신학교에 입학하였는데, 당시 신학교 복도에 걸려있던 다음의 글이 자신의 평생에 걸친 삶의 모토요 지침이 된다.
 
‘Da mihi animas cetera tolle’(나에게 영혼을 달라. 다른 모든 것은 다 가져가라).
 
돈 보스코는 “한 청소년의 영혼을 구하기 위해서라면 악마에게도 절할 용의가 있다.” “청소년들의 영혼 구원을 위한 일이 아니라면 단 한 발자국도 움직이지 않겠다.”고까지 말하면서, 청소년들의 영혼 구원을 향한 강력한 열정을 표명했다. 그뿐만 아니라 그런 영혼 구원을 위한 열정을 실제 자신의 삶 안에서 명확하게 구현하였다.
 
돈 보스코의 이러한 마음은 그가 청소년들과 함께 기도하고, 뛰놀고, 공부하고, 생활하던 ‘오라토리오’(일종의 기숙 기술학교)라 부르는 삶의 현장에서 활활 타올랐던 그의 사목적 사랑과 수많은 일들을 통해서 실천되었다.
 
이런 어록들이 눈에 띈다. “한 살레시오 회원이 영혼들을 위하여 일하다가 쓰러지면, 그때 우리 수도회는 큰 영광을 이룬 것입니다. 그때 우리 살레시오회 위에는 하늘에서 풍성한 축복이 내릴 것입니다.”
 
돈 보스코는 본능적으로 이론보다 실천을 앞세웠다. 추상적인 것보다는 구체적인 것을 강조했다. 말보다는 실제를 중요시했다. 행동 없는 신앙을 믿지 않았다. 생활과 동떨어진 복음도 믿지 않았다.
 
 
돈 보스코가 언제 기도했습니까?
 
이토록 활동의 성인이었던 돈 보스코였기에 그의 시복시성 과정에서 큰 암초를 만나게 되었는데 그것은 ‘부족한 기도’ 문제였다. 반대편 사람들은 집요하게 이 한 가지 문제를 물고 늘어졌다.
 
“일의 노예였던 돈 보스코가 언제 기도할 수 있었겠는가? 한평생 활동으로 충만했던 돈 보스코가 어떻게 기도를 할 수 있었겠는가? 기도라는 주제는 수도회 창립자에게 가장 중요한 요소인데, 돈 보스코는 그렇지 않은 것 같다. 기본적인 기도마저 소홀히 한 사람을 어떻게 성인에 올릴 수 있겠는가?”
 
그런데 놀랍게도 시복시성 조사 과정이 진행될수록 뜻밖에도 돈 보스코가 ‘기도하는 사람’이었다는 증거들이 수도 없이 쏟아져 나왔다.
 
발베리 신부는 증언했다. “돈 보스코는 삶의 순간마다 기도하고 있었다고 저는 확신합니다. 저는 그가 층계를 오르내릴 때마다 기도하는 모습을 늘 봐왔습니다. 길을 걸어가면서도 항상 기도하였습니다. 여행 중에는 원고를 수정하거나, 그렇지 않으면 항상 기도하였습니다. 언제 돈 보스코가 기도하지 않았습니까?”
 
돈 보스코는 꽤 현실적인 사람, 외적인 활동에만 전념한 사람으로 비춰지기도 한다. 그러나 사실 그는 눈에 보이지 않지만 이 세상에서 가장 값진 것들을 - 가난한 청소년의 영혼 구원, 영적 생활, 하느님과 일치하기 - 획득하기 위해 끊임없이 노력한 ‘활동하는 관상가’였다.
 
* 현재 우리나라에는 살레시오 남녀 수도회가 활동하고 있다.
 
[경향잡지, 2008년 4월호]

 

[사제의 해 기획 - 사제(司祭)의 사제(師弟)]
 
4. 돈 보스코 (1) 생애
 
청소년들의 아버지이자 스승
 
 
- 돈 보스코는 거리를 배회하는 많은 청소년들을 위해 기술학교·주일학교·기숙사 등을 세웠고, 아이들을 체벌하지 않고 사랑으로 대했다.
 
 
많은 이들이 돈 보스코(Don Bosco·1815~1888) 성인을 두고 ‘사제의 이상형’‘19세기의 가장 훌륭한 가톨릭 교육자’라고 말한다. 그는 교회에 청소년 교육 영성을 도입한 대영성가이자, 가톨릭 신앙을 수호한 호교론자였다. 근대 선교 운동의 개척자였으며, 2000여 권의 저서를 남길 정도로 문필가로서도 이름이 높았다.
 
그러나 그는 책상 앞에만 앉아있지 않았다. 청소년들 특히 가난한 청소년들을 위해, 그들의 ‘놀이터’에서 일생을 보냈고, 그 한가운데서 일생을 바쳤다.
 
보스코는 1815년 8월 16일 이탈리아 북부 토리노시의 베끼에서 아버지 ‘프란치스코’와 어머니 ‘말가리다 오키에니’사이에서 태어났다. 2살이 채 안 되어 아버지가 돌아가신 탓에 어려서부터 집안일과 들일을 거들어야 했고, 심지어는 이웃집 머슴살이까지 해야 했다.
 
많은 이들이 우울한 성장 과정은 불균형적인 인격 형성으로 이어진다고 믿고 있다. 하지만 이러한 심리학의 전통적 견해는 돈 보스코에게선 여지없이 무너진다.
 
그는 늘 쾌활했으며 재치가 넘쳤다. 상상력이 풍부했다. 게임과 오락을 즐긴 그는 친구들로부터 가수, 배우, 마술사 등으로 불렸으며 장터에서 본 광대나 곡예사를 즐겨 흉내내기도 했다. 한마디로 그는 골목대장이었다. 동시에 그는 부모로부터 물려받은 신앙에 남달리 충실했으며 기도생활에도 열심이었다.
 
결국 밝고 맑은 성격의 보스코는 1835년 신학교에 입학, 6년 뒤인 1841년에 사제 서품을 받는다. 서품 전날 밤, 보스코는 9가지 결심을 세우게 된다.
 
 
▲ 환자 방문과 같은 중대한 이유 외에는 절대로 외출하지 않겠다.
 
▲ 시간을 엄격히 사용하겠다.
 
▲ 영혼을 구하는 문제라면 언제나 어떤 일이든 마다하지 않고 기꺼이 모든 고통을 감수하고 행하며 자신을 겸손되이 낮추겠다.
 
▲ 성 프란치스꼬 살레시오의 자애와 온유를 본받겠다.
 
▲ 건강에 해롭지 않는 한 어떤 음식이 차려져 있든 항상 만족하겠다.
 
▲ 포도주를 마실 땐 물을 타서 마실 것이며 건강에 도움을 주는 정도로만 마시겠다.
 
▲ 일은 영혼을 해치는 적들에 대항할 수 있는 강력한 무기이다. 그러므로 하루 다섯 시간 내지 여섯 시간 이상은 자지 않겠다.
 
▲ 묵상과 영적 독서를 위해 매일 얼마간의 시간을 할애하겠다. 미사 전에는 최소한 15분 전에 미리 준비할 것이며, 미사가 끝난 뒤에도 15분 이상 감사경을 올리겠다.
 
▲ 고해성사를 주거나 혹은 영적 지도에 필요한 때 외에는 여성들과 절대로 이야기를 나누지 않겠다.
 
 
사제 보스코는 모든 노력을 다해 자신의 결심을 실천해 갔다. 이후 그는 우연히 소년원에 수감되어 있는 젊은이들을 방문하는 경험을 한다. 또 얼마 뒤에는 성당의 제의방에서 한 고아 소년을 만난다. 이로써 그는 청소년과 젊은이들을 위해 일생을 바치는 길로 들어선다. 당시 이탈리아에서는 많은 소년들이 집도 일거리도 없이 먹을 것을 찾아 거리를 배회하고 있었다. 돈 보스코는 뒷골목을 방황하는 소년들, 전쟁고아들, 교도소에서 만난 수많은 청소년들, 공장 소년 노동자들에게 관심을 기울이기 시작하였다. 그는 구두 제작, 양재, 목공, 인쇄 제본 등의 기술을 소년들에게 가르쳤다. 주일학교를 시작하고, 고아들과 가출 소년들을 위해 기숙사를 세웠으며, 제본소나 인쇄소 등의 직업학교와 기술학교도 시작하였다. 저술과 출판활동으로 자신의 이념을 전파하는 데도 땀을 흘렸다.
 
“나는 청소년 여러분을 위하여 일하며, 공부하고, 나의 생의 모든 것을 바칠 각오가 되어있습니다.”
 
소년들은 모두가 제각기 자신이 돈 보스코의 각별한 사랑을 받고 있다는 것을 절실히 느꼈으며, 자신들도 이에 대한 보답으로 돈 보스코를 사랑하지 않고는 견딜 수 없었다.
 
그는 강요와 체벌을 가하지 않았다. 아이들과 그 사이에는 종교적 유대감으로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었다. 그는 엄격한 규율이나 훈련을 피하고 사랑으로 대하였으며, 각자의 성장과 발전 과정을 주도면밀하게 관찰, 대응했다.
 
그는 이어 그의 청소년들 중에서 미래의 협력자들을 찾아냈다. 이들을 중심으로 1859년 살레시오회를 창설, 선교사업을 전개했으며 이 수도회는 1869년 교황청으로부터 수도회 인가를 받았고, 1871년 회헌 인가를 받았다. 이듬해에는 소녀들의 교육을 위하여 살레시오 수녀회를 창립하였고, 1876년에는 살레시오 협력자회를 설립했다.
 
땀과 기도로 일관한 일생이었다. 1888년 1월 31일 새벽 72세의 돈 보스꼬는 미소를 머금은 채, 하느님 품에 안긴다. 그는 최후의 순간 이런 말을 남겼다.
 
“모든 사람들에게 선을 행하고 아무에게도 악을 행하지 마십시오! 나의 아이들에게 천국에서 기다리겠다고 전해 주십시오.”
 
▨ 돈 보스코는 1929년 시복, 1934년 4월 시성되었다. 1950년 스페인 정부는 그를 전국 상공업학교의 수호성인으로 정하였다. 그는 청소년 교육의 선구자이며, 편집자와 교정자의 수호성인이다. 또 교황 비오 12세에 의해 ‘청소년들의 아버지요 스승’이라는 칭호를 받았다.
 
 
돈 보스코가 남긴 말
 
▲ 신부는 혼자서 천국이나 지옥에 가지 않는다. 잘 살면 그의 좋은 표양으로 구원된 영혼들과 함께 천국에 들어가게 될 것이며, 잘 살지 못하거나 악표양을 주게 되면 그 악표양으로 저주받은 영혼들과 함께 멸망하게 될 것이다.
 
▲ (돈 보스코의 건강을 염려하며 휴양을 권하는 한 부인에게) 저는 제 건강을 돌보기 위해 신부가 되지는 않았습니다.
 
[가톨릭신문, 2009년 11월 15일, 우광호 기자]

 

[사제의 해 기획 - 사제(司祭)의 사제(師弟)]
 
4. 돈 보스코 (2) 영성
 
생각과 말이 하느님과 함께 한 사제
 
 
- 돈보스코에 있어서 기도는 '교육적 기도'였고 '청원 기도'였으며 무엇보다 '삶의 기도'였다.
 
 
사제의 해를 맞아 사제 영성에 대해 이야길할 때, 돈 보스코는 특히 가깝게 다가온다. 성인은 은수자가 아니었다. 하느님을 발견하기 위해 사막으로 가지 않았다. 봉쇄 생활을 하지도 않았고, 기도를 위해 하루 15시간씩 성당에서 무릎 꿇지도 않았다. 성인은 관상가가 아니었다. 또한 그는 머나먼 이국 땅에서 희생과 절제의 생활을 하며 복음을 전하는 선교사도 아니었다. 그는 교구 신학생으로 신학교에 들어갔으며, 끼에리 대신학교 생활을 거쳐 한 교구의 사제요 사목자로서의 삶을 살았다. 본당과 교구 중심의 한국교회에서 돈 보스코가 더 가깝게 다가오는 이유다.
 
그렇다고 해서 돈 보스코가 기도나 관상을 멀리했다는 말이 아니다. 돈 보스코에 있어서 기도는 ‘교육적 기도’였고 ‘청원기도’였으며 무엇보다 ‘삶의 기도’였다. “한 아이를 위해 할 수 있는 모든 노력을 다했다”는 회원에게 그가 한 말은 “그 아이를 위해 기도했습니까?”였다.
 
교황 비오 11세는 그런 돈 보스코를 가리켜 “만사에 깊은 주의를 기울이면서도 동시에 그의 생각은 하느님과 함께 있었던 사람”이라고 말했다. 그렇게 돈 보스코는 일마저도 기도로 승화시킬 수 있는 모범을 보여주었다. 실제로 돈 보스코는 이냐시오 로욜라 성인과 대 데레사 성녀를 무척 좋아했다. 데레사 성녀로부터는 하느님의 위엄성에 대한 깊은 헌신을 이어 받았으며, 이냐시오 성인으로부터는 악에 대한 열성적 싸움과 하느님의 보다 큰 영광을 위한 노력을 이어 받았다. 특히 그는 육체적 금욕보다는 정신적 금욕을 강조했다.
 
 
실천하는 사랑의 영성
 
돈 보스코는 하느님을 두려워해야 할 분으로 보기 보다는 사랑해야 할 아버지로 보았다. 그 결과 돈 보스코의 영성은 사목을 통해 세상 안에 하느님의 사랑을 깊이 침투케 하는 ‘사목적 사랑’으로 발전한다.
 
그는 사랑의 실천을 통해서 완전한 삶에 도달하는게 가능하다고 보았다. 그래서 이론적이거나 학문적인 영성보다는 실천적 영성을 택하였다. 그의 저작들은 추상적 가르침을 담고 있지 않다. 그는 역동적인 영성을 가르쳤다. 그는 특히 젊은이들을 극진히 사랑했으며, 인간적 가치들을 존중했고, 자유를 존중했다. 또한 그는 무엇보다도 교육에 대해 깊은 관심을 가지고 있었으며, 가난한 이들에 대해 지극한 유대감을 지니고 있었다.
 
- 돈 보스코가 9살때 꿈속에서 성모님을 만난 후로 성모님은 항상 그의 곁에서 삶을 이끌어 주시는 분이었다.
 
 
그래서 그는 도시에 있었다. 운동장과 건물들 안에서 가난한 젊은이들과 만나고 함께 웃고 함께 울었다. 그의 영성은 구체적인 만남을 통해 보다 육화되었으며, 하느님과 이웃에 대한 구체적인 사랑으로 실현되었다.
 
도움이 필요한 이웃은 많다. 돈 보스코는 그 이웃 중에서 가장 도움이 필요한 이웃을 가난한 젊은이들 안에서 발견했다. 그리고 투신하였다. 그는 다음과 같이 단언하였다. “나는 여러분을 위하여 공부하고, 여러분을 위하여 일하며, 여러분을 위하여 살고, 여러분을 위하여 나의 생명까지 바칠 각오가 되어 있습니다.” 사랑, 이것은 한 사제로서 그가 걸어간 사도적 활동이었고, 자신을 바쳐 그리스도를 따르는 구체적인 방법이었다.
 
 
성모신심
 
9살의 돈 보스코는 꿈을 꿨다. 넓은 마당에 수많은 아이들이 놀고 있었다. 그때 성모님이 나타나 이렇게 말씀하셨다.
 
“여기가 바로 네 일터이다. 겸손하고 강인하고 굳건한 사람이 되도록 하여라.” 돈 보스코가 울면서 무슨 뜻인지 가르쳐 달라고 애원하자, 성모님은 “때가 되면 모든 것을 깨닫게 될 것이다”라고 말씀하셨다.
 
돈 보스코에게 있어서 성모님은 항상 함께 하시며 그의 삶을 이끌어 주시는 분이었다. 성모님에 대한 그의 신심은 어려서부터 그의 어머니께 깊이 영향을 받았다. 신학교에 입학하기 전날 그의 어머니는 “네가 태어났을 때 나는 너를 성모님께 봉헌했다. 이제 나는 네게 온전히 그분의 것이 되라고 당부하고 싶구나”라고 말씀하셨다.
 
돈 보스코는 어머니의 가르침을 따라 삼종기도를 통하여 하루에 세 번 성모님께 인사를 드리는 습관을 지니고 있었다. 또한 그는 모든 일의 시작에서 마칠 때까지 즉 닭이 우는 새벽, 일터에서, 지친 몸을 이끌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서 성모님께 기도를 드렸다.
 
결국 이러한 성모신심은 그의 모든 생각과 말과 행동으로 드러나게 된다. 실제로 돈 보스코에게 있어서 성모님은 살레시오회 모든 활동의 창립자였다. 이는 그의 글 속에는 잘 나타나 있다. “성모님께서는 우리가 하나의 수도회를 시작하기 바라십니다. 우리는 살레시오 회원이라고 불리우게 될 것입니다.”“우리 수도회를 원하시는 분은 바로 성모님이십니다.”“성모 마리아께서는 우리 사업의 창립자이시요 후원자가 되실 것입니다.”
 
세월이 흐르고 건강이 나빠짐에 따라 돈 보스코는 점점 더 ‘도움이신 마리아’께 의탁했다. 사람들이 그에게 기적을 청할 때. 그는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우리의 기도를 함께 성모님께 드립시다. 정녕코 치유를 해주시고, 들어 주시고, 이해해 주시며, 동정을 베풀어 주시는 분은 성모님이십니다. 그분께서는 하늘에서 응답해 주십니다. 나는 단지 그분께 기도할 따름입니다.”
 
성인이 돌아가신 후 침대 머리맡의 성모상 아래 홈에서 4000장이 넘는 쪽지가 발견되었다. 모두 다 도움이신 마리아께 드리는 청원기도문이었다.
 
 
영혼의 구원
 
돈 보스코는 ‘포교적’ 사랑을 실천하였고 가르쳤다. 돈 보스꼬는 그가 가장 좋아하던 “하느님의 큰 영광을 위하여” 라는 말에다 “영혼들의 구원을 위하여” 라는 말을 종종 덧붙이곤 했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
 
“만일 제가 한 영혼을 구하는 데 성공한다면 저는 제 자신의 영혼을 구하는 것이기도 하다는 걸 확신합니다.”“우리의 영혼을 구하고 또한 다른 사람들의 영혼을 구하는 것, 이것이 바로 우리 회의 목적입니다.”
 
 
돈 보스코는 1929년 시복, 1934년 4월 시성되었다. 1950년 스페인 정부는 그를 전국 상공업학교의 수호성인으로 정하였다. 그는 청소년 교육의 선구자이며, 편집자와 교정자의 수호성인이다. 또 교황 비오 12세에 의해 ‘청소년들의 아버지요 스승’이라는 칭호를 받았다.
 
 
돈 보스코가 남긴 말
 
▲ 여러분이 젊은이라는 이유만으로 나의 사랑을 받기에 충분합니다.
▲ 나는 여러분을 위하여 공부하고, 여러분을 위하여 일하며, 여러분을 위하여 살고, 여러분을 위하여 나의 생명까지 바칠 각오가 되어 있습니다.
▲ 기쁨 중에 주를 섬기십시오. 달리고 뛰고 소리치고, 죄만 짓지 않는다면 무엇이든 좋습니다.
 
[가톨릭신문, 2009년 11월 22일, 우광호 기자]

 

돈보스코 성인 유해 한국 순례
 
성인 영성 가까이서 만날 특별한 기회
 
 
 
- 지난 7월 27일 온두라스 테구시갈파에 위치한 성 미카엘 대천사 대성당에 모인 신자들이 돈보스코 성인 유해 모형을 지켜보고 있다. 한국은 캐나다에 이어 21번째 순례국으로 오는 11월부터 순례가 시작된다.
 

“영적으로나 현실에서 어려움이 있을 때, 성인(聖人)들께 도움을 청하십시오. 그분들은 항상 우리를 도와주실 준비가 돼 있습니다.”
 
청소년들의 아버지이자 스승, 돈보스코(성 요한 보스코) 성인의 유해가 오는 11월 한국에 온다.
 
이번 성인 유해 순례는 살레시오회가 2015년 수도회 창립자 돈보스코 성인 탄생 200주년을 맞아 마련했다. 2009년 7월 칠레에서부터 시작된 성인 유해 순례는 약 5년에 걸쳐 전 세계 134개국으로 이어질 계획이다. 한국은 캐나다에 이어 21번째 순례국이다.
 
특히, 이번 성인 유해 순례는 신자들이 성인의 유해에 찾아가는 일반적인 순례와 달리, 성인의 유해가 신자들을 직접 찾아온다는 점에서 더 많은 이들이 성인의 영성을 더욱 가까이서 만나는 계기가 될 것으로 기대를 모은다.
 
한국에서는 서울 신길동 살레시오회 관구관에 이어 광주 신안동 수도원, 살레시오 중고등학교(광주 일곡동 수도원), 예수의 까리따스 수녀회 광주 관구관, 서울 신길동 살레시오 수녀회 관구관, 서울 구로3동성당, 서울 대림동 수도원 등에서 성인의 유해를 만날 수 있다.
 
또한 이번 순례를 통해 성인의 유해를 찾아 기도하는 모든 이들에게 전대사 특전이 주어진다. 전대사를 받기 위해선 고해성사에 이어 돈보스코 성인의 유해 앞에서 봉헌되는 미사에 참례해 영성체 하고, 교황의 지향(2010년 11월 교황의 기도지향)과 함께 주님의 기도, 사도신경, 돈보스코 성인과 함께 드리는 기도를 바치면 된다.
 
아울러 살레시오회는 성인의 유해가 순례를 하는 동안 돈보스코 성인의 생애와 영성을 되돌아보는 기념특강을 실시한다. 특강은 11월 1~16일 국내 각 순례지에서 매일 다른 주제로 진행된다. 특강기간 중에는 서울대교구 총대리 염수정 주교(11월 4일)와 광주대교구장 김희중 대주교(11월 8일), 서울대교구 서서울 지역 교구장 대리 조규만 주교(11월 14일) 주례로 미사도 봉헌된다.
 
국내 성인 유해 순례를 담당한 양승국 신부(살레시오회)는 “요즘 우리 가정에서 자녀 교육에 어려움을 호소하는 경우가 많다”며 “이번 유해 순례가 그분께 도움을 간구하고, 그분의 영성 안에서 청소년 문제에 접근할 수 있는 기회가 되길 바란다”고 밝혔다.
 
한편, 이번 유해 순례에 앞서서는 살레시오회 제9대 총장 파스칼 차베스(Pascual Chavez) 신부가 방한할 예정이다. 10월 14일 4박 5일 일정으로 방한하는 파스칼 신부는 광주 살레시오 중고등학교와 서울 신길동 살레시오회 관구관 등에서 각각 ‘살레시오 가족 영성의 날’을 참관, 미사를 집전할 예정이다.

 

 

살레시오회 설립자 성 요한 보스코의 생애와 영성
 
청소년들의 아버지요 스승
 
 
'청소년들의 아버지이자 스승'으로 불리는 돈 보스코 성인.
 
 
"가난한 청소년들을 위해 나의 마지막 숨까지 다 바치겠다."
 
살레시오회 설립자 성 요한 보스코(1815~1888, 이하 돈 보스코)는 청소년들의 영혼 구원에 혼신을 기울였고, 세상은 그를 '19세기 역사상 가장 훌륭한 교육자'라고 부른다.
 
그는 책상 앞에만 앉아있지 않았다. 청소년들, 특히 가난한 청소년들의 '놀이터'에서 자신의 한 삶을 바쳤다.
 
1815년 8월 16일 이탈리아 북부 토리노시 베키에서 가난한 농부의 아들로 태어난 돈 보스코는 어려운 가정형편에도 늘 밝고 명랑했다. 그는 장터에서 본 광대나 곡예사를 곧잘 흉내 내 친구들 사이에서 가수ㆍ배우ㆍ마술사로 통했을 정도로 밝게 성장했다.
 
그의 어머니는 가난 속에서도 자녀 종교교육에 각별한 관심을 기울였다. 어머니 영향을 받은 그는 훗날 수많은 역경 속에서도 하느님 뜻을 받아들이며 기쁨과 희망 속에서 살아가는 법을 배웠다.
 
돈 보스코는 1835년 신학교에 입학, 6년 뒤인 1841년 토리노교구에서 사제품을 받는다. 사제가 된 후 가장 먼저 한 일은 소년원에 수감된 청소년들을 찾아다니는 일이었다. 당시 이탈리아는 공업화의 소용돌이 한가운데 있었고, 시골에서 일자리를 찾아 모인 청소년들은 열악한 환경 속에 살면서 쉽게 범죄에 빠졌다. 교도소는 이런 젊은이들로 넘쳐났다. 이런 현실에 안타까움을 느낀 돈 보스코는 뒷골목을 방황하는 전쟁 고아들과 공장의 어린 노동자들, 재소자들에게 관심을 기울였다.
 
돈 보스코는 이들을 위한 주일학교와 기숙사를 세웠고 직업학교와 기술학교도 열었다. 학교에서는 구두 제작과 양재, 목공, 인쇄 및 제본 등을 가르쳤다. 그들에게 자립할 수 있는 힘을 길러주기 위해서였다.
 
돈 보스코는 "사랑은 오래 참고…, 모든 것을 믿어주고 모든 것을 바라고, 모든 것을 견디어 냅니다"(1코린 13, 4~7)라는 바오로 사도의 말씀에 바탕을 두고 오직 따뜻한 사랑과 관심으로 청소년들을 대했다. 청소년들은 돈 보스코의 각별한 사랑에 감동하며 점차 마음의 문을 열었다. 삶의 무게에 지쳐있던 그들은 돈 보스코의 사랑에 힘입어 마음속 깊이 숨겨져 있던 열정과 희망, 사랑을 찾아냈다. 돈 보스코는 더 많은 이들과 이 체험을 나누기 위해 1859년 살레시오회를 설립, 1869년과 1871년 교황청으로부터 수도회 인가와 회헌 인가를 받았다. 1872년에는 살레시오 수녀회를, 1876년에는 살레시오 협력자회를 설립했다.
 
오직 청소년들을 위해 땀과 기도로 일관한 일생이었다. 1888년 1월 31일 새벽, 73살의 돈 보스코는 미소를 머금은 채 하느님 품에 안겼다. 그는 "나의 아이들에게 천국에서 기다리겠다고 전해 주십시오"라는 말을 남겼다.
 
돈 보스코는 1929년 시복, 1934년 4월 시성됐다. 스페인 정부는 1950년 청소년 교육의 선구자였던 그를 전국 상공업학교의 수호성인으로 정했고, 교황 비오 12세도 그를 일러 '청소년들의 아버지요 스승'이라고 불렀다.
 
[평화신문, 2010년 10월 17일, 이서연 기자]

 

한국 순례 돈 보스코 유해 환송예식에서 다짐
 
"우리 모두 젊은이들의 친구가 되자"...22번째 순례국 태국으로 떠나
 
 
돈 보스코 유해가 서울 대림동 살레시오수도원을 떠나 22번째 순례국가인 태국으로 떠나고 있다. 한국 살레시오 가족들이 성인을 떠나보내는 아쉬움에 숙연히 성인 유해 운구를 지켜보고 있다.
 
 
"이제까지 저를 사랑해주셨던 것처럼 살레시안으로서 회헌을 잘 지키며 서로 사랑하며 살아주십시오. 하늘나라에서 여러분 모두를 기다리겠습니다."
 
유언 낭독이 이어지고 17일간에 걸친 한국 순례를 마친 성 요한 보스코(1815~1888)의 유해는 17일 22번째 순례국인 태국으로 떠났다.
 
이날 서울 대림동 살레시오수도원에서 거행된 환송예식을 끝으로 성인 유해의 한국 순례가 마무리되자 한국 살레시오 가족은 나라 꽃 무궁화를 봉헌하며 기쁨과 아쉬움 속에서 성인 유해를 떠나보냈다.
 
환송예식에서 고 이태석 신부가 2008년 살레시오회 수도자와 신학생들 20여 명을 모아 결성한 존스밴드는 김선오(살레시오회 전국 성소담당) 신부 지휘로 '주 찬미하라(Laudate dominum)'와 '성인들의 행진(Saints go marching in)', '여왕이시며(Salve Regina)' 등을 연주하고 돈 보스코 유해 순례의 기쁨과 감사함을 전했다.
 
살레시오회 한국관구장 남상헌 신부는 이날 성인 유해 한국 순례를 기념해 제작한 돈 보스코 성인 동상을 남ㆍ녀수도회 14개 공동체에 전달했다.
 
1954년 이 땅에 살레시오회가 파견된 후 처음 한국을 찾은 성인 유해 순례는 돈 보스코의 마음과 삶의 결정체인 '예방교육'을 모두에게 일깨우고, 젊은이들이 드나들 '하늘나라의 문'이 되기를 원하고 젊은이들을 위해 목숨을 바친 돈 보스코처럼 살아가겠다는 약속을 새롭게 하는 계기가 됐다.
 
'청소년들의 아버지요, 스승이요, 벗'으로 이 땅에 온 돈 보스코 성인 유해는 살레시오회와 살레시오수녀회, 예수의 까리따스수녀회 국내 8개 공동체를 순회하며 모두의 가슴에 하느님에 대한 사랑과 열정을 다시 불러 일으켰고, 청소년들에 대한 관심을 환기시켰다.
 
서울ㆍ광주 지역 각 수도 공동체별로 이뤄진 돈 보스코 유해 참배엔 3만 4000여 명이 몰려 성황을 이뤘다. 서울 신길동 관구관(3000명)을 시작으로 광주 신안동ㆍ일곡동수도원(6500여 명), 살레시오여자중ㆍ고(2000여 명), 광주 예수의까리따스수녀회 관구관(2000여 명), 서울 살레시오수녀회 관구관(2500여 명) 서울 구로3동성당(1만 명), 서울 대림동 수도원(3000여 명) 등에 몰렸다. 고해성사를 받으려는 신자들이 몰려 수사신부 10여 명이 성사를 베풀어야 할 정도였다. '자의 반 타의 반'으로 고해성사를 받고 냉담을 푸는 일도 숱했다.
 
또한 서울 신길동 관구관에서 염수정(서울대교구 총대리) 주교, 광주 일곡동수도원에서 김희중(광주대교구장) 대주교, 서울 구로3동성당에서 조규만(서울대교구 서서울지역 교구장 대리) 주교 주례로 미사가 봉헌되고, 돈 보스코의 생애와 영성, 위대한 교육자 돈 보스코, 돈 보스코와 신자들의 도움이신 마리아, 돈 보스코의 예방교육 영성, 활동하는 관상가 돈 보스코 등을 주제로 그 뜻을 되새겼다.
 
일시 귀국했다가 유해를 참배한 교황청립 아욱실리움대학 교수 장향주(아우실리아, 살레시오수녀회) 수녀는 "성인께서 이 땅을 찾아주셔서 감개무량하다"며 "성인께서는 한국을 떠나지만 항상 우리와 함께해 주실 것을 믿으며, 유해를 참배한 우리 모두는 젊은이들의 친구가 되고 돈 보스코의 협력자가 될 것이다"고 다짐했다.
 
환송예식에 함께한 전혜숙(58, 서울 송파동본당)씨도 "가난한 청소년을 위해 펼치신 돈 보스코 성인의 많은 활동을 듣고 감명을 받았다"며 "성인께서 보여주신 사랑을 본받아 열심히 봉사에 참여하며 살겠다"고 말했다.
 
남 신부는 환송예식 강론에서 "돈 보스코 성인이 우리 곁에 오셔서 젊은이들이 우리의 현재이고 미래이며 모든 것이라는 영성을 다시 한번 깨닫게 해주셨다"면서 "성인이 우리에게 보여주신 사랑과 영성을 기억하며 우리도 젊은이들을 위해 우리의 삶 속에서 매순간 실천하고 노력하며 살아가야 한다"고 당부했다.
 
  한편 동아시아 - 오세아니아 관구군 순례는 한국을 시작으로 △ 태국(18일~12월 4일) △ 필리핀(12월 5~2011년 1월 15일) △ 베트남(1월 16일~2월 1일) △ 일본(2월2~18일) △ 동티모르(2월19일~3월 7일) △ 오스트레일리아(3월 8일~24일) △ 중국 홍콩ㆍ마카오(3월 25일~4월 10일) △ 미얀마(4월11~30일) 등 모두 9개국에서 이뤄진다. [평화신문, 2010년 11월 28일, 오세택 기자, 이서연 기자]
 
 
돈보스코 성인 유해, 17일 국내 순례 일정 마치고 태국으로
 
큰 사랑 마음에 새겨 기억할게요
 

- 한국을 찾은 돈보스코 성인의 유해는 17일 국내 순례 일정을 마치고 다음 순례지인 태국으로 떠났다.
 
 
성인 탄생 200주년 앞두고 살레시오회가 마련한 순례
전국서 4만여 명 찾아 기도
 
 
‘나는 여러분을 이 땅에 남겨 두고 떠나지만 그건 잠시뿐입니다. 하느님의 무한한 자비로 어느 날 영원한 행복의 나라에서 모두 만나게 되기를 바랍니다.’(돈보스코의 유언서 중)
 
이 땅을 찾았던 돈보스코 성인 유해가 17일 국내 순례 일정을 마치고 다음 순례지인 태국으로 떠났다.
 
이번 성인 유해 순례는 살레시오회가 2015년 수도회 창립자 돈보스코 성인 탄생 200주년을 앞두고 마련했다. 1~17일, 총 17일간의 한국 순례 일정을 마치고 살레시오회 대림동 수도원에서 열린 유해 환송 예식에는 수도회 소속 신부, 수사를 비롯한 살레시오 공동체 식구들과 순례객 등 약 300여 명이 참례해 성인 유해의 마지막 길을 배웅했다.
 
이날 예식에서는 제1독서로 돈보스코 성인의 유서를 낭독하며 평생토록 청소년만을 생각한 성인의 영성을 되새기는 시간이 마련됐다.
 
또 한국 살레시오 가족들과 청소년들을 축복하고 보호해주는 성인의 사랑을 기억하며 한국의 국화인 무궁화 봉헌도 이어졌다.
 
살레시오회 한국관구장 남상헌 신부는 “우리는 오늘 이 자리에서 돈보스코 성인께 드리는 감사와 약속, 두 가지를 기억해야 한다”며 “이번에 이 땅에 오시어 우리의 현재이자 미래의 모든 것이라 할 수 있는 젊은이들을 위해 일생을 바친 성인의 영성이 얼마나 대단한지 일깨워주고, 살레시안들로 하여금 다시 마음을 모으게 해주심에 감사드리며 하늘에서 기다리겠다는 성인의 유언을 따라 우리도 하늘나라에 가서 성인을 꼭 만나겠다고 약속하면 좋겠다”고 말했다.
 
살레시오회 신월동 수도원장 겸 나눔의 집 원장 김해영 신부는 “이번 성인 유해 순례 동안 우리 모두 행복한 시간을 보냈고, 성인께선 우리 안에 계속 살아계실 것”이라며 “성인의 사랑이 청소년, 부모, 교육자 등 모든 이들에게 퍼져나가길 바란다”고 밝혔다.
 
순례객 장경은(세실리아)씨도 “이번 순례를 통해 성인께서 베푸신 사랑이 얼마나 크신지 절실히 깨달았다”며 “성인께서 보여주신 사랑의 활기가 한국교회 안에 퍼져나가 우리 청소년들에게 머물러 있길 바란다”고 전했다.
 
특히 이번 성인 유해 순례는 신자들이 성인의 유해를 찾아가는 일반적인 순례와 달리, 성인의 유해가 신자들을 직접 찾아온다는 점에서 더 많은 이들이 성인의 영성을 더욱 가까이서 만나는 계기가 됐다.
 
아울러 전국에서 4만여 명이 성인의 유해를 찾아 기도하는 등 성인의 영성을 닮아가려는 발걸음이 끊임없이 이어졌다.
 
이번 성인 유해 순례를 담당했던 살레시오회 양승국 신부는 “생각했던 것과 달리 많은 분들이 성인을 만나고 성인의 은총을 받았다”며 “이번 성인 유해 순례는 순례객들에게 신앙 생활의 변화와 형제애적 일치를 얻게 하는 뜻 깊은 기회가 됐다”고 말했다. [가톨릭신문, 2010년 11월 28일, 이우현 기자]

 

[영성으로 읽는 성인성녀전] (75) 성 요한 보스코 (1)
 
‘고아들의 아버지’로 평생을 몸 바쳐
 
정영식 신부 · 효명고등학교 교장, 최인자 · 엘리사벳 · 선교사
 
 
이탈리아 토리노의 한 무덤 비석에는 ‘고아들의 아버지’라는 문구가 새겨져 있다. 비명(碑銘)은 지극히 간단하지만 단순히 몇 마디 인간 언어로 표현할 수 있는 그런 삶을 살다 가신 분이 아니다.
 
성 요한 보스코(St. Joannes Don Bosco, 축일 1.31). 교회에 어떤 위기가 생기면 하느님께서는 반드시 어느 성인을 보내셔서 그 위험을 선처하신다. 또 아무리 반대자가 주님의 계획을 파괴하려고 해도 결국 실현하신다. 요한 보스코도 이러한 하느님의 일을 위한 도구였다.
 
요한 보스코는 1815년 8월 16일 북 이탈리아 토리노교구의 카스텔누오보 근처 작은 마을 베치에서 태어났다. 아버지 프란치스코 루이지는 근면하고 열심한 신자였고 어머니 마르가리타도 역시 덕이 충만한 신심 깊은 여인이었다.
 
그런데 아버지가 급성폐렴에 걸려 34세라는 젊은 나이로 세상을 떠나게 된다. 어머니 마르가리타는 남편이 임종 시에 유언한 “자녀들을 부탁하오. 특히 어린 요한을….”이라는 말을 잊지 않고 요한을 훌륭한 인물로 키우기 위해 밤낮으로 고심했다. 특히 자녀 신앙교육에 대한 열성이야말로 당시 모든 사람들이 “마르가리타는 그리스도교를 믿는 모든 어머니들의 모범이다.”라며 칭찬할 정도였다. 그 때문이었을까. 요한 보스코는 신심깊은 소년으로 자라났다. 9세 때 처음으로 예수의 발현을 보고 성모 마리아를 지도자로 주신다는 고마운 말씀을 들었다. 이후 요한 보스코는 평생동안 성모께 무한한 신뢰를 드렸고, 이는 훗날 수도회 창립 등의 열매로 이어진다.
 
소년 요한 보스코는 사제가 되기로 마음을 먹는다. 하지만 쉬운 일이 아니었다. 가난 때문에 12세부터 14세까지 2년간 숙부의 집에서 일을 도우며 지냈는데, 이 숙부가 사제의 길을 열어주었다. 신학교에서 6년간 철학과 신학을 연마하는 동안 그는 참으로 완덕을 염원하며 열심히 생활했다. 하지만 그는 완덕에 대한 자신의 열정이 겉으로 드러나지 않도록 조심했다고 한다. 결국 요한 보스코는 1841년 4월 5일 사제품을 받는다. 첫 미사 때 어머니 마르가리타는 사랑하는 아들을 하느님께 봉헌한 즐거움으로 눈물을 흘렸다. 그리고 아들에게 말했다.
 
“너는 오늘부터 하느님의 것이 되었지만, 사제의 길은 십자가의 길이라는 것을 잠시도 망각하지 말아라. 지금은 이 말을 깨닫지 못하겠지만 언젠가 반드시 깨달을 날이 올 것이다. 오늘부터는 어머니인 나를 염려하지 말고 다만 사람들의 영혼을 위해 열심히 일해라. 나는 네가 항상 나를 위해 기도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으므로 이제는 만족한다.”
 
요한 보스코에게는 훗날 성인이 되는 토리노의 성 요셉 카파소, 성 요셉 베네딕토 코톨렌고라는 두 친구가 있었다. 두 친구는 요한 보스코에게 박애 사업에 일생을 바치라고 권고했다. 요한은 그 충고에 응해 즉시 가련한 고아들을 모아 함께 생활하며 교리와 생활 자립을 위한 기술을 가르쳐주기 시작했다. 이때부터 요한 보스코는 고아들의 아버지로 살아간다. 사실 그의 아이들은 온순한 아이들이 아니었다. 요한 보스코가 그들과 함께 생활하자 사람들은 ‘요한 보스코의 왈패자식들’이라고 불렀을 정도였다. 하지만 아이들은 곧 덕이 충만한 성인의 감화를 받고 모두 온순한 아이들이 된다. 요한 보스코는 여기서 더 나아가 양로원이나 교도소 등도 방문하고 그곳에 있는 소외된 이들을 위로하고 도와주며 하느님의 품으로 인도했다.
 
1864년 고아원이 건설된 후부터 수용한 아이의 수는 매년 급증하기 시작했다. 그러자 요한 보스코는 수도원을 창설해 ‘살레시오 성 프란치스코의 신심회’라고 이름 짓고, 1869년 12월 18일 제자 몇 명을 데리고 당시 교황 비오 9세를 알현, 인가를 청했다. 다시 1875년 8월 5일에는 살레시오 수녀원도 창설했다. 이 두 수도원은 사람들에게 그리스도교적 교육을 베풀어 천국의 영원한 행복으로 인도했으며, 먹고 살아갈 길을 열어 주는 등 현세의 행복까지도 배려했다. 이 두 수도원이 얼마나 당시 사회에 유익이 되었고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혜택을 받았는지 측량하기 어려울 정도다. 이후 전 세계적으로 이 수도원의 혜택을 받은 이들은 또 얼마나 많은가.
 
성인은 1888년 1월 31일 아침 삼종기도와 함께 고요히 세상을 떠났다. 그러나 그의 많은 공적은 영원히 빛날 것이고, 오늘날도 그 위대한 사업은 그의 애제자인 살레시오회원들의 손을 통해 계속될 것이다. [가톨릭신문, 2011년 4월 10일]
 
 
[영성으로 읽는 성인성녀전] (76) 성 요한 보스코 (2)
 
“저에게는 천국의 열쇠가 필요합니다”
 
 
요한 보스코처럼 우리에게 가까이 다가오는 성인도 드물다. 지극히 인간적이었으며, 예민한 감수성으로 청소년과 소외된 이웃을 사랑했고, 교회를 자신의 몸처럼 사랑했다.
 
그는 ‘가까이 하기엔 너무 먼 당신’이 아니다. 하느님을 발견하기 위해 사막으로 가지 않았다. 봉쇄 생활을 하지도 않았고, 기도를 위해 하루 몇 시간씩 성당에서 무릎 꿇지도 않았다. 성인은 소위 교회 안에서 일반적으로 이야기하는 관상가가 아니었다. 또한 그는 머나먼 이국땅에서 희생과 절제의 생활을 하며 복음을 전하는 선교사도 아니었다.
 
그는 교구 신학생으로 신학교에 들어갔으며, 끼에리 대신학교 생활을 거쳐 한 교구의 사제요 사목자로서의 삶을 살았다. 본당과 교구 중심의 한국교회에서 요한 보스코가 더 가깝게 다가오는 이유다.
 
그렇다고 해서 요한 보스코 성인이 기도나 관상을 멀리했다는 말은 아니다. 요한 보스코에게 있어서 기도는 ‘교육적 기도’였고 ‘청원기도’였으며 무엇보다 ‘삶의 기도’였다. 한 회원이 “저는 한 아이를 위해 할 수 있는 모든 노력을 다했다”고 말했을 때 성인이 한 말은 “그 아이를 위해 기도했습니까?”였다.
 
교황 비오 11세는 그런 요한 보스코를 가리켜 “만사에 깊은 주의를 기울이면서도 동시에 그의 생각은 하느님과 함께 있었던 사람”이라고 말했다. 그렇게 요한 보스코는 일마저도 기도로 승화시킬 수 있는 모범을 보여주었다. 실제로 요한 보스코는 이냐시오 로욜라 성인과 대 데레사 성녀를 무척 좋아했다. 데레사 성녀로부터는 하느님의 위엄성에 대한 깊은 헌신을 이어 받았으며, 이냐시오 성인으로부터는 악에 대한 열성적 싸움과 하느님의 보다 큰 영광을 위한 노력을 이어 받았다. 특히 그는 육체적 금욕보다는 정신적 금욕을 강조했다.
 
그의 삶을 처음부터 찬찬히 들여다 보자. 1815년에 탄생하셨고 1881년에 선종하셨으니까 65세를 사셨다. 인생은 아주 단순하다. 우리 모두는 어린 시절 부모님으로부터 가장 큰 영향을 받는다. 요한 보스코도 예외가 아니다. 가난했다. 아버지는 일찍 돌아가셨고, 어머니를 어린 시절부터 모시고 살았다. 어머니는 신심 깊은 분이셨고, 늘 기도 안에서 생활하시는 분이었다. 요한 보스코는 당연히 그런 어머니의 모습을 통해 신심을 몸으로 배울 수 있었고, 영적인 인간으로 성장할 수 있었다. 요한 보스코가 9세 때 예수님의 발현을 체험하는 것도 이러한 가정환경 때문이 아닐까 싶다.
 
어린 요한 보스코는 발현하신 예수님으로부터 성모님께서 앞길을 비춰 주실 것이라는 말씀을 듣는다. 어린아이는 듣는 대로, 보는 대로, 체험한 대로 행동하는 법이다. 어린 시절에 다가온 이러한 체험은 요한 보스코의 마음에 평생동안 각인되었을 것이다. 요한 보스코가 평생동안 성모님께 온전히 의탁하는 삶을 사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실제로 요한 보스코는 청소년 시기를 보내면서 줄곧 성모님 안에서 덕행과 극기 금욕의 삶을 잘 살았고, 더 나아가 성소에 대해서도 깊이 생각하기 시작했다. 이 시기에 요한 보스코는 결정적으로 천사같은 인물을 만나는데 바로 숙부였다. 가정형편이 어려웠던 요한 보스코는 숙부 집에서 일을 도와주며 살고 있었는데, 그 숙부가 요한 보스코의 그릇이 큼을 알아보았다. 사제의 길을 뒷바라지해 줄 필요가 있겠다고 생각한 숙부는 그 길로 한 사제에게 요한 보스코를 보냈다. 감수성 많고, 모든 것을 스펀지처럼 받아들이는 청소년기에 사제와 함께 생활한 것은 행운이었다. 성직자와의 삶은 어린 시절부터 영성적 성향으로 형성되어오던 요한 보스코의 내면 형성을 더욱 깊게 했을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아름다운 일화를 발견하게 된다. 요한 보스코와 함께 생활하던 사제가 얼마 후 죽음을 앞두게 됐다. 그는 죽으면서 요한 보스코에게 작은 금고와 열쇠를 물려준다. 금고 안에 무엇이 들어있었는지 지금으로서는 알 수 없지만, 요한 보스코가 살아가는데 필요한 물질적인 것들이 들어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 이때 어린 나이의 요한 보스코가 보인 반응이 놀랍다.
 
“저에게는 현세의 열쇠는 필요 없습니다. 천국의 열쇠가 필요합니다.”
 
요한 보스코는 그렇게 어린 시절부터 물질적인 것이 아닌 초자연적인 것의 의미를 알고 있었다. 그런 요한 보스코가 20세가 됐다. 건장한 청년으로 자라났다. 그가 갈 곳은 오직 한 곳뿐이었다. 바로 신학교였다. [가톨릭신문, 2011년 4월 17일]
 
 
[영성으로 읽는 성인성녀전] (77) 성 요한 보스코 (3)
 
“초자연적 삶 이끄는 참된 목자가 되어라”
 
 
6년 후. 신학교에 입학한 요한 보스코가 오랜 학업생활을 마치고 사제로 막 서품되었을 때였다. 어머니가 서품 받은 아들 신부에게 이렇게 말한다.
 
“너는 인간적으로는 내 아들이지만, 이제부터는 하느님의 아들이다. 사제의 길은 십자가의 길이다. 오늘부터는 나를 염려하지 말고 하느님께서 보고 계시는 만인의 영혼을 위해서 살아라. 만인이 초자연적인 삶을 살아갈 수 있도록 이끄는 참된 목자가 되어라. 그런 일을 하면 너는 나를 위해서 늘 기도하고 있는 것이고, 또한 내 곁에 있는 것이다.”
 
참으로 감동적인 말씀이다. 요한 보스코의 어머니는 참으로 영적이고 초자연적인 삶의 방식을 따랐던 분이셨음을 알 수 있다.
 
사실 세속적 차원에서는 모든 것이 ‘내 것’이다. 내가 살고 있는 집도 내 집이고, 내가 입고 있는 옷도 내 옷이다. 하지만 초자연적 의미에서는 내 집이 내 집이 아니고 내 옷이 내 옷이 아니다. 하느님의 집이고, 하느님의 옷이다.
 
어머니는 참으로 영적인 말씀을 이제 막 사제의 길을 걷기 시작한 아들에게 들려준 것이다. 그런데 나는 단순히 어머니의 말씀이 아니라 신적 신비이신 하느님께서 어머니를 통해서 전해주신 말씀이라고 믿는다. 더 확장시켜서 말하자면 이는 어머니의 말씀이 아니라, 어머니 중의 어머니이신 성모님의 말씀이다. 어머님의 말씀은 바로 어린 시절부터 요한 보스코의 앞길을 비춰주신 성모님의 말씀이었다.
 
이후 요한 보스코는 더욱 확고한 마음으로 하느님의 뜻을 하나둘 성취해 나간다. 그런데 이때 요한 보스코에게 두 명의 천사가 나타난다. 여기서 잠깐 생각해 볼 점은 인간은 ‘나 홀로’ 성장할 수 없다는 점이다. 문제는 하느님께서 끊임없이 보내주시는 천사를 우리가 받아들이느냐 그렇지 못하느냐는 것이다.
 
친구는 요한 보스코에게 “자네가 박애사업을 위해 투신했으면 좋겠네”라고 말했다. 요한 보스코는 늘 깨어 있었다. 그래서 두 천사들의 말을 적극 실천으로 옮긴다. 여기서 친구들이 왜 박애사업에 대해 강조했는지 당시 시대상황을 짚어보고 넘어가자.
 
요한 보스코는 르네상스(Renais sance)의 마지막 시기를 살았던 인물이다. 당시 세계는 변화와 변혁으로 소용돌이 치고 있었다. 르네상스 사상가들은 중세를 인간의 창조성이 철저히 무시된 ‘암흑시대’라고 봄으로써 문명의 부흥과 사회의 개선은 고대 문화의 부흥을 통하여 가능하다고 주장했다. 극단적으로는 근세의 시작은 중세로부터가 아닌 고대로부터라 주장하고, 중세를 지극히 정체된 암흑시대라고 혹평하였다. 하지만 최근 연구결과에서는 르네상스의 싹을 고대에서 구할 것이 아니라 중세에서 찾아야 한다는 주장도 크게 대두되고 있다.
 
중세는 하느님 중심의 신학이 세상 안에서 여러 방면에 걸쳐 좋은 역할을 많이 한 시기였다. 물론 약간의 교만한 모습도 있었기에 여러 문제점이 생겼지만, 당시는 사회 경제 문화적 차원에서 하느님 신앙의 꽃을 찬란히 피운 시기였다. 르네상스는 중세의 모든 것을 부정하고 새로운 토대 위에서 서는 것이 아니라 중세라는 큰 거인의 등에 올라타 먼 곳을 내다보는 난쟁이라 할 수 있다.
 
이 시기에 위대한 인물들이 많이 탄생한다. 「신곡」을 쓴 단테(Alighieri Dante, 1265~1321), 「데카메론」을 저술한 보카치오(Giovanni Boc caccio, 1313~1375), 「군주론」의 저자 마키아벨리(1469~1527), 이상적 국가상을 그린 명저 「유토피아」를 쓴 영국의 성인 토머스 모어(Thomas More, 1477~1535) 등이 르네상스를 대표하는 인물들이다. 또 과학자 코페르니쿠스(Nicolaus Copernicus, 1473~1543), 케플러(Johannes Kepler, 1571~1630), 갈릴레오(Galileo Galilei, 1564~1642), 철학자인 브루노(Giordano Bruno, 1548~1600), 베이컨(Francis Bacon, 1561~1626), 예술가인 라파엘로(Raffaello Sanzio, 1483~1520), 미켈란젤로(Michelangelo Buonarroti, 1475~1564), 레오나르도 다빈치(Leonardo da Vinci, 1452~1519) 등이 있다.
 
르네상스는 이처럼 정치 경제 사회 문화 사상 등 모든 차원에서 일대 도약과 변혁이 이뤄지던 시기였다. 그런데 이 시기를 바라보는 시각도 신앙인이라면 조금 달라야 한다. 단순한 역사적 관점이 아니라 영적인 눈으로 볼 수 있어야 한다. [가톨릭신문, 2011년 4월 24일]
 
 
[영성으로 읽는 성인성녀전] (78) 성 요한 보스코 (4)
 
청소년을 교회와 사회의 등불로 이끌다
 
 
인간은 삼중구조로 되어 있다. 신체와 정신, 영(靈)이 그것이다. 인간은 이 삼중구조 속에서 자신을 형성시켜 나간다. 하느님도 우리를 이 삼중구조 안에서 인도하신다. 인간 역사도 마찬가지다. 고대의 인류는 신체적인 차원, 정신적인 차원이 강했다. 하지만 중세로 넘어오면서부터는 영적인 차원이 강화된다. 그러나 이 영적인 차원이 남용이 되고, 세속 안에서 일부 잘못 적용되면서 근대에 오면서는 다시 정신적인 차원이 일깨워지는 것이다. 하느님은 이렇게 늘 영적이고, 정신적이고, 먹고사는 육체적인 차원이 조화롭게 통합을 이루어 갈 수 있도록 인간들을 일깨우시면서 인류 역사를 인도하신다. 문제는 이 세 가지가 조화를 이뤄야 한다는 점이다. 조화가 사라지면 극단으로 치닫게 된다.
 
학문적인 면만 해도 그렇다. 인간 정신과 지성을 이용한 학문은 참으로 좋은 것이다. 하지만 경험주의가 극단으로 치닫게 되면 물질주의, 유물론이 나오게 된다. 물질만능주의가 인간이 도달해야 할 최고의 가치라고까지 판단되는 오류에 빠지는 것이다.
 
사회적 문제도 마찬가지다. 기술 문명의 발달로 인한 산업화는 인간 삶을 풍요롭고 윤택하게 한다는 점에서 긍정적인 면이 있다. 아마 요즘 사람들에게 한겨울에 따뜻한 물이 나오지 않는 초가집에서 살라고 하면 대부분 고개를 저을 것이다. 기술문명의 발달은 인류에게 주신 하느님의 선물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하지만 그 기술이 무기제조에 사용될 때는 수많은 무죄한 이들에게 고통을 야기할 수 있다. 우리는 두 차례에 걸친 세계대전과 한국전쟁 등을 통해 기술의 발달이 얼마나 많은 이들에게 끔찍한 고통을 안겨주는지 잘 알고 있다.
 
종교적 차원에서도 예외가 아니다. 근대는 중세의 종교가 쇄신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했고, 새로운 깨달음을 얻는 계기가 됐다. 하지만 근대는 동시에 무신론도 함께 안고 왔다. 수많은 이들이 ‘신은 죽었다’고 외쳤고, 지금까지 많은 이들이 무신론 혹은 불가지론(신의 존재는 인간으로는 있다 없다고 판단할 수 없다)에 빠져 있다.
 
그렇기 때문에 그리스도교의 정체성이 필요하다. 올바른 그리스도교 영성의 확립이 필요하다. 진정한 영성이 확립되어야 학문적 오류, 사회적 오류, 종교적 오류에서 벗어날 수 있다.
 
이것이 바로 하느님께서 아빌라의 성녀 데레사, 십자가의 성 요한 같은 분을 가톨릭교회에 보내주신 이유다. 하느님은 이분들이 신비적 차원에 가장 높은 경지에 들어갈 수 있도록 이미 섭리를 해주셨다. 그런데 여기서 또 플러스(+)해야 할 것이 있다. 바로 실천이다.
 
나는 하느님께서 이 영성의 실천을 위해 요한 보스코를 보내주셨다고 믿는다. 하느님은 요한 보스코를 먼저 태어나게 하신 것이 아니라, 아빌라의 성녀 데레사와 십자가의 성 요한을 먼저 우리에게 보내셨고, 그 다음으로 요한 보스코를 보내셨다.
 
요한 보스코는 진정으로 행동하는 영성가였다. 서품받은 후 요한 보스코는 친구들의 조언에 따라 고아와 노인, 죄수들을 위해 헌신한다. 어려운 일이 있을 때마다 하느님께서 항상 옆에서 도와 주셨음은 물론이다.
 
이러한 삶이 더 큰 열매를 맺기 위해 이뤄지는 것이 바로 수도원의 창설이다. 요한 보스코는 54세에 남자 수도원을, 59세에 여자 수도원을 설립하고 미래를 위한 청소년 사업에 본격적으로 나서게 된다. 그런데 그의 활동 방법이 참으로 교회적이고 모범적이다. 진정한 기도와 영성 안에 먼저 머물고 그 힘으로 청소년 돌봄에 나선 것이다. 요한 보스코는 잘난 청소년, 못난 청소년을 가리지 않았다. A학생 B학생을 가리지 않았다. 잘생기고, 성실하고, 성격좋은 학생들만 받아들이지 않았다. A, B, C, D, E, F 모든 학생을 받아들였다. 심지어 문제아들까지 함께 끌어안았다. 그에게 안긴 아이들은 모두 초월적 삶으로 변화됐다. 하느님은 이렇게 요한 보스코 사제를 통해 청소년들이 교회와 사회를 위한 등불로서 성장할 수 있도록 인도하시고 섭리하셨다. 교회 내적인 차원에서 요한 보스코의 힘만으로는 부족할 듯 싶으니까, 나중에는 레오 13세 교황(요한 보스코 보다 5살 연상)을 통해서도 사회복음화를 실천할 수 있는 교회의 기반을 쌓을 수 있도록 하셨다. 참으로 하느님 섭리의 신비스러움을 고백하지 않을 수 없다. 마지막으로 요한 보스코 성인의 영성에 대해 간략히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가톨릭신문, 2011년 5월 1일]
 
 
[영성으로 읽는 성인성녀전] (79) 성 요한 보스코 (5)
 
“젊다는 이유만으로 사랑받기 충분합니다”
 
 
실천하는 사랑의 영성
 
요한 보스코는 하느님을 두려워해야 할 분으로 보기보다는 사랑해야 할 아버지로 보았다. 그 결과 요한 보스코의 영성은 사목을 통해 세상안에 하느님의 사랑을 깊이 침투케 하는 ‘사목적 사랑’으로 발전한다.
 
그는 사랑의 실천을 통해서 완전한 삶에 도달하는 게 가능하다고 보았다. 그래서 이론적이거나 학문적인 영성보다는 실천적 영성을 택했다. 그는 역동적인 영성을 가르쳤다. 특히 젊은이들을 극진히 사랑했으며, 인간적 가치들을 존중했고, 자유를 존중했다. 또한 그는 무엇보다도 교육에 대해 깊은 관심을 가지고 있었으며, 가난한 이들에 대해 지극한 유대감을 지니고 있었다.
 
그래서 그는 도시에 있었다. 운동장과 건물들 안에서 가난한 젊은이들과 만나고 함께 웃고 함께 울었다. 그는 가장 도움이 필요한 이웃을 가난한 젊은이들 안에서 발견했다. 그리고 투신했다.
 
“나는 여러분을 위하여 공부하고, 여러분을 위하여 일하며, 여러분을 위하여 살고, 여러분을 위하여 나의 생명까지 바칠 각오가 되어 있습니다.”
 
사랑, 이것은 사제로서 그가 걸어간 사도적 활동이었고, 자신을 바쳐 그리스도를 따르는 구체적인 방법이었다.
 
성모신심
 
9살의 요한 보스코는 꿈을 꿨다. 넓은 마당에 수많은 아이들이 놀고 있었다. 그때 성모님이 나타나 이렇게 말씀하셨다.
 
“여기가 바로 네 일터이다. 겸손하고 강인하고 굳건한 사람이 되어라.”
 
요한 보스코가 울면서 무슨 뜻인지 가르쳐 달라고 애원하자, 성모님은 “때가 되면 모든 것을 깨닫게 될 것이다”라고 말씀하셨다.
 
요한 보스코에게 있어서 성모님은 항상 함께하시며 그의 삶을 이끌어 주시는 분이었다. 성모님에 대한 그의 신심은 그의 어머니께 깊이 영향을 받았다. 신학교에 입학하기 전날 그의 어머니는 “네가 태어났을 때 나는 너를 성모님께 봉헌했다. 이제 나는 네게 온전히 그분의 것이 되라고 당부하고 싶구나”라고 말씀하셨다.
 
요한 보스코는 삼종기도를 통해 하루에 세 번 성모님께 인사를 드리는 습관을 지니고 있었다. 또한 그는 모든 일의 시작에서 마침 때까지 성모님께 기도를 드렸다.
 
결국 이러한 성모신심은 그의 모든 생각과 말과 행동으로 드러나게 된다. 실제로 요한 보스코에게 있어서 성모님은 살레시오회 모든 활동의 창립자였다. 이는 그의 글 속에는 잘 나타나 있다. “성모님께서는 우리가 하나의 수도회를 시작하기 바라십니다. 우리는 살레시오 회원이라고 불리우게 될 것입니다.” “우리 수도회를 원하시는 분은 바로 성모님이십니다.”
 
세월이 흐르고 건강이 나빠짐에 따라 요한 보스코는 점점 더 ‘도움이신 마리아’께 의탁했다. 사람들이 그에게 기적을 청할 때. 그는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우리의 기도를 함께 성모님께 드립시다. 정녕코 치유를 해주시고, 들어 주시고, 이해해 주시며, 동정을 베풀어 주시는 분은 성모님이십니다. 그분께서는 하늘에서 응답해 주십니다. 나는 단지 기도할 따름입니다.”
 
성인이 돌아가신 후 침대 머리맡의 성모상 아래 홈에서 4000장이 넘는 쪽지가 발견되었다. 모두 다 도움이신 마리아께 드리는 청원기도문이었다.
 
영혼의 구원
 
요한 보스코는 ‘포교적’ 사랑을 실천했고 가르쳤다. 요한 보스코는 그가 가장 좋아하던 “하느님의 큰 영광을 위하여” 라는 말에다 “영혼들의 구원을 위하여” 라는 말을 종종 덧붙이곤 했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
 
“만일 제가 한 영혼을 구하는 데 성공한다면 저는 제 자신의 영혼을 구하는 것이기도 하다는 걸 확신합니다.”
 
요한 보스코가 남긴 말
 
“여러분은 젊은이라는 이유만으로 나의 사랑을 받기에 충분합니다.”
 
“나는 여러분을 위하여 공부하고, 여러분을 위하여 일하며, 여러분을 위하여 살고, 여러분을 위하여 나의 생명까지 바칠 각오가 되어 있습니다.”
 
“기쁨 중에 주를 섬기십시오. 달리고 뛰고 소리치고, 죄만 짓지 않는다면 무엇이든 좋습니다.” [가톨릭신문, 2011년 5월 8일]

 

 

[성인들의 발자취] 성 요한 보스꼬

'고아의 아버지'로 직업교육 앞장, 살레시오 수도회 창설 - 축일은 1월 31일



「고아들의 아버지」로 불리우는 요한 보스꼬는 1815년 8월 16일 북부 이태리 「뻬찌」의 작은 마을에서 출생했다. 근면하고 독실한 부모 밑에서 자라난 요한 보스꼬는 어릴 때부터 신심이 남달리 두터웠다.

어린 나이에 아버지를 여윈 요한 보스꼬는 13세부터 농삿일로부터 양복공ㆍ제과공제화공ㆍ목수 등으로 직업전선에 뛰어들었으며 그 후 자신의 힘으로 대학과 신학교를 나와 사제가 되었다.

성모께 특별한 공경을 바쳤던 요한 보스꼬는 교황청의 은혜로 심신을 단련해 나갔는데 금욕생활을 하면서도 가끔 아이들을 모아놓고 손장난 등으로 그들을 즐겁게 해주고 또 함께 기도하고 했다.

1841년 4월 5일 사제품을 받은 요한 보스꼬는 「도리노」에 있던 두 친구, 성 요셉 가파쏘와 성 고도텡고의 권유로 박애사업에 일생을 바치기로 결심하였다.

그리하여 요한 보스꼬는 버림받은 고아들을 모아 그들에게 기술과 공부를 가르쳤는데 당시에는 고아원이 없었기 때문에 어머니가 요한 보스꼬를 도와 고아들을 보살펴주었다.

아이들이 요한 보스꼬를 사랑하고 따랐으므로 요한 보스꼬는 그들이 모여 놀고 기도할 수 있는 장소를 마련해 주었다. 아이들의 소음에 이웃의 불평이 높아지자 요한 보스꼬는 낡은 헛간을 수리하여 그곳을 기도소라 부르고 그곳에서 아이들을 놀도록 해주었다. 이러한 기도소를 시작으로 요한 보스꼬는 공동작업장ㆍ학교 등을 설립했다.

요한 보스꼬는 그의 사업의 계속적인 발전을 위해 「살레시오 성 프란치스꼬의 신심회」라는 수도원을 창설, 1859년 12월 18일 삐오 9세를 알현하고 수도회의 인가를 요청했으며 다시 1875년 살레시오 수녀원도 창설했다.

이 두 수도회는 청소년 교육과 직업기술 교육으로 전 세계에 알려져 있으며 교회 내에서 세번째로 큰 수도회가 되었다.

1887년 72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난 요한 보스꼬는 1934년 교황 삐오 11세에 의해 성인품에 올랐다. 성 요한 보스꼬의 측일은 1월 31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