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독서 집회 17,24-29
하느님께서는 24 회개하는 이들에게는 돌아올 기회를 주시고, 인내심을 잃어버린 자들은 위로하신다. 25 주님께 돌아오고 죄악을 버려라. 그분 앞에서 기도하고 잘못을 줄여라. 26 지극히 높으신 분께 돌아오고 불의에서 돌아서라. 그분께서 너를 이끄시어, 어둠에서 구원의 빛으로 인도하실 것이다. 또 너는 그분께서 역겨워하시는 것을 혐오하여라. 27 살아서 감사하는 이들을 대신하여, 누가 저승에서 지극히 높으신 분께 찬미를 드리겠느냐? 28 존재하지 않는 자처럼 죽은 이에게서는 찬양이 그치지만, 건강하게 살아 있는 이는 주님께 찬미를 드리리라. 29 주님의 자비는 얼마나 크시며, 당신께 돌아오는 이들에 대한 그분의 용서는 얼마나 크신가!
복음 마르 10,17-27
그때에 17 예수님께서 길을 떠나시는데 어떤 사람이 달려와 그분 앞에 무릎을 꿇고, “선하신 스승님, 제가 영원한 생명을 받으려면 무엇을 해야 합니까?” 하고 물었다. 18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에게 이르셨다. “어찌하여 나를 선하다고 하느냐? 하느님 한 분 외에는 아무도 선하지 않다. 19 너는 계명들을 알고 있지 않느냐? ‘살인해서는 안 된다. 간음해서는 안 된다. 도둑질해서는 안 된다. 거짓 증언을 해서는 안 된다. 횡령해서는 안 된다. 아버지와 어머니를 공경하여라.’” 20 그가 예수님께 “스승님, 그런 것들은 제가 어려서부터 다 지켜 왔습니다.” 하고 대답하였다. 21 예수님께서는 그를 사랑스럽게 바라보시며 이르셨다. “너에게 부족한 것이 하나 있다. 가서 가진 것을 팔아 가난한 이들에게 주어라. 그러면 네가 하늘에서 보물을 차지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와서 나를 따라라.” 22 그러나 그는 이 말씀 때문에 울상이 되어 슬퍼하며 떠나갔다. 그가 많은 재물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23 예수님께서 주위를 둘러보시며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재물을 많이 가진 자들이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기는 참으로 어렵다!” 24 제자들은 그분의 말씀에 놀랐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그들에게 거듭 말씀하셨다. “얘들아,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기는 참으로 어렵다! 25 부자가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낙타가 바늘귀로 빠져나가는 것이 더 쉽다.” 26 그러자 제자들이 더욱 놀라서, “그러면 누가 구원받을 수 있는가?” 하고 서로 말하였다. 27 예수님께서는 그들을 바라보며 이르셨다. “사람에게는 불가능하지만 하느님께는 그렇지 않다. 하느님께는 모든 것이 가능하다.”
많은 사람들이 주로 물질적인 관점에서 바라보고 판단합니다. 이는 가톨릭 신자라고 해서 예외는 아닌 것 같습니다. 아니 어쩌면 신부로 살고 있는 저 역시 그랬음을 솔직하게 인정하고 반성합니다. 지난 달 성지순례에서 함께 순례를 하고 있었던 교우로부터 이런 말을 들었지요.
“신부님, 여기는 조상님 잘 만나서 이렇게 관광 수입으로 먹고 사네요.”
스페인의 어느 성당인데, 이 성당에는 입장료를 받는 것입니다. 그것도 꽤 비싼 값을 치루고 말이지요. 그런데 이렇게 입장하는 사람이 한 두 사람이 아니니 입장 수입이 얼마나 많겠습니까? 그래서 그런 말씀을 하셨고, 저 역시 이런 생각을 하게 됩니다.
‘우리 조상님들도 이렇게 멋진 성당 좀 지어놓았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하지만 우리 조상님들은 더 큰 것을 봉헌하셨고 그 유산을 우리에게 남겨주셨습니다. 바로 자신의 생명까지 봉헌할 수 있었던 주님께 대한 믿음이었습니다. 그래서 순교를 선택하실 수 있었고, 영원한 생명을 얻을 수 있는 길을 우리들에게 가르쳐주셨지요.
이러한 우리 선조들의 유산을 우리는 간직하고 있습니까? 혹시 여전히 물질적인 기준만을 내세워서 오히려 선조들이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고 생각하고 있었던 것은 아닐까요?
며칠 전, 유명 연예인 한 명이 스스로 자살을 선택했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습니다. 다행히 구조를 받아 목숨에는 지장이 없다고 하지만, 많은 이들이 깜짝 놀랐습니다. 왜냐하면 평소에 연기하던 이 연예인의 얼굴만 보면 아무런 걱정이 없는 사람처럼 보였거든요. 또 그동안 벌어들였던 수입을 생각한다면 여유로우면서 행복한 삶을 살고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겉으로 보이는 부분이 곧 행복으로 연결되는 것이 아닙니다. 행복은 겉으로 보이는 부분을 통해서 나의 것을 만드는 것이 아니라, 주님의 뜻을 따르는 과정 안에서 내 마음 속에서 저절로 생겨나는 것입니다. 그래서 물질적인 기준을 내세우는 것이 아니라, 주님의 기준에 맞춰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만약 모든 사람들이 이 기준인 사랑을 내세워 살아간다면 세상안의 불행한 사람도 자연스럽게 줄어들 것입니다.
오늘 한 사람이 예수님을 찾아와 제자가 되게 해달라고 청합니다. 그는 어렸을 때부터 철저히 율법을 실천하고 있었던 사람으로서, 예수님도 그 열심을 인정하셨지요.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그에게 부족한 한 가지를 찾아내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가서 가진 것을 팔아 가난한 이들에게 주어라. 그러면 네가 하늘에서 보물을 차지하게 될 것이다.”
율법적으로 완벽했던 이 사람은 예수님의 제자가 될 수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그가 놓아야 할 재산이 너무나도 많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과연 주님의 제자가 될 수 있을까요? 놓아야 할 재산이 없다고요? 그러나 끊임없이 물질적인 기준만을 내세우며 산다면 이 역시 주님의 제자가 될 수 없는 이유입니다.
성공하는 사람들이란 자기가 바라는 환경을 찾아내는 사람들이다. 발견하지 못하면 자기가 만들면 된다(조지 버나드 쇼).
어제 성소후원외 모집 미사를 했던 연수동 성당입니다.
직업 만족도
누군가로부터 어떤 텔레비전에서 직업 만족도에 대한 내용이 나왔다고 들었습니다. 그래서 인터넷을 살펴보니 신부님의 만족도가 4위더군요. 그리고 그 밑에 어떤 사람이 이렇게 댓글을 남겨 놓았습니다.
“100만 원 정도의 월급을 받고, 또 결혼도 할 수 없어 혼자 살면서도 이렇게 만족도가 높다는 것을 도저히 이해하기 힘들다.”
세상의 관점으로는 이 만족도를 이해하기 힘들겠지요. 그러나 사랑에 관점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라면 그 만족도를 충분히 이해할 수 있지 않을까 싶습니다. 사랑을 가장 실천할 수 있는 자리, 그래서 가장 만족해하며 행복할 수 있는 자리이기 때문입니다.
지금 내 자리에 만족하십니까? 만족하지 못하고 있다면 분명히 세상의 기준이 들어와 있을 것입니다. 욕심, 미움, 이기심, 분열이 가득한 곳에서는 어떻게든 만족할 수 없는 것이 당연합니다. 주님의 기준인 사랑을 제일 원칙으로 내세워보십시오. 분명히 만족스러운 삶을 살 수 있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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