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세빌리아의 물장수(1623년)
작가 : 디에고 벨라스케즈(Diego Velazquez1599-1660)
크기 : 켄버스 유채 106.7 X87cm
소재지 : 영국 런던 웰링턴 미술관(Welligton)
이태리 어떤 작가가 “가난과 예술”이라는 주제의 글을 남겼는데, 그 내용은 예술의 대종은 인간의 풍요에서 시작되지만 가난하고 척박한 환경에서도 아름다움은 탄생할 수 있다고 했다. 모든 아름다움의 원천은 하느님이시기에 어떤 처지에서도 아름다움은 꽃필 수 있다는 내용이었다.
성서는 “마음이 가난한 사람의 행복”(마태오 5:2)과 “가난한 사람의 행복”(루카 6:20)을 전하고 있으며 성서의 여러 곳에서 인간적으로는 소외된 사람들에 대한 예수님의 각별한 사랑과 배려와 함께 가난한 사람들이 지닌 아름다운 믿음과 인간성을 드러낸 것이 많이 있다.
작가는 당대에 유행하던 바로크 화가였으며, 1629년에서 1631년의 1년 반 동안 미술 공부와 여행을 위해 이탈리아에서 살면서 이태리 화풍을 익혔다.
이태리에서 받은 영향 때문인지 얼핏 보면 카라밧지오(1573~1610)의 그림을 보는 듯하다. 뚜렷한 명암대비에 의한 테네브리즘(Tenebrism)의 극적인 효과를 연출함으로 관객을 화면에 빠져들게 한다.
작가는 실력을 인정받아 궁정화가로 발탁되어 화려한 그림과 왕과 왕실 가족들을 위시해서 유명 인사들의 초상화를 많이 그렸으나 이것 못지않게 서민 생활에 대해서도 각별한 관심을 가지고 이것을 주제로 한 작품을 남겼는데, 이 작품은 이런 관점에서 작가의 기량을 볼 수 있는 대표작이다.
통념적으로 보면 궁정생활의 화려함에 익숙한 사람에게 서민생활은 반대로 비참함과 척박함의 상징처럼 표현될 수 있겠으나 작가는 궁정생활의 시각으로 보면 부족과 비참의 상징 같은 서민들의 일상생활에서 궁정 생활에서 보기 어려운 인간적인 훈훈함과 또 다른 기품을 발견하여 작품화했다는 면에서 그의 천재성이 드러나고 있다.
그가 이 작품을 제작하는 것은 20세 초반 인데, 이 그림에 나타난 구도와 색채, 명암의 조절과 인물 묘사의 자연스러움, 사실적인 정물 묘사는 그의 날카롭고 정확한 관찰력과 뛰어난 붓놀림을 보여주고 있다.
밤 색깔의 옷을 입은 장대한 남자가 있다. 흰색의 속옷 위에 투박한 외투 형식의 옷을 걸쳐 입은 남자는 물을 팔기 위해 여러 곳을 다닌 탓인지 얼굴도 그을린 상태이며, 그의 매무새로 보면 영락없이 초라한 행상이다.
겉옷 역시 너무 오래 입은 탓인지 헤어져서 안에 입은 흰옷이 보이는 것은 그의 경제적 처지가 말이 아닌 가난뱅이임을 드러내고 있다. 그가 왼손으로 잡고 있는 물통은 하루 종일 거리를 누비며 물장수 행상을 해야 하는 그의 인생의 무게처럼 느껴진다. 그러나 비록 물을 팔아 살아가는 가난한 행상의 처지이지만 그의 얼굴에는 여유로운 기품과 자부심이 넘쳐흐르고 있다.
물장수는 고객인 듯 한 소년에게 컵에 물을 건네고 있다. 물장수의 얼굴 표정은 입에 풀칠을 위해 손주뻘되는 소년에게 물을 파는 상인이 아니라 목마른 소년의 갈증을 풀어준다는 기쁨을 느끼는 어버이의 흐뭇한 모습이다.
마치 시편 23에 나타나고 있는 생명의 물터로 인도하는 주님이신 목자를 연상시킨다 “야훼는 나의 목자 아쉬울 것 없노라 , 파아란 풀밭에 이몸 뉘어주시고 고이쉬라 물터로 나를 끌어 주시니 내 영혼 싱싱하게 생기 돋아라 .”
투명한 물 잔과 이것을 받은 매무새 깨끗한 소년은 물장수와 묘한 대조를 이루고 있다. 이 소년이 물장수 안으로 말려 들어가면서 후줄그레한 물장수를 산뜻하게 만들고 있다.
소년의 뺨을 스치고 비치는 빛이 물장수의 얼굴에 쏫아지면서 소년의 발랄한 생명력이 물장수에게 전달되는 느낌이다. 얼굴에 스친 빛이 물장수 얼굴에도 비치면서 물장수의 얼굴은 소년의 홍조를 띄고 있다. 물장수는 고단한 삶에 지친 늙은이가 아니라 청순한 소년의 이미지와 혼합되어 기품 있는 분위기를 유도하고 있다. 그는 물잔을 소년에게 건네면서 마치 최후 심판에서 주님이 하신 다음 말씀을 떠올려 소년을 대하는 자신의 태도가 자랑스러운 크리스챤으로서의 애덕 행위로 여기고 있는 것 같다.
“내 아버지께 복을 받은 이들아, 와서, 세상 창조 때부터 너희를 위해 준비한 나라를 차지하여라 . 너희는 내가 굶주렸을 때에 먹을 것을 주었고, 내가 목말랐을 때 마실 것을 주었으며 ......( 마태오 25: 34- 35)
물장수가 소년에게 건네는 유리잔 바닥엔 잘 익은 무화과 열매가 놓여 있다. 이것은 레몬처럼 물맛을 산듯하게 만드는 것으로 오늘도 세빌리아 지역에서 사용하고 있는 방법이다.
목마른 사람의 갈증 해소뿐 아니라 향긋한 정취를 주는 무화과 열매는 그것을 마시는 소년 뿐 아니라 건네주고 있는 물장사의 모습도 돋보이게 만들고 있다.
물 잔을 받고 있는 소년의 깨끗한 손과 물 잔속에 들어 있는 무화과 열매는 이것을 건네고 있는 투박한 물장수의 손도 소년의 생기 있는 손과 무화과 열매의 향기로움에 휘말려 들어 온통 기품으로 넘친 한 폭의 정물화를 만들고 있다.
17세기부터 스페인에선 보데곤(Bodegon)이라는 일상 삶의 장면 안에 드러나는 아름다움을 표현하는 방식이 유행했는데, 작가는 이 평범한 풍속화의 모습에서 인생의 높은 기품을 표현했다.
무화과 열매가 들어있는 물 잔을 소년에게 건네고 있는 물장수는 몇 푼의 돈을 벌기 위해 살아가는 삼류인생이 아니라, 인생을 산듯하고 상쾌하고 만들 수 있는 묘약을 전달하는 행복 전도사의 밝은 모습으로 나타나고 있다.
한마디로 그는 목마른 소년의 갈증을 덜어주는 원초적 역할과 하면서 동시에 주위를 산듯하게 만드는 한마디로 멋스러운 인간으로 드러나고 있다.
소년과 물장수의 손아래 보이는 항아리는 빛을 받아 화사함을 풍기고 있다. 가난한 물장수의 살림 밑천과 같이 보잘 것 없는 물통이 빛을 받아 유리잔과 묘한 대조를 이루면서 소년의 청순한 젊음이 물장수에게 전달되듯 힘겨운 삶을 살아가는 물장수의 모습이 더 없이 기품 있고 우아한 모습으로 변하게 된다.
소년의 생기가 물장수에게까지 전달되어 혼합된 것 같은 뒤편에 물장수와 비슷한 연배로 보이는 늙은이가 역시 물 컵을 들고 있는 희미한 모습으로 보인다.
비슷한 연배이면서 소년의 젊음을 나누고 있는 물장수와 이 희미한 사나이의 모습은 묘한 대조를 이루고 있다. 마치 생명을 향해 나아가는 존재와 죽음을 향해 내려가고 있는 존재를 보는 느낌을 받게 된다.
작가는 이태리 바로크 화가였던 카라바죠가 사용한 명암 대조의 방법을 완벽하게 사용해서, 물장수와 사나이의 모습을 대조시키면서 삶의 광채와 어두움을 절묘히 조화시키고 있다.
물장수는 인간적으로 보면 고달픈 삶을 살아가는 서민에 불과하지만 소년으로 상징되는 생명의 원천인 신앙에 자신을 맡겼기에 소년을 통해 들어온 빛으로 조명 받은 얼굴처럼 생기 있는 기품을 느끼게 만들고 있다.
예나 지금이나 세상에는 가난한 사람, 소외된 사람들이 민초의 인생을 꾸리고 있는데, 민초들의 삶은 실패한 인간의 상징이며 이것의 극복은 사회적 지위의 향상이나 경제적 위상을 높여야 한다는 사고방식으로 나아가고 있다. 한마디로 가난하고 사회적 지위를 누리지 못하는 사람은 그 자체로 실패와 불행의 상징으로 치부하고 있다.
그러나 작가는 이것을 뛰어넘어 척박한 가난 저편에 있는 훈훈한 인간미와 삶의 보람을 제시하면서 가난 속에서 표현되는 훈훈한 인간미와 행복을 제시하고 있다.
마치 산모가 젖을 먹고 있는 아기를 바라보면서, 산고의 고통을 잊고 여성으로서 최고의 행복인 어머니로서의 기쁨을 느끼는 것처럼, 물장수는 고객인 소년에게 물을 팔면서 그 소년의 미각과 시각을 상쾌하게 해주는 무화과 열매 하나를 선사하는 정성을 통해 자기의 인생이 다른 사람을 상쾌하게 만들고 있다는 뿌듯한 자부심 속에 살아가고 있음을 표현하고 있다.
이런 면에서 작가는 인생의 행복은 하느님과의 관계이지 세상 물질과의 관계가 아님을 제시하면서 결과적으로 성서가 제시하고 있는 가난한 사람의 행복을 미각과 시각이라는 인간 삶의 기본적 욕구성향을 통해 표현하고 있다.
작가는 초상화에 제작에 대한 탁월한 능력을 인정받아 궁정화가가 되어 당시 스페인 왕족 뿐 아니라 인노첸시오 10세 교황의 초상화를 남길 만큼 궁정화가로서 화려한 생애를 꾸리면서 명실공히 스페인 상류사회 사람들의 기호를 충족시키는 호화로운 삶을 살았다.
그러나 이런 와중에서도 작가는 서민들의 삶에 눈을 돌려, 대장장이 , 난쟁이 같은 서민들의 삶에서 발견할 수 있는 고귀한 사람들의 모습을 그렸다.
작가는 고급 인생들의 상징과 같은 왕족들과 그 측근들에게 인정받았다는 면에서 대가이기 이전 서민들의 삶에서 여유와 멋이라는 우물물을 끌어올려 세상 사람들이 잊기 쉬운 삶의 품위와 멋을 제시했다.
예나 오늘이나 신분 상승이나 사치한 삶의 자리를 누리기 위해 혈안이 되어 인생의 참 의미를 찾지 못하고 방황하는 사람들에게 가난한 삶에서 보이는 중요한 가치를 알렸다는 면에서 신선한 충격을 주는 작품으로 볼 수 있다.
- 이종한(요한) 신부님의 성화 이야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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