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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톨릭 성화, 미술

~ 유다의 키스(1304-130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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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다의 키스 (1304- 1306)


작가 : 지오토 본도네(Giotto di Bondone: 1266- 1337)
크기 : 프레스코 : 200 x 185 cm
소재지 이태리 파도바 스크로베니 경당( Cappella Scrovegni Padua)


루카 복음사가는 제자들에게 당신 수난을 알리고 최후의 만찬을 하신 예수님께서 올리브 동산에서 고뇌에 쌓여 땀이 핏방물 처럼 되어 땅에 떨어지도록 기도하신 후 십자가를 향해 나가는 과정에 있었던 체포의 순간을 격렬히 묘사하고 있다.

“예수님이 아직 말씀하고 계실 때에 한 무리의 사람들이 나타났는데, 열두 제자 가운데 하나로 유다라고 하는 자가 앞장 서서 왔다. 그가 예수님께 입 맟추려고 다가오자, 예수님께서 그에게 “유다야, 너는 입마춤으로 사람의 아들을 팔아넘기려느냐? 하고 말씀하셨다.

예수님 둘레에 있던 사람들이 이 사태를 알아차리고 , 주님 저희가 칼로 쳐 버릴까요? 하고 말하였다. 그들 가운데 한 사람이 대사제의 종을 쳐서 그의 오른쪽 귀를 잘라 버렸다. 그러자 예수님께서는 그만 두어라.“ 하시고, 그 사람의 귀에 손을 대어 고쳐 주셨다. 그리고 나서 예수님께서는 당신을 잡으려 온 수석 사제들과 성전 경비대장들과 원로들에게 이르셨다. “너희는 강도라도 잡을 듯이 칼과 몽둥이를 들고 나왔단 말이냐? (루카 22: 47- 52)

이 장면은 마치 어떤 전쟁의 클라이막스나 , 폭동의 묘사장면에서 드러나고 있는 대단한 박진감과 긴장감을 드러내고 있다.

작가는 르네상스 미술의 시작을 알린 작가로 평가되면서 성화에 있어 인성의 표현을 과감하게 강조하기 위해 원근법을 처음으로 도입했던 작가 답게 이 장면을 그리스도의 수난을 전할 수 있는 주요 부분으로 선정해서 그렸다.

이 사건은 아직 날이 밝지 않는 어둔 밤에 있었던 일이기에 작가는 박진감을 더하기 위해 대비적인 표현을 하고 있다.

청아한 하늘은 만물이 휴식하는 순간의 더없이 평화롭고 고요하다. 그런데 이 고요함 안에 횃불과 창을 든 일군의 병사들에 둘러 쌓인 예수님을 등장시킴으로서 과거 종교화에서 볼 수 없었던 박진감을 더하고 있다

검은 헬멧을 쓴 일군의 병사들이 철옹성같은 힘을 과시하는 앞에 예수님을 체포하기 위해 찾아온 사람들은 당시 사회 인사의 축소판이다 . 무지한 폭도 수준이나 , 악의 세력에 사주를 받은 시민만이 아니라 당시 사회 종교계의 지도급 인사들도 참가하면서 예수님의 피살이 몇 명의 악한 세력들의 힘에 의한 것이 아니라 사회 전체의 일치된 정서임을 표현하고 있다.

작가는 인간의 상식으로 받아 들일 수 없는 예수님의 체포를 극적으로 표현해서 과거 성화에서 볼 수 없었던 박진감을 더하고 있다

긴장과 혼돈의 가운데 예수님께서 유다와 함께 서 계신다 그 주위를 예수님을 고발한 사람들이 둘러 쌓고 있는데, 예수님을 죽이는데, 의견을 모으고 있는 거대한 악의 실체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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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홍빛 옷을 입은 사람은 대사제이며 그의 손길은 예수를 가리키면서 그를 죽여야 한다고 군중을 선동하고 있다 그의 얼굴 표정은 주님을 향한 더 없는 미움과 분노를 품고 있다. 그가 대사제로서 지니고 있는 모든 권위는 이 순간 예수님은 죽임을 당해야 할 사람이라는 선언하고 있다 요한 복음 저자는 그리스도를 십자가에서 죽이기 위한 모의를 하는 집단의 핑계를 당시 대사제인 가야파의 입을 통해 다음과 같이 표현하고 이

“여러분은 아무것도 모르고 있군요. 온 민족이 멸망하는 것 보다 한 사람이 백성을 위해 죽는 것이 여러분에게 더 낫다는 사실을 여러분은 헤아리지 못하고 있소” (요한 11: 49)

그는 대사제의 복장으로 예수님을 십자가에 목박아야 한다는 것을 마치 성전에서 판결이라도 내리듯 정확히 표현하고 있다.

대사제로 시작되는 군중들의 소용돌이는 오른쪽으로 선회하면서 검은 옷의 사나이를 통과해서 핼멧을 쓴 군인들에게로 닥아가면서 예수님을 십자가에 목박아야 한다는 어두움의 정서가 결집되고 있음을 강하게 표현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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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의 대사제가 손가락으로 예수님을 가르치면서 그가 죽어야 할 죄인으로 단죄하는 모습과 달리 이 작자는 복장으로 보아 평민에 불과한 사람이나, 그의 신념에 의해서인지 아니면 대사제의 선동을 받아 군중들을 선동하는 몸짓으로 등장하고 있다.

작가는 이 작품에서 이 선동자를 뒤에서 그림으로서 역사상 처음으로 인물을 뒷면에서 표현하는 새로운 시도를 했다 이것은 우리가 이유를 알 수 없는 악의 실체가 공기처럼 보이지 않으면서도 확실히 존재한다는 것을 표현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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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의 모습을 잘 알지 못하는 사람들에게 예수님을 알려 체포에 일조하는 것으로 30은전을 받은 유다가 폭도들에게 결정적인 제보의 표시로 키스를 하는 장면이다

`이런 유다의 심정을 너무도 잘 표현하고 있다 유다는 전승에 의하면 열혈당원으로 무력으로나마 하느님 나라를 건설해야 한다는 신념을 가진 한마디로 정의에 대한 감각이 대단했던 젊은이였다

그가 예수님을 만났을 때 많은 기적을 행하시고 군중들을 자기 뜻안으로 끌어들일 수 있는 예수님이야 말로 자기가 원하는 이스라엘을 해방시킬 수 있는 지도자로 판단하고 그분의 제자가 되었다.

그는 다른 제자들 보다 더 영리하기에 조그만 공동체이나마 필요한 재정을 관리하는 일을 맡게 되었다 그러나 스승은 그에게 살아갈수록 알 수 없는 분으로 닥아왔다 기적까지 행하실 수 있는 대단한 능력이 있으시면서도 그분은 힘이 필요하다고 느끼는 순간에도 결코 힘을 사용하시지 않고 오히려 힘의 사용을 포기하라는 가르침으로 그를 실망시켰다.

그는 스승의 다음과 같은 가르침을 도저히 받아 들일 수 없었으며 무력으로라도 이스라엘을 해방시켜야 한다는 그의 신념과는 전혀 다른 것이기에 스승을 떠나야 할 때가 되었단 결정을 하게 되었다.

“눈은 눈으로 , 이는 이로.” 하고 이르신 말씀을 너희는 들었다. 그러나 나는 너희에게 말한다.악인에게 맞서지 말라. 오히려 누가 네 오른뺨을 치거든 다른 빰마저 돌려 대어라. 또 너를 재판에 걸어 네 속옷을 가지려는 자에게는 겉옷까지 내주어라. 누가 너에게 천걸음을 가자고 강요하거던 , 그와 함께 이천 걸음을 가 주어라 .“ (마태 5: 38- 41)

유다는 이런 가르침의 스승을 더 이상 따를 수 없다는 생각에 스승을 떠날 결심을 하게 되고 대사제들의 집단에 가서 스승을 체포를 돕는 데 협조하는 댓가로 은전 30량을 받았다.

성서는 이 부분을 다음과 같이 전하고 있다 “예수님께서 아직 말씀하고 계실 때에 한 무리의 사람들이 나타났는데, 열두 제자 가운데 하나로 유다라고 하는 자가 앞장서서 왔다, 그가 예수님께 입 맞추려고 다가오자, 예수님께서 그에게 유다야 너는 입맞춤으로 사람의 아들을 팔아넘기느냐? 하고 말씀하셨다. 예수님 둘레에 있던 이들이 사태를 알아차리고, 주님 저희가 칼로 쳐버릴까요.? 하고 말하였다.“ ( 요한 22: 47- 49)

유다는 노란색 망토를 입고 있는데, 노란색은 대단한 부정적인 상징을 드러내는 색깔이다. 예를 들어 오늘날에도 의학적으로 황달을 표현할 때, 언론에서 선정적인 기사를 말할 때 , 인간적으로 동양인을 멍청이로 평가할 때 , 시기 질투라는 뜻을 사용할 때도 항상 “Yellow“ 라는 표현을 사용하고 있듯이 당시에도 이 색깔은 부정적 표현의 상징이 되었다.

유다는 예수님을 죽여야 한다고 고발하는 대사제와 여기에 선동하는 검은 옷의 사나이 중간에 서서 그의 역할, 즉 예수님을 배반하는 악마의 역할을 정확히 표현 하고 있다.

겹쳐서 유다의 머리 색깔도 약간 붉은 색인데, 이것 역시 악마의 상징이다. 그러나 이렇게 악마에 사로잡힌 유다이지만 이 순간의 그의 가슴 깊은 곳에 있는 스승과의 순순한 기억들이 그를 착잡한 심정에 빠지게 한다. 스승은 그의 총명함을 인정하여 경리 직책을 맡긴 것은 물론이고 언제나 순수한 마음을 자기를 사랑했다는 것이 머리에 스치면서 마음을 착잡하게 만들고 있다.

유다의 이런 마음을 읽어시는지 예수님은 전혀 당황하거나 실망하는 기색이 없이 , 마치 유다가 자기 제자인 듯 그를 응시하고 있다. 예수님의 표정은 자기의 사랑과 신뢰를 배신한 제자에 대한 분노와 전혀 다른 연민의 표정이다.

두 얼굴은 같은 인간의 얼굴이면서도 전혀 다른 양상을 보이고 있다 예수님의 얼굴은 더 없는 기품과 진지함이 풍기는 표정인 반면 , 그에게 키스하는 유다의 얼굴은 악의에 가득 차 있다.

이 두 얼굴의 모습은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우리안에 잠복해 있는 선과 악의 양면성을 너무도 정확히 표현하고 있다. 그러면서 우리안에 있는 유다의 모습을 지우고 예수의 모습으로 변모되는 것이 바로 회개의 삶임을 알리고 있다

당시 여느 작품이 다 그렇듯 성화는 교회나 귀족들의 요청에 의한 것이면서도 대부분 문맹자들이었던 신자들을 위한 것이었기에 작품의 효과는 단순히 감상용이 아니라 관객들을 감동을 통해 신앙으로 인도하는 극적인 역할을 할 수 있었다.

또한 오늘 서민 생활을 잡고 있는 TV같은 시청각적인 자료가 없을 시기에 성화가 주는 영향력은 대단했다. 사제의 강론이 지루하고 읽을 성경이 턱 없이 부족하고 , 설상가상으로 글을 읽을 수 없던 당시의 신자들에게 이 작품이 주는 감동적인 충격은 어떤 강론과도 비길 수 없는 대단한 위력을 발휘할 후 있었을 것이다.

- 이종한(요한) 신부님의 성화 이야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