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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및 세계교회현황

~ 성 카타리나 수도원 ~

 

 

성 카타리나 수도원(Saint Catherine`s Monastery)


1. 시나이 산의 수도생활시나이 광야에서 수도생활은 이른 시기에 시작되었다.

 그리스도교 은수자들은 3세기 중반부터 시나이 광야에 모이기 시작하였다.

은수자들의 아버지라고 불리는 성 안토니오(251-356)의

삶은 많은 이들에게 완덕의 삶을 열망하게 했고,

사막을 찾아 나선 은수자들은 시나이 산 자락에 모여들기 시작하였다.

3세기 중반 로마 황제 ‘데치오’(Decio, 249?251 재위)의 박해시기에

하느님께서 현현하신 시나이 산의 정상과 발치에

 첫 은수자들이 도착하여 정착하기 시작하였다.

 은수자들은 동굴이나 돌로 지은 암자 그리고 오두막과 같은 곳에서

침묵 중에 기도와 일을 하며 살았다.

 이와 같이 시나이 산 주변, ‘불타는 떨기나무’(탈출 3,1-6)가 있는 장소와

파란 계곡에는 비교적 이른 시기부터 작은 규모의 수도 공동체들이 형성되었다.

불타는 떨기나무...신에서 신발을 벗는 모세. 카타리나 수도원 순례자 숙소 식당에 걸려 있는 성화



십계명을 받는 모세



야훼 하느님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셨던 거룩한 ‘불타는 떨기나무’ 자리에는 작은 성당을 지어 동정 성모께 봉헌하였다. 330년경에 전하는 기록에는 시나이 은수자들의 요청에 의해서 비잔틴 제국의 황후인 헬레나 성녀는 불타는 가시덤불이 있는 장소에 동정 성모께 봉헌한 작은 성당을 지었다고 전해진다.

4세기 내내 계속된 사라센인들의 침입으로 시나이 산의 은수자들은 학살과 순교의 고통을 당했는데 특히 305년과 400년에 많은 은수자들이 죽음을 당하였다. 몇몇의 초기의 은수자들은 시나이 산 위에서 살해당한 은수자들의 전기를 기록하고 있다. 정교회에서는 기원전 46년 율리우스 카이사르가 만든 율리우스력을 아직도 사용하고 있는데 해마다 1월 14일에 시나이 산에서 순교한 40명의 순교자들을 기억하고 있다. 실은 이보다 훨씬 더 많은 순교자들이 있지만 ‘40’이라는 순자는 성경의 숫자인 ‘40’을 상징하고 있다.

그레고리우스 13세 교황(1572~85 재위)은 1582년 율리우스력을 고쳐 시행을 선포하는데 정교회는 이것을 받아들이지 않아 그레고리우스 달력을 사용하는 서방 교회보다 13일이 늦다. 시나이 수도승 생활의 전성기는 5세기였다. 시나이 반도 남단의 은수자들의 수는 증가하였고 많은 은수자들의 명성은 동서로 퍼져 나갔다.4세기에 이곳을 순례했던 에제리아는 불타는 떨기나무 기념성당 근처에 있는 오아시스를 중심으로 수많은 은수자들이 살고 있음을 언급하고 있다. 은수자들은 주일이 되면 기념 성당에 모여 성찬례를 거행하였다.

1884년에 발견된 에제리아(또는 에테리아, 에게리아 등) 수녀의 여행기(Intinerarium Egeriae)에는 시나이 산의 은수자들을 방문한 기록을 전하고 있다. 에제리아의 순례기는 1884년 이태리 아레조에서 발견 되었는데 381년 부활절부터 384년 부활절까지 콘스탄티노풀에서 예루살렘까지 그리고 시리아, 메소포타미아, 아라비아, 이집트로 이어진 순례 여행을 하였으며 예루살렘을 기점으로 여러 곳을 순례한 것으로 보인다. 에제리아 수녀가 시나이 산과 파란을 순례한 것은 383년 12월 16일부터 20일까지로 에제리아 순례기의 처음 1,1-5,11까지 언급되고 있다.

에제리아 순례기 : 지금은 많은 수도암자와 성당이 있으며 넓은 골짜기 끝 부분에 해당되는 곳입니다. 그 성당 앞에는 아담한 정원이 있고 풍부한 물을 공급하는 샘도 있었습니다. 바로 그 정원에 ‘덤불’이 있었던 것입니다.에제리아는 시나이 산 정상에서 작은 성당을 발견하였다. 다른 하나는 호렙산(시나이 산) 위에 있었고, 세 번째는 ‘불타는 가시덤불’이 있었던 장소에 있었는데 근처에는 풍부한 물이 있는 아름다운 정원이 있었다고 전한다.에제리아의 기록을 통해 시나이 광야에서의 수도원 발전상을 볼 수 있다. 5세기 중반에 은수자 수의 증가는 ‘파란의 주교’라고 언급되는 고위 성직자에 의해서 보살펴지고 있었는데 시간이 지나면서 이 임무는 시나이의 주교에게 넘겨졌다.

2. 그리스 정교회 수도원과 요새 카타리나 수도원(Orthodox Church of Mt. Sinai)은 시나이 반도 시나이 산 발치의 북쪽 협곡에 있는 해발 1,500m 고지에 위치하고 있다. 이 수도원은 처음에는 예루살렘 총대주교의 관할권 아래에 있다가 1575년 콘스탄티노플에 의해 독립을 승인받아 동방정교회에 속한 자치 교회들 가운데 가장 작은 교회이다. 수도자의 숫자는 36명으로 제한되어 있다. 이 수도원의 대수도원장은 시나이·파란·라이투의 대주교직을 겸임하고, 수사들에 의해 선출되며, 그리스정교회 예루살렘 총대주교에 의해 축성된다. 초기 대수도원장들 가운데는 ‘천국의 계단’을 쓴 성 요한 클리마코가 유명하다. 카타리나 수도원은 이집트의 성 안토니오 수도원과 함께 그리스도교 수도원 중 세계에서 가장 오랫동안 유지되고 있는 수도원이며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되어 있다.



이 수도원 건물은 527년 비잔틴 황제 유스티니아누스 1세(Justinian Ⅰ, 527-565재위)가 초석을 놓은 뒤 530년에 완공되었다. 불타는 떨기나무 기념 성당을 중심으로 정착해 살던 은수자들은 인근 유목민들의 공격으로 피해가 심해지자 동로마 황제인 유스티니아누스 황제에게 도움을 청하게 된다. 이에 황제는 요새화된 수도원과 성벽을 쌓았다.시나이 산은 수도원 뒤쪽 산 너머에 있다. 시나이 산을 오르는 돌계단 길은 왼쪽 두개의 봉우리 사이로 나 있다.



수도원 앞쪽 길에서는 수도원 요새만 보인다. 맞은편 바위쪽으로 올라가면 수도원 안을 바라볼 수 있다.







아래 사진은 시나이 산쪽(북쪽)으로 오르는 돌계단 길에서 바라본 카타리나 수도원















수도원의 요새화된 담은 단단한 화강암을 장방형으로 잘라 다듬어 지었다. 요새는 동·서쪽이 75m, 남쪽은 80m이며 북쪽은 88m인 불규칙한 직사각형의 모양이고 높이는 남쪽 8m에서 북쪽은 25m로 지면에 따라 일정하지 않다. 화강암 요새 벽의 두께는 탑이나 지하실에 필요한 공간을 확보하기 위해 2-3m의 폭을 하고 있다. 남쪽 벽은 고대 십자가 상징물로 벽면을 장식하였고, 돌에 새긴 다른 것들은 북쪽 시나이 산을 향하여 있는데 아주 잘 보존되어 있다. 기다리는 시간에 수도원 뒤쪽을 돌아가 보면 벽에 새긴 다양한 십자가들을 볼 수 있다.

아래 십자가와 비문은 남쪽 성벽에서 볼 수 있다.



수도원 북쪽 담벽에서 아래 십자가들을 볼 수 있다



성곽이 지어지던 비잔틴 시대의 다양한 십자가들을 볼 수 있다.







두 마리의 어린양이 십자가를 경배하고 있는 십자가











북쪽 벽은 가장 많이 훼손 되었는데 수세기를 거치면서 여러 번 복구 되었고, 나폴레옹의 군대에 의해서도 1798-1801년에 복구 되었다. 수도원 출입문 위쪽에는 그리스어와 아랍어로 쓰인 현판이 놓여 있다: “하느님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신 이 시나이 산의 거룩한 수도원은 신심 깊은 로마 황제 유스티아누스가 기초를 놓고 건축하였다. 그의 통치 30년, 아담 이후 6021년 그리고 그리스도 이후 527년에 황제와 황후 테오도라를 영원히 기념한다.” 그리고 다른 헌정은 건축가 스테파노(Stefano)를 기념하고 있는 것이다

수도원에는 원래 출입문이 없었고 마치 오늘날 엘리베이터처럼 끈으로 바구니를 끌어 올리는 장치가 있었다. 몇 세기 전까지만 해도 이 장치가 운용되었고 순례객들과 수도원에 필요한 음식물들을 들어 올렸었다. 외부의 침입이 많았던 외딴 수도원에서 혹시도 모를 외부 침입자로부터 공격을 방어할 수 있었던 하나의 방편이었을 것이다. 성 카타리나 수도원 도서관과 관련하여 유명한 독일의 티센도르프도 1844년 수도원에 도착했을 때 두 명의 수도자가 끌어 올리는 이 장치를 통하여 수도원에 들어갔는데 오늘날은 더 이상 사용하지 않는다. 수도원 밖에서 이 장치를 볼 수 있으며, 오늘날은 그 아래쪽으로 출입문이 나 있다.

수도원 남쪽 성벽과 출입문



처음에는 아래쪽에 나 있는 출입문은 없었고, 그 위쪽에 있는 작은 집처럼 생긴 곳이 출입문(?)이었다. 인근 베두인들의 잦은 약탈로부터 방어하기 위하여 성곽 위쪽에서 신원을 확인 한 후 줄을 내려 사람과 필요한 식량을 끌어 올리는 구조였다.



















수도원 밖은 굉장히 단순하지만 수도원 안은 무척 복잡한 구조를 하고 있다. 수도원의 본당(Catholicon)에는 9개의 경당을 포함하고 있다: 불타는 가시덤불 경당, 성 야고보 경당, 시나이와 인근에서 살해된 거룩한 교부들의 경당, 성 마리나(St. Marina)경당, 성 콘스탄티누스와 성녀 헬레나 경당, 성 안티파스 경당, 성 고스마와 다미아노 경당, 기둥 수행자인 성 시메온과 성 안나 경당이 있고 경내에는 다른 12개 경당이 더 있다.

좁고 낮은 출입문을 통해 안쪽으로 들어가 왼쪽으로 바라다 보이는 곳에는 ‘불타는 떨기나무’ 관목이 있다. 가장 중요한 곳 중의 하나인 ‘불타는 가시덤불 경당’은 본당의 성소 뒤에 위치하고 있다. 이곳을 순례했던 에제리아 수녀는 하느님께서 나타나신 거룩한 장소인 ‘불타는 떨기나무 기념 성당’ 앞쪽에 있는 정원에서 이 관목을 보았다고 전하고 있다.

에제리아 순례기 : "우리는 계곡 안쪽으로 깊이 들어갔는데 그곳에는 무수히 많은 수도자들의 암자들이 있었고 불타는 가시덤불 성당이 있었습니다. 덤불은 지금도 푸릇푸릇합니다. 이것은 내가 일찍이 이야기 했던 불꽃 속에서 하느님이 모세에게 말씀하셨던 바로 그 덤불입니다. 덤불은 성당 앞에 있는 매우 아름다운 정원 안에 있습니다.”하느님께서 모세에게 명령하였던 것처럼 이곳에 들어가는 모든 이는 발에서 신을 벗어야만 했다.탈출 3,5 주님께서 말씀하셨다. “이리 가까이 오지 마라. 네가 서 있는 곳은 거룩한 땅이니, 네 발에서 신을 벗어라.”



불타는 떨기나무. 모세가 하느님을 만날 때 불 가운데 타지 않고 있었던 나무이다. 학명은 'Rubus sanguineus Friv'이며 장미과이며 영어로는 'Burning bush' 또는 '다. 지중해 연안에서 4-9월에 개화하며 성경에서는 탈출기 3,2-4; 신명기 33,16(덤불에 사시는 분의 은총으로 복을 받아라) 에서 언급된다. 임종을 앞둔 모세가 열두 지파를 축복하면서이다.



























떨기나무는 키가 1.5m 정도로 자라는 장미과의 상록 관목으로 습기가 많은 곳에서 덤불을 이룬다. 우리나라의 산딸기와 흡사하며 가시가 있고 잎은 작은 타원형이며 꽃 색깔은 흰색을 띤 분홍색이다. 열매는 처음에는 붉은색이지만 차츰 검은 자색으로 익는다. 꽃과 열매는 4월에서 9월까지 피고 지기를 거듭한다.



"불타는 떨기나무 경당’은 거룩한 동정녀의 ‘주님 탄생 예고’를 상기시켜 주고 있다. 초세기 신자들은 불타는 떨기나무에서 불타 없어지지 않고 불타는 모습 속에서 동정의 상징을 보았던 것이다. 불타는 떨기나무가 불에 타면서도 그 형태를 유지한 것처럼 성모 마리아 역시 처녀의 몸으로 잉태하였지만 그 처녀성은 그대로 유지했다는 것을 상징하고 있다. ‘불타는 가시덤불의 동정녀’ 이콘에서는 불타는 덤불 안쪽에 아기 예수를 앉고 있는 그리스도의 어머니를 표현하고 있고 그 왼쪽에는 신발을 벗고 경배하고 있는 모세를 그리고 있다.

전승에 의하면 이곳에 600년경에“천국의 계단”(Ladder of Paradise)을 쓴 수도원의 아빠스였던 ‘성 요한 클리마코’가 묻혔다고 한다. 천국의 계단은 수도생활로 불림을 받은 이들을 천국의 문까지 인도하는 계단인데, 수도생활의 성화를 위해 필요한 가르침으로 예수의 숨은 30년 생활에 맞추어 30개의 층계로 이루어져 있다. 마지막 30장은 정화·조명·일치를 다루는데 수덕생활의 궁극적인 목적은 무소 무욕에 있으며 수도생활의 최고 단계는 외적인 평화를 누리는데 있다고 한다.



유스티아누스 황제의 건축가는 불타는 떨기나무 전승을 살려 아름다운 바실리카(대성전)를 지으면서 이곳을 3×5m의 작은 경당을 만들어 대성전의 감실(tabernacle)로 만들었다. 불타는 떨기나무 경당. 이곳에 들어갈 때는 누구나 발에서 신을 벗어야 한다.



출입문에서 오른쪽으로 방향을 틀면 그 바로 오른쪽에는 우물이 하나 남아 있는데 전승에 의하면 모세는 미디안의 사제 르우엘(또는 이트로, 탈출기에서는 이곳에서만 ‘르우엘’이라고 언급하고 있고 ‘이트로’가 더 자주 언급된다)의 일곱 딸들을 이 우물가에서 만났고, 그들의 양 떼에게 물을 먹게 해 주었다.

탈출 2,15-20 파라오는 그 일을 전해 듣고 모세를 죽이려 하였다. 그래서 모세는 파라오를 피하여 도망쳐서, 미디안 땅에 자리 잡기로 하고 어떤 우물가에 앉아 있었다. 그런데 미디안의 사제에게는 딸이 일곱 있었다. 이들이 그곳으로 와서 물을 길어 구유에 채우고서는 아버지의 양 떼에게 물을 먹이려 하였다. 그때 목자들이 와서 그들을 쫓아내었다. 그러자 모세가 일어나서 그 딸들을 도와 양 떼에게 물을 먹여 주었다. 그들이 아버지 르우엘에게 돌아가자, “오늘은 웬일로 일찍 돌아왔느냐?” 하고 그가 물었다. “어떤 이집트 사람이 우리를 목자들의 손에서 구해 주고, 우리 대신 물까지 길어서 양 떼에게 먹여 주었습니다.” 하고 그들이 대답하자, 그가 딸들에게 말하였다. “그가 어디 있느냐? 어째서 그 사람을 내버려 두었느냐? 그를 불러다 음식을 대접하여라.”







모세의 우물. 이곳에서 모세는 미디안의 사제 이트로(르우엘) 딸들을 도와 양 떼에게 물을 먹여 주었다.











모세의 우물 옆에는 모세의 일생을 그린 프레스코화가 있다.



























수도자들의 독방과 다른 구조물들은 요새 화된 성벽의 안쪽 면을 따라 지어져 있다. 울퉁불퉁하고 경사진 바닥은 단단한 아치와 통모양의 둥근 천장 구조물로 평탄하게 되었고 그 위에는 수도자들의 숙소와 다른 건물들이 들어서 있다. 한옥처럼 되어 있는 부분은 외부 손님들이 왔을 때 머무르는 방이다.



양철지붕처럼 되어 있는 곳이 수도원 성당(바실리카)이며 오른쪽에는 성당 종탑과 이슬람 첨탑이 함께 있다.



사진에서 아래쪽으로 중앙(약간 오른쪽으로 치우쳐서) 모서리에서 왼쪽부분이 도서관이다.



수도원 도서관...







아래 사진에서 복도처럼 길게 나 있는 방이 있는 곳이 수도원 도서관이 있는 곳이다.



카타리나 수도원 바실리카 남쪽 모습




현관 입구에서 성당으로 들어가는 입구에는 6세기에 레바논 향백나무로 만든 아름답게 새겨진 출입문을 볼 수 있다. 현관 입구는 11세기 십자군들에 의해 만들어졌다.

6세기에 만들어진 향백나무 출입문




























바실리카(대성당)으로 들어가는 출입문 위쪽에 있는 예수님의 거룩한 변모






성당 내부...성당 안은 촬영 금지구역




수도원 본당(Catholicon)은 그 당시 육중한 화강암 덩어리를 사용하여 지었는데 넓은 홀이 딸린 3개의 측랑으로 이루어진 바실리카였다. 길이 40m, 폭 19.20m로 뒤쪽 제단 후진에 불타는 가시덤불 경당, 성야고보에게 봉헌한 경당과 시나이의 거룩한 교부들에게 봉헌한 경당들을 포함하고 있다.본당의 회중석(naos)은 길이가 25m, 폭 12m이다. 회중석은 이음매가 없는 통으로 된 녹색으로 칠해진 화강암 6개 기둥이 있는 두 개의 줄로 3개의 회중석으로 나누어져 있다. 에프램 부제가 전하는 바에 의하면 이 12 기둥은 1년의 매 월을 상징하였다.

각 기둥에는 해당하는 달에 기념하는 성인들의 축일에 상응하는 성인들의 성상으로 덮여 있었다. 기둥의 작은 구멍에는 성인들의 성유물이 놓여 있었다. 이러한 이유 때문에 수도자들은 몸을 숙여 차례대로 각 기둥에 입 맞춘다. 각 기둥의 기둥머리는 십자가, 어린양, 식물과 과일 등의 주제로 각기 다르게 장식하고 있다.바실리카 안 제단 이콘(iconostasis) 뒤쪽에는 성녀 카타리나의 성유골이 담긴 하얀 대리석 관이 하나 놓여 있다. 성녀의 성유물은 이른 시기 이래로 대리석 궤에 보관되어 왔다. 이 유골함은 1231년의 순례기에서도 언급되고 있다. 그 후 1688년 러시아 왕족이 은궤를 보내왔는데 은궤에는 러시아 황제가 보낸 선물이라고 키릴문자로 기록되어 있다. 그러나 성유물은 오래된 대리석 궤에 계속 모셔져 왔다.



오늘날의 종탑은 1871년에 지어졌다. 9개의 종은 러시아 황제가 보낸 선물이며 주일과 축일에 울려진다. 반면 나무로 만들어진 세만트론(semantron)은 저녁기도와 아침 기도 때 울려진다. 프레스코발디는 수도원 경내에 일례가 없는 회교 사원이 1381년경에 수도원에서 봉사하는 베두인 무슬림들을 위하여 건설된 것을 언급한다. 이슬람 사원의 첨탑(minaret)은 대성당(basilica)의 그리스도교 종탑과 나란히 서 있다. 전승에 따르면 이슬람교도들의 손에서 살아남은 수도자들은 수도원 경내에 작은 이슬람교 사원을 세워서 그들을 회유했다고 한다. 어떤 이들은 수도원의 안전을 보장해준 마호메트에게 감사하기 위해 첨탑을 지었다고도 하는데 어쩌면 이슬람으로 개종한 수도원을 돕고 있는 베두인들을 위한 작은 배려일지도 모르겠다. 수도원 안에 이슬람 사원이 지어졌지만 이 사원은 메카를 향하여 지어지지도 않았고 사용된 적도 없다고 한다.그리스도교 성당 종탑과 이슬람 첨탑이 수도원 안에 함께 있는곳은 이곳 카타리나 수도원이 유일한 곳이다















시나이 산에 오르면서 만나게 되는 베두인들은 카타리나 수도원을 위해서 특별한 임무를 수행하고 있는 이들이다. 불타는 떨기나무 성당에 대성당과 요새를 짓게 했던 유스티니아누스 황제는 루마니아와 이집트 지역에서 200 가정을 뽑아 수도자들을 보호하고 수도원을 돕도록 하였다. 비록 이슬람의 출현으로 모두 그리스도교를 포기했지만 그들은 수도원을 떠나지 않고 그들의 자리에서 그들의 역할을 오늘날까지 충실히 해 오고 있다. 이들은 모두 이슬람신자들이지만 거룩한 산의 예언자 모세를 숭배하고 있고 조르지오 성인과 카타리나 성녀를 공경하고 있다. 이들은 4개의 씨족으로 나뉘어져 있는데 각 씨족은 수도원에서 인가된 각자의 족장이 있다.수도원은 주일과 대축일을 제외한 모든 평일에 오전 9시부터 12시까지 개방한다.

3. 시나이와 이슬람의 창시자 마호메트 7세기에 접어들어 시나이의 수도원들은 아랍 정복자들에 의하여 중대한 위험에 처하게 되었다. 한때 수천 명의 은수자들이 살았던 시나이 반도에는 30여명으로 줄어들었고 희망의 불빛이 꺼져버린 시기가 되었다. 그럼에도 유스티아누스 요새와 성당, 성유물과 값진 이콘들 그리고 필사본들은 이러한 고난의 시기를 견디어 냈다.

이집트와 시리아 그리고 시나이 반도의 수도원들을 휩쓸고 간 격변의 시기에 시나이 수도원이 살아남을 수 있었던 이유가 있었다. 전승에 의하면 수도원장은 마호메트(Muhammad)에게 시나이에 살고 있는 은수자들과 그리스도인 그리고 유대인들을 보호해 줄 것을 요청 하였다. 이 요구는 기꺼이 받아들여졌고 마호메트는 그의 추종자들에게 시나이의 수도원들을 보호할 것을 지시하였다. 성 카타리나 수도원의 도서관에는 마호메트(Muhammad)가 시나이 반도를 가로지르는 여행을 하고 있을 때 마호메트로부터 받은 두 손바닥으로 날인한 문서 위에 그의 조카 아부 탈립(Abu Talib)이 622년에 서명한 문서를 보관하고 있다.



이 문서 덕분에 수도원은 무슬림들의 위협으로부터 보호 받을 수 있었다. 이 문서는 20세기의 학자들 사이에서 논쟁의 요인이 되었다. 어떤 이들은 그것의 신빙성을 주장한 반면 다른 이들, 특별히 다수의 아랍인들은 900년 이후의 것으로 보았다. 여하튼 역사가 아만토스(K.Amantos)가 제안하는 것처럼 시나이 수도원은 마호메트와 그의 후계자들의 도움 없이는 살아남을 수 없었을 것이다. 게다가 이집트의 이슬람 통치자들이 수많은 법령으로 그리스도교 수도원을 보호하도록 확증해 주었던 것은 마호메트 자신이 시나이의 보호를 지시했다는 사실로부터 가능한 일이었다. 오스만 터키 제국의 술탄 셀림 1세(Sultan Selim I)가 1517년에 이집트와 시나이를 정복했을 때도 이 마호메트의 문서는 효력을 발휘 하였다. 터키의 술탄들 특별히 셀림 1세(Selim I)와 슐레이만 대제(Suleiman the Magnificent)는 종종 관대한 법령들을 공포하여 수도원에게 관례에 따른 의무들을 관면하고 번영을 누릴 수 있도록 도움을 주었다. 이 마호메트의 손도장이 찍힌 문서의 사본은 수도원 갤러리에서 볼 수 있다.

4. 시나이와 서방 불타는 떨기나무가 있던 자리에 기념 성당이 지어지고 나서 처음 몇 세기 동안에는 각국에서 수도자들이 모여들었고, 20개의 경당에서 서로 다른 언어와 전례가 행하여 졌고 각자의 전례에 참여할 수 있었다. 하나의 믿음 안에서 다양성이 존중되던 시기였다. 570년 이태리 지역에서 온 순례자는 수도원에서 그리스어와 라틴어 그리고 콥트어와 시리아어를 말할 수 있는 3명의 아빠스와 다른 언어로 통역할 수 있는 통역가들을 만났다고 전하고 있다. 시나이 반도가 이슬람의 통치하에 놓여 있음에도 불구하고 콘스탄티노플과의 교류는 멈추지 않았고 비잔티움과의 관계는 매우 친밀하였다. 많은 비잔틴 황제들이 재정적인 보조를 확대하였고 시나이 수도원을 '정교회 전승의 보고'로 존경할 것을 명한 조치들을 통해서 시나이 수도원이 얼마나 큰 사랑과 관심의 대상이었는지를 알 수 있다.

1054년 로마 카톨릭과 동방 정교회가 정치적으로 분열되면서 11세기에 접어들어 시나이의 수도자들에게는 새로운 전기가 시작되었다. 카타리나 성녀의 성유물 일부가 프랑스로 옮겨지고 십자군들이 시나이에 머물면서(1099-1270) 유럽의 그리스도인들에게 시나이 수도자들의 안전과 독립 그리고 이집트와 팔레스타인, 콘스탄티노플 등지의 수도자들이 가진 자산을 보호할 관심을 촉진하게 하였다. 프랑크족이 시리아를 통치하는 동안 십자군들은 ‘시나이의 기사’라고 불리는 특별한 조직을 만들어 시나이 수도원의 보호와 제정적인 도움을 주었다. 본당으로 연결된 목재에 새겨진 현관과 오래된 수도원 식당의 다양한 라틴 비문은 이 시기의 것들이다. 시나이의 수도원장은 서방의 그리스도인들과 아랍의 이슬람들 사이에서 사려 깊은 균형을 유지하였다.

당시 로마의 교황은 다양한 교서와 성명서등을 통하여 수도원의 권리를 변호하였다. 호노리오 3세 교황(1217), 그레고리오 10세(1271-1276), 교황 요한 22세(1316-1334), 베네딕도 12세(1358), 인노첸스 6세(1360)는 다양한 방법으로 수도원의 선익을 표현하였고 크레타(Crete), 치프로스(Cyprus)와 다른 지역에 있는 수도원들의 특권을 호의를 가지고 중재하였다. 오스만 투르크 시기에도 유럽의 그리스도교 왕들과 주요 통치자들은 재정적인 보조를 하였고 수도원에 막대한 기부를 하였다. 카타리나 수도원은 십자군들의 세력이 후퇴하면서 제17차 피렌체 일치 공의회(1439년) 이후 로마 교회에서 돌아섰다. 로마 카톨릭과 정교회는 신학적인 논쟁, 베드로 수위권 등 현안들에 대하여 모두 일치를 이루었지만 일반 정교회 신자들과 성직자들이 보기엔 당시 지리멸렬했던 정교회의 입장에서 굴욕적인 합의로 비춰졌고 또 십자군들의 만행에 대한 분노의 앙금을 지울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나폴레옹이 1798년 이집트를 점령한 했을 때 카타리나 수도원은 그의 보호 아래 있기도 하였다.

5. 성녀 카타리나 성녀 카타리나(St.Catherine)는 310년경에 활동한 알렉산드리아의 동정 순교자이며 축일은 11월 25일이다. 상류 가문에서 태어나 학식 있는 카타리나는 철학과 수사학 · 시 · 음악 · 자연과학 · 수학 · 천문학과 의학을 공부하였다. 그녀의 아름다움과 뛰어난 학문 그리고 고귀한 성격은 그녀가 천상 신부인 예수 그리스도를 받아들이는 것을 막지 못했고 그녀는 그리스도교의 세례를 받게 된다. 4세기 초에 막시미누스(Maximinus, 308-313 재위)황제가 그리스도인들을 박해할 때, 카타리나는 우상을 숭배하는 황제를 공개적으로 비판하였고, 아무런 두려움 없이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을 고백하였다.

황제는 카타리나를 설득하기 위하여 50명의 학자들을 보내 그녀의 그리스도교에 대한 신앙을 반박하였지만 오히려 이방인 철학자들은 황제의 많은 지인들과 함께 그리스도교로 개종하게 되었다. 황제는 이러한 노력들이 헛수고임을 깨닫고 카타리나에게 고문을 하기 시작하였다. 황제는 대못을 박은 바퀴를 만들어 카타리나를 고문하였지만 카타리나는 전혀 상처를 입지 않았고 오히려 구경꾼들이 바퀴에서 튕겨 나온 못에 의하여 죽었다고 한다. 온갖 고문으로도 카타리나의 신앙을 바꾸지는 못하자 마침내 참수하고 만다. 카타리나의 목에서는 하얀 피가 쏟아져 나왔다고 한다. 카타리나의 시신은 천사들에 의하여 시나이 산의 최고봉으로 옮겨졌다. 5세기가 지난 9세기 초에 시나이 산에서 수행하던 어느 수도자가 환시에 빛에 싸인 채 천사에 의해 성녀의 시신이 시나이 산 정상으로 옮겨지는 것을 보게 된다. 그 수도자는 다음 날 산 정상에서 성녀의 시신을 발견하였고 시신은 수도원에 안치되게 된다.

시나이는 성녀 카타리나의 명성과 공경이 전파되면서 유럽에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시메온 메타프라스테스(Symeon Metaphrastes)는 10세기에 성녀의 삶을 일반 신자들에게 알리는 대단한 공헌을 하였는데 “위대한 순교자의 순교 그리고 주님의 이름으로 승리를 거둔 성녀 카타리나”라는 성인전을 기록하였다. 시메온은 중세 그리스어로 성인들의 삶을 담은 성인전을 10권으로 저술하였다. 시메온이 성녀의 성유물 일부를 프랑스로 옮겨 가면서 이 후 성녀의 시신이 발견된 산은 ‘카타리나 산’이라고 명명 되었고, 불타는 떨기나무 수도원 또는 거룩한 변모 수도원이라고 불리던 수도원은 9세기경부터 ‘성 카타리나 수도원’으로 불리게 되었다.

성녀 카타리나는 10세기경부터 동방 교회 뿐만 아니라 서방교회에서도 가장 높이 공경 받는 성인 중의 한명이 되었다. 값진 선물들이 수도원으로 보내져 왔고 많은 토지들이 유럽의 여러 나라들에 의해 기증되었다. 안젤리코(Fra Angelico), 코렛찌오(Correggio), 루벤(Rubens), 티씨안(Titian)과 무릴로(Murillo)와 같은 거장들에 의해서 성녀 카타리나는 그녀의 생애에서부터 순교에 이르기까지 캔버스 세계에서 불멸하게 되었다. 성녀의 공경과 초상화는 마찬가지로 동방으로 전파되었다. 성화에서 성녀는 왕실의 복장을 하고 화관을 쓰고 지혜와 순교를 암시하는 깃펜, 지구의, 책들 그리고 대못이 박힌 수레와 같은 물건들에 둘러싸여 있는 모습으로 묘사되어 있다. 16세기의 성녀 카타리나 이콘




성녀의 수많은 이콘들 중에서 종종 이콘의 가장자리에 작게 성녀의 생애에서부터 순교까지 가장자리를 장식한 이콘들이 있는데 오늘날까지도 수도원에 잘 보관되어 있다. 성녀 카타리나의 일생과 순교의 장면을 함께 그린 17세기의 이콘



6. 수도원 도서관

성 카타리나 수도원에서 가장 소중한 보물은 도서관이라고 할 수 있다. 성 카타리나 수도원을 가장 유명하게 만든 것은 다름 아닌 도서관에 있으며 세계에서 가장 중요한 도서관 중의 하나이다. 대부분 희랍어로 쓰여 있지만 히브리어, 아랍어, 시리아어, 아르메니아어, 이집트어 등 4500편의 필사본을 소장하고 있다.



성 카타리나 수도원에는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비잔틴시대의 이콘들뿐만 아니라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번역 필사본을 갤러리에서 만나 볼 수 있다. 5세기경에 시리아어로 번역된 루카복음서 사본은 지금까지 발견된 것 중에서 가장 오래된 번역 사본이다.



그러나 수도원에서 무엇보다도 가장 경이로운 발견은 4세기경에 쓰인 희랍어 성경인 ‘시나이 사본’(Codex Sinaiticus)이다. 전 세계에서 바티칸 사본 다음으로 중요한 필사본인 4세기경 희랍어로 쓰인 시나이 사본의 대부분은 유감스럽게도 현재 영국 런던의 대영박물관에 소장되고 있다. 시나이 사본 중 루카복음 11,2절



독일 성서학자 티센도르프(K.van Tischendorf)는 1844년 카타리나 수도원에서 불태우려고(수도원 쪽에서는 꾸며낸 이야기라고 말하고 있다) 내 놓은 낡은 바구니 안에 129장의 양피지를 발견하였다. 유심히 살펴본 성서학자인 티센도르프는 이것이 희랍어로 쓰인 70인역 본 사본임을 알아차리고 이것을 자기가 보관할 수 있도록 해달라고 청하자 수도자는 양피지의 가치를 즉각 알아차리고는 양피지 중 43장만을 주었다. 이것은 330-360년 사이에 희랍어로 쓰인 성경 필사본으로 오늘날 시나이 사본(Codex Sinaiticus)이라고 부르는 것이다. 시나이 사본은 바티칸사본(Codex Vaticanus)과 함께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성경 사본이며 동시대에 쓰인 바티칸 사본과 함께 가장 귀중한 사본으로 오늘날 교회에서 사용하고 있는 구약성경의 70인역과 신약성경은 거의 모두 이 두 사본에서 번역된 것이다. 대략적으로 70인역(희랍어로 번역된 구약 성경)의 절반정도가 남아 있고, 신약성경은 전부와 바르나바 서간(Epistle of Barnabas)과 헤르마스의 목자(The Shepherd of Hermas) 일부가 발견 되었다.

카타리나 수도원에는 필사본을 공식적으로 빌려 간다고 1844년에 티센도르프가 직접 작성하고 서명한 문서가 남아 있다. 수도원으로부터 필사본을 선물 받은 것인지 아니면 대여해 간 것인지에 대한 논쟁이 있는 것이다. 티센도르프가 처음 받은 43장의 필사본 내용은 역대기 상권, 예레미야서, 느헤미야서 그리고 에스터르기 일부로 티센도르프는 그것을 독일로 가져와 라이프찌히 대학(Leipzig University) 도서관에 기증하였고, 1846년 티센도르프는 그 내용을 ‘코덱스 프리데리코 아우구스타누스’(Codex Friderico Augustanus)라는 이름으로 출판하였다. 같은 묶음 중에서 성 카타리나 수도원에 남아 있는 사본은 이사야서 전권과 마카베오기 1권과 4권이다.

나머지 필사본을 찾기 위해 1853년 카타리나 수도원을 다시 찾았지만 별다른 수확이 없었다. 1859년에 티센도르프는 러시아 황제 알렉산드로 2세의 도움으로 필사본을 찾기 위해 3번째로 카타리나 수도원을 방문 하였다. 이 때 이미 알고 있는 나머지 86장의 필사본을 찾았을 뿐만 아니라 347장의 완전한 양피지 필사본을 발견하게 된다. 수도원은 러시아 황제에게 이 시나이 사본을 대여 해 주기로 결정하고 티센도르프를 통해서 보내게 된다. 구소련 연방은 1933년에 이 시나이 사본을 대영박물관에 10만 파운드를 받고 팔았다.

시나이 사본은 현재 347장(199-구약, 148-신약)은 런던에 있는 대영박물관에, 12장과 14 조각은 시나이 산의 성 카타리나 수도원, 43장은 독일의 라이프찌히 대학 도서관에 그리고 3장의 조각들은 세인트 피터스버그(St. Petersburg)에 있는 러시아 국립 도서관에 보관하고 있다. 2005년 6월 영국과 유럽, 이집트, 러시아와 미국의 전문가 팀이 4개의 지역에 분산되어 있는 필사본을 디지털 작업화 하기 위하여 구성 되었고 4년에 걸친 공동 작업 끝에 800 페이지로 합쳐지게 되었다. 시나이 사본은 다음 웹 사이트에서 직접 만나볼 수 있다. 이제는 온라인을 통해서 전 세계 학자들과 일반 독자들은 누구나 학문적인 연구가 가능하게 되었다.

1975년에는 성 카타리나 수도원의 수도자들이 수도원 복원 작업 도중 우연히 성 조르지오 경당 아래에서 수많은 양피지 조각들이 들어 있는 방을 발견했다. 이 조각들 중에는 시나이 사본의 12장과 11장의 모세오경 그리고 헤르마스의 목자 1장 있었다. 그리고 2009년 9월에는 박사 학위를 준비하기 위해 성 카타리나 수도원에서 머무르고 있던 니콜라스 사리스(Nikolas Sarris)가 이전에 발견되지 않은 여호수아 1장 10절이 기록되어 있는 성경 조각을 발견되기도 했다. 카타리나 수도원에 보관된 사본들은 1945년에 세운 수도원 도서관에 소장되어 있으며 미국 의회 도서관과 알렉산드리아 대학의 지원으로 모두 마이크로 필름화 하였다.

성 카타리나 수도원이 보유한 또 다른 보물은 이콘이다. 이콘 박물관이라고 부를 수 있을 정도로 크고 작은 진귀한 대작에서부터 단순한 작품까지 2000여종의 이콘이 수도원 성당과 경당, 이콘 갤러리, 제의실과 수도자들의 독방 그리고 수도원의 여러 장소에 보관되어 있다. 이 이콘들은 6세기 비잔틴 시대부터 19세기까지 장장 14세기가 넘는 오랜 세월을 거쳐 전해져 오고 있다. 이콘, 필사본과 수도원의 보물 전시관











전능자이신 예수 그리스도(Pantocrator)와 하느님의 어머니(Theotokos), 천사들과 성인 성녀들의 이콘은 하느님을 향한 사랑을 색감으로 표현한 것으로 단순한 그림이 아니라 하느님의 영감을 받은 수도자들이 기도 하면서 그들의 깊은 영성적인 심연을 기록한 하느님의 말씀이다 동방교회에서는 8-9세기에 일어난 ‘성화상 논쟁’으로 수많은 이콘들이 철저하게 파괴 되는 불운을 겪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 카타리나 수도원은 모진 풍랑을 피해갈 수 있었던 것은 지리적이고 정치적인 요인에 의한 것이다. 제국의 수도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는 시나이반도는 지리적인 특성상 사람들의 왕래가 빈번한 곳이 아닌 외진 장소였으며 더욱이 7세기 이후 비교적 타 종교에 관대했었던 이슬람의 수중에 들어갔기 때문에 비잔틴 제국의 정치적인 외풍을 피할 수 있었다. 그러므로 성화상 논쟁을 피한 초기 이콘들은 모두 36개로 잘 보관 될 수 있었다.

이콘 갤러리는 작은 규모이지만 수도원에 있는 2000여점의 이콘들 중에서 엄선된 것들이다. 이 이콘들은 비잔틴 시대부터 오늘날까지 15세기 동안을 아우르는 더없이 귀중한 문화적 유산을 담보하고 있는 것으로 그중에서 유일하고 중요한 예술적 가치를 지닌 작품들을 갤러리에서 만나볼 수 있다. 불타는 가시덤불 경당을 바라보고 왼쪽 2층에 작게 마련된 갤러리는 비록 입장료를 지불(수도자 무료) 하더라도 잠시 시간을 내어 둘러볼 가치가 있는 곳이다. 갤러리에서는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비잔틴시대의 이콘뿐만 아니라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번역 사본인 5세기경에 시리아어로 쓰인 필사본과 전례 용품들도 볼 수 있다. 6세기의 청동 십자가. 하느님께서 시나이 산 위에서 모세에게 십계명을 주시는 탈출기 장면을 기술하고 있다.



시나이 수도원 대주교의 모관과 지팡이와 십자가



6세기의 성 베드로 사도 이콘. 위쪽 중앙에는 예수님, 왼쪽은 사도 요한과 오른쪽은 성모님



12-13세기의 이콘. 십계명을 받는 모세




그리스어로 만물을 지배하는 군주라는 의미의 이 판토크라토르(Pantocrator) 이콘은 유스티아누스 황제 시대인 6세기 중엽 비잔틴 제국의 수도인 콘스탄티노플에서 제작되어 성 카타리나 수도원으로 보내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판토크라토르 이콘은 초세기 비잔틴 이콘의 양식에서 시간 속에 변하지 않는 영원성을 표현하기 위해 영원한 소년이나 착한 목자의 이미지를 탈피하여 이스라엘 셈족의 족장들이나 원로들처럼 긴 곱슬머리에 턱수염을 기른 근엄한 그리스도의 모습으로 표현하고 있다. 고대 그리스인들의 의상이었던 키톤(Chiton)이라 부르는 붉은 자주색 상의를 입고, 겉에는 푸른색 히마티온(himation)을 두르고 있는데 붉은 색과 푸른색은 그리스도가 지상에서 겪게 될 피의 수난과 천상적인 신성의 원리를 상징하며 이것은 그리스도 속에 체현된 신성과 인성의 결합 즉 삼위일체를 암시한다.

그리스도는 십자가의 형상이 나타나는 후광을 배경으로 오른손으로는 하늘과 땅의 결합을 상징하는 강복의 자세를 취하고 왼손에는 아름다운 보석으로 치장한 복음서를 든 모습을 보여주고 있는데, 그리스도의 두 손가락은 신성과 인성의 결합을, 나머지 세 손가락은 삼위일체를 상징한다. 눈은 크기와 모양이 같지 않고 입은 우울한 표정을 하고 있는 비대칭적인 모습이다. 다소 짧은 수염은 안쪽으로 휘어져 있고 머리는 왼쪽 어깨 위로 쳐져 있다.우주의 지배를 상징하는 이 판토크라토르 형상은 이콘 파괴 논쟁이 종료된 9세기 이후에 들어와서는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 내부의 정점이자 하늘과 우주의 중심을 상징하는 성당 돔에 모자이크로 표상되거나 프레스코화로 그려진다.

Christ Pantocrator(0.85 x 0.45m). 6세기 이콘



바실리카 안의 제대 후진(apse)에는 6세기에서 만들어진 아름다운 ‘그리스도의 변모’ 모자이크가 있다. 예수님의 양 옆으로는 시나이 산의 두 중심인물인 모세가 예수님의 왼쪽에 그리고 오른쪽에는 엘리야 예언자를 배치하였고 그 아래쪽으로는 무아경에 빠진 베드로와 야고보 그리고 요한이 서로 다른 모습을 취하고 있다. 그리고 그 주위 둥근 반원 아래쪽 가운데 중심에는 다윗 왕을 배치하고 그 양쪽으로는 16명의 예언자들이 둘러싸고 있으며 위쪽 라인에는 12 사도들이 그려져 있다. 예언자들과 사도들을 그린 그림 안에는 그리스어로 각자의 이름이 새겨져 있다. 12사도에는 배반자 유다가 빠지고 그 자리에는 바오로와 타대오 그리고 마티아가 포함되어 있다.



하느님의 영광에 빛’(2코린 4,6; 히브 1,3)나는 아름다운 그리스도의 변모 모자이크는 예수님의 뒤쪽 배경을 아몬드(편도나무) 모양으로 배치하였다. 예수님이나 성모님의 주위를 아몬드 모양으로 처리하는 성화 기법은 아몬드 꽃이 겨울이 끝나기도 전인 이른 봄에 피어나듯이 마치 죽어 있는 듯한 나무에서 피어나는 아몬드 꽃은 부활을 상징하는 꽃이며 하느님의 말씀은 이루어지고 말 것이라는 약속의 표징으로서 사용되었다(예레 1,11 참조). 아몬드는 안쪽은 조금 더 짙은 검은색 원형 아몬드에서 밖으로 향하면서 엷은 색으로 처리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몸에서 초자연적인 빛이 발산되는 것처럼 느끼게 하였다.

2코린 4,6 "어둠 속에서 빛이 비추어라.” 하고 이르신 하느님께서 우리 마음을 비추시어,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에 나타난 하느님의 영광을 알아보는 빛을 주셨습니다. 히브 1,3 아드님은 하느님 영광의 광채이시며 하느님 본질의 모상으로서, 만물을 당신의 강력한 말씀으로 지탱하십니다. 그분께서 죄를 깨끗이 없애신 다음, 하늘 높은 곳에 계신 존엄하신 분의 오른쪽에 앉으셨습니다.



버스 속에서 오랫동안 사막을 구경하다가 시나이 산에 접어들면, 마치 붉게 타오르는 듯한 황량한 화강암의 모습에 압도당한다. 그러다가 버스에서 내려 잠시 걷다보면 푸르른 오아시스가 전혀 다른 세상을 느끼게 한다. 수도원을 둘러싸고 있는 밖의 정원과 과수원은 이미 4세기에 이곳을 방문했던 에제리아 수녀에게도 깊은 인상을 남겼던 곳이다.

에제리아는 그녀의 순례기에서 불타는 가시덤불 근처에 있는 엄청나게 많은 물이 흘러나오는 정원을 유쾌하게 언급하고 있다. 오늘날에도 채소와 과일들과 수도원을 장식하고 있는 꽃들은 수도자들이 때로 먼 곳으로부터 운반 해 온 흙 위에서 자라고 있다. 물이 귀한 이곳 수도원에서는 빗물과 눈이 녹아 흐른 물을 거대한 물 저장소에 모으고 정원이나 과수원에 사용하고 있다. 카타리나 수도원과 정원(순례자 숙소). 주차장은 사진에서 오른쪽으로 있다. 시나이 산은 오른쪽에서 시작하여 수도원 앞쪽을 지나 왼쪽으로 올라간다.







수도원 아래쪽에 있는 순례자 숙소






정원 안에는 성 트리폰(St. Tryphon)의 경당이 딸린 작은 묘지가 있고 납골당이 있다. 흙이 넉넉하지 않은 곳이기에 항구적인 묘지가 허용되지 않는다. 그래서 이곳은 수도원에 살았던 수도자들이 마지막으로 거쳐 가는 마지막 통로이기도 하다. 세상에 남겨진 육신은 마른 모래와 함께 묻힌다. 2-3년이 지나면 무덤을 발굴하여 머리와 정강이뼈, 갈비뼈, 척추뼈 등은 서로 분리한다. 그런 후 무덤 옆에 있는 납골당에 한데 모은다. 이곳에는 수도원이 만들어질 때부터 이렇게 모아진 수도자들의 뼈들이 수북하게 쌓여 있다.

수북하게 쌓여진 수도자들의 뼈는 보는 이로 하여금 삶과 죽음, 세상적인 것들의 무상함을 묵상하게 한다. 뜨겁게 갈망하는 모든 것들은 결국 헛된 것들임을 말없이 이야기 해주고 있는 것이다. 수도자들은 언젠가는 자신의 차례라는 것을 잘 알고 있다. 어제는 그의 차례요 오늘은 네 차례다(집회 38,22). 납골당 중앙에 있는 벽장에는 시나이 산으로 오르는 계단에서 순례자들에게 고백성사를 주었던 은수자 스테파노의 시신이 놓여 있다.



복도 끝에 스테파노의 시신과 뼈들이 있다. 왼쪽은 두개골







성 카타리나 수도원의 매력은 수도원이 가지고 있는 이콘들도, 최고의 필사본을 가지고 있는 도서관도 아니다. 수도원이 가진 보물은 외적인 그 어느 것이 아니라 질그릇에 담긴 보물(2코린 4장 참조)처럼 한낮의 뙤약볕과 살 떨리는 어둔 밤의 장고의 세월을 견디어낸 그 힘에 있을 것이다. 인고의 세월을 견디어 낸 진주가 이콘들이고 도서관이지 않을까? 성 카타리나 수도원의 야경 모습

 

주님, 정녕 당신은 저의 등불이십니다
주님께서는 저의 어둠을 밝혀 주십니다.

(2사무 22,2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