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월 8일 *대림 제2주일(R) - 마태 3.1-12
“ 회개하여라. 하늘 나라가 가까이 왔다 .”
<에프엠대로 사는 수도자>
수도자라고 해서 다들 ‘에프엠대로’ 사는 것은 아닙니다. 때로 저 같이 적당, 적당히 사는 날 나리 같은 수도자도 있습니다. 그런가 하면 정말 수도자다운 형제들을 봅니다. 본업은 당연히 복음 선포요, 사목활동입니다. 취미는 기도생활입니다. 특기는 공부입니다. 관심사는 오로지 형제들의 영적생활의 향상이나 수도회의 쇄신 등과 같은 것입니다. 일상적인 대화 역시 어떻게 하면 ‘하느님 마음에 들게 잘 살까?’입니다.
지나치다 싶은 정도로 정도(正道)만을 고집하기에 재미가 없습니다. 여유가 없어 보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교회가 살아나기 위해, 수도회가 쇄신되기 위해서는 이런 분들이 좀 더 많아져야 합니다.
세례자 요한이 그랬습니다. 세례자 요한의 삶은 한 마디로 표현해서 ‘팍팍하기 그지없는’ 삶이었습니다. 인간적인 측면에서 본다면 참으로 재미없는 삶이었습니다.
세례자 요한은 다양한 눈요기 거리, 호기심을 자극하는 재미있는 볼거리들로 가득 찬 도시를 멀리하고 황량한 광야에서 살았습니다. 풀 한포기 없는 광야, 끝도 없이 펼쳐진 하늘과 땅 밖에는 아무것도 없는 광야에서 쓸쓸하고 고독하게 살았습니다.
그의 주식은 메뚜기와 들꿀이었습니다. 메뚜기 드셔보셨습니까? 정말 먹을 것이 없는 곤충입니다. 날개 떼어내고, 머리 떼어내고, 다리 떼어내면 아무 것도 먹을 것이 없습니다. 맛도 그저 그렇습니다. 그래서 메뚜기는 당시 유다 사회에서 식물의 범주로 분류했습니다. 그만큼 영양가가 없는 음식, 풀과도 같은 거친 음식으로 여겨졌습니다.
들꿀 역시, 요즘 말하는 값비싼 석청이 아니라 당시 가장 소박하고도 초라한 음식이었습니다. 메뚜기와 들꿀로 연명했다는 말은 우리말로 초근목피로 연명했다는 말과 동일했습니다. 그만큼 세례자 요한은 검소하게 살았습니다.
세례자 요한하면 떠오르는 단어들은 메뚜기와 들꿀이란 단어들인데, 이 단어들은 단순한 금육이나 검소한 식생활을 뛰어넘어 하느님을 향한 순수하고 지고한 열정을 의미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세례자 요한은 자신에 대해서 아무것도 구하지 않았습니다. 자신을 위해서는 불필요한 에너지 소모를 전혀 하지 않았습니다. 오로지 오시는 예수님께로 주파수를 맞췄습니다. 세례자 요한은 자기중심이 아니라 하느님 중심의 삶을 한평생 추구했습니다.
당시 세례자 요한은 세례갱신운동은 군중들 사이에서 큰 호응을 얻었고, 사람들은 세례자 요한을 큰 스승으로 여긴 걸로 역사가 요세푸스는 전하고 있습니다. 세례자 요한의 인기는 당시 절정을 구가하고 있었습니다.
당시 사람들로부터 크게 추앙받고 있었던 세례자 요한이었지만, 예수님께서 구세사의 전면에 등장하시자 즉시 이렇게 증언하며 크게 물러섭니다.
“나는 몸을 굽혀 그분의 신발 끈을 풀어드릴 자격조차 없다.”
신발 끈을 묶고 푸는 일은 당시 노예들이 일상적으로 하던 일이었습니다. 당시 노예들은 주인 가족들을 위해서 하루 수십 번도 더 신발 끈을 묶고 풀었습니다.
그런데 세례자 요한은 신발 끈 조차 풀어드릴 자격이 없다고 하니 자신을 노예보다 더 낮춘 것입니다.
세례자 요한이 선구자로서 가장 적격이었던 가장 큰 이유는 ‘자신의 정체성에 대한 명확한 인식’ 때문입니다. 세례자 요한은 자신이 그리스도가 아니요, 단지 그리스도에 앞서서 파견된 존재라는 사실을 명확하게 인지하고 있었습니다. 세례자 요한이 가장 큰 예언자로 불리는 이유는 자신의 정체성에 대해서 그 어떤 환상에도 빠지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세례자 요한이 조금이라도 덕이 덜 닦인 사람이었더라면, 선구자로서의 삶의 준비가 부족했더라면 백성의 환호와 박수갈채를 자신의 것으로 만들 수 있었습니다. 당시 올라갈 때 까지 올라갔던 자신에 대한 높은 지지율을 바라보며 착각에 빠질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세례자 요한은 파견된 자로서 자신의 소명을 분명히 알고 있었기 때문에 개인적인 야욕이 스며드는 것을 방관하지 않았습니다. 즉시 원점으로 돌아갑니다. 하느님께서 자신을 파견하신 이유를 상기하면서 겸손의 덕을 청합니다.
이토록 겸손했던 세례자 요한의 삶, 그 배경에 무엇이 있었을까요? 세례자 요한은 오랜 기간 광야에서 머물렀습니다. 그곳에서의 강도 높은 피정과 자기 쇄신 작업을 통해 자신의 내면세계를 잘 다스렸습니다. 고독과 침묵 속의 광야 생활에 충실했기에 세례자 요한은 지속적으로 하느님의 음성을 잘 알아들을 수 있었던 것입니다.
한때 잘 나가던 세례자 요한을 사람들이 그냥 두었을 것 같습니까? 많은 사람들이 집요하게 따라다니면서 ‘저녁 한번 사겠다, 차 한대 빼드리겠다’고 괴롭혔을 것입니다. 예루살렘 부인들은 메뚜기와 들 꿀로 연명하는 세례자 요한을 보며 ‘저런 저런’ 하면서 음식보따리를 싸들고 따라다녔겠지요.
그럴수록 세례자 요한은 더욱 더 깊은 광야로 들어갔습니다. 더욱 더 깊은 고독 속으로 들어갔습니다. 더욱 더 청빈한 삶, 더 정직하고 깨끗한 삶을 추구했습니다. 이런 세례자 요한이었기에 지속적인 겸손을 유지할 수 있었습니다. 한 평생 예수님의 선구자로서의 삶, 구도자로서의 삶에 충실할 수 있었습니다.
신앙생활의 연륜이 쌓여 가면 갈수록 우리에게 주어지는 과제가 있는데, 그것은 바로 세례자 요한이 우리에게 보여준 모범입니다.
‘예수님께서 주인공인 연극에 조연으로서의 겸손함 ’
†살레시오회 한국관구 부관구장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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