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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 신부님들의 강론

~ 대림 2주간 화요일 강론모음 ~

 

 

 

 

 


 
2013년 12월 10일 대림 제2주간 화요일

 


너희는 어떻게 생각하느냐?

어떤 사람에게 양 백 마리가 있는데

그 가운데 한 마리가 길을 잃으면,

아흔아홉 마리를 산에 남겨 준 채

길 잃은 양을 찾아 나서지 않겠느냐?

(마태오 18,12)

 

 What is your opinion?

If a man has a hundred sheep

and one of them goes astray,
will he not leave the ninety-nine in the hills

and one of them goes astray,
will he not leave the ninety-nine in the hills
and go in search of the stray?

 

 

 


말씀의 초대

 이사야 예언자는 바빌론으로 끌려가 유배의 삶을 살고 있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해방을 선포한다. 하느님께서 내리신 심판을 이제 거두시어 다시 예루살렘으로 돌아가게 되는 것이다(제1독서). 예수님께서는 하느님께서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을 얼마나 사랑하시는지를 ‘되찾은 양의 비유’로 말씀하신다(복음).

☆☆☆

오늘의 묵상

 오늘 복음의 비유에 대하여 어느 교우가 이러한 의문을 제기한 적이 있습니다. ‘어떻게 양이 길을 잃을 수 있을까요? 그냥 울타리 안에 조용히 머물면 그럴 이유가 없지 않을까요? 설사 양을 한 마리 잃어버렸다고 하더라도 그 어떤 목자가 다른 아흔아홉 마리를 버려둔 채 그 한 마리를 찾아 나설까요?’
이러한 의문은 예수님 시대의 이스라엘 땅에서 양을 키우는 방식을 조금이라도 알면 답을 쉽게 찾을 수 있습니다. 유다 지방의 목초지는 고원 지대에 좁고 길게 뻗쳐 있는데, 그 폭은 3-5킬로미터이며 울타리도 없습니다. 그래서 양들이 여기저기 다니며 풀을 뜯다가 벼랑 아래로 구르거나 갇히는 일이 잦았습니다. 당시에는 양 떼를 서너 명의 목자가 관리했기 때문에 이렇게 잃어버린 양을 목자 한 사람이 찾아 나서는 동안 다른 목자들이 나머지 양들을 돌보았습니다.
오늘 복음은 우리가 길을 잃고 방황할 때 하느님께서 몸소 나서시어 우리를 살리고자 하신다는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오신 모습 자체가 바로 잃어버린 양을 찾아 나서는 목자의 모습이기도 합니다. 곧 예수님께서는 하늘 높은 곳에만 머무르시지 않고, 죽음의 골짜기로 치닫고 있는 우리를 구하시어 생명의 풀밭으로 인도하시고자 이 세상에 오신 것입니다.
그러나 아무리 목자이신 주님께서 우리를 구하러 오신다고 하여도, 우리 스스로 ‘나는 길을 잃지 않았다.’고 고집부리거나 그분 등에 업히기를 바라지 않는다면 주님께서도 우리를 인도하지 않으실 것입니다. 우리 스스로 주님의 이끄심을 불필요하게 생각하거나 그분 품에 안기려는 마음이 없다면, 우리는 결코 생명의 풀밭으로 갈 수 없을 것입니다. 


 
 

 
 < 내 안의 자비심 존중하기 >

        -전삼용신부-

 

이철환 작가의 ‘연탄길 2’에 ‘꼴찌의 달리기’란 제목으로 소개된 실화입니다.

한 여름 고등학교 운동장에서 오래달리기 체육실기 측정을 하고 있었습니다. 선두는 매우 빠른 속도로 질주하고 있었고 꼴찌로 달리고 있는 한 아이는 쓰러질 듯 쓰러질 듯 간신히 발을 떼고 있었습니다. 선두는 한 바퀴를 더 돌아 꼴찌를 앞질러 손을 번쩍 치켜들며 결승점을 통과합니다. 선두가 결승점을 통과한 이후에도 꼴찌는 한 바퀴 반이나 남았으며 얼굴은 홍당무가 다 되었고 더 이상 발을 움직이지 못할 정도로 몸이 비틀거렸습니다. 그러나 포기할 수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이것이 성적에 반영되는 것이고 끝까지 포기하지 않으면 성적을 줄 것이라 선생님이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꼴찌와 함께 뛰는 아이가 있었습니다. 그는 꼴찌의 팔을 끌며 용기를 주었습니다. 꼴찌는 가쁜 숨을 몰아쉬며 빨간 색종이 같은 얼굴로 힘겨워했습니다. 꼴찌를 격려하던 학생은 전국대회에서 입상까지 했던 그 학교의 육상선수였습니다. 그는 결승점까지 꼴찌와 함께 달렸습니다. 꼴찌인 친구를 결승점에 들여보내고 나서 그는 마지막으로 결승점으로 들어왔습니다. 백 점을 받을 수 있는 과목은 체육밖에 없었지만 친구의 힘겨운 질주를 그는 외면할 수 없었습니다.

 

아무리 일등을 강조하고 경쟁에서 이길 것을 가르치더라도 어떤 아이들 마음은 꺾을 수 없습니다. 그 육상선수에게 유일하게 일등을 할 수 있는 과목은 체육밖에는 없었습니다. 그러나 그것마저 포기하게 만든 원인은 무엇일까요? 아마도 그렇게 해서 일등을 해봐야 친구를 외면한 자신의 마음이 더 아플 것을 알았기 때문일 것입니다. 모든 사람에겐 ‘자비심’이 있어서 그것을 배신할 때는 양심의 가책을 받아 괴로워하게 되어있습니다. 우리는 남과의 경쟁에서 이겨 얻는 기쁨이나, 혹은 뒤쳐진 이와 함께 해 주면서 얻는 위로와 둘 중에 하나를 선택해야 할 때가 있습니다.

 

제가 이번에 인사이동 발령을 받아 오산성당을 떠나게 되었습니다. 저도 마음이 아프고 신자분들도 그럴 것입니다. 이별의 아픔일 것입니다. 그런데 제가 더 신경 쓰이는 것이 있습니다. 바로 제가 왔을 때는 잘 나오며 활동을 하다가 지금은 보이지 않는 신자들입니다. 물론 더 많은 새로운 신자분들이 새로 나와 주셔서 숫자적으로는 적지 않게 늘었습니다. 그래서 그냥 떠나도 칭찬은 받을 것 같습니다. 그러나 나오다 나오지 않는 신자분들, 어쩌면 그분들 때문에 발걸음이 더 무거울 것도 같습니다. 그래서 일부러 전화번호를 찾아 전화를 하기도 하고, 그 사람을 아는 사람들에게 꼭 제가 가기 전에 나와 얼굴을 보여 달라고도 합니다. 양을 한 마리라도 잃고 싶지 않은 것, 떠난 양이 더 생각나는 것, 이것이 아마도 목자의 작은 마음인 것 같습니다. 다행히 이번 주일 미사에 저의 연락을 받고 몇 달 동안 보이지 않던 신자가 성당에 다시 나온 것을 보니 마음이 가벼워졌습니다. 숫자적으로 늘은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잃어버린 한 마리 양을 찾아나서는 예수님의 심정을 조금은 알 것 같습니다.

 

모든 것이 꽁꽁 얼어붙은 듯이 추운 겨울 밤, 필라델피아로 가는 증기선 위에서 어떤 신사가 실수로 바다 속으로 바지고 말았습니다. 배에 탄 모든 사람들이 갑판 위로 몰렸습니다. 그리고 사람들은 재빨리 밧줄을 바다 속으로 던졌습니다. 바다 속에서 허우적거리던 신사는 구사일생으로 갑판으로 끌어올려졌습니다. 그가 무사한 것을 보았을 때, 그를 전혀 알지 못하던 사람들까지 모두 기쁨의 환호성을 질렀다고 합니다.

 

이것은 무엇을 말할까요? 사람들 마음 안에는 모두 이 ‘자비의 마음’이 들어있다는 증거가 아닐까요? 자신과 아무런 상관이 없던 사람일지라도 물에 빠져 죽게 된다면 마음이 편치 않을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어떤 영혼도 잃게 되는 것은 하느님의 뜻이 아닙니다. 하느님의 마음이 아프고 모든 연혼들의 마음도 아프기 때문입니다. 반대로 한 영혼이 구원된다면 하느님은 물론 모든 천사들도 기뻐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본다면 그 잃어버린 한 마리 어린 양은 나와 아무런 관련이 없는 양이 아닙니다. 마치 발가락에 가시가 박히면 온 정신이 그 발가락에 집중되는 것처럼 모든 영혼은 다 하느님에게서 나왔기 때문에 하느님 안에서 서로 연결되어 있습니다. 나와 상관없는 영혼은 없습니다. 모든 영혼이 하느님으로부터 나왔기에 모든 영혼이 나와 연결되어 있습니다. 한 영혼을 구원하는 것이 곧 하느님을 기쁘게 해 드리는 것이고 모든 영혼들을 기쁘게 하는 것이고 내가 기쁠 수 있는 일입니다. 어차피 내 안에 자비심이 박혀있다면 그 사랑의 마음을 배반하지 않는 것이 행복의 길일 것입니다.

 

 

 입장 바꿔 생각하기     

-조명연 신부-

 


 오늘 복음의 예수님 말씀을 생각해봅니다. 한 마리 양을 위해서
아흔아홉 마리 양을 그대로 놔두고 찾아나선다는 것. 이 사회에서
이런 행동을 한다면 멍청하다는, 어리석다는 평을 받기 십상일 것입니다.
물론 잃어버린 양 한 마리도 중요하지요. 하지만 저의 손길을 기다리고 있는
다른 아흔아홉 마리의 양은 어떻게 합니까? 그래서 그 한 마리를 찾기 위해
길을 나선 사이에 열 마리의 양을 잃어버린다면 어떻게 할 것입니까?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우리들의 생각을 뒤엎으십니다. 즉, 작은 것 또한
내쳐서는 안될 만큼 소중하다는 것을 우리에게 힘주어서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의 이 말씀을 보다 더 잘 이해하기 위해서는 내 자신이
목자의 위치가 아니라 양이 되어 생각해봐야 할 것입니다. 길을 잃고 애타게
목자를 찾는 그 한 마리의 양이 바로 나라고 생각해보세요. 나를 지켜주는
목자도 없고, 사나운 짐승들만이 주위에서 나의 허점을 노리면서
잡아먹으려고 합니다. 그렇다면 어때요? 목자가 나를 포기하는 것이 옳은가요?
절대 그래서는 아니지요. 바로 하느님 아버지의 사랑이 이것입니다.
작은 사람도 포기할 수 없다는 것. 그래서 우리는 하느님께
감사의 기도를 바쳐야 하는 것입니다. 포기하지 않는 사랑에….

 

 


 


 서로 잃어버린 채

-김명희(이화여자대학교 생명의료법인연구소)-

 


 요즘 저에게 세상에서 가장 힘든 일 중 하나를 대라면 아이를 키우는 것이라고 대답하고 싶습니다. 오늘날 한국에서 아이를 키우는 일은 물질적·정신적·육체적으로 너무 어려운 것 같습니다. 좋은 대학을 가기 위해서는 아이들과 부모가 혼연일체가 되어 애를 써야 합니다. 마치 가을 운동회 날 흔하게 행해지던 부모와 아이의 이인삼각 경기처럼 말입니다.
아이들은 아이들대로 이른 아침부터 학교에서 하루 종일 공부를 하고, 방과후에는 학원과 과외 교습소에서 밤늦게까지 심지어 새벽 한두 시까지 공부를 해야 합니다. 집은 그저 서너 시간 잠을 자기 위해서 들르는 장소일 뿐 더 이상 아이들의 보금자리가 아닌 것 같습니다. 부모는 부모대로 허리가 휩니다. 학원비·과외비 등 아이들을 교육시키는 데 들어가는 비용이 만만치 않습니다. 하루 종일 직장에서 시달리고도 일찍 잠자리에 들기는커녕 밤늦게 돌아오는 아이들을 기다려야 합니다. 때로는 학원이나 과외 교습소 앞에서 밤늦게 귀가하는 아이들을 기다리기도 합니다.
우리는 마치 전쟁에서 승리하기 위해 안간힘을 쏟는 것처럼 대학입시에서 이기기 위해 그렇게 합니다. 하지만 이기기 위해 애를 쓰고 승자의 기쁨을 누리기 위해 안간힘을 쓰는 동안 부모는 아이들을 잃어버리고 아이들은 부모를 잃어버리고 살아갑니다. 몸은 같이 살지만 마음은 서로 잃어버린 채 말입니다.
오늘 예수님은 길 잃은 우리를 찾으십니다. 하느님은 길을 잃고 헤매는 양 한 마리도 소중하게 생각하고 계십니다. 아니 길을 잃은 양이기에 하느님은 길을 잃지 않은 양보다도 더 소중하게 생각하고 계시다는 것을 오늘 말씀하고 싶으신 것 같습니다.
내 아이가 좋은 대학에 가는 것은 중요합니다. 그러나 오늘 내 아이의 마음이 길을 잃고 헤매고 있지는 않은지 먼저 살펴야겠습니다. 예수님이 길 잃은 양을 찾아가시는 것처럼 학원 앞이 아니라 아이의 마음 안으로 떠나야 할 것 같습니다. 오늘 예수님은 그것이 더 중요하다고 우리에게 말씀하시고 계십니다.

 

 

 


 


 우리를 구원하시는 하느님
-경규봉 신부 -


예언자 이사야는 하느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을 바빌론의 종살이에서 해방시키시어 예루살렘으로 귀환하도록 하실 것을 예언한다. 하느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의 죄를 용서하셨다. 이스라엘 백성은 바빌론의 포로생활을 통하여 자신들의 죄를 깨달았고,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자비와 계약으로 그들의 죄를 용서하신 것이다. 그리하여 천사는 그들이 종살이를 마치고 예루살렘으로 귀환하리라고 선포한다.

이 말씀 속에는 죄의 저주 아래에 있는 세상을 구원하시기 위하여 그리스도께서 강생하시리라는 예언까지도 담겨져 있다. 그리스도의 강생을 위하여 먼저 세례자 요한이 그리스도를 준비할 것이며(말라 4,6 ; 루가 1,17), 그 후 주님께서 오실 것이다.

인생은 한낱 풀포기나 들꽃과 같아서 시들고 지는 것이다. 사람이 소중하게 여겼던 모든 것들, - 예절, 친절, 선행, 건강, 지식이나 지혜, 명예나 지위 등 인간적인 모든 것이 하느님 앞에서는 시드는 풀이나 지는 꽃처럼 일시적인 것에 불과하다. 오직 하느님의 말씀만이 영원불변하며, 말씀은 반드시 실현된다. 이제 하느님의 말씀이 이루어져 바빌론에서 종살이하던 이스라엘 백성이 예루살렘으로 귀환할 것이며, 나아가 예수 그리스도께서 강생하실 것이다.

하느님께서는 강한 권능을 떨치시며 오시어 당신을 대적하던 모든 어둠의 세력들을 정복하실 것이다. 하느님께서 그러한 세력과의 싸움에서 승리하시어 당신 백성을 찾으시고 구원하시어 데려오실 것이다. 이스라엘 백성이 바빌론의 종살이에서 해방되어 귀환하리라는 이 예언 속에는 목자이신 그리스도께서 당신 백성을 구원하시라라는 예언을 담고 있다(요한 10,11-15).

하느님은 우리를 구원하시는 하느님이시다. 하느님께서는 천지창조 때부터 인류구원을 계획하셨다. 그래서 에덴이라는 기쁨의 동산을 사람에게 주셨고, 첫 사람이 죄를 지었을 때에도 구원을 약속하셨다. 하느님께서는 인류구원을 위하여 한 백성을 선택하셨다.

하느님께서 친히 그들의 왕이 되시고, 그들을 당신 백성으로 삼으셨다. 하느님께서는 그들과 계약을 맺으시고 축복을 내리셨다. 그들이 계약을 어기고 하느님의 말씀을 거스르며 죄를 지어 그 대가를 치를 때에도 그들에게 구원의 약속만은 거두지 않으셨다. 인류를 구원하고자 하시는 하느님의 계획은 언제나 변함이 없었던 것이다.

사람이 어떤 죄를 짓고, 어떻게 배반할지라도 하느님의 사랑과 자비는 변함이 없고, 그래서 사람의 구원계획 만큼은 변하지 않았다. 하느님께서는 당신 백성에게 끊임없이 구원을 약속하시며 그들을 인도하신다. 당신 백성이 고통과 좌절에 빠져있을 때, 하느님께 희망을 두고 그 어려움을 헤쳐 나가도록 구원을 약속하신다. 사람에 대한 하느님의 사랑은 그처럼 크다.

그리고 때가 이르자 예수 그리스도를 세상에 보내셔서 인류를 죄의 종살이에서 해방시키시고 구원하셨다. 그리스도를 통해서 구원과 하느님 나라를 약속하셨다. 하느님은 구원의 하느님이시며 약속의 하느님, 약속을 성취하시는 하느님이시다.

그러므로 구원의 하느님, 약속과 성취의 하느님께 희망을 두고 살아가자. 우리가 이스라엘 백성이 바빌론에서 종살이를 하는 것처럼 힘들고 어려울 때라도, 좌절과 절망이 밀려올지라도 하느님께 희망을 두고 어려움을 이겨나가자. 비록 인간적인 상황이 절망스러울지라도 그 모든 것은 하느님 앞에서는 시드는 풀이나 지는 꽃과 같은 것임을 생각하고, 오직 영원하신 하느님의 말씀에 의지하여 살아가자. 세상을 바라보지 말고 하느님을 바라보며 살아가자..........◆


 
잃어버린 양을 찾아 나서는 성탄...
-정 호 신부-


우리는 지금 대림절이라는 시간 속에 들어와 있습니다. 예수님의 오셨음을 기억하고 다시 오마 하신 약속인 재림을 기다리는 시기에 우리는 예수님의 오심에 대한 여러 이야기를 들으며 어떤 준비를 해야 할까요.

교회는 성탄을 준비하며 사람들에게 고해성사를 통한 하느님 오심에 대한 깔끔한 준비하게 하고 예수님 오시는 길을 잘 마련하도록 눈이 부시도록 화려한 불과 장식으로 성탄을 꾸밉니다. 성탄의 의미와는 상관없이 우리가 기뻐할 수 있는 날로 그 날을 여기는 세상의 떠들썩함과 더불어 우리의 성탄도 그렇게 점점 다가옵니다.

그런 우리에게 오늘 들려오는 예수님의 이야기는 하느님의 말씀이 사람이 되신 이유, 곧 첫성탄이 우리에게 다가온 이유를 알려줍니다.

길을 잃지 않은 아흔아홉 마리 양을 두고 한 마리 양을 찾아 나선 목자의 비유는 우리에게 아주 익숙한 이야기입니다. 주님은 이 이야기를 꺼내시면서 우리 같으면 어떻게 하겠느냐고 물으십니다. 그리고 당신은 당연히 그 한 마리를 찾아 나서겠노라고 말씀하십니다. 우리도 마땅히 그럴 것이라고 말씀하시면서 말입니다.

그러나 어떤 면으로 보더라도 우리는 예수님의 이 말씀과는 다른 삶을 삽니다. 주님은 당연히라는 표현을 쓰시지만 우리에겐 길 잃은 괘씸한 한 마리 양보다는 아직 내 품에 있는 아흔아홉마리 양이 더 커보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 한 마리는 나중에 다른 방법으로 보충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아깝지만 그 정신 없는 짐승 하나 따위에 내 모든 제산을 잃을 수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비약한 것 처럼 들리지만 많은 사람들은 그렇게 살고 있으며 심지어 신앙생활을 하면서도 그 한마리를 다른 방법으로 빨리 채우는 것이 하느님의 은총으로 여기는 일까지도 빈번하게 일어납니다.

이것은 주님의 오실 날에 대한 기대에서도 드러납니다. 우리는 예수님께서 다시 오시면 왕으로 오신다는 것을 알고 있고 그분 앞에서 우리의 심판이 이루어지리라는 것을 압니다. 그러나 대게 그 심판에 대해 우리는 공정하시고 엄하신 하느님 만을 기립니다. 그래서 더 고해성사를 강조하는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비유 속의 예수님은 오신 이유가 당신 우리 안에 있는 대다수의 양이 아닌 길을 잃은 한 마리 때문이라고 이야기하십니다. 그리고 그 길이 당연한 길이었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우리에게 그래야 하지 않겠느냐고 물으십니다.

예수님이 이 같이 그 정신 없는 양 한 마리에 집착하시는 이유가 뭘까요? 우리에게 양은 우리의 소유물로 여겨지지만 그래서 없으면 아쉽지만 어쩔 수 없는 것으로 여겨지지만 예수님께 그 양은 절대 그럴 수 없는 것으로 등장합니다. 그런데 우리에게 소유물인 그 양이 사실 우리 자신임을 우리는 잊지 말아야 합니다. 하느님은 우리 중 우리가 실망하고 단죄하고 나쁘다고 하는 그 어리석은 사람 하나 때문에 사람이 되신분입니다.

그것이 주님이 우리에게 주시는 사랑이며, 우리에게 바라시는 사랑입니다. 그 사랑 때문에 하느님이 사람이 되셨고 다시는 버리지 않겠다 하신 세상을 구하시기 위해 그 길을 오신 것입니다. 그래서 세상은 살아있는 사랑을 확인하게 되었고 그분을 알던 이들이 자신들의 부족함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의 뒤를 따름으로 하느님의 거룩하신 모습을 되찾게 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사랑을 아는 우리에게 예수님의 이 목자의 모습은 당연한 우리 삶의 태도가 되어야 합니다.

대림절, 그 날에 우리가 기억해야 하는 주님의 첫성탄은 그렇게 우리를 사랑하셔서 우리를 살리시고자 찾아오신 하느님의 발걸음이어야 합니다. 그리고 마지막날 그분이 다시 오실 때에 우리에게 바라시는 그 심판의 기준이 당연히 그렇게 살아야 할 주님의 삶을 우리가 살고 있는가, 곧 그만큼 세상을, 사람을 사랑하며 사는 가임을 나타내줍니다.

사랑을 기준으로 성탄을 준비하는 사람과 무서운 심판을 기준으로 성탄을 준비하는 사람의 태도는 분명 다를 것입니다. 사랑으로 준비하는 성탄은 주님과 우리를 하나되게 만들겠지만 심판만을 생각하는 이는 심판 앞에서 하느님과 한 없이 멀리 떨어지게 되어 버릴 것입니다.

길을 잃은 양을 떠난 목자, 그 목자가 우리의 주님이셨습니다. 그분을 생각하며 행복하게 성탄을 준비합시다. 우리도 그분처럼 말입니다...........◆

 

 

 

 


 우리 각자는 하느님 아버지께 소중하고 고유하다.

-하유설 신부(메리놀외방전교회) -

 


 남성학을 공부하면서 나는 대부분의 남자들이 아버지와 관계가 어렵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생각해 보니 나도 아버지와 관계가 그리 좋지 않았다. 아버지와 깊은 대화를 해본 적도 없었고, 아버지가 화를 내면 무척 두려웠다. 그러나 중년기에 들어 남성학을 공부하면서 아버지와 관계를 바꿀 수 있다는 것을 배웠고 실천하기 위해 노력했다. 전화를 걸기 전에 아버지와 할 이야기를 미리 준비하였고 그러면서 차츰 각자에게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 이야기를 나누게 되었다. 만나서 간단하게 식사를 하게 될 때도 이야깃거리를 준비했다. 1992년 2월에는 식사를 하면서 종교 체험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었다. 대화 중에 아버지는 눈물을 흘리면서 당신이 나를 얼마나 소중하게 여기는지를 말씀하셨는데 한 달 후에 아버지는 심장마비로 돌아가셨다. 겨우 아버지와 가까워졌는데…. 나는 아버지의 죽음을 받아들이기가 힘들었다. 그러나 죽음도 우리의 사랑을 끊을 수 없을 것이라는 것과 아버지가 돌아가시기 전에 내게 큰 축복을 주셨다는 것을 깨달았다. 내가 아버지의 소중한 사람이라는 말을 들은 것이 무엇보다도 크고 영원히 잊을 수 없는 선물이었다.

예수님도 오늘 비유를 통해 같은 말씀을 하시는 것 같다. 어떤 목자가 양 백 마리 중에 한 마리를 잃으면 어떻게 하겠는가? 이 비유의 핵심은 아흔아홉 마리를 잃을 수 있는데도 이들을 두고 한 마리를 찾아 나서는 어리석은 목자에 대한 것이다. 이 비유는 우리 각자에 대한 하느님의 사랑, 소중하게 여김을 표현하는 것이라 본다. 우리는 하느님의 모습대로 창조되었고 하느님의 마음에 드는 사랑하는 아이다. 우리 각자가 하느님 아버지께 소중하고 고유하다는 것을 깨닫는 것이야말로 가족과 공동체와 함께 건강하게 살아갈 수 있는 열쇠다. 이번 대림절에 나를 소중하게 여기는 이가 누구인지 생각해 보자. 또 가정이나 공동체나 직장 안에서 내가 말이나 행동으로 다른 이에게 그의 소중함을 표현하고 있는지 생각해 보자.


 

 

 


 누렁이     

-민경철 신부-

 


제게 누렁이란 순종 똥개가 있었습니다. 목숨을 바쳐 주인에게 충성을 바친
놈이지요. 본당을 떠날 때 이 녀석과 헤어져야 했던 아픔이 되살아나는군요.
어느 날 사제관에 침투한 동네 건달 진돗개 두 마리를 응징하기 위해 혈투를
벌였습니다. 안타깝게도 다리에 큰 부상을 입었더랬죠. 동물 병원에 데리고
갔는데 수술을 하든가 아니면 안락사를 시키든가 결정을 내려달라 하더군요.
막상 수술비가 아깝게 느껴졌습니다. 이 똥개 팔아도 사료비도 못 건지는데
이 녀석이 뭐가 대단하다고 돈을 들여야 하나? 하지만 곧바로 수술시켰지요.
인간적인 계산으론 어리석은 행동일지 모르지만 한 가족이 되어버린 녀석을
잃고 싶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주님의 생각… 계산해보니까 아흔아홉 마리 중 또 다른 녀석에게
문제가 생길 것 같아 길 잃은 녀석을 포기하는 것이 아니라
잃어버린 양 하나도 소홀히 할 수 없는 소중한 자식이기에
찾아 나서시는 것입니다.
저처럼 잠시라도 수술비 아깝게 생각하시는 분이 아니십니다.
주님은 우리 머리카락까지 다 세어 두셨던 분입니다(루카 12,7).
 

 

  


작은 이

-오영숙 수녀(사랑의 씨튼 수녀회)-

 

하느님이신 예수님이 ‘작은 이’가 되어 우리 가운데 오셨습니다. 세상에서 가장 약한 모습으로, 자신의 힘으로는 아무것도 할 수 없이 온전히 남에게 자신을 맡겨야 하는 ‘작은 아기’로 오셨고 일생을 ‘작은 이’로 사셨으며 그분의 삶은 온통 그들에 대한 사랑과 연민으로 가득 차 있었습니다. 그분의 마음은 그들이 겪어야 하는 아픔으로 인해 부서져 내렸고 그들을 향한 사랑은 그 시대의 관습이나 제도를 뛰어넘는 것이었습니다.
길 잃은 한 마리 양은 곧 이 ‘작은 이’들에 대한 비유입니다. 언젠가 읽은 책에 이런 내용이 있었습니다. “아가페는 하느님의 사랑이다. 아가페는 상대방을 사랑할 가치가 있기 때문에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사랑할 만한 가치가 없는 상대일지라도 내가 가치를 부여해서 사랑하는 사랑이다. 하느님은 인간의 어떤 가치를 보고 사랑하시는 것이 아니라 버려서 마땅한 죄인임에도 불구하고 사랑하신다. …`길거리에 쭈그리고 앉아 있는 거지가 어떤 가치를 지니고 있거나 아름다움이 있거나 또는 어떤 보상을 기대하기 때문에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그도 하느님의 사랑받는 자녀이기 때문에 하느님의 명령에 따라, 곧 자비로움의 명령에 순응해서 사랑해야 할 책임을 느껴 사랑하는 것이다. 이런 사랑은 부인이 비록 매력을 상실하거나 또는 남편이 기대에 어긋난다 할지라도 날로 날로 새롭게 노력함으로써 사랑을 창조하고 키워 나가야 하는 인내가 필요한 사랑이다.”
예수님이 당신의 전생애를 통해 보여주신 사랑은 바로 이런 사랑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일생을 두고 행해야 하는 사랑도 그렇습니다. 사랑은 그냥 좋아서 하는 것만은 아닙니다. 특히 이 작은 이들에 대한 사랑은 날로 날로 새롭게 노력함으로써 창조하고 키워 나가야 하는 인내가 필요한 사랑입니다.
 

  


아흔 아홉 혹은 한 마리

-이회진신부-

 


저는 삼형제 중 장남으로 태어났습니다. 

형제들만 한 지붕 아래에서 살았기에 집안은 늘 엉망이었고 즐거운 놀이터였죠.

중학교 2학년 때 쯤인가 한 번은 이런 일이 있었습니다.

 


밑에 동생, 그러니까 차남인 둘째가 어느 날 방에 들어와 우는 것이었습니다.

왜 그러냐고 물어봐도 대답도 하지 않고 울기만 했죠.

그날은 제가 동생을 때리거나 못살게 굴어서 그런 것이 아니었기에 당황했었습니다.

어떻게 해야 할지 몰랐으니까요.

동생이 그렇게 울면 나중에 어머님께 내가 혼나니까 어르고 달랬지만 되지 않았습니다.

 


결국 어머님이 돌아오셔서 왜 그러냐고 물었지만 저는 할 말이 없었습니다.

어머님이 동생을 불러 방으로 데려갔을 때 저는

한편으로는 혼날까봐 불안에 떨어야 했고,

한편으로는 도대체 제가 왜 그런 것이지 하며 의아해했죠.

 


그런데 잠시 뒤에 방에서 나오신 어머님의 표정은 묘했습니다.

슬픈 듯 기쁜 듯 웃으시면서 저에게 동생에게 잘해주라고 하더군요.

 


나중에 알고 보니 동생이 그랬다고 합니다.

“흑! 흑! 저는 사랑이 부족해요?”

 


“그게 무슨 말이냐?”

동생의 사랑이 부족하다는 말에 어머니는 처음에 이해하지 못하셔서 다시 물었죠.

 


그러자 동생이 “형은 첫째라고 사랑해 주고, 준(막내)이는 막내라고 잘해주는데,

저는 가운데 끼어서 사랑받는 게 없어요. 저에게는 어머니의 사랑이 부족해요.”

지금도 가끔 형제들이 모였을 때 “흑흑, 저는 사랑이 부족해요.”하고 흉내 내며

다 큰 동생을 돌리곤 합니다.

그 사건 이후 어머니는 옷을 사거나 선물을 살 때 늘 이 사건을 기억하셨던 것 같습니다.

 


열 손가락 깨물어서 아프지 않은 손가락이 없다고 부모님들을 말씀하십니다.

그런데 실제로는 더 아픈 손가락이 있고, 덜 아픈 손가락이 있죠.

부모님 자체도 더 마음이 가는 자식이 있고,

자식들 가운데서도 부모님의 마음을 더 민감하게 느끼는 자식이 있습니다.

 


그 가운데서도 특별히 부모님의 마음을 더 아프게 하거나 애틋하게 만드는 것은

상처입거나 약한 자녀일 것입니다.

 


하느님은 당신의 자녀 모두를 사랑하신다고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더 많이 그 은총과 아픔을 느끼는 사람이 있습니다.

하나는 더 민감하게 아버지 하느님의 사랑을 느끼는 이들이고,

다른 하나는 하느님께서 그를 보며 더 많이 아파하고 있는 경우일 것입니다.

 


아흔 아홉 마리보다 한 마리를 두고 더 기뻐하는 것은

그 한 마리가 입은 상처와 아픔을 당신도 같이 느꼈고 계셨기에,

그 상처와 아픔이 나았을 때 느끼는 기쁨임을 어찌 우리가 모르겠습니까?

그것이 아버지 하느님의 마음입니다.

 


아흔 아홉에 속하던, 다시 찾은 한 마리 양의 무리에 속하던

주님께 우리는 모두 없어서는 안 될 열 손가락이자 소중한 자녀들입니다.

 


오히려 우리가 하느님께 은총을 받아 누리며 자신만을 위해 살 때

하느님은 우리보다 먼저 길 잃은 한 마리 양을 찾아가실 것입니다.

 


(그렇다고 이 대림시기 여러분더러

길 잃은 한 마리 양이 되어 상처입고 슬퍼하라고 권하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를 위해 사랑으로 오시는 주님이 그런 분이시기에

우리가 이 대림시기에 기억하고 애써야 할 것은

나도 길 잃은 한 마리 양이 되어야지 하는 것이 아니라,

그분의 수고로움에 감사드리며, 그 은총의 손길에 우리도 함께 하는 것입니다.

그때 우리의 발걸음은 주님과 함께 걷는 동반자가 될 수 있기 때문이죠.

 


오늘 복음은 주님께서 길 잃은 양을 찾아 떠나는 사랑의 여정에

우리를 당신의 동반자로 초대하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 그런 주님의 사랑을 닮아

자신의 주위를 한 번 더 둘러보는 주님의 동반자가 되어 보십시오.

 


“주님, 저는 제가 늘 한 마리 양이 되길 원했습니다. 주님께서 저만을 찾아 길을 떠나 주시길 청했습니다. 그러면서도 상처 받기 싫어하고 아파하는 것도 피했고, 길 잃은 양이 되어 헤매는 것도 두려웠습니다. 주님, 당신의 사랑의 여정에 따라 나서지도 못하면서 당신의 사랑과 은총만 갈구하는 저를 오늘은 데려가 주십시오. 그리하여 당신과 함께 사랑을 나누게 하여 주십시오. 아멘.”

 

  


-서울대교구 김윤복 모세 신부-

찬미예수님
여러분들은 아마 어릴 적에 쉘 실버스터인이라는 작가가 지은 ‘아낌없이 주는 나무’라는 동화를 읽어보셨을 것입니다. 오늘은 이 이야기로 강론을 시작하려고 합니다.

먼 옛날 한 그루의 나무가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나무에게는 사랑하는 한 소년이 있었습니다. 그 소년은 처음에는 그 나무의 나뭇잎으로 왕관을 만들기도 하고 나무에 올라가기도 했으며 그 나무의 시원한 그늘에서 낮잠을 자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 그 소년이 커서 청년이 되자 더 많은 것들을 요구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래서 나무는 처음에는 자신의 사과열매를 그리고 그 다음에는 나뭇가지를 그 다음에는 줄기를 그리고 마지막에는 자신의 나무밑동을 내주었습니다.

우리의 눈에 그 나무는 참으로 바보같은 나무입니다. 소년은 나무에게 해준 것이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다만 그 소년은 어릴 적 나무와 놀았을 뿐이었고 크고 나서는 나무로부터 모든 것을 가져갔을 뿐이었습니다. 그렇게 그 나무는 자신의 모든 것을 주었습니다. 그리고 나무는 자신의 것들을 내어줄 때마다 행복해 했습니다.

오늘 우리는 복음에서 이런 나무와도 같은 사람을 한 사람 더 만나게 됩니다. 그는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목자입니다. 그는 양 한 마리가 길을 잃어 사라지자 아흔아홉 마리를 산에 남겨 둔 채 길 잃은 양을 찾아 나섭니다.

목자에게는 잃어버린 한 마리의 양에 대해 그 양을 보호해야 할 책임이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 목자에게는 다른 아흔아홉 마리에 대한 책임 또한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 목자는 아흔아홉 마리를 남겨 둔 채 잃어버린 한 마리 양을 찾아 나섭니다. 그리고 그 길 잃은 양을 찾게 되면 그 목자는 길을 잃지 않은 아흔아홉 마리보다 그 한 마리를 두고 더 기뻐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목자는 양을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소년에게 자신의 모든 것을 아낌없이 주는 나무가 자신의 모든 것을 통해 그 소년을 사랑한 것처럼 목자도 양을 다른 어떤 것보다 더 사랑했습니다. 사랑에는 이윤이나 타산, 이해관계가 없습니다. 어떤 것을 선택해야 나에게 더 이로운지에 대한 계산이 없습니다. 다만 내가 사랑하는 대상을 사랑할 뿐입니다. 오히려 이유가 있다면 그것은 사랑이 아닐 것입니다.

하느님께 이 세상은 모두 사랑 덩어리들입니다. 이 세상의 어느 하나도 하느님의 손길과 사랑을 거치지 않은 것이 없습니다. 마태오 복음 6장 30절에서는 오늘 서 있다가도 내일이면 아궁이에 던져질 들풀까지 하느님께서 이처럼 입히신다고 전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내일 당장 불에 살라질 들풀조차 사랑하셔서 입혀주시는 하느님께는 이 세상 모든 것이 다 소중한 것들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이와 같이 이 작은 이들 가운데 하나라도 잃어버리는 것은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뜻이 아니다.’

옛 말에 열 손가락 깨물어서 아프지 않은 손가락이 없다고 했습니다. 이는 중요한 손가락, 하찮은 손가락 할 것 없이 깨물면 모두 똑같이 아프다는 말입니다.

하느님께 우리는 모두 깨물으면 아픈 손가락들입니다. 그리고 이 세상 모든 사물들도 하느님께는 깨물면 아픈 손가락들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오늘 복음말씀을 통해 우리가 하느님의 사랑받는 자녀라는 사실을 말씀해주셨습니다. 그리고 하느님께서 작은 것 하나라도 잃지 않기를 바라신다고 말씀하시며 우리도 우리가 받은 것들 중 작은 것 하나라도 잃지 말것을 말씀하십니다.

오늘 잠시 동안이라도 하느님께 우리가 받은 것들은 어떤 것들이 있는지 그리고 우리는 그것들을 잘 지키고 돌보고 있는지 살펴보는 소중한 시간을 가지시기 바랍니다.

 

 

  


아무도 잃지 않기를 바라시는 하느님의 마음

-서울대교구 이기양 신부-

제 1독서 : 이사 40,1-11 (하느님께서 당신 백성을 위로하신다.)
복 음 : 마태 18,12-14 (하느님께서는 작은 이들도 잃어버리는 것을 바라지 않으신다.)

오늘 복음 말씀은 우리가 많이 들어온 아주 유명한 말씀 중의 하나입니다.

㰡’회개할 필요가 없는 의인 아흔아홉보다 회개하는 죄인 한 사람 때문에 더 기뻐할 것이다.㰡“(루카15,7)라고 노래로 부르기도 합니다. 그런데 이 부분은 사목자가 고민하는 대목중의 하나이기도 하지요. 지금 우리 본당의 신자는 대략 3,800여 명이 되는데 실제로 그 중 냉담하는 신자들이 50% 가까이에 이릅니다. 고민이 되지 않을 수가 없는 수치입니다.

또 다른 고민은 교회는 수많은 신자들의 요구를 전부 받아들일 수가 없다는 것이지요. 하다 못해 다섯 명만 되는 단체의 장만 되어도 이 이야기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금방 알아 들을 수 있을 것입니다. 모두 다른 의견들을 받아들인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이며, 또 가능하지도 않다는 것을 우리는 경험으로 알 수가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흔아홉 마리의 양을 놔두고 한 마리의 길 잃은 양을 찾아 나선다는 예수님의 말씀을 우리는 묵상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아흔아홉 마리의 양을 놔두고 한 마리의 길 잃은 양을 찾아 나선다는 예수님의 말씀에는 그냥 단순한 것이 아니라 나름대로의 배경이 있습니다. 오늘 복음 말씀은 하나라도 소중하고 귀하게 여기시는 하느님의 마음을 우리에게 전하고 있지요. 그런데 우리 한자성어 중에 㰡소탐대실(小貪大失)㰡‘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작은 것을 탐내다가 큰 것을 놓친다는 의미인데 경우에 따라서 맞는 말이기도 합니다. 오늘 복음에서처럼 아흔아홉 마리의 양을 놓칠 수도 있는 것이지요. 그런데 성경의 배경을 조금 알면 오늘 복음이 이해가 됩니다.

이스라엘에서는 혼자 양떼를 키우는 일은 거의 없습니다. 여러 명이 함께 양을 치다가 사고를 당해서 잃어버리기라도 하면 한 명이 그 양을 찾으러 가고 다른 목동들이 나머지 양들을 돌보게 되어 있지요. 목동이 없어지면 아흔아홉 마리의 양이 흩어져 버리지나 않을까 하는 우리의 생각과는 그 배경이 다른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복음은 아흔아홉 마리의 양이 중요하지 않고 길 잃은 한 마리의 양이 중요하다는 뜻이 절대 아니고 아흔아홉 마리의 양 못지 않게 길 잃은 한 마리의 양도 소중하다는 것을 말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한 사람, 한 사람을 모두 귀하게 여기시는 하느님의 마음 이렇게 표현하고 있는 것이지요.

이 세상의 모든 사람이 다 손가락질하고 외면을 하여도 부모는 자기 자식을 버릴 수가 없는 법입니다. 마찬가지입니다. 모든 사람이 다 외면하고 상대하지 않으려고 해도 하느님께서는 그를 소중히 여기고 품어주신다는 것입니다. 실제로 예수님께서는 공생활 동안에 그런 모습을 우리에게 자주 보여주셨습니다. 부정하다고 아무도 함께 하려 하지 않고 돌팔매질 당하여 외딴 곳에 버려진 문둥병자들을 예수님께서는 치료해 주셨고, 또 부정한 짓을 저질러서 돌에 맞아 죽게 된 여인에게 새로운 계기를 만들어 주셨으며, 모든 것을 버리고 아버지의 가슴에 못을 박고 떠난 아들의 회개를 받아 주셨을 뿐 아니라, 당신을 세 번이나 배반하고 외면했던 베드로 사도를 세 번의 용서로 받아들이신 분이 우리의 예수님이십니다. 예수님의 이런 모습들을 생각할 때 한 마리의 길 잃은 양을 찾아 나서겠다는 예수님의 마음이 어떠한 것인지를 우리는 감히 짐작해 볼 수가 있습니다.

오늘 복음은 우리에게 용기를 줄뿐 아니라 어떤 처지에서도 예수님께서는 우리를 받아주실 것이라는 희망을 불러일으켜 줍니다. 뉘우치고 회개하는 사람은 누구든지 용서해 주시는 하느님을 우리는 우리의 아버지로 모시고 있는 것입니다. 하느님 안에 죽을 죄인이란 없다는 것이지요.

우리는 자칫 㰡’저 사람은 사형을 시켜야 한다.㰡“라든가 㰡’저런 사람은 지구에서 추방을 시켜야 한다.㰡“ 㰡’저 사람과 함께 살 수 없다.㰡“라고 분개합니다.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그렇지가 않다는 것입니다. 용서받지 못할 죄는 없다는 것이지요. 죄인이든, 성한 사람이든 하느님께 용서를 청하면 하느님께서는 모두 받아주신다는 것입니다.

또 우리는 조금만 다투어도 쉽게 다시는 보지 않겠다고 결심을 하고 죽어도 용서할 수 없다는 마음을 가슴에 응어리처럼 담고 삽니다. 이러한 적대감에 사로잡혀 살아간다는 것이 얼마나 비복음적인 모습인지 오늘 예수님의 말씀을 통해서 우리는 다시 한 번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오늘 복음은 우리에게 위안이고 희망이면서 동시에 큰 의무이기도 합니다. 하느님께 그 어떠한 죄든지 용서를 받은 우리가 또한 어떠한 이웃도 받아들일 수 있는 마음이 되도록 노력하고 자비를 베풀 수 있는 최소한의 아량을 갖출 수 있도록 노력하는 것이 당연하지 않겠습니까?

살다보면 정말 받아들이기가 어렵고 마음으로부터 용서하기 어려운 사람이 우리에게는 있게 마련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하느님께서 나의 모든 죄를 다 용서해 주셨듯이 나 역시 하느님의 그 자비에 힘입어 이웃에 대한 용서와 사랑을 베풀어야 하지 않느냐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어떠한 죄인도 회개하면 다 용서해 주시고 돌보아 주신다는 것을 한 마리의 길 잃은 양을 통해 예수님께서는 오늘 복음에서 말씀하고 계시는 것이지요. 하느님께서 우리를 용서해 주셨듯이 우리에게는 이웃을 용서해 줄 의무가 있음을 기억하며, 불편한 이웃을 받아들이고 함께 살아가도록 노력을 해야 한다는 것을 오늘 복음은 우리에게 가르쳐 줍니다.

살아가면서 다소 불편한 관계가 맺어졌을 때 용서를 청하며 새로운 관계 회복을 요청해 오는 이웃을 교만한 마음으로 거부한다면 그것은 분명 비복음적인 삶을 사는 것이고 그를 예수님의 제자라고는 볼 수 없을 것입니다. 혹시라도 나에게 생각지도 못한 그러한 교만한 마음이 있다면 오늘 주님의 말씀을 마음에 새기며 삶 안에서 실천할 수 있도록 최선의 노력을 기울여야 하겠습니다.

 

 

  


“모든 인간은 풀이요, 그 영화는 들의 꽃과 같다.”
-대구대교구 하성호 신부-

우리가 독서를 할 때 중요하거나 자신의 마음에 드는 구절들 밑에는 줄을 긋든지 다른 표시를 하게 됩니다. 하지만 자신이 줄을 그은 부분을 객관적으로 모든 사람들이 다 중요하다고 여기지는 않습니다. 내가 줄을 그을 때는 대게가 그 구절이 나의 마음을 잘 드러낼 때 입니다. 자신의 마음 상태를 그 글이 잘 표현해주고 있을 때 우리들은 그 구절에 감명을 받기도 하고, 또는 마음에 무엇인가가 뭉클거리며 움직이고 있지만 자신의 재주로는 그것을 무엇이라 표현하지 못할 때 누군가가 그 마음을 표현해주면 “그래 바로 이거야!”하며 감탄을 자아내기도 합니다.

“모든 인간은 풀이요, 그 영화는 들의 꽃과 같다.” 오늘 독서에 나오는 이사야 예언자의 말씀입니다. 제가 대신학생 때이니까, 30년이 더 지났습니다만 방학을 맞아 광주에서 대구로 고속버스를 타고 오는데 라디오에서 문예극장이 방송되고 있었습니다. 시한부 삶을 사는 주인공이 병상에 누워 성경을 펼쳤는데 주인공의 눈에 들어온 구절이 바로 오늘 독서에 나오는 이사야서의 “모든 인간은 풀이요, 그 영화는 들의 꽃과 같다.”라는 구절이었습니다. 당시 제가 대신학생이고 힘이 펄펄 넘치는 청년이었지만 그 주인공의 입에서 되새김질 되어 나온 이사야서 구절은 저의 마음 깊은 곳에 새겨졌습니다. “모든 인간은 풀이요, 그 영화는 들의 꽃과 같다.”

흔히들 사제를 향해 “신부님 되길 참 잘 하셨어요. 결혼생활 해봐도 별 것 아니고, 골치 아픈 아이가 있나, 때로는 싸우는 것도 지겨워요.”라고 넋두리 비슷한 것을 해옵니다. 하지만 그 말들을 듣는 신부들 기분은 별로 좋지가 않습니다. 신부가 혼자 자유롭게 살기 위해 신부되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부부로 싸우는 것이 싫고 아이 낳아 기르는 것이 싫어서 신부되는 것이 아닙니다. 신부가 되는 것은 인간은 한 포기 풀과 같고 그 영화는 들꽃 같지만, 그래도 주님이 함께 하시니 그 생명이 값지고 소중하다는 것을 신자들에게 열과 성을 다해 깨우쳐주기 위해 신부가 되는 것입니다.

주님은 계십니다. 우리와 함께 계십니다. 우리가 가진 것이 영원한 것이 아니라 주님이 영원하십니다. 영원하신 그분이 우리에게 손을 내미시어 우리를 끌어주시니 우린 영원을 향해 걸음마를 오늘도 배우는 것입니다. 오늘 복음의 말씀처럼 그 주님께서 오늘도 잃은 양 한 마리 찾아 우리에게 오십니다. 사람은 자신이 처한 화경에서 사물이나 사건을 바라봅니다. 세속 사람은 세속이라는 눈으로 주님을 보려고 합니다. 주님의 사람은 주님의 마음으로 세상을 보려 합니다. 주님의 마음으로 오늘 독서들을 다시 한 번 묵상합시다.


 


-부산교구 이민 신부-

 

 오늘 대림 2주간 화요일 복음은 마태오 복음 18장 12절부터 14절까지입니다. 흔히 이야기하는 양 백 마리 중에 아흔 아홉 마리와 한 마리의 비유이야기입니다. 오늘 이 비유 이야기를 가지고 함께 묵상고자 합니다.

오늘 복음은 마태오 복음 18장 중에서 아주 짧은 부분인데 마태오 복음 18장은 소위 공동체 설교, 혹은 교회규범이라고 불리웁니다. 이는 그리스도인이라면 마땅히 지녀야 할 마음가짐이나 몸가짐을 혀 놓은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복음은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취해야 할 자세 중에 한 가지를 말하고 습니다.

오늘 복음은 이러합니다. 우선 양 백 마리가 나오고 그 가운데 한 마리가 길을 잃는다면 아흔 아홉 마리는 산에 버려둔 채 길을 잃은 한 마리를 찾아 나선다는 내용입니다. 그리하여 찾게 되면 길을 잃지 않은 아흔 아홉 마리보다 한 마리를 찾게 된 것을 더 기뻐합니다. 이와 같이 이 작은 이들 가운데 하라도 잃게 되는 것은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뜻이 아니라는 내용입니다.

우리는 가끔 오늘 복음 내용을 인용하는 경우를 종종 봅니다. 그래서 아주 소수의 사람이나 한 사을 강조하기 위하여 혹은 그런 사람들을 소홀히 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말하기 위하여 아흔 아홉 마의 양과 한 마리의 양 이야기를 합니다. 그리하여 언뜻 들을 때는 마치 양 한 마리가 아흔 아홉 마보다 더 귀하게 느껴지기도 합니다. 아흔 아홉은 버려둔 채 한 마리 찾기 위하여 온 산을 다 뒤진다고 하니 얼마나 귀하게 여겨지겠습니까? 도대체 그 한 마리가 어떠한 양인지는 몰라도 대단한 양인 것처럼 느껴집니다. 그런데 만일 한 마리를 찾다가 나머지 양 중에서 길을 잃은 양이 생긴다면 어떻게 할 지 궁금합니다. 지금 제가 복음 내용을 이해 못하고 있습니까? 비유의 뜻을 잘못 이해 하고 있니까? 비유는 우화가 아니기 때문에 비유는 비유로서 이해해야 됩니까?

저는 오늘 복음을 바라 볼 때 양 백 마리 중 아흔 아홉 마리와 한 마리를 갈라 놓고 생각하는 그 자체가 잘못된 시각임을 말하고 싶습니다. 아흔 아홉은 누구이고 한 마리는 누군란 말입니까? 길은 한 마리가 뭐 그리 대단하다고 그렇게 강조를 하는 것입니까? 초점은 아흔 아홉 마리, 한 마리에 있는 것이 아니라 '길을 잃어버린' 경우입니다. 핵심은 아흔 아이든 한 마리이든 그 숫자에 있는 것이 아니라 백 마리 중에서 어느 누구라도 길을 잃게 해서는 안 다는 것입니다. 12절 '양 백 마리 가운데 한 마리가 길을 잃는다면', '산에 버려둔 채 길 잃은 것을 찾아 나서지 않겠습니까?', 13절 '길을 잃지 않은 아흔 아홉 마리보다', 14절 '이 작은 이들 가운데 나라도 길을 잃게 되는 것은 아버지의 뜻이 아닙니다' 이렇게 길을 잃는다는 말이 무려 4번이나 나옵니다. 통상 반복적으로 나오는 단어가 복음 이해에 있어서 열쇠가 됩니다. 핵심은 길을 잃었느냐 그렇지 않느냐에 있는 것이지 다수냐 소수냐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 다음으로 양 백 마리는 누구인가 하는 것인데 오늘 복음 내용을 보았을 때는 '작은 이들'입니다. 12절 '양 백 마리가 있는데 그 가운데 한 마리가 길을 잃는다면' 이라고 나오고, 14절 '이 작은 이들 가운데 하나라도 길을 잃게 되는 것은' 이라고 나옵니다. 양 한 마리가 작은 사람들이 아닙니다. 양 백 마리 전체가 '이 작은 사람들'이라고 합니다.

그러면 이 작은 사람들은 누구일까요? 오늘 복음 앞의 내용에서도 '이 작은 사람들'이 나오는데 기에는 '나를 믿는 이 작은 사람들'이라고 나옵니다.(18장 6절)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을 두고 '이 은 사람들'이라고 지칭합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이니까 ''이 작은 사람들'은 바로 예수님을 따르는 제자들 혹은 제자의 제자, 아니면 예수님을 믿는 신앙인을 말하는 것입니다. 몇몇 사람들은 '은 사람들'이라고 하니까 교회 공동체 안에서 소수의 신자들 혹은 못나고 미천한 신자들을 지칭하는 것이라고 하는데 이는 복음 내용을 잘못 보고 있는 것입니다.

양 백 마리는 예수님을 믿는 작은 사람들이고 이 작은 사람들은 소수의 몇몇 사람이 아니라 교회 공동체 전체 신자들을 말하는 것입니다. 교회 공동체에서는 신자들을 두고 작은 사람들이라고 불렀던 것입니다.

다음으로 '길을 잃게' 되는 경우는 어떤 경우일까요? 이것은 그렇게 어렵지 않습니다. 묵상해 보면 신앙을 잃어버린 경우나 신앙이 대단한 위기에 처해 있는 경우를 말합니다.

이제 오늘 복음을 정리해 보면 오늘 복음의 메시지는 교회 공동체 안에서 그리스도교 신앙인 어느 누구라도 신앙을 잃어 버리게 한다거나 위기에 놓이게 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또 그런 일이 일어나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한 것은 하느님 아버지의 뜻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럼 오늘 이 복음 말씀에 비추어 오늘날 우리 교회 공동체를 생각해 봅시다. 신자들이 신앙을 잃어버리는 경우는 어떤 경우가 있습니까? 개인 사정으로 인해서 잠시 쉬는 경우는 신앙을 잃어버렸다고 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어떤 경우가 있는지 몇 가지 살펴보고자 합니다.

첫째 교직자, 수도자와의 관계때문에
둘째 유아기적인 신자
셋째 쉽게 상처 받은 경우
넷째 의견 충돌
다섯째 일반 사회적인 잣대로 보는 경우,
여섯째 파벌형성 끼리끼리

 


 길 잃은 양

-강영구 루치오 신부(마산교구) -

 

 

+너희는 어떻게 생각하느냐? 어떤 사람에게 양 백 마리가 있는데 그 가운데 한 마리가 길을 잃으면, 아흔아홉 마리를 산에 남겨 준 채 길 잃은 양을 찾아 나서지 않겠느냐?

그대에게

요즘 신문에 자주 등장하는 기사 중 하나는 따돌림 받는 청소년이 자살했다는 것입니다.
따돌림 받아서 외톨이가 된다는 것은 참을 수 없는 고통이며 불행입니다.
내 주위에 아무도 없다는 사실이 절망하게 하고 죽음을 선택하게 합니다.

불가(佛家)의 지옥 중에 가장 고통스러운 지옥을 무간지옥(無間地獄)이라 합니다.
평소 사람 사이(間)에서 사랑하지 않고 사랑받지 못했던 사람이 빠지는 사이((間)가 없는 지옥은 고통이 끊일 사이도 없다(無間)고 합니다. 그래서 무간지옥(無間地獄)입니다.

하늘나라(天國)도 지옥(地獄)도 사람 사이(間)에 있습니다.
너를 사랑하고 너로부터 사랑 받고, 너를 용서하고 너로부터 용서 받고,
너에게 자비를 베풀고 너로부터 자비를 받으면,
거기 사랑의 하느님이 함께 계시고 하늘나라(天國)도 있습니다.
너를 외면하고 너로부터 외면당하고, 너를 미워하고 너로부터 미움 받으며,
너를 증오하고 원망하다가 너로부터 앙갚음 당하는 곳에 악마(惡魔)도 함께 있고
거기가 지옥(地獄)입니다.
오만(傲慢)과 독선(獨善), 아집(我執)과 자만(自慢)의 장벽을 쌓고
그 속에 혼자 웅크리고 앉아서 사람사이를 거부하는 사람도 지옥의 고통을 당합니다.

길 잃은 양이란 어떤 사람을 가리킵니까?
사랑할 사람도 사람 받을 사람도 없는 무간(無間)에 빠진 외톨이를 말합니다.
예수님은 무간(無間)의 장벽을 허물고 사랑하고 사랑받는 사이(間)를 만드시는 분입니다.

 

 

 

 


잃어버린 한 마리의 양을 위해...

-박상대신부

 

 

  제2이사야서(40-55장)가 달리 ‘위로의 책’이라고 불리는 이유는 이 책이 “위로하여라. 나의 백성을 위로하여라.”(40,1) 하고 시작하기 때문이다. 예언자는 바빌론의 귀양살이가 끝나가고 있음을 알고 예루살렘의 기쁨을 미리 내다본다.(40,9) 유배기간은 그들에게 복역기간이었고, 죄벌을 받는 기간이었으며, ‘잃어버린 기간’이었다. 이제 그 기간이 끝난다.(40,2) 예언자는 외친다. “야훼께서 오신다. 사막에 길을 내어라. 벌판에 큰 길을 훤히 닦아라. 모든 골짜기를 메우고, 산과 언덕을 깎아 내려라. 절벽은 평지를 만들고 비탈진 산골길은 넓혀라.”(40,3-4) 목자가 양떼에게 풀을 뜯기고, 새끼 양들을 두 팔로 안아 가슴에 품으며, 젖먹이 딸린 어미 양을 곱게 몰고 오듯이, 야훼께서 팔을 휘둘러 원수를 정복하시고 승리하신 보람으로 찾은 백성을 친히 예루살렘으로 데리고 오신다는 것이다.(40,10-11) 

 


  그래서 세례자 요한은 광야에서 요르단강으로, 요르단강에서 예수에게로 구원의 길을 닦고 예수를 예언된 메시아요 구원자로 계시하였던 것이다.(마태 3,1-17; 요한 1,35-36) 예수는 곧 100마리 양 중에 잃은 한 마리의 양을 찾기 위해 자신의 모든 것을 다 바치는 목자이시다. 오늘 복음이 바로 이 사실을 밝혀주고 있는 것이다. 마태오복음 18장은 믿음의 공동체에 대한 설교로서, 구성원 상호간의 형제애에 대한 예수님의 가르침이 담겨있다. 그 주제들을 요약하면, 겸손, 선도(善導), 상호존중, 자비와 용서 등이다. 가르침의 내용을 구체적으로 살펴보면, 어린이처럼 자신을 낮추어라(1-5절), 작은이들을 죄짓게 하지 말라(6-9절), 작은이들을 업신여기지 말라(10-14), 형제가 죄를 짓거든 바로잡아 주어라(15-18절), 둘이 함께 내 이름으로 청하면 아버지께서 다 이루어주신다(19-20절), 몇 번이고 용서하라(21-22절), 무자비한 종의 비유(23-34절), 그러므로 진심으로 용서하라(35절)는 것이다.

 


  오늘 복음은 “작은이들을 업신여기지 말라.”(10-14절)는 대목에서 ‘길 잃은 한 마리 양의 비유’(12-14절)만 들려준다. ‘길 잃은 양의 비유’는 ‘잃은 은전의 비유’와 ‘잃은 아들의 비유’와 함께 루가복음에서는 하느님의 무한한 사랑과 자비에 관한 주제로 다루어진다.(루가 15,4-32) 루가는 이 비유를 예수께서 세리와 죄인들에도 복음을 전하시고, 그들과 어울려 음식을 나누는 일을 못마땅해 하는 바리사이파 사람들과 율법학자들에게 들려주신 것으로 소개한다. 그러므로 루가의 비유에서 ‘잃은 것’은 세리와 죄인들을 의미하며, 이들의 회개를 ‘다시 찾은 것’에 비유하면서 이 사실을 두고 하늘전체가 기뻐한다는 것이다. 물론 비유의 맥(脈)은 잃은 것에 대한 하느님의 끈질긴 관심과 사랑과 자비이다. 마태오복음에서는 ‘길 잃은 한 마리의 양’이 공동체에 속해있는 ‘보잘것없는 작은이’에 비유된다. 비유의 결론은 100마리의 양들 중에 아흔 아홉 마리를 그대로 두고 잃은 양 한 마리를 끝까지 가서 찾아내시고 기뻐하시는 하느님의 사랑을 본받아 작은이들에 대한 공동체 전체의 각별한 관심과 배려를 표하라는 것이다.

 


  그러나 현실은 어떤가? 가난하고 보잘것없고 무능한 이들은 교회 밖에서는 물론이고 교회 안에서도 종종 설자리를 잃는다. 이들을 업신여기지 말라고 예수께서 간절히 권고하시건만, 교회 안에도 늘 업신여김과 차등과 차별이 존재한다. 교회의 머리이신 그리스도께서는 스스로 세상에 대하여 가난하고 보잘것없고 무능한 자가 되셨다. 얼마 있지 않아 우리는 이 사실을 구유에서 목격하게 될 것이다. 우리 공동체는 다시금 마음을 모아 하느님의 사랑을 배워야 한다. 하느님의 열외(列外) 없는 사랑, 잃은 것, 상한 것, 구석에 있는 것에 대한 끈질기고 인내하는 사랑, 큰 것보다 작은 것에 더 기뻐하는 사랑, 어떠한 질책이나 책임추궁 없이 다시 찾은 것만으로도 기뻐하는 사랑을 말이다. 이것이 하느님의 ‘이유와 조건 없는’ 사랑이며, 구원자 예수께서 못난 우리에게 베푸실 사랑이다. 그러므로 예수는 바로 나일 수 있는 잃어버린 한 마리 양을 찾기 위해 세상에 오시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