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님의 부르심에 대한 완전한 개방
-조욱현신부-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신 뒤에는 우리가 기다려야 할 다른 어떤 새로운 것은 없다”라고 성 이레네오는 말했다. 그러기에 그리스도께서 오시기 이전의 모든 기다림의 시간은 ‘대림’이다. 여기서 대림을 잘 준비한다는 것은 그분의 진실에, 그분의 요청에, 그분의 부르심에 그리고 매순간 그분의 메시지에 대한 완전한 개방을 말하는 것이다. 그러기 때문에 대림은 우리 신앙구조의 본질적인 구성요소가 되는 것이다. 오늘 전례에서 크리스챤적 대림의 의미가 잘 표현되고 있다.
제1독서: 이사 63,16b-17; 64,1.3b-8: 하늘을 쪼개시고 내려오소서
이사야는 고통스럽지만 믿음의 자세로 하느님의 능력과 구원의 새로운 어떤 움직임의 기다림을 묘사하고 있다. 그 기다림은 아주 강렬하고 하느님의 개입이 야기할 놀라움과 경이를 말해주고 있다. 즉 하느님이 개입하시지 않으면 이스라엘은 어느 누구에 의해서도 구원될 수 없으며, 더구나 그 스스로는 구원될 수 없다는 사실이다(63,16-17; 64,1 참조). 여기서 이스라엘은 회개하여 마음의 치유를 받아야 한다. 이 모든 것이 이스라엘의 불충실에 근거하기 때문이다. 하느님께서 개입하시는 이유는 그분 없이는 인간의 마음이 조금도 새롭게 변모될 수 없기 때문이다. 또한 이러한 변화 없이 예루살렘의 재건도 아무 의미가 없다는 것이다. 다시 파괴될 것이기 때문이다. ‘진흙’(8절)의 의미는 하느님께서 인간들을 새롭게 하는 재형성의 작업을 상징하고 있다. 즉 하느님의 임재는 변화를 일으키신다는 것이다. 하느님의 오심은 구원을 위한 것이다. 구원적 도래라고 할 수 있다. 성탄을 잘 준비하는 의미가 이것이다. 우리가 성탄에 다시 태어나지 못하면, 그리스도는 이 세상에 오시지 않았다는 표지가 되고 말 것이다.
복음: 마르 13,33-37: 조심해서 항상 깨어있어라
예수께서는 이 말씀을 하시기 전, “그 날과 그 시간은 아무도 모른다. 하늘에 있는 천사들도 모르고 아들도 모르고 오직 아버지만이 아신다”(13,32)라고 하시고, ‘깨어있음’에로 초대하신다. 즉 깨어있음으로써만이 우리는 우리 자신을 항상 준비하고 있을 수 있다. 오늘 복음이 강조하는 것은 무엇보다 ‘깨어있어야 할’ 의무에 대해서 말하고 있다. 여기서 ‘깨어있음’의 개념은 세 번(33.35.37절) 분명하게 표현되고 있고, ‘문지기에게 깨어있으라고 분부한’(34절)데서 한번 더 표현되고 있다.
이것은 마태 25,14-30의 ‘달란트의 비유’와 루가 19,12-27의 ‘금화의 비유’에서 더 발전된 것이다. 그러면서도 더 예리하게 기다림의 분위기를 강조하고 있다. 집주인의 돌아옴은 불확정적이어서 갑작스레 들이닥치리라는 것을 강조하기 위해 네 번에 걸쳐 깨어 기다림을 상기시킨다. 그 때가 저녁, 한밤중, 닭이 울 때, 이른 아침으로 표현하고 있다. 주님의 오심의 이러한 불확실성에 근거한 ‘깨어 기다림’은 모든 신자들로 하여금 정신을 차려 깨어있어야 할 책임성 있는 태도를 가르쳐 터득케 하려는 것이다. 책임 있게 깨어 기다리는 것은 헛된 망상에 사로잡혀 미래를 꿈꾸는 묵시적 열광이라든지 현실에 대한 무감각이나 도피가 아니다. 그것은 우리 자신이 진정 하느님의 뜻에 완전히 우리 자신을 개방하고 받아들여 실천하는 삶을 의미한다. 그래서 언제라도 들이닥칠 수 있는 주인에게 문을 열어줄 수 있는 깨어있는 자세를 말하는 것이다. 그러한 삶이어야 함을 말해 준다.
제2독서: 1고린 1,3-9: 여러분은 주 예수 그리스도를 고대하고 있습니다
바오로 사도께서는 주님의 도래에 대한 주제를 다시 취하여 삶의 모든 순간에 확대하여 적용하고 있다. 주님께서 실제로 오실 것이기 때문에 우리는 그분의 오심을 항상 기다려야 한다. 그렇게 할 때 순간순간이 그분께 대한 신뢰와 사랑을 드리는 만남의 시간이 될 것이다. 그리하여 인간에게 베풀어주신 은총의 선물들이 결실을 맺게 될 것이다. 우리가 아무 잘못이 없는 사람으로 주님의 심판날을 맞이한다는 것은(8절) 우리가 그분의 은총의 빛 안에 살았다는 것을 의미한다. 우리를 부활하신 그리스도와 그분의 영광된 왕국에서 결합시켜줄 그 친교는(9절) 바로 지금 이 순간부터 시작되어야 한다. 즉 매일 매일 계속적으로 작은 ‘도래’, ‘임재’가 선행되지 않으면 그 ‘위대한 마지막 도래’는 결코 오지 않을 것이다.
주님을 맞이하는 것은 어느 때고 가능한 일이다. 우리는 결정적으로 주님을 만나는 날이 올 것이다. 그 날과 그 시간은 알 수 없다는 것이다. 그래서 결정적인 만남을 잘 하기 위해서는 매일 매일 순간순간의 삶을 통하여 자신을 죽일 수 있는 삶이 되어야 한다. 여기서 죽는다는 것은 그 순간마다 주님을 만나는 삶을 산다는 것이다. 그 만남의 삶을 살 수 있도록 하는 것이 항상 깨어있는 삶이라고 할 수 있다. 순간순간의 삶을 통하여 우리에게 오시는 주님을 만날 수 있을 때, 우리는 결정적인 만남, 우리의 죽음 혹은 주님의 재림도 기쁘게 맞을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삶을 계속적으로 살 수 있도록 깨어있도록 하여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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