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다림 2
-장재봉신부-
오늘 독서를 통한 하느님의 고백을 들으면
‘이제는 그 바보 같은 사랑을 그만 두시라’고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하느님의 인간사랑은 결코 헤아릴 수 없다고 하지만
“벌레 같은 야곱”
“구더기 같은 이스라엘”인줄 뻔히 아시면서도
“오른 손을 붙잡아 주고”
“도와주리라”고 다짐을 하시니
정말 이해하기 힘듭니다.
세상에는 신도 많고 종교도 다양합니다.
단언하건데
그 많은 종교는 모두 뇌물을 요구합니다.
상이 잘 차려진 제사일수록
기도의 힘이 세지고
더 많은 복채를 통해
더 큰 복을 받게 된다하니 그렇습니다.
오직 그분의 이스라엘,
그리스도인들의 제사만이 ‘속죄제’입니다.
세상의 것으로 해결될 수 없는 죄,
세상의 것으로는 결코 얻지 못하는 구원의 역사가
그분의 희생을 통해 이루어지는 현장이
미사입니다.
그리스도인의 삶이 곧
믿음이며
사랑이며 희생이어야 할 까닭입니다.
+++
이스라엘 백성이 이집트에서 노예살이를 한 세월이 430년입니다.
세상의 어느 민족도 400년을 꼬박 노예로 지내는 일은
인류 역사상 전무하다고 합니다.
긴 세월은
자신의 주체를 흐리게 할 것이고
긴 시간은 서로를 동화시킬 것이며
긴 시간을
참아내지 못한 민중의 궐기와 반항의 역사가 일어나기 마련이라 합니다.
말라키 예언자를 통해서 이르신
하느님의 약속 “엘리야 예언자를 보내리라”(말라 3, 23)는 말씀은
350년 만에 이루어졌습니다.
오늘 복음을 전한 마태오사가의 집필시기를 따지면
거의 400년이 흘렀을 것이라 꼽아집니다.
그 긴 세월,
하느님께서는 침묵하셨습니다.
예언이 사라지고
역사가 뒤바뀌는 와중에서
이스라엘인들의 갑갑함이 얼마나 컸을까 싶습니다.
호세아에게 들려주신 하느님의 절규를 기억하며
죽어간 숱한 세대가 있었을 것입니다.
이사야를 통한 하느님의 사랑에 의지하면서도
아무런 확신을 얻지 못하고 사라진 세대도 있었습니다.
무조건 믿고 기다린
그들의 간절한 시간을 생각해 봅니다.
그리고 오늘
복음을 적었던 마태오사가의 마음을 헤아려봅니다.
‘받아들이고자’ 하는 자에게만
들리는 복음,
믿는 자에게만 보이는 메시아,
그것을 몰라보는 이스라엘이
안타까워서
펑펑 눈물을 쏟았을 것도 같습니다.
하느님의 침묵은 잊음이 아닙니다.
하느님의 약속은 지금도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이미 내게 와서
“두려워 마라”하시는 그분의 음성을 듣는 일은
받아들이는 마음에만 가능합니다.
이미 곁에 와 계신 그분을
두고
누구를 찾으십니까?
그분을 기다린다면서
무엇에 분주하며
무엇에게 휘둘리며
무엇을 위해 시간을 보내고 있습니까?
참으로 무엇을 기다리고 계십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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