축일:5월16일
성 요한 네포묵 사제 순교자
St. Joannes de Nepomk, M
St. John Nepomucene
Saint John of Nepomuk
Born :c.1340 as John Wolflin at Nepomuk, Bohemia
Died:burned, then tied to a wheel and thrown off a bridge into the Moldau River on 20 March 1393;
on the night of his death, seven stars hovered over the placed where he drowned
Beatified:31 May 1721 by Pope Innocent XIII
Canonized:19 March 1729
보헤미아의 네포묵에서 태어난 그는 가문 이름인 뵐플라인 대신에 고향 이름을 따서 자신의 별명으로 삼았다.
그는 프라그 대학교에서 공부하고, 사제로 서품되었다.
그 후 즉시 프라그의 대주교 요한 젠젠슈타인의 총대리로 발탁되었다.
전설에 따르면 그는 왕비의 고해신부였는데,
국왕 벤체슬라오가 고해 비밀을 털어놓으라고 요구하였을 때 거부하므로써 미움을 받게 되었을 뿐만 아니라,
국왕과 대주교 간의 논쟁에도 휘말리게 되었다고 한다.
그후 대주교와 요한이 어느 수도원 원장 선거에 참석하고 있을 때, 국왕이 사람들을 보내어 그를 체포하게 하였다.
그는 이때 참살당하고, 프라그의 몰다우강에 던져졌다.
1729년에 시성되었고, 보헤미아의 수호 성인이자 고백자들의 수호성인이다.
(성바오로수도회홈에서)
네포묵의 성 요한의 초상은 보통 사제 복장 위에 소백의와 영대를 하고
오른손에 십자가를 들고 왼편에 입을 다문 모양을 그린다.
그 이유를 알려면 루마 순교록을 보면 된다. 거기에는 다음과 같은 기사가 실려져 있다.
"네포묵의 성 요한은 고해의 비밀을 누설하라는 강요를 당하고도
단호히 거절했기 때문에 몰다우 강에 던져져 용감한 순교의 죽음을 당했다.”
이와 같이 그는 고해의 비밀을 지킨 성인으로서 유명하다.
이 성인은 1350년경 보헤미아(지금의 체코와 슬로바키아) 지방의 네포묵에서 태어나
가문 이름인 뵐플라인 대신에 고향 이름을 따서 자신의 이름으로 삼았다.
사제를 지원해 열심히 법학과 신학을 연구하고 박사 학위를 획득한 요한은 사제가 되고 나서는
대주교의 신임을 얻어 중책을 맡아보며 나라의 수도 프라하에서 강론가 및 고해 신부로서 충실히 근무하고 있었다.
그때 마침 보헤미아를 통치하고 있던 벤첸슬라오 1세라는 왕은 그리스도교 신자였지만 타락의 길을 걸었고,
성격도 잔인하기 짝이 없었으나 그의 왕비 요안나는
그와 반대로 경건 온순하며 오로지 하느님을 섬기는 데에만 낙을 붙이고 사는 부인이었다.
그러던 중에 성인 요한은 왕비 요안나의 고해 신부로 선택되었다.
그런데 왕은 악으로서인지 호기심으로서인지
하루는 요한을 대령시키고나서 왕비가 무슨 고해를 했는지 말해 보라고 명했다.
요한은 이런 난폭한 왕의 말에 놀랄 수 밖에 없었으나 곧 정장을 하고 위엄있게 대답했다.
“성스러운 고해의 비밀을 누설한다는 것은 하느님께서 엄히 금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모처럼 명하신 것을 순종치 못하는 것을 유감으로 생각하는 바입니다.”
이런 단호한 거절의 말을 듣자 벤첸슬라오 왕은 대노해 즉각 요한에게 갖가지 고문을 가하게 하고
친히 참혹하게도 불에 달은 쇠로 그의 옆구리를 지지고 거의 완전한 데가 없을 만큼 그의 몸을 상하게 했으나
요한은 처음부터 끝까지 일체의 학대를 꿋꿋이 인내했던 것이다.
하다못해 왕은 그의 손을 뒤로 결박시키고 몸을 가재처럼 구부려 놓고 발을 머리에 잡아매어
몰다우 당의 가루르 다리 위에 싣고 가서 거기에서 소리를 지르며 수중에 던지게 함으로써 물속에 생매장을 했던 것이다.
그 날 밤, 성 순교자의 유해가 가라앉은 부근에는 이상하게도 별과 같이 광채가 떠 있었다.
다음 날 아침 사람들은 그 유해를 발견하고 대성당으로 운반해 정성껏 안장하고
곧 고해 성사의 신성함을 옹호한 순교자로서 특별한 공경을 드리기 시작했다.
네포묵의 요한이 성인품에 오른 것은 1729년 3월 19일 교황 베네딕토 13세의 시대였다.
10년 전에 시성 조사가 행해지던 때에 그의 무덤을 열어 시체를 검사하니
원체 3백년 이상이나 경과되었으므로 전신은 모조리 다 썩어있었지만 혀만은 마른채로 그대로 남아있었다.
사람들은 이것이야말로 고해의 비밀을 지킨 성인의 충실함에 대한
하느님의 존귀한 보수의 표시라고 기뻐하며 정성스럽게 황금의 성광에 모셔 성당의 보물로서 영구히 보존했던 것이다.
또한 이 성인은 다리 위에서 물속에 던져져 순교한 점에서 다리의 성인이라 칭하고 수많은 다리 위에 그의 초상을 모시게 되었다.
그는 보헤미아의 수호 성인이자 고해자들의 수호 성인이다.
(대구대교구홈에서)
성사경신성성
성체신비 공경에 관한
예부성성 훈령
Eucharisticum Mysterium
35. 고백성사와 영성체
성체성사가 “우리를 일상 허물에서 건져주고 중한 죄에 떨어지는 것을 막아주는 예방제(禮防劑)"와 같은 것으로 신자들에게 소개되고,
미사 중 통회의 부분을 적절히 이용하는 방법도 제시되어야 한다.
“영성체를 하고자 하는 이들에게는 「사람은 먼저 자기를 살펴보아야 한다」(1고린 11,28)하신 훈계를 상기시켜 주어야 한다.
교회의 관습에 따라 자기가 대죄 중에 있음을 의식한다면 아무리 통회한다 하여도
미리 고백성사를 받지 않고서는 아무도 감히 성체를 모시러 나가지 말아야 하는 것이므로, 그러기 위해서는 이런 반성이 필요한 것이다”
“만일 다급한 경우에 고백신부를 만나지 못한다면 먼저 완전한 통회를 발하여야 한다”
신도들은 언제나 미사 집전 밖에서 고백성사 받는 습관을 길러야 하겠다.
특히 정한 시간을 이용하여 이 성사가 조용하게 이루어지고,
그들에게 참된 유익이 되며, 그들이 능동적으로 미사에 참여하는 데에 방해되는 일이 없도록 할 것이다.
매일 또는 자주 영성체하는 이들에게는 각기 그 처지에 따라 적당한 때에 고백성사를 받도록 가르쳐야 하겠다.
(가톨릭홈에서)
축일:5월16일 성 안드레아 보볼라 순교자 St. Andreas Bobola, M St. Andrew Bobola, SJ M (RM) Sant’ Andrea Bobola Martire Society of Jesus. Jesuits Born:30 November 1591 at Sandormir, Poland Died:beheaded at Janow on 16 May 1657 at Pinsk; buried at the Jesuit school in Pinsk, but his grave was forgotten when the Jesuits were forced to abandon the town; he later appeared in visions to the rector of the school, pointing out his grave; relics translated to Polosk in 1808; body found incorrupt; later taken to Moscow by the Bolsheviks; taken to Rome in 1922; currently entombed at the Jesuit church in Cracow, Poland Beatified:30 October 1853 by Pope Pius IX Canonized:17 April 1938 by Pope Pius XI
안드레아 보볼라는 폴란드 예수회원이었는데, 그는 핀스크 근교 야노브에서 코싹인들에 의하여 살해되었다. (참고 "플롯스크의 요사팟") (성바오로수도회홈에서)
*성 요사팟 주교 순교자(1580-1623)축일:11월12일.게시판1465번. *성 스타니슬라오 코스트카 축일:11월13일.게시판1532번. ☞http://home.catholic.or.kr/gnbbs/ncbbs.dll/chinchang
예부성성(禮部聖省)은 말하기를 "순교 조사를 무수히 했으나 그 형벌의 잔학성에 있어 안드레아 보볼라보다 더한 것은 아직 들어본 일이 없다."했다. 그렇지만 그의 시성은 비교적 지연되었다. 그가 순교한지 3백년이 경과한 1938년 4월 17일, 예수 부활 축일을 택하여 교황 비오 11세는 그를 성인반열에 올리게 되었다.
안드레아 보볼라는 1591년에 폴라든의 산도미루 주에서 태어났다. 양친은 귀족으로 조상부터 신심이 깊은 가톨릭 신자이며, 그 백부도 교회를 위해 매우 힘쓴 분으로, 안드레아가 어려서 입학한 예수회 운영의 학교도 그의 기부에 의해 세워진 것이다. 그런 가문에 태어난 안드레아도 어려서부터 하느님을 공경하는마음이 두터웠고 21세에 예수회에 들어가 신학교를 마치고, 32세에 사제 서품을 받았다. 바로 그때 이교도들이 교회를 압박하고 주교 성 요사팟을 암살한 사건이 있었다.
안드레아는 교회의 적들을 꼭 회심시키려고 위르나 및 그 부근을 순회하며, 그가 특히 연구한 호교론을 힘기울여 설교하며, 일부러 상대방이 존경하는 성 바실리오의 저서를 인용해 그들을 계몽함에 전력을 다했다.
그러나 사람의 마음을 움직임에는 다만 학문과 지식만으로는 불가능한 것이며 반드시 하느님의 은총이 있어야 하므로, 그는 이 은총을 얻기 위해 기도와 고행에 노력하며, 그러한 목적으로 맨발로 거닐며, 설교 전에는 꼭 단식을 했다. 그리고 그는 죄수를 방문애 이들을 위로하고, 병자들을 찾아서는 이들을 격려하고 그 영혼 구원을 위해 온 정성을 다 기울였다. 1625년부터 1629년까지 폴란드에는 무서운 페스트가 만연했는데, 이때 안드레아는 생명을 내걸고 수명의 형제(수사)들과 같이 이 병의 간호에 눈부신 대활약을 했다.
이 같은 희생이 하느님의 눈에 안 들리가 없었다. 이단자들이 속속 교회에 귀화하는가 하면, 때로는 한 마을이며, 한 도시가 전부 귀화하는 정도였다. 이리하여 안드레아의 헌신적인 활동은 마침내 전국에 평판이 높아가고, 신자들은 그를 영혼의 사냥꾼이라 칭찬하는가 하며, 이단자들은 그를 영혼의 도적이라고 증오했고 그들의 앙들은 길거리에 숨었다가 그가 지나갈때 돌팔매질을 하는 형편이었다.
안드레아는 이렇게 위험을 겪으며 25년간 교회를 위해 동부서주했다. 그리고 1667년에 러시아 군대가 풀란드에 침입하자, 그들은 지빙의 이단자와 결탁해 가톨릭 신자를 살해하고 수도원, 교회를 파괴하며, 제구와 제복을 모독하고, 더욱이 신부나 수사들을 보기만 하면 용서없이 학살했다. 이리하여 당시의 폴란드는 ’순교자의 나라’라고 칭할 정도였다.
그때 안드레아는 신자들과 피난해 핀스크 시까지 왔지만, 그 지방의 이교도들에게 밀고되었음을 알고 다시 피해서, 5월 16일 아침에 야노 시 부근 페렛디르 성당에서 미사를 지냈는데, 미사가 채 끝나기도 전에 러시아 병정이 왔다는 소식을 듣고, 그는 신자들의 권유대로 마차를 타고 피하려 했다. 그러나 아무리 달려도 더 이상 피할 수가 없게 되어, 그는 마침내 각오하고 마차에서 내려 땅에 꿇어 하느님께 이렇게 기도를 올렸다. "주여! 당신 의향대로 이루어지이다." 러시아 병정들은 그를 잡아 옷을 벗기고 나무에 붙잡아매고 채찍이 부러지도록 때린 후, 큰 가지 중간에 매달아 두 마리의 말로 끌어 그대로 시내에 있는 대장한테 데리고 왔다.
그러자 대장은 극도로 위협하며 "너는 라틴(가톨릭이라는 것)신부냐?"고 물었다. "예, 나는 가톨릭 사제입니다. 나는 태생이 가톨릭이니 죽어도 신앙은 버릴 수 없습니다"하고 안드레아 사제는 대답했다. 병졸들은 그의 눈알을 뺐다. 다음에는 벌거벗기고 평상에 눕혀놓고 시벌겋게 달군 쇠꼬챙이로 옆구리를 지지며 조롱을 가한 후, 머리와 등의 가죽을 벗기고 코와 귀를 베어내고, 목에 구멍을 뚫고 혀를 그리로 뽑아내는 등 갖은 잔악한짓을 다하고, 인사불성이 되니 쓰레기통에 내버렸다. 얼마 후 고통을 겪은 끝에 마침내 그 영혼을 하느님께 맡기게 되었다.
그때 안드레아의 유해는 기이한 천상적 광채를 발했다 한다. 곧 신자들이 공손히 그 유래를 핀스크시에 모셔가 예수회 수도원 공동묘지에 정성스럽게 장례를 지냈다. 뒤에 그의 전구로 인해 여러 기적이 일어났고, 이에 1853년에 시복, 1938년에 시성되었다. (대구대교구홈에서)
성 안드레아 보볼라(Andreas Bobola)는 1590년 폴란드 귀족 가문에서 태어나 1622년 빌나(Vilna, 현재 리투아니아의 수도인 빌뉴스)의 예수회에 입회하였다. 그는 성 카시미루스(Casimirus) 성당에서 사목활동을 하고 1630년 종신서원을 한 뒤 브로뷔스크(Brobuisk)에 있는 예수회의 총장이 되었다. 1636년 성 안드레아는 리투아니아 선교사로 파견되었다. 라드지웰(Radziwell) 왕자로부터 벨로루시(Belarus)의 핀스크(Pinsk)에 있는 수도원을 제공받아 개신교도들과 분리주의자들의 공격에도 불구하고 열성적으로 활동하였다. 1657년 5월 10일 성 안드레아는 두 명의 코사크인(kazak)에게 납치되었다. 그들은 안드레아를 때리고 묶어서 말의 안장에 매달고는 고문 장소까지 끌고 갔다. 그는 그곳에서 갖은 고문 끝에 참수하였다. 그의 유해는 핀스크에 모셔졌다가 폴로츠크(Ploltsk)로 이장되었다. 그는 1853년 10월 30일 교황 비오 9세(Pius IX)에 의해 복자품에 올랐고, 1938년 4월 17일 교황 비오 11세에 의해 시성되었다.
예수회는 어떤 수도회인가?
1. 예수회의 기원 예수회는 성 이냐시오 로욜라와 그의 ’영신수련’(靈神修練)으로 단련받은 초대회원들로 부터 유래한다. 그들의 시대는 16세기의 대격변기였고 종교개혁의 시대였다. 성 이냐시오가 ’주님안의 벗들’이라고 부른 그의 동료들은 오로지 하느님만을 섬기려는 열망으로 자신들에 대한 하느님의 뜻을 식별하여 찾았다. 하느님의 섭리는 이냐시오 성인을 통해서 복음적 권고를 따르는 삶가운데 새로운 생활양식을 일으켜 하느님 백성의 모임인 교회에 봉사하도록 했다. 그리하여 그들이 공동으로 갖게된 비젼안에서 고유한 예수회의 생활양식이 자라났으며, 결국 예수 그리스도의 거룩한 이름을 가진 성직 수도회가 결성되었다. 예수회는 1540년에 사도좌의 인가를 받아 교회 안에서 탄생하였다.
2. 예수회의 행동양식 예수회의 유일한 목적은 하느님의 은총으로 회원 자신뿐만 아니라 동시에 이웃의 구원과 완덕을 전심전력으로 추구하는데 있다. 더우기 그 모든것에서 ’하느님의 더 큰 영광’ 을 위해 봉사하는 것이다. 이 목적은 예수회의 행동양식을 결정하며, 예수회를 수도적이면서 특히 사도적인 단체로 만든다. 예수회의 사도적 활동은 세계 전역을 대상으로 하고 제한없는 기동성을 요구하며 더 어려운 사명을 기꺼이 받아들이게 한다. 따라서 교회의 필요에 즉각적으로 응해 어디나 가서 활동할 자유를 얻기 위해, 이전의 전통적인 수도생활 양식 안에 있던 여러가지 방해 요소들을 과감히 포기하여 근본적으로 쇄신된 수도생활 양식이 성립되었다.
예수회의 행동양식은 ’영신수련’(靈神修練)을 통해 관상한 그리스도, 즉 가난하고 겸손하신 그리스도를 인격적으로 만나고 무조건적으로 따르는 전적인 자기헌신에서 나오는 영적이며 인간적인 태도이다. 그리스도는 예수회원 모두에게 삶과 일의 원형이 되시며, 또한 각자의 상황안에서 사도적 적응성을 가지고 항상 ’그 이상의 것’을 선택하도록 재촉하신다.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예수회원은 세상 안에서 활동하는 관상가가 되며, 그리스도의 대리자인 교황과의 특별한 유대속에서 교회와 함께하는 정신으로 봉사한다. 예수회원은 무상으로 봉사할 마음을 가지며, 기도로써 길러지고 체득된 식별의 감각을 지니고 세상안에서 활동한다. 예수회 전통은 봉사의 질과 자기도야에 있어 엄격함을 유지하여 왔으며, 인간적인 것에 대한 고결한 감각으로 참으로 인간다운 것을 존중한다. 예수회원의 행동양식은 외면상으로는 평범하고 또 그것을 추구하나, 내적으로는 자신의 목적의 탁월한 완성을 위해 노력한다.
3. 오늘날의 예수회원 예수회는 그 시대와 세계 안에서 그리스도를 관상하면서 영감을 받아 거기에서 사도적 활동력을 보존할 통찰을 길어 내었다. 따라서 우리시대 인간들의 염원과 필요를 보되 그리스도의 눈으로 봄으로써, 오늘날의 예수회원들은 스스로의 신원과 사명을 자각한다. 오늘의 예수회원은 이냐시오와 같이 ’예수의 벗’으로 부름받았음을 인식하면서, ’주님 안의 벗들’인 동료들과 더불어 그리스도의 지상 대리자께 결속하여, 이 시대의 가장 심각한 투쟁인 신앙의 봉사와 신앙에 내포된 정의 구현에 헌신하는 사명을 받아 파견된 사람이다. 예수회원은 세가지 서원을 통해 이러한 봉사에 필요한 사도적 자유를 얻어 가난한 이들과 일치하면서 세계의 현실 한 가운데로 뛰어든다. (예수회 성소실홈에서)
*성 이냐시오 데 로욜라 사제 축일:7월31일.인창동성당게시판1295번 ☞http://home.catholic.or.kr/gnbbs/ncbbs.dll/chinchang
THE HOLY NAME OF JESUS 예수 성명 축일:1월3일.게시판1550번.
IHS(JHS)의 정확한 뜻은?
오늘 우리는 글을 쓰는 데 종이를 사용합니다. 그러나 종이가 발명되기 이전의 시대에는, 찰흙판, 암벽, 나무판, 파피루스지, 양피지 등에 글씨를 써서 기록을 남겼습니다.
초기 그리스도교 문서들은 (성서, 전례, 교부학, 교회사 등의 내용을 가진 문서들) 주로 파피루스지나 양피지에 기록되었는데, 이들은 대체로 비싼 가격이어서, 자주 반복되는 단어들을 서서히 약자로 기록하게 되었습니다. 또한 당시의 출판은 한 필경사가 처음부터 끝까지 손으로 쓰는 것이었고, 또 다시 한권의 책이 있기 위해서는 처음부터 다시 베껴써야 해습니다. 아까의 경제적 이유 이외에 적은 시간에 많은 내용을 옮겨쓰기 위해서도 약자들이 사용되었다고 생각됩니다.
이미 4세기부터 발견되는 약자들은 DS, IHS (JHS), XPS (XPC), SPS 등입니다. 그 뜻은 DS = DEUS (하느님), IHS (JHS) = IESUS (혹은 JESUS; 예수), XPS (XPC) = CHRISTUS (그리스도), SPS = SPIRITUS (영; 성령) 입니다.
그런데 여기에서 DS, SPS 와 달리 IHS, XPS 는 자신의 라틴어 단어와 잘 합치하지 않는 듯 보이는데, 사실 IHS 는 희랍어 IHSOUS (예수, 소문자로 적을 수 없어서 유감입니다) 에서 유래하고, XPS 는 희랍어 xpistos (그리스도) 에서 유래합니다. 이것은 이 두 약어 (IHS, XPS) 가 교회가 공식어로 라틴어를 채택하기 이전, 희랍어를 사용하던 시대부터 이미 약어로 사용되던 것이 유산으로 남겨졌다는 것을 말합니다.
참고로 현대에도 (영어 등) 사용하는 & 도 et (그리고)를 단순화시켜 적은 것입니다.
한편, IHS에 대하여 ’Iesus hominum salvator’ (인류의 구원자이신 예수) 의 약자라고 해석하는 경우도 있는데, 이것은 라틴어 약어가 더 이상 널리 사용되지 않게된 시대 (인쇄술의 발달로 손으로 책을 베끼던 작업이 끝난 시대)에 잘 모르고 덧붙였던 해석이, 오늘날까지 전해진 것이라 추정됩니다.
참고도서: G. Battelli, Lezioni di Paleografia, Libreria editrice Vaticana, 1997, p. 101. <장신호 신부님, 전례학 동호회 홈페이지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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