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없이 눈에 보이는 것을 좇는 본성을 지닌 인간이
세상 안에서 살아가기란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
현세적 복락을 당장 가져다주지도 않는 신앙을
점점 부차적인 것으로 여겨버리는지도 모른다.
세상에 속하지 않은 우리가 세상 안에서 살아가고,
세상의 경험이나 지식이 아닌 그분의 진리 안에서
행복을 찾는다는 것은 엄청난 도전이 아닐 수 없다.
오늘 복음에 비추어 바른 인생길을 찾아보자.
예수님께서는 자신의 부재 시에 제자들이 세상 안에서
하느님의 진리를 끝까지 지킬 수 있기를 기도하신다.
제자 공동체의 존속은 하느님과 일치를 이루고
악마의 지배를 받지 않고 신앙과 사랑 안에 머무름으로서 가능해진다.
따라서 예수님께서는 “이들도 우리처럼 하나가 되게 해 주십시오.”
(17,11)라고 기도하신다.
우리의 연약함에도 불구하고 하느님과 일치하고
예수님의 사랑 안에 하나될 때 생명력을 얻을 수 있다.
인간은 예수님을 통해 진리를 만나고 경험한다.
그래서 요한은 말한다.
“너희가 내 말 안에 머무르면 참으로 나의 제자가 된다.
그러면 너희가 진리를 깨닫게 될 것이다.
그리고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할 것이다.”
(8,31-32)
진리는 진리와 사랑의 하느님께로 우리를 이끌며 변화시킨다.
예수님을 따르는 이들은 모든 시대에 세상 가치가 아닌
하느님의 진리 안에 머무르려는 성화에 힘써야 한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을 거룩하게 하시려고 자신을 거룩하게 하신다
(17,18-19).
아버지에 의한 예수의 파견은 예수님의 떠나감으로 끝나지 않고,
제자 공동체의 파견으로 이어진다.
공동체는 세상 구원이라는 그분의 사명을 이어받는다.
세상 구원을 위한 공동체의 능력은 결국 제자들을 위해
자신을 바치신 예수님의 지극한 사랑으로부터 온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과 함께 있는 동안 그들을 지켰음을 밝히신다
(17,12).
유다를 잃게 되겠지만 이제 공동체에는 다른 협조자께서 오실 것이다.
따라서 예수님의 떠나감은 제자들에게 완전한 기쁨의 시작이 된다.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로 우리에게는 영원한 구원이 시작되었다.
이 구원은 세상이 주거나 빼앗아 갈 수 없는 완전한 기쁨이다.
우리 세상 즐거움이 아니라 바로 이런 기쁨을 추구하여야 한다.
구원은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전해주신 하느님의 말씀에 의해 보장된다.
그러나 하느님의 말씀은 생명을 일깨우고 불러일으키며
우리와 세상을 구분 짓는다.
우리는 예수님께 뿌리를 두게 되므로 더 이상 세상에 속하지 않는다
(17,16).
세상과는 전혀 다른 가치와 행동방식으로 살아가기에
엄청난 도전을 받는다.
따라서 세상 안에서의 복음살이는 자주 상처받고 불안해하며
강한 미움을 받을 것이다.
그럴수록 우리는 자신을 성화시키고 하느님과
하느님의 길을 따르기 위해 몸을 바쳐야 한다
(17,17).
요한복음에서
‘세상’은 두 가지 측면이 있다.
한편으로는 구원을 필요로 하면서 구원을 받을 수 있는 인간세계요,
다른 한편으로는 완고한 불신과 증오로 가득 찬 인간세계다.
따라서 ‘세상’은 심판의 대상이자 구원의 대상이다.
그러므로 예수와 제자들의 복음선포 상황은 증오와 박해의 상황인 동시에
신뢰와 믿음의 상황이다
(15,19-20 참조).
이 갈림길에서 세상에 속하지 않는 자로서 나는 어떤 길을 선택할 것인가?
그래도 하느님 안에서 영원한 기쁨과 행복을 누릴 수 있는 길은
죽음에 이르는 자기헌신과 ‘제아무리 죽이려 해도 죽여지지 않으시는
주님’께 대한 믿음 뿐이다.
오늘 나는 어떤 길을 걷고 있는지 살펴보자!
인생은 그렇게 자기 편한 대로 세상적은 쾌락과 만족을 추구하며
대충 살며 하루살이처럼 아무렇게나 허비할 것이 아니다.
죽을 만큼 힘들고 포기하고 싶고 고통스러울 때,
바로 그때가 바로 영원한 기쁨을 얻을 수 있는
절호의 기회임을 제발 눈치채며 영리하게 살아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