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대건 신부의 믿음과 희망
-최기산 주교-
희광이가 휘두른 칼날 아래로 선혈이 치솟더니 젊은이의 목이 떨어졌다.
한강 새남터 백사장은 어느새 피로 물들고 피를 본 희광이의 눈은 미친 사람처럼 광기가 가득 한 채,
막걸리를 사발로 들이켰다.
목이 떨어진 젊은이의 이름은 김대건이었다.
그의 죄목 은 국법을 어기고 국교인 유교가 아닌 서양종교를 신봉했다는 것이었다.
가여운 젊은이 !
그가 이 시대에 태어났던들 그렇게 참혹하게 세상을 등지지는 않았을 것이다.
세월을 잘못 만난 탓일까 ? 그것 은 아니다.
그는 얼마든지 호의호식할 수도 있었다. 말 한마디만 하면 되었다.
' 나는 하느님을 배 반하오' 이 한마디를 할 수 없었기에 그는 군문효수형을 받았다.
< 생 애 (生涯) >
김대건 신부는 1821년 8월21일 충청도 내포지방 솔뫼에서 태어 났다.
그의 증조부는 김진후였는데 그 지방의 관료로서 남부럽지 않게 살아가고 있었다.
김진후 는 50세에 세례를 받고 열심한 신자가 되고자 관직에서 물러나 오직 신앙생활에만 전념하였다.
그러던 중 1814년 2월20일 체포되어 순교하였다.
될 성싶은 나무는 떡잎부터 알아본다는데 이미 할아버지부터 순교자가 되었던 것이다.
김대건 신부의 아버지인 김제준(이냐시오)은 고 우술라와 결혼하여 솔뫼에서 살다가
1839년 9월26일 체포되어 순교했다.
할아버지가 순교하였으니 경제적으로도 가난하 게 살았을 것은 뻔한 일이다.
남편을 잃은 우술라는 아이 김대건을 데리고 경기도 용인의 골배마실이라 는 동네로 이사갔다.
이사라기보다는 친척집에 가서 더부살이를 한 셈인데 천주학쟁이 과부를 누가 좋아 했겠는가 ?
천덕꾸러기로 살아갔을 것이다.
골배마실을 방문한 모방 신부는 15세의 소년 김대건 의 영특함을 알아보고
그를 신학생으로 선택하기로 마음먹었다.
그후 김대건 신부는 최방 제, 최양업과 함께 1837년 6월7일 마카오에 도착하였다.
산설고 물설은 이국 땅에서 어린 학생들은 얼마 나 고향생각을 했을까 ? 음식도 맞지 않았을 것이다.
다음해, 사랑하는 친구 최방제는 병마와 싸우다 먼 저 하늘나라에 들어갔다.
최양업과 김대건이 얼마나 친구를 얼싸안고 울었을까 ?
1844년 오랜 각고 끝에 부제품을 받은 그는 9년의 외국생활의 지친 삶을 잠시 접고
조선으로 돌아와 국내 상황 을 살펴보고자 하였다.
국내에 돌아온 기간동안 김대건 신부는 어머니를 만나고자 했으나 그의 어머니 는 거지처럼
떠돌이 생활을 했기에 만날 수가 없었다.
그는 다시 중국으로 돌아가 다음해인 1845년 8월17일 상해 김가항 성당에서 사제로 서품 되었다.
사제가 된 뒤 서둘러 조선에 들어와서 전도 하기 시작했으나, 이 시기에 천주교에 대해
박해가 너무 심했다.
그는 혼자 몸으로는 도저히 성무 집행을 다할 수 없어 중국교회에 선교사 파견을 청하러 가다가
1846년 6월5일 순위도 앞에서 그만 체포 되고 말았다.
그는 여러 외국어와 지리에 대해서도 능통하여 감옥에 있으면서도 지도를 그려주었 다.
이러한 그의 능력을 아까워한 정부는 좋은 집을 주겠다, 높은 지위를 주겠다,
예쁜 부인을 맞 게 하겠다 등등의 회유를 해보았으나 도저히 그의 마음을 바꿀 수 없음을 알고
처형하기로 결심하였다.
김 신부는 그해 9월16일 한강 백사장 지금의 새남터 상당터에서 군문효수라는 형을 받아 처형되 었다.
군문효수란 목을 쳐서 장대 높이 달아놓는 것으로 그것을 보는 이들에게
다시는 천주학을 하 지 못하도록 하는, 소위 본때를 보이는 형 집행이었다.
< 사상(思想) >
그는 죽기 전에 '나의 영원한 생명을 이제 시작합니 다'라고 큰 소리로 외쳤다.
그에게는 바오로 사도의 '나에게는 그리스도가 생의 전 부입니다'(필립비 1,21)라는 말씀이
언제나 가슴깊이 새겨져 있었다.
그는 주님을 이 세상의 그 무 엇보다도 사랑했다. 그는 하나밖에 없는 목숨을 주님을 위해 내놓았다.
그가 우리에게 주고 간 교훈은 이 세상은 잠시 지나가지만 하느님 나라는 영원하기에
하느님 나라를 위해서, 영원한 생명을 위해서 있 는 힘을 다하라는 것이다.
< 복음의 메시지 >
오늘 우리 신자들은 김대건 신부를 닮는 사제를 원한다.
세속적인 것에 가치를 두 지 않고 오직 주님만을 바라보며 주님을 위해서 목숨을 바치는 사제를 원한다.
그런 사제가 나오기 위해 서는 가문의 분위기가 중요하다.
김대건 신부의 증조부, 아버지도 순교하였고 자식을 위해서 거지처럼 살아갔지만
언제나 기도해주었을 어머니의 굳은 믿음이 김대건 신부를 꿋꿋하게 살아갈 수 있게 했 다.
죽어서 백사장에 아무렇게나 묻혀있었을 그를 신도들은 포기하지 않았다.
경비병에게 술을 사주고 잠이 든 뒤 시신을 파내어 미리내까지 메고 갔다는 것은 참으로 대단한 믿음이다.
그런 신도 들이 있었기에 김대건 신부같은 훌륭한 사제가 있었을 것이다.
오늘 우리는 교회 안에 많은 문제들이 있음을 직시하고 있다.
신도들은 영적으로 꽉 찬 신부를 원하고 신부들은 그야말로 순종 잘하고 열심한 신자,
헌 신적인 신자를 찾고 있다.
과연 내가 이 시대에 한강 백사장에 묻힌다면 그 누가 썩은 내 육체를 거두어
등에 메고 150리 길을 달려갈 수 있을까 ?
김대건 신부보다 곱절의 인 생을 살았으면서도 그가 깨달았던 심오한 신앙의 의미를
아직도 도반으로서 깨달아 가고 있으니 참으로 안타까울 따름이다.
안도현 시인의 시 중 이런 구절이 있다.
연탄재 함부로 차지 마라,
너는 누구에게 한번이라도 뜨거운 사람이었느냐 ?
김대건 신부는 주님께 뜨거운 사랑을 드린 사람이 다.
나는 어떤가 ? 뜨거운 사람인가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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