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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 신부님들의 강론

~ 07 월 05일 한국 성직자들의 수호자 성 김대건(안드레아) 신부 순교대축일 미사 강론 / 이균태 신부님 ~

                                 

           

 
 

 

축일 : 7월5일
한국 성직자들의 수호자

성 안드레아 김대건 사제 순교자 대축일

 

 

성 안드레아 김대건 사제(1821-1846년)는

충청도 솔뫼의 구교우 집안에서 태어났는데,

어려서부터 비상한 재주와 굳센 성격과 진실한 신심이 드러났다고 한다.

 

15세 때인 1836년에 모방 신부의 주선으로 마카오로 가서 신학을 공부하고,

1845년 1월에 죽을 고생 끝에 압록강을 건너 귀국하는 기쁨을 얻는다.

 

서울에 도착한 후 그는 극도로 건강이 나빴으나 건강이 회복되기도 전에

전교신부를 영입하려는 목적으로 다시금 상해로 떠난다.

 

풍랑으로 인한 죽을 고비를 넘기고 상해에 도착한 그는

1845년 8월 17일에 김가항에서 페레올 고주교 집전으로 서품되는 기쁨을 얻었다.

 

같은 달 31일, 고 주교와 안 신부를 모시고 충청도 나바위에 상륙하여

선교활동에 새로운 기운을 불어넣었다.

 

한편 그는 만주에서 기다리는 메스트로 신부 일행을 입국시키려고 활약하던 중

1846년 6월 5일 밤에 순위도에서 체포되어 그의 행적이 세상에 알려졌던 것이다.

 

성인은 수차례에 걸쳐 문초와 형벌을 받았으며, 마침내 김대건 신부는

사제생활 1년 1개월만인 1846년 9월 16일에 새남터에서

군문효수형을 받고 순교하니, 이때 그의 나이는 26세였다.

 

1925년 7월 5일 비오 11세께서 김신부를 비롯 79명의 순교자를 시복하시고,

비오 12세는 1949년 11월 25일에 한국에서 선교하는

모든 성직자들의 수호자로 선언하였으며,

요한 바오로 2세는 1984년 5월 6일에 서울에서 한국 순교자 103위

시성식을 거행하시고, 그를 한국의 대표 성인으로 삼으신 것이다.

 

 

 

 
찬미예수님!
 

오늘의 미사강론
 

 

11월 18일 연중 제 33주간 화요일 미사 강론

 

 

7월 5일 성 김대건 안드레아 사제 순교자 대축일 미사 강론

 

복산성당 주임 신부 이균태 안드레아

 

 

  

 

 

우리나라 최초의 천주교 사제 김대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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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사람이라면, 천주교 신자이건 그렇지 않건,

한번 이상은 들어본 이름이다.

큰 대 하늘 건, 당신의 이름처럼, 큰 하늘을 닮으려 했던 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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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21년에 태어난 신부님은 1846년 9월 16일 한강 새남터에서

순교하실 때까지 25세라는 아주 짧은 인생을 사셨고,

그 가운데, 사제로서의 생활은 일년 남짓 하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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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그분은 시간의 길이만으로는 가늠할 수 없는

삶과 가르침을 주고 간 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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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군다나 오늘 제 1독서의

즈가리야와 같이 시대의 예언자요 의인으로 살았으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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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2독서의 사도 바오로가 로마인들에게 보낸 편지의 주제인

진정한 희망의 삶이 무엇인가를 온몸으로 보여주었던 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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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거에 교회는 지상에서의 삶의 가치와 그 녹녹치 않음을 간과하고,

하늘만 쳐다보고 살라고, 죽음 이후에는 행복이 올 것이라느니 하는,

말도 안 되는 식으로 내세의 행복을 지나치게 강조하던 시절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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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면서 기득권자들의 이익과 집권자들, 힘있고 돈 있는 자들의

편에 서서 그들의 권익을 대변하던 시절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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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더러움과 추악함이 절정에 이르렀을 때,

니체는 “신은 죽었다. 너희들이 신을 죽여버렸다”고 외쳤고,

맑스는 “종교는 아편이다. 현실의 아픔과 눈물과 피땀에서부터

우리를 도피하게 만드는 아편이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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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는 그들의 예언자적인 목소리를 외면하고,

그들을 무신론자들이라고, 매도해버리고,

악마의 자식들이라고 낙인을 찍어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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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날, 교회는 과거 중세와 근세에 저질렀던 잘못들을 인정하고,

이 현세가 얼마나 소중한 것인지, 얼마나 고귀하고 거룩한 것인지를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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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2년부터 1965년까지 4년에 가까운 시간에 걸쳐 이루어졌던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사목헌장은 이렇게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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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쁨과 희망, 슬픔과 번뇌, 특히 현대의 가난한 사람과

고통에 신음하는 모든 사람들의 그것은 바로 그리스도를 따르는

신도들의 기쁨과 희망이며 슬픔과 번뇌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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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실로 인간적인 것이라면 신도들의 심금을 울리지 않는 것은 있을 수 없다.

신도들의 단체가 인간들로 구성되었기 때문이다.”

(사목헌장 1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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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다른 한편 지나치게 현세위주의 삶만을 이야기하는

경향도 없잖아 있는 것도 사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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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현세에서의 삶은 분명 중요하다.

그러나 이 현세의 삶만으로 모든 것이 끝나는 것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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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앙인으로 산다는 것은 이 세상 안에서 하느님나라의

풍요로움을 누리며 산다는 것이라고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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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아무리 그렇다고 하더라도, 그 나라에 산다는 것이

우리가 발을 디디고 서 있는 이 땅을 떠나서 어떤 낙원에서

산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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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화나 전설에서나 나오는 따위의 그러한 낙원은

예수가 선포한 하느님 나라가 결코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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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려한 궁전에서, 온갖 보석들과 온갖 먹거리들로 가득 차 있는 곳,

그런 곳은 게으름뱅이들의 꿈에서나 나오는 곳일 뿐,

결코 하느님 나라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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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한 낙원은 결코 존재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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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느님 나라에서 살기를 희망하는 이들은

결코 허무맹랑한 것을 꿈꾸는 사람들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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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어느 누구보다도 더 현실적이고 실제적이다.

그러면서도 미래에 대한 낙관적인 희망을 안고 살아가는 이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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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희망이라는 것은 일차적으로 사람으로 하여금 살게 하는 원천이다.

또한 희망은 예수 그리스도의 약속을 신뢰하고,

우리 자신의 힘을 믿기보다는 성령의 도움으로

하느님 나라를 갈망하게 한다.

 

 

 

 

바로 오늘 제2독서에서 바오로 사도가

이 말씀을 하셨다는 것을 우리 모두는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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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망은 하느님께서 모든 사람들의 마음에 넣어주신

행복을 바라는 것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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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망은 사람들의 활동을 고취시키는 갈망을 하나로 모으며,

그 활동들을 정화하여 하느님 나라를 향하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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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을 실망하지 않게 보호하고,

버림받을 때 언제나 힘을 북돋아 주며,

영원한 행복에 대한 ‘기다림’으로 마음을 부풀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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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한 희망은 칼 맑스의 ‘인민의 아편’이 아닌 ‘실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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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느님 나라에 대한 희망은 이 현세에서의 고통을 견딜 수 있게 한다.

시련 중에서도 기쁨을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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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망은 기도를 통해서 표현되고 또한 기도를 통해 자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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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망을 가지고 기뻐하며 환난 속에서 참으며 꾸준히 기도하십시오”

(로마 12,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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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한 희망을 가능케 하는 것은 믿음이다.

하느님에 대한 믿음,

그것은 우리로 하여금 사랑의 삶과 희망의 삶을 가능케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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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하는 형제, 자매 여러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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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대건 안드레아,

그가 실천한 사랑과 희망과 믿음의 삶의 모범은

우리로 하여금 그러한 삶을 살도록 종용한 삶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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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불어 그러한 삶을 살 때에 하느님 나라는 이미 우리 안에

존재하고 있음을 보여 준 삶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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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대건 신부님께서 순교하시기 직전 믿는 이들에게

당부하신 말로 강론을 맺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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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우들아 보아라,

미구에 전장에 나아갈 터이니, 부디 착실히 닦아

이 어려운 때를 당하여 마음을 허실히 먹지 말고,

주야로 주의 은혜를 빌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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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은 이슬비처럼 의인을 내려다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