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나라 최초의 천주교 사제 김대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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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사람이라면, 천주교 신자이건 그렇지 않건,
한번 이상은 들어본 이름이다.
큰 대 하늘 건, 당신의 이름처럼, 큰 하늘을 닮으려 했던 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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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21년에 태어난 신부님은 1846년 9월 16일 한강 새남터에서
순교하실 때까지 25세라는 아주 짧은 인생을 사셨고,
그 가운데, 사제로서의 생활은 일년 남짓 하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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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그분은 시간의 길이만으로는 가늠할 수 없는
삶과 가르침을 주고 간 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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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군다나 오늘 제 1독서의
즈가리야와 같이 시대의 예언자요 의인으로 살았으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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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2독서의 사도 바오로가 로마인들에게 보낸 편지의 주제인
진정한 희망의 삶이 무엇인가를 온몸으로 보여주었던 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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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거에 교회는 지상에서의 삶의 가치와 그 녹녹치 않음을 간과하고,
하늘만 쳐다보고 살라고, 죽음 이후에는 행복이 올 것이라느니 하는,
말도 안 되는 식으로 내세의 행복을 지나치게 강조하던 시절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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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면서 기득권자들의 이익과 집권자들, 힘있고 돈 있는 자들의
편에 서서 그들의 권익을 대변하던 시절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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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더러움과 추악함이 절정에 이르렀을 때,
니체는 “신은 죽었다. 너희들이 신을 죽여버렸다”고 외쳤고,
맑스는 “종교는 아편이다. 현실의 아픔과 눈물과 피땀에서부터
우리를 도피하게 만드는 아편이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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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는 그들의 예언자적인 목소리를 외면하고,
그들을 무신론자들이라고, 매도해버리고,
악마의 자식들이라고 낙인을 찍어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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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날, 교회는 과거 중세와 근세에 저질렀던 잘못들을 인정하고,
이 현세가 얼마나 소중한 것인지, 얼마나 고귀하고 거룩한 것인지를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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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2년부터 1965년까지 4년에 가까운 시간에 걸쳐 이루어졌던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사목헌장은 이렇게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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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쁨과 희망, 슬픔과 번뇌, 특히 현대의 가난한 사람과
고통에 신음하는 모든 사람들의 그것은 바로 그리스도를 따르는
신도들의 기쁨과 희망이며 슬픔과 번뇌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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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실로 인간적인 것이라면 신도들의 심금을 울리지 않는 것은 있을 수 없다.
신도들의 단체가 인간들로 구성되었기 때문이다.”
(사목헌장 1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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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다른 한편 지나치게 현세위주의 삶만을 이야기하는
경향도 없잖아 있는 것도 사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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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현세에서의 삶은 분명 중요하다.
그러나 이 현세의 삶만으로 모든 것이 끝나는 것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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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앙인으로 산다는 것은 이 세상 안에서 하느님나라의
풍요로움을 누리며 산다는 것이라고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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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아무리 그렇다고 하더라도, 그 나라에 산다는 것이
우리가 발을 디디고 서 있는 이 땅을 떠나서 어떤 낙원에서
산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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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화나 전설에서나 나오는 따위의 그러한 낙원은
예수가 선포한 하느님 나라가 결코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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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려한 궁전에서, 온갖 보석들과 온갖 먹거리들로 가득 차 있는 곳,
그런 곳은 게으름뱅이들의 꿈에서나 나오는 곳일 뿐,
결코 하느님 나라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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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한 낙원은 결코 존재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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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느님 나라에서 살기를 희망하는 이들은
결코 허무맹랑한 것을 꿈꾸는 사람들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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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어느 누구보다도 더 현실적이고 실제적이다.
그러면서도 미래에 대한 낙관적인 희망을 안고 살아가는 이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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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희망이라는 것은 일차적으로 사람으로 하여금 살게 하는 원천이다.
또한 희망은 예수 그리스도의 약속을 신뢰하고,
우리 자신의 힘을 믿기보다는 성령의 도움으로
하느님 나라를 갈망하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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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로 오늘 제2독서에서 바오로 사도가
이 말씀을 하셨다는 것을 우리 모두는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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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망은 하느님께서 모든 사람들의 마음에 넣어주신
행복을 바라는 것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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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망은 사람들의 활동을 고취시키는 갈망을 하나로 모으며,
그 활동들을 정화하여 하느님 나라를 향하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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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을 실망하지 않게 보호하고,
버림받을 때 언제나 힘을 북돋아 주며,
영원한 행복에 대한 ‘기다림’으로 마음을 부풀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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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한 희망은 칼 맑스의 ‘인민의 아편’이 아닌 ‘실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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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느님 나라에 대한 희망은 이 현세에서의 고통을 견딜 수 있게 한다.
시련 중에서도 기쁨을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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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망은 기도를 통해서 표현되고 또한 기도를 통해 자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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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망을 가지고 기뻐하며 환난 속에서 참으며 꾸준히 기도하십시오”
(로마 12,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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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한 희망을 가능케 하는 것은 믿음이다.
하느님에 대한 믿음,
그것은 우리로 하여금 사랑의 삶과 희망의 삶을 가능케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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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하는 형제, 자매 여러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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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대건 안드레아,
그가 실천한 사랑과 희망과 믿음의 삶의 모범은
우리로 하여금 그러한 삶을 살도록 종용한 삶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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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불어 그러한 삶을 살 때에 하느님 나라는 이미 우리 안에
존재하고 있음을 보여 준 삶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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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대건 신부님께서 순교하시기 직전 믿는 이들에게
당부하신 말로 강론을 맺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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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우들아 보아라,
미구에 전장에 나아갈 터이니, 부디 착실히 닦아
이 어려운 때를 당하여 마음을 허실히 먹지 말고,
주야로 주의 은혜를 빌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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