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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욱현 신부님

~ 성 야고보 사도 축일 - 참된권위는 사랑과 봉사에서 / 조욱현 신부님 ~

                                          

성 야고보 사도 축일

야고보 사도는 제베대오의 아들이며, 요한이 그의 동생이다. 그들은 갈릴래아 출신으로 어부가 직업이었는데 예수님께 부름을 받았다. 야고보는 베드로와 요한과 함께 항상 중요한 사건의 증인으로 복음에 나타난다. 시몬의 장모의 열병을 고쳐주실 때, 회당장 야이로의 딸을 살리시는 현장에, 예수님께서 당신의 모습을 영광스럽게 변모하셨던 그 현장에, 겟세마니 동산의 기도하시는 현장에 증인으로 꼭 등장하는 분이었다.

사도는 헤로데 아그리빠 1세에 의해 예루살렘에서 순교하심으로써 사도로서는 첫 번째 순교자가 되셨고, 성인의 유해는 지금 스페인의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에 모셔져 있으며 스페인의 수호자로 공경을 받고 있다.











복음: 마태 20,20-28: 너희도 내 잔을 마시게 될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예루살렘으로 가시면서 당신의 수난을 예고(20,18-19)하시는데 제자들은 그 말씀이 무슨 뜻인지 알아듣지를 못한다. 엉뚱하게도 제배대오의 두 아들의 어머니가 자기 아들들과 함께 예수님께 가서 특별한 지위를 청한다. “스승님의 나라에서 저의 두 아들이 하나는 스승님의 오른쪽에, 하나는 왼쪽에 앉을 것이라고 말씀해 주십시오.”(21절) 예수님 시대에도 치맛바람이 있었던 것 같다.

“내가 마시려는 잔을 너희가 마실 수 있느냐?”(22절) 마르코 복음에는 “내가 마시는 잔을 너희가 마실 수 있으며, 내가 받는 세례를 너희가 받을 수 있느냐?”(10,38)고 하신다. 잔과 세례는 같은 것이 아니다. 잔은 수난을 의미하며 세례는 죽음 그 자체를 말한다. 그들 모두는 실로 주님의 잔을 마셨지만, 그분께서 받으신 세례는 받지 않았다.

그들은 “할 수 있습니다.”(22절)고 대답한다. 이렇게 대답한 것은 그들의 마음이 담대해서가 아니라, 예수님의 수난에 대해 전혀 알지 못했기 때문이다. 예수님께서도 수난 앞에서 “아버지, 하실 수만 있으시면 이 잔이 저를 비켜 가게 해 주십시오.”(마태 26,39) 하셨다. 그 죽음의 시련이 어떤 것인 줄 알았다면 어떻게 “할 수 있습니다.”라고 말했겠는가? 수난의 괴로움은 아주 큰 것이다. 그러나 죽음은 훨씬 더 무서운 것이다.

“너희는 내 잔을 마실 것이다.”(23절) 그렇게 되었다. 야고보 사도는 헤로데에게 목이 베였고(사도 12,2 참조), 요한은 파트모스로 귀양을 갔다. 이렇게 그들은 잔을 마신 것이다. “그러나 내 오른쪽과 왼쪽에 앉는 것은 내가 허락할 일이 아니라, 내 아버지께서 정하신 이들에게 돌아가는 것이다.”(23절) 하늘 나라는 주는 이의 것이 아니라, 받는 이의 것이라는 의미이다. 하늘 나라에 합당한 사람만이 받는 것이라는 의미이다.

“다른 열 제자가 이 말을 듣고 그 두 형제를 불쾌하게 여겼다.”(24절) 예수님을 따르는 것이 세속적이었기 때문에 그런 청을 했으며, 동시에 불쾌해 했던 다른 제자들도 아직은 세속적인 마음 때문이었다. 선한 일을 하고자 하는 것은 좋은 일이지만 첫 자리를 탐하는 것은 허영이다. 선행은 우리의 의지와 활동과 수고로 이루어지는 것이기에 그 보상도 받는 것이지만, 첫 자리를 쫓는 것은 하느님의 판단에 끼어드는 것이다.

세속적인 첫 자리를 찾는 것은 다른 민족의 통치자들의 모습이지, 제자들의 모습은 아니라고 하신다. 그런 욕망은 사람을 압제자로 만든다. 아무리 위대한 사람이라고 해도 이 욕망으로 끊임없이 방해를 받는다. 이런 욕심은 엄격하게 다루어야 한다. 제자들 가운데는 꼴찌, 즉 섬기는 사람이 첫째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예수님의 삶에서 그 증거를 보고 있다. 그분은 그분이 가르치는 대로 행하셨다. 그분은 하느님이시면서도 인간이 되셨고 경멸과 악의에 찬 대접을 받으셨고 죽임까지 당하셨다.

“너희 가운데에서 높은 사람이 되려는 이는 너희를 섬기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26절) 우리는 그리스도의 뜻과 행동을 본받는 사람들이 되도록 그분의 모상으로 만들어졌다. 그러니 우리는 그분과 같이 보고 행할 수 있어야 한다. 그분은 겸손한 분이시니, 만일에 자랑거리를 좇는 사람은 그리스도의 모상이 아니다. 스승을 본받지 않는 사람은 참된 제자가 아니며, 자기를 창조하신 분과 닮지 않은 것은 참된 모습이 아니다.

“사람의 아들도 섬김을 받으러 온 것이 아니라 섬기러 왔고, 또 많은 이들의 몸값으로 자기 목숨을 바치러 왔다.”(28절) 우리는 아무리 낮아져도 주님께서 낮아지신 만큼 낮아지지 못한다. 그분이 낮아지심으로써 우리 모두가 올라가게 되었다. 주님께서는 당신을 낮추셔서 사람이 되시고 십자가에 돌아가시기까지 당신을 낮추셨기 때문에 가장 큰 영광, 즉 부활의 영광을 입으셨다.

야고보 사도가 처음에는 주님의 뜻을 잘 알지 못하고 주님을 따르고 있었지만, 부활하신 주님을 체험한 후에는 그분을 위해 목숨을 바치신 분이다. 처음에는 주님께 당신을 따르라고 하였지만, 나중에는 진정으로 주님을 따르게 되었고 그분을 위해 순교하신 분이시다. 이제는 우리도 주님의 뜻이 무엇인가를 생각하면서 그것을 실천하고 십자가의 길을 통하여 그분을 닮아갈 수 있는 우리 되도록 결심하고 그러한 은총을 구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