폰테 콜롬보 - 프란치스칸 시나이
폰테 콜롬보 역시 이태리 중부에 위치한 자그마한 마을입니다.
이 폰테 콜롬보가 프란치스칸 수도자들에게 시나이라고 불리는 것은 이 곳에서 성인이 회칙을 쓰셨기 때문입니다.
즉 모세가 시나이 산에서 하느님으로부터 십계명을 받았던 것에 비유되어 붙여진 것입니다.
프란치스코 성인은 네 번에 걸쳐 회칙을 쓰셨습니다.
그 중 마지막, 네 번째 회칙이 이곳에서 쓰여졌습니다.
그 네 번째 회칙은 인준 받은 회칙으로서(1223년 11월 29일) 바로 이 곳 폰테콜롬보에서 40일 동안 단식하시며
기도하시며 작성하신 회칙입니다.
이 회칙과 연관되어 하나의 일화가 전해져 내려옵니다.
몇몇의 장상 형제들이 찾아와 너무 엄격한 회칙은 준수하기 힘들다는 사실을 성인께 알리며 회칙을 좀 더 완화해 줄 것을 요청하였다고 합求?
그 때 성인은 하느님께 이 회칙이 주님의 뜻임을 이해시켜 주실 것을 기도하자
“프란치스코야, 그 회칙 안에는 너에게서 나온 것이라고는 하나도 없다.
거기에 있는 것은 모두가 나에게서 나온 것들이다.... 그것을 지키기를 원하지 않는 사람은 수도회를 떠날 것이다”
하고 말씀하셨다고 레오 형제는 전합니다.(페루지아 전기 113)
주님의 이름으로 작은 형제들의 생활양식이 시작됩니다.
“작은 형제들의 회칙과 생활은 순종 안에, 소유 없이, 정결 안에 살면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거룩한 복음을 실행하는 것입니다"(회칙 1장)
지명에 얽힌 이야기
폰테 콜롬보라는 지명은 말 그대로 해석하면 비둘기의 샘이란 뜻입니다. 이 지명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이야기가 전해져 내려옵니다.
성인이 1217년 처음 이곳에 오셨을 때 숲 속에 있는 샘물가에 비둘기가 목을 축이고 있는 것을 보시고
우리의 갈증을 없애 주시는 생명의 샘이신 그리스도와 그를 둘러싼 영혼들을 연상하시고는 폰테 콜롬보라고 명하셨다고 하기도 하고
또 어떤 이는 이 산이 골롬바라고 불렀던 한 부인이 그에게 선물한 것이라고도 합니다.
폰테콜롬보에 머무신 시기
어찌되었건 여러 전기들을 살펴볼 때 프란치스코와 그의 동료들이 이 곳에 처음 온 것은 1217년으로 추정됩니다.
그리고 확실한 사실은 인준 받은 회규를 쓰셨던 1222년 12월부터 1223년 2월 사이와 눈 수술을 위해 이곳에 머무셨던 1225년 말 또는 1226년 초에 이 곳에 머무셨다는 것입니다.
폰테 콜롬보에서 쓰인 것은 네 번째 회칙
우리가 잘 알다시피 프란치스코 성인은 네 개의 회칙을 쓰셨습니다.
제일 첫째 회칙은 원회규(Proto Regula)라고 불리는 회칙으로서 복음에서 발췌한 가난과 단순성과 사도적 열성
의 길을 통하여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도록 강조하는 간단한 생활 규범 같은 것들이라 추정되는 회칙입니다.
이것이 1210년 4월 16일 프란치스코가 동료들과 로마로 가서 인노첸시오 3세로부터 구두로 인준 받은 바로 그 회칙을 일컫는 것입니다.
그리고 두 번째가 인준 받지 않은 회칙으로 1221년 성서 전문가인 스피라의 체사레아 형제의 도움으로 작성된
것으로서 1221년 성령강림 총회에 상정되었을 것입니다.
이 회칙은 상당히 길고 성서 인용이 많지만 법적 제도적 요소들이 부족한 것으로 보완이 필요한 것으로 밝혀진 회칙입니다.
세 번째 회칙은 엘리아 형제에게 주었으나 며칠 후 그의 부주의로 분실되었다는(완덕1) 회칙을 말합니다.
네 번째 회칙은 인준 받은 회칙으로서(1223년 11월 29일) 바로 이 곳 폰테콜롬보에서 40일 동안 단식하시며 기도하시며 작성하신 회칙입니다.
이 회칙과 연관되어 하나의 일화가 전해져 내려옵니다.
일군의 장상 형제들이 찾아와 너무 엄격한 회칙은 준수하기 힘들다는 사실을 성인께 알리며 회칙을 좀 더 완화해 줄 것을 요청하였다고 합니다.
그 때 성인은 하느님께 이 회칙이 주님의 뜻임을 이해시켜 주실 것을 기도하자
“프란치스코야, 그 회칙 안에는 너에게서 나온 것이라고는 하나도 없다.
거기에 있는 것은 모두가 나에게서 나온 것들이다....
그것을 지키기를 원하지 않는 사람은 수도회를 떠날 것이다” 하고 말씀하셨다고 레오 형제는 전합니다.
(페루지아 전기 113)
성 프란치스코 은둔소와 눈 수술
폰테콜롬보 안에는 현재 성 프란치스코 은둔소라고 불리는 장소가 있습니다.
이 곳에서 눈 수술을 받으셨다고 합니다.
즉 1225년 말, 그러니까 돌아가시기 1년 전 형제회의 보호자 추기경인 우골리노 추기경과 수도회의 총대리인
엘리아 형제의 권고로 이 곳을 찾으셨다고 페루지아 전기는 전합니다.
“....수술을 하기 전에 의사는 쇠를 달구었다.
프란치스코는 불 형제에게 주님의 이름으로 기진하지 않고 참을 수 있을 정도로 너무 강도를 세게 하지 말아줄 것을 당부하시고 의사에게 수술에 임하도록 하였다.
레오와 다른 형제들은 너무 무서워 그 자리를 피하였다.
그들이 되돌아 왔을 대 성인은 기도의 힘에 신뢰하지 않았음을 꾸짖으시고 수술 중에 아무런 고통도 느끼지 않으셨다고 말씀해 주셨다”
(페루지아 전기 48)
이 장소에는 현재에는 상당히 변형된 것이라고는 하지만 성인께서 거주하신 흔적이 남아 있습니다.
막달레나 경당(성모 마리아 경당)
이 경당은 매우 소박하고 단순하게 지어졌습니다. 이 경당은 성 프란치스코 이전부터 있었다고 합니다.
처음에는 성녀 세실리아에게 봉헌되었고 그리고 그 다음에 성모 마리아께 봉헌되었다고 전해집니다.
그리고는 17세기부터 막달레나 경당으로 불리기 시작했다고 합니다.
이 성당의 좁은 문 위쪽에는 흩어져 있는 은둔소들에 있는 형제들에게 공동기도를 알리기 위하여 울리던 종이
있고 내부는 초기의 단순성을 보여주는 제대 그리고 양옆으로는 구세주, 아기 예수와 동정마리아,
성녀 세실리아 그려져 있습니다.
그리고 제대 옆 창 쪽으로는 1920년대에 발견된 것으로서 프란치스코 성인이 직접 쓴 것으로 보이는 타우 십자가 그림이 있습니다.
성 미카엘 경당(회칙 경당)
이 경당은 14세기 초에 거룩한 바위라 불리는 큰 돌 위에 지어진 것으로서 출입문 왼쪽 벽에는 성 미카엘을 나타낸 부조가 있어 성 미카엘 경당이라고 불립니다.
경당 앞면에 프란치스코가 회칙을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받는 장면을 담은 그림(1664년 코모의 엠마누엘 형제 작)이 있고,
경당에서 조금 왼쪽으로 내려가면 바위 밑의 협소한 굴을 볼 수 있습니다.
거룩한 바위
이 곳은 1223년 성인께서 몇 몇 동료들과 함께 이 곳에 오신 후 여기서 홀로 기도하시며,
하느님의 뜻을 밝혀 주시기를 간청하며 회칙을 쓰신 곳입니다.
이 바위는 성 미카엘 성당과 이 바위 사이에는 떡갈나무가 있는데, 회칙을 쓰실 때 예수 그리스도께서 발현하셨던 곳이라고 전해져 옵니다.
비둘기들의 샘
성지 밑으로 산책로를 따라 거닐면 비둘기들의 샘이 나타납니다.
여기에는 최근에 지어진 세 개의 경당이 있습니다. 주님의 승천경당은 18세기에 지어졌고 19세기에 개축된 것으로서 성 프란치스코의 생애의 장면들이 표현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성 안토니오 경당과 회칙에 봉헌된 경당이 있습니다.
성 당
성 프란치스코에게 봉헌된 이 성당은 1450년 7월 19일 추기경 쿠사의 니콜라오에 의해 축성되었다고 합니다. 성당과 수도원은 세월을 거쳐 오면서 변경되기도 하고
또 다시 복구되기도 하면서 현재의 모습에 이르렀다고 합니다.
수도원
수도원은 15세기부터 증축과 개축이 계속되었고, 현재는 작은 형제회의 수련소로 쓰이고 있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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