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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욱현 신부님

~ 연중 제28주일 - 침된 부를 가지려면 어떻게? / 조욱현 신부님 ~



연중 제28주일: 나해: 참된 부를 가지려면 어떻게?

오늘 복음에서는 예수께서는 참된 부를 가지려면 주님께서 우리를 신앙의 선물을 통하여 부르시는 그 영광 속에서 추구하는 것임을 말씀하신다. 그러므로 이러한 ‘부’를 얻기 위해서는 그에 대한 것을 희생하여야할 필요가 있다.

부자 청년에게 이러한 말씀을 하셨을 때, “그 사람은 재산이 많았기 때문에 근심하며 떠나갔다”(22절). 즉 예수께서는 하늘 나라에 들어가는 조건으로 어떤 인간적 보장이나 확실성을 확보할 수 있는 것들과는 거리가 아주 먼 것을 요구하신다는 것이다. 여기서 ‘마음의 지혜’가 이루어진다(시편 90,12-17 참조).








제1독서: 지혜 7,7-11: 지혜에 비교하면 재산은 아무 것도 아니다

1독서에서 솔로몬은 이 지혜를 세상의 어떤 보물보다도 낫게 여기고 주님께 그것을 청한다. 그 내용은 솔로몬이 왕국을 시작하면서 바치는 기도에 관한 것으로 생각된다(참조: 1열왕 3,6-13). 그러나 이 기도는 지혜서의 저자 자신이 기원전 2세기경, 알렉산드리아에 있는 유다인들에게 권력과 재산과 아름다움과 육체적 건강, 생활의 즐거움 등을 최고의 행복으로 여겼던 그리스 사람들의 거짓된 지혜에 현혹되지 말라는 당부의 말이었다.

“나는 지혜를 왕홀과 왕좌보다 더 좋아하고, 지혜에 비기면 많은 재산은 아무 것도 아니라고 생각하였으며, 나는 지혜를 건강이나 미모보다 더 사랑하고, 빛보다 지혜를 갖기를 선호하였다. 지혜에서 끊임없이 광채가 나오기 때문이다. 지혜와 함께 좋은 것이 다 나에게 왔다. 지혜의 손에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재산이 들려 있었다.”(8.10-11절).

그러므로 참된 부는 이 세상의 재화를 소유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 때문에 생길 수 있는 위험스러운 요소들을 알게 해주는 지혜를 소유하는 것이다. 이러한 가치전도가 오늘 복음에서 추구하는 것이며 그것은 오직 신앙의 관점에서만 가능하다. 이 지혜는 바로 하느님만이 주실 수 있고 기도를 통해서 얻을 수 있는 선물이다(7절).

복음: 마르 10,17-30: 가진 것을 다 팔고 나서 나를 따라오너라

오늘 복음에서도 참된 부는 이 세상의 재물을 포기할 줄 알고 또 끊어버릴 마음을 갖는데서 이루어진다는 것을 말하고 있다. 복음을 보면 세 부분으로 구분되는데 그 주제는 모두 그리스도를 따르기 위한 “끊어버림”이다. 그러기에 이것은 어떤 특정한 사람에게만이 아니라 모든 그리스도인에게 주어지는 메시지이다.

첫째 부분에서는 부자청년에 대한 이야기이다. 이 청년은 처음과 마지막 태도가 다르게 나타나는 것이 인상적이다. 이 청년은 어려서부터 모든 계명을 잘 지켜왔다고(20절) 하는데 예수께서도 감탄하시고 대견해 하셨다(21절)고 한다. 그런데 “너에게 부족한 것이 하나 있다. 가서 가진 것을 팔아 가난한 이들에게 주어라.”(21절) 하였을 때 울상이 되어 근심하며 떠나갔다(22절).

아마 제자들은 이해를 하지 못했을 것이다. 그 청년과 같이 이미 열심히 살아왔으면서 그 여정에 매력을 느끼고 원의를 가진 사람도 그 여정이 제시하는 요구를 철저히 따를 능력이 없다면 과연 누가 구원을 성취할 수 있겠는가? 하고 생각한 것이다. “그러면 누가 구원받을 수 있는가?”(26절).

이 극적인 상황에서 드러나는 것은 재산 때문에 비롯되는 치명적 위험이다. 그 청년은 용기 있게 결심하고 시작하였지만 예수님의 요구를 받아들이지 못하고 울상이 되어 근심하며 떠나갔다. 왜냐하면 재산이 많았기 때문이다(22절). 물질에 대한 애착이 참된 선(善)이신 하느님을 추구하는 것을 방해했기 때문이다.

이런 까닭에 처음에 당신을 선하다고 하는 것(18절)을 거절하시면서 ‘하느님만이 선하신 분’임을 상기시키신다. 그래서 유일한 선이신 하느님을 받아들이기 위해서는 다른 선(善)들의 유혹이나 매력을 극복하여야 한다고 하신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모든 계명들은 제1계명에 의해 생기를 얻고 조명되지 않으면 구원을 가져다주지 못한다.

바로 여기서 하느님과 똑같으신 당신을 따르기 위해서 그의 모든 재산을 실질적으로 버리라고 하신다. 예수께서 말씀하시는 것은 하느님을 첫 자리에 놓음으로써 나오는 결과이지 다른 요구가 아니다. 그 청년에게는 하느님보다는 자기의 재산에 대한 집착이 컸으므로 하느님이신 주님을 따를 수 없었던 것이다.

둘째 장면은 예수께서 비탄스럽게 재물의 위험에 대해 경고하시는 말씀으로 모든 시대의 당신 제자들의 공동체에 하시는 권고의 말씀이다(23-27절 참조). 여기서 예수께서는 두 번씩이나 “재물을 많이 가진 자들이 하늘 나라에 들어가기는 참으로 어렵다!”(23.24절)고 하신다.

두 번째는 거의 불가능하다고 상징적인 표현을 덧붙이신다. “부자가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낙타가 바늘귀로 빠져나가는 것이 더 쉽다.”(25절). 이 표현은 너무 강해서 좀 부드럽게 해석을 하려고 하지만, “눈 속에 들보”(마태 7,3)라는 표현을 생각한다면, 청년처럼 재산에 마음을 두고 자신을 구원하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할 만큼 어려운 일이라는 의미이다.

제자들은 “그러면 누가 구원받을 수 있겠는가?”(26절)하고 수군거린다. 구약에서는 재물을 하느님의 축복으로 여겼는데, 장애물로 말씀하셨고, 또 그 청년이 구원에 아주 가까이 있다고 생각했는데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낙담한 사람처럼 떠나갔기 때문에 제자들은 그렇게 수군거렸던 것이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구원이 어렵기는 하지만 불가능한 것은 아니라고 말씀하신다. “사람에게는 불가능하지만 하느님께는 그렇지 않다. 하느님께는 모든 것이 가능하다.”(27절).

이 표현은 구약에서 사라가 아들을 얻는 장면에서(창세 18,14), 마리아가 잉태하게 되는 것을 알리는 천사를 통해서 반복되고 있다(루가 1,37). 중요한 것은 구원이란 하느님께서 인간에게 무상으로 베풀어주시는 것이라는 사실을 알고 인간이 그 은총에 자신을 맡길 수 있는 용기와 신앙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베드로는 부자청년과 정 반대되는 태도를 취한다. “보시다시피 저희는 모든 것을 버리고 스승님을 따랐습니다.”(28절). 여기서 베드로는 마태오 복음에서와 같이(19,27) 어떤 보상을 요구하지 않는다. 그 보상에 대해서는 예수께서 하느님의 은총에 대한 응답의 결실이며 그 은총이 확장되는 것이라고 알려주신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누구든지 나 때문에, 또 복음 때문에 집이나 형제나 자매, 어머니나 아버지, 자녀나 토지를 버린 사람은 현세에서 박해도 받겠지만 집과 형제와 자매와 어머니와 자녀와 토지를 백 배나 받을 것이고, 내세에서는 영원한 생명을 받을 것이다.”(29-30절).

여기서도 하느님 나라를 위해 끊어버리는 행위를 요청하고 있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끊어버리는 행위가 그 행위 자체를 위한 것이 아니라, “나 때문에, 또 복음 때문에”(29절) 끊어버리는 행위가 가치가 있다는 것이다. 그러기에 그리스도와 복음이라는 가치를 소유하는 것은 다른 모든 것을 포기한다 해도 자신을 보다 충만한 존재가 되게 하는 것이다.

즉 그 보상은 사도행전과 같은(참조: 사도 2,44-45; 4,32) 보편적 사랑과 형제애를 체험함에서 이루어지는 것이고, 내세의 영원한 생명의 보증은(30절) 바로 지금 이 순간부터 그리스도와 그분의 사랑의 풍요함으로 자신이 부유해짐을 느낄 때 그것을 완성시켜주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 때문에 ‘박해’도 받게 된다고 하신다.

그 박해까지도 믿는 이에게는 영광과 행복을 더해주는 역할을 할 것이다. 이것이 오늘 복음에서 우리를 놀라게 하는 것이다. 그 박해까지 하느님의 사랑의 징표이며 우리 믿음에 대한 보상의 한 형태라고 한다.

제2독서: 히브 4,12-13: 하느님의 말씀은 속셈을 드러낸다

이 모두가 하느님의 말씀이기 때문에 실현되리라고 확신하는 모습을 2독서에서 보여주고 있다. 히브리서는 그러기에 하느님의 말씀을 온유하게 들으라고 권고한다(12절 참조). 그러므로 하느님의 말씀은 그리스도의 가르침이 요구하는 과제 앞에서 드러나는 우리 생활의 모호한 점, 거짓, 주저함과 두려워하는 것을 심판한다.

그러기에 하느님의 나라를 위해 또 복음을 위해 사물들과 자기 자신 그리고 모든 것을 끊어버리고 있는지 볼 수 있게끔 “모든 것이 벌거숭이로 드러나 있습니다.”(13절) 그 말씀에 의해 철저히 자신이 드러나도록 내 맡기는 것이 진정한 마음의 “지혜”이다.

가난함이 흥미로운 것은 아니다. 중요한 것은 하느님의 나라를 차지하는 것이다. 그런데 가난한 사람만이 그 나라를 차지한다. 그리스도를 따르는데 있어서 우리 마음에 하느님과 재물이나 세상의 것들이 어떤 순서로 자리 잡고 있느냐에 따른 것임을 잊어서는 안 된다. 오늘 독서의 말씀에 따라, 참된 부, 참된 지혜를 차지할 수 있는 삶이 필요한 것이다. 그것을 통해 우리는 하느님 안에 더욱 풍요해짐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삶의 은총으로 우리가 주님 안에 더 일치되고 기쁨을 나눌 수 있는 삶을 청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