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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욱현 신부님

~ 연중 제32주일 나해 - 과부의 헌금 / 조욱현 신부님 ~



연중 제32주일: 나해: 과부의 헌금

오늘 전례의 주인공들은 가난한 두 과부이다. 이 두 과부는 하느님 앞에 믿는 이들의 상징적 표상이 된다. 하느님 앞에 자랑할 수 있는 부(富)는 많든지 작든지 다른 사람들과 나누기 위해 가지고 있는 것을 내어놓을 수 있는 마음의 부(富)이다.

즉 자비로움이 부이며, 어떤 것에 대한 지나친 집착은 항상 불행이요 가난이다. 그러기에 “행복하여라. 마음이 가난한 사람들! 하늘 나라가 그들의 것이다.”(마태5,3)라고 노래하고 있다.







제1독서: 1열왕 17,10-16: 사렙다의 과부의 믿음

엘리야는 과부에게 처음에는 물만 달라고 하였었지만 그 다음에는 떡도 달라고 하면서 더 많은 요구를 하고 있다. 마치 죽어 가는 사람에게 마지막 숨을 빌려달라는 것과 같다. 과부는 오랫동안 계속된 가뭄으로 이제는 먹을 것이 다 떨어졌고, 마지막으로 남은 것들로 식사를 하고는 죽음을 기다리게 되는 자신의 처지를 말한다.

그러나 엘리야는 하느님께서 살아가는데 필요한 만큼 계속 주시리라고 하면서 과부를 안심시킨다. 그 과부는 엘리야의 말을 믿고 그에게 베풀었을 때에 더 많은 것을 보상으로 얻을 수 있었다. “주님께서 엘리야를 통하여 하신 말씀대로, 단지에는 밀가루가 떨어지지 않고, 병에는 기름이 마르지 않았다.”(16절).

우리는 사렙타 과부에게서 두 가지 모습을 볼 수 있다. 하나는 보다 필요한 사람에게 베풀고자 하는 자비로운 마음, 즉 이웃에 대한 사랑 때문에 사물을 끊어버리는 마음이고 또 하나는 우리에게 남는 것만이 아니라 우리가 필요로 하는 것까지도 요구하실 수 있는 하느님의 사자로서 그 예언자를 믿는 마음이다. 이것으로 그녀는 애덕을 실천하였으며 그것으로 몇 배의 보상을 받는다. 모든 것을 주는 사람은 모든 것을 받는다고 인도의 시성 타고르가 말했다.

“나는 이 집 저 집 문전걸식을 하며 어떤 마을을 지나고 있었다. 그 때 멀리서 꿈속에서나 볼 수 있는 찬란한 빛의 황금마차가 나타났다. 나는 왕중의 왕이신 분이라고 생각하고 기쁨으로 가득 찼다. 나는 희망에 벅차 있었고 ‘불행한 날들은 다 지나갔다’고 생각했다. 나는 그분의 자선을 기대하면서 먼지 속 어디에 떨어질지 모르는 동전을 주울 준비를 하고 있었다.

마차가 내가 있는 곳에 와서 멈춰 섰다. 그분의 시선이 나에게 와 멈추면서 미소를 지으면서 그분은 마차에서 내렸다. 나는 내 인생의 행운이 왔다고 확신했다. 그런데 그분은 즉시 나에게 오른 손을 내밀며 이렇게 말했다. ‘내게 무엇을 줄 수 있겠느냐?’ 거지에게 왕이 동냥을 하다니 될 말인가? 나는 어리둥절하여 얼떨결에 내 식량자루에서 조그만 곡식 한 톨을 꺼내 그분에게 드렸다.

그런데 그날 저녁 나는 내 자루에 든 얼마 안 되는 곡식들 중에서 금으로 된 작은 곡식 한 톨을 발견하고서 얼마나 놀랬는지 모른다. 나는 비통한 마음으로 눈물을 흘렸다. 그리고 생각했다. ‘왜 나는 모든 것을 그분께 드릴 용기를 갖지 못했었을까?’”(R. 타골).

복음: 마르 12,38-44: 과부의 헌금

이 과부의 헌금에 관한 이야기는 신학적으로 더 풍부한 의미를 담고 있다. 무엇보다도 과부의 동전에 대한 이야기가 율법학자들에 대한 가혹한 표현과 직접 연결되고 있다는 점이다. 그들은 신앙생활을 겉꾸미는 신앙생활을 하면서 남에게 대우받기를 원하면서도 뒤로는 “과부들의 가산을 등쳐 먹는다.”(40절). 이렇게 위선에 가득 찬 율법학자들과 단순하고도 충만한 과부의 믿음을 비교하고 있다. 그 과부는 생계를 꾸려나가기 위하여 꼭 필요한 것까지도 바쳤던 것이다.

두 번째로 과부의 봉헌은 하느님께 드리는 예배의 행위였기에 아무런 보답을 요구하지 않는 사심 없는 봉헌이었다는 것이다. 가난하였지만 가진 것 모두를 하느님께 바쳤다. 헌금 궤 앞에 계신 예수께서는 헌금하는 것을 보고 계셨다. 거기에 나오는 부자들의 행위는 하느님께 제물을 봉헌한다기보다는 자신을 드러내 보이기 위한, 그리고 하느님의 자비를 돈으로 살 수 있다는 듯이 거들먹거리는 자세였다.

반면에 과부는 겨우 동전 한 닢 값어치인 렙톤 두 개를 바쳤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그녀를 칭찬하신다. ‘생계유지’를 위해 꼭 필요한 것을 다 바쳤기 때문이라고 하신다(44절). 하느님께서는 우리의 있는 그대로의 삶과 진실성을 요구하신다. 과부는 자기의 삶과 마음을 봉헌했고, 부자들은 과부들의 가산을 등쳐서 모아들인 것일지도 모르는 것의 부스러기를 바쳤을 따름이다.

제2독서: 히브 9,24-28: 단 한번 당신 자신을 제물로 바치셨다

오늘 제2독서에서 역시 계속적으로 그리스도의 사제직의 ‘새로움’에 대하여 발전시키고 있다. 구약의 사제들은 매년 소나 양을 제물로 바쳤지만(25절), 예수께서는 단 한 번 당신 자신을 봉헌하시어 죄를 이기신 후 천상의 성소로 들어가셨다(26절).

그리스도께서는 이 세상에 처음 오셨을 때에는 죄와 직접 관계를 맺으셨으나(로마 8,3; 2고린 5,21 참조), 이제 다시 오심으로써 오늘 독서의 두 과부와 같이 모든 것을 받기 위해 모든 것을 내어드릴 마음의 준비를 갖추고 당신을 사랑하며 기다리는 사람들에게 구원을 주시어 죄에 대한 승리를 드러내시는 분이 될 것이다.

두 과부의 이야기는 “하느님의 자비에 온전히 의탁하여 자신의 모든 것을 구체적으로 포기하신, 그리고 말없이 완전히 이루어진 희생을 바치신 예수님의 공생활에 대한 결론이라고 할 수 있다”(E. Schweizer, Il Vangelo secondo Marco, Brescia 1971, p.274).

오늘 독서의 두 여인의 모습에서 자비로운 마음과 믿는 마음을 즉 신앙으로 자기의 모든 것을 바친 것과 하느님 아버지의 뜻을 따라 당신의 모든 것을 즉 당신 자신을 온전히 바치신 예수 그리스도를 볼 수 있어야 한다. 그리스도의 사제직에 참여한다는 것은 바로 나 자신을 온전히 하느님께 봉헌할 수 있는 삶이 뒤따라야 한다는 것을 오늘의 독서를 통해서 우리는 알아들을 수 있어야 한다. 이러한 자비로운 마음과 신앙을 우리에게 주시도록 청하여야 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