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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승국(스테파노) 신부님 말씀 강

~ 다 죽었어 / 양승국 신부님 ~

   

 

 

 

 다 죽었어!

 

 

  용서를 주제로 강론 중이던 한 신부님이 좀 더 생동감 있게 강론을 해 보려고

신자들에게 질문을 하나 던졌습니다.

 "지금 이 순간 미워하는 사람이 단 한명도 없는 분, 한번 손들어 보세요!"

 적어도 두세 명은 있겠지 했는데, 단 한명도 손을 드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당황한 신부님은 절박한 목소리로 다시 외쳤습니다.

 "정말 아무도 없습니까? 옆 사람 눈치 보지 마시고 소신껏 손 한번 들어 보세요."

 

 그래도 감감무소식이었습니다. 적막감과 난감함이 맴돌던 어느 순간,

아주 연로하신 할아버님 한 분이 손을 드셨습니다.

너무나 기뻤던 신부님은 할아버님을 앞으로 모셨습니다.

 "어르신, 정말 훌륭하십니다. 얼마나 열심히 신앙생활을 하셨으면, 또 얼마나 열심히

용서의 삶을 실천하셨으면 단 한명도 미워하는 사람이 없으십니까?

우리 신자들을 위해 그 비결을 좀 말씀해 주십시오."

 

 그 순간 할아버님은 역사에 길이 남을 '명언'을 한마디 던지셨습니다.

 "신부님, 훌륭할 것 하나도 없습니다. 보시다시피 제가 세상을 너무 오래 살았습니다.

올해 제 나이가 아흔입니다. 원래 저도 미워하던 사람들이 엄청 많았는데,

오래 살다 보니 그 사람들 다 죽어 버렸습니다. 용서를 하려 해도 용서할 사람이 있어야지요."

 

 보십시오. 그렇게 어렵다는 용서라지만, 방법이 없는 것은 아닙니다. 가장 효과적인 방법이 하나 있는데

그것은 바로 '죽는 것'입니다. 그가 죽던지 내가 죽던지, 죽고 나면 모든 것이 다 부질없어집니다.

오랜 세월 주고받았던 상처도 순식간에 아물어 버립니다. 자동으로 용서되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용서하기 위해서 인위적으로 목숨을 끊으라는 것이 절대 아닙니다.

 

 은혜롭게도 우리 그리스도교 신앙 안에는 살아 있으면서도 실천할 수 있는 다양한 '죽음의 길'이 있습니다.

마음 한 번 크게 먹고, 크게 한 번 뒤로 물러서면 그게 바로 죽는 길입니다.

정말 말도 안 되는 예수님의 자기 낮춤, 어처구니없이 바보 같은 사랑을 한 번 실천하면

그게 바로 죽는 것입니다. 그런 '죽음 연습'을 통해 죽기보다 힘든 용서가 조금씩 가능하게 될 것입니다.

 

 누군가가 가슴에 찌르고 간 비수 같은 한마디 말 때문에 도저히 용서하지 못해 밤잠을 설친 적이 있으십니까?

내 인생에 커다란 오점을 남긴 누군가를 죽이고 싶을 정도로 증오해 본 적이 있습니까?

사연 많고 풍파 많은 이 한세상 살아가다 보면 누구나 몇 번씩 그런 체험을 하게 되지요.

상처가 채 아물지 못한 순간, 통증이 아직 가시지 않은 순간, 분노로 치가 떨리는 순간,

죽었다 깨어나도 용서가 안 되는 그 순간은 사실 '살아도 살아 있지 못한 순간'입니다.

끝까지 용서가 안 되는 그 순간이야말로 지옥입니다.

 

 사실 지옥은 누군가에 의해 가게 되는 그런 장소이기보다는 우리가 만든 장소하는 생각을 많이 합니다.

사랑이 미움 앞에서 무력하게 사라지는 순간, 속수무책으로 그 상처를 안고 숨 죽여 울 수밖에 없는 순간,

우리 스스로 그 죽음과도 같은 증오의 감정을 안고 끝도 없는 수렁으로 빠져 들어 가는 곳이

지옥이라고 생각합니다. 아직 상처가 아물지 않아 용서가 안 되는 그 순간 세상은 온통 회색빛입니다.

 

 분노가 지속되는 만큼 건강도 심한 타격을 입습니다.

명치가 답답해져 옵니다. 속에 큰 돌덩어리가 하나 들어앉은 기분입니다.

'그 인간', 머릿속에 떠올리기만 해도 얼굴이 확확 달아오릅니다.

어렵겠지만 어떻게 해서든 그 수렁에서 빨리 빠져나와야 합니다. 정말 힘겨운 일이겠지만

나를 죽음으로 몰아가는 '그 인간'을 한시라도 빨리 내 속에서 몰아내야 합니다.

어떻게 해서든 비워야 합니다. 내려놓아야 합니다. 그것만이 우리가 진정으로 살 수 있는 유일한 길입니다.

 

 이런 이유로 성경은 우리를 향해 집요하게 용서하라고 당부합니다.

예수님께서는 한 술 더 뜨십니다. 용서할 뿐만 아니라 원수를 사랑하라고까지 하십니다.

한두 번도 아니고 일흔일곱번이라도 용서하라고 당부하십니다.

이건 너무 지나친 권고가 아닐까 하는 생각까지 듭니다. 차라리 '바보가 되라는 거야, 뭐야?' 하는

마음까지 생깁니다. 그런데 일흔일곱 번이라도 용서하라는 말씀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용서만이 살길이니 밥 먹듯이 용서하라는 것입니다.

용서하고 말고를 따질 것이 아니라 무조건 용서하라는 것입니다.

용서할까 말까 고민할 것이 아니라 늘 용서하라는 것입니다.

 

 

 

                                                                 < 축복의 달인 >

                                                          양승국 신부의 영성 스토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