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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찬선(레오나르도) OFM

~ 봐야할 것 보는 행복한 눈 / 김찬선 신부님 ~

봐야할 것을 보는 행복한 눈  

 

-김찬선신부-


너희가 보는 것을 보는 눈은 행복하다.

많은 예언자와 임금이

너희가 보는 것을 보려고 하였지만 보지 못하였고,

너희가 듣는 것을 들으려고 하였지만 듣지 못하였다.”

 

살면서 이것저것, 온갖 것을 다 겪은 걸 일컬어

산전수전 다 겪었다고 하고,

볼 꼴 못 볼 꼴 다 봤다고도 하는데

행복한 일과 불행한 일을 다 겪었다는 뜻입니다.

 

여기서 <볼 꼴>이란 보면 좋을 것,

꼭 봐야할 것을 얘기하는 것이고,

<못 볼 꼴>이란 안 보면 좋을 것,

보지 말아야 할 것을 얘기하는 거겠지요.

 

그러므로 불행한 사람은 이런 사람입니다.

봐야 할 것은 못 보고 보지 말아야 할 것은 보는 사람입니다.

 

살아가면서 자식이 먼저 죽는 것은 보지 말아야 하고,

자식들이 재산 때문에

서로 고소하며 싸우는 것도 보지 말아야 하며.

돈 안 준다고 부모에게

온갖 패악 질을 하는 것도 보지 말아야 합니다.

 

그런데 이런 것을 보지 말아야 한다고 하는데

이런 것을 보고 싶어서 보는 부모는 아무도 없을 겁니다.

정말 이런 꼴 보고 싶지 않은데

봐야만 하니 보는 거고 그래서 불행합니다.

자기 힘으로는 도저히 막을 수 없는,

곧 불가항력적不可抗力的으로 보게 되는 불행이고,

봐야만 하는 불행입니다.

 

반대로 봐야 할 것을 못 보는 불행도 있습니다.

아직 손자를 못 봤다고 할 때

이 말은 자식이 손자를 안 보여줘서가 아니라

자식이 아직까지 아이를 못 낳아서

보고 싶은 손자가 없다는 말입니다.

 

또 이런 경우도 있지요.

아이를 낳았는데 맹인 부모는

그 사랑스런 아이의 얼굴을 볼 수 없습니다.

그래서 손으로 만져보는 수밖에 없습니다.

눈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손으로 만져서 보는 것입니다.

그런데 만져서 보는 사람이

눈으로 볼 수 있게 되면 얼마나 행복할까요?

 

이것이 소박한 인간의 행복이라면

신앙인의 행복이 있습니다.

나의 구원자이신 아기 예수를 만져보고

더 나아가 눈으로 보는 것입니다.

 

루카복음을 보면 시메온이라는 노인이 나옵니다.

그토록 고대하던 구원자

아기 예수를 보고 그 행복을 이렇게 노래합니다.

주님, 이제야 말씀하신 대로

당신 종을 평화로이 떠나게 해 주셨습니다.

제 눈이 당신의 구원을 본 것입니다.

이는 당신께서 모든 민족들 앞에서 마련하신 것으로

다른 민족들에게는 계시의 빛이며

당신 백성 이스라엘에게는 영광입니다.”

 

우리는 성무일도 끝기도 때 이 찬미가를 매일 바칩니다.

노인 시메온처럼 죽을 때

이런 말을 하며 죽을 수 있게 해달라는 겁니다.

 

그런데 주님의 구원을 보는 것,

아니 구원이신 주님을 보는 것,

이것이 평생소원이고,

그 평생소원이 이뤄지는 것을 보는 것,

이것이 행복이고,

이것을 보지 못하면 불행입니다.

 

그렇다면 누가 이 구원을 보고 어떻게 봅니까?

오늘 복음에서 주님께서는

제자들이 이것을 봤다고 하십니다.

너희가 보는 것을 보는 눈은 행복하다.

 

슬기롭다는 사람과 지혜롭다는 사람은 못 보고

철부지는 본다고도 하십니다.

슬기롭다는 사람은 참으로 슬기로운 사람이 아니고

자기가 슬기롭다고 자처하는 사람이고,

한 마디로 교만한 사람입니다.

그런데 교만한 사람에게는

눈에 뵈는 것이 없어서 보지 못합니다.

 

그래서 오히려 철부지들이 봅니다.

맑은 눈, 깨끗한 눈, 성령의 눈을 가져서

하느님께서 보여주시는 대로 보기 때문입니다.

 

오늘, 이 눈을 주님께 청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