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님께서는
하느님의 뜻을 알아듣지 못하는
이스라엘 백성의 어리석음을 장터의
아이들에 빗대어 지적하십니다.
세례자 요한은
주님의 길을 준비하러 온 선구자이고,
예수님은 하늘나라를 보여주려고 오신 메시아이십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먹지도 마시지도 않는 요한을
마귀 들린 사람이라 합니다
(11,18).
또한 죄인들, 세리들과 어울려 먹고 마시는 예수님을
천박한 ‘먹보요 술꾼’(11,19)이라고 힐난합니다.
하느님의 선택받은 민족이라 자처하던 이스라엘 백성은
오실 메시아에 대한 선입견을 갖고 있었습니다.
그들이 기다리던 메시아는 민족을 해방하는
위대한 인물로서 권위를 지닌 존재여야 했습니다.
메시아는 단식과 고행을 해서도 죄인들과 어울려서도
안 된다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그런 굳은 사고의 틀과 선입견을 지닌
그들의 눈에는 메시아의 길을
준비하는 선구자도 메시아도 보일 턱이 없었습니다.
왜 우리는 ‘지금 여기서’
펼쳐지는 하늘나라를 보지 못할까요?
왜 매순간 만나는 사람들과 사건, 자연의 변화 안에서
하느님의 뜻을 읽지 못하는 것일까요?
근본적인 이유 가운데 하나는 자신을 버리고,
순수한 마음으로,
있는 그대로 보고
받아들이지 못하는
고정관념과 선입견, 편견일 것입니다.
이런 것들에 매여 있는 한
결코 영적 성숙에 나아갈 수는 없습니다.
나름대로 열심히 신앙생활을 하고
봉사활동을 한다고 하면서도
‘하느님은 이런 분이셔야 한다.’,
'저 사람은 이래야 한다'라는 틀에 갇혀 있지는 않은지 돌아보아야겠습니다.
굳어지고 왜곡된 사고의 틀과
고집스런 신념은 하느님이나
이웃과의
관계를 뒤틀리게 하고
영혼의 어둠을 가져올 뿐입니다.
장터에서 편을 갈라 서로 소리를 지르며 노는 아이들은
“우리가 피리를 불어 주어도 너희는 춤추지 않고,
우리가 곡을 하여도
너희는 가슴을 치지 않았다.”(11,17)고 합니다.
그들은 상대방이 무엇을 하든 듣지도 보지도 않고
호응하지 않습니다.
자기 생각대로 행동하고 자신이 원하는 것만 보며,
자기 뜻에 맞는 것만 듣는 것입니다.
하느님을 잊어버린 채 바삐 내 일을 하고
내 삶을 즐기며 욕구를 충족하고,
아쉬울 때만 하느님께 매달리는 나의 모습과 닮은꼴이지 않습니까?
고통받는 국민들의 한숨소리와 울부짖음에 귀를 막고 있는 정치 권력가들,
돈의 우상에 사로잡힌 자본가들,
가난한 이들의 아픔에는 무관심하고
정치 이념을 좇는 종교지도자들을
보는 것 같습니다.
하느님을 닮고 따르는 우리 자신과
이 사회가 독단과 고집불통,
일방통행의 망령에 휘둘려서는 안 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지혜가 옳다는 것은
그 지혜가 이룬 일로 드러났다.”
(11,19)고 말씀하십니다.
당시 사람들은 자신들의 왜곡되고 굳고 삐뚤어진 생각에 걸려 넘어져
주님을 알아보지 못하고 외면했습니다.
그러나 주님의 부활은 이들에게
하느님의 뜻이 무엇인가를
보여준 참 지혜였습니다.
대림시기에는 굳은 생각의 틀과 고집에서 벗어나
함께 인간다움을 회복해 나가야겠습니다.
주님!
제 안의 고착되고 치우치고
삐뚤어진 관념의 다발을 태워버리고,
지금까지 내 기준으로 쌓아오던 가치관을
괄호 안에 넣어버리게 하소서.
그리하여 다가오는 모든 것들을 순수하고
겸손하게 받아들이며
인간성의 회복을 위해 자신을 쏟아붓는
지혜로운 저희가 되도록 이끌어주소서!
아멘.
기경호 프란치스코 신부 작은형제회(프란치스코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