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가난
만일 당신이 “성 프란치스코”란 이름을 말하면서 생각나는 것이 무엇이냐고 누군가에게 묻는다면, 대부분의 사람들은 “가난”이라고 말할 것이다. 그는 아시시의 작고 가난한 사람인 “포베렐로”이지만 가장 뜨겁게 논쟁을 하고 가장 많이 오해의 대상이 되는 것도 바로 그의 가난이다. 가난의 주제에 관한 열띤 논쟁 한 가운데에 단순한 프란치스코가 서 있다. 그에게 있어서 가난은 결코 그 자체가 목적은 아니었으나 하느님 안에 사는 한 방법이었고 하느님 나라를 현실화시키는 한 가지 삶의 방식이다.
아마도 가장 초창기에 나온 성 프란치스코의 “전기”인 Sacrum Commercium('거룩한 교제‘)란 제목의 약간 우화적인 작품(프란치스코와 가난부인 사이에 거룩한 교제) 안에 보면 가난과 프란치스코의 관계의 핵심이 몇 구절로 재치있게 그려지고 있다.
가난에 대한 그의 사랑의 첫 번째 이유는 “인간의 마음 안에 하느님을 맞아들일 수 있는 공간과 장소를 마련하는 일에 있어서... 거룩한 가난의 덕행이 단연 두드러지며, 여타의 덕행보다 품위에서도 능가한다(거룩한 교제 1).”
그리고 하느님께로 가는 프란치스코의 길에 있어서 가난의 탁월함에 대한 두 번째 이유는 하느님의 아들이 특별히 이 덕을 사랑하셨다는 것인데.
“하느님의 아드님께서 지상 한 가운데서 구원을 이룩하실 때 이 가난의 덕행을 지극히 사랑하셔서 그것을 찾아내어 밝히신 것만 봐도 알 수 있다. 그분은 설교생활을 시작하실 때 이 덕행을 믿음에 입문하는 이들의 손에 들려 있는 등불로 생각하시고, 당신 집의 기초가 될 반석으로 삼으셨다.(거룩한 교제 2)”
그리고 두 개의 문장 안에서 이 초창기 전기의 작가는 간단히 말한다: 즉 “다른 덕들은 하늘나라를 약속으로 받는 것이다, 이와 달리 가난은 하늘나라와 바로 직통하게 하는 것이다. 그러기에 그분은 ‘마음이 가난한 사람은 행복하다. 하늘나라가 그들의 것이다’하고 말씀하신 것이다.(거룩한 교제2)”
프란치스코와 초창기 형제들은 예수의 말씀들을 글자 그대로 받아들였으며, 그 말씀들을 살아감으로써 자신들의 것으로 만들었으며, 그 말씀들이 약속한 것들이 그들의 삶 속에서 실현되기를 갈망하였다. 그리고 그런 일이 일어났다. 왜냐하면 형제들이 설교하고 증언했던 아시시의 시민들이나 인근 마을 사람들에게 형제들의 삶은 진실로 하느님 나라를 현재화시킨 것과 같이 보였기 때문이다.
마치 우리가 지상에 하느님 나라를 세우는 자들인 것처럼 생각하며, 하느님 나라를 건설하려고 안달하는 우리들과 프란치스코의 생각은 얼마나 많은 차이가 있는가. 프란치스코에게는 가난하신 그리스도에 대한 사람으로 가난하게 되는 것만으로도 충분한 것이다. 하느님 나라는 하느님께서 우리 사이에 거주하시기로 선택하셨을 때 현재화된다. 그리고 프란치스코가 복음에서 본 것처럼, 하느님께선 우리가 마음이 가난할 때에 비로소 거주하시길 택하신다. 하느님 나라가 오는 것은 우리가 무엇을 하는가가 아니라 하느님께서 우리 사이에 거주하시도록 우리가 무엇을 끌어안는가에 달려있는 것이다.
그러면 산상설교의 첫 번째를 산다는 것의 암시는 무엇일까? 14세기 프란치스칸 전기인 ‘세 동료들의 전기’는 프란치스코가 어떻게 마음이 가난하게 되었는가를 말한다. 젊은이로서, 그는 다른 젊은이들처럼 그의 삶으로 무엇인가 하기를 원했으며 자신만의 고유한 기여로 어떤 사람이 되고자 한다. 그는 하느님께서 그의 정신과 마음에 빛을 비추시라고 계속해서 요청하고 있었다.
그러자 이 전기에 따르면, 어느 날 프란치스코가 하느님께 열렬히 기도하고 있는 동안에 응답을 받았다.
“프란치스코야, 네가 나의 뜻을 헤아리기 원한다면, 네가 육적으로 사랑해 왔고 또 소유하고자 했던 것들을 경멸하고 협오해야 할 것이다. 이렇게만 되면 전에 너에게 달콤하고 감미로운 듯했던 것들이 역겨워질 것이며, 이와는 반대로 전에 네가 두려워했던 것들 안에서 형언할 수 없는 달콤함과 더할 나위 없는 감미로움을 맛보게 될 것이다.(세 동료 4,11)”
이러한 말들은 프란치스코의 가난의 삶에 있어 중심적인 원동력을 포함하고 있다. 그리고 프란치스코가 실제로 하느님의 이런 말씀들을 들었든지 안 들었든지 간에, 또는 하느님이 그의 마음에 말씀을 하셨든지 안하셨든지 간에, 혹은 목숨을 잃는 것이 얻는 것이라는 복음서의 역설의 말씀을 읽고 단순히 영감을 받았든지 아니었든지 간에, 요점은 프란치스코가 하느님의 말씀에 응답하여 실행한다는 것이다.
그의 가난은 일들이 일어나도록 허락하는 수동적인 희생정신이라기보다는 오히려 행동하고 선택하는 한 가지 길이다. 가난부인을 포옹하도록 재촉하는 것은 사랑이지, 때때로 생각되어지듯이 자기 협오나 자신의 죄들을 벌주려는 욕구가 아니다.
“그는 말을 타고 아시시 교회로 가다가 어느 나환자 하나를 만났다. 나환자를 몹시 무서워했던 그는 이번엔 있는 힘을 다해서 자신을 억제하며 말에서 내려와서 나환자의 입을 맞추고는 돈을 집어 주었다. 그는 나환자로부터 평화의 친구를 받은 다음에 다시 말에 올라서 가던 길을 갔다. 그날부터 하느님의 은총의 도움으로 자신을 완전히 극복할 수 있을 때까지 더욱더 자신을 천하게 여기기 시작했다.(세 동료 3,11)”
무엇에 대한 완전한 승리인가? 그것은 프란치스코의 기고에 대한 답으로부터 그리고 바로 이어지는 이야기로부터 어두움과 바르게 보지 못하는 무지에 대한 승리임이 분명해진다. 그리고 그것은 나병환자들을 불쾌하게 보는 눈멀음에 대한 승리이다. 실제로 나를 두려움에 떨게 하는 가난이 만일 내가 그 손에 키스하기만 한다면 긍극적으로 나에게 가장 큰 달콤함과 만족감을 가져다 줄 것이라는 사실을 모르는 무지에 대한 승리인 것이다.
나병환자에게 입맞춤을 한 것은 프란치스코에게 위대한 각성의 순간이 되는데, 왜냐하면 그것은 하느님의 그에게 하신 말씀이 진실함을 증명한 것이기 때문이다. 프란치스코가 남은 그의 생애 동안 고통 받기로 선택한 가난함과 결핍은 진실로 나병환자의 손에 키스를 하게하고 그를 가난하게 하며, 하느님께서 세상을 보시듯 세상을 볼 수 있도록 그리스도의 마음을 더욱더 지니게 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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