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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욱현 신부님

~ 주님공현 대축일 - 찬란한 빛 / 조욱현 신부님 ~



주님 공현 대축일: 찬란한 빛

오늘은 주님 공현 대축일이다. 오늘의 전례는 예수님 탄생의 의미를 확인하고 그분이 만민의 주님이심을 공적으로 선포한다. 그래서 예수님을 통해 이루어진 구원과 교회의 보편성을 장엄하게 선포하는 것이다. 오늘의 주제는 “찬란한 빛”이다. 이 빛은 어둠을 이기고 앞길을 밝히는 희망의 표지이다.







복음: 마태 2,1-12: “별”, 삼왕에게 경배 받은 아기

오늘 복음에서 동방박사들의 동방이란 동쪽 즉 다마스쿠스 쪽을 의미한다. 이곳에서 성서를 열심히 읽으며, “시대의 징표”를 잘 살폈던 히브리인들을 말한다. 별은 사람의 아들의 징표로서 영광의 십자가의 모습이다(24,30). 박사들이 찾아온 아기는 수천 년 기다려온 분이며, 오셔야 할 분으로 성서에 예언된 분이시다.

박사들은 동에서 본 별이 다시 나타났을 때에 그것을 보고 기뻐하였으며, 그 별이 아기가 있는 곳에 이르러 멈추어 빛나는 것을 보고 매우 기뻐하였다. 이 아기는 왕이며 성서적으로 “구세주”이신 분이시다.

복음에 나오는 박사들의 의미는 깊다. 그들의 고국이 어디든 간에 그리고 그들의 직업이 무엇이든지 간에 그들은 그리스도를 찾아 모여드는 이방인들의 세계를 의미하고 있다. 그러기에 그리스도는 이스라엘 백성에게만 구원을 주시는 분이 아니라, ‘죄로부터 구원하러’ 오시는 ‘그 백성’은 온 인류를 말하는 것이다.

그리고 마태오 복음을 맺는 ‘선교사명’의 내용이 이미 동방 박사들의 이야기 속에 예고되고 있다.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들을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어라.”(28,19). 즉 그리스도는 하느님께서 모든 시대, 모든 사람들에게 주시는 ‘선물’이시다. 항상 이 선물을 받으면서 그분을 알아 뵈워야하기에 항상 새로운 신비이다. ‘공현’이 우리의 삶 속에 새롭게 이루어져야 한다.

이제 주님께서는 당신을 내어주실 때 당신을 알 수 있는 방법과 수단도 주신다는 것이다. 박사들에게는 별을, 헤로데에게는 “메시아가 태어날 곳이 어디인지”(4절) 성서상의 증거를 주신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신앙의 ‘빛’은 겸손하고 준비된 마음에 의해서만 받아들여질 수 있다는 점이다.

헤로데나 대사제들에게는 성서의 증거도 그들에게 믿음을 갖게 하기에는 부족하였다. 준비가 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삼왕들에게는 불확실한 ‘증표’도 도움이 되었다. 은총의 작용에 따랐기 때문이었다. 그들은 그들이 찾던 ‘왕’을 베들레헴의 보잘 것 없는 한 아기에게서 발견하였고 경배 드리는 것이 어렵지 않았다. “그 집에 들어가 어머니 마리아와 함께 있는 아기를 보고 땅에 엎드려 경배하였다”(11절).

이 등장인물들의 여러 가지 태도는 예수께서 앞으로 당하게 될 운명을 어렴풋이 그려주고 있다. 메시아의 탄생 소식에 “헤로데 임금을 비롯하여 온 예루살렘이 깜짝 놀랐다.”(3절), 헤로데는 이미 그를 죽일 생각을 품는다(7-8절). 그러나 박사들은 별을 따라 온갖 일들을 해결해 나가면서 고생 끝에 그들의 시야에서 사라졌던 그 별을 다시 발견하고 “더없이 기뻐하였다”(10절).

여기서 우리는 예수께서 제자들로부터 배척을 당하고 십자가의 고통을 통해 죽음을 맞게 되는 그 사건이 암시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렇게 동방박사의 이야기는 주님의 공현 축일의 의미가 우리의 매일의 삶 속에서 드러나느냐, 즉 그리스도의 모습이 드러나느냐 아니면 헤로데의 경우처럼 감추어져 있느냐, 더 나아가 그리스도를 제거해 버리려고 하는 삶인가 하는 것의 신비가 될 것이다.

제2독서: 에페 3,2-3a.5-6: 이방인의 구원

그리스도의 신비는 사도들에게 계시되었고. 사도들은, 예언자들은 성서를 설명하며 교회를 이룬다(5절). 이 모든 일은 오직 성령으로 말미암은 것이었다. 그리고 이제 이방인들에게도 즉 거룩한 계약이 없는 그들에게도 복음으로 그들도, 그리스도를 통하여, 옛 약속에 구원의 공동 상속자, 한 몸이, 동참자가 된다(6절). 하느님 앞에 이미 성령과 함께 그리스도를 통하여, 사람을 구별하는 것은 없다. 모든 사람이 그분의 크신 은총을 받고 있는 것이다.

구세주께서는 이방인들에게 당신의 모습을 드러내셨다. 시대의 징표를 깨어 기다리던 삼왕들은 구세주를 만났다. 이 삼왕들은 이방인들을 대표하는 사람들이다. 구원을 베푸시는 하느님은 인간을 차별하지 않으시고 모든 이를 구원에로 부르시는 분이시다. 인간은 모두가 당신의 모상이며 당신과 같은 모습이 되기를, 그분을 닮기를 원하시는 분이시다.

여기서 이스라엘의 자기들만이 구원받을 수 있다는 선민사상이 힘을 잃게 된다. 우리도 역시 이스라엘 백성들과 같이 독선적인 면을 가지고 있지나 않은지 모르겠다. 하느님을 잘 섬기고 하느님과 이웃을 사랑하는 사람은 그러한 독선적인 면이 없다. 그들을 불쌍히 여기고 그들을 위해서 기도하며, 하느님을 전해주려고 하지 그들을 판단하지는 않는다. 하여간에 하느님을 모르는 사람들이라도 삼왕과 같이 깨어있는 사람들이 있는 것이며 그들이 구원받는 것도 하느님의 뜻이기 때문이다.

즉 모든 인간은 하느님의 구원에로 초대를 받았다는 것(에페 1,4-5), 이것이 하느님의 뜻이고 하느님께서 기뻐하시는 일, 인류 전체가 하느님께로 되돌아가는 것이 그분의 원하심이다. 그래서 모두가 하느님을 “아버지!”라고 부를 수 있도록 하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 모두 하느님의 자녀로서 형제자매가 되는 것이다. 그러기에 복음선포는 매우 중요한 우리의 사명이다.

이제 우리에게는 증거하는 삶이 있어야 한다. 구원자로서 그리스도를 지금, 여기서부터, 나를 통해서, 나 자신을 통해서 드러내 보일 수 있어야 한다. “너희는 온 세상에 가서 모든 피조물에게 복음을 선포하여라.”(마르 16,15). 이 말씀은 우리 모두에게 주어진 과제이며 사명이다. 우리만이 아닌 모두가 구원에로 나아가야 하기 때문이다. 공동구원의 의미가 여기에 있다. 그리스도의 몸을 통하여 그 안에서 모두가 구원을 받아야 한다.

우리 모두가 영광의 주님을 드러내 보이는 삶을 살아야 하는데, 이러한 삶은 생명의 십자가에서 나타난다. 오늘 이방인들에게 당신을 드러내 보이신 주님은 아기가 아니다. 십자가를 통한 영광의 주님, 구세주로 오신다. 이 신비가 나의 십자가를 통해 드러나서 그리스도가 드러나도록 하는 것이다. 그래서 나의 모습이 더 선명하게 나타나게 된다.

이러한 삶을 통하여 우리는 예비자들을, 하느님을 모르는 사람들을 하느님께로 인도하고, 그들을 하느님께 바쳐드리고 맡기는 행위는 진정 우리의 삶을 더 열심히 하도록 이끌어줄 것이다. 그들에게 모범을 보여주어야 하기 때문에 그리고 그들을 위해서도 기도를 열심히 하게 될 것이다. 예비자들을 인도하여 하느님께 영광을 드리도록 하자. 여기에 기도와 실행, 희생, 도움이 있어야 한다.

그리고 우리 주위에 있는 우리의 도움을 필요로 하는 많은 사람들에게 구체적으로 도움이 되는 일도 하여야 한다. 처음 만나는 사람이라도 한 형제자매임을 느끼도록 하여 하느님께로 인도할 수 있다. 지금부터 우리가 하는 모든 일을 교회를 위하여 한다고 생각하고 말이나 몸가짐이나 모든 것이 하느님의 영광을 위하여 한다고 실천해 나가자. 어려움이 있으나, 용기를 가지고 살 수 있는 은총을 구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