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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 신부님들의 강론

~ 이름 모를 들꽃 / 고 임언기 신부님 ~



내 분수와 주제에 맞지않게 피정을 지도하러 여기저기 다니다 보면,

내 자신을 위해서도 시간을 투자할 필요를 느껴 조용한 공원이나

그리 높지 않은 산을 오르거나 산길을 트래킹할 때가 있다.

 

그럴 때마다 내가 늘 마주 대하는 묵상 재료가 있다.

이 세상이라는 사막에서 모두가 다 영적으로나

현실적으로 힘겹게 살고 있지만,

유독 나혼자 더 외로운 영적 투쟁을 하고 있다고

느끼기 때문에 그런지도 모른다.

 

아무도 밟은 적이 없는 것처럼 보이는 산길이나 들길에

홀로 피워 있는 야생화 같은 이름모를 꽃들과

풀포기들, 이끼들, 돌들이 눈에 가장 먼저 들어온다.

 

누가 이들에게 한번이라도 눈길을 주며 쳐다보기나 했을까?

그러나 그들은 아무도 보아주지도 알아주지도 않은 곳에서

제자리를 지키며 비바람 서리눈 다 맞아가며

홀로 하늘을 향해 꿋꿋이 서 있다.

 

그들은 홀로 창조 신학을 하고 있고,

하느님의 영광을 드러내며

그분의 선한 손길과 아름다움과 사랑을 품고

생명을 노래하고 있다.

 

그리고 그것으로 족한 것이다. 

언젠가 공해와 오염으로 찌들린 도심 한복판

어느 건물 옥상에서 시멘트를 뚫고

하늘을 향해 호흡하는 꽃을 소개한 적이 있고,

최민순 신부님의 두메꽃을 소개한 적도 있다.

 

그렇다. 모든 피조물, 미물들이 하늘을 향해

하느님을 위해 존재하고 하느님을 찬양하며

노래하고 있는 것이다.

 

다만 당신 모상을 닮은 인간, 소위 만물의 영장이라는 사람에게

그것을 당신 대신에 잘 관리하라고 주셨기에

우리는 그 피조물들을 보면서 그안에 들어있는 하느님의 뜻과 생명의 원리와

존재 목적과 가치를 간접적으로 묵상하며 그들에게서 배우는 것이다.

 

금수보다 못한 존재, 자연의 미물보다,

자연보다 못한 존재가 안되기 위해서~~~

 

그런데, 그 산속과 들판의 이름모를 꽃들은

결코 햇빛을 찾아 옮겨 다니지 않는다는 것이다.

햇빛 또한 그 꽃들을 찾아 두리번거리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냥 그 자리, 바로 거기서 '지금 이 순간'을 호흡하고

성실하게 제몫을 다하고 있다는 것이다.

 

여기 사막 지대에 있다보니 사막에 관심을 갖게 되는데,

한번씩 모래 폭풍이 불어 도무지 이동이 불가능하면

낙타는 그냥 그 자리에 주저앉아 그것이 잠잠히 되는 시간까지

마냥 기다리고 있다는 이야기가 실린 사진을 본 적이 있다.

 

낮에는 작열하는 태양열을 방어해주고

밤에는 추운 기후를 견디도록 보온 역할을 하는

지방이 담겨진 낙타의 물혹도 그렇고,

모래 바람을 견디며 큰 눈을 보호하는 낙타의 눈썹도 그렇고,

자연의 순리에 순응하며 무릎꿇어 만들어진 낙타의 굳은 살도 그렇다.

 

하느님께서 이런 미물도 살만큼 살도록

다 적응하여 살도록 마련해 주셨지만,

그 낙타는 사막 한가운데서 어떤 어려움이 있어도

결코 울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난 유아세례 받고 나이 40 불혹의 나이에 성령 충만을 체험했다.

그것은 83년도 첫 서원한지 15년만에,

85년도 사제서품 받은지 13년만이었다.

 

그리고 작년에 첫 서원 30주년을 보냈고,

내년이면 사제서품 30주년을 보내게 된다.

 

그 성령충만 이후로 하늘을 바라보면

아무리 먹구름이 있는 날도

내 눈에는 별들이 보인다.

그리고 어떨 때는 별들이 땅으로 내려오듯이 떨어지고

어떨 때는 별들이 춤출 때가 있다.  

 

그리고 수도원 내 방의 방충망에 십자가를 

거미줄로 크게 새긴 거미와도 대화한 적이 있는데,

그 거미는 나의 뜻대로 움직여 주었다.

 

물론 별들의 이야기도 나의 착시일 수도 있지만,

성령충만을 받으면 하느님 안에서는

다르게 보일 수 있다는 것이다.

 

모든 피조물 안에 하느님의 얼이 들어 있고,

하느님의 생명의 손길에 의해 움직이기에

그렇게 느껴질 수 있다는 것이다.

 

아무도 없는 무인도나 사막에서 우리가 홀로 살 수 있다는 것은

이러한 자연과 자연의 미물들이 가르쳐 주는 것처럼

하느님이 내 안에 계시기 때문이고

하느님과의 절대적 생명의 올바른 관계 개념이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이기 때문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