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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욱현 신부님

~ 나에게 살아있는 생명의 말씀 ~

나에게 살아있는 생명의 말씀

- 조욱현 신부-

오늘 독서와 복음의 주제는 하느님 말씀을 규범으로 받아들이고 삶 속에 실천하여 ‘오늘’, ‘이 자리’에서 구원적 삶이 이루어지게 하는 것이다. 그래서 하느님의 말씀이 항상 나에게 있어 살아있는 생명의 말씀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제1독서: 느헤미야 8,2-4.5-6.8-10: 에즈라의 법전 해설

1독서는 에즈라가 바빌론 귀양에서 돌아와 예루살렘을 재건하기 시작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하느님의 법’을 선포하는 내용이다. 그것은 그들이 예루살렘을 다시 아름답게 재건한다해도 하느님과 맺은 계약을 잊어버린다면 아무 소용이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즉 하느님의 뜻에 충실한 삶이 그들에게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백성으로 끊임없이 사랑을 베풀어주시는 것이 될 것이다. 즉 외적인 것에만 치우치지 않고 진정한 하느님과의 관계를 이루도록 모세의 법전을 공적으로 선포하는 것이다. 이렇게 하느님의 말씀, 법은 공적으로 백성들 앞에서 이루어져야 하며 일어서고, 손을 쳐들고, 무릎을 꿇고, 땅에 엎드려 ‘아멘’ ‘아멘’ 하며 응답하는 백성들의 ‘참여’로써 이루어져야 한다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오늘의 ‘주일강론’이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백성들은 에즈라로부터 하느님의 법을 듣고 눈물을 흘렸다(9절)고 한다. 즉 ‘하느님의 법’을 듣는다는 것은 모든 사람들의 마음속에 ‘회개’를 일으켜 지금까지의 삶에 대해 후회와 괴로움을 느끼게 하고, 그리하여 가장 도움을 필요로 하는 사람들에 대한 사랑을 드러내게 한다. 하느님의 말씀을 들음으로써 새로운 마음을 가지게 되었다는 구체적인 증거는 바로 이러한 사랑의 실천을 통하여 나타나게 된다. 바로 1독서의 메시지는 하느님의 말씀을 선포하고 들음으로써 공동체가 변화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변화가 없다면 하느님의 말씀이 확실한 신앙으로 전달되지 못했거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는 의미이다.

복음: 루카 1,1-4; 4,14-21: 이 성서의 말씀이 오늘 이루어졌다

오늘 복음은 복음의 서문(1,1-4)과 예수께서 공생활 초기에 나자렛 회당에서 있었던 일(4,14-21)로 되어있다. 루가는 이 서문을 통하여 예수님의 구원사건을 체험하지 못한 사람들, 즉 이 복음을 헌정 받는 테오필로와 그 후대의 신앙인들에게 하느님 말씀의 신비로 안내하고 있다. 어떻게? 즉 그가 기록한 모든 것은 인위적으로 창작된 것이거나 조작된 것이 아닌 글로나 말로나 확실한 근거를 바탕으로 한 것임을 표현하고 있다. “그들이 쓴 것은 처음부터 직접 눈으로 보고 말씀을 전파한 사람들이 우리에게 전해준 사실 그대로입니다”(루가 1,2). 이 확실한 증거 때문에 우리는 모두 구원적 사건들의 핵심에 가까이 갈 수 있고, 역사성에 대해서도 확신을 가질 수 있다. 우리의 신앙이 타당성을 가지려면 테오필로와 같이 이러한 견고한 기초 위에 세워지면 더 좋지 않겠는가?

그러나 이와 같은 모든 것이 모든 사람들의 마음에 신앙심을 생기게 할 수 있다는 것은 아니다. 그 예를 우리는 나자렛 사람들이 ‘예수께서 하시는 은총의 말씀’(22절)을 찬미하면서도 그분 앞에서 취하는 태도에서 볼 수 있다. 신앙은 그리스도 안에서 외적인 것, 예를 들면 ‘요셉의 아들’(22절)이라는 것보다 그분 안에 있는 그 이상의 어떤 사실을 알아봄으로써 이루어지는 것이다. 복음사가가 원하는 것은 어떤 사실을 전하고 해석하면서 독자들을 신앙의 보다 깊은 차원으로 이끌어가고자 하는 것이다. 예수님을 안다고 하는 것은 그분을 ‘요셉의 아들’ 혹은 그 어머니를 아는 것으로 그분을 안다고 하는 것 이상의 그 무엇을 알아야 하는데 그것은 신앙이다. 이것을 복음사가는 의도하고 있다.

예수께서는 회당에 들어가셔서 이사야서의 한 대목을 읽으신다. “주님의 성령이 나에게 내리셨다. 주께서 나에게 기름을 부으시어 가난한 이들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셨다. 주께서 나를 보내시어 묶인 사람들에게는 해방을 알려주고, 눈먼 사람들은 보게 하고, 억눌린 사람들에게는 자유를 주며 주님의 은총의 해를 선포하게 하셨다”(이사 61,1-2). 이 내용은 이사야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귀양살이에서 돌아오게 되리라는 해방과 하느님의 구원의 약속을 전한 내용으로 아무 이상이 없었다. 문제는 성서를 읽으시고 자리에 앉으시어 그 내용을 설명하시는 말씀에서 제기된다. “이 성서의 말씀이 오늘 너희가 들은 이 자리에서 이루어졌다”(20-21절). 이 말씀 때문에 그들은 예수님을 죽이기로 작정한다. 그들에게는 예수님의 이 말씀이 터무니없고 믿을 수 없는 것이었다. 우선은 그 예언의 말씀이 ‘마리아의 아들’이며 목수인 ‘요셉의 아들’인 예수를 통해 이루어지고, 예언자의 메시아 활동이 바로 그 순간 즉 ‘오늘’ 이루어진다고 하였기 때문이다.

하여간 예수께서는 말씀과 행동으로써 가르치시고 구원업적을 이루신다. 예수께서 주시는 가장 큰 선물은 해방이다. 그 해방은 모든 악으로부터의 해방이다. 육체적, 영신적 시력상실로부터의 해방, 가난으로부터의 해방, 노예생활에서의 해방, 죄악으로부터의 해방 등이다. 즉 모든 사람들의 구원을 가져오신 분이다. 그분은 심판관으로서의 모습이 아닌 구원자로서의 모습으로 우리에게 오시는 분이시다. 예수님을 구원자로서 받아들일 수 있는 것은 신앙의 차원에서만 가능하다. 나자렛의 한 목수라는 것 때문에 그것을 거부했던 나자렛 사람들의 모습은 우리에게서도 흔히 나타날 수 있는 현상이다. 예수님을 구세주로 받아들이는 사람은 그러기에 그 옛날 나자렛 회당에서 하신 말씀이 ‘규범’, ‘법’이 된다. “이 성서의 말씀이 오늘 너희가 들은 이 자리에서 이루어졌다”. 그 ‘오늘’은 매일 시작되는 것이다.

제2독서: 1고린 12,12-30: 다양성 안에서의 일치-그리스도의 몸

사도 바오로께서는 그리스도의 신비체를 인체를 들어 설명하면서 각자가 서로 불가분의 관계를 맺고 있음을 말하고 있다. 한 몸을 이루고 있는 각 지체들은 서로가 조화를 이루지 않고 사랑하지 않는다면 그 몸은 올바로 성장할 수 없고 죽을 수밖에 없다. 그러므로 이 몸이 건강하고 아름다운 그리스도의 몸이 되게 하기 위해서는 각 지체로서 자신의 일에 충실하며 지체들 간에 진정한 일치가 있어야 한다고 가르치신다. 우리들 사이에 서로 불화를 야기하고 서로를 받아들이지 못하는 것은 자신의 고정관념이나 아집에 사로잡혀 예수님의 말씀을 받아들이지 못했던 옛날의 나자렛 사람들의 모습과 같은 모습이다. 공동체 안에서 형제를 받아들이지 못함으로 그 형제를 통하여 역사하시는 주님을 거부하는 결과를 초래하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인들은 하느님의 말씀을 ‘규범’으로 삼고 살아가는 사람들이다. 항상 하느님의 말씀 앞에 그 말씀이 “오늘”, “여기서” 나에게 구원이 이루어지는 말씀이 되게 하는 사람들이다. 이러한 삶은 올바른 성사생활, 또 전례생활을 통해서 그리고 구체적인 삶의 현장에서 실천되도록 해야 하는 삶이다. 하느님의 말씀이 ‘규범’인 삶은 진정 그리스도의 몸을 이루며, 우리 모두가 그리스도 안에 하나가 되어 한 몸 그리스도로서 하느님의 생명에로 나아갈 것이다. 지금까지의 나의 신앙생활은 어떤 모습이었는가 성찰해 보면서 주님께 은총을 구하여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