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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욱현 신부님

~ 연중 제 4주일 다해 - 예언자의 사명과 증거 / 조욱현 신부님 ~




연중 제4주일: 다해: 예언자의 사명과 증거

오늘 독서와 복음에서는 예언자의 사명과 그 증거에 대해서 말하고 있다. 예수께서는 이사야의 말씀을 당신 자신에게 적용하시면서 당신의 예언적 사명을 천명하신다. 그런데 역사적으로 예언자들이라고 하는 사람들은 지금까지 내려오는 구태의연한 삶을, 즉 안일주의에 빠져있는 삶을 들쑤셔 피곤하게도 다른 삶을 제시하면서 ‘새로운’ 목적과 ‘새로운’ 길로 방향전환을 시키러 오는 ‘불편한’ 사람들이다.

그래서 그것이 불편한 사람들에게 항상 박해를 당하고 죽음을 당하고 침묵을 강요받기도 한다. 참된 예언자는 항상 다른 세계를 열어준다. 그러나 그 세계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모두가 다 변화되어야 하고, 처음부터 다시 시작해야하기 때문에 어렵다고들 한다. 때문에 변화를 싫어하는 사람들은 예언자를 제거하거나 침묵케 함으로써 이미 자신 안에 일어나기 시작한 자신의 의식도 조용히 가라앉힐 수 있다고 여긴다.







제1독서: 예레 1,4-5.17-19: 나는 너를 내 말을 전할 나의 예언자로 삼았다

예언자는 항상 ‘불편한 존재’이다. 항상 하느님의 새롭고도 어려운 요구를 사람들에게 제시하기 때문이다. 이것을 싫어하는 사람들은 예언자에게 폭력을 가하여 말을 못하게 하거나, 귀를 막고 듣지 않는 것이다. 그러나 참된 예언자는 이러한 종교적 사회적 한계성을 벗어날 수 있어야 한다. 이것은 하느님의 특별한 도우심과 함께 용기를 잃지 않고 자신의 사명을 수행해 나갈 수 있다.

오늘 제1독서의 예레미야가 그런 경우이다. 하느님께 소명을 받고 그는 심리적으로 약화되고 불안하여 처음부터 그 소명을 피하려고 했다. 그러나 하느님께서 그를 도와주실 것을 약속하시며 용기를 주신다.

“이제 너는 허리를 동여매고 일어나, 내가 너에게 명령한 모든 것을 그들에게 말하여라. 너는 그들 앞에서 떨지 마라 그랬다가는 내가 너를 그들 앞에서 떨게 할 것이다. 오늘 내가 너를 요새 성읍으로, 쇠기둥과 청동 벽으로 만들어 온 땅에 맞서게 하고, 유다의 임금들과 대신들과 사제들과 나라 백성에게 맞서게 하겠다. 그들이 너와 맞서 싸우겠지만 너를 당해내지 못할 것이다. 내가 너를 구하려고 너와 함께 있기 때문이다. 주님의 말씀이다.”(17-19절).

복음: 루가 4,21-30: 예수님은 만민을 위해 오신 분이시다

이렇게 예언자들은 많은 박해와 고통을 당하면서도 하느님의 뜻을 전하는 사람들이다. 복음에 나오는 나자렛 사람들을 통하여서도 그것을 우리는 알 수 있다. 나자렛의 이야기에서 우선 조금 전까지도 별로 특별하게 생각하지 않던 한 사람, 예수가 너무나 두드러지게 돋보이게 된다는 것에 질투심 같은 것이 생겼는지도 모른다.

“저 사람은 요셉의 아들이 아닌가?”(22절)라는 말이 암시하고 있다. 그들이 보기에는 너무나 거리가 먼 두 가지 사실, 즉 예수가 어쩌면 다른 사람들보다 비천한 가문의 출신이라는 사실과, 자신을 이사야서 61,1-2의 말씀을 실현시킨 장본인이라고 주장하는(21절) 사실이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는 것이었다.

이것은 우리에게도 마찬가지이다. 신앙의 눈이 아니면 알아볼 수 없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예수님의 평범한 인간으로서의 모습과 또 당신의 생활과 가르침과 기적들을 통해 나타나는 인간 이상의 어떤 모습이 있음을 깨닫게 되는 사람들에게 어려움을 주게 된다. 인간이시면서 하느님이심을 고백하면서도 그 신비 앞에 혼란을 거듭할 것이다.

나자렛 사람들은 예수께 적개심을 갖는 것이 지방색을 드러내는 편협한 사고방식에서 나온 것 같다. “너희는 틀림없이 ‘의사야, 네 병이나 고쳐라.’하는 속담을 들며, ‘네가 카파르나움에서 하였다고 우리가 들은 그 일들을 네 고향에서도 해 보아라’ 할 것이다.”(23절). 사람들은 예수께서 기적을 나자렛에서는 하지 않으시고 카파르나움에서 행하신 것에 대해 불만을 품고 있는 듯하다. 그러나 기적은 무슨 광고행위가 아니다. 그것은 하느님께서 신앙을 갖고 있거나 믿고자 하는 자세를 가진 사람에게 하나의 표징으로 보여주시는 절대로 자유로운 행위이다.

예수께서는 구약의 엘리야가 찾아간 사렙타 마을의 과부 이야기와 엘리사 시대에 시리아의 장군 나아만을 고쳐주신 이야기(24-27절)를 하시면서, 기적을 팔레스티나 밖에서 행하신 것은 바로 당신의 백성들이 믿음을 갖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하신다. 사실 사렙타 마을의 그 과부(1열왕 17-18장)와 시리아 사람 나아만 장군(2열왕 5장)이 얼마나 큰 신앙을 입증해 보여주었나를 알 수 있다.

‘신앙’이라고 하는 것은 하느님의 현존과 활동의 영역을 넓혀주고 확장시킨다. 예수님을 자신의 편의와 이익을 위해서만 잡아두려고 하는 것은, 즉 하느님을 나의 편의와 이익만을 위해서 이용하려고만 한다면, 그것 자체가 이미 하느님의 보편적인 구원계획과는 거리가 먼 신앙생활을 하는 것이다. 따라서 더 이상 새로운 길로 나아가지 못하고 하느님께서 제시하시는 새로운 일들도 받아들일 마음의 문을 열 능력도 없게 된다.

바로 나자렛 사람들이 예수께서 선포하신 새로운 것들에 마음의 문을 열지 못하였기 때문에 그에게 적개심을 갖게 되었고 그분을 배척하고 마침내 그를 죽이려고 하였던 것이다. 그분이 불편한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제2독서: 1고린 12,31-13,13: 사랑의 찬가

바로 이 예언적 증거가 바오로 사도의 사랑의 찬가에서 말하고 있듯이 모든 은총 중의 가장 위대한 은총이며, 어느 누구에게도 없어서는 안 될 은총인 ‘사랑’을 통한 증거라고 할 수 있다. 바오로 사도께서는 “여러분은 더 큰 은사를 열심히 구하십시오. 내가 이제 여러분에게 더욱 뛰어난 길을 보여 주겠습니다.”(12,31)라고 하면서 사랑의 찬가를 노래한다(13,1-13).

우리들이 세상에 선포해야할 사명이 있는 그 ‘불편한’ 예언적 사명과 연결시켜 생각해 보자. “사랑이 없다면 신앙이 무슨 소용이 있으며, 불 속에 우리 몸을 던진다 한들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당신은 그것을 이해하고 있는가? 투쟁과 묵상은 다만 하나의 동일한 근원을 갖고 있다. 즉 사랑이신 그리스도이시다. 당신이 기도를 한다면 사랑 때문에 하는 것이다. 당신이 착취당한 사람에게 새로운 삶의 모습을 되찾아주고자 투쟁한다면 그것 역시 사랑 때문이다.”(1974. 8. 30. 떼제의 둘째 편지).

그러면 우선 영원한 예언자이신 그리스도와 나와의 관계는 어떤가? 그분은 어떤 면에서 ‘불편한’ 분이시다. 이 불편한 분의 말씀에 부응하여 우리 자신을 변모시켜 나가고자 하고 있는가, 아니면 나자렛 사람들과 같이 폭력은 행사하지 않았더라도 그분에게 어떤 제약을 가하려 하고 있지는 않은지 반성해 보아야 한다.

그리고 둘째로는 그분의 변화에 대한 예언적 메시지를 전해야할 그 사람들에 대한 우리의 태도를 살펴보아야 한다. 즉 우리의 힘에만 의존할 것이 아니라, 하느님께로부터 오는 힘과 도움에 의지함으로써 ‘단단히 방비된 놋담 처럼’ 우리 자신을 세울 힘을 갖추고 있는가?

그리스도인들은 이렇게 용기를 갖고 외칠 수 있어야 할 것이다. 바로 사람들의 의식 속에서 은폐될 위기에 처해있는 가치들을 재확인시키는 것이다. 여기에는 성령의 ‘예언적’ 능력이 필요하다. 인간의 법에 의해 짓밟히고 있는 태아의 생명에 관한 권리, 혼인의 비신성화, 외설 문학, 보편화된 폭력, 쾌락과 돈에 대한 발작적인 추구로 생명을 경시하는 세태를 생각하며 우리의 자세를 가다듬어야 한다. 항상 ‘사랑’을 증거하는 삶을 이루어 가도록 하여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