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명기는 이스라엘 백성이 하느님의 규정과 법규들을
명심하여 실천함으로써 그분 소유의 백성이 된다고 일러줍니다
(26,16-19).
그러나 우리는 율법 규정을 지키는 데서 더 나아가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여”(26,16) 실천함으로써
온 존재가 그분을 닮음으로써
하느님의 거룩한 자녀가 될 수 있습니다.
자신의 뜻과 욕구를 좇아가기 쉬운 우리가
그렇게 살아간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일지 모릅니다.
하느님의 백성으로 선택 받았다는 사실에만 집중하여
자신들의 특권을 누리려 하면서도, 율법 준수에 머물며
하느님을 닮으려는 노력은 소홀히 했던 이스라엘 백성의 잘못을
우리도 되풀이할 때가 많기 때문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원수를 사랑하여라.
그리고 너희를 박해하는 자들을 위하여 기도하여라.
그래야 너희가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자녀가 될 수 있다.”
(마태 5,44-45)고 하십니다.
그분은 동포는 사랑하되 원수는 미워해야 한다는
율법의 한계를 뛰어넘어 모두를 받아들이는
전인적 사랑을 요구하신 것입니다.
어떻게 그런 사랑을 실천할 수 있을까요?
먼저 내 기준을 버리고 하느님을 닮아야 할 것입니다.
거룩해지고 완전해진다는 것은 내가 정한 목표나
기준에 도달하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을 닮는 것입니다.
따라서 두려움의 빗장을 풀고 하느님을 바라보고 받아들이며
내가 기댔던 것들을 내려놓고 그분의 뜻을 마음을 다해 실천할 때
주님을 닮을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는 그렇게
“악인에게나 선인에게나 당신의 해가 떠오르게 하시고,
의로운 이에게나 불의한 이에게나 비를 내려 주시는”(5,45)
주님을 닮아야 합니다.
이것이 거룩함의 길이요 완전함의 길입니다.
따라서 ‘차별하지 않으며’ ‘한계를 두지 않고’ 사랑하는 것이
하느님의 거룩한 자녀다운 삶입니다.
우리는 감정과 사고의 틀과 경험과 좁은 신념, 종교, 혈연,
외모에 따라 습관적으로 가르고 차별합니다.
오해를 받거나 모욕과 무시를 당하면 꼴도 보기 싫어하며
관계를 단절해버리려 드는 경우도 있습니다.
내 생각과 다르고 내 말에 동조하지 않는 사람과는
가까이 하려 하지 않습니다.
자신의 신념이나 종교적 확신과 다른 사람에 대해서는
부정적으로 바라보고 겉모습만으로 비판하기도 합니다.
가족이나 친지, 친밀감이 있는 친구들에게는 잘하고
그들의 말은 무조건 받아들이면서도
나를 싫어하는 이들이나 별 친분이 없는 사람,
사회적 약자나 죄인에 대해서는 냉정하고 무관심한 경우도 많지요.
동족, 가족, 친구나 자신에게 잘해주는 것은 어렵지 않습니다
(5,46-47).
예수님의 제자들의 사랑이 다른 이들과 다른 점은
바로 자신을 박해하고 중상하며, 증오하는 원수들까지
사랑하는 데 있습니다
(5,44).
하느님의 사랑 때문에 원수를 포함해 아무도 내치지 않고
조건 없이, ‘먼저’ ‘다가가’ 품는 것이
우리의 도리임을 깊이 새겨야겠지요.
오늘도 배타적인 태도로 감정에 따라 좋고 싫음을 구별하고,
선악을 가르며, 관계를 단절하는 좁디좁은 마음의 울타리를 허물고,
그 누구도 내치지 않고 품을 수 있는 사랑의 능력을 키우는
하루가 되길 소망합니다.
기경호 프란치스코 신부 작은형제회(프란치스코회)
"대체 나는, 그리고 우리는 얼마나 자신을 버리고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르고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