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고성소에 내리신 그리스도 (Anastasis)
제작 년도 : 프레스코(1315- 1321)
소재지 : 터키 이스탄불 코라(Chora)구세주 성당
현재는 이슬람 국가이지만, 동로마제국이 멸망하기 전까지 로마와 쌍벽을 겨루던 동방 교회의 본산이 터키의 이스탄불은 아직도 크리스천 문화와 예술이 보물창고처럼 남아 있어 보는 이들의 마음을 아프게 한다.
서방 교회의 수장인 로마 교황과 동방 교회의 수장인 콘스탄티노폴 총대주교 간에 자리다툼의 힘겨루기는 화해와 일치라는 신앙의 기본을 망각하고 상호파문이라는 극단적 길을 걷게 되었다.
이 와중에 동로마제국은 새로운 위기를 맞게 되었다. 아시아 쪽에서 새로 일기 시작한 오스만투르크 족이 침범하면서 동로마 제국은 수도인 콘스탄티노폴을 제외하고 고립됨으로서 다급해진 동로마 황제는 그동안 힘겨루기의 핑계로 주장했던 많은 것을 양보하는 조건으로 교황에게 도움을 청했으나 교황이 외면함으로서 동로마제국은 1453년 멸망하면서 터키가 이슬람 국가로 변하게 되었다.
이 성당은 이스탄불 교외에 있기에 “시골”이라는 뜻의 코라(Chora)로 불리는데, 이스탄불 시내에 있는 소피아 대성당처럼 박물관이 되어 관광객을 모으고 있다.
소피아 대성당에 비기면 엄청나게 작은 것이나, 100여종에 이르는 모쟈익과 프레스코를 담고 있기에 성미술의 보물 창고로 볼 수 있는 이 성당은 11세기 황제 안드로니코스 장모의 발원에 건축되어 총리 메토키데스에 의해 증축되면서 오늘과 같은 값진 성미술의 보물 상자가 되었다.
이 성당은 교회사의 슬프고 부끄러운 역사의 기억을 일깨우면서도 너무도 아름답고 시원한 크리스천 신앙의 정수를 발견할 수 있는 곳이다.
이 작품은 이 성당에 있는 수많은 작품 중에서 하느님의 자비를 명확히 표현한 탁월한 작품중 하나이다.
희랍어 아나스타시스(Anastasis)는 부활이란 뜻으로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죽음을 겪으시고 부활하셔서 가장 먼저 찾아간 곳, 우리 표현으로는 “고성소” “저승”으로 번역할 수 있는 림보(Limbo)에 가셔서 천국으로 오르지 못하고 대기상태에 있던 구약의 여러 성인들과 예언자들을 구원하셨다는 내용을 표현하고 있다.
이 림보에 대한 내용은 성서에 직접적으로 언급되고 있지 않는 것이나 초대교회 신자들은 그들의 신앙 감각에 의해 의심 없이 믿어 왔던 중요한 교리의 하나였다. 그러나 암시적으로 림보 신앙이 다음 구절에서 드러나고 있다.
“그는 육으로 살해되었지만 영으로는 생명을 받은 것입니다. 그리고 감옥에 있는 영들에게 가시어 말씀을 선포하셨습니다.“(1베드3,19)
반원형의 벽면에 그려진 이 벽화는 신앙의 눈으로 바라보면 엄청난 감동을 일으키면서 오늘 우리 교회 현실을 복음의 시각에서 다시 바라보게 만든다.
삼각구도에 반원형의 중간에 그리스도께서 서 계신다. 그 주위엔 노란 색깔의 별들이 흰 바탕에 놓여 그리스도의 모습을 더 위엄 있는 모습으로 만들고 있다. 그분의 모습에는 어디에도 십자가의 비참한 죽음을 겪은 흔적을 찾아 볼 수 없다. 천지의 창조주이신 성부의 아들 예수로서 인간을 구원하시기 위해 이 세상에 오셔셔 성부의 뜻을 이루시고 부활하셔서 구세주로서의 역할을 시작하시는 늠름하고 당당한 모습이시다.
보통 성화에서는 주님 얼굴에 후광을 그리는 것으로 끝내고 있으나 여기엔 희색으로 시작되어 점점 흰빛으로 나아가 마지막은 별이 새겨진 하늘을 연상시키는 반원형으로 주님 영광을 더 없이 부각시키고 있다.
죽음을 쳐 이긴 승리자 예수의 모습이 강하게 드러나고 있다. 서방의 성화에서는 이런 경우에서 어떤 방법으로든지 십자가 죽음의 흔적을 남기고 있으나 여기엔 전혀 그런 흔적이 없이 생명 자체의 밝고 힘있는 모습으로 서 계신다.
“나는 세상의 빛이다” (요한8,12) 라는 말씀을 상기시키는 주님의 밝은 모습과 달리 주님 발 아래 검은 색깔의 심연이 보이는데, 이것은 예수님의 부활로 박살난 악의 잔상들이다.
악의 ,특징은 해방이 아니라 구속이며 속박임을 강조하기 위해 속박을 위해 제작된 각종 철물들, 자물쇠 경첩 등이 박살난 상태로 널부러져 있으며 간간히 보이는 형상들은 패배한 악마들의 상징이다.
크리스천의 구원이라는 것은 속된 말로 아무 불편이나 어려움이 없는 안락한 처소인 천당에 간다는 것이 아니라 인간을 속박하기 위해 만들어진 모든 제도나 인습에서 자유로워진 해방의 상태임을 알리는 것이다.
성서의 다음 구절을 일깨우고 있다.
“이 썩는 몸은 썩지 않는 것을 입고 이 죽는 몸은 죽지 않는 것을 입어야 합니다. 이 썩는 몸이 썩지 않는 것을 입고 이 죽는 몸이 죽지 않는 것을 입으면, 그때에 성경에 기록된 말씀이 이루어 질것입니다."
“승리가 죽음을 삼켜 버렸다. 죽음아, 네 승리가 어디에 있느냐? 죽음아, 네 독침이 어디 있느냐?죽음의 독침은 죄이며 죄의 힘은 율법입니다."(1코린 15,53-56)
주님은 오른손과 왼손으로 두 남녀를 잡아 일으키고 있다. 오른쪽의 늙은이는 아담이다. 여기에서의 아담은 미켈란젤로의 천지창조에서 나타나고 있는 아담과는 전혀 다른 모습이다.
그런 낙원에서 추방당한 후 처자식을 먹여 살리며 살아야 했던 고통의 시간이 얼마나 길고 괴로웠는지를 상징하듯 호호백발의 늙은이가 되어 주님이 이끄는 대로 손길을 주고 있다.
왼쪽의 하와는 아담을 유혹했던 당사자임을 암시시키기 위해 붉은 옷을 입혔다. 남자를 죄로 떨어트리는 육욕의 상징과 같은 존재로 그려져 있다. 이것은 당시 신학의 미발달로 여성을 부정적인 존재, 남성과 열등한 존재로 여겼던 당시 신학의 표현이라 볼 수 있다.
아담과 하와의 밑에는 그들이 잠들었다기 보다 갇혀 있었다고 보는 것이 나은 관들이 열러 있으며 양쪽의 관안엔 그들을 유혹했던 뱀이 검은 모습으로 그려져 있다.
아담과 하와는 세상에 원죄를 가지고 온 죄의 원흉이라 볼 수 있으나, 부활하신 주님은 가장 먼저 이들의 손을 잡아 일으키심으로서 그분 자비 안에는 어떤 차별도 있을 수 없는 파격적 사랑이 있음을 보이고 있다.
아담의 뒤에는 세 사람의 남자가 등장하고 있다. 첫 번째는 세례자 요한으로 손가락으로 구세주이신 예수님을 가르키고 있는데, 이것은 세례자 요한의 역할이 바로 세상에 구세주로 오신 하느님의 어린양 예수님을 사람들에게 알리는 존재임을 표현하는 것이다.
그 뒤에 세례자 요한의 안내를 받으며 서 있는 두 사람은 다윗왕과 솔로몬이다. 두 사람은 다 고귀한 신분이나 공통점은 죄의 유혹을 이기지 못하고 넘어져 죄인이 된 모든 인류의 상징이다. 다윗 왕은 오늘 성왕(聖王)으로 불리고 있으나 그는 심각한 실수를 범한 인간이었다.
육욕에 빠져 큰 죄를 지었으나, 그는 너무도 용감히 자기의 죄를 진심으로 인정하고 뉘우침으로서 성인으로 추앙되고 있으며, 솔로몬 왕 역시 하느님의 은총을 넘치게 받아 이스라엘의 국운을 일으켰으나, 이방인 많은 여성을 후궁으로 만들므로 그들에 의해 야훼 신앙을 오염시키는 큰 죄를 범했다.
그러나 이들은 세례자 요한의 인도로 부활하신 주님을 맞을 구원의 잔치에 참여하고 있다.
하와의 뒤에는 연푸른 색깔의 옷을 입고 손에 목장을 든 사람이 있는데, 창조에 나타나고 있는 유일한 의인인 아벨이다. 카인과 아벨이라는 아담의 첫 자손으로 형인 카인의 질투에 의해 살해되었던 의인의 상징이다. 그는 직업이 목자였다는 것을 상기시키려는 듯 손에 목장을 들고 있다.
이 편에는 아담 편과는 달리, 의인들이 등장하고 있다. 작가는 이 양편의 등장인물을 통해 하느님 자비의 실상을 아주 대담하게 표현하고 있다. 즉 하느님 자비 앞에는 의인과 죄인의 구별이 있을 수 없고, 모든 이가 다 하느님의 사랑받는 자녀라는 것이다. 참으로 파격적인 표현이다.
오늘의 현실적 교회 안에는 아직도 자신의 죄와 실수 때문에 교회 성찬례에 참석할 수 없는 크리스천들이 현실적으로 존재하고 있다. 이혼자, 성 소수자, 교회의 신학 노선과 다른 의견을 가진 신학자들 안타깝지만 열거하면 아직 많이 있다.
자비의 해를 맞으면서 이런 형제자매들에 대한 시원한 배려를 하지 못하고 있는 우리 교회의 현실이 아쉽다.
이 작품은 자비의 해를 맞고 있는 우리가 해야 할 실천으로 과감히 초대하고 있다. 법과 전통에 묶여 자비를 외치면서도 자비 표현의 기동력이 떨어진 제도적 교회안에서 우리 각자가 자비의 화신(化身)으로 이 작품의 예수님처럼 사람들을 대하라는 것이다.
우리 모두가 아담과 하와의 손을 잡고 일으키는 예수의 제자로서 제도적 교회로부터 단죄된 사람들을 형제자매로 맞아들이는 것이다.
며칠 전 프란치스코 교종께서 당신의 거처인 마르타의 집에서 집전한 미사에서 다음과 같은 내용의 강론을 하셨다.
“오늘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심각하게 양심성찰 하도록 요청하십니다. 사실 자비는 상징적인 언어가 아닌 일상적인 삶의 형태입니다. 각자는 자비로운 사람이 될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습니다. 이는 자신이 선택하는 삶의 형태입니다. 자비롭게 살 수도 있지만 자비롭지 않게 사는 삶을 선택할 수도 있습니다. 자비에 대해 말하는 것과 사는 것은 다릅니다.“
야고보 사도의 서간을 빌려 이야기 한다면(야고2,14-17참조) “실천 없는 자비는 죽은 것입니다.” 바로 그렇습니다!“
교종님의 강론은 자비의 실천을 외치면서도 하느님의 자비의 빛을 던지지 못하는 사각지대를 품고 있는 교회 현실에서 우리가 해야 할 역할을 일깨우시는데, 이 작품은 바로 700여년 전 대담한 시각적 표현으로 우리에게 접근하고 있다.
이런 면에서 예술가는 법과 제도의 틀에 짜여 어떤 때 교회의 현실이 답답하고 숨막힐 때 교회 안에서 해방과 자유라는 복음의 핵심을 너무도 시원하고 정확하게 표현한 예언자로 볼 수 있다.
출처: 작은형제회, 이종한 요한 신부의 성화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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