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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란치스코성인의 꿈과희망

~ 성 프란치스코 와 성녀 클라라 / 회칙들, 유언, 권고 ~

회칙들, 유언, 권고



a. 인준 받지 않은 회칙(1221년)



2.15. 성청의 인준을 받지 않은 이전 회칙(Earlier Rule: 이후 1221년 회칙은 ‘이전회칙’이라 칭하고 1223년 회칙은 ‘나중회칙’이라 칭함- 역자 주)은 1209년에서부터 1221년까지의 중대한 시기 동안의 수도회의 모습에 대한 숙고가 낳은 열매이다. 1209년에는 원회칙 혹은 “Propositum Vitae”(생활양식, 혹은 생활지침)이라고 일컬어지는 최초의 회칙을 인노첸시오 3세 교황으로부터 구두로 인준 받았고, 1221년에는 이 ‘이전회칙’을 승인해 준 수도회(형제회)의 총회가 개최되었다. 이 회칙은 1215년에 있었던 제 4차 라떼란 공의회 후에 일어난 개혁정신을 아 주 잘 적용시키고자 했던 흔적을 볼 수 있게 해 준다.






2.16. 비인준회칙의 작성 과정은 3 부분으로 나누어 얘기할 수 있다; 즉 1) 하나는 프란치스코의 복음적 소명을 잘 가리켜주는 복음적 문구들로 작성된 “Propositum Vitae”를 1209년에 인준 받은 것이고; 2) 두 번째는 1215년에 열린 제 4차 라떼란 공의회의 결정 사항들과 형제회의 총회에서 결정한 사항들, 특히 1217년 총회에서 형제회의 선교 계획과 관련한 결정 사항들이며; 3) 세 번째는 1221년 회칙에서 결정적으로 승인된 회칙의 최종안이다.



2.17. David Flood, OFM 형제와 Thadee Matura, OFM 형제의 분석(“The Birth of a Movement: A Study of the First Rule of Saint Francis,” Franciscan Herald Press, Chicago, 1975)에 의하면 이전회칙은 두 개의 부분으로 나뉠 수 있다. 첫 번째 부분(1-17장)은 1215년 이전의 형제회의 상황을 반영해 주는 반면, 두 번째 부분(18-24장)은 라떼란 공의회 이후에 교회와 형제회가 새롭게 요청하는 바들에 대한 답으로 주어진 것이다. 이 요청들은 특히 형제회의 확장, 관구 제도의 설립(1217년) 그리고 북부 유럽과 중부 유럽 그리고 북 아프리카와 중동 지방에로의 선교 계획 등이었다.



2.18. Giano의 Girdano가 자신의 연대기 15항에서 말하는 바에 의하면, 프란치스코는 이 회칙의 최종안을 쓰는 데 있어서, 특별히 성서에서의 다수의 인용을 하는 문제에 관해서 Speyer의 체사리오 형제에게 도움을 요청했다고 한다. 체사리오 형제가 성서 학자였다는 것은 알려진 사실이다. 비인준 회칙에 나오는 성서 본문들의 전체 분석을 해 놓은 책이 있다: Dino Dozzi OFMCap, "Il Vangelo nella Regola non Bollata di San Francesco d'Assisi," Istituto Storico dei Cappuccini, Rome, 1989.



2.19. 몇몇 장들(Chapters)은 특별히 주목할 만하다. 16장은 비신자들에게 가는 선교사들에 대해서 말하고 있다. 이것은 교회 안에 있는 수도회들의 규정들 안에서 처음으로 발견되는 종류의 규정이다. 21장은 프란치스칸적 설교 방식에 대한 모범이 되는 것이다. 23장은 긴 찬미의 기도와 감사로 되어 있다.



b. 인준 받은 회칙(1223)



2.20. 나중회칙 혹은 인준회칙의 본문은 1223년 호노리오 3세에 의해 공식적으로 인준되었다. 인준회칙은 제 1회 남자 프란치스칸 가족 모두(OFM-작은형제회; OFMConvetual-꼰벤뚜알 성 프란치스코회; OFMCapuchin-카푸친 작은형제회)가 받아들이는 회칙이다.



2.21. 인준회칙의 원본은 아시시의 성 프란치스코 대성당 지하에 귀중한 유물로 소장되어 있다. 이 회칙의 본문은 이 회칙이 교황 칙서에 포함되어 있어서 프란치스칸 삶의 양식이 전적으로 가톨릭적이라는 것을 교회가 인정한다는 사실을 증거해 주고 있다.



2.22. 이 회칙을 썼던 배경에 대해서는 여러 개의 사료들이 전해 주고 있다. 성 보나벤뚜라는 (대전기 4장, 11항) 프란치스코가 높은 산에 올라가서 이 회칙을 받아쓰게 하였다고 전한다. 프란치스코의 대리자였던 엘리아가 그 회칙을 잃어버렸다고 말했기에 프란치스코는 다시 한적한 곳으로 물러가서 회칙을 전부 다시 썼다고 한다. 모세-그리스도-프란치스코, 그리고 10계명-진복팔단-프란치스코의 회칙이라는 상징성을 초기사료들은 분명히 드러내주고 있다. 이후의 사료들은 이 회칙이 그리스도께서 프란치스코에게 개인적으로 받아쓰게 한 것이라고까지 진술하고 있다.



2.23. 프란치스코는 두 형제, 즉 레오 형제와 교회법 전문가였던 볼로냐의 Bonizo 형제에게 회칙을 쓰는 데 도움을 청하였다. 이 회칙은 우골리노 추기경의 영향도 있음을 드러내주고 있다.






2.24. 인준회칙은 12장으로 나뉘어져 있다. 물론 이 회칙의 원본에는 이렇게 장으로 나뉘어져 있지 않다. 이 회칙이 비록 프란치스코의 본래 의도에서 벗어나 있다는 생각을 받아들일 수는 없지만 형제회의 법적인 규정을 마련하고자 하는 경향은 없는 아주 간결한 문서이다. 제 1장은 작은 형제들의 규칙과 생활이 복음을 살아가는 것이라고 단순히 기술하고 있다. 프란치스코에게 있어서 이 말들은 그의 이상을 표현하는 데 더할 나위 없이 충분하다.



c. 은둔소를 위해 쓰신 회칙



2.25. 은둔소를 위해 쓰신 회칙은 형제회의 은수적이며 관상적인 체험을 위한 기초를 놓으려는 목적으로 쓰여진 짤막한 글이다. 이태리의 프란치스칸 은둔소들은 잘 알려져 있다: Le Carceri, La Verna, Grecco, Fontecolombo, Speco di Narni, 그리고 무수한 은둔소들이 있다. 프란치스코는 이 관상적 삶을 자신의 이상을 통합하는 일환으로 제시하고 있다. 프란치스칸 은둔 생활은 예수님께 봉사하는 마르타와 마리아의 일화를 기초 삼은 것이다. 프란치스코의 은둔소를 위한 회칙을 전체적으로 연구한 책이 있다: “Franciscan Solitude,” edited by Andrew Cirino OFM and Josef Raischl, The Franciscan Intitute, St. Bonaventure University, New York, 1995.



d. 유언(1226년)



2.26. 1230년의 “Quo elongati” 칙서에서 그레고리오 9세가 말하기를 프란치스코가 자신의 생애 마지막에 이르러서 형제들에게 유언이라고 부르는 계명(“mandatum”)을 주었다고 한다.



2.27. 아마도 프란치스코가 죽던 해인 1226년에 쓰여졌을 거라고 추정되는 유언은 이 가난뱅이(프란치스코)의 자서전적 글로써 매우 중요한 가치를 지닌다. 이 글을 “mandatum”이라고 일컫는 것은 이 글이 요한 복음 13-17장에 나오는 그리스도의 “mandatum”, 특별히 그리스도께서 죽음에 이르러서 준 사랑의 계명 이야기의 관점에서 제자들에게 준 “mandatum”을 모델 삼아 프란치스코가 형제들에게 한 마지막 유언적 형식을 지니고 있음을 말해 주는 것이다.



2.28. 1225년에 시에나에서 쓰신 유언(받아쓰게 한 글)에서 프란치스코는 세 가지 관점, 즉 형제애와 가난 그리고 교회에 대한 순명의 관점에서 자신의 마지막 소망을 표현하고 있는데, 그것은 결정적인 유언의 기초가 된 것이다.



2.29. 프란치스코의 유언은 사본 전승 안에서 제대로 입증되어 있으며 아시시 사본에 그 내용이 실려 있다. 유언에 대한 비판본 : 카에탄 에셀, OFM의 “Das Testamentum des heiligen Franziskus von Assisi,” Münster, 1949.



2.30. 유언은 형제회의 역사 안에서 늘 열띤 논쟁의 대상이 된 글이었다. 이 글은 프란치스코가 애초에 품었던 자신의 복음적 이상을 드러내주는 글인데, 가끔 이 글은 교권이 부여한 회칙의 해석과 더불어서 직접적인 논쟁으로 이어지는 경우가 많았다. 프란치스칸 전통 안에 있었던 모든 개혁 가족들은 이 유언에 대단한 가치를 두고 이를 지켰다. 그러나 프란치스코의 의도는 유언의 본문을 보면 알 수 있듯이 분명한 것이다. 즉 이 유언이 인준회칙처럼 양심적인 면에서 구속을 주는 그런 문서가 아닌 영적인 문서라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유언은 프란치스코가 가졌던 애초의 영감과 형제회의 겸허한 출발을 알아내는 데 중요한 가치를 지니는 문서이다.



e. 권고



2.31. 권고는 아마도 여러 번의 총회 기간 중에 프란치스코가 형제들에게 해 주었던 권고 형식의 찬가 28개로 되어 있는 글이다(I첼라노 82 참조). 13세기의 모든 사본들은 권고 글의 존재에 대해서 증거를 해 주고 있다.



2.32. 권고는 법적인 글은 아니다. 그 스타일은 영신적이며, 전통적인 정주 수도원 계열들이 했던 복음 나누기 형식을 전형으로 만들어진 것이다. 모든 권고는 특정한 주제를 다루고 있다. 가장 중요한 것에 대해 언급해 보겠다.






2.33. 권고 1번은 가장 긴 것으로서 성체성사 안의 주님의 몸에 대해서 말하고 있는 것이다. 프란치스칸 학자들은 이 권고 말씀이 가(假)-베르나르도계의 “Tractatus de corpore Domini”(주님의 몸에 관한 개론, Patrologia Lantina 184: 1149-1150)에서 출처를 찾을 수 있다는 사실을 지적하고 있다. 이 권고말씀은 프란치스코가 성체성사에 대한 존경심을 상당히 강조하고 있는 여러 글들 중 한 부분이다(참조 : B. Cornet, "Le De Reverentia Corporis Domini. Exhortation et Lettre de S. Francis", in Etudes Franciscaines 6(1956), 20-35, 155-17; 8(1957), 35-58). 이 권고말씀은 프란치스칸 이상에 시토회 신학이 대단히 큰 영향을 미쳤음을 증거해 주는 것이기도 하다.



2.34. 권고말씀들 중 다른 그룹(13-16번)은 복음의 진복선언에 대한 짧은 주석들이다. 마태오 복음 5-7장에 나오는 산상수훈은 이 권고말씀들의 신학적 기초가 되는 것인데, 이 산상수훈이야말로 때때로 복음적 형제애를 위한 “magna charta”(대헌장)이라 일컬어지는 것이다.



2.35. 프란치스코는 권고말씀들에서 자주 하느님의 종에 대해 언급하고 있는데, 이것은 성서와 수도승적 전통에서 나오는 표현이다. 권고말씀들은 덕행들에 대한 짤막한 찬미와 당신의 가슴에 말씀을 소중히 간직했던 동정 마리아에 대한 약간은 흐릿한 언급들을 담고 있다.





편지들



i. 안토니오 성인에게 보내신 편지



2.36. "Chronica XXIV Generalium Ordinis Minorum"(작은형제회-작은이들의 수도회-의 일반 연대기 24장)은 리스본 출신의 안토니오에 대해 언급하고 있는데, 그는 아오스딩 규율 수도회 회원이었다가 모로코에서의 첫 프란치스칸 순교자들(1220)인 베르나르도와 그의 동료들에 의해 자극을 받아 프란치스코 수도회에 들어갔다고 한다. 후에 파두바의 성 안토니오로 널리 알려진 안토니오는 1222년에 볼로냐에 있는 형제들에게 신학을 가르치기 위해 파견된었다. 이 짤막한 편지에서 프란치스코는 안토니오의 학문 소명을 인정해 주면서도 “기도와 신심의 정신”(인준회칙 10장)을 끄지 말 것을 권고하고 있다.



ii. 성직자들에게 보내신 편지



2.37. 이것도 프란치스코의 성체성사에 관한 글들 중 하나이다. 이 글은 1215년에 열렸던 제 4차 라떼란 공의회에서 내린 결정들을 반영해 주고 있으며, 또한 “Sane cum olim”(1219년)이라는 교황칙서 내용도 반영해 주고 있다. 페루지아 전기 18장은 프란치스코가 성체성사에 대해 대단한 존경심을 보여주었고, 그래서 형제들에게 자주 교회와 제대 등에 대해 존경을 보이고 잘 돌볼 것을 권고했다고 전한다. 성직자들에게 보내신 편지는 두 개의 사본으로 전해 내려왔다. 첫 번째 것은 수바시오 산에 있는 베네딕도 수도원의 13세기 미사경본에서 발견되었는데, 그 사본에는 프란치스코에게 있어서 매우 특징적인 요소인 “Thau cum capite”(대문자 타우)라는 표시가 있다(레오 형제에게 주신 축복문 참조).








iii. 수호자(보호자) 형제들에게 보내신 편지



2.38. 이 편지도 역시 두 개다. 이 편지를 쓰게 된 배경은 성직자들에게 보내신 편지의 배경과 비슷하다. 첫 번째 편지는 Guarnacci 도서관에 225번 사본에서 Sabatier가 발견한 것이다. 이 편지에서 프란치스코는 설교가들이 입자에서와 성체성사를 거행하는 사제들의 입장에서 그리고 일반 신자들의 입장에서 성체에 대한 공적인 공경을 표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말하고 있다.



2.39. “custos” 혹은 “custodian”(수호자, 혹은 보호자)라는 단어와 관련해서, 에셀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로마 총본부의 문서들 안에... 우리는 이 직무와 관련하여 특별히 복잡한 부분이 있다는 것을 발견하게 된다... 마지막 회칙에서 부적합한 총봉사자에 관한 부분(8장)에서 형제들이 자신들을 위해 주님의 이름으로 다른 수호자(혹은 보호자; 우리말 본문에서는 총봉사자 선출이라고 되어 있지만 원문에는 보호자 선출로 되어 있다 - 역자 주)를 선출하라고 규정하고 있는 만큼 이 단어가 처음부터 어떤 고유한 개념으로만 사용되었던 것 같지는 않다. 이처럼 이 단어는 형제회의 최고 장상에게도 적용될 수 있었던 단어이다... 그러나 성 프란치스코가 유언을 쓸 시기쯤에는 이 단어가 명백히도 어떤 특정한 직무를 지칭하게 되었다. 그때에게 가서는 더 작은 행정 단위체로서 관구들이 분명히 나뉘어졌고 이 관구들은 ‘custos’(수호자)들이 이끌어 갔다.” (K. Esser, "Origins of the Franciscan Order", Franciscan Herald Press, Chicago, 1970, 00. 67-68).



iv. 신자들에게 보내신 편지



2.40. 첫 번째 편지: 참회자들의 그룹(order: 교회 안의 공식적인 그룹이었기에 “참회자들의 회”라고도 번역할 수 있음- 역자 주) 형제 자매들에게 주신 권고.



2.41. 첼라노의 토마스가 쓴 제 1생애 37항은 “ordo poenitentium”(참회자들의 회)의 구성원들로서 세속에 살면서 복음적 삶을 받아들이고자 하는 형제 자매들에게 생활양식을 주었다고 말하고 있다. 카에탄 에셀은 이 편지가 사실상 프란치스코에 의해 주어진 생활양식에 핵심을 구성하고 있으며 1221년의 “Memoriale Propositum”으로 교회가 이 생활양식을 인준해 주었다고 결론을 내리고 있다.



2.42. 이 편지의 본문은 Guarnacci 도서관에서 Sabatier가 발견한 것이다. Sabatier는 이 편지를 “Verba vitae et salutis”(생활과 축복의 말씀들)라고 명명하였다.



2.43. 에셀은 자신의 연구, “Origins of the Franciscan Order” 44-45쪽에서 이 참회자들의 회의 초기 역사에 대해서 설명해 주고 있는데, 이 회가 후에 제 3회로 발전하게 된 것이다. “참회자들의 그룹 중 하나로 형제회를 일컫고 있는 단 하나의 기록에는, 작은 형제들이 자신들을 ‘viri poenitentiales de civitate Assisii oriundi’(아시시 출신의 남성 참회자들)이라고 했다고 한다[세 동료들의 전기 37항]. 우리는 여기서 ‘각자의 집에 머물면서 참회하는 형제 자매들’로 불렸던 프란치스칸 제 3회에 대한 의문점에 대해서 더 깊이 관여하려는 것은 아니다. 믿을만한 증거에 의하면 이 3회에 대해서는 1221년까지의 상황만 알 수 있다.”



2.44. 신자들에게 보내신 첫 번째 편지는 1978년 바오로 6세가 인준해 준 재속 프란치스코회의 새로운 회칙에 포함되어 있다.



2.45. 두 번째 편지: 신자들에게 보내신 편지는 아마도 작은 형제회의 이전회칙의 경우와 매우 비슷한 발전과정을 가졌다. 이 두 번째 편지는 가장 발전된 것인데 프란치스칸 회개 운동의 발전 결과로 나온 것이다. 이 편지는 카타리 이단의 교리에 대항하여 평신도들을 가톨릭 신앙 안에서 교육시키고자 하는 명백한 의도를 지니고 있기에 회개의 성사(화해의 성사)와 성체성사를 품위 있게 받을 것을 강조하고 있다. Regis J. Armstrong, OFM,Cap. 형제의 “Francis and Clare: The Complete Works” 67쪽을 보면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신자들에게 보내신 두 번째 편지는 육화와 관련하여 강조점을 두고 있는 표현으로 시작한다. 이것은 카타리 이단에 의해 발전된 교리교육 방법인데, 이 이단에 속한 사람들은 물질은 모두 불순한 것이기에 그리스도가 육화했다면 그분은 하느님이 아닐 뿐 아니라 심지어는 사람보다도 못한 존재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이다. 카타리 이단은 그리스도가 하느님이 선택한 천사로서 보았으며 사람의 형상을 취한 것뿐이라고 보았다. 그들은 복음적이고 가난한 삶의 방식을 받아들이면서 자신들의 교리를 선포하였다. 이처럼, 그들의 삶에 있어서 많은 부분이 참회하는 형제 자매들의 삶과 비슷하였다.”



v. 레오 형제에게 보내신 편지



2.46. 이 편지는 프란치스코가 친필로 쓴 두 개의 글 중 하나이다. 이것은 Spoleto 대성당에 유물로서 간직되어 있다. 본래 이 편지는 Spoleto의 글라라회 자매들이 가지고 있었는데, 1604년 Spoleto의 꼰벤뚜알 성 프란치스코회 회원들에게 기증하였다. 이태리가 한 나라로 통일이 되면서 이 소중한 글이 소실되었었는데, 1895년 이후에야 이 편지를 다시 찾아서 성 프란치스코의 친필 편지로 공개되었다.



2.47. 이 편지는 감동적인 문서로서 “pecorella di Dio”인 레오 형제에 대한 형제적 염려와 사랑을 잘 드러내 주는 글이다. 자필로 된 성인의 유일한 두 개의 글, 즉 이 편지와 지극히 높으신 하느님께 드리는 찬미(양피지본)이 모두 이 형제에게 준 글이라는 것은 그리 놀라운 일이 아니다.






vi. 어느 봉사자 형제에게 보내신 편지



2.48. 이 편지의 내용은 이 글을 작성하게 된 배경에 관하여 명확하게 말해 주고 있다. 프란치스코는 자신의 직무에서 떠나 은둔소에 가서 살기를 청한 어떤 관구 봉사자에게 이 편지를 써주었다. 이 편지를 보면 형제들이 이 봉사자 형제에게 많은 어려움을 주었던 것으로 보인다. 프란치스코는 형제애의 정신으로 대답하고 있다. 봉사자는 그의 직책에 남게 되었고 순종으로 이 결정을 받아들이게 되었다. 더구나 자신의 형제들이 자신을 박해했어도 그는 그들을 받아들였고 용서해 주었다.



2.49. 이 편지는 또한 관구 봉사자들이 형제회의 중요한 결정을 위해 소집된 성령강림 총회에 대해서 언급하고 있다. 이 총회는 매년 전 형제들이 참여하는 가운데 열렸지만 1221년 이후에는 봉사자들만이 참여하였다.



2.50. 이 편지는 “형제회의 총회에 보낸 편지”와 같이 다른 제목을 붙여 알려지기도 하였다. 에셀은 Volterra 사본에 나오는 이름인 “Epistola toti Ordini missa” 즉 “전 형제회에 보내는 편지”라는 제목을 사용하기를 선호한다. 에셀은 이 편지의 결론부에 기도문을 포함시키고 있다. 이 기도는 “Omnipotens, aeternae”(전능하시고 영원하신...)라는 말로 시작하는데, 에셀은 이것을 포함시키는 것은 아시시 사본에 이 기도가 들어 있기 때문이다.



2.51. 이 편지는 프란치스코의 생애 말년쯤에 있는 형제회의 상황을 언급해 주고 있다. 1224년에 나온 “Quia popularies tumultus”라는 칙서는 형제회가 작은 경당을 가질 것과 성체를 모실 것을 허락해 주었다. 이 칙서는 1220년의 “Sane cum olim” 선언문과 함께 프란치스코에게 성체성사와 사제직의 품위에 대해서 마땅한 존경심을 가질 것을 말하도록 하는 계기를 제공해 주었다. 이 편지는 또한 프란치스코가 교회의 규정에 따라 성무일도를 바치는 규정을 충실하게 지켰다는 것을 드러내 주고 있다.



viii. 백성의 지도자들에게 보내신 편지



2.52. 루가 와딩이 이 편지를 1579년에서 1587년까지 형제회의 총봉사자로 일했던 Francisco Gonzaga OFM의 글에서 발견하였다. 와딩은 자신의 연구서 “De Origine Seraphicae Religionis Franciscane”, Venice, 1603, p. 806에서 Gonzaga가 형제회의 첫 총봉사자였던 요한 Parenti(1227-1232)가 스페인에서 이 편지의 사본을 가져왔다고 말했다고 한다. 이 편지의 신빙성은 이 편지 내용에 대해서 언급하고 있는 보호자 형제들에게 보내신 두 번째 편지에 의해서 증명된다.



2.53. 이 편지에서 프란치스코는 이태리의 자치행정부 지도자들에게 말하고 있으며, 그들이 그리스도인으로 가지고 있는 의무에 대해서 상기시켜 주고 있다. 그는 특별히 하느님을 찬미하는 방법을 사람들에게 제공해 줄 의무가 그들에게 있다는 것을 상기시켜 주고 있고 시민들이 훌륭한 그리스도인으로 살도록 살펴볼 의무가 있다는 것을 상기시켜 주고 있다. 프란치스코의 삶에 있었던 여러 가지 예들을 보면, 우리는 프란치스코가 리보토르토에서 오토 4세에게 전한 메시지의 경우와 성탄절에는 가난한 사람들에게 풍부한 음식을 제공해 줄 것을 바랬던 것, 그리고 에집트에서 술탄과 만났던 예에서 볼 수 있듯이 정치 지도자들과 관계를 맺고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2.54. 프란치스코가 1220년/1221년에 갔었던 동방 지역에서 체험한 이슬람 전통인 “muezzin”이라는 “salat”에서 아이디어를 얻어 정치 지도자들에게 하느님 찬미를 위해 어떤 표시(예를 들어 종을 침으로써)를 해줄 것을 요구했다는 것은 있음직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