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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 예수님
차별 받던 갈릴리에서 출생
악마 유혹 물리치고 성자로
마태·마가·누가·요한 4복음서에 행적 기록
성경 속 동방박사는 조로아스터교 제사장
30세에 침례 받고 광야에서 금식 기도
출생과 성장
예수님에 대한 기록은 성경에 나오는 네 가지 복음서(마태, 마가, 누가, 요한) 이외에는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따라서 학자들 중 그의 역사성 자체를 부인하는 사람들도 있다. 일단 이 사복음서에 의존해서 예수님의 생애와 가르침을 알아볼 수밖에 없는 셈이다. 사복음서 중 마태복음과 누가복음에서만 예수님의 출생에 대한 이야기가 나온다. 이 두 복음서의 기록이 서로 상충해서 예수님의 출생연대를 정확하게 알 수는 없다. 그러나 마태복음의 기록을 그대로 따르기로 할 경우, 예수님의 출생연대가 대략 기원전 4년경이었으리라 보고 있다.
예수님의 출생을 이야기하고 있는 마태복음과 누가복음이 공통적으로 말하고 있는 것은 그의 어머니 마리아가 약혼만 한 처녀 상태에서 성령으로 임신을 했다는 것과 그가 예루살렘에서 멀지 않은 베들레헴이라고 하는 곳에서 태어났다고 하는 것이다. 마리아의 약혼자는 목수 요셉이었다고 한다.
마태복음에 의하면 아기가 태어났을 때 동방에서 별을 보고 ‘동방 박사’들이 선물로 ‘황금과 유향과 몰약’을 가지고 아기를 경배하러 찾아왔다고 한다. 여기서 동방박사들이란 조로아스터교의 제사장들이었으리라 짐작할 수 있다. 천사가 요셉의 꿈에 나타나 그 당시 왕 헤롯이 아기를 죽이려 하니 아기와 어머니를 데리고 이집트로 피신하라고 일러주었다는 것이다.
이집트로 간 세 식구는 헤롯이 죽기까지 거기서 살다가 헤롯이 죽고 갈리리 지방 나사렛이라는 동네로 가서 살게 되었다. 20세기 최대의 그리스도교 사상가 중 하나로 여겨지는 토마스 머튼(Thomas Merton)은 이 이야기를 문맥 그대로 받아들인다면 예수님과 그 부모들이 이집트로 가서 동방박사들이 가져단 준 선물을 팔아 생계를 이어갔으리라 볼 수 있다는 이야기가 되는데, 그리스도교 시작에 ‘동방에서부터의 선물’이 이처럼 중요했던 것처럼 2천년이 지난 오늘 다시 그리스도교에 동방으로부터의 선물이 필요하다고 보고 이 선물이 바로 선불교나 노장철학과 같은 동양의 정신적 유산이라 보았다.
누가복음에는 이야기가 조금 다르다. 아기가 태어나던 밤, 들에서 양을 치던 목자들이 천사들의 기별을 받고 아기를 찾아와 구유에 누인 아기를 경배했다. 태어난 아기는 규례대로 예루살렘에 올라가 성전에서 봉헌식을 치루었다.
예루살렘에 시므온이라는 경건한 사람이 있었는데, 성령의 감동으로 성전에 들어가 아기가 오는 것을 보고 받아 안고 “주님, 이제 주님께서는 주님의 말씀에 따라, 이 종을 세상에서 평안히 떠나가게 해주십니다. 내 눈이 주님의 구원을 보았습니다. 주님께서 이것을 모든 백성 앞에 마련하셨으니, 이는 이방 사람들에게는 계시하시는 빛이요, 주님의 백성 이스라엘에게는 영광입니다.”(2:29-32)하는 말을 했다. 부처님이 태어났을 때 아시타 선인이 아기에게 와서 한 말을 연상하게 하는 대목이다.
예수님이 갈릴리에서 자라나 갈릴리 사람이라는 것은 사복음서 모두가 공통적으로 이야기하고 있다. 갈릴리는 정통 유대인들로부터 차별대우를 받는 곳이었다. 예수님의 성장기에 대한 이야기는 누가복음에 잠깐 언급된 것 이외에 없다.
누가복음에 보면 그가 열두 살 때 부모와 함께 예루살렘 성전으로 유월절을 지키러 갔다가 부모가 집으로 가는 것도 모르고 성전에 남아서 종교 지도자들과 『토라』에 대해 토의를 했는데, “모두 그의 슬기와 대답에 경탄하였다”(2:47)는 것이다. 길을 가다가 그를 찾으러 되돌아 온 어머니 마리아를 보고 예수님은 “어찌하여 나를 찾으셨습니까? 내가 내 아버지의 집에 있어야 할 줄을 알지 못하셨습니까?”했다.(2:49) 예수님은 “지혜와 키가 자라고, 하느님과 사람에게 더욱 사랑을 받았다.”고 한다.(2:52)
침례와 시험
세계 종교사적으로 그렇게도 중요한 그 ‘30세’가 되어 예수님은 침례 요한에게 가서 침례를 받았다. 그 당시는 물을 뿌리거나 바르는 ‘세례’가 아니라 전신이 요단강 강물에 잠기는 ‘침례’였다. 예수님도 물에 잠겼다 올라오는데, 하늘이 갈라지고 성령이 비둘기처럼 내려오는 것을 보게 되고, 또 하늘에서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는 소리를 들었다. 영적 눈과 귀가 열린 체험이라 할 수 있다.
침례를 받은 후 곧 성령의 인도함을 받아 광야로 나가 40일간 금식과 기도로 시간을 보냈다. 40일이 지난 후 예수님이 사탄의 시험을 받았다고 한다. 마태복음과 누가복음에는 그 시험이 세 가지였다고 하는데, 둘째와 셋째 시험의 순서가 각각 다르다. 마태복음의 순서대로 하면 첫째 시험은 사탄이 와서 예수님에게 하느님의 아들이거든 돌들을 떡덩이로 만들라는 것이었다. 예수님은 “사람이 빵으로만 살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 것이다.”(마4:4)하는 히브리 성경의 말씀으로 이 유혹을 물리쳤다.
둘째는 예수님을 성전 꼭대기에 세우고 하느님의 아들이거든 아래로 뛰어내리라는 것이었다. 예수님은 “주 너의 하느님을 시험하지 말아라.”는 말씀으로 이 시험도 이겼다. 셋째는 사탄이 예수님을 산꼭대기로 데리고 가 천하만국과 그 영광을 보여주고 자기에게 엎드려 경배하면 이 모든 것을 주겠다는 것이었다. “주 너의 하느님께 경배하고, 그분만을 섬기라”는 말씀으로 사탄을 물리쳤다.
이 시험을 요즘 말로 고치면, 순서에 따라 경제적, 종교적, 정치적 유혹이라 할 수 있다. 예수님이 이런 유혹을 모두 물리쳤다고 하는 것은 참된 종교의 목적이 돌을 떡으로 만드는 것처럼 경제적인 이득을 추구하는 것도, 성전 꼭대기에서 뛰어내려도 다치지 않는 것 같은 초능력을 발휘하는 것도, 막강한 영광과 권위로 세상을 휘어잡고 세상에 군림하는 것도 아니라는 뜻이다.
예수님의 삶에서 침례와 시험이라고 하는 이 두 가지 사건에 대한 이야기는 그에게 궁극 실재와의 새로운 관계에서 가능한 ‘의식의 변화’(transformation)를 가져다 준 체험이 있었다는 것을 시사해주는 이야기라 볼 수 있다. 이런 ‘특수 인식능력의 활성화’를 통해 지금까지의 일상적 세계관이나 가치관에서 완전히 ‘비보통적인’ 것으로 바뀌는 체험이다. 이제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오 ‘말씀(로고스)’ 곧 우주와 삶의 참다운 ‘뜻’으로 살게 되는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예수님도 ‘깨치신 분’ 곧 ‘성불하신 분’이라 볼 수는 없을까? 예수님 뿐 아니라 종교사를 통해서 볼 때, 붓다를 위시하여 무함마드나 최제우 등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위대한 종교 지도자들은 이런 특수 체험을 통해 새로운 의식과 확신으로 거듭 나게 되고, 이런 일이 가능한 후에 그 체험을 행동으로 옮겨 사람들을 가르치기 시작했음을 발견하게 된다.
“최후 심판 척도는 타인에 대한 자비와 섬김”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웠느니라”가 최초 기별
“神 위주 유대교 비판… 사람 중심의 사랑 역설
“창녀 등 차별받는 이들과 평등의 밥상공동체
예수님은 침례와 시험을 받은 후 갈릴리로 돌아가 외치기 시작했다. 마태복음에 의하면 가장 처음 외친 복음이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웠느니라”(4:17)하는 것이었다. 말하자면 제1차 전법륜(轉法輪)이었던 셈이다. 그러나 사실 이것은 예수님의 최초의 기별이자, 중간의 기별이며, 또한 끝의 기별, 그야말로 초지일관(初志一貫)된 기별이었다. 대부분의 학자들은 이 기별이 예수님이 가르친 복음의 핵심이었다는데 동의한다.그러나 이 기별의 참된 뜻이 뭔가 하는데 대한 해석은 학자들마다 다르다. 19세기말부터 20세기 초반까지 많은 신학자들은 예수님이 가르친 이 기별의 뜻을 푸는데 그들의 관심을 집중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크게 두 가지로 나누면 첫째, 예수님이 자기 당대에 세상 끝이 이를 것으로 믿고 거기에 따라 말하고 행동하고 가르쳤다는 주장과 둘째, 예수님은 그의 제자들을 비롯해 그 당시 많은 사람들과 달리, 미래에 올 별도의 종말을 기다리지 않고, 자신의 등장과 활동으로 천국이 이미 실현된 것으로 보았다는 입장이다.나중에 이야기하겠지만 예수님은 천국을 내 속에 있는 신성(神性)이나 나의 본성(本性)을 의미하는 것으로 가르쳤다고 보는 이들도 있다.
아무튼 예수님은 ‘천국 복음’을 가르치며 대략 3년 정도를 보냈다. 부처님이 45년간 가르치신 것에 비하면 너무나 짧은 기간이었다. 예수님은 자기의 말을 받아들이는 열 두 제자들을 모았다. 그 중에는 특히 어부들이 많았다. 열둘이란 이스라엘 열 두 지파를 상징하는 숫자라 할 수 있다. 베드로와 그의 형제 안드레, 요한과 그의 형제 야고보 등 열 두 남성 제자들 이외에도 그 유명한 막달라 마리아 등 그를 따르는 여자들도 많이 있었다.
그는 그를 따르는 사람들에게 천국의 건설을 위해 세상적인 것들에 집착하지 말하라고 가르쳤다. 부자가 천국에 들어가는 것은 낙타가 바늘구멍으로 들어가는 것과 같다고 하고 모든 것을 하느님께 맡기면 하느님이 돌보시리라고 하였다.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입을까’ 염려할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공중의 나는 새나 들의 백합화처럼 특별히 스스로를 위해 애쓰지 않아도 하늘 아버지께서 다 먹이시고 입히시는데, 이보다 훨씬 귀한 너희 인간들일까 보냐 하는 생각이었다. 하느님의 사랑에 대한 철두철미한 신뢰에서 오는 느긋함 아닌가. 도의 흐름을 신뢰하고 스스로를 거기에 맡기라는 노자(老子)의 무위자연(無爲自然)을 연상하게 하는 말씀이다.
복음서에 의하면 예수님이 가르칠 때 많은 ‘기적’을 행하였다고 한다. 물을 포도주로 만든다든가 나병환자나 눈먼 자, 혈우병 앓는 여인 등 병자들을 고친다든가 귀신을 쫓아낸다든가 죽은 사람을 살린다든가 물위를 걸어 다닌다든가 광풍을 잔잔하게 한다든가 떡 다섯 덩이와 생선 두 마리로 5천명을 먹인다든가, 열매 맺지 않은 무화과나무를 저주해서 말라 죽게 한다던가 하는 것들이다.
복음서에서는 이런 것들이 새로 임할 왕국의 징조(표적과 기사, signs)라 하였다. 물론 이런 일을 문자적이고 역사적 사건으로 보기보다 상징적, 은유적으로 보는 그리스도인들도 많다.예수님의 가르침은, 거의 모든 종교 지도자들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그 당시로서 가히 ‘파격적’(subversive)이었다. 그는 특히 유대교를 형식적이고 위선적인 종교로 변질시킨 종교지도자들을 ‘회칠한 무덤’이라든가 ‘독사의 자식’이라는 등의 말로 신랄하게 비판했다.
나아가 그 당시 유대인들이 모두 히브리 성서 『레위기』의 명령에 따라 하느님이 거룩한 것처럼 거룩해야 한다는 ‘정결제도’(purity system)를 가장 중요한 가르침으로 삼고 거기 매여 있을 때, 예수님은 “너희의 아버지께서 자비로우신 것 같이, 너희도 자비로운 사람이 되어라.”고 하는 ‘자비’의 가르침을 그의 중심 가르침으로 삼았다. 율법을 둘로 요약하면 ‘하느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내 몸과 같이 사랑하는 것’이라고 했다. 경천애인(敬天愛人)이다.그는 병든 사람, 죽은 사람, 피 흘리는 사람, 불의한 사람, 천한 사람 등은 불결한 사람, 부정 타는 사람들로 취급되어 기피 대상이었던 그 당시 제도에 구애받지 않고, 나병 환자, 죽은 사람, 혈우병 앓던 여인 등 누구라도 그의 도움을 필요로 하는 사람들과 함께 하는 일을 마다하지 않았다.
사회적 위치, 인종, 종교에 따라 누가 의로우냐 거룩하냐 깨끗하냐 바르냐 하는 것 등이 사람을 대할 때 따져보는 표준이었던 그 당시 사회에서 그는 이런 차별과 장벽을 허물고, 오로지 누가 고통을 당하느냐 하는 것 하나를 표준으로 삼고 고통당하는 사람들과 스스로 고통을 함께 하는 ‘자비’를 실천하고 가르쳤다.‘자비’에 해당되는 영어 ‘com passion’이 어원적으로 ‘아픔을 함께 한다’는 의미라면, 예수님은 실로 이런 ‘자비’의 스승이었다. 그의 ‘밥상 교제’(table fellowship)는 창녀나 세리 등 그 당시 부정 탄다고 천시되고 기피되던 사람들을 포함하여 모든 계층의 사람들이 모두 참여할 수 있었던 밥상 공동체였다.
예수님에게는 제도나 규례 같은 것 자체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무엇보다 사람이 우선이었다. 제도나 규례가 사람을 위한 것이 아니라면 그 자체로는 의미가 없는 것이라고 보았다. “안식일이 사람을 위하여 생긴 것이지, 사람이 안식일을 위하여 생긴 것이 아니라”고 한 그의 말에서 그의 이런 태도가 단적으로 나타나 있다.그는 인간이 맞게 될 최후의 심판에서도 이처럼 정결하냐 거룩하냐에 근거한 제도나 규례를 성실히 따랐느냐 하는 따위 외부적인 표준과 상관이 없이 ‘사람들이 주릴 때에 먹을 것을 주고, 목마를 때 마실 것을 주고, 나그네 되었을 때 영접하고, 벗었을 때 옷을 입히고, 병들었을 때 돌아보고, 옥에 갇혔을 때 와서 보는’ 등 얼마나 사람들에게 자비를 베풀고 잘 섬겼느냐 하는 것이 판단의 기준이 된다고 하였다.
스스로에 대해서도 자기는 섬김을 받으러 온 것이 아니라 섬기러 왔다고 했다. 이렇게 자기를 낮추고 남을 섬기는 자세를 그는 그의 제자들의 발을 친히 씻어주는 것으로 실증했다. 이런 사랑과 자비와 동정의 가르침이 물론 보통 인간으로서는 현실적으로 실천 불가능한 일이다. 예수님도 “사람으로는 할 수 없으되 하나님으로는 다 하실 수 있느니라”라고 하였다. 인간 내면의 의식에 획기적인 변화가 있을 때 가능하다는 뜻이다. 그의 가르침을 실천하는 것이 결국 윤리적인 단계를 넘어서는 종교적 차원임을 말하고 있는 셈이다.
특히 주목할 만한 사항은 예수님이 하느님을 ‘아바’라고 불렀다는 것이다. ‘아바’는 ‘아버지’보다 더욱 친근한 말로서 그가 하느님과 관계를 어떻게 파악했던가 하는 것을 가장 잘 보여주는 사례라 할 수 있다. 물론 ‘아바’라고 불렀다고 해서 반드시 인격신을 상정했다고 단정할 필요는 없다. 궁극실재는 인격적이냐 비인격적이냐 하는 범주를 넘어서는 것이지만, 인간으로서는 그 궁극실재와 ‘인격적 관계’를 가지는 것이 가장 실감나는 일이기 때문에 이처럼 인격적 관계를 가질 수 있기 때문이다.
예수님은, 그 당시 유대인 랍비(선생) 전통에 따라, 가르치면서 ‘비유’(譬喩, parables)를 많이 사용했다. 비유는 가르침의 핵심을 짧은 이야기로 표현하는 방법으로서 사람들이 그것을 오래 기억할 수 있게 할 수 있을 뿐 아니라 그 핵심을 스스로 더욱 깊이 생각하고 자기 자신의 해답을 찾도록 도와주는 특징을 가지고 있다.
그가 말한 비유 중 많이 알려진 것으로 탕자의 비유,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 씨 뿌리는 자의 비유 등이 있다. 탕자의 비유에서 어느 부자 아버지에게 두 아들이 있었는데 작은 아들이 아버지로부터 받을 유산을 미리 달라고 하여 먼 나라로 가 허랑방탕(虛浪放蕩)하며 돈을 다 쓰고 돼지 밥으로 배를 채우다가 ‘참 자기에게 돌아오게 되자’ 일어나 아버지 집으로 돌아가니 아버지가 뛰어 나와 옷을 입히고 자기 반지를 빼서 그에게 끼워주는 등 ‘무조건적인 사랑’으로 그를 받아주었다는 이야기이다.
십자가 죽음은 인간에 대한 지고한 신의 사랑
예수님이 한 번은 제자들과 함께 갈릴리 북쪽에 있는 가이사라 빌립보라고 하는 곳으로 갔다. 거기서 제자들에게 “사람들이 나를 누구라 하느냐”고 물었다. 제자들이 ‘침례 요한, 엘리야, 예레미야, 혹은 선지자 중 하나’라 하더라고 대답했다. 그러자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고 다시 물었다. 성질이 급한 베드로가 제일 먼저 “주는 그리스도(메시야)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고 대답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이 말을 “아무에게도 이르지 말라”고 경계했다.예수님이 자기가 메시야임을 스스로 인지하거나 받아들였을까 하는 문제는 신학자들 사이에 논쟁점이 되고 있다.
예수님은 그러나 자기가 예루살렘에 올라가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많은 고난을 받고 죽임을 당하고 제 삼일에 살아나야 할 것’이라 말했다. 그러자 베드로가 예수님에게 권세와 영광으로 나타날 메시야가 어떻게 고난을 받을 수 있겠느냐며 결코 그럴 수 없다고 했다. 예수님은 베드로를 향하여 그가 할 수 있는 최대의 욕을 하였다.
“사단에 내 뒤로 물러가라!” 그 이유는 베드로가 ‘하나님의 일’ 대신에 ‘사람의 일’을 생각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하였다. 하나님의 일이란 자기를 잊어버림이요, ‘사람의 일’이란 자기중심적으로 생각함을 의미하는 것이리라. 예수님이 스스로 고난을 받을 것이라 한 것도 자기를 완전히 잊고 오로지 거룩한 목적을 위해 자기를 바칠 각오가 되어 있다는 뜻일 것이다.바로 이 말에 이어서 예수님은 그의 가르침에서 가장 중요한 것 중의 하나라 할 수 있는 다음과 같은 발언을 하였다.
“아무든지 나를 따라 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 오너라. 누구든지 자기 목숨을 구하고자 하는 사람은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나 때문에 자기 목숨을 잃는 사람은 찾을 것이다.”(마태복음16:24~25)예수님을 따른다는 것은 자기를 부인하는 것(self-denial)이요 이를 다른 말로 하면 십자가를 지는 것, 자기의 썩어질 자아를 십자가에 못 박는 것이라는 뜻이다. 작은 자아(self)를 구하면 큰 자아(Self)는 잃어버리고, 작은 자아를 버리면 큰 자아를 찾을 것이라는 종교적 역설을 강조하고 있다. 이렇게 큰 자아를 위해 작은 자아를 버리는 것이 독일 신학자 본훼퍼가 말하는 ‘제자 됨의 값’(cost of discipleship)이라 할 수 있다. 불교의 무아(無我) 사상을 상기시킨다.
이런 고백이 있은 후 예수님은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을 데리고 높은 산에 올라갔다. 예수님은 제자들 앞에서 변형이 되어 그 얼굴이 해같이 빛나고 옷이 빛과 같이 희어졌다. 다시 하늘에서 소리가 나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니 너희는 저의 말을 들으라”는 소리가 났다. 이 때문에 이 산을 나중에 ‘변화산’이라고 부른다.
영적으로 어느 단계에 도달한 사람은, 모세나 붓다의 경우처럼, 이렇게 얼굴에서 빛이 나는 것으로 묘사되는 것이 보통이다. 부처님 상에 빛이 퍼지는 모양이나 불꽃이 그러진 것이나 그리스도교 성화에 예수님의 머리 둘레로 후광(halo)이 나타나 있는 것도 이런 사실과 관련된 것이 아닐까 생각해 볼 수 있을 것이다. 힌두교에서는 인간에게 있는 일곱 개의 ‘에너지 센터(차크라)’ 중 여섯 번째 이마에 있는 것이 열리면 빛을 발한다고 가르친다.
이런 일이 있은 다음 예수님은 제자들과 그를 따르던 여자들을 데리고 예루살렘으로 길을 떠났다. 예수님은 고난을 받기 위해 가는 길이지만, 제자들은 “누가 크냐?”를 가지고 논쟁을 했다. 예수님이 왕으로 등극하는 날 누가 재무장관이 되고 누가 외무장관이 되는가 하는 것을 가지고 격론을 벌린 셈이다. 노자님이 “나를 이해하는 사람이 이렇게도 드믄가” 한탄하고, 공자님이 “아, 아무도 나를 이해하지 못하는구나... 하늘밖에 없구나.” 아타까워 하며 다른 이들이 자기들의 심원한 뜻을 이해하지 못했을 때 느꼈던 그 ‘실존적 고독’을 예수님도 똑 같이 느꼈을 것이다.
그 때는 유대인들의 큰 절기인 유월절이었는데, 예루살렘은 각지에서 몰려온 사람들로 분주했다. 모두 이 절기에 메시야가 나타나지 않을까 하는 기대감으로 부풀어 있었다. 그 중에는 예수님을 메시야로 알고 영접하는 사람도 많았다. 그들은 나귀를 타고 들어가는 예수님을 향해 종려나무 가지를 흔들며 “호산나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하며 환호하였다.
이른바 ‘예루살렘 입성’이었다. 예수님은 예루살렘 성전에 들어갔다가 성전 안에서 장사하는 자들을 쫓아내고 환전상의 상과 제물로 쓰일 비둘기들을 파는 자들의 의자를 둘러엎었다. 제물을 팔아 이권을 챙기던 그 당시의 제사 제도에 대한 심각한 도전이었다.
목요일 저녁, 제자들과 어느 집 다락방에서 이른바 ‘최후의 만찬’을 가졌다. 손수 제자들의 발을 씻어준 다음, 떡과 포도주를 나누어주며, 이것이 그의 살과 피니 받으라 하고, 이것으로 그를 기억하라고 하였다. 이 이야기가 그리스도인들이 지금까지 ‘성만찬’ 혹은 ‘성찬’을 거행하는 이유이다. 가톨릭에서는 이것을 ‘미사’라 한다.
만찬이 끝나고 모두 감람산 겟세마네 동산으로 갔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깨어 기도하라고 이르고, 거기서 ‘돌 던질 만큼’ 거리에 가서 홀로 기도했다. 이때의 기도가 그 유명한 기도, “내 아버지여 만일 할 만하시거든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하는 기도였다. 제자들은 그 시간을 견디지 못하여 잠을 잤다. 얼마 후 예수님의 제자 가룟 유다의 안내를 받은 ‘큰 무리가 검과 몽치를’ 가지고 나타나 예수님을 잡아갔다. 물론 최근에 발견된 유다복음에서는 유다가 배신자가 아니라 예수님의 부탁을 받고 이런 일을 했다고 되어 있다.
유대 대제사장 가야바는 예수님을 죽이기로 마음먹고 그를 로마 총독 빌라도에게 넘겨주었다. 빌라도는 여기서 역사적으로 가장 유명한 질문을 했다. “진리가 무엇이냐?” 예수님이 이 질문에 대답을 했다는 기록이 없다. 복음서의 주장에 의하면 빌라도는 명절 때마다 죄수 한 명을 사면하는 관례에 따라 예수님을 풀어주려고 했지만 유대인들이 반대하며 오히려 민란을 꾸미다가 잡혀온 바라바를 그 대신 방면하라고 요청했다는 것이다.
복음서에 나오는 이 간단한 한 구절이 결국 예수님을 죽인 것이 로마의 식민지 세력이 아니라 유대인 자신이라는 생각을 뒷받침하는 빌미를 제공하게 되었고, 이 생각이 서양 역사를 통해 그리스도인들의 반유대교적 정서를 부추기는 근거로 작용하였다. 예수님의 고난을 묘사한 멜깁슨의 영화 〈패션오브크라이스트(The Passion of the Christ)〉에도 예수님의 죽음이 유대인들의 책임인 것처럼 나와 논란을 일으키기도 했다.아무튼 복음서 기록에 의하면 예수님은 결국 유대인들이 원하던 대로 사형선고를 받고, 다음 날인 금요일 아침 골고다라고 하는 언덕으로 끌려가 십자가 형틀에 달려 죽음을 당했다고 한다.
십자가에 위에서 한 ‘일곱 가지 말’ 중에서 가장 많이 알려진 것은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하는 것이다. 이 말은 시편(22:1)에 나오는 말로 하느님에 대한 절대적 신뢰를 나타내는 것이었다. 복음서에 의하면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릴 때 ‘해가 빛을 잃고 온 땅에 어두움’이 내리고, ‘성소의 휘장이 한가운데가 찢어지는’ 일이 있었다. 부처님 입멸 때 큰 지진이 나고 엄청난 천둥소리가 들렸다고 하는 것과 맞먹는 대목이다. 아무튼 정통 그리스도인들은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이야 말로 인간에 대한 하느님의 사랑이 가장 극명하게 드러난 사건으로 여기고 있다.
복음서에 의하면 금요일 해지기 전에 부자 아리마대 요셉이 빌라도의 허락을 받고 예수님의 시체를 내려 세마포로 싸고 일단 자기를 위해 준비했던 무덤으로 옮겼다. 이때 예수님의 시신을 쌌던 세마포(linen shroud)가 2006년 동계올림픽이 열렸던 이탈리아 투리노에 보관되어 있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다. 아무튼 일요일 아침 예수님을 따르던 여자들이 예수를 정식으로 장사하기 위한 준비로 예수님의 몸에 기름을 바르기 위해 무덤에 가보니 무덤을 막고 있던 큰 돌이 옆으로 비켜져 있고 무덤은 비어있었다.
예수님이 ‘부활’을 한 것이다. 사복음서가 부활사건에 대하여 각각 다른 이야기를 하기 때문에 그 정확한 정황을 파악하기가 힘들다. 그러나 복음서에서 한 가지로 강조하는 사실은 예수님이 죽음을 이기고 부활했다는 그 ‘확신’이 절망 중에 있던 제자들과 그를 따르던 사람들에게 용기와 활력을 불러일으키는 결정적 요소가 되었다는 것이다.
이렇게 부활한 예수님이 어떻게 되었는지 복음서 초기 사본에는 분명한 언급이 없고, 사도행전에 보면 부활 후 40일 만에 제자들이 보는 앞에서 하늘로 들려 올라가 구름에 싸여 보이지 않게 되었다고 했다. 제자들이 하늘을 쳐다보고 있는데, 갑자기 흰 옷을 입은 두 사람이 그들 곁에 서서 “갈릴리 사람들아, 어찌하여 하늘을 쳐다보면서 서 있느냐? 너희를 떠나서 하늘로 올라가신 이 예수는, 하늘로 올라가시는 것을 너희가 본 그대로 오실 것이다”고 했다. 이것이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아직도 예수님의 다시 오심, 곧 ‘재림’을 기다리고 있는 이유이다.
이상이 현존 4복음서 기록에 기초한 예수님의 삶과 가르침과 행적의 대략이라 할 수 있다. 다시 한 번 기억할 것은 이 복음서들에 나타나는 이런 예수님 상과는 사뭇 다른 예수님에 대한 이해가 그리스도교 초기에도 있었고 역사를 통해 언제나 있었고, 지금도 있다고 하는 사실이다. 다음 회에는 여기에 대해서 이야기해 보기로 한다.
이제까지 예수님의 출생, 성장, 시험, 갈릴리에서의 활동과 가르치심, 고난과 죽음, 부활, 승천, 재림 등을 성경에 포함된 4복음서 기록에 기초하여 대략 살펴보았다. 그런데 다시 한 번 강조하고 싶은 것은 이 4복음서에 나온 이런 이야기들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하는 문제는 간단한 것이 아니라고 하는 것이다.
또 예수님의 삶과 가르침을 말해주는 복음서가 지금 4복음에 포함되지 않은 복음서들에도 나타나 있다고 하는 사실이다. 예수님에 대한 글을 마치기 전에 여기서는 복음서에 나오는 예수님의 가르침이 어떻게 다른 시각, 다른 차원에서 이해될 수 있는가, 그리고 4복음 이외의 복음이란 무엇이고 거기서 말하는 예수님은 어떤 분인가 하는 문제에 대해 잠시 이야기하고자 한다.
무비판적 성경 읽기는 비극
성경을 오로지 문자적으로만 이해하려는 자세를 ‘근본주의적 태도’라 한다. 이런 근본주의적 태도는 사실 종교의 더욱 깊은 뜻을 이해하는데 가장 큰 걸림돌이라 할 수 있다. 20세기 가장 위대한 신학자 중 하나인 폴 틸리히가 적절히 지적한 것처럼, “성경을 문자적으로 읽으면 심각하게 받아들일 수 없고, 심각하게 받아들이려면 문자적으로 읽을 수 없다.”는 것은 진실이다. 이런 근본주의적 문자주의는 어느 종교에나 거의 보편적으로 발견되는 현상이지만 특히 유대교, 그리스도교, 이슬람에 두드러지게 나타난다고 할 수 있다.
이제 그리스도교에서는 이런 문자주의를 넘어서서 될 수 있는 대로 성경을 깊이 읽어야 한다고 믿는 사람들이 점점 많아지고 있다. 지각 있는 그리스도교 신학자들 중에는 궁극 실재나 진리는 말로 표현할 수 없으므로 말의 표피적이고 문자적인 뜻에 사로잡히지 말고 그야말로 ‘불립문자(不立文字)’의 입장을 취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이들이 많아진다는 뜻이다. 성경이나 기타 경전, 그리고 의식(儀式) 등 외부적인 것들은 결국 ‘달을 가리키는 손가락’이라고 강조하는 선불교의 가르침과 궤를 같이 하는 생각이 퍼지고 있는 셈이다.
사실 그리스도교 초기부터 지금까지 성경을 읽을 때 표피적 문자를 넘어서서 여러 가지 시각, 여러 가지 차원에서 더 깊은 의미를 찾으려는 노력은 계속되어 왔다. 그러나 4세기 로마 황제 콘스탄티누스가 정치적 의도를 가지고 그리스도교를 공인하면서 문자주의를 넘어서려는 모든 시도를 억누르게 되고 이에 따라 그 이후 1천6백년간 그리스도교에서는 문자적 성경 읽기가 교회의 주류를 이루는 비극이 초래된 것이라 볼 수 있다.
지금 서양에서는 종래까지의 근본주의적 그리스도교가 많은 이들에게 ‘반지성적, 문자주의적, 독선적, 스스로 의로운 척, 우익 정치에 무비판적으로 경도된’ 종교집단으로 여겨지기까지 하고 있다. 이런 식의 그리스도교는 받아들이기도 어렵고, 실천하기도 어렵고, 더욱이 여러 가지로 말썽을 일으키는 경향이 있다고 보고 있는 것이다. 이런 식 그리스도교에 속할 것인가 말 것인가? 이것만이 유일한 선택일까? 일단의 그리스도인들은 이런 식 그리스도교에 속하기를 거부하는 것이 바로 그리스도교를 버리는 것이라는 공식을 거부하고 제3의 선택을 하기에 이르렀다. 이 선택이 바로 ‘새로 등장하는 그리스도교’ (the newly emerging Christianity)와 함께 하는 것이다.
새로 등장하는 그리스도교와 함께 하는 사람들은 성경에 나온 예수님 말씀의 표피적, 문자적 차원의 뜻을 넘어서는 심층적, 영적 차원의 뜻을 찾으려 하는 사람들이다. 한 가지 예로 예수님의 핵심적인 기별인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느니라”(마태복음 4:17)고 하는 말씀을 심층적으로 풀이하면 어떻게 되는가 알아보기로 한다.
하느님 나라는 내게 임한 神性
우선 이 문장에서 이 ‘회개’라는 말이 무슨 뜻일까. 일반적으로 회개라고 하면 우리의 과거 잘못을 뉘우치고 새로운 삶을 살겠다고 결심하는 것쯤으로 생각한다. 그러나 회개의 그리스어 ‘메타노이아’는 ‘의식을 바꾸라’, ‘보는 법을 바꾸라’, ‘눈을 뜨라’, ‘깨치라’는 뜻이다.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웠느니라.”는 말은 그러니까 “눈을 떠서 천국이 가까이 있음을 알라.” 혹은 “우리 내면 가장 깊은 곳, 우리의 의식 자체를 바꾸라. 그러면 천국이 바로 옆에 있다는 사실을 깨달을 것이다”하는 말로 풀 수도 있다.
‘천국’이라고 하면 저 하늘 어디에 떠있을 지리적, 물질적 나라로 생각되기 쉽지만, ‘나라’ 혹은 ‘왕국’의 본래 말인 말쿠스(히브리어)나 바실레이아(그리스어)에는 영토 혹은 장소라는 뜻보다는 주권, 통치, 원리라는 뜻이 더 강하다. 영어로도 the Kingdom of God보다는 Sovereignty of God, Reign of God, Rule of God, Principle of God이라는 말을 선호하고 있다.
그러면 하느님의 나라가 어디 있다고 하는가? 표피적, 문자적 의미에 집중하는 경우 하느님나라, 혹은 천국은 하늘 어디에 붕 떠 있고, 우리가 죽어서 가는 곳, 혹은 예수님 재림 때 이 땅으로 임할 곳 등, ‘장소’로 생각하게 된다. 물론 이런 식으로 믿어서 안 된다는 것은 아니나 ‘하느님 나라’의 더욱 깊은 뜻을 알아보기 위한 우리의 노력을 멈추어서는 안된다.
우선 예수님 스스로도 “하느님의 나라는 볼 수 있게 임하는 것이 아니요 또 여기 있다 저기 있다고도 못하리니 하느님의 나라는 너희 안에 있느니라”(눅17:20, 21)고 하였다. 예수님의 이 말씀은 ‘하느님의 나라’라는 것이 우리 ‘중에’, 혹은 우리 ‘속에’ 이미 있는 것임을 주목하라는 말씀이다. 이런 뜻에서 이 하느님 나라란 바로 우리 안에 있는 하느님의 주권, 하느님의 힘, 하느님의 원리, 하느님의 임재, 하느님의 일부를 가리키는 것이라 보아 틀릴 것이 없다. 영어로 ‘God within’이다. 바울 같은 이는 이를 ‘내속의 그리스도(the Christ within)’라 했다.
천국 복음, 참나 찾으라는 뜻
그 천국이 ‘가까이 왔다’는 것은 무슨 뜻일까. 일반적으로 ‘가까이 왔음’을 ‘시간’의 개념으로 생각했다. 그래서 예수님이 하신 이 말을 두고, 예수님은 천국이 이미 임한 것으로 가르치신 것인가? 혹은 그의 생전에 곧 임할 임박한 것으로 가르치신 것인가? 혹은 이미 임했지만 아직 완성된 것은 아니라는 이중적인 뜻으로 가르치신 것인가? 하는 등 ‘언제’의 문제로 논전을 계속했다. 그러나 우리는 여기서 하느님나라의 가까움을 시간의 개념이 아니라 ‘거리’, ‘공간’, ‘어디’의 개념으로 받아들일 수 있다. 영어로 ‘at hand’라는 번역이 더 실감난다. ‘손 가까이 있다’고 하는 말이다. 하느님의 나라는 시간적으로 어느 때쯤에 올 것인가 하는 문제가 아니라 공간적으로 바로 내 손닿는 지근(至近) 거리에, 내 속에, 있다는 뜻으로 이해하는 것이 좋다는 뜻이다.
복음서에 보면 예수님이 우리를 보고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마6:33)고 했다. ‘먼저’라는 것을 보면 인간으로서 우리가 해야 할 최우선 과제가 바로 하느님의 나라를 구하는 것이라 볼 수밖에 없다. 그런데 앞에서 본 것처럼, 하느님의 나라가 ‘우리 안에’ 있다고 하셨으니 우리는 당연히 우리 안을 들여다보고 거기 있는 하느님의 나라를 찾아야 할 것이다. 내 안에 있는 하느님 나라, 그것이 좀 더 구체적으로 무엇이겠는가? 여기서 우리는 그것이 바로 내 속에 있는 하느님의 현존, 내 속에 있는 하느님의 일부분, 내 속에 들어있는 신적 요소, 내 속에 임해 계시는 하느님 자신이라 볼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내 속에 계시는 하느님이 나의 바탕, 나의 근원이란 뜻에서 그 하느님은 결국 나의 ‘참나’이기도 하다는 것이다. 따라서 하느님의 나라를 찾는 것은 궁극적으로 나의 가장 깊은 차원의 ‘참나’를 찾는 것과 같은 것이다. 다석 유영모 선생님의 말을 빌리면, 나의 일상적이고 이기적인 ‘제나’가 아니라 나의 참된 나, ‘얼나’를 찾는 것이다. 신학자 폴 틸리히의 말, 하느님을 ‘높이’에서 찾을 것이 아니라 ‘깊이’에서 찾아야 할 것이라는 말이 이런 의미에서 의미심장한 말이라 보아야 한다.
물론 우리가 잘 알고 있는 것처럼, “내 속에 불성이 있다”고 하는 것을 강조하는 불교의 불성(佛性) 사상도 이와 맥을 같이 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불성 사상보다 좀 더 시각적으로 구체적인 표현이 바로 ‘여래장(如來藏, tathgatagarbha)’ 사상이다. ‘장(garbha)’이라는 말은 ‘태반(matrix)’과 ‘태아(fetus, embryo)’라는 이중적인 뜻을 가지고 있기에 우리는 모두 생래적으로 여래 곧 부처님의 ‘씨앗’과 그 씨앗을 싹트게 할 ‘바탕’을 함께 내장하고 있다는 뜻이다. 이런 의미에서 예수님이 말하는 ‘천국 복음’도 결국 세계 여러 종교의 신비주의 전통과 궤를 같이 하여 내 속의 참 나, 진아(眞我)를 찾으라는 말이라 보아 지나칠 것이 없을 것이다.
부처님이 출생하자 말자 “천상천하 유아독존(天上天下唯我獨尊)”이라고 했다는 말이나 예수님이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라고 한 말에서 그 ‘나’라는 것도 결국 역사적 고타마나 역사적 예수를 지칭하는 것이라 보기보다 우리의 바탕이 되는 ‘참나’를 가리키는 말로 이해할 수 있다는 것이다.
도마복음 가르침 선불교와 비슷
1945년 이집트 나그함마디(Nag Hammadi)라는 곳 땅 밑에서 항아리에 담긴 채 묻혀 있던 52종의 문서를 발견하게 되었는데, 거기에 성경 4복음에 속하지 않은 복음서들이 여러 가지 나왔다는 것이다. 그 중 가장 잘 알려진 것이 「도마복음」으로, 여기에 등장하는 예수님은 철두철미 우리 보고 우리 속에 있는 천국, 참 나를 발견하는 ‘깨침(gnosis)’을 얻으라고 가르치는 분이다. 「도마복음」의 예수님은 위에서 말한 그리스도교의 깊은 가르침, 곧 밀의적(密意的, esoteric)가르침을 가르치고 있고, 그의 이런 가르침은 여러 면에서 선불교의 가르침과 너무나도 비슷하다.
예수님의 이런 가르침이 지난 천6백년 동안 땅 속에 묻혀 있었던 셈이다. 그리스도인 중 이런 가르침에 관심을 가지는 사람들이 점점 많아지고 있고, 이런 면에서 불교인들과 그리스도인들 사이의 대화하고 협력은 더욱 긴밀하고 건설적인 것이 될 수 있으리라 믿는다. (필자의 도마복음 풀이가 현재 「기독교사상」 1월호부터 연재되고 있음.)
오강남 캐나다 리자이나대 명예교수
서울대학교 종교학과 및 동 대학원에서 서양 종교사상을 전공하고 캐나다 맥매스터(McMaster) 대학에서 ‘화엄(華嚴)의 법계연기(法界緣起) 사상에 관한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캐나다 리자이나 대학교에서 27년 동안 비교종교학 교수로 재직했으며, 현재 밴쿠버 신학대학원에 출강하고 있다. 저서로 『도덕경』『장자』『예수는 없다』『불교, 이웃종교로 읽다』등이 있고, 역서로 『예수의 기도』등 다수가 있다.
933호 [2008년 01월 14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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