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김종오 신부님 말씀

~ 빠다킹 신부님과 새벽을 열며,,, ~

2019년 8월 4일 연중 제18주일

제1독서 코헬 1,2; 2,21-23

2 허무로다, 허무! 코헬렛이 말한다. 허무로다, 허무! 모든 것이 허무로다!
2,21 지혜와 지식과 재주를 가지고 애쓰고서는 애쓰지 않은 다른 사람에게 제 몫을 넘겨주는 사람이 있는데 이 또한 허무요 커다란 불행이다.
22 그렇다, 태양 아래에서 애쓰는 그 모든 노고와 노심으로 인간에게 남는 것이 무엇인가? 23 그의 나날은 근심이요 그의 일은 걱정이며 밤에도 그의 마음은 쉴 줄을 모르니 이 또한 허무이다.


제2독서 콜로 3,1-5.9-11

형제 여러분, 1 여러분은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아났으니, 저 위에 있는 것을 추구하십시오. 거기에는 그리스도께서 하느님의 오른쪽에 앉아 계십니다. 2 위에 있는 것을 생각하고 땅에 있는 것은 생각하지 마십시오. 3 여러분은 이미 죽었고, 여러분의 생명은 그리스도와 함께 하느님 안에 숨겨져 있기 때문입니다. 4 여러분의 생명이신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때, 여러분도 그분과 함께 영광 속에 나타날 것입니다.
5 그러므로 여러분 안에 있는 현세적인 것들, 곧 불륜, 더러움, 욕정, 나쁜 욕망, 탐욕을 죽이십시오. 탐욕은 우상 숭배입니다. 9 서로 거짓말을 하지 마십시오.
여러분은 옛 인간을 그 행실과 함께 벗어 버리고, 10 새 인간을 입은 사람입니다. 새 인간은 자기를 창조하신 분의 모상에 따라 끊임없이 새로워지면서 참지식에 이르게 됩니다. 11 여기에는 그리스인도 유다인도, 할례 받은 이도 할례 받지 않은 이도, 야만인도, 스키티아인도, 종도, 자유인도 없습니다. 그리스도만이 모든 것이며 모든 것 안에 계십니다.


복음 루카 12,13-21

그때에 13 군중 가운데에서 어떤 사람이 예수님께, “스승님, 제 형더러 저에게 유산을 나누어 주라고 일러 주십시오.”하고 말하였다. 14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사람아, 누가 나를 너희의 재판관이나 중재인으로 세웠단 말이냐?” 15 그리고 사람들에게 이르셨다. “너희는 주의하여라. 모든 탐욕을 경계하여라. 아무리 부유하더라도 사람의 생명은 그의 재산에 달려 있지 않다.”
16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비유를 들어 말씀하셨다. “어떤 부유한 사람이 땅에서 많은 소출을 거두었다. 17 그래서 그는 속으로 ‘내가 수확한 것을 모아 둘 데가 없으니 어떻게 하나?’ 하고 생각하였다. 18 그러다가 말하였다. ‘이렇게 해야지. 곳간들을 헐어 내고 더 큰 것들을 지어, 거기에다 내 모든 곡식과 재물을 모아 두어야겠다. 19 그리고 나 자신에게 말해야지. ′자, 네가 여러 해 동안 쓸 많은 재산을 쌓아 두었으니, 쉬면서 먹고 마시며 즐겨라.′’
20 그러나 하느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어리석은 자야, 오늘 밤에 네 목숨을 되찾아 갈 것이다. 그러면 네가 마련해 둔 것은 누구 차지가 되겠느냐?’
21 자신을 위해서는 재화를 모으면서 하느님 앞에서는 부유하지 못한 사람이 바로 이러하다.”



‘사랑’의 반대말은 ‘미움’이 아니라 ‘무관심’이라는 이야기를 들으신 적이 있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진리’의 반대말은 무엇일까요? 이렇게 질문하는 것을 보면 ‘거짓’이 아닌 다른 무엇이라고 생각하실 것입니다. 라틴어에서 진리(Veritas)의 반대말은 거짓(Falsum)이 아니라 망각(Oblivio)라고 합니다. 아마 진리란 계속 기억되어야 하는 것이기 때문이 아닐까 싶습니다. 따라서 기억하지 못하는 망각 속에 사는 것은 진리의 반대편에 서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렇게 진리의 반대편에 서는 사람들이 종종 있습니다. 즉, 알아도 모르는 척 하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역사 안에서도 종종 보게 됩니다. 자신이 잘못한 일인데도 불구하고, “나는 그러지 않았습니다. 기억나지 않습니다.”라는 말로 진리를 외면하는 사람들을 매스컴을 통해서 많이 보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단순히 이런 사람들만 진리 안에 살지 않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 각자도 알아도 모르는 척 그리고 몰랐다는 말로 진리를 외면하는 경우가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진리 그 자체이신 주님께서는 당신의 삶 전체를 통해서 참 진리이신 사랑을 전해주셨습니다. 단순히 내 욕심과 이기심을 채우는 물질적인 것들에 대한 사랑이 아니라, 이웃과 함께 하는 사랑 이로써 주님을 참으로 사랑하는 삶입니다. 그러나 우리들은 내 욕심과 이기심을 취하는데 온 힘을 다합니다. 더 많이 가지고 더 높은 곳에 오르는 것, 그리고 나만 잘 되면 그만이라는 생각을 가지고 주님께서 주신 계명에 대해서는 전혀 모르는 것처럼 행동합니다. 진리가 아닌 망각을 선택하는 모습입니다.

주님께서는 유산 분배의 중재인 역할을 해달라는 사람을 향해서 어리석은 부자의 비유 말씀을 전해주십니다. 그 부자는 이 땅에서 거둔 많은 소출을 거두어서 모아 두기 위해 곳간들을 더 크게 짓지요. 그리고는 이제 넉넉하니 쉬면서 먹고 마시며 즐기겠다고 다짐합니다. 문제는 이러한 삶이 영원하지 않다는 것입니다. 그날 밤에 하느님께서 이를 데리고 가면 마련해 둔 모든 것은 누구의 차지가 되겠냐는 것입니다.

이 부자는 장차 올 세상에 필요한 유일한 준비물인 사랑을 외면했습니다. 그저 자신의 물질적인 욕심을 채우면 다 인 것처럼 생각했던 것이지요. 그러나 자신이 죽을 수밖에 없는 존재임을 아는 이들은 준비 없이 최후를 맞이해서는 안 됩니다. 재물이 아니라 덕행을 사랑하며, 생명과 구원을 비롯하여 모든 것을 주시는 분이 하느님이심을 굳게 믿는 사람만이 진실로 부유한 사람임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주님께서 말씀하시고 직접 보여주셨던 사랑을 기억하며 살아야 합니다. 그래야 욕심을 통해 망각의 길로 가는 것을 막아주고, 참 진리의 삶을 향해서 나아갈 수 있습니다.
내가 가진 것을 내주는 것은 조그만 베풂이다. 나를 헌신하는 것이 진정한 베풂이다(칼릴 지브란).



순교자는 진리를 향해 나아가는 사람입니다.


글이 잘 써질 때.

가장 글이 잘 써질 때가 언제냐고 종종 사람들이 묻습니다. 솔직히 생각날 때마다 글을 쓰는 저이기에 특별히 언제가 더 낫다고 말할 수는 없지만 그래도 잘 써지는 순간을 뽑으라 한다면 새벽 시간이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너무 조용해서 어떤 소리도 낯설 수밖에 없는 시간, 온통 어둠으로 가득차서 사물을 제대로 분간하기 힘든 시간, 어쩌면 가장 고독을 느낄 수 있는 시간이 글이 잘 써지는 시간인 것 같습니다. 그런데 저만 그런 것이 아니더군요. 많은 작가들이 시끄럽고 북적대는 세상의 대척지에 있는 시간과 장소에서 글이 잘 써진다고 말합니다.

어떤 새로운 창조는 이렇게 고독의 순간에 이루어지는 것이 아닐까요? 사실 고독한 상황을 좋아하는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외로움에서 그리고 고독함에서 벗어나야 행복할 것이라고 생각하지요. 하지만 그 상황이 오히려 새로운 창조가 이루어질 수 있는 순간이 될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이는 곧 이러한 상황을 나쁘다면서 무조건 피할 것이 아님을 깨닫습니다.

내 자신이 무엇을 생각하고 행동하느냐에 따라 지금의 상황을 변화시킬 수가 있습니다. 다른 사람들과 비교하면서 스스로에 대한 낮은 자존감을 갖게 된다면 만족스러운 삶을 살 수가 없지요. 그러나 고독으로 다가오는 고통과 시련의 순간 역시 좋은 것으로 받아들인다면 내게 커다란 선물을 줄 것입니다.



오늘은 마리아 비안네 사제 축일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