축일:5월21일
성 콘스탄티누스 대제
St. Constantine the Great
San Costantino Imperatore
St. Constantinus I
Flavius Valerius Constantinus
(274.2.27~337.5.22)
Costantino = che ha fermezza, tenace, dal latino
= that it has firmness, tenacious, from the Latin
콘스탄티누스 1세 [Constantinus I, 274.2.27~337.5.22]
콘스탄티누스 대제. 고대 로마 황제(재위 306∼337).
정식 명칭은 Flavius Valerius Constantinus.
콘스탄티누스 대제(大帝) 또는 콘스탄틴 1세라고도 불린다. 콘스탄티우스 1세와 헬레나 사이에서 태어났다.
디오클레티아누스의 황제 퇴위 후 로마 제국의 혼란을 수습하고 로마 제국을 재통일시켰으며, 그리스도교 신앙을 공인한 황제로서도 유명하다.
그는 디오클레티아누스 황제를 따라 갈레리우스의 페르시아 원정에 참가하였다.
306년 아버지가 죽자 황제에 추대되었으나, 정통파 황제를 자칭하고 로마시를 근거지로 삼고 있던 막센티우스를 꺾어야 했고
312년에야 정식으로 황제 지위를 얻었다.
314년부터 로마 제국 동부를 차지한 황제 리키니우스와 대립하였으나,
323년 고트인(人)의 침입을 막아낸 후 리키니우스를 격파, 제국을 통일하여 단독 지배자가 되었다.
원래 그는 태양신을 숭배하였으나 그리스도교에 깊이 경도하여 그 자신도 그리스도교도가 되어
313년 밀라노에서 리키니우스와 함께 밀라노 칙령(勅令)을 공포, 신앙의 자유를 인정하였다.
당시까지 전국적으로 벌어지고 있던 그리스도교 박해를 중지시키고 교회의 사법권 ·재산권 등을 우대하였다.
또한 북아프리카 도나투스파의 분파(分派) 문제도 조정하였으며,
325년 니케아에서 종교회의를 개최하는 등 교회 내의 분쟁 ·교리(敎理) 논쟁에도 적극적으로 관여하였다.
한편 디오클레티아누스가 정한 통치 방식을 계승 발전시켜, 문무(文武) 관직의 기능을 완전히 분리하였고,
황제고문회의의 권한을 강화하여 중요한 정치에 관여시켰으며, 황제를 정상으로 하는 계급적 관료제도를 완비하였다.
또한 상비군 제도와 변경의 둔전병(屯田兵) 제도에 의거하여 군제를 정비하였으며,
사르마티아인(人)과 게르만인을 변경지방으로 이주시킴으로써 야만족의 침입에 대처하였다.
행정적으로는 관료와 군대의 유지, 오리엔트식의 궁정조직과 의례(儀禮)형식의 채용, 대규모 건축사업 등에 대한 지출이 증대하였기 때문에
각종 세금제도(금을 납부하는 형식으로)를 신설하였고, 솔리두스 금화본위(金貨本位)로 화폐제도를 정비하게 되었다.
한편 이교적 색채를 불식한 그리스도교적인 도시로서 비잔티움에 새로운 도시를 건설하여 콘스탄티노폴리스(콘스탄티노플)라고 명명하였다(330).
그는 군인 ·통치자 ·입법자로서 제1급의 인물로 꼽히고, 디오클레티아누스와 더불어 로마 제국의 재건자로서 높이 평가되고 있다.
(NAVER백과사전에서)
밀라노칙령 勅令
라틴어 Edictum Mediolanense
313년 2월 로마황제 콘스탄티누스 1세와 리치니우스(Licinius)가 밀라노에서 회담하고
6월에 발표한 칙령으로 로마제국의 전 영토 내에서 그리스도교의 자유를 허용한다는 내용이 포함되어 있다.
이에 따라 박해시대에 몰수되었던 교회의 재산이 모두 반환되었고, 그리스도 교인을 속박하던 모든 법률은 폐지되었다.
이 칙령은 리치니우스가 막시미누스 다자(Maximinus Daza)를 무찌른 후 오리엔트 총독에게 보내
<박해자의 죽음에 대하여>(De mortibus persecutorum, 348)란 서한 속에 실려 있었고,
이것이 다시 락탄시오(Lactantius)와 에우세비오(Eusebius)에 의해 인용되어 전해져 내려오고 있다.
이 때문에 밀라노칙령은 양 황제의 의견차로 인하여 밀라노에서 공포되지 못하였고,
칙령이라기보다는 동방지역의 총독들에게 보낸 포고문의 형식이었다는 견해가 지배적이다.
(가톨릭대사전에서)
밀라노 칙령 勅令
영어 Edict of Milan
그리스도교가 로마 제국 내에서 영구히 종교적 관용을 누릴 수 있도록 보장한 포고령.
이는 313년 2월에 로마 황제 콘스탄티누스 1세와 리키니우스가 밀라노에서 협의한 정치조약의 결과였다.
동방교회는 313년 6월 리키니우스에 의해 선포된 이 포고령에서 모든 사람에게 신앙의 자유를 주고
그리스도교도에게 법적 권리(교회를 조직할 권리도 포함)를 보장해주며, 몰수한 재산을 그리스도교도에게 신속히 돌려주도록 지시했다.
이전에 내렸던 여러 칙령들은 그것을 선포했던 역대 정권들만큼 단명했으나, 이 밀라노 칙령은 종교 관용을 제도적으로 확립했다.
(한국브리태니커 온라인에서)
니케아 신경
영어 Nicene Creed
니체아 공의회(기원후 325)에서 선언되고 콘스탄티노플 공의회(기원후 381)에서 재확인된 신앙의 진리들의 요약.
그것은 (후대에 압축적으로 확정된) 사도신경보다도 가톨릭 교리(특히 삼위일체의 신비)를 더욱 충만히 표현하고 있다.
이 니케아 신경은 주일과 다른 축일들의 성찬례에서 강론 또는 설교 후에 함께 외우는 신앙고백에 사용된다(교리서 195).
(성바오로수도회홈에서)
로마 제국이 비로소 가톨릭에 자유를 준 것은 저 유명한 콘스탄티노 대제인데,
그때까지 300년 동안 계속된 박해에서 흔연히 신앙을 위해 생명을 바친 무수한 신자들의 용감성과
또 그들의 평상시의 훌륭한 행동은 아울러 뜻있는 이들의 마음을 감동시키고도 남음이 있었던 것이다.
콘스탄티노 대제의 아버지 콘스탄디오나 어머니 헬레나도 그러한 감화를 받아 은연중 가톨릭에 대한 경외심을 가지게 되었다.
그리고 헬레나는 세례를 받고 후세에 성녀로서의 존경을 받을만한 훌륭한 신앙의 소유자가 된 것이다.
헬레나가 태어난 해는 확실치 않으나 대개 250년 전후로 추측된다.
그녀의 아들인 콘스탄티노가 274년 2월 17일에 출생했기 때문이다.
그녀의 고향은 소아시아의 비치니아 주에 있는 드레파눔이라는 곳이었으며 그녀의 양친은
명문의 집안도 아니고 재산도 넉넉하지 못했으므로 헬레나도 손수 벌어서 먹고사는 법을 강구하는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그녀는 본래 미모에다 아름다운 마음씨의 소유자였으므로
마침 그곳에 배속 근부 중인 로마의 장교 콘스탄티오 클로루스의 눈에 들게되어 낮은 신분에도 불구하고 그와 결혼하게 된 것이다.
그녀가 초산(初産)을 한 곳은 나이수스라고 하는 지금의 닛슈 시(세르비아 영내에 있다)이며 그 아기의 이름이 곧 콘스탄티노였다.
콘스탄티노는 작은 콘스탄티오라는 뜻이다.
그러는 동안 남편인 콘스탄티오는 차차 승진해 막시미아노 황제의 중신이 되고 부하들의 신망도 컸으므로,
곧 로마 제국 서부의 총독으로서 갈리아 지방, 즉 프랑스와 남독일, 스페인, 브리타니아 등 온 지방을 통치하게 되었다.
거기서는 조건이 있었다. 즉 먼저 그의 부인인 헬레나를 버리고 막시미아노의 딸인 테오도라와 결혼할 것과,
다음은 그 아들인 콘스탄티노를 볼모로서 소아시아의 니코메디아에 있는 리지니오의 저택에 남겨 둔다는 것이었다.
콘스탄티오는 그런 무리한 요구에 처음에는 응하려 하지 않았으나, 그의 복받치는 야심은 마침내 부인을 희생시키려고 결심했다.
때는 292년의 일이었다.
헬레나는 억울한 마음을 억제하며 비참히 그 자리를 물러났다.
그 아들 콘스탄티노는 인질로서 소아시아를 향해 떠나게 되어 서로 이별하게 되었다.
이리하여 콘스탄티오는 자기 야망대로 서 로마 지역의 총독이 되었으나, 역시 사람은 죽을 때엔 본심이 돌아오는 법이다.
그가 중병에 걸려 눕게 되자 그 아들이 보고 싶었던 것이다.
그래서 그 아들을 소환하려 했는데, 이것을 안 동 로마의 총독 리지니오는 콘스탄티노를 독살하려 했다.
겨우 난을 면해 아버지를 찾아간 콘스탄티노는 306년 아버지의 별세와 더불어 군부의 지시를 받아 그 후계 총독이 되었다.
그는 즉시 어머니 헬레나를 독일의 트리엘에 있는 자신의 별장에 모시고 가서 아버지가 약탈한 그녀의 지위와 권리를 복구시켜 주었다.
그리고 그가 저 유명한 미르비오교(橋)의 전쟁에서 대승리를 얻자 곧 서 로마 제국의 황제로서 추대를 받고 로마로 거처를 옮겼다.
그 후 그는 어머니 헬레나에게 왕대비 아우구스타라는 칭호를 보내고 아울러 조폐권(造幣權)을 주고
어머니 고향인 드레파눔을 개조,미화해 이를 헬레노폴리스 즉 헬레나의 시(市)라 개칭하여 영원히 그녀의 이름을 기념케 했다.
그러나 전에 세상의 쓴맛을 다 맛본 헬레나인지라, 연기와 같이 허무한 세상의 영화에 마음을 붙이지 않았다.
오히려 영원불멸의 행복을 말하는 가톨릭에 더욱 마음이 끌리어 마침내 60세에 이르렀을 때에 자진하여 세례를 받고 가톨릭 신자가 되었다.
초대 교회의 유명한 역사가인 에우세비오는 그녀를 평해 말하기를
“주 예수 그리스도께 직접 가르침을 받은 제자와 같이 그녀의 신앙은 견고하고 열의는 뛰어났다”고 했다.
당시 헬레나의 몸은 왕대비라는 높은 지위에 있고 또한 조폐권까지 가지고 있어 그녀의 부유함은 비할 데가 없었으나,
그녀는 빈민에게 희사하거나 성당 건축을 위한 것이라면 한 푼도 아끼지 않고 모든 원조를 제공했으며,
자기의 존귀한 신분을 잊고 천한 사람들과 함께 예식에 참여도 하고, 기도하기를 좋아했다.
콘스탄티노 황제는 그 후 자기의 기념 도시인 동로마 제국의
콘스탄티노플(콘스탄티노폴리스, 콘스탄티노의 도시라는 뜻이다)을 그 수도로 정했다.
헬레나는 예수께서 일생을 지내신 팔레스티나 지방과 조금이라도 가까운 곳에 살게 됨을
매우 기쁘게 생각하며, 또한 그녀의 유일한 소망인 성지 순례를 마침내 326년에 이루었다.
그때 교회의 원수들은 옛날의 성스러운 유물을 없애기 위해 갈바리아 산상에 세워졌던
주님의 십자가를 어딘가로 치워 버리고 그 대신 그 곳에다 베누스 여신의 동상을 세워 놓았었다
.
헬레나는 여러 곳을 발굴해 고생 끝에 겨우 주님의 십자가를 발견하는데 성공했다.
이 때문에 그녀의 문장은 십자가이다.
헬레나는 또 다시 주님의 탄생지인 베들레헴과 주님의 승천지인 올리브 동산에 기념 성당을 건축하고 많은 유물을 모시고
콘스탄티노플에 귀환했으나 얼마 후에 주님의 부르심을 받아 세상을 떠났다. 그때 그녀의 나이는 80세였다.
그녀의 상본은 보통 머리에 아름다운 관을 쓰고 화려한 복장에 망토를 두르고 위엄을 갖춘 왕대비의 복장으로 십자가를 안고 있는 모습으로 그린다.
(대구대교구홈에서)
*성녀 헬레나 황후 축일:8월18일.
*성 십자가 현양 축일:9월14일.
콘스탄틴 황제가 기독교를 인정하게된 내역
콘스탄틴 (Constantine)황제는 처음부터 기독교를 인정하고 종교의 자유를
로마제국 국민들에게 부여할 마음이 없었다
다만 정도가 덜 했을뿐이지 기독교를 탄압하는 정책은 마찬가지였다
당시 콘스탄틴 황제는 로마 북부의 티베르 강을 가로지르는 밀비안(Milvian) 다리를
사이에두고 적군인 막센티우스(Maxentius)와 치열한 전쟁중이었다
하지만 콘스탄틴의 군대는 상대편의 군사력에 미치지 못했기 때문에
전쟁에 패할 위기에 처해진 콘스탄틴은 걱정과 안타까움으로 밤잠을 이루지 못하든중에 환상을 보게되는데
그리스도의 이름으로부터 따온 머릿글자를 보게되며 이 상징을 새기고 전쟁에 임하면 이기라는 계시를 받는다
콘스탄틴은 이를 신의 계시(신의 당부:神託)로 생각하고 병사들의 방패와 투구에
환상으로 본 그 상징의 기호를 그려넣고 전쟁에 임하여 불리하던 상황을 역전시켜 승리로 장식하게 된다
이 전쟁의 승리로 서방을 손에 넣게된 콘스탄틴은
이 전쟁의 승리가 자기에게 환상을 보여준 신이 가져다 준것이라고 믿게되었으며
자신이 스스로 기독교인이 되기에 이르며 313년 밀라노에 돌아와 밀라노칙령Edict of Milan을 선포하였다
이 칙령은 모든 종교를 자유롭게 선택할수 있으며 예배를 할수 있다는 선언인 것이었다
동시에 로마제국에 몰수 되었던 교회의 재산을 환원 받게 되었고 기독교를 로마제국이 인정한 다른종교와 동일시 하게 된것이다
그는 324년에 동방의 리시니우스(Licinius)를 멸하고 드디어 동서를 가로 지르는 대 황제가 되었다
이와같이 그가 기독교를 인정하고 기독교인이 되기 까지는 전쟁의 승리가 신이라는 믿음이 강하게 자리잡았기 때문이었으며
비록 기독교를 로마의 국교로 정하지는 않았지만 기독교의 대표자들을 감독으로 임명하여
지금의 국회의원과 같은 지위를 인정했으며 많은 교회를 짓기도 하였다
콘스탄틴 황제가 지은 교회들:성 요한 라테란 성당(The Church of St John Lateran, Basilica San Giovanni in Laterano)
베드로 성당(The Church of St Peter, San Pietro Basilica),바오로 성당(The Church of St Paul, Basilica of St. Paul Outside the Walls )
(NAVER백과사전에서)
*라테란 대성전 봉헌 축일:11월9일.
*성 베드로 사도좌 축일:2월22일.
콘스탄티노플(Constantinople)
콘스탄티노플의 원래 지명은 비잔티움이다.
B.C. 7세기경 그리스의 지도자 비자스가 "눈 먼땅에 새 도시를 건설하라"는델피 신전의 신탁을 받아
도시 국가를 건설한 것이 유래가 되어 비잔티움으로 불리웠다.
비잔티움의 시대는 이 도시의 그리스 문화를 대표하는 지명이기도 하다.
A.D. 4세기 콘스탄티누스 대제가 로마 제국의 수도를 이곳으로 옮기면서 콘스탄티노플이라 부르기 시작했다.
A.D. 330년 5월 11일 히포드럼(마차 경기장)에서 도시의 완공식을 갖고 콘스탄티노플로 다시 태어난 이 도시의 이름은
비잔틴제국의 기독교 문화를 대표한다.
기독교 국가로서 1230년동안 비잔틴 제국의 수도로 있던 콘스탄티노플은
1453년 5월 29일 오스만 터키 마호멧 술탄에 의해 망하게 되고 이 도시는 3일간의 약탈이 행해진 후
이스탄불이라는 이슬람식 명칭으로 불리워지게 되어 지금까지 이어져 오고 있다.
이스탄불은 이슬람 문화를 나타내는 지명이다.
아름다운 고도이자, 아시아와 유럽이 만나는 곳. 그 옛날 실크로드의 여정이 마무리 되던 곳.
역사학자 토인비는 이 도시를 일컬어 ’살아있는 박물관’이라 하였다.
(NAVER백과사전에서)
축일 :5월21일(5월19일)
비테르보의 성 크리스피노
San Crispino (Pietro Fioretti) da Viterbo Religioso Cappuccino
Viterbo, 13 novembre 1668 - Roma, 19 maggio 1750
Saint Crispin of Viterbo, OFM Cap
Also known as : Crispinus of Viterbo, Crispinus von Viterbo, il Santorello, Peter Fioretti, Pietro Fioretti
Born : 13 November 1668 at Viterbo, Italy as Pietro Fioretti
Died : 19 May 1750 of pneumonia at the friary of the Immaculate Conception on Rome's Via Veneto; entombed under a side altar in the Capuchin church at Rome; body found incorrupt in 1959
Beatified : 7 September 1806 by Pope Pius VII
Canonized : 20 June 1982 by Pope John Paul II
이탈리아 라치오(Lazio) 지방의 비테르보 태생인 피에트로 피오레티(Pietro Fioretti)는 어려서부터 성모님을 특별히 공경하였다. 그는 삼촌의 지도하에 견습 제화공으로 있던 중 수도생활에 대한 하느님의 부르심을 느꼈다. 그는 25세 때까지 구두 수선하는 일을 하다가 1693년 오르비에토(Orvieto)에서 카푸친회에 입회하여 크리스피누스(Crispinus, 또는 크리스피노)라는 수도명을 받았다.
성 크리스피누스는 수도원의 천한 일을 도맡아 하였다. 비테르보에서는 정원사, 톨파(Tolfa)에서는 주방 요리사로서 봉사했다. 톨파와 브라치아노(Bracciano)에서 유행병이 돌 때에는 그의 주위에서 수많은 기적이 일어나 세상을 놀라게 했다고 한다. 그는 요르비토에서 재무를 담당하였는데, 사실 이런 일보다는 그의 기적과 예언 그리고 지혜 때문에 대중들로부터 큰 사랑과 존경을 받았다. 그는 1750년 5월 19일 병든 몸으로 휴양 중이던 로마(Roma)에서 선종하였다. 그는 1806년 교황 비오 7세(Pius VII)에 의해 복자품에 올랐으며, 1982년 6월 20일 교황 요한 바오로 2세(Joannes Paulus II)에 의해 시성되었다. 그의 시성식 중에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는 그를 “단순하게 자신의 사명을 완수하고 지상 순례의 참된 가치를 이해한 아무 경력도 없는 겸손한 형제”라고 칭송하였다. 그의 축일은 지역에 따라 5월 19일 또는 23일에 기념하기도 한다.
(가톨릭홈에서)
모든 이의 친구, 민중의 형제, 비테르보의 성 크리스피노
몇 마디의 격언으로 인생관을 요약하다
“마차를 타고 ‘낙원’에 가는 일은 없다!”,
“‘낙원’은 안락의자들을 위하여 만들어진 곳이 아니다!”
“태어난 사람은 누구나 죽어요.”
“하루하루 또 한 하루가 지나가는 것뿐입니다.”
“하느님의 섭리는 우리가 할 수 있는 것보다 우리를 더 잘 살펴주십니다.”
“흔들리지 말고 하느님 사랑하십시오. 말은 그만 두고 선행을 하십시오.(Ama Dio e non fallire, fa pur bene e lascia dire)”
“어머니를 사랑한다고 하면서 그 아드님을 불쾌하게 만드는 사람은 가짜 사랑을 하는 자입니다.”
“수도공동체에서 행복하게 살려고 하면 다른 것들 중에서 이 세 가지를 지켜야 하세요. 즉, 고통을 받는 거. 침묵을 지키는 거, 기도하는 거.”
“날 기다리는 선익 커져 가고, 내 모든 고통은 쾌락 돼요. (Tanto è il bene che mi aspetto, che ogni pena mi è diletto).”
"내 아들들이여, 젊을 때 할 수 있는 만큼 좋은 일을 하고 기꺼이 고통을 감내해요. 사람이 늙으면 남는 것은 호의 밖에 없기 때문이에요."
“슬리퍼를 신고 ‘낙원’에 가는 일은 없다!”
“고통을 한 순간이지만 기쁨은 영원합니다.”
“죽음은 세속에 집착하는 미치광이들에게 상식을 가르치는 학교입니다.”
위와 같은 표현들은 카푸친 성인이 된 비테르보의 크리스피노 형제가 자신의 그리스도교 인생관을 능수능란하게 요약했던 함축성 있는 격언 중 몇 마디일 뿐이다. 자기 자신은 몸소 그런 금언들대로 살았고, 자주 재치가 있는 말투로, 만나게 된 다른 사람들에게도 가르쳐주었다. 비테르보의 성 크리스피노라는 이 사람은 도대체 누구인가?
한 명의 꼬마, 두 분의 어머니
1668년 11월 13일, 크리스피노 형제는 이탈리아의 비테리보(Viterbo)라는 마을에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는 ‘우발도 피오레티(Fioretti)’이고, 그의 어머니는 ‘마르치아 안토니(Antoni)’였다. 그들의 결혼 당시 마르치아는 이미 딸 한 명을 데리고 있는 과부였다. 11월 15일, 그들은 그들 사이에서 태어난 간난 아기를 세례자 성 요한의 본당에서 ‘베드로’라는 이름으로 세례를 받게 하였다. 하지만 베드로가 아주 어릴 때, 아버지 우발도가 세상을 떠남으로써 그의 어머니 마르치아는 또 과부가 되어 버렸다. 때문에 베드로의 작은 아버지 프란치스코가 꼬마인 베드로의 양육을 도와주게 되었고, 예수회 초등학교에 다닐 수 있도록 지원해 주었다. 그러고 나서 그는 나중에 자신의 제화점에서 베드로를 견습생으로 삼았다.
매우 경건했던 베드로의 어머니는 아이에게 깊은 모성애를 품었다. 한번은 오크나무의 성모 성지를 방문했을 때, 다섯 살짜리 베드로에게 성모상을 가리키면서 “보렴. 너의 어머니이시고 너의 여주인이시란다. 나중에 저 분을 너의 어머니, 너의 여주인으로 사랑하고 존경하렴.”이라고 말했다. 어린 베드로는 이 말을 마음에 새겨 어디에서나 성모님의 제대를 만들어 ‘가장 아름다운 꽃’들을 봉헌하곤 했다.
모든 장애를 극복하여 가푸친 되다
베드로의 청년시절, 오르비에토(Orvieto)에 가뭄이 심한 관계로 비가 오기를 기원하는 보속의 행렬이 시내에서 거행되었는데, 이 행렬에는 팔란자나(Palanzana)의 카푸친 수련원에서 나온 수련자들도 있었다. 그들의 모습을 보고 베드로는 카푸친 형제가 되기로 결심했다. 당시 오르비에토에 머무르고 있었던 로마의 관구봉사자는 25살인 베드로를 보고 즉시 입회시키려고 했다. 그러나 가족, 특히 어머니의 반대를 극복해야만 했는데, 베드로는 어머니에게 어린 시절 자신을 성모님께 봉헌한 그 기억을 상기시켜 결국 카푸친 작은 형제회에 입회할 허락을 얻어냈다. 하지만 베드로 성소에는 또 한 사람의 반대자가 기다리고 있었다. 바로 그의 입회를 반대했던 수련장이었다. 나약한 베드로가 카푸친들의 터프한 생활을 잘 해낼 수 있을지에 대한 의심을 샀기 때문이었다. 결국은 관구봉사자의 마지막 결정이 날 때까지 베드로가 팔란자나 수련원에서 손님으로서만 머물러야만 했는데, 관구봉사자는 수련장에게 본인의 결정을 분명하게 밝히고 베드로를 카푸친 작은 형제회에 입회시켰다.
베드로는 착복식 때, ‘크리스피노’라는 수도명을 받았다. 성 크리스피노는 원래 제화공들의 수호성인이었고 베드로도 제화 기술을 배운 사람이었다. 하지만 한 번도 수도회에서 그 기술을 쓸 기회는 없었다.
초기 카푸친 봉사활동
어쨌든 그때로부터 일 년 후 1694년 5월 22일, 크리스피노 형제는 수련기를 마치고 서약할 수 있었다. 그리고 나서 톨파(Tolfa)의 지역 형제회(즉 ‘톨파의 수도원’)로 파견되어 3년간 요리사로 봉사했다. 그리고 로마와 알바노(Albano)와 모테로톤도(Monterotondo)인 라치오(Lazio) 주의 여러 지역 형제회에서 간호사와 과수원지기, 요리사로 봉사했다.
모든 사람의 친구가 된 구걸자
1709년, 크리스피노 형제는 오르비에토로 보내져 동냥자의 소임을 임명 받았는데 그곳에서 38년 동안 충실히 이 의무를 다했다. 57년간의 그의 수도생활은 끊임없이 하느님과 형제들과 이웃들에 대한 봉사에 헌신이었다. 그는 그 지역의 모든 주민들을 잘 알고 있었고, 그 주민들도 크리스피노 형제를 좋은 친구로서 사랑했다. 전염병 환자를 돌볼 때는 자신의 안전은 등한시 한 채 자발적이고 열성적으로 임했고, 카푸친 형제들을 위해서 뿐만 아니라 ‘큰 오르비에토 가족’을 위해서도 음식을 구걸하곤 했다. 그러나 카푸친 형제들을 위해서는 필수품만 구걸했기 때문에 동료 형제들에게서 환심을 사진 못했다. 사실 몇몇 형제들은 크리스피노의 유명세로 조금은 편해지기를 은근히 바라고 있기도 했는데, 크리스피노 형제가 그들의 기대에 못 미치자 점점 그에게 분개를 표출하기도 했다.
카푸친 Vita Mixta - 기도와 사도직 활동이 얼기설기 엮여 있는 직물
아무튼 크리스피노 형제는 사도직과 관상이 서로 보완되는 카푸친들의 혼합생활(vita mixta)에 탁월한 모범으로서 활동사도직과 기도생활을 놀라울 정도로 잘 통합시켰다. 성모상을 모신 제대를 꾸며놓고 그 앞에서 기도하고 성가를 부르며, 아름다운 꽃들을 자주 봉헌하기를 좋아했던 크리스피노 형제는 형제회에 되돌아오면 무엇보다도 기도에 열중했다. 먼 곳에서 하루 종일 힘든 동냥에 시달린 크리스피노는 가대석(즉 chorus - “기도소”라고도 한다는 형제들이 성무일도를 바치는 성당 제대 뒤에 위치한 경당)에 들어오지 않아도 되는 특별허가를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늘 밤기도에 참석했다. 항상 첫 번째로 성당에 들어갔고 늘 마지막으로 성당을 나왔다. 그리고 감실 앞에서 긴 시간 성체조배를 했고, 자유 시간에도 많은 시간을 성당에서 보냈다. 집을 나가기 전에 그는 반드시 짧은 명상곡을 노래하고 나갔다. 그런 때에는 성모상 앞에서 “Ave Maris Stella(바다의 별이시어, 기뻐하소서)” 같은 성모 성가를 항상 불렀고, ‘Ecce Homo’의 예수님 성상을 지날 때에는(그의 독방은 ‘성가정’ 성화와 ‘Ecce Homo’라는 ‘수난의 예수님’ 성화들로 장식되어 있다) 걸음을 멈추고 엎드려 다음과 같은 기도를 했다. “주님, 당신께 감사드리나이다. 오! 주님, 당신을 찬양하나이다.” 그리고 그는 식당에서의 독서 낭독 중에 특히, 칸탈리체의 성 펠릭스와 식마링겐의 성 피델리스, 레오네사의 성 요셉과 아씨시의 성녀 글라라의 전기에서 따온 부분을 주의 깊게 듣곤 했다.
그는 평생을 살면서 한가함을 피하려고 최선을 다했다. 외부에서는 말이 많은 편이었지만 형제들과 함께 있을 때는 말을 많이 아끼는 편이었다. 특히 형제회 안에서 종교적인 주제로 논쟁할 때 더욱 그랬다.
그 동시대의 카푸친 수도생활에 대한 관점
크리스피노는 그 시대의 카푸친 수도생활이 안고 있는 문제들을 잘 알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카푸친 성소를 매우 소중히 여겼다. 카푸친 수도생활에 대한 그의 금언이 매우 많은데 그중 일부는 다음과 같다. “우리는 우리를 이 거룩한 수도생활에로 불러주신 주님께 얼마나 신세를 지고 있는지요!” 자신의 ‘십자가’인 동냥자루와 포도주부대들 그 멍에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이 경탄했다고 한다. “하지만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얼마나 더 큰지요!” 그리고 또 다음과 같이 말했다. 수도자들의 십자가는 “평신도들의 십자가에 비하면 지푸라기 같은 것입니다. 그리고 평신도들이 지는 십자가들은 비록 쇠로 만들어져 있더라도 그것이 그리스도께서 지신 그 십자가와는 결코 비교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시절에 만연된 수도생활의 문제들을 비탄하는 마음과, 헌신적이며 선행으로 구체화된 엄격한 수도생활을 그리워하는 마음이 그의 금언들로 인해 잘 드러났다.
크리스피노 형제가 훈계를 할 때는 일반 사람들에게는 예의를 갖추었으나 수도자들의 경우에는 매우 직선적이었다. 한번은 수호자에게 화를 내는 비테르보의 프란치스코 안토니오 형제에게 “시골뜨기야, 너는 네 영혼을 구원하기를 원한다면 이 세 가지를 지켜야 해. 모든 사람을 사랑하는 거, 모든 사람에 대해 잘 말해주는 거, 모든 사람에게 잘 대해주는 거.”라며 직접적으로 혼을 냈다. 다른 동료형제에게도 그와 같이 권했다.
모든 면으로 순종했지만 회칙을 위반하지 못했다
수호자의 명령들에 대한 순종을 우선시한 크리스피노 형제였기에, 그는 순종하기를 거부하는 수도자들은 특별히 심각하게 다루었다. 그는 다음과 같은 경고를 하곤 했다.“순종하지 않는 사람은 하느님과 아버지 성 프란치스코 앞에 죽은 영혼이요, 수도회에 아무 쓸모없는 몸입니다.”, “그런 자는 가족 안의 정신이 이상한 분별없고 변덕스러운 청년 같습니다. 그는 단지 남을 귀찮게 방해하고 혼선을 초래하는 일에만 능합니다.”, “그런 자는 제 구린내로 온 집 안에 악취를 풍기는 일이 아니면, 그 어떤 일에도 쓸모가 없는 집안에 죽어 있는 시체와 같습니다.”
크리스피노 형제의 순종 정신은 다음 일화에서 잘 드러난다. 당시 카푸친 형제회는 시내에서 멀리 떨어져 있었기 때문에 동냥자들의 편리함을 위하여 크리스피노 형제는 한 두 명의 동료 형제와 함께 주중에는 오르비에토 시내에 있는 작은 거처에서 숙박을 했다. 그러나 규칙 준수에 엄격한 수호자는 크리스피노 형제를 비롯한 모든 형제들이 매일 저녁식사를 위해 형제회로 돌아와야 한다고 명령했다. 많은 불편함에도 불구하고 고령의 크리스피노 형제는 그 명령에 철저하게 순종했다. 힘든 오르막길에 따라 귀가했다가 한 입의 빵만 먹고 잠시 쉬는 것이 전부였지만 자신의 안위보다는 순종이 늘 먼저였다.
하지만 양심에 거스르는 일이나 성 프란치스코 회칙을 위반하는 명령은 거부했다. 한번은 어느 수호자가 크리스피노 형제에게 성 프란치스코의 회칙에서 금지된 돈을 모으는 일을 명령했다. 이 명령을 거부한 크리스피노 형제는 오르비에토에서 쫓겨나 바사노(Bassano) 형제회로 옮겨졌다. 이 소식을 들은 오르비에토 주민들은 크리스피노 형제 말고는 다른 동냥자들에게 구호품을 주지 않았고, 어쩔 수 없이 크리스피노 형제는 3개월 만에 다시 오르비에토로 돌아와야 했다. 그 일을 명령한 수호자는 다른 곳으로 이동하였고 결국 나중에는 수도회를 떠나게 되었다. 크리스피노 형제가 수도자들을 다룰 때에 비록 딱딱하긴 했지만 수도회에 대해서는 결코 비관적이지 않았다. 수도회에서 하느님을 섬길 기회를 크나큰 은혜로 여겼기 때문이다.
무슨 도움이든지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에 대한 봉사
그는 동냥자의 임무에 충실하면서도 사회복지와 영성 분야에도 많은 선행을 했다. 병자들과 죄수들, 미혼모들, 가난한 사람들과 희망을 잃은 사람들에게 활기차게 봉사했고, 형제회 안팎의 여러 일도 능수능란하게 잘 대처했다. 특히 수도원 출입문으로 다가오는 가난한 사람들에게 격려와 도움을 아끼지 않았다. 그러한 도움에 대해 그는 “우리가 두 개의 문, 즉, 주님의 더욱 더 큰 영광을 위하여, 가대석의 문과, 가난한 사람들의 이익을 위하여 형제회 현관의 문을 늘 열어둔다면” 하느님께서는 우리를 늘 너그럽게 부양해 주실 거예요.”라고 말했고, 또 “정문은 형제회를 지탱해요.” 라고도 말하곤 했다.
그는 매일 병자들을 방문했다. 죄수들도 자주 찾아가 그들을 옹호해 주기도 하고, 교도관에게는 죄수들의 인권을 존경하도록 권고하곤 했다. 죄수들에게 빵과 군밤과 담배를 나누어 주었고, 형편이 나은 가족들에게는 맛있는 음식을 만들게 하여 그들에게 전해주도록 했다. 형제회 정문 앞에 버림받은 아기들은 직접 고아원으로 데리고 주었고, 그것에 그치지 않고 꾸준히 이기들에게 관심을 보여, 아이들이 성인이 될 때까지 연락하고 지냈다.
그의 유머감각, 불같은 성질에 대한 해결책
크리스피노 형제는 재치가 뛰어나고 명랑한 사람이었는데, 어떤 증인들에 의하면 그는 재치가 넘치는 발언으로 자신의 타고난 불같은 기질을 완화시키고 다스렸다고 한다. 그는 이러한 자신의 재치와 유머 감각을 잘 이용하여 천차만별의 사람들과 잘 어울릴 수 있었다. 그래서 그의 봉사활동은 언제나 기쁨이 충만했다. 특히 사람들의 필요를 잘 파악했고, 그 어떤 작은 것도 놓치지 않았다.
크리스피노와 그의 '여주인이신 어머니'
그리고 크리스피노 형제는 어떤 임무라도 시작하기 전에 꼭 먼저 성모 마리아께 기도하곤 했다. 성모님께 대한 거룩한 금언들도 자주 크리스피노의 입술에서 흘러 나왔다. 성모님을 ‘내 여주인이신 어머니’라고 불렀으며 “지극히 거룩하신 마리아님께 신심이 있는 사람이라면 그 누구도 멸망할 일이 전혀 없을 것입니다.” 라고 주장했다. 그리고 또는 “아드님을 불쾌하게 하는 사람은 누구든지 그 어머니를 사랑하고 있지 않는 것입니다.” “잘못으로 인해 하느님이신 성모님의 아드님을 불쾌하게 만드는 사람은 마리아님의 진정한 신봉자가 아닙니다.” 라고 말했다. 그리고 사람들에게 다음과 같은 기도를 외워 반복해 비치도록 가르쳐주곤 했다. “지극히 거룩하신 마리아님, 죽을 때에 저에게 빛이 되시옵고 저와 함께 하시옵소서.”
누군가가 위독한 사람들을 위해 기도를 부탁하면(일반적으로 그런 경우에는 사람들은 기적을 바란다) “나의 여주인이신 어머니와 잠깐 이야기 할 기회를 주시겠습니까? 이야기를 한 뒤 다시 돌아오겠습니다.” 혹은 “내 여주인이신 어머니께 메모를 보낼 테니 답장을 기다려 봅시다.” 라고 말하곤 했다. 물론 가끔 그 답장은 사람들이 받기를 바랐던 답장이 아니었다. 프란치스코 라스키(Laschi)의 경우가 바로 그런 예인데, 그에게 이렇게 말했다. 아들의 “건강에 관하여 내가 보낸 메모에 나의 여주인이신 어머니께서는 뒷보증하시지 않았습니다.”
‘유식한 평형제’이자 현명한 영성지도자
크리스피노 형제는 교육을 받은 덕택에 그 시절의 카푸친 평형제 성인들과는 달리 읽고 쓸 줄을 알았다. 강론을 듣고 영성생활에 필요한 책들을 섭렵하여 여러모로 상당한 수준의 교양을 쌓을 수 있었다. ‘유식한 평형제’라고 불린 그는 통찰력과 지혜로 가득 차 있었고, 클레멘스 11세 교황을 비롯한 고위 성직자들과 학자들과 귀족들이 그에게 충고나 영성지도를 청하곤 했다. 그가 교구 사제들에게 쓴 편지들을 보면 세심증과 같은 영성 생활의 문제들을 매우 정교하게 다루고 있다. 영적인 불안감에 시달리는 한 교구 사제에게 보낸 편지에서 그의 영적 권고가 잘 드러난다. “대담하고 남자다운 마음으로 힘을 내십시오. 동요에 대해서는 조금도 신경 쓰지 마시고, 종종 가장 까다로운 당신의 의무에도 명랑하게 나아가십시오. 여전히 주님 안에서 기뻐하고 당신 마음에 드는 일, 당신의 성소에 어울릴 만한 그 일들에 종사하도록 노력하십시오. 우리의 인생은 끊임없는 전쟁입니다. 허나 그것은 우리가 하느님의 자비로 ‘낙원’에서 위대한 왕자들이 될 것이라는 표시입니다.”
크리스피노의 금언, 몇 마디 더
크리스피노 형제의 영성지도는 장문의 긴 편지들보다는 짧은 글과 짧은 시로 잘 표현되어 있다. “하느님 순심으로 사랑하는 자, 즐거이 살다가 기꺼이 죽으리라.(Chi ama Dio con purità di cuore, vive felice e poi contento muore)”, “주님 뜻을 이루는 이에게는 역경에 처할 일이 전혀 없습니다.”, “이 하느님을 사랑합시다. 과연 그분은 사랑 받으실 만하십니다.” 한번은 심각한 기근이 일어났는데, 크리스피노 형제는 다음과 같이 하느님 섭리에 대한 신뢰심을 고무했다. “당신 희망 하느님께 둬요. 매 풍요를 누리실 거예요.(Poni in Dio la tua speranza, ché averai ogni abbondanza)” 비테르보의 프란치스코 안토니오 형제에게는 “시골뜨기여, 우리가 해야 할 모든 일과 완수해야 할 모든 임무를 하느님 사랑을 위하여 합시다.. 나로서는 하느님의 영광을 위해서가 아니라면 지푸라기 한 닢도 줍지 않겠습니다.”라고 말했다. 그리고 그렇게 하지 않는 사람을 가리켜 ‘마귀를 위한 순교자’라고 덧붙였다.
크리스피노 형제는 "지옥에 가는 것이 거룩한 활동으로 거룩한 ‘낙원’에 이르는 것보다는 더 힘든 것입니다"라는 확신을 가지고 있었다. 그리고 그는 사람들에게 하느님께 대한 신뢰심을 기지도록 강조하곤 했다. 그래서 어떤 사람이 자신이 구원받을 수 있는지에 대해 물었을 때에, 그는 사람이 구원받을 희망이 있으면 구원받을 것이라고 곧바로 대답했다. 그리고 하느님의 자비는 무한하다고 조언하기도 했다. 잘못 사는 어느 귀부인에게 다음과 같이 말했다고 한다. “여사님, 하느님의 자비는 위대합니다. 한 ‘좋은 고해성사’로 악습을 벗어나십시오.” 그리고 다음과 같은 말도 했다. “하느님의 권능은 우리를 창조합니다. 그분의 지혜는 우리를 다스립니다. 그분의 자비는 우리를 구원합니다.” 세심증에 심각하게 시달리고 있었던 바오라 스키아베티(Schiavetti)에게는 “사람이, 알고 있는 것만큼 또 할 수 있는 것만큼을 다했다면, 나머지는 하느님 자비심의 바다 속으로 송두리째 던져버려야 합니다.” 하고 말했다.
사회정의에 목말라하다
또한 크리스피노 형제는 인간 사회에 만연된 물질적, 영적인 불행은 자주 불평등의 결과라고 확신했다. 그래서 그는 그러한 사회적 불평등과 맞서 싸웠는데, 상업가들에게는 깨끗하고 정당한 수익 활동을 권했고, 노동자들에게는 그들의 합당한 권리를 옹호해 주었다. 그의 타고난 유머감각과 재능이 이러한 상황에 잘 맞는 금언을 만들어 냈는데, 통풍을 고쳐 달라는 어느 한 사람에게 “당신의 병은 발의 통풍인 것보다 손의 통풍입니다. 당신은 품삯을 받아야 할 사람들에게 지분을 주시지 않기 때문입니다. 당신의 일꾼들과 하인들이 울고 있습니다.”라고 질타했고, 특히 상업가들에게 “하느님께서 계약서도 물건도 모두 다 보고 계신다는 것을 아십시오.” 또는 “멍청이가 되지 않도록 조심하세요. 하느님께서 지켜보고 계십니다.”라고 경고했다.
사람들에게 가능한 한 빚을 탕감해주도록 청했고, 분쟁이 일어나면 언제든 망설임 없이 중재하는 데 힘을 썼다. 그리고 다음과 같은 말도 했다. “세속의 것들은 하느님께 이르지 않습니다.”
크리스피노의 비평가들
이 모든 그의 공로에도 불구하고 크리스피노 형제에게 비평가들이 아예 없는 것은 아니었다. 그는 카푸친 수도회 안에서 뿐만 아니라 바깥에서도 비판자들에게 공격을 받아 왔다. 몇몇 사람들은 그가 독선적이며 공격적이라고 불만을 드러냈고, 또 다른 사람들은 그를 ‘위선자’라고 불렀다. 그가 자주 찾아갔던 한 수녀원의 어느 수녀는 30년 동안이나 기회가 생길 때마다 그를 모욕하곤 했다. 자선을 베풀기 싫어한 어느 한 시민은 카푸친 작은 형제회의 총봉사자에게 편지를 보내어 크리스피노 형제의 해고를 요구하기도 했고, 주교좌 성당의 어느 사제는 길거리에서 아예 대놓고 크리스피노 형제에게 “너는 위선자야.” 라고 외치곤 했다. 자신의 모자람을 잘 아는 겸손한 크리스피노는 이 모든 것을 훌륭하게 참아냈다.
크리스피노의 겸손과 자신을 비하하는 유머
크리스피노 형제는 자신을 늘 보잘것없는 사람으로 여겼다. 한번은 자기 자신을 이렇게 묘사했다. “나는 세빌랴 오렌지(광귤)보다 더 못한 놈입니다. 적어도 그 세빌랴 오렌지는 사람들에게 주스를 재공해 주지만 나로부터는 무엇을 얻을 수 있습니까?” 또 크리스피노 형제는 대중의 칭찬과 찬사를 피해 가려고 재치 있는 비유들을 자주 사용했다. 퍼붓는 빗속에서 다니는 크리스피노 형제를 어떤 사람이 불쌍히 여기자 “친구야, 나는 빗방울 사이로 걸어 다녀.”
감사하는 마음에서 특히 그의 겸손이 잘 드러난다. 그는 죽을 때까지 자신을 ‘불쌍한 죄인, 이 가엾고 조그만 놈, 작은 빈자’로 칭했고, 또 그러한 자신을 기억해 준 친구들에게 감사의 편지를 보내곤 했다. 그리고 늘 은인들과 친구들을 위하여 기도했고, 그 사람들도 자신들의 기쁨과 고통을 기꺼이 이 ‘민중의 형제’와 나누려고 했다.
크리스피노는 지극히 현실주의자였지만, 그에게 일어난 기적과 치유들은 과학자들과 의학자들이 설명할 수 없는 것이었다. 크리스피노 형제의 기적에 대해 감탄해 하며 그를 따르는 사람들에게 다음과 같이 말했다. “보세요, 놀랄 것이 뭐 있습니까? 하느님께서 기적을 하실 수 있는 것은 신기한 일이 아닙니다.” 그리고 “친구야, 성 프란치스코도 기적을 행할 수 있다는 것을 몰라?” 몬테퍄스코네(Montefiascone)에서는 그의 망토 조각을 잘라 거룩한 유물로 삼으려는 사람들에게 다음과 같이 혼냈다. “아아! 불쌍한 사람들이여, 뭐 하고 계십니까? 개 꼬리털을 잘라내는 일이 오히려 낫겠습니다. 미치셨습니까? 지나가는 당나귀 때문에 이토록 소란을 피우시다니요. 차라리 성당에 가서 하느님께 기도를 하십시오.”
주님의 수염을 잡아당기려는 거야?
그리고 그는 즉효의 기적을 요구하는 사람들에게 인내심을 가르치곤 했다. 바르바리니(Barberini) 공주가 아들 카롤로를 고쳐 달라고 급하게 요구했을 때에 크리스피노 형제는 이렇게 대답했다. “어이! 나중에 성년(聖年)에 낫게 되는 것으로는 충분하지 않는 모양이지? 어이! 주님의 수염을 잡아당기려는 거야? 주님께서 은혜를 베풀어주시고자 할 바로 그때에 은혜를 받아야지.”
그가 예언한 카푸친 성소
그리고 크리스피노 형제는 막달레나 로사티(Rossati)의 아들 히에로니모를 만나서 “빵도 포도주도 없이, 크리스핀의 조그만 형제지.(Senza pane e senza vino, fraticello di fra Crispino)”라고 노래하여 그가 카푸친이 되리라는 예언을 했다. 그리고 사실 그 아이는 ‘오르비에토의 히아친토 형제’라는 카푸친이 되었으며, 사제 지망자였으나 1749년, 스물한 살이 채 되기도 전에 팔레스트리나(Palestrina)에서 선종했다.
크리스피노의 보통 하루 일과
오르비에토에서 생활하는 동안 크리스피노 형제는 일반적으로 형제들이 빌려준 작은 시내 거처나 여행자 휴게소(hospitium)의 2층 골방에서 숙박하곤 했다. 그곳에서의 대표적인 일정은 다음과 같다. 아침 일찍 일어나 자신의 작은 골방이나 1층의 공동방에서 기도를 하고, 주교좌성당의 문이 열리면 여러 미사에 참석했다. 그리고 거처로 돌아와 아직까지 미사에 참석 못한 늦잠 자는 동료가 있으면 성당에 데려다 준 다음 동냥을 나갔다. 그 다음엔 병자를 방문하고, 감옥의 죄수들을 만났다. 점심으로 야채국물 조금이나 물에 찍은 빵 한입 정도를 먹고 난 뒤에는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을 찾아 나섰다. 때로는 거처로 찾아오는 손님들을 접대했는데, 그들에게 덕담을 해 주고 음식을 나눠주곤 했다. 저녁에는 성당에 가서 설교를 듣거나 성체조배를 했고, 한 두 시간 정도 라틴어 성경과 ‘그리스를 본받기’와 같은 영성 서적을 읽고 묵상에 빠졌다. 그리고 임종하는 신자들이 있을라치면 병자성사를 주는 사제와 꼭 함께 갔고, 그들의 장례식 또한 놓치지 않았다. 또 형제회안의 아픈 형제들이 양로원에 가기 싫어하면 늘 자신의 거처로 데리고 와서 몸소 돌보았다. 이러한 생활양식 때문에 그는 사람들 한가운데에서 기쁨과 슬픔에 긴밀히 동참하는 진솔한 삶을 살 수 있었다.
여름이 되면 별들이 쏟아지는 옥상에서 잠을 청하곤 했던 그는 노년에 이르자 많은 편지들도 쓰고 이탈리아 문학의 시조들도 외우곤 했다. 통풍에 시달렸던 오르비토 출신인 프란치스코 바르바레스키(Barbareschi) 약사에게 다음과 같은 초대장을 써서 보냈다.“아킬레스의 창을 들고(삽을 들고) 크리스피노의 별장 마땅(villa Crispiniana)’에서 열심히 일하십시오.” (크리스피노는 은인들을 위해서 직접 일군 작은 채소밭을‘villa Crispiniana’라고 불렀다) 또, 범람한 강물을 건너다가 빠질 뻔한 어느 카푸친 형제를 기적적으로 살린 다음, 크리스피노는 직접 쓴 다음의 짤막한 시조를 노래했다. “탁수(濁水)로 보면 그냥 탁수로 두지, 건넌다면 미치광이요.
로마에서 보낸 그의 말년
1747년 겨울, 크리스피노 형제는 심각한 병이 들어 로마에 있는 카푸친 양로원으로 옮겨졌다. 그의 명성이 로마 시민들에게 널리 알려진 터라, 그를 면회하러 비아 베네토(Via Veneto)에 있는 로마 형제회에 많은 사람들이 왔다. 어느 형제가 그에게 고통중이라도 기쁨을 잃지 말라고 위로 했을 때, 그는 자신의 병보다는 자신을 돌보는 형제들에게 폐가 되는 것이 더 고통스럽다고 했다. “하느님께서 나에게 고통을 주셨고, 하느님께서 나에게서 고통을 덜어주실 것입니다. 그분의 지극히 거룩한 뜻이 이루지소서!” 라며 거룩하게 자신을 포기할 줄 알았다. 그의 고통을 안타까워하는 사람에게는 기쁜 마음으로 대답했다. “자네는 하느님의 사랑을 위하여 언제 고통 받아보겠나? 죽고 난 다음에?” 또한 다른 사람에게는 “어이! 우리가 묘지('pilozzo') 안에 있을 때 고통 받기를 기다리려는 것입니까?”라고 말했다.
“'주님의 집으로 가세!' 사람들이 나에게 이를 제 나는 기뻤네.”
다행히 크리스피노 형제의 병은 어느 정도 회복됐다. 그러나 1750년 5월, 크리스피노 형제는 폐렴에 걸려 다시 양로원으로 옮겨졌다. 그는 로마에서 1750의 성년의 대사(大赦)를 받고 죽겠다고 예언한 적 있었는데, 이제야 베르바리니 공에게 "저는 이사 가야지요... 우리 영원한 거처로 이사 가야 합니다.”하고 말했다. 한 형제가 크리스피노 형제에게 주님의 수난을 생각하라고 위로하자 그는 “아 예, 안젤로 아노니오 아버지! 바로 거기에 나의 모든 희망을 걸어 왔던 거지요.”라고 말했고, 간호사 형제가 그에게 죽음이 임박하고 있었다고 알려주자 그는 “'주님의 집으로 가세!' 사람들이 나에게 이를 제 나는 기뻤네.”라는 시편의 말씀으로 노래했다. 그러나 그는 칸탈리체의 성 펠릭스의 축일에 방해되니 5월 17일이나 18일에는 죽지 않겠노라고 약속했다. 그 전 며칠 동안에 해왔던 대로, 19일에도 그는 반복하여 기도를 바쳤다. “오! 나의 하느님, 당신 자비의 활동을 완성하시고 저의 주 예수 그리스도님의 수난의 공로로 이 저의 영혼을 구원하소서.” 죽기 전, 그를 괴롭히는 악마에게 “이 추한 짐승아, 너는 나에게 아무것도 할 수 없어. 나는 하느님의 자비와 내 여주인이신 지극히 거룩하신 마리아님의 보호와 나의 세라핌적 아버지 성 프란치스코의 도움을 굳게 믿으니까!”하고 큰 소리로 외쳤다.
1750년 5월 19일, 오후 2시30분, 로마 ‘비아 베네토(Via Veneto)’에 위치한 무염시태의 카푸친 형제회에서 비테르보의 크리스피노 형제는 82세의 나이로 선종했다. 그러자 수많은 로마 시민들이 거룩한 시신에 자기들의 성물을 대려고 로마 카푸친 형제회로 몰려왔다. 크리스피노 형제의 시신은 칸탈리체의 성 펠릭스의 유해가 안치된 무염시태 성당에서 묻혔다. 모든 이의 친구, 민중의 형제였던 크리스피노 형제는 1806년, 비오 7세 교황에 의해 시복되었고 1982년, 그는 시성되었다. 그 즈음에 비테르보의 성 크리스피노의 시신은 오르비에토시의 카푸친 성당으로 옮겨져 그곳에 안치되어 있다. 베테르보의 성 크리스피노는 복자 요한 바오로 2세 교황에 의해 성인품에 오른 첫째 복자였다.
"사랑스러우신 우리 주님께서 복음 안에서 우리에게 남겨주신 그 거룩한 금언들을 마음껏 당신이 받아들이셨다고 들었기에 저는 기뻐했어요. 왜냐하면 사람이 복음말씀 안에서, 그리고 또한 주님의 뜻을 묵상하는 일과 그분의 지극히 거룩한 생애와 수난을 묵상하는 일에 있어서는, 그분의 지극히 거룩한 뜻에 따라 걸어가기 위하여 안전하고 확실한 길을 발견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과연 주님의 수난은) 착오에 빠지지 않고 거룩한 덕행들을 훈련하기 위한 믿음직한 학교입니다. 그리고 신부님 자신의 편으로는 하실 수 있는데 만큼 주님 안에서 계속 기쁘게 사십시오." - 비테르보의 성 크리스피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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