축일: 7월 21일
브린디시의 성 라우렌시오 사제 교회학자, O.F.M.Cap.
San Lorenzo da Brindisi Sacerdote e dottore della Chiesa
21 luglio - Memoria Facoltativa
Brindisi, 22 luglio 1559 - Lisbona, 22 luglio 1619
Lorenzo = nativo di Laurento, dal latino
Saint Lawrence of Brindisi
Also known as : Brother Lorenzo, Julius Caesar Rossi, Laurence of Brindisi, Lorenzo da Brindisi
Born : 22 July 1559 at Brindisi, Italy as Julius Caesar Rossi
Died ; 22 July 1619 at Lisbon, Portugal of natural causes
buried in the cemetery of the Poor Clares on Villafranca, Spain
Beatified ; 1 June 1783 by Pope Pius VI
Canonized ; 8 December 1881 by Pope Leo XIII
라우렌시오의 가장 뛰어난 점은 아마도 그의 탁월한 언어 능력일것이다.
그는 자기 조국 이탈리아에 관한 완벽한 지식과 더불어
라틴어,히브리어,그리스어,독일어,보헤미아어,스페인어 그리고 불어에 이르기까지
완전한 독해력과 회화 능력을 갖추고 있었다.
그는 1559년 7월 22일에 이탈리아 브린디시에서 태어나 1619년 포르투갈 리스본에서 세상을 떠났다.
그의 부모님은 그에게 ’줄리어스 시저’ 혹은 ’이탈리아의 시저’라는 이름을 지어 주었다.
부모님이 일찍 별세했으므로 그는 삼촌의 도움으로 베니스의 성마르코 대학에서 교육을 받았다.
16 살에 베로나에서 카푸친 프란치스코 수도회에 입회하여
철학과 신학 그리고 외국어에 급속한 진전을 이루었으며 라우렌시오라는 새로운 이름을 받았다.
그는 파도바 대학에서 철학과 신학,성서, 그리스어, 히브리어 등 여러 외국어를
연구한 뒤 23세에 사제가 되었다.
그는 뛰어난 언어 능력 덕분에 원문으로 된 성서를 연구할 수 있었다.
서품 후 처음에는 국내의 주요 도시, 북 이탈리아를 순회하면서 복음을 선포했다.
그는 수도회의 학생들에게 신학을 가르치는 둥 여러 고위 직책을 맡았으나 유다인 개종을 위해 주로 활동했다.
교황 클레멘스 8세의 의뢰로 그는 이탈리아에서 유대인에게 설교하는데 많은 시간을 보냈다.
그의 히브리어 실력이 어찌나 뛰어났던지
유대교의 랍비들도 그가 그리스도교로 개종한 유대인이라고 믿을 정도였다.
카푸친 수도회는 1956년 그의 저서 15권의 편찬을 끝냈다.
15권중 11권은 그의 설교로 이루어져 있는데
그것은 주로 그의 가르침을 설명하기 위한 성서 인용문으로 되어 있다.
1598 년 라우렌시오는 독일과 오스트리아에 공동체를 설립하도록 11 명의 동료와 함께 파견되었다.
프라하와 비엔나 그리고 고리지아에 수도원을 세우기도 하여 이 수도원이 후일에는 보헤미아,
오스트리아 그리고 스티리아 관구로 발전케 했다.
제국 내에 있는 동안 그는 황제로부터 투르크인들의 침공에 대비하여
가톨릭 제후들을 조직시키는 임무를 맡아 이 일을 성공적으로 완수했다.
1602년, 이탈리아로 돌아와 보니 수도회 총장으로 선출되어 있었다.
표면적으로 드러난 그의 성격의 특징은-어쩌면 그같이 재능 있는 학자에게서는 기대되지 않는
-그가 사람들의 욕구에 민감하다는 점이었다.
그는 31세에 토스카나 대교구의 카푸친 프란치스코회 수도원 원장으로 선출되었다.
그는 총명함과 인간애와 의무 수행에 필요한 행정적 기술 등을 두루 갖춘 사람이었다.
때문에 그는 동료 카푸친 수사들로부터 1602년에 전수도원의 총장으로 선출되었다.
이 총장직에 있으면서 그는 수도원의 지역적 확장과 성장에 큰 공적을 남겼다.
그는 외교적, 정치적 문제가 있을 때마다 황제 혹은 교황의 특사 및 평화 중재자로 임명되어
큰 공을 세우는 등 이름난 설교가로서 유럽을 여행하면서 설교에 많은 수확을 거두었다.
그러는 중에서도 그는 가톨릭 신앙을 해석하는 수많은 저서를 남겼는데,
특히 유명한 것은 창세기와 에제키엘서의 주석서이다.
그의 조국 나폴리 왕국의 평화를 위해 스페인 왕을 방문하려고 리스본으로 여행을 하였는데,
그는 리스본에서 1619년 중병으로 일생을 마쳤다.
1881년 시성되었고, 1959년에 요한 23세는 1960 년 라우렌시오를 교회학자로 선포하였다.
인간 욕구에 대한 민감함과 성서에 대한 끊임없는 연구를통해
그는 20세기 그리스도교인에게 설득력 있는 하나의 생활 양식을 제시해 준다.
라우렌시오는 봉사해 주기를 요구하는 이들에 대해 깊은 이해를 가졌고
또한 자기 훈련을 통해서 생활의 균형을 이룰 수 있었다.
그리스도의 지상권에 대한 스코더스파 학자의 가르침.
"하느님은 사랑이시며 그분의 모든 행위는 사랑에서 출발한다.
그분은 사랑을 공유함으로써 선을 증명하기를 원하고 계시며,
강생은 바로 그분의 선과 사랑과 영광을 증명해 주는 최고의 것이다.
이렇게 그리스도께서는 모든 창조물 앞에 그리고 그분 자신을 위하여 나타나신 것이다.
모든 것은 그분을 위하여 창조되었으며, 모든 것은 그분에게 속한다.
그리고 하느님은 그리스도 안에서 그리스도 때문에 모든 인간을 사랑하신다.
그리스도는 모든 피조물 중에 최초로 태어나신 분이시며,
온 인류는 창조된 세상과 마찬가지로 그분 안에서 그 근거와 의미를 찾게 된다.
더구나 이것은 아담이 죄를 범하지 않았다고 할지라도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교회 박사인 라우렌시오의 카푸친 교육에 관한 강연회에서’ 워싱턴 D.C.)
브린디시의 성 라우렌시오 사제의 강론에서
(Sermo Quadragesimalis 2 Opera omnia 5,1, nn. 48.50.52)
복음 전파는 사도적 의무입니다.
우리는 하늘의 천사들과 거룩한 영들과 함께 하느님의 모상으로 창조되었습니다.
만일 우리가 천사와 동등한 우리 영적 생명을 영위하려 한다면
그 생명의 양식으로서 성령의 은총과 하느님의 사랑을 필요로 합니다.
그러나 은총과 사랑은 믿음 없이는 아무것도 아닙니다. 믿음 없이는 하느님을 기쁘시게 해드릴 수 없습니다.
그리고 믿음은 하느님 말씀의 전파없이는 우리에게 올 수가 없습니다.
"믿음은 듣는 데서 오고 듣는 것은 그리스도의 말씀을 통해서 옵니다."
우리 육신적 생명을 위해서 씨 뿌림이 필요한 것처럼
우리의 영적 생명을 위해서 하느님 말씀의 전파가 필요합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씨 뿌리는 사람이 씨를 뿌리러 나갔다."고 말씀하십니다.
씨 뿌리러 나간 사람은 정의의 전파자입니다.
정의의 전파자는 어떤 때 하느님 당신 자신이셨습니다.
하느님 친히 정의의 전파자가 되셨다는 것을 성서에서 읽을 수 있습니다.
사막에서 말씀하시는 소리가 내려와 정의의 법을 모든 백성에게 공포하셨을 때 그러했습니다.
또 어떤 때 전파자는 주님의 천사였습니다.
통곡의 처소에서 주님의 천사는 하느님의 법을 깨뜨린 것에 대해 백성들을 꾸짖었고,
이스라엘 자손들은 그의 말을 들었을 때 마음이 찢기어 목소리 드높여 통곡하였던 것입니다.
그리고 신명기에서 읽을 수 있는 바와 같이 모세도 모압의 벌판에서
모든 백성에게 하느님의 법을 전파했습니다.
마지막으로 하느님이시고 사람이신 그리스도께서는 하느님의 말씀을 전파하러 오셨고
그분은 이전에 예언자들을 보내신 것처럼 이 일을 계속하도록 사도들을 파견하셨습니다.
그러므로 복음전파는 사도의, 천사의, 그리스도의, 그리고 하느님의 직무입니다.
하느님의 말씀은 여러 가지 선으로 너무도 충만하여 마치 온갖 좋은 사물의 보고와도 같습니다.
이 말씀에서 믿음, 희망, 사랑, 모든 덕, 성령의 모든 은혜,복음의 모든 지복 직관,
모든 선업, 이승에서의 모든 공로 그리고 천국의 모든 영광이 옵니다.
"여러분은 하느님께서 여러분의 마음속에 심으신 말씀을 공손히 받아들이십시오."
하느님의 말씀은 지성의 빛이요 의지의 불로서 인간이 하느님을 알고 사랑할 수 있게 해줍니다.
하느님의 영의 은총으로 살아가는 내적 인간에게 있어 그 말씀은 빵이요 음료인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밀봉의 꿀보다 더 달콤한 빵이고 우유나 포도주보다 더 나은 음료입니다.
영혼에게 있어 그것은 공로의 영적 보고이며 따라서 황금 또는 보석이라고 부릅니다.
말씀은 악으로 인해 완고하게 굳어진 마음을 두드리는 망치이고,
육신과 세상과 마귀에 대항하여 온갖 죄를 죽여 버리는 칼입니다.
카푸친들의 르네상스 교양인, 브린디시의 성 라우렌시오
부러운 이력서
언어학자, 인문학자, 철학자, 신학자, 성경학자, 설교자, 선교사, 교수, 국제 행정인, 교황들과 황제들과 군주들의 신뢰 받는 친구, 외교 사절, 군기를 확립하는 군목 및 군사전략가, 논객, 다작 작가 등 - 이 목록은 우리가 줄리오 카이사르 루소(Russo)의 이력서에서 찾을 수 있는 몇몇의 핵심기량과 전문적 자산들이다. 오늘날, 실용적인 교수이자 영향력 큰 홍보담당자이며 다국어에 능통한 이 사람을 자기 회사의 드림팀원으로 뽑기 위하여 다투지 않을 다국적 기업이나 조직은 별로 없을 것이다.
그러나 16세기의 이 다재다능한 사람이 선택한 직업은 위의 것과 전혀 다른 성향의 드림팀의 팀원이 되는 것을 수반했는데, 그 대안적인 드림팀은 바로 아시시의 성 프란치스코가 설립했던 '카푸친 작은 형제회'라는 '천상대왕의 음유시인들의 악단'이었다. 이 형제회의 단원이자 그 형제들의 섬기는 지도자로서 그는 유럽 대륙 여기저기를 맨발로 돌아다니며, 신성로마제국 도처에 성당들과 수도원들을 설립했다. 그는 사람들을 복음화 시키고 용기를 북돋아주었으며, 필요할 땐 그들을 바로잡아주고, 또 언제나 그들에게 영감이 되어주었다. 또 접시를 닦기도 했으며, 미사를 겸손하게 집전했다. 그 외에도 그는 거의 끊임없이 기도하며 형제들과 그에게 도움을 바라는 모든 이들의 요구에 기꺼이 귀기울여주곤 했다. 그는 결국 고향에서 멀리 떨어진 채 구호 임무 중에 낯선 사람들 한 가운데에서 죽어야 했다. 전형적인 ‘르네상스인’이자 다재다능한 천재인 이 박식한 카푸친 형제는 카푸친 작은 형제회의 한때 총대리였던 바로 ‘브린디시의 성 라우렌시오’이다.
1783년, 비오 6세 교황에 의해 시복된 그는 1881년 '원죄 없이 잉태되신 성모의 대축일'에 레오 13세 교황으로부터 시성을 받았다. 그랬다가 그는 1959년 복자 요한 23세 교황에 의해 'Doctor Apostolicus(사도적교회 학자)'라고들 하는 교회 학자로 선포되어 있다. 에스파냐 국왕의 칙령에 따라 라우렌시오의 시신은 에스파냐 갈리시아 주의 '비야프랑란카 델 비에르토(Villafranca del Bierzo)'의 '맨발의 프란치스칸 수녀들'의 수도원성당에 안치되어 있다.
천재 아이
브린디시의 성 라우렌시오의 훗날 명성에도 불구하고, 그의 어린 시절에 관하여 아는 것은 거의 없는 바이다. 아버지는 부유한 베네치아 출신의 상인, '굴리엘모 루소'였고 어머니는 '엘리사벳 마셀라'였다. 그는 1559년 7월 22일, 이탈리아 남부 항만도시인 브린디시에서 태어났다. 그는 꼰벤뚜알 프란치스코회가 운영했던 통학 학교에서 초등교육을 받았고, 학업에 빠르게 진보했다. 그는 그 시절 이탈리아의 풍습에 따라, 6세라는 어린 나이에 공석에서 아기 예수님에 대한 짧은 성탄절 설교를 했다. 그러나 그가 14살 때 부모를 모두 잃어 고아가 되자, 그의 교육은 베네치아 성 마르코의 주교좌성당에서 고위 성직자로 근무하고 있던 그의 삼촌에게 맡겨졌다. 그는 삼촌이 운영하는 명문 사립학교 '성 마르코 칼리지'에서 뛰어난 고등교육을 받았다.
가난 부인에 반하여 카푸친 더욱 작은 형제가 되다
줄리오 카이사르는 베네치아에서 카푸친 작은 형제회를 처음 알게 되었는데, 그 수도회는 그 도시의 쥬데카(Giudeca)섬에 위치한 천사들의 성 마리아께 봉헌된 작은 성당을 관리하고 있었다. 카푸친 형제들의 엄격히 가난한 생활양식에 감동 받아, 줄리오 카이사르는 수도회에 입회를 청원했다. 1574년 2월 18일, 그는 베로나의 카푸친 수련원에서 수도복을 착복하였고, 그와 동시에 '라우렌시오 형제'라는 수도명을 받았다. 일 년 뒤 3월 24일, 그는 종신서약을 했다.
하느님의 말씀에서 말씀이신 하느님을 만나게 되다
이어서 라우렌시오 형제는 파도바 대학교에 입학하여 철학과 논리학을 공부했다. 그런 다음 베네치아에서 신학을 공부하며 사제직을 위한 양성을 계속 받았다. 그는 엄청난 지식욕을 가지고 있었고 그것에 걸맞는 지력도 가지고 있었다. 성경을 공부하는 것을 너무나 좋아한 그는 라틴어뿐만 아니라 성경원어인 히브리어와 그리스어로도 성경을 통째로 암기했다. 비범한 기억력 덕택에 그는 금방 라틴어 물론이고, 프랑스어와 독일어와 에스파냐어, 라틴어와 같은 유럽의 주요 언어에 유창해졌을 뿐만 아니라, 그리스어와 히브리어, 아람어와 시리아어와 같은 성경언어들에도 능숙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라우렌시오 형제는 단순히 지적 지식에만 관심을 갖기보다는 성덕에 더 많은 관심을 가졌다. 학문에 대한 성 보나벤투라의 접근법에 따라, 그는 독서와 묵상으로 의지를 불태우며 기도로써 하느님께 영을 올려드리도록 애썼다. 1582년, 부제임에도 그는 베네치아에서 사순절 피정을 지도했고, 그의 설교는 듣는 사람들에게 깊고 오랜 감명을 주었다. 1582년 12월 18일, 그는 '요한 트레비산(Trevisan)'이라는 베네치아의 총대주교에게서 사제서품을 받았다. 카푸친 회헌은 다음과 같이 진술한다. "그리스도님께서 몸소 형제들로 하여금 사랑의 풍부함으로부터 말하게 재촉하실 수 있도록, 형제들은 능력을 다하여 그리스도님이신 하느님의 말씀을 자기 자신들의 마음에 새기며, 온 힘을 다하여 그분의 소유권에 자신들을 내맡겨 드리도록 노력할 것입니다." 이것은 바로 사제 직무를 준비하는 과정 동안 라우렌시오 형제가 해온 일이었고, 또 이것이야말로 사제서품 후, 그로 하여금 하느님 말씀을 전하는 너무나 유명한 설교자가 되게 한 것이었다.
라우렌시오 형제 자신은 신앙생활을 기르기 위한 하느님 말씀의 중요성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했다. "여러분 안에 심어진 말씀을 공손히 받아들이십시오. 그 말씀에는 여러분의 영혼을 구원할 힘이 있습니다. 하느님의 말씀은 지성의 빛이요 의지의 불로서, 인간이 하느님을 알고 사랑할 수 있게 해줍니다. 하느님의 영의 은총으로 살아가는 내적 인간에게 그 말씀은 빵이요 음료인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꿀벌의 꿀보다 더 달콤한 빵이고 우유나 포도주보다 더 나은 음료입니다. 영혼에게 있어 그것은 황금이나 보석들을 풍부히 생산해내는 공로의 영적 보물인 것입니다."
하느님의 말씀을 전하는 분
서품 이후에 라우렌시오 형제는 이탈리아의 여러 크고 작은 도시들에서 하느님의 말씀을 전하는 직무를 본격적으로 착수했다. 그는 설득력 있고 성공적인 설교자에게 걸맞는 다양한 신체적, 지적, 영적 특성들을 타고났으며, 성경에 대한 빈틈없는 그의 지식은 그의 설교가 성경에 근거되어 있어다는 것을 확실히 보장해 주었다. 그의 강론들은 늘 뚜렷했고 세심히 계획된 것이었다. 그의 설교는 그저 생각만 가다듬게 한 것이 아니라 마음 또한 움직이게 했다. 그의 대중설교가 끝나면 수많은 사람들이 회개했고, 그 결과로 인해 천주교 신자가 아닌 많은 사람들이 입교하게 되었다.
교황의 요청에 따라 라우렌시오 형제는 1592년과 1594년에 두 번 로마의 유대인 공동체에 설교했는데, 이에 유대인들은 그의 열성뿐만 아니라 그의 예의바른 태도와 성경을 유창한 히브리어로 해설하는 그 능력에도 깊은 인상을 받았다. 후년, 선교여행 중에 그는 지금의 오스트리아와 헝가리, 남독일과 체코공화국 영토인 신성한 로마 제국의 주요 도시들에서도 설교할 기회가 있었다. 하느님의 말씀을 선포하는 일이 그에게는 가장 주요한 봉사였고, 최대의 특권이었다. 강론에서 그는 다음과 같이 말한 적이 있다. "우리 육신적 생명을 위해서 씨 뿌림이 필요한 것처럼 우리 영적 생활을 위해서 하느님 말씀의 전파가 필요합니다.. 복음 전파는 사도의, 천사의, 그리스도의, 그리고 하느님의 직무입니다."
다작 작가
라우렌시오 형제의 신학적 작품 대부분은 주일과 사순절과 대림절, 그리고 교회의 주요 축일들의 설교와 강론들로 이루어진 것이다. 그 외에 성모님의 모든 특권들, 그리고 구원의 역사 안에서 성모님께서 하신 중추적인 역할을 다룬 '마리아알레(Mariale)' 라는 복되신 동정 마리아님에 대한 강론집도 있다. 그러나 라우렌시오 형제는 마리아의 모든 특권과 영광은 그리스도의 어머니로서의 그 역할로 인해 받게 된 하느님의 선물임을 주장했다. "마리아님은 그분의 태중에 모셨던 아기로부터 자신의 모든 영광을 받게 된 것입니다."
이 작품 외에도, 라우렌시오 형제는 창세기 첫 12장에 대한 해석서와 하느님의 히브리어 이름에 대한 논문도 썼다. 그리고 여러 권의 논쟁집과 기사를 썼지만, 그 중에 마르틴 루터의 모든 가르침을 반박하는 'Lutheranismi hypotyposis (루터교의 박진)'라는 저서는 가장 잘 알려진 작품이다. 그 외 다른 작품들에는 자신의 선교활동에 대한 보고들을 위해 쓴 몇몇의 자선전적 자료들이 포함되어 있다. 대부분의 강론들은 이탈리아어로 썼지만, 나머지 작품들은 그리스어와 히브리어 주석들이 첨부된 라틴어 원문들이다.
라우렌시오 성인의 설교의 맛보기
라우렌시오 형제는 강론을 하기 전에 기도와 보속으로, 그리고 복음을 수 시간 동안 묵상함으로써 설교를 준비하곤 했다. 다음의 인용은, 성경을 공부하는 라우렌시오 형제가 어떻게 문자의 의미를 넘어 본문보다 더 깊은 영적 의미에 이를 수 있었는지, 그 통찰의 도움과 함께 그만의 설교 스타일을 우리에게 맛보게 해준다. "태어나면서부터 눈먼 사람을 볼 수 있게 해주시기로 그리스도께서 결심하셨을 때, 그분께서는 그 사람의 눈에 진흙을 넣으셨습니다. 그 행동은 눈먼 사람들을 볼 수 있게 해주기보다는 볼 수 있는 사람들을 눈멀게 하는 일에 훨씬 더 잘 어울리는 행동입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그리스도의 수난과 죽으심도 믿지 않는 사람들에게 신앙을 권하기보다는, 그분이 하느님의 외아님이심을 믿고 있었던 사람들의 신앙을 파괴할 가능성이 더 높았던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사탄과 싸우러 나서시고 세상을 하느님께 대한 믿음과 참된 예배에로 돌리시려 이 세상 안으로 들어오셨습니다. 심판하러 오실 때처럼 당신 능력의 무기들로, 그리고 변모 때에 당신 자신을 드러내셨을 때처럼의 그 영광과 장엄으로, 그분께서는 그러한 일을 이루실 수 있었습니다. 그렇게 하셨는데 도대체 누가 그리스도를 믿지 않겠습니까? 하지만 그분께서는 당신 승리가 더욱 더 영광스러운 것이 되게 하시려고 우리의 나약한 육신 안에서 사탄과 싸우시기를 결심하셨습니다. 그것은 흡사 무기를 가지지 않은 사람이 오른손이 묶인 채, 오직 왼손으로만 강력한 군대와 싸우는 것과 같았습니다. 만일 그런 사람이 싸움에서 승리를 거두게 된다면, 그 승리는 더욱 더 영광스럽게 여겨지게 될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리스도께서는 당신 신성의 오른손이 묶인 채로 악마에 대항하셔서 오직 당신의 나약한 인성의 왼손만으로 사탄을 이겨내신 것입니다."
라우렌시오의 신학
그리스도의 인성에 대한 사랑은 라우렌시오 형제의 광범위한 저작물에 걸쳐 거듭 발견되는 주제인데, 프란치스칸 신학적 의견에 따라 라우렌시오 형제는 우리 인간들이 비록 죄를 짓지 않았더라도 그리스도께서는 어쨌든 우리와 같은 인간으로 태어나셨을 것이라고 주장했다. 뿐만 아니라, 그는 그리스도의 육화가 그토록 크나큰 신비이기에, 그분의 복되신 어머니가 땅으로 오실 하느님의 마땅한 거주가 되어드릴 수 있게, 그 어머니의 원죄 없는 잉태되심으로 그리스도의 육화는 반듯이 준비되어야 했을 것이라고 주장하기도 했다. 이것은 ‘무염시태 교의’의 선포보다 250여 년 전의 일이었다.
자신의 형제들을 섬기고 고무시킬 부르심을 받다
서품 후 1년 안에, 라우렌시오 형제는 자신의 동료형제들을 고무시키고 섬기도록 부르심을 받았다. 1583년부터 1586년까지 그는 성경학 교수였고, 그 다음의 3년 동안 수련장과 수호자의 직무를 맡았다. 1590년, 그는 토스카나 관구의 관구대리로 당선됐고, 1598년에 쉬스관구에서도 같은 봉사직을 맡도록 선출되었다. 1596년, 그는 전체 수도회의 총의결회원으로 선출되었다.
'거룩하신 총장님'
그리고 1602년 5월 24일, 라우렌시오 형제는 카푸친 작은 형제회의 총대리로 선출되었다. 우선적으로, 이 새로운 임무에는 온 유럽에 걸쳐 퍼진 30여개의 관구에서 살고 있는 9000명의 형제들을 방문하는 수고가 수반되었다. 알프스 산맥을 넘어 맨발로 오가면서 그는 모든 형제들을 만나, 그들을 격려했고, 그들에게 권고했으며, 때로는 그들을 바로 잡아주기도 했다. 비록 그가 형제들의 잘못을 단호하게 지적했다 하더라도 형제들에 대한 그의 사랑은 여전히 변함이 없었다. 여행 다녀야 했던 길은 거리가 멀고 거칠었지만, 라우렌시오 형제는 엄격한 단식과 금욕을 포함한 수도회의 모든 관행들을 모두 준수했다. 뿐만 아니라, 그는 여느 형제회에 도착한 시간이 아무리 늦은 저녁이어도 밤기도를 바치기 위해 제일 먼저 자리에서 일어나는 형제였다. 그는 그 어떠한 특별대우도 받지 않기를 고집했고, 어쨌든 간에 다른 형제들이 먹는 대로 먹었고, 식사 후에도 그들과 함께 부엌에서 설거지를 하곤 했다.
그렇지만 그의 봉사는 한낱 좋은 모범을 보여주는 일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라, 카푸친 더욱 작은 형제들의 생활양식을 보호할 의무도 있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그는 형제들에게 회칙과 회헌을 준수하도록 열심히 권고했으며, 진정으로 가난하고 엄격한 생활을 살 것을 강력히 요구했다. 그리고 형제들의 생활양식이 기준에 못 미친다고 여겨지면 그는 망설임 없이 그 사실을 지적했으며 태도를 고쳐줄 것을 요구했다. 라우렌시오 형제는 남의 비위를 맞춰주는 스타일이 아니었다. 그래서 회칙과 회헌의 준수를 재대로 확인하지 않은 장상들은 흔히 공석에서 자신들의 부주의를 지적받아야 했다. 그러나 형제들을 타이르곤 한 그의 진심어린 태도와 그만의 빛나는 그 모범은 곧 필요한 개혁들에 대한 형제들의 지지를 얻을 수 있게 하였다. 그가 총대리직을 그만둘 무렵에 형제들은 그를 '거룩하신 총장님'이라고 일컬었다.
그러나 수도회도 교회도 라우렌시오 형제의 퇴직을 선뜻 허락할 준비를 하고 있지 못했다. 결국 그는 1613년에 세 번째로 총평의회원으로 선출되었다. 그리고 그가 제노바 관구를 방문했었을 때에, 그 관구의 형제들은 라우렌시오 형제를 자신들의 관구대리로 선출했다. 1616년이 되서야 그는 고향인 베네치아의 관구로 겨우 돌아갈 수 있었다.
어려운 사명
불만을 품은 가톨릭 신자들을 복음화 시키고, 개신교의 공격을 저지하는 데에 있어서 특히 오스트리아와 쉬스와 남독일 같은 구역에서의 카푸친들의 중요한 역할을 언급하지 않고서는 16세기 후반과 17세기 전반의 유럽사를 완전한 역사로 볼 수 없다. 그리고 그때의 반종교 개혁안에서, 브린디시의 라우렌시오 형제의 중추적인 역할이 무시된다면 카푸친들의 활약을 재대로 묘사하지 못하는 것이다.
총대리로 당선되기 3년 전이었던 1599년, 라우렌시오 형제는 오스트리아와 현 체코공화국 영토에 수도회를 설립하고 개신교의 맹공에 저항하는 가톨릭 신앙을 지지하는 데에 도움이 되기 위하여 그 지역에 선교사로 이미 파견되어 있었다. 그는 12명의 다른 형제들을 함께 데리고 가서 빈과 프라하와 오스트리아 동남부에 위치한 도시인 그라츠(Graz)에 지역 형제회를 설립했다. 일행 형제들 중 몇몇 형제는 독일어계의 출신이었다. 형제들은 파라하에 도착하자마자 병원에 주거지를 정하고 전염병 환자들을 돌보았으며, 주일이나 교회의 다른 대축일 때에는 시민들에게 설교했다. 그들의 강론들이 효과를 내면서, 그 결과로 많은 미지근한 가톨릭 신자들이 신앙 활동을 다시 시작했다. 그러나 그와 동시에 형제들은 개신교 신도들과 적개심을 품은 냉담한 가톨릭 신자들의 비웃음, 그리고 가끔 생명을 위협하는 폭력에 부닥치기도 했다. 시민들은 형제들의 빈약한 패션 감각과 맨발로 돌아다녔다는 점에 대해 비웃었고, 또한 형제들의 긴 수염들도 조롱거리로 삼곤 했다. 제국군의 루터교 병사들은 라우렌시오 형제를 ‘늑대수도승’이라고 부르곤 했다. 또 다른 경우, 어떤 개신교 신도 무리들이 라우렌시오 형제를 프라하의 어느 한 다리에서 강물 아래로 밀어 떨뜨리려고 한 적 있었다. 그러나 그는 우연히 그곳을 지나가던 교황청 대사의 조카와 몇몇의 친구에 의해 마지막 순간에 구출되었다.
지역 필요에 맞추어진 다양한 복음화 접근법
당시, 함스부르크 황제들이 다스렸던 영토에는 반가톨릭 사람들과 비가톨릭 사람들, 냉담한 가톨릭 사람들과 독실한 가톨릭 사람들이 있었는데, 그들 중에 어떤 사람들은 도심에서 살았고, 또 어떤 사람들은 외딴 시골 농가에서 살았다. 서로 다른 청중들이기에 서로 다른 복음화 접근법들이 요구되었다. 그래서 카푸친들은 '사도적 선교활동'의 접근법에 따라, 시골사람들의 경우 그들의 집과 일터를 직접 방문하여 그들에게 신앙의 기본교리를 가르쳤다. 하지만 도시에서는 그리스도의 수난과 죽으심을 기리는데 전념하는 참회신심단체를 설립했고, 또한 성체신심과 특히 40시간 성체조배 신심을 촉진시켰다. 라우렌시오 형제는 모든 기회를 통해 개신교 목사들과 적극적으로 논쟁하기를 대단히 좋아했고, 또한 저서를 통하여 그들의 사고방식이 얼마나 틀렸는지를 목사 본인들은 물론이고 목사들의 지지자들에게도 지적하곤 했다. 이 선교단이 크게 성공을 거두자, 그들을 도와주기 위한 두 번째 카푸친 선교단이 그곳으로 초청되었다. 우리비노의 복자 베네딕토가 바로 이 두 번째 선교단의 일원이었다. 라우렌시오 형제는 베네치아의 관구대리로서 빈과 트리엔트와 티롤을 연결하여 일련의 카푸친 형제회들을 설립했다. 그 지역 주민들의 성소가 많은 탓에 이러한 참석과 임무를 위한 집들이 우후죽순처럼 늘어났고, 그것들은 결국 6개의 독립 카푸친 관구들이 되었다.
권력의 회랑과의 협상
비록 라우렌시오 형제와 그의 동료 카푸친 형제들은 황족의 인물들로부터 초대를 받아 오스트리아와 현 체코 영토에 와 있었지만, 정작 그 신성로마제국 황제 본인은 피해망상에 시달려 카푸친들이 자신에 대한 암살음모를 꾸미고 있다는 그릇된 생각을 품고 있었다. 그는 형제들을 추방시키기로 결정했지만, 하루 만에 생각을 바꾸어 칙령을 철회했고, 또 며칠 안 있어 다시 한 번 그들을 추방시키려 했다. 이 미묘한 상황 내내, 라우렌시오 형제는 대단한 인내심으로 평정을 유지하였고, 결국 황제의 신뢰를 얻어낼 수 있게 되었다. 기도에 몰두하며 침묵과 고독을 매우 갈망하는 그였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권력의 회랑과의 협상'은 그의 남은 생애 동안의 선교 노력에서 빠뜨릴 수 없는 한 요인이 되었다.
군사전략가 및 전쟁 영도자
1601년, 터키의 대형 군대가 신성로마제국의 영토를 침략하여 함스부르크 황실령의 나라들을 급속히 장악하고는, 로마로 진군하여 성 베드로 대성전을 군마들을 위한 마구간으로 사용하겠다고 협박했다. 교황과 황제는 이것에 불안해하며 터키군의 위협에 대처할 비상보완군대를 소집하였다. 그들은 라우렌시오 형제의 외교적 능력을 이용하여 개신교 병사들을 포함한 그리스도교 연합군을 일으켜 세워 서로 결속시켰다. 황제의 요청에 따라 카푸친들은 연합군을 위한 군목봉사에 임했고, 라우렌시오 형제는 그 속에 임명된 군목사제 중의 한 사람이었다. 하지만 이 연합군은 너무나 소규모였고, 또한 장비공급이 참으로 불충분했기에 쳐들어오는 터키군과는 절대 대적이 되지 못했다. 팔만이나 되는 터키대군은 사실상, 그들을 막아보고자 하는 만 팔천 그리스도교 군대에 비해서 4배나 더 큰 규모였던 것이다.
헝가리 '쉐케스페헤르바르(Székesfehérvár)'의 교전에서, 어찌할 도리가 없을 정도로 수적으로 열세인 그리스도교 군대의 야전 지휘관들은 후퇴할 것을 충고했다. 하지만 라우렌시오 형제는 그 충고를 따를 생각이 없었다. 오히려 승리를 향하여 계속 나아가기를 재촉했으며, 불을 뿜는 듯한 열변으로 맥 빠진 병사들에게 용기를 주었고, 결국 그는 모든 사람들이 볼 수 있도록 십자가를 높이 들어 올린 채, 말을 타고 치열한 전투 속으로 직접 군대를 이끌었다. 그는 "진격하라! 진격하라 승리는 우리의 것!"라며 연거푸 외쳐댔고, 마침내 새로운 활력을 얻게 된 그리스도교 군대는 터키군을 완전히 진압하였다. 루터교 군인들마저 이에 깊은 감명을 받았고, 터키대군을 패배로 몬 라우렌시오 형제의 그 사기고취의 노력은 막판의 중대한 승리를 거두는 데에 있어서 결정적인 것으로 여겨졌다.
외교관이자 신앙의 옹호자
총대리직의 3년기를 마친 라우렌시오 형제는 기도와 설교에 몰두할 수 있기를 바랐다. 하지만 그는 독일과 다른 나라들에서 가톨릭 통치자들 간의 관계를 강화시키고, 개신교의 진입을 막는데 도움이 되어줄 것을 거듭 거듭 부탁받았다. 본인 자신은 자주 다음과 같이 주장하곤 했다. "죄인들과 이단자들의 전향을 위하여, 하느님께서 프란치스칸이 되도록 나를 부르셨습니다." 라우렌시오 형제의 요청에 따라, 마침내 신성로마황제가 사면초가에 몰린 그의 가톨릭 신민들을 돕기 위해 찾아왔다. 이에 개신교 통치자들은 황제의 노력에 반대하여 '개신교 제후동맹'을 설립했다. 그러나 1609년, 라우렌시오 형제는 가톨릭 통치자들의 동맹인 '가톨릭 제후연맹'의 결성에 중요한 역할을 하여 개신교 제후동맹의 발전을 저지하였다. 그는 가톨릭 제후연맹 운동을 발전시키기 위하여 교황 사절은 물론이고, 여러 가톨릭 제후들의 외교적 사절로서도 로마, 뮌헨, 마드리드, 빈 등, 그 외 여러 곳을 여행 다녀야 했다. 또한 그는 가톨릭 통치자들 사이의 사소한 경쟁이나 다툼을 해결하여, 가톨릭 제후연맹이 한데 뭉칠 수 있도록 노력했다.
십자가와 미사와 상모님 안에서 그는 평화와 새로운 힘을 찾았다
그렇지만 라우렌시오 형제는 이 모든 과열된 활동 중에서도 기도 속으로 물러남으로써 평화와 계속 나아갈 힘을 발견했다. 보통 개인적으로 집전했던 그의 미사는 가끔 12시간까지 계속 된 적 있었다. 그는 미사성제를 바칠 때 엄청난 눈물을 흘리곤 했고, 그가 재단에서 기도할 때 공중으로 뜨는 것을 목격한 사람들도 있었다. 1575년 라우렌시오 형제가 수도회에 입회했을 때, 카푸친 생활양식의 어려움들을 상세히 묘사함으로써 그를 단념시키려는 관구봉사자에게 그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내 방에 십자고상이 있기만 하면 나에게는 아무것도 힘들지 않을 것입니다." 성 라우렌시오의 성화들은 십자고상을 관상하는 그의 모습을 자주 보여준다. 그는 자신의 성소와 학생시절의 건강회복, 그리고 히브리어 대한 지식과 자신의 모든 성공을 마리아님께서 주신 은혜로 여겼다. 그는 뭐든 필요할 때 성모님께 달려가곤 했다. 수도회의 총대리로 선출됐을 때, 그는 로레토(Loreto)에 있는 '성모의 성가정' 성지에 제일 먼저 갔었고, 임기가 끝났을 즈음에도 그곳으로 되돌아갔었다. 그는 양성시절 때부터 묵주기도와 성모님의 소성무일도를 매일 바치곤 했다. 형제들에게 잘 했던 그의 인사말은 다음과 같다. “Nos, cum prole pia, benedicat Virgo Maria!(당신의 효자와 함께 동정 마리아님께서는 우리에게 강복하시기를!)”
사명 완수!
1619년 교황의 부탁에 의해, 라우렌시오 형제는 에스파냐의 총독, 오수나(Ossuna)의 공작의 압제적인 통치하에 나폴리 국민들이 격고 있는 곤경을 에스파냐의 국왕에게 아뢰기 위하여 에스파냐로 한 번 더 여행해야 했다. 그의 사명을 차단하려는 공작의 모든 시도를 벗어나 그는 간신히 제노바의 항구에서 남몰래 출항했다. 하지만 에스파냐의 국왕을 만나기 위해 그는 포르투갈 리스본까지 가야만 했다. 그의 외교 사명은 성공적으로 마쳤지만, 여행에 지친 그는 심하게 앓게 되었다. 브린디시의 라우렌시오 형제는 1619년 7월 22일, 포르투갈 리스본 시에서 귀향선을 타기 전 임종성사를 받고 선종했다. 그는 60년 전 그가 이 땅에 들어왔던 바로 그 날짜에 하늘로 올라갔다.
"나의 사랑하는 영혼 여러분, 비오니, 우리는 이 성체성사의 제정 안에서 우리에게 향하시는 그리스도의 그 무한한 사랑을 인정합시다. 우리의 사랑이 영적인 사랑이 되게 하시려고 그분께서는 우리가 새로운 마음과 새로운 사랑과 새로운 영을 가질 것을 바라고 계십니다. 그것은 육적인 마음이 아니라, 과연 그리스도께서, 순수한 은총과 애덕 때문에, 그 지고지상하고 지극히 열정적인 사랑, 그 무보수의 사랑으로, 우리를 사랑해주셨던 마음은 육적인 마음이 아니라, 영적인 마음이었습니다. 아아! 우리는 온전하고도 온전하고 온전한 마음으로, 살아있고도 살아있고 살아있는 마음으로, 참되고도 참되고 참된 마음으로 반드시 그분에게 사랑을 되돌려드려야 합니다!" - 브린디시의 성 라우렌시오
브린디시의 성 라우렌시오에 대한 베네딕도 16세의 교리
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2008년 브린디시에서 내가 받았던 그 축하 환영을 나는 아직도 기쁨으로 기억하고 있습니다. 그 도시는 저명한 교회학자인 브린디시의 성 라우렌시오가 1559년에 태어났던 바로 그 도시였습니다. ‘브린디시의 라우렌시오’라는 이 이름은 율리오 카이사르 로씨(Giulio Cesare Rossi)가 카푸친회 입회하면서 몸소 받아들였던 이름입니다. 그분은 어릴 때부터 줄곧 아씨시의 성 프란치스코의 가족에 대한 매력을 느꼈습니다. 사실 그가 만 7살이 되었을 때 아버지를 잃어 고아가 되었고, 그분의 어머니는 고향 도시의 꼰벤뚜알 수사님들에게 그분의 양육을 맡겼습니다. 그러나 몇 년 후, 라우렌시오와 그분의 어머니는 베네치아로 이사를 갔는데 바로 베네토 주(베네치아시 근교 지역)인 그곳에서 라우렌시오는 직접 카푸친들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 시절 카푸친들은 트리엔트 공의회가 촉진하는 중대한 영적 개혁을 신장시키기 위해 온 교회에 대한 봉사에 아낌없이 헌신하고 있었습니다. 1575년, 라우렌시오는 수도 서약을 함으로써 카푸친 형제가 되었고, 1582년에는 사제서품을 받게 되었습니다. 성직자가 되기 위해 교회 학업에 매진하던 시절, 그분은 타고난 걸출한 지적 능력을 이미 드러내고 있었습니다. 그분은 희랍어, 히브리어와 시리아어 같은 고대어뿐만 아니라, 프랑스어와 독일어 같은 현대어도 쉽게 터득했습니다. 그분은 위의 언어들에 이탈리아어와 일찍이 모든 교회성직자들과 교양인들이라면 유창하게 말하곤 한 라티인어에 대한 지식을 덧붙이게 되었습니다.
그토록 많은 언어에 대한 능숙함 덕분에, 라우렌시오는 다양한 부류의 사람들을 위하여 강렬한 사도직을 수행할 수 있었습니다. 영향력 있는 설교자로서 그분은 성경뿐만 아니라 랍비들의 문헌에도 철저한 지식을 가지고 있어서 사실 랍비들조차도 그것에 놀라워하며 감탄했고, 그분에게 존경과 경의를 표하곤 했습니다. 성경과 교부학에 전통한 신학자로서, 그분은 또한 종교개혁을 신봉하는 그리스도인들, 특히 독일에 있는 그러한 그리스도인들에게 가톨릭 교리를 모범적으로 설명할 수 있었습니다. 분명하고 차분한 설명으로 그분은 마르틴 루터가 문제 삼았던 모든 신앙조항에 대한 성경학적, 교부학적 근거를 보여주었습니다. 성 베드로와 그의 후계자들의 수위권, 주교직의 신적 기원, 사람의 내적 변모로 (이루어지는) 의화, 구원을 위한 선행의 필요성이 이에 포함됩니다.
라우렌시오가 누린 성공은 우리가 오늘날 그토록 큰 희망으로, 교회의 성전(聖傳)에 따라 읽힌 거룩한 성경과의 대면은 교회일치를 위한 대화를 촉진시키는 데에 포기될 수 없고, 본질적으로 중요한 요소라는 것을 이해하도록 도와줍니다. 이것은 ‘Verbum Domini(즉 주님의 말씀)’ 교황 권고 (No 46)에서 내가 상기시키고 싶었던 것이었습니다.
보잘 것 없는 사람들에게 자신들의 생활과 자신들이 고백한 신앙 사이의 일관성에로 되돌아올 것을 상기시키려 연설했던, 라우렌시오의 설득력 있는 말씀에서는 대단한 교양을 갖추지 못한 사람들, 가장 순진한 그 신자들조차도 유익을 얻었습니다. 바로 이 점은 16세기와 17세기에, 자신들의 삶의 증거와 가르침으로 사회에 깊이 침투하여 그리스도교 생활의 개신에 이바지했던 카푸친들과 또 다른 수도회들의 큰 공덕이었습니다.
오늘날에도 역시 새 복음화에는 잘 준비된 열정적이며 용감한 사도들이 필요합니다. 그래야 복음의 빛과 그 아름다움이 윤리적 상대주의와 종교 무관심의 문화적 성향에 우세를 차지하게 하여, 온갖 사고방식과 행동방식들이 진정한 그리스도교 인본주의에로 변모될 것입니다. 브린디시의 성 라우렌시오가 큰 책임을 수반하는 부담스러운 다른 직무들을 맡았음에도 불구하고, 이탈리아의 수많은 도시들과 또한 다른 여러 나라에서도 존경받고 지칠 줄 모르는 설교자로서 자신의 일을 계속할 수 있었다는 사실은 놀라운 일입니다. 사실 그분은 신학교수였고 수련장이었으며, 여러 번 관구봉사자와 총의결회원이었다가, 결국 1602년부터 1605년까지 총봉사자였습니다.
그 수많은 일들 중에서도 라우렌시오는 특출하게 열렬한 영성생활을 함양했습니다. 그분은 기도에 특히, 주님의 수난과 죽음과 부활의 기념제에 동화되고 감화되곤 하여, 자주 수 시간이 걸렸던 그 거룩한 미사에 많은 시간을 바쳤습니다. 최근 ‘사제의 해’ 동안에 자주 강조되었듯이, 각 사제는 성인들의 그 학교에서 자신의 내적 삶에 주의를 기울이기만 한다면, 활동주의의 위험성, 즉 직무의 깊은 동기를 잊은 채 활동하기의 그 위험성을 피할 수 있습니다. 라우렌시오의 출생 도시인 브린디시의 주교좌성당에서 사제들과 신학생들에게 말했을 때에, 나는 다음과 같이 그들에게 상기시켰습니다. “기도의 순간은 사제 생활의 가장 중요한 순간인데, 그 순간에는 하느님의 은총이 보다 커다란 효과로 행사하여 사제의 직무에 열매가 맺게 해줍니다. 기도는 공동체에 해줘야 할 첫째가는 봉사입니다. 그리고 바로 이 사실 때문에 기도의 순간들은 우리 생활에서 참된 우선권이 되어야 합니다.. 우리는 내적으로 하느님과 친교를 맺고 있지 않으면 다른 사람들에게 아무것도 줄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하느님께서 참 최우선이십니다. 우리들이 우리 주님과 기도의 친교를 맺을 수 있도록 우리는 항상 필요한 시간을 따로 남겨두어야 합니다.”
게다가, 라우렌시오는 오해의 여지가 없는 그분만의 열정으로 사제들뿐만 아니라 모든 이에게 기도 생활을 함양하도록 촉구했습니다. 왜냐하면 기도를 통해서 우리는 하느님과 이야기하고 또 하느님께서도 우리와 이야기하시기 때문입니다. 성인은 다음과 외칩니다.“오! 우리가 이 사실을 심사숙고했더라면! 우리가 기도 안에서 하느님께 말할 때에 진정으로 그분께서 우리에게 현존해주신다는 것을! 우리가 마음과 정신만으로 기도하더라도, 그분께서는 우리의 기도를 정말로 들어주신다는 것을! 또 현존하시고 들어주시는 것뿐만 아니라, 그분께서는 사실 우리의 간청들을 기꺼이 최대의 기쁨으로 응해주고 싶어 하신다는 것을!”
성 프란치스코의 이 아들의 대업의 또 한 가지의 특징은 평화를 위한 그분의 활동입니다. 당시 오스만 제국에 위협을 받고 있던 유럽 국가들 간의 논란을 불식시키고 화합을 촉진시키기 위해서 교황 성하들과 가톨릭 제후들은 라우렌시오에게 중요한 외교 사명들을 빈번히 맡겼습니다. 그분이 누렸던 도덕적 권위는 그분을 찾고 듣고자 하는 인물들의 고문이 되게 했습니다. 성 라우렌시오의 시절과 마찬가지로 오늘날에도 세상은 평화가 필요하고, 평화를 이루는 평화로운 남녀를 필요로 합니다. 하느님을 믿는 모든 이들은 늘 평화의 원천이요, 평화를 이루는 사람들이어야 합니다. 라우렌시오는 지방 정부 당국의 압제를 받는 나폴리 신민들의 대의를 옹호하기 위해 필립보 3세 에스파냐 국왕을 만나러 리스보아에 갔었고, 바로 이 외교적 사명 중에 그분은 1619년, 거기에서 지상의 생을 마감했습니다.
1881년에 그분은 시성되었고, 그분의 탄생 4백주년이었던 1959년, 그분의 활기차고 열렬한 활동과 폭넓고 조화로운 학식 때문에 'Doctor Apostolicus', 즉 '사도적 교회학자'라는 명칭을 복자 요한 23세 교황께로부터 받게 되었습니다. 브린디시의 라우렌시오에게 이 인정이 허락된 또 하나의 이유는 그분이 성경주해와 신학과 설교에 관한 수많은 저작물의 작가이었기 때문입니다. 그 글들에서 그분은 사람들에 대한 하느님의 사랑이 가장 잘 드러나는 표명인, 육화의 신비에 집중된 구원사에 대한 유기적인 설명을 내놓습니다. 뿐만 아니라, 높이 평가되는 마리아론 신학자요, 'Mariale(즉 ‘마리아론’ 또는 ‘마리알레’)라고 제목이 붙여진 성모님에 대한 강론집의 작가로서, 그분은 동정 마리아만의 독특한 역할을 강조합니다. 그분은 성모님에 관하여 당신의 무염시태와 그리스도 구속 사업과의 협조가 사실임을 분명히 단언합니다.
브린디시의 라우렌시오는 세련된 신학적 감성으로 ‘믿는 이’의 삶 안에서의 성령의 활동을 가리켜 보여주기도 했습니다. 그분은 지극히 거룩하신 삼위일체의 셋째 위께서 복음의 메시지를 기꺼이 살아가려 하는 우리의 헌신을 당신의 은혜로 비추어 주시고 도와주신다는 것을 상기시킵니다. 라우렌시오는 다음과 같이 썼습니다.“우리가 대단히 쉽게 그리고 즐겁게 하느님의 계명들을 준수할 수 있도록, 성령께서는 하느님 율법의 멍에를 부드럽게 해주시고 그 율법의 무게를 가볍게 해주십니다.”
나는 그분의 모든 활동이, 몸소 광범위하게 암기했던 거룩한 성경에 대한 엄청난 사랑에, 그리고 또한 하느님의 말씀에 대한 경청과 수용이 우리를 거룩함으로 이끌어주는 내적 변모를 이룬다는 자신의 확신에 고취된 것임을 강조하며, 브린디시의 성 라우렌시오의 생애와 가르침에 대한 이 짧은 설명을 마감하려고 합니다. 그분은 다음과 같이 주장했습니다. “주님의 말씀은, 사람이 하느님을 알고 사랑할 수 있도록, 지능에 빛이 되고 의지에는 불이 됩니다. 그 말씀은 주님 영의 은총의 삶을 사는 내적인 사람에게는 꿀보다 달콤한 빵이요, 포도주보다, 또 우유보다 더 나은 물이 됩니다.. 그 말씀은 고집스러운 악습으로 인해 굳혀진 마음을 거슬리는 망치입니다. 또 모든 죄를 없애기 위해 육과 세상과 마귀를 거스르는 칼입니다.”
우리의 모든 행동과 모든 활동이 주님 안에서 시작되고 완성될 수 있도록, 브린디시의 성 라우렌시오는 거룩한 성경을 사랑하고 매일의 기도로써 주님과의 우정을 기르라고 우리에게 가르쳐 줍니다. 우리의 그리스도인다운 증거가 빛을 발하고, 우리 시대의 사람들을 하느님께 이끌어 주는 것이 될 수 있도록 우리는 이 샘에서 물을 떠야 합니다. 감사합니다.
(카푸친 작은형제회홈에서)
카푸친 작은 형제회(ofmcap)의 뿌리는
교회의 역사 안에서 그리스도를 가장 닮아 "제2의 그리스도" 라고 불리우는
아씨시의 작고 가난한 성 프란치스코에게로 거슬러 올라 갑니다.
성 프란치스코는 예수님의 발자취를 철저하게 따랐으며 그의 형제적 사랑은
사람들 뿐만 아니라 모든 창조물에게까지 이르는 보편적인 것이었습니다.
1209년에 성 프란치스코는"작은 형제회" 또는 "더욱 작은 형제들"이라 불리우는 수도회를 시작하였습니다.
"카푸친 작은 형제회"는 이"작은 형제회"안의 개혁 운동으로 시작 되었는데
1528년 7월 3일 교황 클레멘스7세의 대칙서’Religionis Zelus’에 이어,1619년 교황 바오로3세에 의해
"작은 형제회" 세 개의 가지- OFM(작은형제회),OFMConv(꼰벤뚜알작은형제회),
OFMCap(카푸친작은형제회)-중의 하나로 인가되었습니다.
카푸친 형제들은
관상기도,고행,엄격한 가난,가난한 이들에 대한 봉사에 헌신하였으며 복음에 대한 열렬한 설교자들이었습니다.
형제들은 단순한 전례 성서에 기반을 둔 설교,가난하고 소박한 생활 양식때문에 보통 사람들로부터
많은 사랑을 받게 되었습니다.
카푸친이라는 이름도 긴 세모꼴 두건(capuce)이 달린 갈색 수도복을 입었던 형제들에게
대중들이 붙여준 카푸치니(capucini)라는 별명에서 비롯되었습니다.
카푸친 작은 형제회홈에서 www.capuchin.or.kr
"작은 형제들의 회칙과 생활은 순종 안에, 소유 없이, 정결 안에 살면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거룩한 복음을 실행하는 것입니다." - 인준받은 회칙 1:1
“우리의 생활의 모든 상황에서
복음을 최고의 법으로 따르고
구원의 말씀을 부지런히 읽으면서
복되신 동정 마리아처럼 우리 마음에서 새깁시다.” -카푸친 회헌 1:6
성 프란치스코가 세웠던 작은 형제회의 최후의 개혁으로서
1528년 교황님의 인준을 받은 카푸친 작은 형제회는
기도와 가난과 더욱 작음으로써
성 프란치스코와 초기 동료들의 생활양식을 할 수 있는 만큼 닮으려고 했다.
형제애 - 카푸친들은 형제들이다
“너희는 모두 형제이다.
또 이 세상 누구도 아버지라고 부르지 마라.
너희의 아버지는 오직 한 분, 하늘에 계신 그분뿐이다.” 마태오 23,8-9
한 분 뿐이신 하느님을 아버지로 모시는 수도회로서 우리 카푸친들은
성 프란치스코의 정신대로 모든 피조물의 맏형이 되신
가난하시고 겸손하시며 십자가에 못박히신 예수님의 발자취를 따르려고 하는 형제들이다.
사실 우리 형제회를 하나로 묶어 주시는 분께서는 주님의 성령이시다.
그래서 같은 부르심을 받은 우리 수도회의 모든 회원들은 사제든 평수도자든 차별 없이 형제라고 불린다.
참 형제로서 우리는 함께 일하고, 함께 기도하고,
어려울 때 서로를 도와주고, 기쁠 때 함께 기뻐하고, 슬플 때 서로를 위로한다.
성 프란치스코는 우리 형제애를 다음과 같이 묘사했다:
“형제들은 어디에 있든지 어디서 만나든지 한 가족임을 서로간에 보여 줄 것입니다.
그리고 신뢰심을 가지고 필요한 것을 서로간에 드러내 보일 것입니다.
그래서 어머니가 자기 육신의 자녀를 기르고 사랑한다면,
각자는 자기 영신의 형제들을 한층 더 정성되이 사랑하고 길러야 하지 않겠습니까?” -인준받은 회칙, 6:7-8
우리의 형제애는 우리 자신들에게만 제한되있지 않으며
세상의 모든 사람들과 피조물에까지 퍼져야 하는 것이다.
위계적이고 왜곡된 권위에 기초한 사회 제도들과 인종 차별, 민족간의 분쟁,
빈부간의 계층갈등, 노동력 착취, 생태계의 파괴 등에 찢어진 세상에
우리가 무엇보다도 이바지할 점은 바로 우리의 복음적 형제애이다.
관상 - 하느님께 기도하는 형제들이다
"너는 기도할 때 골방에 들어가 문을 닫은 다음,
숨어 계시는 네 아버지께 기도하여라 너희는 이렇게 기도하여라.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 -마태오 6.6;8
성 프란치스코의 전기 작가는,
프란치스코를 기도하는 사람이라기보다는 스스로가 곧 기도 자체인 사람으로 묘사했다.
이는 카푸친 형제들의 생활 목적이기도 하다.
개인의 관상기도와 공동체의 전례기도는 우리 카푸친들의 생활양식과 모든 사도직을 가능하게 한다.
카푸친 회헌에서 기도에 대한 다음의 내용을 읽을 수 있다.
“하느님께 드릴 기도는 사랑의 호흡으로서, 성령의 활동에서부터 비롯하여
그 활동으로 마음에 말씀하시는 하느님의 음성에 내면적인 사람은 귀담아듣는다.” -회헌 6:45
우리 카푸친들의 관상기도는 많은 말을 하는 것보다
매일매일 자연과 인류역사, 다른 사람들과 자기 자신의 양심,
성서에서 우리에게 말씀해주시는 하느님의 음성에 귀담아 듣는 기도라는 뜻이다.
이 관상기도를 제대로 실천하기 위하여 침묵과 고요와 충분한 시간과 고독이 필요하다.
이런 조용한 분위기 안에서 우리는 하느님의 음성에 응답하여,
그분의 성자 예수 그리스도의 성령께서는
우리 마음에서부터 부르짖는 소리로 “아빠, 아버지”라고 기도를 바치신다.
성 프란치스코는 그리스도의 탄생과 수난과 성체에 대해서 자주 묵상하여
마음으로부터 불타 오르는 사랑으로 사랑 자체이신 그분의 사랑에 응답하도록 노력했다.
그리스도의 육화와 수난, 성체에 중심이 되는 우리 카푸친들의 기도도
프란치스코의 기도처럼 마음의 기도 또는 정신적 기도가 되어야 한다.
이런 기도는 우리로 하여금 하느님을 긴밀히 체험하며 그분과 깊은 관계를 맺게 한다.
이 긴밀한 체험과 관계는 전례 시간 외에도 침묵 속에서 바치는 개인기도 시간으로 길러진다.
* 아시시의 성 프란치스코 축일: 10월4일.
* 성 프란치스코의 오상축일: 9월17일.
축일:7월21일
성 다니엘 예언자
San Daniele Profeta
Daniele = Dio è il mio giudice, dall"ebraico=God is my judge, from the Hebrew
다니1,6-7
6 그들 가운데 유다인으로는 다니엘, 하나니야, 미사엘, 아자리야라는 젊은이들이 있었다.
7 내시부 대신은 이 젊은이들에게 이름을 새로 지어주었다.
곧 다니엘은 벨트사살, 하나니야는 사드락, 미사엘은 메삭, 아자리야는 아벳느고라고 부르게 하였다.
다니3,14-20.91-92.95
14 느부갓네살이 물었다. "사드락, 메삭, 아벳느고,
Daniel the Prophet & Ananias, Azarias, & Misail,
the Three Holy Youths
너희는 내가 세운 금신상 앞에 절을 하지 않고 내가 위하는 신을 섬기지 않았다니, 그게 사실이냐?
15 이제라도 나팔, 피리, 거문고, 사현금, 칠현금, 퉁수 등 갖가지 악기 소리가 나는 대로
곧 엎드리어 내가 만든 신상 앞에 절할 마음이 없느냐?
절하지 않으면 활활 타는 화덕 속에 던질 터인데, 그래도 좋으냐?
내 손에서 너희를 구해 줄 신이 과연 있겠느냐?"
16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가 느부갓네살왕에게 대답했다.
"저희는 임금님께서 물으시는 말씀에 대답할 마음이 없습니다.
17 저희가 섬기는 하느님께서 저희를 구해 주실 힘이 있으시면
임금님께서 소신들을 활활 타는 화덕에 집어 넣으셔도 저희를 거기에서 구해 주실 것입니다.
18 비록 그렇게 되지 않더라도 저희는 임금님의 신을 섬기거나
임금님께서 세우신 금신상 앞에 절할 수 없습니다."
19 느부갓네살은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의 말을 듣고는 금방 안색이 달라지며 노기에 차서
화덕의 불을 여느 때보다 일곱 배나 뜨겁게 지피도록 하고,
20 군인들 가운데서도 힘센 장정들을 뽑아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를 묶어
활활 타는 화덕에 집어 넣으라고 명하였다.
91 그런데 느부갓네살 왕이 깜짝 놀랄 일이 생겼다. 그는 벌떡 일어나 측근자에게 물었다.
"꽁꽁 묶어서 화덕에 집어넣은 것이 세 명 아니었더냐?" 그들이 대답했다. "임금님, 그렇습니다."
92 "그런데 네 사람이 아무 탈없이 화덕 속에서 거닐고 있으니, 어찌된 일이냐?
저 넷째 사람의 모습은 신의 모습을 닮았구나." 하면서
95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가 섬기는 신이야말로 찬양받으실 분이구나." 하며 느부갓네살은 외쳤다.
"저들의 하느님께서, 어명을 어기면서까지 목숨 걸고 당신만을 믿고 저희의 신 아닌 다른 신 앞에서는
절하지도, 섬기지도 않는 이 신하들을 천사를 보내시어 구해 내셨구나.
*성 하나니야,미사엘,아자리야 순교자 축일:12월16일
구약의 다니엘서에 나오는 인물로서
모함에 처한 수산나를 하느님의 지혜와 신앙으로 구해주고,
우상을 섬기지 않고 버티다가 결국에는 불속에 던져지나
여기에서 하느님의 도우심으로 구해지고,
사자굴에서도 아무런 생명에 지장없이 지낸 인물로 등장한다,
유일하신 하느님을 증거하고 당대의 묵시문학을 드러내주는 상징적인 예언자이다.
다니엘서는 구약성서에 속한 예언서이다.
히브리어 경전은 다니엘서를 성문서(聖文書)에 포함시켜 에스델서와 에즈라서 사이에 배치시키고 있으나,
70인역(Septuaginta)이나 그 밖의 그리스어 번역본들은
이를 예언서로 취급하여 에제키엘서 다음에 배열하고 있다.
다니엘은 '감사'를 나타내는 뜻으로 아이들이 출생할 때 많이 붙여진 이름이다.
다니엘서의 기록에 의하면, 다니엘은 유대 왕 여호야킴이 바빌론으로 끌려갈 때 함께 갔다.
그는 느부갓네살 왕, 벨사살 왕, 다리우스 왕과 고레스 왕의 치하에서 궁중의 조언자로,
포로로 끌려 온 자기 민족을 위한 예언자로 활동하였다.
다니엘서를 포함하여 구약성서에 담고 있는 다니엘에 관한 보도들은 일관되지 못하며,역사성도 결여되어 있다.
이로 미루어 볼 때 다니엘은 결코 포로 시대의 역사적 인물로 볼 수 없다.
이스라엘의 지혜문학에서 비로소 형성된 상징적 인물이다.
이 상징적 인물의 기원은 분명하게 밝혀져 있지 않다.
이렇듯 다니엘서의 저자가 정확하게 누구인지는 모르나,
하시딤(Hasidim, '경건한 자들'이란 뜻) 사람들 중 한 사람으로 본다.
하시딤 사람들로 구성된 유태교 일파가 그 모습을 드러낸 시기는 대략 마카베오 형제들의 반란 이전이다.
이들은 율법에 충실했으며, 이방민족들의 영향력을 적극 반대했던 사람들이다.
당초 마카베오 형제들의 반란을 지지했던 것은 사실이나(1마카 2,42; 2마카 14,6),
이 반란이 종교성을 상실한 순수 정치적 실력행사로 판단되는 순간 이들은 거기에서 이탈하여
그들 고유의 행동노선을 밟아 간다.
이들의 직접적인 후예들이 바로 바리사이파 사람들이다.
다니엘서 저자는 그리스화 움직임에 대해 혐오감을 가지고 있으며, 성실하게 살고 있는 유태인들로 하여금
율법에 무조건 복종할 것을 강요하는 자들을 증오하고 있다.
그는 그리스 셀류쿠스 왕들의 침입으로 위기에 처한 동족들에게 용기를 북돋아 주며,
박해에 직면해서도 굽힐 줄 모르는 신앙을 고취시키고 있다.
다니엘서 9,4-19절과 3,26-45절이 하시딤 사람들의 정신을 잘 반영해 주는 기도문들이며,
본 기도문들에서 저자는 이스라엘의 무력함을 인정하면서 하느님의 선성만을 호소하고 있다.
사후(死後)의 상선벌악과 육신의 부활에 대한 교의를 처음으로 분명하게 표명해 내고 있는 것 역시
저자의 최대 업적으로 평가할 수 있다.
다니 3,52.53.54.55.56
○ 저희 조상들의 주 하느님, 찬미받으소서.
◎ 세세대대에 찬미 찬양 받으소서.
○ 영광스러운 당신 이름, 거룩하신 그 이름 찬미받으소서.
◎ 세세대대에 찬미 찬양 받으소서.
○ 영광스러운 궁전에서 찬미받으소서.
◎ 세세대대에 찬미 찬양 받으소서.
○ 당신 왕좌에서 찬미받으소서.
◎ 세세대대에 찬미 찬양 받으소서.
○ 케루빔 위에 좌정하시고 심연을 굽어보시는 이여, 찬미 받으소서.
◎ 세세대대에 찬미 찬양 받으소서.
○ 드높은 창공에서 찬미받으소서.
◎ 세세대대에 찬미 찬양 받으소서.
<불가마 속에 있는 세 명의 히브리 청년들>
3세기 초,프레스코화,프리실라 카타콤바,로마,이탈리아
[작품설명]
히브리 청년 세 명은 우상숭배를 하지 않았기 때문에 불가마 속에서 고통을 당하였다.
그러나 그들은 혹독한 고통을 당하면서도 두 손을 들고 하느님께 구원의 기도를 간절히 바치고 있다.
그들의 머리 위에는 비둘기가 올리브 가지를 물고 하늘로부터 내려오고 있다.
올리브 가지는 고통 속에 있는 사람들이
하느님의 은총으로 머지 않아 구원될 것이라는 희망을 상징하는 것이다.
- 천주교 서울대교구 성미술 감독 정웅모신부
[관련성서]
“너희의 부모와 형제와 친척과 친구들까지도 너희를 잡아 넘겨서 더러는 죽이기까지 할 것이다.
그리고 너희는 나 때문에 모든 사람에게 미움을 받겠지만 머리카락 하나도 잃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참고 견디면 생명을 얻을 것이다”(루가 21, 16-19).
(가톨릭굿뉴스홈에서)
다니엘서 입문
다니엘서는 그 문학 유형상 구약성서에서 유일한 책이다.
히브리 말 성서에서 이 책은 ‘성문서’에 속하는데,
에스델서로 끝나는 ‘축제 오경’ 다음, 그리고 에즈라서 앞에 들어 있다.
이러한 위치만으로도 이 책이 후대의 작품이라는 사실을 감지하기에 충분할 것이다.
그리스 말 성서에서는 다니엘서가 예언서로 분류되어 에제키엘서 다음에 나온다.
다니엘서의 문학 유형
글의 문학 형식은 크게 두 가지 요소로 결정된다.
글은 특정 집단을 대상으로 한다.
그래서 글이 그 특정 집단에서 수행하는
또는 수행해야 하는 구실이 그 문학 형식을 결정짓는 첫째 요소이다.
그리고 그 글을 둘러싼 문화권에서 통용되는 관습이 둘째 요소이다.
저작 당시의 배경에서 볼 때,
다니엘서는 그 때의 유다교 문학에서 애용되던 두 문학 유형,
곧 유다인들이 ‘하가다’라고 부르는 교훈적 이야기와
묵시 문학을 독창적으로 결합한 작품이라고 할 수 있다.
(1) 교훈적 이야기
교훈적 이야기는 사람들에게 신학적, 도덕적,
또는 지혜 문학적 가르침을 주기 위하여 이용되는 교육 방식이다.
이러한 이야기가 담긴 본문의 의미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비유를 해석할 때와 마찬가지로 ‘요점’을 포착해야 한다.
이야기의 주인공, 그의 행동이나 시련 등은 독자에게
자기 시대의 영성적 필요성과 관련하여 교화, 위로, 신앙 등의 메시지를 끌어 내게 한다.
유다교는 헬레니즘 시대에 주변의 여러 이교적 문화와 대립된다.
그럼으로써 하느님을 믿는 이들에게 온갖 문제가 제기된다.
그리스-시리아 제국이 강제로 그리스화를 추진하자,
유다 땅에 살던 이 신앙인들은 갈등과 곤경에 빠지게 된다.
게다가 일부 귀족들은 이미 그리스적 생활 방식을 받아들여 익숙해진 터였다.
바로 이러한 맥락 속에서 다니 1장, 3 - 6장, 13장, 14장을 읽어야 한다.
때로는 다니엘과 그의 세 동료의 행동이 다른 이들도 따라야 하는 본보기로 칭송되기도 한다(1장, 3장, 6장).
그리고 때로는 인간적 교만이나 하느님을 모독하는 이교도들의 망상을 강력히 단죄하거나(4장, 5장)
풍자적으로 비웃기도 한다(14장).
이러한 다니엘서의 이야기는, 어떠한 역사적 사건에서 비롯되기는 하지만 역사를 말하는 것은 아니다.
(2) 묵시 문학
기원전 587년에 시작된 바빌론 유배 때부터, 예언 문학은
점점 ‘하느님의 심판’과 또 그것에 이어지는 ‘구원’이라는 이중의 관심으로 특징지어진다.
아울러 이러한 ‘종말론적’ 관심에 부응하기 위하여 채택한 문학 양식도 점진적으로 변형된다.
그리하여 감추어진 것을 밝히는 점술과 묵시가 중시되는 문화의 맥락에서,
종말론이 ‘묵시’ 문학 안에 자리를 잡게 된다.
우리는 이러한 변천의 발자취를 비교적 선명하게 추적할 수가 있다.
이미 에제키엘과 즈가리야 예언자는
환시와 그것에 대한 천사의 설명이 통상적 문학 전통으로 자리잡은 표현 방식을 이용하였다.
유배 이후, 무명의 저자들 손에 이루어진 즈가 13 - 14장과
이사 24 - 27장에서는, 역사의 최종적 위기가 그려진다.
묵시 문학은 이러한 변천 과정의 끝 부분에서, 때로는 성서적 회상을 곁들인 문체를 써 가며,
새로운 시대의 요구에 맞춘 메시지를 제시하기 위하여 앞의 것들과 똑같은 방식을 채택한다.
이 메시지가 빈번히 ‘종말’의 예고로 종결짓는 역사에 관한 신학적 해설을 그 대상으로
하기 때문에, 저자들은 자기들의 시대와 거리를 두고 객관적 평가를 내린다는 의미에서,
자기들의 메시지를 과거의 인물이 말하는 것으로 설정한다.
그들의 명의인(名義人)이 바로 다니엘이나 에녹 같은 사람이다.
시간이 더 흐르면서 모세, 에즈라, 이스라엘의 열두 선조, 바룩, 또는 아담 등도 등장한다.
이리하여 가명 사용이 이 문학 유형의 본질적 원칙이 된다.
이러한 방식을 통하여 저자들은 한 작품 안에서,
자기들이 저술하는 때에 대단원에 다다르는 ‘과거’에 관한 신학적 해설,
그리고 하느님의 뜻이 지향해 나아가는 종말의 예고를 한데 묶을 수 있게 된다.
그러나 묵시 문학에서 아주 오래 전에 살았던 예언자들의 목소리가 중계된다고 할지라도,
그 본질적인 사항들은 분명히 구분된다.
위로의 메시지와 하느님 심판의 예고가,
이전의 예언자들에게서처럼 강력한 회개의 촉구를 동반하지는 않는다.
그리고 믿는 이들에게 주어지는 묵시는 위에서 오는 지혜로 제시된다.
교훈적 이야기들이 실생활에 관한 권고로 끝을 맺는 반면,
묵시된 이 지혜는 하느님의 은밀한 계획을 알려 주는데,
사람들의 실생활은 바로 이 하느님의 계획 안에서 전개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다니엘서에서는, 표현상의 변형들이 있기는 하지만 둘째 부분(7 - 12장) 전체가 완전히 묵시 문학에 속한다.
그러나 이 부분의 본질적인 주제들은 제1부에서부터, 곧 다니엘이 해몽하는 느부갓네살의 꿈이라든가(2장),
임금에 대한 심판을 뜻하는 큰 나무에 관한 꿈이라든가(4장),
벨사살 임금이 자기 왕궁의 벽에서 본 글자의 해독(5장)에서부터 이미 비롯된다.
환시와 꿈의 이러한 지속적 이용은,
당시 이교에서 애용하던 점술 문학과 부인할 수 없는 유사성이 있음을 드러낸다.
그러나 그러한 형식상의 유사성은 이교 점술의 무능에,
하느님의 ‘지혜’와 ‘영’에서 비롯되는 예언의 진실성을 대비시키는 데에 그 목적이 있다(2장, 4장, 5장).
다니엘이 상징적 환시의 수혜자가 되기는 하여도, 보이는 것의 뜻을 알려 주는 천사가 개입해야 한다.
네 마리 짐승과 “사람의 아들 같은 이”(7장), 숫양과 숫염소(8장), 그리고 페르시아 시대에서
기원전 164년까지의 역사를 그려 내는 거대한 ‘벽화’가(10 - 12장) 그러한 예이다.
또 미래에 관한 은밀한 계시로 간주되는 성서 본문이 있다.
예레 25,11-12와 29,10인데 거기에 나오는 “칠십년”의 해석이,
환시와 꿈의 해석과 비슷한 특수 기법으로 제시된다.
그러나 묵시 문학적 표현 방식은 특별히 어렵고 복잡하여 상세한 설명이 필요하다.
다니엘서의 주요 주제
(1) 신앙과 종교 생활의 근본 요소
다니엘서는 매우 전통적이면서도, 시대가 제기하는 여러 문제를 명철하게 살핀다.
잡다한 신들이 가득하고 그 상들 앞에서 예배하며(5,4),
신성하게 여기는 짐승들을 공경하고(14,23)
또 임금 자신이 신처럼 공경받기를 요구하는(6,8) 여러 이교 문화 앞에서,
이스라엘의 유일신론은 그 모습을 뚜렷이 드러낸다.
유다인들은 이러한 이교들을 물리치기 위하여,
내용이 그다지 깊지는 않아도 일종의 호교론을 구상해 낸다(14장).
그뿐만 아니라 특별히 생명을 잃는 위험까지도 감수해야 하는
신앙의 위대함을 찬양한다(3장; 5장; 14,29 이하).
모든 피조물이 한 분이신 하느님을 찬미하는 탈신화한 세상에서(3,52-90),
정치 권력 역시 그분의 절대적 통치를 인정해야 한다(4,31-32; 5,22-23).
정치의 권위도 하느님에게서 오기 때문이다(4,22ㄴ.29ㄴ; 5,18-19).
그분만이 시간과 역사의 주님이시며, 홀로 쥐고 계신 비밀들의 유일한 계시자이시다(2,20-23).
이러한 하느님의 현존을 상기시키기 위해서,
신앙의 언어는 독소가 제거된 옛 신화의 잔재가 존속하는 상징적 표현 방식을 이용한다.
곧 하느님께서는 시종들의 무리에 둘러싸여
나이와는 무관하게 살아 계신 ‘노인’이시라는 것이다(7,9-10).
여기에서 천사 세계의 묘사는, 동부 메소포타미아 곧 현재의 이란 땅에서 쓰이던 상징들에서
새로운 요소들을 빌려 옴으로써 복잡해진다.
“주님의 천사”가 불가마 속에 있는 세 젊은이(3,49-92),
그리고 사자굴에 있는 다니엘을 구출하기 위하여 개입하는 것만이 아니다(5,23).
또 다니엘이 본 환시와 꿈을 해석하는 열쇠가 에제키엘과 즈가리야의 경우처럼
천사에게서 주어지는 것만이 아니다(7,16 이하; 9,16 이하; 9,21; 10,9 - 11,2; 12,6 이하).
주님께서는 바로 이 초자연적 존재들을 통하여 세상을 통치하시고
당신의 계획을 실현시키시는 것이다(4,14; 10,13.20-21; 12,1).
하느님께서는 이러한 방식으로 당신을 드러내신다.
그리고 사람은, 인간의 개입 없이 이루어지는 경탄스러운 사건들 안에서
하느님의 현존과 활동을 깨닫게 된다(2,34.45; 3,11-13.20-22; 5,5; 8,25ㄴ).
유다교는 하느님에게서 받은 계시를 바탕으로 율법에 따라 실생활을 체계화한다.
이교인들로서는 뜻을 이해할 수 없는 율법의 규정들(예컨대 음식에 관한 금령들: 1,8)을
유다인들이 그토록 중시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율법은 법 체계를 세울 뿐만 아니라(13,62), 모든 도덕적, 제의적(祭儀的)
책무에 의미를 부여한다(3,18.41; 13,23).
율법은 또한 전례력을 확정짓는다.
그리고 어떠한 인간적 권세도 그것을 변경시킬 권한이 없다(7,25ㄴ).
율법은 유배의 땅에서도, 관습에 의해서 정착된 횟수와 자세에 따라 이루어져야 하는
기도의 형식을 제시한다(6,11).
이렇게 일정한 형식으로 고정된 기도문들이 다니엘서 이전부터 많이 전해져 오고 있었는데,
다니엘서의 운문들은 바로 그 표현법을 모방한다(2,20; 3,33; 4,34ㄴ; 6,27-28; 7,27ㄴ).
다니엘서에는 삶의 갖가지 상황에 직접 관련되는 개인 기도 외에도(13,42-43),
히브리/아람 말로 쓰인 본문과 그리스 말로 쓰인 첨가 부분에,
각기 해당 문학 유형의 표본이 되는 두 개의 참회 기도(3,25-45; 9,4-19)와
한 개의 찬미가(3,52-90)가 보존되어 있다.
그리스도인들도 복음으로 새롭게 열린 전망에 맞추어서 이 기도문들을
자기들의 기도로 받아들이는 데에 아무런 문제를 느끼지 않게 된다.
유다교는 이렇게 하여 동방의 여러 문명과 종교를 병합한 헬레니즘의
혼합주의적 문화 속에서도 자기의 독창성을 보존할 수 있었다.
다니엘서는 바로 그러한 방향으로 움직일 뿐만 아니라, 나름대로 그 문학 양식 속에서,
유다인들에게 위협이 될 수 있는 이 독특한 상황이 지닌 긍정적이고 희망적인 가능성을 드높인다.
곧 이 책은 그러한 환경 속에서도 충실히 살아가는 유다인들이
크게 성공한다는 사실을 강조하고(1장; 2,48; 3,30; 5,29), 그들 자신이
바로 자기들이 동화하여 살고 있는 사회를 구할 사람들임을 드러내며,
또 아무런 주저도 없이 참 하느님의 위대성을 고백하는 이교도 임금들이 회개하리라고
예상한다(2,46-47; 3,31-33; 4,34; 6,27-28).
이러한 전망은 바로 그 당시 이교도들을 이스라엘의 하느님께 인도하고,
때로는 율법을 지키게 하여 그들도 계약의 백성으로 동화시키는 선교의 전망이기도 하다.
(2) 역사 신학
하느님께서는 역사의 흐름 속에서 당신의 신비한 계획을 실행하신다.
예레미야의 보편주의와(예레 25) 제2이사야의 위로의 메시지는(이사 41,25-29; 45,1-6)
이제 폭넓게 구현된다. 이러한 사실을 구체적으로 표현하기 위하여,
다니엘서의 저자는 근동의 역사에서 꼬리를 물고 이어가는 제국들을 보여 준다
(바로 이 제국들과의 대결에서 하느님의 백성이 파멸되는 것처럼 보인다).
신상에 관한 꿈에서나(2장), 네 마리 짐승과 “사람의 아들 같은 이”에 관한 환시에서(7장),
그 메시지의 핵심과는 무관한 전통적 표현 양식을 이용하여,
바빌론, 메대, 페르시아, 그리스 제국의 연이은 출현을 상기시킨다.
그런데 이러한 관점에는 일종의 비관론이 지배한다.
이러한 역사는 위기가 계속되면서 점진적 타락을, 하느님에게서 떨어져 나간
인간 세계에 일어나는 악의 증가를 드러내기 때문이다.
2장에 나오는 거대한 상(像)이 머리는 금으로 되어 있지만, 발은 흙으로 되어 있다는 것이 바로 그 뜻이다.
그리고 앞의 것들보다 더 큰 악행들을 저지름으로써
누구보다도 더 흉악하게 나오는 7장의 네 번째 짐승도 마찬가지이다.
인간 역사는 대단원을 향해 나아가는 죄의 신비이다.
인간 역사는 또한 사람들에게 이로운 ‘권세들’
(“지극히 높으신 분의 거룩한 백성”에게 끊임없이 도움을 주시는 하느님과 그분의 천사들)과,
이를테면 이교도 제국들로 육화한 적대적 ‘권세들’이(10,13; 10,20 - 11,1 참조) 마주치는 장소이기도 하다.
바로 이러한 이유에서, 역사는 이미 여러 가지 상징으로 표현되는 마지막 심판을 향하여 나아가는 것이다.
거대한 상의 붕괴(2,44-45), 벨사살의 죽음(5,24-30), 짐승의 죽음(7,11.24-26),
숫염소의 파멸(8,23-25), 박해자-임금이기도 한(11,40-50) ‘파괴자’의 종말(9,27) 등이 그 상징들이다.
이러한 심판의 예고는 안티오쿠스 에피파네스 임금의 통치가 빚어 내는 비극적 상황과 직결된다.
그러나 그 뒤에서는, 하느님의 백성이 장차 겪게 될 모든 시련이 이미 그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한다.
그래서 이러한 예언은 위기 때마다 항구한 현시성을 지니게 된다.
요한 묵시록은 같은 방식으로 교회를 박해하는 로마 제국을 그려 낸다.
로마에 정복당한 유다인들은 특히 기원후 70년 예루살렘이 파괴된 뒤에
바로 다니엘서에서 위로의 메시지를 얻기도 한다.
(3) 희망의 메시지
거만한 이교도 권력자들뿐 아니라 불충한 유다인들에게도 내릴 하느님의 심판은,
하느님의 계획이 전개되고 공개되는 과정에서 극적인 한 순간일 따름이다.
예언자들의 약속으로 열린 희망의 전망들은,
그러한 심판을 넘어서서 이제 그 어느 때보다도 더 현실적인 것이 된다.
다니엘서의 저자가 이 약속들에 준거한다는 사실은,
예레미야의 한 구절을 현재의 상황에 따라 현실화하는 9장에서 명백히 드러난다.
저자는 분명, 약속의 의미를 지닌 모든 성서 구절을 이와 비슷한 전망 속에서 재독하였을 것이다.
그는 유배 이후의 예언자들에게서 비롯된 과정을 그 마지막 결론까지 이끌어 가면서,
옛 약속들을 지상의 역사와 한시적 결과의 한계를 벗어나는 곳으로까지 옮겨 놓는다.
이스라엘은 무엇보다도 먼저, 인간 역사의 실질적 종말을 가져오는 ‘하느님 나라’의 수탁자이며 수혜자이다.
제국들의 승계가 끝나는 곳이 바로 이 초인간적이고 초역사적인 ‘나라’이다(2,44).
저자는 하느님 앞으로 인도된 “사람의 아들 같은 이”의 모습으로(7,13-14)
이 왕국을 표현함으로써 그 초월성을 강조한다.
“지극히 높으신 분의 거룩한 백성”(이스라엘)은 이 나라를 지상에서 떠받치는 지주가 될 것이다.
그러나 그러한 소명을 감당할 수 있으려면, 이 백성은 다시 시련을 겪으면서 단련을 받아야 한다(11,35; 12,10).
이것이 바로 팔레스티나에 사는 유다인들이 받는 박해의 뜻이다.
이 박해는 후에 라비들이 ‘미래의 세상’이라고 부르게 되는 것에 곧바로 이어진다.
7장의 유비적 환시에서도, 또 12,1-4의 신탁에서도, 이 ‘미래의 세상’은 변모된 우주의 모습을 띤다.
유배 이후의 몇몇 종말론적 본문이 이미 이러한 생각을 예고하였다(이사 25,7-8; 30,26; 65,17-25; 즈가 14,6).
이러한 부분적 주제들이 이제, 거룩한 땅에서 영위하는 평화로운 삶에 관한 신명기의 약속을 훨씬 뛰어넘는
전체적 표현 속에 체계를 갖추게 된다. 사람들이 고대하는 바는 천상적 실재가 지상으로 밀려오는 것이다.
이러한 목표에 도달하기 위해서는 이스라엘 자신이 하느님의 심판을 받아야 한다.
“책에 쓰인 이들”(12,1), 곧 ‘남은 자들’만이 ‘미래의 세계’의 행복에 참여할 것이다.
그러나 이렇게 제시된 원칙은, 다니엘서가 저술되기 직전에 신앙을 위하여 목숨을 바친 유다인들에게도
그대로 적용된다. 이로써 저자는 순교자들의 체험으로 제기되는 문제에 대답하는 것이다.
그는 하느님께서 불가마에서도(3,28), 또 사자굴에서도 사람들을 구해 내실 수 있음을 강조하면서(6,22),
동시대인들에게 필요한 경우에 죽음과 맞서라고 격려하는 것으로 그치지 않는다.
그는 죽음의 희생물이 된 이들 안에서 바로 하느님의 권능이 그 ‘죽음’의 권능을 쳐 이기리라는 사실을
원칙으로 제시한다. 그들은 인간적으로 볼 때에 억울한 죽음으로 인간의 공동 운명에 동참함으로써,
‘미래의 세상’에 자리를 얻게 된다.
이로써 구약성서에서 처음으로 개인의 부활에 관한 약속이 뚜렷이 나타난다(12,2-3).
그와 동시에, 예언서들과 시편에서 자주 사용된 고전적 표현을 빌리자면,
단순한 ‘죽음’의 영역인 “저승”은 이제 하느님께서 계시지 않는 곳,
‘미래의 세상’에서 배제되는 곳으로서의 “저승”이 된다.
마카베오 하권은, 순교자들이 신앙을 보존하는 데에 이 희망의 메시지가
중요한 구실을 하였음을 입증한다(2마카 7,9.11. 14.23.29).
계시의 최종적 발전은 이 교의를 단순히 확인하는 것으로 그치지 않는다.
장차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을 이해할 수 있는 틀이 마련되는 것이다.
이렇게 다니엘서는 예언자들의 신학과 신약성서의 메시지를 결부시키는 데에 이바지한다.
(새번역성서에서)
*성 모세 예언자 축일:9월4일
*성 이사야 예언자 축일:7월6일
*성 엘리세오(엘리사)예언자 축일:6월14일.
*성 예레미야 예언자 축일:5월1일.
*성 아모스 예언자 축일:3월31일.
*성 즈가리아 예언자 축일:9월6일.
*성 다니엘 예언자 축일:7월21일.
*성 엘리야 예언자 축일:7월20일.
*성 에제키엘 예언자 축일:4월10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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