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ixtus II-BOTTICELLI, Sandro.1481.Fresco, 210 x 80 cm.Cappella Sistina, Vatican
축일:8월 7일
성 시스토 2세 교황과 동료 순교자
St. Pope SIXTUS II
Saint Sixtus II and his companions
San Sisto II e compagni Papa e martiri
(Papa dal 30/08/257 al 06/08/258)
Born : Greek
Papal Ascension : 30 August 257
Died : beheaded on 6 August 258 in a cemetery on the Appian Way, Rome, Italy
Canonized :Pre-Congregation
Sisto = variante di Sesto
성 식스또는 257년에 교황 성 스테파노를 계승하였다.
이때 황제 발레리안은 크리스챤을 박해하는 첫번째 칙령을 내렸다.
258년 군사들이 크리스챤을 습격했을 때, 식스또는 무덤 속에 있었다.
식스토 교황은 공동묘지로 사용하던 지하동굴에서
미사성제를 거행하는 도중에 4명의 부제들과 함께 잡혀 참수당했다.
그 당시에는 로마의 무덤들이 신자들의 집회 장소로 사용되었기 때문이다.
그는 아삐아에 있는 성 갈리스또 묘지에 안장되었다.
식스또와 함께 체포된 사람은 부제 성 야누아리오, 빈첸시오, 마뇨 그리고 스테파노이다.
그리고 이때 함께 있던 2명의 부제
즉, 펠리치시모와 아가비도는 교황 식스또와 함께 같은 날에 순교하였으므로,
로마 순교록에는 같은 날을 축일로 정하고 공경한다.
성 라우렌시오는 4일후에 순교했다.
집회의 자유는 언제나 독재자들이 국민에게 허용하지 않은 자유 중의 하나였다.
하지만 우리 선조들은 이 자유를 높이 평가한다.
발레리아노 황제는 257년 그리스도교를 반대하는 첫 법령을 선포했고,
그리스도인들이 집회를 갖는 것도 금했다.
식스토 교황은 1년 동안 교황의 지위에 있으면서 공동 묘지로 사용하던 지하 동굴에서
미사 성제를 거행하다가 4명의 부제와 함께 붙잡혀 참수 당했다.
함께 있던 2명의 다른 부제들은 같은 날 순교했고, 성 라우렌시오 (8월10일)는 4일 후에 순교했다.
식스토는 재임 기간 동안 이교도의 세례가 유효한지 아닌지에 대한 논쟁을 처리해야만 했다.
그는 그 문제에 대해서 긍정적인 견해를 가졌으며,
이교도로부터 세례를 받은 사람들에게 다시 세례를 주는 희랍 정교의 처사에 대해서도 관용적이었다.
식스토는 그 일을 의논하기 위해서 성 치프리아노에게 전령을 보냈는데 부정적인 답변을 받았다.
식스토는 오류에 젖은 사람들에 대해서도 인내심을 가져 줄 것을 부탁했으며
자신은 진리를 꿋꿋이 주장하는 것으로 만족했다.
마침내 오류가 최종적으로 단죄될 때까지 다른 교황들도 식스토와 같이 행동했다.
초대 교회 신자들이 박해를 피해 숨어 살았던 카타콤베에 관해서는 무시무시한 전설이 내려온다.
카타콤베는 그리스도인들이 비밀리에 미사를 드리는 장소로 사용되었지만 원래는 무덤이었다.
로마의 권력자들은 누구나 그리스도인들이 그곳에 숨어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식스토 2세 교황은 그곳에서 미사를 드리던 중 불시에 들이닥친 로마 군사들에 의해 순교했다.
초기 그리스도교인들은 무덤을 가장 위대한 예식에 사용하였다.
그들은 죽음에 들러 싸여 있으면서도 영원한 생명에 대한 약속을 믿고 기뻐하였다.
영생을 얻으려면 먼저 죽어야 한다는 것은 역설적인 이야기다.
여기에서 말하는 죽음은 육신의 죽음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죽어야 산다는 것은 우리를 이 세상에 붙들어 매는 끈이나 집착을 끊어 버리는 것을 뜻하며,
이기적인 욕망과 물질에 대한 소유욕을 버리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한 것들을 알게 될 때 우리는 비로소 죽음이 가득찬 카타콤베에서도 기뻐할 수 있었던
초대 교회 신자들의 마음을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St Sixtus Ordains St Lawrence-ANGELICO, Fra
1447-49, Fresco, 271 x 197 cm.Cappella Niccolina, Palazzi Pontifici, Vatican
성 치쁘리아노 주교 순교자의 편지에서
(Epist. 80: CSEL 3,839-840)
그리스도의 군사들은 멸망하지 않고 월계관을 받는다는 것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형제여, 이 교회의 모든 성직자들이 박해의 폭풍에 눌려
이 경황에 나갈 수 있는 사람이 하나도 없으므로 형제에게 즉시 답장할 수 없었습니다.
그래도 이곳 사람들은 경건한 생활로써 하느님께서 주시는 천상의 영광을 받을 마음의 준비가 되어 있습니다.
내가 로마에 보낸 사신들이 무사히 돌아왔습니다.
불확실하고 모순되는 여러 소문만 떠돌기 때문에
우리에 관해 어떤 결정이 내려졌는지 이 사신들을 통해 확실히 알고 싶었습니다.
사태의 진상은 다음과 같습니다. 발레리아누스 황제는 원로원에 칙서를 내렸습니다.
이 칙서에 의하면 주교와 사제와 부제는 즉각 사형에 처하라는 것이고,
원로들과 저명한 인사와 로마의 기사들은 자기 지위가 지니는 특전을 상실하고 재산을 압수당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재산과 특전을 몰수당한 뒤에도
그들이 그리스도교 신앙을 계속 고백한다면 목을 베겠다는 것입니다.
부인들은 재산을 압수당하고 유배형에 처하며,
궁중에서 일하는 사람들에 대해서는 이전에 신앙을 고백한 이들이건 현재 신앙을 고백하는 이들이건
재산을 압수당하고 투옥되어 황제의 소유지에서 노동을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발레리아누스 황제는 또 지방 총독들에게 보낸 우리에 대한 편지의 사본을 그 칙서에 첨부시켰습니다.
우리는 매일 같이 이 편지의 도착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신앙에는 변함이 없고 순교 앞에서의 우리의 각오는 확고합니다.
하느님의 자비로운 손에서 영원한 생명의 월계관을 받으리라는 확신으로 그것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씨스또와 그의 네 부제들이 8월 6일 묘지에 있을 때 치명했다는 소식을 알려 드립니다.
더욱이 로마의 집정관들이 이 박해를 무자비하게 계속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이라고 혐의를 받은 사람이 그들 앞에 끌려 오기만 하면 처형되고 재산을 몰수당합니다.
형제께서 이런 사실들을 다른 주교들에게 알려 주시기를 부탁드립니다.
그러면 그분들은 권고의 말씀으로 어디서나 그리스도교 공동체를 튼튼히 하고
이런 영적 투쟁을 준비할 것입니다.
우리 형제들은 각자 누구나 죽음을 생각하는 것 보다 불사 불멸을 생각해야 하고,
열렬한 믿음과 전력으로 주님께 헌신하며 신앙을 고백해야 한다는 것을 생각할 때
그것을 두려워하기보다 기뻐해야 합니다.
하느님과 그리스도의 군사들은 멸망하지 않고 월계관을 받는다는 것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형제여, 주님 안에서 내 내 안녕 하시기를 바랍니다.
*성 치프리아노(카르타고) 주교 순교자 축일:9월16일
*성 라우렌시오 부제 순교자 축일:8월10일
축일:8월7일
성 가예타노 사제
Saint Cajetan
St. Cajetan of Tienne
San Gaetano Thiene Sacerdote
(Vicenza, ottobre 1480 - Napoli, 7 agosto 1547 )
Born :October 1480 at Vicenza, Italy as Gaetano dei Conti di Tiene
Died :1547 at Naples, Italy
Beatified :8 October 1629 by Pope Urban VIII
Canonized :12 April 1671 by Pope Clement X
Gaetano = nativo di Gaeta, dal latino
1480년 이탈리아의 비첸차에서 태어났다.
파도바에서 법학을 공부한 후 법률가로서 평범한 삶을 살았던 성인은
36세에 서품을 받고 가난하고 병들고 어려운 사람들을 돌보는 데 일생동안 헌신했다.
그는 테아티노회라는 수도회를 설립했는데 이 수도회는 당시의 부패된 교회를 개혁하려는 운동이었다.
베네치아와 나폴리 지방에 이 수도회를 파급 시키는 데 노력했다.
나폴리에서 세상을 떠났다.
우리들과 마찬가지로 가예타노도 평범한 삶을 살았으며 처음에는 법률가로서,
후에는 사제로서 로마 교황청에서 일했다.
그는 36 세에 서품을 받고 곧 로마에 있는 하느님 사랑의 오라토리오회에 입회했다.
이것은 그의 인생의 커다란 전환이었다.
이 단체는 동정과 자비를 위해 헌신하는 회였다.
그는 42 세 때 베네치아에 불치병 환자를 위한 병원을 세웠다.
비첸차에서는 가장 하류층의 남자들로만 구성된 평판이 나쁜 수도회에 들어갔다.
그 때문에 그는 친구들로부터 가문을 손상시킨 사람이라는 노골적인 비난을 받았다.
그는 여러 마을을 다니며 환자와 가난한 이들을 찾아내어 도와주었다.
그 시대의 가장 큰 요구는 ’책임자와 구성원들’이 병들어 있는 교회를 개혁하는 것이었다.
가예타노와 3 명의 동료들은,
개혁의 최선책은 사제의 정신과 열정을 소생시키는 것이라고 결정을 내렸다.
그들은 함께 테아티노회로 알려진 수도회를 세웠다.
(그들 중의 한 사람은 후에 교황 바오로 4 세가 됨).
최초의 장상인 그들의 주교가 주교좌를 두고 있던 테아테(치에티)에서 테아티노회라는 이름이 나왔다.
그들은 칼 5 세가 1527 년 로마를 약탈하는 와중에 로마에 있던 그들의 집이 파괴되자 베네치아로 피신했다.
테아티노회는 프로테스탄트 개혁이 있기 전에 일어난 가톨릭 개혁 운동 중 가장 뛰어난 운동이었다.
그는 나폴리에 몬테 디 피에티(자선 기금)를 설립했다.
이는 많은 자선 단체 가운데 하나로서
저당물을 담보로 돈을 빌려 주는 비영리적 신용 기관 중의 하나이다.
이 기관의 목적은 가난한 사람을 돕고 고리 대금업자들에게서 그들을 보호하는 것이었다.
가예타노의 이 작은 기관은 마침내 정치적인 큰 변화와 더불어 나폴리 은행이 되었다
가스팔 디 티에네 백작과 마리아디 포르토의 아들로 태어난 그는
비첸사에서 세례를 받고, 두 살 때 그의 부친이 전사하는 불운을 안았다.
그는 어머니 슬하에서 자라나, 파두아 대학교에서 공부하여 민법과 교회법의 박사 학위를 받았다.
그는 곧 비첸사의 시의원이 되었고,
1506년에는 로마로 가서 교황 율리오 2세로부터 최초의 공증인으로 임명되었다.
또한 그는 신심 깊은 사제들로 구성된 신애회를 재생시켰다.
1513년, 율리오 교황이 서거하자 자신의 직책을 사임하고, 1516년에 사제로 서품된 후, 비첸사로 돌아왔다.
그는 거기서 성 예로니모의 오라토리오회에 입회하여 가난하고 병든 사람들을 위하여 일하다가,
베로나에서 이와 비슷한 회를 창설하였다.
1523년, 그는 로마로 가서, 후일 교황 바오로 4세가 된 요한 피에트로 카라파, 바울로 콘시글리에리
그리고 보니파시오 다콜레 등과 함께 교회를 개혁하고, 백성들에게 설교하며, 병자를 돕고,
최악의 경우에서 허덕이던 성직자의 신분을 개선하려는 목적으로
성직 수도회를 창설하여,1524년에 교황 클레멘스 7세의 승인을 받았다.
테아턴회라 부르는 이 수도회는 공동체 생활을 하는 정규 성직자들로 구성하고,
서원을 발하며, 사목직에 종사하였다.
처음에는 그리 성공적이 못되었다.1530년, 가예따노가 총장으로 선출되었다.
가예따노의 주요 업적 중의 하나는 전당포의 설립이었다.
후일, 그는 복자 요한 마리노니와 함께 몬테스 피에타티스를 설립하여
가난한 사람들에게 돈을 빌려주는 일로써 시민들의 복리를 위해 일하였다.
그는 트렌트 공의회 전에 있었던 가톨릭 개혁가들 중에서도 가장 뛰어난 성인이다.
그는 기도 생활과 이웃에 대한 사랑에서 뛰어났으며,
1547년 8월7일 나폴리에서 운명하였고 1671년에 시성되었다.
성 가예따노 사제의 편지에서
(Epist.ad Elisabeth Porto: Studi e Testi 177, Citta del Vaticano 1954, pp.50-51)
그리스도께서 믿음으로 말미암아 우리 마음에 거하시길 바랍니다.
나는 죄인이고 내 자신 아무것도 아니라고 생각하지만 하느님의 뛰어난 종들의 전구에 당신을 맡기고
그들이 당신을 위해 그리스도와 그 모친께 기도해 주시기를 기원합니다.
그러나 당신 스스로가 그리스도의 마음에 들게 할 수 있는 것만큼
다른 성도들은 할 수 없다는 것을 잊지 말아 주십시오.
열쇠는 당신께 있습니다.
그리스도께서 당신을 사랑해 주시고 도와 주시기를 바란다면,
당신은 먼저 그분을 사랑하고 모든 지향을 언제나 그분을 기쁘게 해드리는 데에 두어야 합니다.
그리고 모든 성도들과 피조물이 당신을 버린다 행도 그리스도께서는 당신에게 필요한 어떤 것이 있을 때
언제나 도와주신다는 것을 의심하지 말아야 합니다.
이승에서 우리는 아직 여행 중에 있는 순례자입니다. 우리의 본향은 하늘에 있습니다.
교만으로 부풀어 있는 사람은 누구나 바른길에서 벗어나 죽음으로 달려가고 맙니다.
우리는 이땅에 살고 있는 동안 영원한 생명을 얻고자 애써야 합니다.
그런데 죄로 말미암아 우리가 이 생명을 잃었기 때문에 그것을 우리 스스로는 얻을 수 없습니다.
우리를 위해 그것을 되찾아 주신 분이 계십니다. 그분은 바로 그리스도이십니다.
우리는 그 분께 항상 감사 드려야 하고 그분을 사랑해야 하며
그 분께 순명해야 하고 할 수 있는 한 그분과 함께 있도록 해야 합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우리 양식으로서 당신 자신을 주셨습니다.
이렇게도 큰 은총의 선물을 모르는 사람은 참으로 불행합니다.
우리는 동정 마리아의 아드님이신 그리스도를 차지 할 영예를 얻었는데 그분을 포기하면 되겠습니까?
그리스도를 받아들이려는 마음이 없는 사람은 불쌍합니다.
나의 딸이여, 내가 내 자신을 위해 하느님께 청하는 것을 당신을 위해서도 간절히 청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것을 참으로 얻고자 한다면 하나의 길 밖에 없습니다.
동정 마리아께서 그분의 위대한 아드님과 함께 당신께로 오시도록 간청하고 더 나아가
제단의 거룩한 성사에서 영혼의 참된 양식이 되시는 그분의 아드님을 주시도록 간청해야 합니다.
그러면 동정 마리아께서는 아드님을 당신께 기꺼이 주실 것이고
또 아드님은 당신을 아주 기쁘게 찾아 주시어 당신은 온갖 원수들이 잠복해 있는
이 어두운 숲을 무사히 통과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 원수들은 우리가 그러한 도움에 의탁하고 있음을 알게 될 때
멀리 떨어져 우리에게 아무런 해도 끼치지 않을 것입니다.
내 딸이여, 예수 그리스도의 뜻이 당신의 뜻에 복종하기를 희망하면서 그분께 접근하지 마십시오.
오히려 당신 자신을 주님께 맡기어
주님께서 당신을 맞아들이시고 원하시는 대로 당신을 인도하시도록 하십시오.
나는 이것을 바라고 이것을 권고 합니다.
또 내가 할 수만 있다면, 억지로라도 당신이 그렇게 하도록 만들고 싶습니다.
많은 가톨릭 신자들은, 만일 제2차 바티칸 공의회가
1962년 첫 회기중에 바로 중지되었다면 교회 성장에 큰 일격이 가해졌을 것이라고 생각할 것이다.
가에타노도 트렌트 공의회에 대해 똑같은 느낌을 가졌다.
그러나 가에타노가 말했듯이 하느님은 베네치아에서처럼 나폴리에도 똑같이 계시며,
트렌트 공의회나 제2차 바티칸 공의회(혹은 제3차 공의회)가 있든 없든 언제 어디서 나 계시다.
우리 스스로가 처한 환경이 어떻든 간에 하느님의 전능에 자신을 열어 보이면 하느님의 뜻이 이루어진다.
하느님은 우리와는 다른 성공의 기준을 가지고 계신다.
가에타노가 자기 수도회를 위한 집을 짓기 위해 나폴리에 파견되었을 때,
어떤 백작이 그에게 토지 소유권을 받아들이게 하려고 설득하였다.
그러나 그는 거절했다.
백작이 "나폴리 사람들은 베네치아 사람만큼 풍족하지 않기 때문에 돈이 필요할 것이다."하자
가에타노는 "그 말이 맞을 것입니다. 그러나 주께서는 두 도시에 똑같이 계십니다."라고 대답했다.
이 성인은 1480년 이탈리아의 비첸자에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는 근위병 총지휘자였는데 성인이 두 살때에 세상을 떠났다.
어린 두 형제는 성실한 어머니 슬하에서 고이고이 자랐다.
가예타노는 어렸을 때부터 사제가 될 결심으로 열심히 공부해 24세에 이미 법학 박사 학위를 얻었다.
그는 잠시 교회의 행정관으로 지낸후, 1516년 그의 나이 36세에 서품을 받았다.
사제가 된 후로는 예전보다 더 열성을 내어 자기 성화에 온 힘을 다했다.
그 이듬해 성탄 절, 그가 말구유 앞에서 열심히 기도를 하고 있을 때
갑자기 성모님께서 발현하시어 아기예수를 그의 품에 안겨 주셨다.
그때부터 그는 하느님을 사랑하기 위해서는 어떠한 희생이라도 사양하지 않으리라는 결심을 굳게 했다.
1518년에 그의 어머니가 세상을 떠났다.
임종하시는 어머니의 머리맡을 떠나지 않고 시중해 드린 가예타노는
그 후 오랫동안 비첸자에 머물러 있으면서 병자를 돌보기 위한 형제회를 세웠다.
또한 불치의 환자만을 수용하는 요양소를 설치하고, 그곳에서 항상 환자들과 지내고자 햇다.
그러다가 장상의 명령대로 베로나에서 베네치아로 옮기게 되었다.
그곳에서도 또한 병원을 세우고 손수 그 간호에 종사했다.
그의 친척들은 그런 사업을 대단히 반대하며 그에게 갖은 비난을 퍼부었으나
가예타노는 아무 말도 없이 겸손과 인내로 모든것을 받아들였다.
그를 만난 사람, 더욱이 가난한 사람들과 병자들은
그의 독실한 신앙심과 경건한 모습에 감화되지 않는 이가 없었다.
사실 그가 미사 성제를 올릴 때의 모습은 마치 천국에서 움직이는 성인과 같았으며
그의 강론의 힘은 가장 완고한 죄인이라도 능히 움직일 수 있을 힘을 가졌었다.
가예타노는 인류의 구원 사업을 더욱 크게 넓히기 위해 성직 수도회를 세울 생각을 하고
이런 일에 매우 신중을 기하고 심사 숙고하여 열심히 하느님의 가르치심만을 구했다.
그러면서 이 계획을 법학 친구에게 말했는데
그 친구는 이를 기뻐하며 격려해 줄 뿐 아니라 제일 먼저 회원이 되어 주었다.
그 시대의 유명한 주교 가라파가 이 수도회에 입회한 것은 그 후 얼마 안되어서였다.
이분도 역시 성인이시지만 성격 상으로는 가예타노와 아주 다른 분이었다.
대단한 정력가로서 아무리 활동을 해도 피로를 느끼지 않는 분이며, 대단한 정치적 수완의 소유자였다.
그러므로 가예타노에게 있어서는 수도회의 발전상 없어서는 안 될 귀중한 존재였다.
수도회 설립에 있어서 제일 먼저 필요한 것은 교황의 인가였는데
교황은 새 수도회의 인가를 대단히 주저했으므로 곤란한 점이 많았다.
그러나 가예타노를 아는 많은 명망가들의 간절한 청원도 있고 더욱이 가라파 주교의 덕망을 보고
마침내 교황 클레멘스 7세는 1524년 이 회를 인정했다.
수도회의 창립자는 가예타노지만 명칭은 테아틴회(Theatines)라 했다.
이는 겸손한 가예타노가 그 회의 초대 총장인 가라파 주교의 거주지인 테아티노를 따서
그 회를 불렀기 때문이다.
가라파 주교 역시 그 회의 창립자인 가예타노를
회의 창립자(사부,師父)로 섬기기를 서슴지 않았던 겸손한 분이었다.
회의 목적은 신자들에게 교리를 가르치고 병자들을 돌보며
하느님께 대한 흠숭의 예식을 성대히 하며 순명, 정결, 청빈의 서원을 지키며 자신을 성화하는 것이었다.
가예타노는 곳곳에 수도원을 건립하게 되어 각 지방에 여행하지 않으면 안 되엇다.
그럼으로써 가는 곳마다 그의 덕망이 나타났고 그의 열렬한 기도로 때로는 기적도 일어났다.
가예타노는 쟁론을 조정시키는 역할도 했는데 그럴 때마다 현명한 재판으로 당사자들을 언제나 감복시켰다.
이런 성인에게도 고통이 없을 수는 없었다.
1547년 나폴리 지방에 대혁명이 일어났을 때 시민들은
가예타노에게 불의 부당한 비방과 갖은 비난을 퍼부었다.
이에 큰 충격을 받은 그는 마침내 중병에 걸리게 되었고 담당 의사의 모든 치료에도 아무 효과가 없었다.
그래서 동료들은 다른 의사를 또 초청하려고 했으나 이 말을 들은 가예타노는
"저같이 가난한 사람에게는 의사 한 분 이면 충부합니다"하며 거절했다.
그는 병 중에 있으면서도 조금도 편안함을 찾지 않았다. 오직 열렬한 마음으로 성체를 영하고,
동료들에게는 자기의 부덕함을 깊이 사과하고
그들의 후의(厚意)를 감사하며 편안히 숨을 거두었다. 때는 1547년 8월 7일이었다.
그는 트리엔트 공의회 전에 있었던 가톨릭 개혁가들 중에서도 가장 뛰어난 성인으로 1671년에 시성되었다.
축일 : 8월7일
베르돔의 복자 아가탄젤로와 낭트의 복자 카시아노 순교자, OFM Cap.
Beati Agatangelo de Vindocino (Francesco) Nourry e Cassiano da Nantes (Gundisalvo) Vaz Lopez-Netto Sacerdoti cappuccini, martiri
+ Gondar, Etiopia, 7 agosto 1638
베르돔의 복자 아가탄젤로 순교자
Beato Agatangelo Noury Martire
Blessed Agathangelus of Vendôme , OFM Cap. MM (AC)
(Tours, 31 agosto 1598 - Gondar, 7 agosto 1638 )
Born:31 July 1598 near Vendome, France
Died:stoned to death or hanged with the cords of their own robes (records vary)
on 7 August 1638 at Dibauria, Abyssinia
Beatified:23 October 1904 by Pope Pius X; formal recognition on 1 January 1905
Canonized :pending
낭트의 복자 카시아노 순교자
Beato Cassiano Lopez-Netto Martire
Blessed Cassian of Nantes, OFM Cap. MM (AC)
(Nantes, 15 gennaio 1607 - Gondar, 7 agosto 1638 )
Born:1607 at Nantes, France
Died :stoned to death in 1638 in Abyssinia (modern Ethiopia)
Beatified :1904
Canonized :pending
아가탄젤로는 1598년에 방돔에서 태어났고, 21살 되던 해에 르 망의 카푸친회에 들어갔으며,
1625년에 사제로 서품되면서부터 시리아로 갈 때까지 고향에서 유명한 설교자로 명성을 떨쳤다.
또 알레뽀에서는 프랑스와 이탈리아 상인들을 상대로 사목활동을 하였으며,
그 동안에 아라비아어를 공부하여 대화나 강론에서 자유자재로 구사할 정도의 실력을 갖추었다.
그는 모슬렘 사회의 문맹을 퇴치하고, 터키인들에게 그리스도교회를 전하는 등,
당시의 교회가 위험하다고 금하는 사람들을 대상으로 선교활동을 계속하였던 것이다.
1630년에 카푸친회는 카이로에 선교지를 확보하고 활동을 개시하였는데,
아가탄젤로는 1633년에 그곳의 책임자로 동분서주하였다.
이때 마르세이유에서 3명의 선교사들이 합류하였는데, 이들 중에 낭뜨의 카시아노 신부가 가장 출중하였다.
카시아노는 즉시 아카탄젤로 신부의 오른팔이 되어 활동을 하였는데,
그가 특히 노력한 것은 로마 성좌와 곱트 교회간의 재일치를 도모하는 일이었다.
이들 두 선교사가 이 힘든 일을 계속하다가, 에티오피아 선교를 위하여 디바루아로 갔다가,
그곳의 왕인 바실리데스 앞으로 끌려갔다가, 결국은 순교하고 말았다.
교황 비오 10세는 이 두 분이 17세기에서 가장 위대한 선교사였다고 선포하였다.
자신들의 밧줄 띠에 매달려 교수형을 당한 곤다르의 카푸친 순교자들,
베르돔의 복자 아가탄젤로와 낭트의 복자 카시아노
떠났지만 잊히지 않았네!
200년 이상 동안, 그들의 시신이 세상에 잊힌 채 어느 한적한 아프리카 마을의 건조한 모래흙 밑에 묻혀 있었듯이, 그들의 이름도 교황청의 어느 비밀 문서보관소의 먼지 밑에서 영원히 묻힐 운명처럼 보였다. 물론, 그 두 명의 영웅적인 카푸친에 대한 기억이 완전히 이 지구상에서 사라질 것은 아니었다. 200년이나 된 후에, 또 한 명의 유명한 카푸친 선교사인 피오바(Piovà)의 굴리엘모 형제가 같은 나라인 에티오피아에 활동하러 갔을 때에, 그는 자신의 동료형제들의 묘표도 없는 무덤을 다시 되찾을 수 있었다. 뿐만 아니라, 그는 교회일치운동가 선교사로서 그들이 보낸 삶의 마지막 몇 해 동안에 대한 명확한 묘사와 그들의 마지막 시련과 신앙을 위한 순교 이야기를 종합했다. 굴리엘모 형제는 오늘날 마사야(Massia) 추기경으로 더 잘 알려진 사람이다. 그 두 사람에 대한 기억을 수세대에 걸쳐 상기해 온 에티오피아의 가톨릭 신자들로부터 그가 모아온 역사적으로 믿을 만한 증거들 덕분에 증거가 부족해서 오래 동안 질질 끌고 있었던 그들의 시복운동이 빠르게 발전했고, 1905년 1월 1일, 성 비오 10세 교황은 교회의 복자명단에 교회일치를 위해 순교한 그 두 명의 순교자인 ‘베르돔(Verdôme)의 아가탄젤로 형제’와 ‘낭트(Nantes)의 가시아노 형제’의 이름을 추가하게 되었다.
함께 나눈 수고! 함께 나눈 운명! 함께 나눈 영광!
복자 아가탄젤로와 복자 카시아노는 자신들의 인생의 마지막 4년 동안, 선교사로 아프리카에서 함께 일했고, 곤다르(Gondar)에서 한 교수대에 나란히 매달려 교수형을 받았다. 그리고 그들의 시신은 거의 에티오피아의 회교도가 다수인 어느 마을 입구에 하나의 무덤 속에 함께 묻혀 있었던 것이다. 아가탄젤로와 카시아노, 이 두 개의 지천은 분명 서로 다른 프랑스의 원천에서 솟아났지만, 이집트에서 하나로 합류되었고, 그곳으로부터 흘러 나와서 막을 수 없는 강물이 되어 에티오피아의 광야에서 영생의 바다까지 흘러들었다. 곤다르의 순교자인 이 두 명의 카푸친은 에티오피아와 에리트레아의 땅에서 취약하지만 급격히 성장하고 있는 카푸친 수도회의 부식(扶植)에 매일매일 여전히 물을 주고 있으며, 그와 동시에 그 아프리카의 고대국가들 안의 가톨릭교회의 못자리에도 철저하게 물을 대고 있다. ‘아가탄젤로와 카시아노’란 그들의 이름은 그들의 생애처럼, 언제나 교회전례상에도 카푸친 수도회 역사상에도 연결되어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들 각자는 서로 다른 문화적, 가족적 배경에 영향을 받은 제 유일한 개성과 자신만의 타고난 재주들, 그리고 카푸친 생활과 봉사활동에 대한 독자적인 경험을 간직하고 있다. 그 경험은 카시아노 형제가 이집트 알렉산드리아에 도착하여 처음으로 베르돔의 아가탄젤로 형제와 만나게 된 1634년 이전의 것이다. 알렉산드리아는 카시아노 형제가 자기 자신보다 훨씬 더 노련한 선교사였고 9세 연상이었던 아가탄젤로 형제, 즉, 훗날에 주님의 포도밭에서 함께 일하며 또 순교 동료가 될 아가탄젤로 형제와 처음 만났던 곳이다.
베르돔의 복자 아가탄젤로
사실상 카푸친들과 함께 자라난 베르돔 출신의 소년
아가탄젤로 형제는 1698년 7월 31일에 프랑스, 베르돔에서 태어났다. 1618년 그가 수도회에 입회하기 전까지, 그는 사실상 카푸친 형제들과 함께 자라났다. 그 도시의 선거재판소의 회장으로 일했던 그의 아버지, 프란치스코 누리(Noury)는 카푸친 수도회의 주된 기금 조성자였으며, 또한 수도회의 재무를 담당한 이사(理事), 즉 ‘영적인 친구’였다. 그는 아내인 마르가리타 베옹(Béon)과 함께 일곱 명의 자녀를 낳아 길렀다. 세례명으로 아버지의 이름을 따서 ‘프란치스코’라는 이름이 지어진 아가탄젤로 형제는 그들 자녀 중 셋째였다. 1606년, 카푸친들이 베르돔의 새 형제회 부지에 십자가를 세울 때에, 어린 프란치스코는 아버지와 함께 그 공적인 경축행사에 참여했다. 그때 주민들이 카푸친 형제들에게 보여준 그 열광적인 환영은 그의 어린 마음에 잊힐 수 없는 깊은 인상을 남겼다. 그리고 그는 세사르-베르돔(César-Verdôme) 학교에서 고전적인 교육을 받은 뒤, 결국 1618년 만 스무 살의 나이로 수도회에 입회했다.
“잿빛 추기경님”의 제자
르망(Le Mans)에 위치한 수련소에 들어갔을 때에, 프란치스코 누리는 ‘베르돔의 아가탄젤로 형제’라는 수도명을 받았다. 그의 수련장은 몬네이(Monnay)의 에지디오 형제였다. 1년 뒤, 종신 서약을 한 아가탄젤로 형제는 철학과 신학을 공부하기 위해 1620년 푸아티에(Poitiers)로 보내졌다. 푸아티에의 그의 교수들 중의 하나는 유명한 ‘파리의 프란치스코 형제’였다. 파리의 프란치스코 형제는 오늘날 프랑수아 르클레흐크 드 트럼블레이(François Leclerc du Tremblay)라는 세속명으로 더 잘 알려져 있는데, 당시 프랑스의 가장 힘 있는 인물인 리슐리외(Richelieu) 추기경의 영향력 큰 고문이었다. 그 형제는 훗날 아가탄젤로 형제와 그의 동료가 될 낭트의 카시아노 형제의 생활과 선교에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된다. (프란치스코회 수도복의 원래 색깔과 리슐리외 추기경에 대한 막강한 영향력 때문에 파리의 프란치스코 형제는 즉시 ‘잿빛 추기경님’이란 뜻인 ‘la Eminence grise(라 에미낭스 그리즈)’라는 별명을 얻게 되었다.) 1624년, 아가탄젤로 형제는 렌(Rennes)으로 파견되었는데, 서품을 받을 1625년까지 그곳에서 계속하여 학업을 닦았다. 그의 렌 신학교수들 중의 한 사람은 당시 또 다른 수도회 인물인 트레귀에(Treguier)의 프란치스코 형제였다. 사제서품 받은 후, 아가탄젤로 형제는 3년 동안 서부 프랑스의 인구 밀집 지역들을 복음화 혹은 재복음화 하기 위해 그곳들을 순회하는 설교자의 삶을 보냈다. 그 인구 밀집 지역들 중에는 푸아티에와 자신의 고향인 베르돔도 포함되어 있었다. 당시 그의 설교의 주된 목적은 듣는 사람들의 신앙을 강화시켜, 위그노(Huguenot)식 개신교의 영향력이 프랑스 공생활에서 커지는 것을 막으려는 것이었다.
‘우연한’ 외방 선교사가 주님의 포도밭에서 헌신적인 일꾼이 되다
1628년, 렌에서 설교하는 동안에 아가탄젤로 형제의 생활에 얘기치 않은 사건은 발생했다. 그 사건이 비록 하느님 섭리에 의해서 발생한 것이었지만, 역시 아가탄젤로 형제의 옛 교수이자 ‘잿빛 추기경님’이라고 일컬어 졌던 파리의 프란치스코 형제의 정치적 책략에 의해서도 발생된 것이었다. 중동으로 떠날 카푸친 선교사들의 단체의 한 단원이 출발하기 전 병에 들었는데, 그 대신에 베르돔의 아가탄젤로 형제가 파견되었다. 파리의 프란치스코 형제는, 당시 자리가 확고하면서도 여전히 영적으로 융성한 카푸친 작은 형제회에 입회하기 위해 모여드는 수많은 프랑스의 활기찬 젊은이들을 동방 교회와 로마 교회와 재통합을 이루고자하는 그의 원대한 계획에 이상적인 도구들로 보았다. 프란치스코 형제가 ‘전 세계 복음화’를 목표로 한 이 대(大)계획을 세운 동기는 하느님의 더욱 더 큰 영광을 위해서는 물론이고, 또한 국제무대에서 주도적 역할을 하고자 갈망하는 프랑스의 영향력을 드높이기 위함이었다. 1629년 4월 29일, 계획대로 아가탄젤로 형제는 시리아의 지중해 연안에 위치한 주요 항구도시인 알레포(Aleppo)에 상륙했다. 그는 곧바로 문화적으로 다양하고 민족적으로도 이질적인 중동 나라의 대다수의 국민들이 쓰는 공동언어인 아랍어 공부에 투신했다. 또한 시리아는 대다수를 차지하는 이슬람교도들과 함께 평화롭게 공존하고 있는 여러 서로 다른 그리스도교 교파들로 된 사회였다. 그곳에는 전례에서 여전히 예수 그리스도의 모국어인 아람어를 쓰는 시리아 동방 교회 외에, 그리스 정교회 신자들과 레바논 마론파 가톨릭교도들, 그리고 아르메니아 그리스도인과 소수 라틴 전례를 사용하는 가톨릭 신자들도 있었다. .아가탄젤로 형제는 유럽에서 해왔던 대중 설교 대신, 그 지역 교회 지도층과 인맥을 맺고 그들과 인내 있게 대화하는 것이 하느님을 위한 영혼들을 얻는데 훨씬 더 효과적인 방법임을 곧바로 깨달았다. 그는 자신의 메시지를 개개인에게 맞추는 것을 습득했고, 대화 상대의 실정에 따라 재조정이 가능한 짧은 연설을 준비하곤 했다. 그는 단 1년 동안 언어를 공부한 다음 일상 구어체 아랍어로 적절하게 설교할 수 있었다. 구어체 아랍어는 주로 문학에서 사용되는 언어인 고대 아랍어와 약간 다르다. 아가탄젤로 형제는 학업적인 공부와 아랍어 실력이 중동에서 효율적으로 일하려는 모든 선교사들에게 필수라고 확신했다. 고향으로 보낸 편지에서, 그는 새로운 선교사들에게 좋은 아랍어와 라틴어 책들을 함께 가지고 오라고 권하곤 했다. 그는 직접 귀제어스(Guiggeus) ‘Thesaurus linguae arabicae’라는 라틴어-아랍어 사전을 주문했으나, 그가 이집트로 떠날 때가지 도착하지 않아 그는 그 책을 중동을 복음화시키기 위해 일하는 동료형제들에게 물려주었다. 아가탄젤로 형제는 동료 형제들 중 그 누구보다 아랍어를 잘하는 편이었지만, 그는 자신의 아랍어 실력이 학술적인 면에서 그릇된 교리를 논박하고 교의 진리에 대한 가톨릭교회의 입장을 설명하는 데에 많이 부족하다고 늘 한탄했다. 시리아에서 그리고 나중에 레바논에서, 그는 교회 간의 대화를 촉진함으로써 분리된 그리스도인들 간의 화해를 조성하려 했고, 그의 노력은 어떤 정도까지 성공했다. 그는 시리아의 한 주교를 가톨릭신자로 개종시키는데 성공했다. 그리고 그 고위성직자가 그 지방 카푸친회 선교운동의 기반을 굳히는 데에 크게 이바지했다는 것이 드러났다. 레바논 전역에서의 아가탄젤로 형제의 설교는 큰 무리의 군중을 끌어 모으곤 했다. 비록 레바논의 마론파 가톨릭교회의 안티오키아의 총대주교는 아가탄젤로 형제의 전교 활동을 찬성했지만, 마론파의 다른 고위성직자들은 그의 활동을 별로 대단치 않게 생각했다. 아가탄젤로 형제는 ‘마론파 총대주교의 총대리’의 수그러들 줄 모르는 적대감의 결과로 설교하던 그 고장들에서 쫓겨났지만, 레바논에서의 그의 전교활동은 매우 성공적이었다. 그래서 어떤 사람들은 그를 ‘레바논의 사도’라고 일컫기도 했다.
그가 이집트에서 했던 도착화의 첫 발걸음
1633년, 아가탄젤로 형제는 이집트에 위치한 카푸친회의 선교지로 파견되었다. 당시 이집트는 콥트 교회의 총대주교인 마태오 3세 교황과의 전도유망한 대화가 이루어질 것 같은 나라였다. 그는 그곳에서 콥트교회의 지도층과 접촉했다. 콥트교회의 주교들은 언제나 수도승들 중에서 뽑힌 이들이기 때문에, 아가탄젤로 형제는 이집트 내의 그 수도승원들을 방문함으로써 자신의 활동을 시작하곤 했다. 그는 태배(Thebaid) 지방 사막에 사는 성 안토니오의 수도승들과 몇 개월 동안 살았고, ‘와디 엘 나트룬(Wadi El Natrun)’에 위치한 성 마카리오의 수도승원에도 몇 개월 동안 머물렀다. 머지않아 프랑스에서 추가 선교사들이 이집트로 파견되었고, 그들 중 낭트의 카시아노 형제는 알렉산드리아에 가장 먼저 도착한 사람들 중의 한 사람이었다.
낭트의 복자 카시아노
어느 이민자의 아들의 어린 시절 꿈
카시아노 형제는 1607년 1월 16일에 프랑스 북서부에 위치한 루아르(Loire) 강변 도시 ‘낭트’에서 태어났다. 그의 부모, 요한 로페스 네토(Lopes Neto)와 귀다 달람으라스(d’Alamras)는 포르투갈에서 이주하여 낭트에 정착한 상인들이었다. 그들의 갓난 아들과 그 아이의 쌍둥이 누이는 태어난 다음날에 성 시밀리아노 성당에서 세례를 받았다. 남자아이는 ‘군디살보(또는 곤살보)’라는 세례명을 받았는데, 무슨 까닭인지 모든 사람들이 그를 ‘바스네(Vasenet)’라고 불렀다. 쌍둥이는 독실한 가정에서 자라났다. 그리고 바스네는 어릴 적부터 근처에 있는 카푸친 형제회에 방문하곤 했다. 카푸친 형제들의 생활양식에 깊은 인상을 받은 그 소년은 겨우 만 9살이 되었을 때, 처음으로 수도회 입회신청을 내게 되었다. 후일 다시 신청할 수 있을 때가지 계속 공부하라는 권고를 받은 그는 그 도시의 성 클레멘스의 중고등학교에 다니면서 훌륭한 고전 교육을 받았다. 그는 언어 공부에 탁월하여 즉시 히브리어에 능통하게 되었다. 그 동안에도 그는 덕에 있어서도 꾸준히 진보했고, 카푸친회 입회를 준비하기 위해 고행과 정신 기도를 생활화할 줄을 배웠다. 그는 학교에서 교사들의 사랑을 받았고, 예리한 지능뿐만 아니라 어린애 같은 순진함으로도 유명했다. 결국 만 15살 때에 그는 다시 한 번 더 카푸친 작은 형제회에 입회 신청을 냈다. 그렇지만 부모의 반대로 인해, 그가 만 17살까지 수련자로 받아들여지게 되기를 기다려야 했다.
외방선교지에 가기를 열망했던 젊은 카푸친 언어학자
1624년 2월 6일, 군디살보 로페스 달람으라스(Lopes d’Alamras)는 앙제(Angers)의 위치한 카푸친 수련원에서 수련자의 수도복을 입게 되었고, ‘낭트의 카시아노 형제’라는 수도명을 받았다. 수련자로서 그는 겸손하고 순종적이며 고행을 잘하는 형제로 주목받았다. 1625년 서약한 다음, 그는 철학과 신학을 공부하기 위해 렌으로 보내졌는데, 마침 그곳에 있는 그의 교수들 중의 한 사람은 몇 년 전에 같은 형제회에서 아가탄젤로 형제에게 신학을 가르쳤던 트레귀에의 프란치스코 형제였다. 아가탄젤로 형제와 카시아노 형제는 같은 곳에서 살며 같은 교수들 밑에서 공부했지만 그들 고향인 프랑스에서 정작 서로 만난 적은 한 번도 없었다. 학문을 닦으면서도 카시아노 형제는 선교사가 될 꿈을 품었고, 이러한 점을 염두에 둔 그는 끊임없이 자신의 언어기술을 연마했다. 그는 별 어려움 없이 시험을 잘 봤고 1631년에 사제 서품을 받게 되었다. 그가 선교지로 파견되기를 기다리는 동안, 렌에서는 전염병이 발생했고, 1631부터 1632년까지 도시 전역에 퍼지게 되었다. 신수품자인 카시아노 형제는 도시 외곽에서 병자들을 보호하는 형제들의 집단에 동참할 허락을 청하였고, 그 허락을 받게 되었다. 그 뒤, 그는 다시 한 번 더 공부를 시작했고, 이어서 2년 후, 그 사이에 수도회의 파리 관구의 관구봉사자가 된 그 유명한 ‘잿빛 추기경님’인, 파리의 프란치스코 형제에 의해 그는 북아프리카의 카푸친 선교지로 파견되었다. 그리하여 그는 지본(Dijon)의 베네딕토 형제라는 동행자와 함께 마르세유를 떠났고, 1634년에 알렉산드리아에 도착하게 되었다.
가공할 만한 한 팀이 된 복자 아가탄젤로와 복자 카시아노
카푸친 ‘교회일치운동가’들
이집트에서, 카시아노 형제는 아가탄젤로 형제가 진행하고 있었던 교회일치운동과 콥트교회 총대주교와의 교회 간 대화에 협력하게 되었다. 카시아노 형제가 그 프로젝트에 기여한 것은 청년 특유의 열정뿐만 아니라, 그 자신의 타고난 학문적 탁월성과 언어적 재능이었다. 이와 대조되어 아가탄젤로 형제가 기여한 것은 노련한 선교사의 실제적 경험과 신중함과 노하우였다. 그들 두 사람이 함께 하면 가공할 만한 팀이 되었다. 그들은 콥트교회의 지도자들과 접촉한 다음, 그쪽 교회인사들과 신앙의 진리에 대한 대화를 하는 일에 종사했다. 그들은 서로간의 어떠한 오해와 장애가 없도록 최선을 다했고, 성령께서 인내 있게 천천히 일하실 수 있도록, 또 완전한 교회일치에 이르는 길을 닦으실 수 있도록 그들의 모든 신뢰를 그분께 두었다. 동시에 그들은 로마의 교회 간부들에게, 특히 함께 예배하는 일에 있어서, 이른바 분파적 교회에 속하는 콥트교도들에게 접근하는 데에 있어서는 보다 더 유연한 접근 방식을 채택할 것을 권했다. 아가탄젤로 형제는 그러한 결정들은 현지에 있는 사람들의 판단에 맡기는 편이 더 나은 것이라고 생각했다.
새롭고 외견상으로 유망한 카푸친 선교지, 에티오피아
이제, 그들은 유망한 선교지로 보이는 에티오피아를 목표로 하고 있었다. 그 카푸친들은 로마 교황에 의해 그곳으로 파견되었는데, 그곳은 에티오피아의 새로운 ‘왕들의 왕’, 파실리데스(Fasilides - ፋሲለደስ) 황제에 의해 추방된 예수회 선교사들을 대신하는 자리였다. (‘왕들의 왕’ 또는 ‘왕중왕(王中王)’라는 에티오피아 황제의 명칭은 토착어로 ‘네구스타 나가스트(Negusa Nagast - ንጉሠ ነገሥት)’이라는 말의 직역이다.) 파실리데스 황제는 자신의 아버지 수세뇨스(Susenyos - ሱሰኒዮስ) 1세 황제 뒤를 이어서 에티오피아의 왕위에 올랐었는데, 가톨릭교회로 개종한 수세뇨스와 달리 파실리데스 황제는 가톨릭교회를 몹시 싫어하여 외국에서 온 선교사들뿐만 아니라 현지 원주민 가톨릭 그리스도인들마저 박해하는 것을 서슴지 않았다. 이러한 상황에서, 에티오피아의 관구장대주교에 어울릴 만한 후계자가 알렉산드리아의 콥트 총대주교에 의해 임명된다는 것은 로마의 교황과 가톨릭교회 전체에도 적지 않은 관심사였다. 그 카푸친 선교사들은 가톨릭 교리에 개방적이고 가톨릭 신자들에 대해서도 호의가 있어 보이는 ‘아리미미오스(Arimimios) 신부’라는 이집트의 수도승을 그 직책에 추천할 수 있다고 확신했다. 아리미미오스 신부는 적절한 절차에 따라 에티오피아의 ‘아부나(Abuna)’, 즉 관구장대주교로 주교서품을 받았다. 하지만, ‘마르코스 아부나’라는 즉위명을 삼은 그 새로운 관구장대주교는 곧 가톨릭 선교활동에 대한 적대감을 품게 되었고, 자신의 옛날 친구들이었던 카시아노와 아가탄젤로 형제들에게 등을 돌렸다. 그것은 그가 (스스로 ‘베드로 레오’라고 부르곤 한) 라이프치히(Leipzig) 출신의 ‘베드로 헤예를링(Heyerling)라는 순회하는 독일 루터교도의 반가톨릭적 영향을 받게 되었으며, 또 수많은 에디오피아 콥트교회의 반동주의자 성직자들에 의해 압력을 받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국경선에서 체포되어 수도에서 재판받고 친구에게 배신당하다
1637년 12월 하순, 두 형제는 에티오피아로 출발했다. 그들은 총대주교의 충고대로 달갑지 않은 주목을 피하기 위해 여행 말미에는 카푸친 수도복 위에 콥트교의 사제복을 입었다. 그러나 에티오피아에서 선교지를 설립할 그들의 계획은 그 나라에 있는 정상들에게 이미 알려져 있었다. 그 두 선교사는 도중에 해당 지방의 여러 파샤(즉 주지사 또는 영주)들의 대상(隊商)의 호위를 받으며 수개월 동안에 누비아(Nubia)의 사막을 횡단했다. (‘카라반’이라고도 하는 ‘대상(隊商)’이란은 낙타나 말에 짐을 싣고 떼를 지어 먼 곳으로 다니면서 특산물을 교역하는 상인의 집단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여행은 매우 길고 매우 힘든 여행이었다. 결국 그들은 에티오피아의 고지대 평야에 이르렀지만, 데보레흐(Deborech)라는 국경 도시에 발을 내디디자마자 체포되어 고문을 당했다. 알렉산드리아의 총대주교인 마태오 3세의 추천서들은 압수되어 그것은 형제들의 안전 통행권을 보장하는 데에 별로 도움이 되지 않았다. 1638년 8월 5일, 베드로 헤예를링의 선동으로 그들은 노새의 꼬리에 매달려 당시 제국의 수도였던 곤다르로 끌려갔다. 그들의 목과 손이 사슬로 결박되는 동안에 카시아노 형제는 다음과 같이 소리쳤다. “이것은 우리가 이 멀고 먼 나라들로 와서 구하려고 했던 그 고귀한 보석들입니다!” 형제들은 황궁 소속 신하들에게 신문을 당하고 교도관들에게 학대당하게 되자 예전 대화 상대였던 마르코스 아부나에게 호소해 보았다. 하지만, 불행하게도 베드로 헤예를링은 이미 대주교에게 말하여서 아가탄젤로 형제가 자신을 퇴위시키기 위해 에티오피아로 와 있는 것이라고 그를 설득시킨 상태였다. 그래서 아부나 마르코스는 선교사들을 돕기 위해 자신의 도착을 지연했다. 결국 8월 7일, 그가 카푸친들의 재판소에 나타났을 때에는 옛 친구들을 변호하러 온 것이 아니라 단죄하러 온 것이었다. 그는 자신의 총대주교에게도 배신감을 느꼈던 모양이었다. 그는 카푸친 선교사들에게 욕을 퍼부으면서도 자신의 장상인 마태오 3세 총대주교에 대해서도 서슴지 않고 온갖 욕설을 내뱉었고, 총대주교를 자신과 에티오피아 내의 콥트교회 전체에 대한 역모에 연루된 자로 비난했다. 마침내 두 카푸친 선교사에게 최후통첩은 내려졌다. 그들은 콥트교 신앙을 받아들이지 않으면 사형에 처해지게 되었다. 이에 대응하여, 그 지방의 말을 할 줄 알았던 카시아노 형제는 둘의 이름으로 가톨릭교회의 신경을 큰소리로 외치며 고백하기 시작했다.
자신들의 밧줄 띠로 같은 교수대에 매달려 교수형을 받다
카시아노 형제가 신경을 끝내기도 전에, 미쳐 날뛰는 군중은 베드로 헤예를링의 열변에 자극 받아 카시아노 형제와 아가탄젤로 형제를 목매달기 위해 그들을 교수대로 끌고 갔다. 피에 굶주린 그 군중은 급한 나머지 목을 맬 밧줄을 가지고 오는 것을 잊어버렸지만, 두 형제는 자신들의 프란치스칸 밧줄 띠를 벗어 그것들을 대신하여 사용하라고 건네주었다. 그러므로 그 두 명의 거룩한 카푸친 사제는 서로에게 사죄경을 외어 준 다음, 자신들의 밧줄 띠로 교수대에 매달렸다. 하지만, 밧줄 띠가 거칠어서 올가미가 너무 느리게 죄어지고 있었으므로, 성난 군중은 카푸친들의 죽음을 재촉하고 그들에게 고통을 더 증가시키기 위해 그들에게 돌을 던지기를 시작했다. 돌 하나가 아가탄젤로 형제의 한쪽 눈을 쳤고, 그의 눈이 나가떨어졌다. 얼마 후에, 바로 1638년 8월 7일인 그날에, 곤다르의 순교자들인 베르돔의 아가탄젤로 형제와 낭트의 카시아노 형제는 그들의 마지막 숨을 거두었다.
그들의 무덤 위에 치솟은 불기둥
그들의 시신은 근처에 있는 무덤에 묻혔고 돌로 덮어졌다. 그 지역 주민들은 밤이면 그 돌들에서 불꽃들이 솟아올라 무덤 위로 불기둥이 생기는 것을 증언하곤 했다. 그 지역 가톨릭 신자들이 시신을 ‘아자조(Azazo)’라는 한적한 회교도 마을 입구와 가까운 곳으로 이장할 때까지 이 현상은 매일 밤 계속 일어났다. 가톨릭 신자들이 무덤을 이장한 이유는, 자신들의 범죄의 모든 흔적을 없애려 했던 그 지역 당국에 의해 그 무덤이 파해져지는 것을 피하기 위함이었다. 바로 이 두 번째 무덤은 주민들이 약 200년 후 마사야 추기경에게 가르쳐준 무덤이다. 1928년, 어느 지역의 사제는 에티오피아로 여행해온 이탈리아 사람에게 그 무덤 현장을 보여주며 다음과 같이 단순하게 설명했다. “이곳은 평지에서 올라온 그 두 외국인이 매장된 위치입니다. 이분들은 파실리데스 사람들에게 죽임을 당했습니다.”
곤다르의 순교자들 - 선교와 교회일치운동과 카푸친 형제성에 대한 증거자들
베르돔의 복자 아가탄젤로와 낭트의 카시아노 형제는 신앙을 위한 영웅적인 순교자들일뿐만 아니라, 당시의 규범에 따라 그들의 사목활동 대상이 된 사람들을 이해하고, 그 사람들의 언어와 종교적인 문화들과 다양한 역사를 배우고, 또 그 사람들과 함께 진정한 ‘교회일치’의 대화를 이어나가기 위해 최선을 다했던, 특별히 타고난 선교사들이었다. 그들은 가톨릭교회와 그 교회가 가르치는 근본적인 진리에 꾸준히 충실하면서도, 동시에 자신들이 일해 왔던 문화적, 종교적 환경에 기꺼이 적응한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나이와 배경과 성격의 차이에도 불구하고 서로간의, 그리고 그리스도와의 친교 안에서 함께 일하고, 함께 살았으며 함께 죽은 참된 더욱 작은 형제들이었다. 합류된 그들의 순교자 피는 그들의 선교적, 문화적, ‘교회일치적’, 종교적 노력을 완성하는 역할을 할 뿐만 아니라, 카푸친 형제적 생활의 진정한 아름다움에 대한 확고한 증거가 되는 것이다.
“판단을 내리기 위해서 사람은 모든 상황, 즉 장소, 시간, 사람들, 전례, 그리고 이와 비슷한 기타의 것들에 대한 완전하고 정확한 지식을 가지고 있어야 합니다. 그리스도교(나라들)의 교사들은 이곳 나라들의 관례에 대해 모르고 있기 때문에 그러한 지식을 가질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제가 보기로는 이러한 것들에 대한 결정은 선교사들에게 맡겨야 합니다. 옛 시절에 그들은 그러한 성사에서의 교류(communcatio in sacra)는 금지되지 말아야 한다고 판단했습니다. 이에 이의를 가진다면, 선교지에서 그 어떤 좋은 일을 함에 있어 필요한 모든 수단과 희망은 파괴되어 버립니다. 실제로 그것은 수많은 어려움을 일으킵니다. 이곳에 수많은 콥트교도들이 있는데, 저는 그들의 전례서들에서 이단인 디오스코러스(Dioscorus)와 세베러스(Severus)을 향한 탄원들 외에는 아무 오류도 발견하지 않았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이단들의 그러한 탄원을 제외한다는 의무 하에, 이 책들을 미사 거행에 사용해도 될 것을 사제들에게 허가해주었습니다. 그리고 그 사제들은 백성에게 추문을 일으키지 않고 그렇게 하고 있습니다.” - 베르돔의 복자 아가탄젤로
“이것(사슬)은 우리가 이 멀고 먼 나라들로 와서 구하려고 했던 그 고귀한 보석들입니다!” - 낭트의 복자 카시아노
(카푸친 작은형제회홈에서)
[이콘] 그리스도와 성 메나스. 6세기.루브르박물관,파리
목판에 그려진 이콘 중 현재 가장 오래된 것 중의 하나로 콥트 교회에 기원을 두고있다.
(이콘.신비의 미-장긍선신부편저.참조)
이집트 정교회에서 만들어진 가장 오래된 이콘 가운데 하나로서,
구세주 예수님과 곱틱(Coptic)교회의 수도원장 성 메나(Mena)와의 친교가 잘 담겨져 있다.
(정웅모신부.서울대교구 성미술 감독)
여러분들은 나의 벗들입니다.
이 이콘을 자세히 보면 메나스라고 전해진 성인 곁에 나란히 서서 그의 어깨에
다정히 당신 오른 손을 얹고 계시는 예수님은 왼손에 복음서를 들고 계십니다.
메나스는 예수님을 사랑하기에 그분과 함께 복음을 선포할 것입니다.
그런데 메나스는 자신의 무능력함을 체험합니다.
대부분의 예언자들이 그러하였듯이 자신의 길에서 너무나 지나친 것을 요구한다는 생각이 듭니다.
’저는 말재주도 없습니다’, ’저는 아직 나이도 어리고 체험도 부족합니다’라고 거듭 고백합니다.
그런 메나스는 자신이 가고 있는 길에 예수님께서 정겹게 어깨를 마주하시는 가장 사랑하는 친구로서,
가장 소중한 친구로서 예수께서 늘 함께 계심을 체험합니다.
"혹, 세상의 모든 사람들이 나를 저버리는 일이 있을지라도,
혹 어미가 어린 젖먹이를 버릴지라도, 주님께서는 나를 떠나지 않으리라"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이런 체험을 통해 메나스의 나약한 믿음이 하느님 안에서 굳건해 집니다.
주님이 함께 하시기에...
그분께서 함께 가시기에 자신의 약점이나 사람들의 인정이나 평가에 얽매이지 않습니다.
그분께서 함께 가시니 힘이 납니다.
(소공동체길잡이2003년7,8월호에서)
요한 15,11-17
11 내가 너희에게 이 말을 한 이유는, 내 기쁨이 너희 안에 있고 또 너희 기쁨이 충만하게 하려는 것이다.
12 이것이 나의 계명이다.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
13 친구들을 위하여 목숨을 내놓는 것보다 더 큰 사랑은 없다.
14 내가 너희에게 명령하는 것을 실천하면 너희는 나의 친구가 된다.
15 나는 너희를 더 이상 종이라고 부르지 않는다. 종은 주인이 하는 일을 모르기 때문이다. 나는 너희를 친구라고 불렀다. 내가 내 아버지에게서 들은 것을 너희에게 모두 알려 주었기 때문이다.
16 너희가 나를 뽑은 것이 아니라 내가 너희를 뽑아 세웠다. 너희가 가서 열매를 맺어 너희의 그 열매가 언제나 남아 있게 하려는 것이다. 그리하여 너희가 내 이름으로 아버지께 청하는 것을 그분께서 너희에게 주시게 하려는 것이다.
17 내가 너희에게 명령하는 것은 이것이다. 서로 사랑하여라.”
■콥트교회 Coptic church
이집트인의 콥트 국민교회.
639∼640년 아라비아인 지배아래 성립, 알렉산드리아 총대주교 밑에 속한다.
교회법은 위사도서간(僞使徒書簡), 고대 공의회문서, 비잔츠, 시리아 법률자료, 여러 주교의 지령에 따라 성립.
교의상 가톨릭 교회와 구별되는 점은 그리스도론, 종말론, 교황의 통치권교도권상의 수위(首位)에 관한 점이다.
전례는 콥트어를 사용. 신도수 약 85만명, 콥트인 프로테스탄트 5만명, 가톨릭 귀일교회 신도 3만명이다.
(가톨릭대사전에서)
■콥트 교회 Coptic Church
이슬람권 이집트에 압도적으로 많은 주요 그리스도교 교회.
7세기 아랍인이 점령하기 이전의 이집트 민족은 그들 자신과 그들의 언어를
그리스어로 ’아이지프티오스’(아랍어로는 qibt, 콥트는 서구화된 발음임)라 불렀다.
그뒤 이집트의 이슬람교도들이 ’아이지프티오이’라는 칭호를 쓰지 않자 이 용어는 소수 종교집단인 그리스도교도들만을 가리키게 되었다.
5세기 이래 이 그리스도교도들은 단성론(그리스도의 단성만을 인정하는 견해) 교회에 속했으며, 스스로를 이집트 교회라 불렀다.
19, 20세기에는 콥트 정교회로 자칭하여 로마 가톨릭으로 개종한 콥트인들 및 주로 그리스인들로 구성된 동방정교회와 스스로를 구별하기 시작했다.
4, 5세기에 이집트에서 콥트인들과 그리스어를 사용하는 로마인들인 멜키트파(’황제의 사람들’) 사이에
단성론을 배격한 칼케돈 공의회(451)를 둘러싸고 신학 논쟁이 있었다. 7세기 아랍인들이 이집트를 정복한 뒤 콥트인들은 그리스어 사용을 중단했다.
■콥트 성가 Coptic chant
7세기에 이슬람이 이집트를 정복하기 전 그리스도교에 귀화한 고대 이집트 후손들의 예배음악.
아랍어 ’qibt’에서 유래한 ’콥트’라는 말은 그리스어 Aigyptios(’이집트인’ 또는 ’이집트어’)의 전와어(轉訛語)이다.
나중에 이슬람교로 개종한 후로 이집트인들은 이 명칭을 사용하지 않았고, 그리스도교를 계속 믿던 소수인들에게만 이 명칭이 적용되었다.
함셈어족인 콥트어는 997년에 아랍권에서 완전히 금지되었고 콥트의 예배용 언어로만 오늘날까지 전해내려온다.
콥트의 종교의식은 예루살렘의 초기 그리스도교 의식에 뿌리를 두고 있고, 시리아와 아랍의 영향도 강하게 나타나 있다.
어떤 학자들은 콥트의 의식이 이슬람의 종교의식에 어느 정도 영향을 끼쳤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분명한 증거는 없지만 콥트인들은 풍부한 음악적 전통을 전승했던 것으로 보인다.
이들의 음악은 근래에 와서 필사 악보와 예배서 등에 의해 정리되기 전까지는 구전으로만 전해져왔다.
(한국브리태니커 온라인에서)
*성 메나스축일:11월11일
'성인, 성녀 축일 기념일등' 카테고리의 다른 글
+++ 십자가의 성녀 데레사 베네딕따(= 에디트슈타인) 순교자 / 라베르나의 복자 요한 기념일 +++ (0) | 2020.08.09 |
---|---|
+++ 성 도미니코 사제 기념일 +++ (0) | 2020.08.08 |
+++ 주님의 거룩한 변모 축일 +++ (0) | 2020.08.05 |
+++ 성 요한 마리 비안네 사제 기념일 +++ (0) | 2020.08.04 |
+++ 성녀 리디아 / 성 니고데모 기념일 +++ (0) | 2020.08.03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