축일: 8월 9일
성녀 에디트 슈타인 순교자
십자가의 성녀 데레사 베네딕따
Saint TERESA BENEDICTA of the Cross
Santa Teresa Benedetta della Croce (Edith Stein) Martire
(Breslavia, 12 ottobre 1891 - Auschwitz, 9 agosto 1942)
Born:12 October 1891 at Breslaw, Germany (now Wroclaw, Poland) as Edith Stein
Died:gassed on 9 August 1942 in the ovens of Auschwitz
Beatified:1 May 1987 by Pope John Paul II in the cathedral at Cologne, Germany
Canonized:11 October 1998 by Pope John Paul II
유태인 가정에서 태어나 무신론자가 되었다가 다시 가톨릭으로 개종하여 가르멜에 입회하였고
아우슈비츠의 독가스실에서 최후를 맞이했던 에디트 슈타인은
온 삶을 진리를 찾기 위해 헌신했던 철학자요 수도자요 순교자로서
우리 시대의 활동적이고 자주적인 여성 중의 빼어난 본보기가 되며,
여성 스스로 삶의 주체가 되어 사회와 교회에 철저히 봉사하도록 격려할 수 있는 인물이다.
1998년 10월 11일 요한 바오로 2세 교황에 의해 로마에서 시성된 그녀는
민족과 종교 사이의 평화와 화해를 추구하는 오늘날,
우리의 방향 선택에 등대가 될 수 있는 성인이라 하겠다.
1987년 시복식때 요한 바오로 2세 교황은
에디트 슈타인을 재래의 의미로 "순교자"라고 칭할 수 없어서 "사랑의 순교자"라는 칭호를 부여했다.
이 칭호를 통해 교황은 에디트 슈타인이
주위에 있던 모든 존재에 대한 사랑을 마지막 극한 상황에서까지 남김없이 드러냈으며
그녀의 모습이 성서의 하느님의 자비로 빛났다는 것을 말한다.
그리스도교적 영성과 성성의 모범으로 악의 세력에 정면으로 도전한 에디트 슈타인은
신앙의 진리를 추상적 차원이 아니라 경험과 열정으로 실천해야 할 진리임을 제시한다.
현대의 문제인 물질주의, 세속주의, 이교도주의로부터 이탈하는 길로 사랑과 기도의 힘을 제시하고 있다.
에디트 슈타인의 삶은 나의 계획이 없는 하느님의 계획이 어떤 것인가
그리고 어떤 사상을 우리 삶에 새겨 넣어야 할 것인가를 우리에게 묻고 또한 가르쳐 준다.
20세기 전반의 격동의 시대를 산 특이한 인물로
빼어난 지성과 재능을 겸비한 그녀의 생애는 파란만장하고, 비참하고 숭고한 일생이었다.
에디트 슈타인은 현대라고 하는 정신적인 사막에 단단히뿌리를 내리고,
우리들 한 사람 한 사람의 마음 속 어둠과 갈등을 나눠 가지고 그것을 정화하여 재생시켜 주는 사람이다.
현대의 정신적 위기를 사는 우리들에게 이러한 상황들이 위험인 동시에
하느님을 만나 새롭게 변화될 수 있는 가장 적절한 기회임을 깨닫게 해준다.
19세기 말 독실한 유다교 집안에서 출생한 에디트 슈타인은
25살에 철학 박사 학위를 받은 뛰어난 학자로서 독일에서 강의와 연설을 하였다.
그가 43살이 되었을 때 가르멜 수녀회에 들어가기 위해서 세상의 지식과 학문이 담긴 책들을 덮어 버렸다.
유다인 혈통이었던 그는 나치의 의해 체포되어
여러 수용소를 전전하다가 1942년 8월 9일 아우슈비츠 수용소에서 살해되었다.
성인들 중에는 에디트 슈타인처럼 뛰어난 학자가 있는가 하면 읽거나 쓸 줄도 모르는 사람도 있다.
그러나 그 성인들이 한결같이 가르치는 것은
지식이나 교육 정도와 상관없이 누구나 거룩하게 될 수 있다는 것이다.
하느님은 우리를 시험 성적이나 학위에 따라 평가하지 않으신다.
하느님이 성적을 평가하는 과목은 사랑, 인내, 자비와 같은 덕목들이다.
하느님은 학교에서처럼 우리의 성적을 합격 점수, 불합격 점수로 평가하지 않으신다.
하느님은 우리가 얼마나 성공했느냐 하는 것보다
얼마나 마음을 다해 노력하였는가를 보시고 그에 상응하는 상을 주실 뿐이다.
우리가 해야 할 일은 노력하는 것뿐이다.
1891년 10월 12일 독일 동북부 지역의 브레슬라우(Breslau)의 전통 유대인 가정에서 11번째 아이로 태어난 성녀 에디트 슈타인(Edith Stein)은 두 살 때 목재상을 하던 아버지 지그프리트(Siegfried Stein)를 일사병으로 여의고, 열심한 유대인이었던 어머니 아우구스트(Auguste Stein Courant)에 의해 양육되었다. 그녀는 어려서부터 집안에서 거행되는 유대교 전통 예식을 보며 자랐고, 유달리 고집스럽고 사색과 독서를 좋아하는 학구적인 성격의 아이였다. 11세 때 숙부의 갑작스런 죽음을 경험하면서 삶의 궁극적인 의미에 대해, 그리고 유대인들이 믿고 있는 하느님의 존재에 대해 의심을 품기 시작하였다. 또 가족과 친지들의 형식적인 유대교 의식과 기도에 실망하여 더 이상 참석하지 않기로 결단을 내리기도 하였다.
그녀는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1911년까지는 브레슬라우에서, 그리고 1913년부터는 괴팅겐(Gottingen) 대학으로 옮겨 심리학, 철학, 역사학, 독일어학 등을 공부하였다. 다양한 학문을 공부하던 중 제1차 세계대전의 발발로 잠시 간호사로 활동하기도 했던 그녀는 1916년 프라이부르크(Freiburg)에서 후설(Edmund Husserl)의 지도로 박사학위를 받고 그의 개인조교가 되었다. 그 후 독자적인 연구 활동을 하며 교수 취임 논문을 제출하고 후설이 직접 추천서까지 작성해 주었으나, 당시 독일 학계에서 여성이 교수로 재직하는 것이 거의 불가능하였기 때문에 그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그 후 브레슬라우로 돌아와 계속 철학 연구 논문들을 집필하던 중 1921년 여름 같은 괴팅겐 학파 친구인 콘라트 마르티우스와 그녀의 남편이 경영하던 농장에 머무르게 되었다. 친구 부부가 외출한 어느 날 서재에서 우연히 손에 잡힌 “아빌라의 성녀 데레사의 생애”를 읽고, 그녀는 자신이 오랫동안 실존적으로 회의하고 있었던 신이 그녀를 사랑해 왔으며, 그녀가 전 인격으로 그 사랑에 응답하기를 기다려 왔음을 깊이 깨닫게 되었다. 이러한 하느님 체험 후 그녀는 평화를 얻었고, 이듬해 1월 1일 테레사 베네딕타(Teresia Benedicta)라는 세례명으로 세례를 받았다.
세례를 받음과 동시에 성녀 테레사 베네딕타는 카르멜 수도원에 입회할 의지를 확고히 하였으나, 어머니의 반대와 지도신부의 만류로 이를 연기하였다. 그 대신 지도신부의 제안으로 1931년까지 슈파이어(Speyer)에 있는 성 막달레나 수도원 교사 양성 학교와 도미니코 수녀회의 여학교에서 독일어와 역사를 가르쳤다. 그리고 점차 후설의 관념론적인 철학 노선을 떠나 그리스도교 철학의 실재론적인 사상을 연구하기 시작하였다.
계속 왕성한 교육 및 학문 활동을 하던 그녀는 발처 아빠스로부터 카르멜 수도원 입회를 허락받고 어머니와 힘겨운 이별을 나눈 뒤 1933년 10월 14일 쾰른의 카르멜 수도원에 입회하면서 수도명을 십자가의 테레사 베네딕타(Teresia Benedicta a Cruce)로 정하였다. 입회한 후에도 수도원 원장의 적극적인 학문 지원에 힘입어 지속적인 연구와 저술활동을 할 수 있었다.
1936년 9월 14일 첫서원을 하였으나, 바로 그 해 어머니가 사망하였다. 그녀는 마지막까지 어머니가 지녀왔던 유대교 신앙을 존중해 주었다. 1938년 4월 21일 종신서원을 하였다. 그러나 나치의 유대인에 대한 위협은 날로 심해져 갔고, 성녀 테레사 베네딕타는 이를 피하기 위해 수도원의 주선으로 비밀리에 그녀의 언니 로사(Rosa)와 함께 네덜란드의 에히트(Echt) 카르멜 수도원으로 옮겼다. 이곳에서 그녀는 십자가의 성 요한(Joannes) 탄생 400주년을 기념하는 저서 “십자가의 학문”을 발표하였다.
그런데 이때 네덜란드의 주교들이 독일의 반유대주의를 비난하였고, 이에 화가 난 히틀러는 모든 비아리안계 가톨릭 신자들을 체포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이로 인해 1942년 8월 2일 언니 로사와 함께 게슈타포에게 체포된 그녀는 많은 유대인 그리스도교 신자들과 함께 아메르스포르트(Amersfoort) 수용소를 거쳐 베스터보르크(Westerbork)로 끌려갔다. 그리고 그 해 8월 7일 이들 중 987명이 아우슈비츠 수용소에서 살해되었는데, 두 자매는 이틀 후인 8월 9일 가스실에서 살해된 것으로 추정된다.
그녀가 사망한 지 20년 만인 1962년 1월 4일 쾰른의 대주교 프링스(Josef Frings) 추기경은 그녀의 시복을 위한 소송을 제기하였고, 1980년에는 독일 주교회의를 거쳐 로마에서 시복절차를 위한 공식적인 청원이 이루어졌다. 그 후 교황 요한 바오로 2세(Joannes Paulus II)가 독일을 방문한 1987년 5월 1일 쾰른에서 순교자로 시복되었고, 1998년 10월 11일 로마에서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에 의해 시성되었다. 시성식에서 그녀를 “이스라엘의 탁월한 딸이자 전세계를 위한 성인으로서 교회의 충실한 딸”이라고 칭송한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는 이듬해 10월 1일 자의교서를 통해 시에나의 카타리나(Catharina) 성녀와 스웨덴의 비르지타(Birgitta) 성녀와 함께 유럽 대륙의 수호성인으로 선포하였다.
(가톨릭홈에서)
유대인 여자 에디트 슈타인-저자 마르타 메스자로스(시간 97분,베네딕도미디어)
유대인 철학자이며 가르멜 수녀였던 에디트 슈타인(1891-1492)의 생애와 사상을 담은 영화.
독일의 브레슬라우(현재 폴란드령)에서 태어난
에디트 슈타인은 현상학의 창시자인 에드몬드 후쎌의 애제자요,
조교로서 끊임없는 진리추구에 헌신했으며,
스피르, 뮌스터 등에서 학생들에게 강의를 하였고 많은 저술을 남겼다.
1921년 아빌라의 대 데레사 자서전을 읽고
"이것이 진리다"라는 깨우침과 함께 가톨릭에로의 개종을 결심한다.
가톨릭 개종을 결심하는 것에서부터 시작되는 이 영화는 가족,
특히 어머니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철저한 봉쇄 수도원안에서 관상생활을 하는 가르멜 수녀가 되기로 결심한다.
대 데레사 성녀의 삶과 저서로부터 많은 영향을 받은 슈타인은 서원을 발하기 전날밤,
자신의 동료수녀에게 "영혼의 7개의 궁방(성)"을 얘기해주며,
동료가 자유로운 삶을 선택하기를 권고한다. 또한 자신의 앞으로의 길을 운명으로 받아들이려 한다.
교수시절부터 슈타인을 사랑하며 수용소에까지 찾아온 헬러박사에게까지 마지막으로 죽기전에 용서를 청하며,
유대인 어린아이를 대신하여 가스실로 들어가는 죽음의 길을 택한다.
에디트 슈타인은 처형되기 전에, 유대인들의 회개를 위해 자신의 생명을 바쳤다.
지칠 줄 모르는 진리에 대한 추구가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축복에로 이어졌으며,
수용소에서 이스라엘의 딸인 동시에 십자가로 성별된 십자가의 데레사 베네딕따 수녀로 운명하였다.
자기 민족과 함께, 자기 민족을 위하여 죽음을 받아들인 그녀의 삶은 십자가를 피하지 않고
오히려 희망으로 가득찬 그리스도인으로서,
파스카 신앙의 신비 안에서 십자가를 얼싸안은 감동적인 모습을 그려내었다.
가톨릭 교회는 신앙을 증거하며 순교한 에디트 슈타인을 1998년 10월 11일에 성인으로 인정하고 선포했다.
특별히 주님의 십자가의 여정에 함께하는 사순시기에 볼만한 비디오이다.
슈타인은 독일 현대철학의 제일선에서 큰 활약을 했던 여성 철학자이면서 독일 가르멜회 수녀다.
한때 무신론자였지만 아빌라의 성녀 데레사의 글을 읽고 신앙에 눈을 뜬 그녀는 수도생활을 하면서
그리스도교 철학을 연구했으며 그리스도인과 유다인의 화해의 제물로 자신의 생명을 바친 성녀다.
이 비디오는 유다인 슈타인이 가톨릭으로 개종한 후 어머니에게 그 사실을 고백하는 장면부터 시작해
가르멜수녀회에 입회, 수도생활을 하다 아우슈비츠 수용소에서 처형되기까지의 과정을 담고 있다.
영화는 20세기 초 나치주의가 기승을 부리고 유다인 박해 물결이 일던 상황에서
그녀가 겪은 심적 고통과 가족과의 갈등,
그리고 하느님에 대한 굳은 믿음과 진리에 대한 열망을 잘 묘사하고 있다.
슈타인은 유다인이라는 이유로 교직도 박탈당하고 끝내는
죽음의 강제수용소로 끌려가지만 절망하지도 반항하지도 않았다.
모든 고통을 하느님의 섭리로 받아들였다.
그녀는 유다인들의 불신앙에 대한 용서를 구하면서 1942년 가스실에서 조용히 죽음을 맞이했다.
철학과 신앙 안에서 진리를 추구했던 에디트 슈타인은
“하느님은 진리이시다.
진리를 찾는 사람은 누구나 다 하느님을 찾는 것이다”라고 말했다.
에디트 슈타인 -사랑과 진리의 불길
글쓴이: 수자와 카오리 . 옮긴이: 최경식. 분도출판사
에디트 슈타인의 생애에 대해서 한국에 소개된 책은 극히 드물다.
그만큼 한국에서는 잘 알려지지 않았다는 것이다.
하지만 근래에 들어서 에디트 슈타인 수녀에 대해서 많은 연구가 진척되어 가고
새로운 발견들로 놀라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이 책은 여성론자와 무신론에서 가르멜회 수녀로의 개종만으로 알려진 에디트 슈타인에 대해서 써내려 간다.
지금까지 에디트 슈타인은 그 극적인 생애 때문에 전기적 관점에서 주목되는 일이 많았지만
그녀의 역량을 나타내는 철학적·종교적 저작에 접하지 않고서는 그녀의 삶의 태도를 이해할 수는 없을 것이다.
사실 그런 의미에서는 그 어떤 해설서나 소개서건 그 원서에는 못 미친다.
독일의 헤르더사에서 에디트 슈타인의 저작 전집이 간행중에 있으며 현재에 14권까지 출판되고 있다.
슈타인의 저작은 그 내용과 주제가 주로 네 가지 장르로 나뉘어진다.
우선 첫째로 그녀는 현상학의 창시자인 에드문드 훗설 아래에서
철학 연구의 길로 들어섰다는 점에서 현상학자로서의 본령을 유감없이 발휘하고 있는 저작이 있다.
그 다음 그녀의 사상적 과제는 현상학과,
성 토마스로 대표되는 스콜라학과의 만남과 대결로 옮겨간다.
슈타인의 주된 저서라고 볼 수 있는 <유한한 존재와 영원한 존재>는
그녀의 깊은 명상적 신비성을 바탕으로 한 그리스도교 철학의 집대성이라 해도 좋을 것이다.
세 번재 주제는 여성론관 교육론이다.
그녀 자신이 오랫동안 교육에 종사한 일도 있어
여성들에게 삶의 태도와 사명에 대하여 참신한 생각을 제시하고 있다.
마지막으로 오는 주제는 영성에 관한 것으로 거기에서는 가르멜회의 정신을 계승한
하느님과의 깊은 일치와 관상의 세계를 엿볼 수 있다.
본서는 총괄적인 기술이나 지면 제한 관계로
에디트 슈타인의 철학적·종교적 사상에 관해 깊이 파고들지는 못했다.
하지만 그녀의 전기적·철학적인 삶을 개괄적으로 꼼꼼이 써내려 간 이 책은
그녀의 저작에는 아직 출간되지도, 정리되지도 않은 것들이 아직 많이 남아 있어
그녀를 연구하고자 하는 사람의 흥미를 북돋울 수 있을 것이다.
앞으로 더욱더 연구를 해나가고 싶다고 생각하는 이들에게 많은 도움이 될 것이다.
에디트 슈타인의 생애와 사상
글쓴이: F. 메리 오븐. 옮긴이: 유재옥. 출판사: 성바오로
지금으로부터 100년 전, 독일 콜렌가의 가난한 집에서 11번째 자녀로 태어난 에디트슈타인,
이미 일곱 살 때 말로는 표현할 수 없는 내적 생활을 체험하고
행복과 영광의 찬란한 생활을 꿈꾸고 있었던 에디트는
그 은밀하게 간직하던 내적 생활을 나중에 관상 수도자로 생활하며 성소를 통하여 아름다운 결실을 맺게 된다.
유태인으로서 인류사의 비극인 대학살 사건의 소용돌이 속에 대속의 십자가를 지고 죽기까지 성녀의 삶은
탁월한 지성과 진리에 대한 들끓는 열정을 후세들에게 본보기로 보여 주고 있다.
"사랑하는 어머니, 저는 진정한 평화를 위하여 희생하는 속죄의 행위로써
예수 성심께 제 자신을 봉헌하고자 하오니 어머니의 허락을 청합니다.
이는 가능하다면 또 다른 전쟁의 발발 없이도
반그리스도의 지배가 파괴되고 새로운 질서가 정착되기 위함입니다.
제가 오늘 이러한 청원을 드리는 이유는 벌써 12시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철학자요, 교육자이며, 여성론자였고,
뿐만 아니라 성스러운 관상 수도자이며 순교자였던 이 놀라운 여성을 만나면서
그리스도의 무한하신 사랑과 함께 삶을 끌어간 그녀의 사상의 줄기를 발견할 수 있다.
(성바오로수도회홈에서)
유럽의 여자 수호성인으로 선포된 성녀 3명의 이력
(에디트 슈타인,그리스도교와 유대교 잇는 ’가교’구실) 평화신문에서
성 에디트 슈타인과 시에나의 성 카타리나,
그리고 스웨덴의 성 비르짓다가 유럽의 여자 수호성인으로 선포됐다.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는 1일(1999년10월)유럽 주교 시노드 개막미사에서
“유럽인들은 세 성인의 거룩한 삶과 신앙을 통해
그리스도교가 유럽의 역사 및 문화와 뗄수 없는 밀접한 관계가 있음을 깨닫기 바란다”며
3명의 성녀를 유럽의 수호성인으로 선포했다.
이로써 3명의 성녀는 성 베네딕도, 성 치릴로, 성 메토디오와 함께 유럽의 수호성인 대열에 합류하게 됐다.
교황은 특히 “비록 남성 중심적인 문화가 교회역사를 이끌어왔지만
이러한 문제점은 꾸준히 개선되고 있다”며
“교회는 역사를 통해 보여준 여성들의 역할에 대해 충분히 깨닫고 있다”고 수호성인 선포 배경을 설명했다.
▲ 성녀 에디트 슈타인(1891∼1942)
1942년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나치 치하의 아우슈비츠 수용소에서 순교한 유대인 출신의 철학자 겸 수도자.
전통적인 유대인 가문에서 태어난 그녀는 가톨릭으로 개종한 후
여성의 존엄성과 인간의 자유등에 관한 연구에 몰두하며 독일 현대철학의 제일선에서 활약.
그리스도를 죽인 유대인, 유대인을 증오하는 그리스도교 신자들,
유대인을 박해하는 독일인 사이의 화해는 십자가밖에 없다고 판단해 가르멜 수도회에 입회했다.
교황은 1998년 그녀를 시성하면서
“그녀는 자신과 자신의 민족에게 드리워진 죽음을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으로 이해한 참 그리스도인”이라며
“그녀의 순교는 20세기 유럽사의 극적인 상징이자 그리스도교와 유대교를 잇는 가교”라고
말한 바 있다.
▲ 시에나의 성녀 카타리나(1347∼1380)
그리스도교의 몇 안되는 신비가 중 대가에 속하는 인물.
불과 6살의 어린 나이에 자신의 생애를 미리 내다보는 신비한 체험을 한 후
나환자와 페스트 환자를 돌보고, 교회를 수호하는 일에 일생을 바쳤다.
1376년 아비뇽의 교황좌가 로마로 복귀하는데 큰 역할을 했다.
교황은 그녀를 ‘용감하며 겸손한 여성’이라고 칭송했다.
1461년에 시성, 1939년에 이탈리아의 수호성인으로 선포되었다. (축일:4월29일)
▲ [15기도]스웨덴의 성녀 비르짓다(1303∼1373)
8남매의 어머니로 남편이 죽은 후 성삼회(비르짓다회) 수도회를 창설하고
유럽 전역을 여행하며 수도회 개혁운동을 펼친 인물.
엄격한 생활과 성덕, 가난한 사람과 순례자들에 대한 관심,
그리고 아비뇽에 유배 중이던 교황 클레멘스 6세의 귀환 노력 등이 높게 평가받고 있다.
교황은 가톨릭과 루터교 양측으로부터 존경받고 있는 그녀를
‘교회 일치의 지주(支柱)’라고 칭송했다. (축일:7월23일)
라베르나의 복자 요한의 움막(2005년 성지순례 사진)
축일:8월9일
라베르나의 복자 요한, 1회
Beato Giovanni da Fermo (o della Verna)
Fermo, 1259 – Monte della Verna, 9 agosto 1322
Il suo culto fu approvato da Leone XIII il 24 giugno 1880.
49장 그리스도께서 라베르나의 요한 형제에게 나타나신 일
성 프란치스꼬의 슬기롭고 거룩한 형제들과 아들들 중에는 솔로몬의 말대로 아버지의 영광이 되는 이들이 있었다.
우리 시대에 마르카 관구 안에 존경받을 만한 라베르나 페르모의 요한 형제가 살았다. 그를 라베르나의 요한 형제라고도 불렀는데, 라베르나 성지에서 오래 살았고 또 거기서 이 세상을 끝냈기 때문이다. 그 형제는 모범적 생활을 한 위대한 성덕의 사람이었다.
그는 어린아이로 세속에 있을 때 벌써 영혼과 육신을 깨끗하게 보존할 보속생활을 마음깊이 열망하였다.
그래서 어린아이였는데도 고복(古服)을 입고 쇠고리를 살에 감아 대단한 극기 생활을 하였다. 특히 훌륭한 생활을 하고 있던 페르모의 성 베드로 성당의 주교좌 참사원 들과 함께 있을 때는 육체적 환락을 피하여 극히 엄한 금욕 생활로 제 몸을 괴롭혔다.
그의 친구들은 이일에 몹시 반대하여 고복을 강제로 벗기고 금욕생활을 여러 가지로 방해하였지만 하느님께 영감을 받은 그는 세속과 세속을 사랑하는 자들을 떠나 그리스도의 오상을 받았다고 그가 들은바 있는 성 프란치스꼬가 세운 형제회에 입회하여 십자가에 못 박히신 그리스도의 팔에 자기를 고스란히 바치기로 결심했다.
그는 아주 어려서 형제회에 들어와 수련장의 보호를 받게 되었다.그는 아주 영적이고 신앙이 깊어졌기 때문에 가끔 수련장에서 하느님에 관해 이야기하는 것을 들으면 그의 마음은 화로 옆의 밀초처럼 녹아버렸다.하느님의 사랑 속에 너무나 큰 은총의 감미로움으로 뜨거워져서 온 가슴이 터질 듯한 그 감미로움을 누를 길이 없어 한 장소에 가만히 있지 못하고 성령에 취한 사람 모양 벌떡 일어나 정원으로. 나무숲으로. 성당 안으로 성령의 불꽃과 거센 힘이 미는 대로 여기저기 달음질쳐 다녔다.
세월이 지남에 따라 이 천사와 같은 사람은 덕행으로, 천상적 초성은혜로, 또 황홀한 탈혼으로 쉬지 않고 점점 자라나서 그 영혼은 때로 케루빔의 광휘에, 때로는 세라핌의 열정에, 어느 때는 복된 이들의 환희에. 그렇지 않으면 그리스도의 애정 깊고 극진한 포옹에로 끌려 올라갔다. 그런데 이것은 다만 내부의 영적 감각으로만이 아니고 외부의 실제 표정과 육체적 감각으로 느꼈다.
특히 한번은 하느님 사랑의 불길이 그의 마음을 심히 불살라 이 불길이 삼 년 동안이나 계속되었다.그때의 그는 놀라운 위안과 하느님의 방문을 받았고, 가끔 하느님 안으로 탈혼 되었다.즉. 간단히 말하면 그는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온통 불붙어 타올랐었고 그것은 거룩한 라배르나 산에서 일어났다.
하느님께서는 그의 아들딸들을 자상히 돌보시기 때문에, 자녀들이 겸손해지거나 또는 천상 적인 것들에 더 큰 열망이 불붙어야 할 필요가 있다고 보시는데 따라서 각각 그시기에 맞게 그들에게 어떤 때는 위로를, 어떤 때는 고뇌를, 또 어떤 때는 행운을, 어떤 때는 불운을 주신다.
이렇게 삼 년이 지난 뒤에는 요한 형제에게서 하느님의 섭리로 사랑의 광채와 불길과 모든 영적 위안을 거두셨다. 요한 형제는 광명도 없고 하느님의 사랑도 없이 괴롭고 슬프고 가슴이 메어지는 고통 속에 남아있게 되었다.그는 번민에 사로잡혀 숲으로 들어가 여기저기를 헤메며, 아무도 없는 빈 산 속에서 혼자 부르짖고 탄식하면서 자기를 떠나 숨어버린 영혼의 그리운 정배를 애타게 불렀다.그분 없이 그 영혼은 마음의 평화도 안식도 찾을 수 없었다.아무리 울부짖으며 헤매어도 그 어느 곳에서도 또 아무리해도 들려오는 것은 울부짖는 자기의 비참한 메아리뿐 그토록 감미로운 예수를 만날 수 없었고, 그리스도사랑의 달콤한 영적 감촉을 전처럼 다시 맛볼 수 없었다.
그 시련은 여러 날 계속 되었다.그동안에 그는 쉴새없이 비탄과 한숨과 기도로 하느님의 인자하심을 베푸시어 자기 영혼의 그리운 정배를 어서 돌려주시도록 애소하고 애원하였다.
드디어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대로 그 형제의 인내심을 충분히 시험하시고 열망의 불을 활활 붙여준 어느 날 요한 형제는 침울하고 가슴 터지는 듯한 격심한 고통으로 숲 속을 거닐다가 그만 피로하여 한 너도밤나무에 기대앉아 눈물로 흠뻑젖은 얼굴을 하늘로 향했다.그 찰나 갑자기 요한 형제가 걸어온 오솔길에 예수 그리스도께서 발현하셨다.
그곳은 자기가 있는데서 아주 가까운 거리였으나 한 마디의 말씀도 없으셨다.요한 형제는 그분이 분명히 그리스도임을 확인하자마자 쏜살같이 달려가 그 발아래 엎드려서 쏟아져 흐르는 눈물로 이렇게 겸손히 간청했다.
"주님, 저를 도와주십시오.
참으로 달콤한 구세주님 .
당신 없이는 나는 암흑과 눈물 속에 있습니다.
지극히 온유하신 어린양이시여,
당신없는 저는 불안과 공포 속에 있습니다.
지극히 높으신 하느님의 아드님이시여,
당신 없는 저는 모든 선을 빼앗기고 소경이 되어버립니다.
당신은 영혼들의 참된 빛이신 예수님이십니다.
당신 없는 저는 멸망하여 지옥에 떨어질 것입니다.
바로 당신이 영혼의 생명이요.
모든 생명의 생명이시기 때문입니다.
온갖 은혜와 은총의 근원이신 당신이 없으면 저는 열매맺지 못하는 황무지입니다.
당신은 우리를 구속하신 예수이시며,
우리의 사랑이시며,
우리의 희망이시며.
힘을 주시는 빵이시며,
천사들의 합창과 성인들의 마음을 즐겁게 하시는 포도주이시니
당신 없이는 다른 아무런 위안도 없습니다.
참으로 지혜로운 스승이시며 인자하신 목자여,
저에게 당신의 빛을 비추소서. 저는 당신의 부당한 작은 어린양입니다."
그러나 거룩한 사람들의 열망을 하느님께서 들어주시기를 늦추실 때 사람의 사랑과 공로가 더욱더 커지는 까닭에, 그리스도께서는 그의 기도를 못 들으신 척하고. 한마디 말도 없이 그 길을 그냥 걸어가셨다. 그래서 요한 형제는 벌떡 일어나 그 뒤를 쫓아가 다시 그 발아래 엎드려서 굳이 만류하며 붙잡고는 북받쳐 쏟아지는 눈물로 땅을 적시며 목이 메어 또다시 간청했다.
"지극히 감미로우신 예수님, 이 고통 중에 있는 저를 불쌍히 여기소서.
당신의 풍성한 자비와 구원의 진리로써 제 청을 들어주시어.
당신 얼굴의 즐거움과 자비로운 시선을 저에게 돌려주소서,
당신의 인자하심은 온 땅에 넘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여전히 그냥 지나가실 뿐, 한마디 말씀도 아무위로도 주시지 않았다.그리스도께서는 어린애에게 젖을 잘먹게 하려는 엄마가 어린것이 울면서 쫓아 오게 만들어놓고 그 다음에 어린것이 더 기쁘게 젖을 먹게 하듯이 요한 형제에게 그렇게 하셨다.
요한 형제도 더 열심히 더 열렬히 애걸복걸 눈물을 흘리며, 그리스도를 따라가 꽉 붙잡았더니 그리스도께서는 기쁨과 자애에 넘치는 눈으로 바라보시며 그 성스럽고 인자하신 두 팔을 벌려 사랑스럽고 귀여운 듯. 그를 꼭 안아주셨다. 주께서 팔을 벌리실 때에 요한 형제는 구세주의 거룩하신 가슴에서 신비로운 빛줄기가 나와 숲 전체는 물론 자기 자신의 영혼과 몸까지 비추는 것을 느꼈다.
그때 요한 형제는 그리스도의 발아래 무릎을 꿇었다.그러자 예수께서는 바로 막달레나 성녀에게 한 것과 똑같이 인자하게 입맞추라고 발을 내미셨다.요한 형제는 기쁨과 감사에 벅차 쏟아져 흐르는 눈물로 주님의 발을 적시었다. 이것은 정말 제2의 막달레나와도 같았다. 그는 깊은 신심으로 이렇게 여쭈었다.
"제 죄를 보지 마시고, 당신의 지극히 거룩하신 고난과 우리를 위해 흘리신 값진 피로써 제 영혼을 당신 사랑의 은총 안에 되살려 주십시오.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당신을 사랑하라고 명하신 주님. 당신의 도우심이 없으면 아무도 그 영을 지킬 수 없습니다. 하느님의 가장 사랑하시는 아드님이시여, 내 모든 마음과 힘을 다하여 당신을 사랑하게 해주십시오".
요한 형제가 그리스도의 발 밑에서 이렇게 말씀드리고 있을 때 그 소원이 이루어져 하느님 사랑의 불길, 즉 이전의 은총을 다시 찾은 그는 재생의 위안을 전보다 더 크게 느꼈다. 하느님 은총의 선물이 자기에게 다시 온 것을 알자 복되신 그리스도께 감사 드리며 열렬히 그 발에 입맞추었다.
그가 구세주의 얼굴을 바라보려고 눈을 드니, 그리스도께서는 그 지극히 성스러우신 손을 펴시며 입맞추라고 그 앞에 내미셨다. 요한 형제는 그 두 손에 입맞추고 예수님의 가슴에 바짝 다가서서 그 지존하신 가슴을 껴안고 입 맞추었다.그리스도께서도 마찬가지로 그를 꼭 껴안고 입맞추어주셨다.
이렇게 포옹하고 입맞추는 중에 요한 형제는 짙은 하늘나라 향기를 맡았다. 만일 이 세상의 온갖 향료와 아름다운 방향을 모두 모아놓아도 그 하늘나라 향기에 비교하면 악취와도 같았으리라. 요한 형제는 그 향기로 아주 황홀해지며 큰 위로와 빛을 받았다.
요한 형제가 그 황홀경으로부터 제정신으로 돌아오자 복되신 그리스도께서 사라졌다.그러나 그가 맡은 이 향기는 몇 달 동안이나 그 형제의 영혼 안에 남아있을 뿐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직접 거니시던 숲 속의 오솔길과 그 언저리에 가면 그 후에도 요한 형제는 오래 동안 그 향기와 눈부신 아름다움을 느꼈다.
구세주의 거룩한 가슴에서 하느님의 천상지혜의 샘물을 마음껏 마신 그의 입에서는 그 후 놀라운 천상말씀이 새어나와 듣는 이의 가슴속에 변화를 일으키고 풍부한 영적 열매를 맺어주었다.
그 형제는 그리스도의 신성의 심연 한가운데서 지혜의 빛을 받아, 비록 인간의 학문으로 공부하지 않았어도 성삼위의 가장 오묘하고 고귀한 문제와 성서의 신비를 풀고 설명할 줄 알았다.
그 후 자주 그 형제는 교황과 추기경들 또는 국왕과 귀족과 선생과 박사들 앞에서 이야기할 때마다 드높은 말과 뜻깊은 명언을 가지고 모든 이를 감탄케 하였다.
그리스도께 찬미. 아멘
(성프란치스꼬의 잔꽃송이,프란치스꼬회 한국관구 옮김, 분도출판사,2001,213-219쪽에서)
라베르나 오상경당으로 올라 가는 길
오른쪽 산위로 올라가면 관상의 특은을 입으신 베르나의 복자 요한의 움막이 있다.
(2005년 성지순례 사진)
라베르나의 대성당 마당에 있는 십자가(2005년 성지순례 사진)
라 베르나: 프란치스칸의 갈바리아
라 베르나(La Verna)는 아페니노 산맥의 한 부분인 고립된 하나의 둔덕이다. 최고 높이는 1,283 미터에 이르나 성지는 해발 1,128 미터이다. 그 일단은 작은 계곡을 중심으로 깎아지른 듯한 암벽들과 드러난 바위들을 보여주고 있다. 이 바위들 가운데 일부는 깊은 균열을 보이고 있는데, 아마도 그것은 오랜 세기 전에 있었던 강한 지진 때문이었을 것이다.
이 산은 13세기 초에 키우시의 오를란도 카타니(Orlando Catani) 백작의 소유였다. 그는 이 산을 조상들로부터 물려받았다. 오를란도는 이 지방의 지주였으며 군사적 정치적인 수완으로서보다는 성 프란치스코와의 우정을 통하여 역사에 알려졌다.
1213년 프란치스코는 마로코를 향해 길을 떠났다. 도중에 프란치스코는 레오 형제와 함께 로마냐의 몬테펠트로(Montefeltro)에 이르렀고 인근 성 레오 성에서 멈추게 되었다. 새 기사의 탄생을 기념하는 축제가 벌어지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러한 상황을 잘 이용하여 프란치스코는 축제에 참석한 사람들에게 성 레오 광장에서 설교하였고, 이에 감명을 받은 오를란도 백작은 사적으로 자신의 영신 사정에 대해 프란치스코와 함께 이야기를 나누게 되었다. 일련의 대화 이후 백작은 라 베르나 산을 성 프란치스코에게 선물할 뜻을 밝혔고, 프란치스코는 그 곳이 속죄와 기도생활에 적합한 산이라면 백작의 호의를 기꺼이 받아들이겠다고 응답하였다.
몇 달 뒤 프란치스코에 의해 파견된 두 형제가 이 산을 답사하였고 마침내 형제들은 기도와 관상에 아주 적합한 조그마한 봉우리가 있는 곳으로 오게 되어 그 장소에 주님의 이름으로 자신들과 성인의 거처를 만들기로 결정하였다(오상 2 참조).
프란치스코가 라 베르나에 처음 올라간 것은 1214년으로 보고 있고, 그 뒤 다섯 차례, 즉 1215년, 1216년, 1217년, 1221년 그리고 1224년에 그 곳에 간 것이 확실하다. 1224년의 마지막 체류는 아마도 좀 더 길었던 것 같고 분명히 더 기억할 만하다. 왜냐하면 그는 9월 14일경 이 곳에서 오상을 받았기 때문이다. 프란치스코는 9월 30일 오를란도 백작이 보낸 나귀를 타고 보르고 산세폴크로, 몬테카살레, 치타 디 카스텔로를 거쳐 포르치운쿨라로 돌아갔다.
파도바의 성 안토니오는 이 곳에 머물렀던 이들 중의 하나였는데, 아마도 1230년 6월과 10월 사이였을 것이다. 1250년 경에야 계속적인 체류에 관한 근거들이 나오기 시작하는데, 그 때는 이미 더욱 견고한 건축물들이 있었다.
1259년 9월과 10월 사이에, 당시 총봉사자였던 성 보나벤투라는 여기에 머물면서 그 유명한 “하느님께로 나아가는 영혼의 여정”과 “삼중도(三重道)”를 저술하였고, 또한 아시시의 클라라 수녀원의 클라라 자매들에게 편지 한 통을 썼다. 1260년(8월 20일?)에는 성 보나벤투라와 인근 지역의 7명의 주교들이 참석한 가운데 천사들의 성모 마리아 성당의 축성이 있었다. 2, 3년 뒤 오를란도 백작은 세상을 떠났는데, 나중에 그는 이 성당에 묻혔다.
카살레의 우베르티노는 1305년 3월 19일부터 9월 29일까지의 그의 체류기간에 그의 유명한 작품 “예수의 십자가 생명나무”(Arbor vitae crucifixae Jesu)를 썼다.
그리고 라 베르나의 복자 요한(1259-1322)은 거의 30년 동안 이 곳에서 보속과 관상의 삶을 살다 1322년 8월 9일 세상을 떠났다.
그리고 1443년 9월 당시 이탈리아 관구들의 총봉사자 대리였던 요한 카페스트라노는 그의 보살핌 아래에 있는 형제들을 위한 지침서(회헌)를 작성하기 위하여 이 곳을 찾았다. 그가 작성한 회헌(Capisteranenses 1443, pro Observantibus Cismontanis)은 회규에 대한 주석 형태의 것으로서, 옵세르반티 형제들의 이상을 담고 있었으며, 형제들이 지켜야 하는 개별 규정들이 덧붙여졌다.
(기경호,성프란치스코의 발자취를 찾아서,프란치스칸사상연구소,2000,376-378쪽 요약)
라베르나 대성당에는 복자 라 베르나의 요한의 유골이 모셔진 경당이 있다. 이곳에 라베르나의 복자 요한의 유해가 모셔져 있다. 그의 유해는 여러 곳으로 흩어져 지금 여기에는 그의 뼈 일부 밖에는 보존 되어 있지 않다. 그의 두개골은 피렌체의 성 안토니오 성당에 모셔져 있었으나 분실되었다.
그는 1259년 마르케 지방의 페르모(Fermo)에서 출생하여, 스무살 무렵(1273?)에 프란치스코의 작은 형제회에 입회하였다. 그 뒤 자기 고향에서 잠시 머문 다음 1292년경 라 베르나 산에 와서 은둔생활을 시작하였다. 그는 1322년 8월 9일 선종하였고, 1880년 교황 레오 13세에 의해 시복되었다. 위대한 설교가요 고행자였던 그의 삶은 잔 꽃송이 제 49장과 오상에 관한 고찰에 소개 되고 있다.
(위의 책 380쪽에서)
*성 프란치스코의 거룩한 상흔 축일:9월17일
*파도바의 성 안토니오 축일:6월13일
*성 보나벤투라 주교 학자 축일:7월15일
*포르치운쿨라의 천사들의 복되신 동정마리아 축일:8월2일
*성 요한 카페스트라노 축일:10월23일
16세기에 만들어진 라베르나의 오상경당의 가대에는
성프란치스코의 초기 형제들을 새겨 놓은 것 같았다. (2005년 성지순례 사진)
라베르나의 오상경당의 가대는 양옆으로 12개씩 24개의 초상이 있다.
(2005년 성지순례 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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