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성인, 성녀 축일 기념일등

+++ 비테르보의 성녀 로사 동정 / 팔레르모의 성녀 로살리아 동정 기념일/ 성 모세 기념일 +++

 

"영원히 시들지않는 장미인 성모와 성자들".스트로고노프 양식.1700년경. 31x26cm

 

 이러한 형식의 그림은 그리스에서 처음 발생했다.

 그 근원을 작곡가인 요셉(Joseph)이 작곡한 아카티스토스(Akathistos) 첫장 3절에 둔다.

 

 이 성화 왼쪽 윗 모서리를 보면 황후 복장을 하고 왕관을 쓴 성모

(대부분 교회를 주관하는 마리아를 상징하는 형식으로 러시아어로 호디기트리아(Hodigitria)라고 한다)가 구름속에 군림하고 있다.

 

그녀는 한 손에는 주교복을 입은 아기 예수(주교가 쓰는 모자(Mitra)를 쓰고 있음)를

다른 손에는 한송이 장미를 들고 있다.

 

성모를 경배하기 위해 아래와 같은 성자 성녀들이 모였다.

맨 뒷줄에 스테판(Stefan)과 마리아 막달레나(Maria Magdalena)

그 앞에는 2명의 성자와 황후 헬레나가 서 있는데 그들은 손에 촛불 혹은 십자가를 들고 있다.

색이 약간 바랜 홍색과 녹색이 이 그림의 주조를 이룬다. 희귀하고 흥미있게 제작된 이 그림은 보존상태가 좋은 편이다.

 

 

축일: 9월 4일(혹은 3월6일)

비테르보의 성녀 로사 동정

Santa Rosa da Viterbo Vergine

St. Rose of Viterbo

Viterbo, 1233/34 - Viterbo, 6 marzo 1251/52

꽃 파는 사람들의 주보성인

 

로사(1234 - 1252)는 문자 그대로 영신 생활에서 천재성을 지닌 어린이였다.

이미 9 살 때 성모님의 인도로 프란치스코 3회 착복을 원하여 허락받았다.

그녀는 자기 집의 조그만 골방에서 관상생활과 극기 생활을 하였다.

또한 자주 거리에 나가 참회할 것을 비테르보 사람들에게 설교하기도 하였다.

그녀는 프레데릭 2 세의 반교황 정책에 공개적으로 반대했기 때문에 제국 당국은 그녀와 부모를 비테르보에서 추방하였다.

 

로사의 설교 특히 마니교 이단을 거스려 하는 설교에는 수많은 청중이 몰려들었다.

비테르보로 돌아와 글라라회에 입회하려 했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고 또한 자신이 공동체를 설립하려는 계획도 좌절되었다.

그러나 그녀는 겸손하게 이를 받아들였다.

그녀는 1252 년 18세라는 꽃다운 나이로 하늘의 정배에게 돌아갔다.

 

그녀의 썩지 않는 유해는 알렉산델 4세에 의하여 글라라회 수녀원으로 이장되었으며

갈리스토 3 세에 의하여 1457년 시성되었다.

그녀의 무덤에서는 지금도 계속하여 기적들이 일어나고 있다고 한다.(작은형제회홈에서 www.ofm.or.kr)

 

 

성녀의 서거 750주년 기념. 이탈리아. 2001.5.6.

 

비떼르보에서 태어난 성년 로사는 병을 앓던 8세때에 성모 마리아의 환시를 보았는데,

이때 성프란치스코의 수도복을 입으라는 말씀을 들었다.

그러나 그녀는 그후에도 집에서 그냥 지내면서 평범한 여성으로 자랐다.

병이 회복된 그녀는 평신도의 회개 복장을 하였고,

우리 주님의 고난을 더욱 절실히 체험케 되었으며, 죄인들의 무례함과 배은망덕을 대신 속죄하였다.

그후 12세기경부터 그녀는 타오르는 하느님의 사랑을 이길 수 없어 거리로 뛰쳐 나가서 설교하기 시작하였다.

 

그녀는 그당시의 정치 지도자들에게 무수한 경고를 하였다.

이때문에 그녀가 집에 감금되었고, 이리하여 로사와 그부모는 추방되어 소리아노로 갔는데,

그녀는 여기서 그당시의 독재자인 프레데릭 황제의 죽음을 예고하였고, 그것은 꼭 13개월 후에 일어났다.

 

이때부터 그녀의 명성은 더욱 높아졌고, 고향으로 귀향할 수 있었다.

그후 그녀는 비떼르보에 있던 로사의 성마리아 수녀원 입회를 청하였지만 거절당하였다.

그리하여 그녀의 주임사제가 성당 곁에 수녀원을 만들고 몇몇 동료들과 함께 살도록 주선하였으나,

집으로 돌아와서 곧 운명하니, 그녀의 나이는 17세였다.

 

 

Madonna of the Rose Bush-LOCHNER, Stefan. c.1440,Oil on panel,51 x 40 cm,Wallraf-Richartz Museum, Cologne

 

하느님께서는 성인들을 통해 기적을 행하신다.

우리는 모든 성인들의 기적에서 하느님의 은총을 본다.

그 중에서도 더욱 현저히 나타난 기적은 비테르보의 성녀 로사의 일생에서 볼 수 있다.

 

그녀는 1235년 이탈리아의 비테르보에서 태어났다. 양친은 가난했으나,

자식으로는 로사 하나 밖에 없었으므로 될 수 있는 데까지 교육시켰다.

그러나 그녀의 교육에 많은 역할을 한 것은 부모의 힘보다 오히려 하느님의 은총이었다.

아직 걸음도 제대로 걷지 못한 어린 로사가 근처에 있는 성 프란치스코회 성당에 가서 경건한 모습으로

미사에 참여하고 있는 것을 본 부모나 사람들은 탄복하지 않을 수 없었다.

어린 로사는 강론때에 방울 같은 눈동자를 굴리며 신부의 강론 말씀을 한마디도 빼놓지 않고 기억하고 돌아와,

부모에게나 혹 다른 아이들에게 그대로 들려주었다.

 

2,3년 후부터 로사는 이미 고신 극기의 생활을 시작햇다.

그녀는 자기 방에 조그마한 제단을 꾸며놓고 대부분을 그 앞에서 기도하며 지냈다.

잘 때에는 한 장의 판자를 요로 삼았고 너무 엄한 단식(斷食)때문에 사람들은 그녀의 건강을 염려하였다.

그래도 항상 그녀의 얼굴은 기쁜 빛이 감돌며 모든 사람들에게 친절하고, 거지들을 반가이 대하며 자기 몫인 음식을 나누어 먹이기도 했다.

 

그 당시 로사에 대한 몇 가지 기적이 전해져 내려온다.

어떤 가난한 집 아이가 하루는 꽃병을 깨뜨렸다. 로사는 불쌍한 생각으로 그 꽃병 조각을 모아 그 위에다 십자가를 그렸다.

그랬더니 즉시 그 병은 전과 같이 되어 금이 난 흔적도 없었다고 한다.

로사는 열 살 때 중병에 걸렸었다. 임종이 가까웠다고 생각될때 그녀는 묵시를 보았다.즉 천당, 연옥, 지옥의 모양이었다.

 

그러자 성모님이 나타나서 그녀에게 예쁜관을 씌워 주시며 성 프란치스코 제3회에 들어갈 것을 권고하시고,

앞으로의 생활 방식과 그녀가 해야 할 일들, 또 그녀가 받을 박해와 고통에 대해서도 친절히 깨우쳐 주셨다.

이리하여 그녀는 완쾌한 후 거치른 옷에다 끈으로 만든 띠를 허리에 둘렀다.

 

그녀는 탈혼 중에 어린 예수를 보았다. 그 때 예수에게서는 이미 가시관을 쓰시고 피가 낭자하게 흘렀다.

그것을 본 로사는 애처로운 생각에 잠겨 자기 몸을 피가 나도록 매질했다고 한다.

 

그 당시 황제 프리데리코는 교회를 박해하고 그 군대는 이탈리아까지 침입하여 많은 학살을 감행했다.

비테르보와 그 부근의 촌락도 그 마수를 피할 길이 없었다.

바로 이때 로사는 분연(憤然)히 일어나 세상의 불신, 부도덕, 호화와 사치며 기타 부정을 책하는 일 장 연설을 했는데,

그 웅변 태도며 그 말의 구절 마다가 하늘에서 울려나오는 것 같았다.

 

로사는 네거리와 광장 등 사람이 많이 모이는 곳을 택하여 누구에게도 보일 수 있는 높은 돌이나 기둥에 서서 연설을 햇다.

불과 12세인 이 소녀의 열변은 대단한 반향을 일으키지 않을 수 없었다. 많은 사람이 그 말에 감탄하여 회개하고 죄의 보속을 했다.

프리데리코의 부하들은 이 소녀를 대단히 불쾌히 생각하여 비테르보 시장으로 하여금 로사의 가족을 즉각 추방하도록 했다.

 

그 부친은 "지금은 겨울이요, 돈도 없고 정처도 막연하니 잠깐만 여유를 주십시오.

지금 우리를 추방한다면 우리는 들에서 굶어 죽을 것입니다."하며 애원했으나

시장은 조금도 동정함이 없이 "너희들은 죽어도 좋다.어서 빨리 나가라"고 도리어 재촉했다.

이에 부친은 하는 수없이 처자를 거느리고 정든 곳을 떠나 사방을 헤매다가 솔리아노라는 곳에 이르렀다.

 

이곳 사람들은 불쌍한 그들에게 친절을 베풀어 주었다.

그래서 그들은 이곳에 자리를 잡고, 로사는 설교를 시작했는데, 그 반향은 역시 대단했다.

1250년 12월 5일, 로사는 사람들에게 곧 행복할 것을 예언했다.

그러자 그달 13일에 프리데리코 황제가 사망하고, 국내에는 평화가 깃들이게 되었다.

로사의 가족들은 그리운 비테르보 시에 귀환하는 도중 어떤 마을을 통과했는데 그곳은 배교한 어떤 여자의 악한 표양으로 인해 배교자가 많았다.

 

로사는 그저 통과할 수 없다고 생각하고 그 여자의 비행을 질책했으나 상대방도 상대인지라 여러 가지 항변으로써 쉽게 승복하지 않았다.

로사는 "말로써 시비가 결정되지 않으니 기적으로 결정합시다"하고 소경 하나를 데려다 놓고 고치라 하였다.

그런 여자가 이런 일을 할 수 있을리가 만무했다.

그 여자는 실패했고 로사는 훌륭히 그 소경의 눈을 뜨게 했다. 그런데도 그 여자는 마음을 돌리지 않았다.

그래서 이번에는 둘이 다 같이 이글이글 타는 불속을 건너가자고 청하였다. 상대는 두려워 승낙할 기색을 보이지 않았다.

로사는 장작에 불을 지펴놓고 그 가운데에 우뚝 섰다. 그녀는 의복 하나 그을리지 않았고 몸에도 조그마한 화상 하나 없었다.

그때서야 그 여자도 얼굴빛이 변하며 놀랐고 마침내 회개하고 그녀와 더불어 많은 사람들이 다시 신앙의 길로 돌아왔다.

 

로사의 가족이 비테르보에 들어섰을 때 시민의 환영은 대단했다.

15세가 된 로사는 수도원에 들어가기를 원했으나 그 소원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그래서 그녀는 다시 자기 작은 방에서 전과 같이 홀로 기도와 극기의 생활을 계속했다.

2년 후 그녀는 17세의 꽃 같은 몸으로 그의 깨끗한 영혼을 하느님 손에 맡겼다.

그녀의 유해는 처음 비테르보 교회에 매장했다가 뒤에 다른 교회로 이장했다.

그때는 이미 5년이 경과한 해였지만 아직 얼굴색이 하나도 변하지 않았다고 한다.

그 뒤 백년이 지났을 무렵 그 교회는 대 화재로 전소되어

성녀 로사의 영구(靈柩)와 의복은 다 소실되었으나 유해만은 무사하여 현재에 이르고 있다.

 

 

 

 

축일 : 9월 4일

성녀 로살리아 동정

Santa Rosalia Vergine, eremita di Palermo

Santa Rosalia Vergine

St. Rosalia of Palermo

at Palermo, Sicily - c.1160 apparently of natural causes

Rosalia = dal nome del fiore

 

 

13세기부터 시실리아에서는 성녀 로살리아 공경이 보편화 되었으나,

옛 순교록에는 그의 생애가 기록되지 않고 있다.

스틸팅 신부의 연구에 따르면, 성녀 로살리아는 젊어서 고향을 떠나

시실리의 비보나 교외 몬떼 꼬쉬나의 어느 동굴에서 은수자로 살았다.

후일 그녀는 팔레르모에 페스트가 유행했을 때,

그녀는 이 도시의 주민을 구했기 때문에 그녀가 팔레르모로 주민들의 수호성인으로 공경을 받으며,

그녀의 은둔소 위에 큰 성당을 세웠다.

 

 

1624년 이탈리아의 팔레르모 시에는 무서운 페스트가 발생하여

어떠한 치료 수단도 효과 없이 희생자가 속출했으며 사람들도 매우 불안했다.

 

사람들은 하느님의 도우심 외에는 구할 길이 없다하여 모든 성인의 호칭 기도를 외우며 시가행진을 했는데,

이상하게도 마치 주님의 묵시나 받은 듯이 제각기 다른 길로 열지어 가는 성가대원들이

성녀 로살리아의 이름을 호칭 기도문에 덧붙여 노래했다.

더구나 이상한 것은 이 행렬이 끝나자 그처럼 맹위를 떨치던 열병도 즉각 멈추었다는 것이다.

 

 

로살리아는 어렸을 때에 부친과 같이 팔레르모에 와서 부친이 왕궁에서 근무하는 동안,

그녀는 왕비 마르가리타의 총애를 받아 그 감독 하에 좋은 교육을 받았다.

 

성년이 되어 어떤 귀족에게 출가시키려는 무렵 로살리아는 돌연 종적을 감추었다.

그녀는 우선 어떤 수녀원에 숨었다가 곧 인기척 없는 동굴 속에서 살았다.

그 소재지를 안 사람을 왕비 마르가리타 뿐이었으며,

그녀는 더 조용한 장소를 로살리아에게 택하여 주며 일생을 그 곳에서 지내도록 했다.

 

 

 

로살리아는 기도와 묵상으로 세월을 보냈다.

비바람을 가릴 만한 집이 페레그리노 산 위에 있었는데,

때때로 한 신부가 찾아와 그곳에서 미사를 지내 주었다.

 

로살리아가 아무도 모르는 이런 산중에서 일생을 마쳤으므로

그녀의 죽음과 묘지를 안 사람도 극히 드물었다.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그녀의 묘소와 그녀의 이름을 세상에 알리셨다.

팔레르모에서 시가행렬이 끝난 후였다.

 

성녀는 어떤 노인에게 나타나서

"페레그리노 산에 가 보세요, 거기에 내 무덤이 있습니다"했다.

 

노인이 가보니 과연 가르쳐 준 장소에 무덤이 하나 있었다.

그래서 무덤을 헤쳐보니 한 부인의 시체가 나왔다.

 

 

STATUE OF SANTA ROSALIA IN THE CAVE

 

생전의 모습 그대로였다.

그러나 과연 성녀 로살리아의 시체인가?

이런 의문을 둘러싸고 의사와 신부들이 면밀한 조사를 한 결과

거의 틀림없다는 결론을 내리게 되었는데, 여기서 새로운 증거가 나타났다.

 

 

 

즉 묘지의 동굴 속에서 발견된 돌 한개에는

성녀 자신이 새겼는지 혹은 다른 사람이 새겼는지 다음과 같은 글이 기록되어 있었다.

 

"퀴스퀴나 및 로제스의 영주 시니발도의 영양 로살리아는

하느님의 사랑을 위해 동굴에 거처하기로 정했다."

 

팔레르모 시민들은 즉시 그녀를 주보 성녀로 결정했다.

성녀가 살던 곳에는 아름다운 성당을 건립하고,

주교좌 성당 옆에는 조그마한 성당을 세워 그곳에 성녀의 유해를 안치했다.

 

 

성녀 로살리아는 팔레르모 시민의 신뢰를 어기지 않고 주보로서의 임무를 다했다.

우선 전술한 페스트 종식을 시작으로 1693년의 대지진 때에도

구원의 손을 뻗쳐 다른 도시 촌락에서는 수많은 사상자가 났었지만 팔레르모 시민만은 그 참화를 면했다.

그 뒤 성녀 로살리아에게 대한 흠모는 각국에까지 퍼졌고,

특히 페스트와 지진에 대한 구원의 성녀로 공경을 받게 되었다.

 

 

 

 

 

 

 

로사리오의 복되신 동정 마리아 (축일:10월7일)   

 

이 축일은 성 비오 5세 교황이 레판토 해전(1571년) 승리 기념일에 제정하였다.

그리스도교 신자 군사들은 그 때 자신들이 거둔 승리가 묵주기도를 바침으로써 받은,

천주의 거룩하신 어머니의 도움 때문이라고 생각하였다.

 

오늘 이 축제는 하느님 아드님의 사람이 되심, 수난, 그리고 부활의 영광에 특별한 방법으로 참여하신

복되신 동정 마리아의 이끄심으로 그리스도의 모든 신비를 묵상하도록 우리를 격려한다.

로사리오란 말은 장미 꽃다발(Rosario:라틴어)에서 유래되었습니다.

 

*로살리아Rosalia 축일:9월4일

*로사리아Rosaria 축일:10월7일

 

 

 

 

 

 

 성 모이세스(Moyses, 또는 모세)는 이스라엘 백성이 이집트에서 탈출할 당시 백성의 지도자요 예언자이자 율법의 중개자였다. 그의 절대적 권위는 구약과 신약성경 시대는 물론 오늘날까지도 이스라엘의 율법을 ‘모세법’이라고 부르는 전통이 철저히 지켜지는 데서도 잘 드러난다. 구약성경의 모든 신학이 흘러나오는 가장 중요한 원천이 ‘이집트 탈출’과 ‘시나이산 계약’이라고 한다면, 주 하느님께서 모세를 선택하여 이 해방 사건과 계약의 중개자로 삼으신 것이 바로 이스라엘 안에서 모세가 가지는 절대적 권위의 근거가 된다. 출생에서부터 특별한 일화를 남기고 있는 모세는, 비록 모세오경 외의 구약성경에서 그 이름이 자주 언급되지는 않지만, 율법 중심의 이스라엘 사회에서 계약과 율법의 중개자로서의 그 독보적인 권위는 확고하다.

   탈출기 1장에 의하면 모세는 불어나는 이스라엘 백성을 보고 위협을 느낀 이집트의 왕 파라오가 “히브리인들에게서 태어나는 아들은 모두 강에 던져 버리고, 딸은 모두 살려 두어라.”(1,22)라고 명령한 시대에 태어났다. 그는 레위 지파에 속한 아므람과 요케벳 사이에서 태어났고, 그의 누이는 미르얌이었고, 형제로는 아론이 있었다(탈출 6,16-20. 7,7. 15,20; 민수 26,59; 1역대 23,12-14). 모세의 부모는 파라오의 눈을 피해 석 달 동안 모세를 숨겨 기르다가, 더는 숨겨 둘 수 없게 되자 왕골 상자를 가져다 역청과 송진을 바르고 그 안에 아기를 뉘어 강가 갈대 사이에 놓아두었다. 파라오의 딸인 공주가 목욕하러 강으로 내려왔다가 그 상자를 발견하고 아기를 안아 들자, 이를 지켜보던 아기의 누이(미르얌)는 아기의 친어머니를 유모로 소개하여 아기는 다시 어머니의 품에서 자라다가 파라오의 딸에게로 보내졌다. 공주를 그 아기를 아들로 삼고, “내가 그를 물에서 건져 냈다.”(탈출 2,10) 하면서 그 이름을 모세라 하였다. 이렇게 해서 모세는 이집트 궁중 안에서 성장하게 되었다(탈출 2,1-10 참조).

   청년이 된 모세는 어느 날 이집트 사람 하나가 강제 노동에 시달리는 한 히브리 사람을 때리는 것을 보고 그 이집트인을 죽이고 몰래 모래 속에 묻어 버렸는데, 그 일이 탄로가 난 것을 알고는 파라오를 피해 미디안 땅으로 도망갔다(탈출 2,14-15). 모세는 미디안 광야에서 치포라라는 여인과 결혼하고 장인 르우엘(또는 이트로라고도 함, 탈출 2,18-21. 3,1. 4,18. 18,1)의 집안에서 양 떼를 치는 목자 생활을 하다가 하느님의 부르심을 받았다. 떨기나무에 불꽃이 솟아오르는 데도 타지 않는 떨기 가운데 신비로이 나타나신 주 하느님께서는 “나는 네 아버지의 하느님, 곧 아브라함의 하느님, 이사악의 하느님, 야곱의 하느님이다.”라고 말씀하셨다. 이어 이스라엘 백성이 이집트에서 극심한 노역에 울부짖는 소리를 들으셨고, 그들의 고통을 알고 있다고 하셨다. 또한 조상들과 맺은 계약을 기억하시며 모세가 이집트의 손에서 이스라엘 자손들을 구해내어 당신이 약속하신 땅, 즉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으로 데려갈 것을 명하셨다(탈출 3,1-12 참조).

   주 하느님께 소명을 받고 파견된 모세는 이집트의 왕 파라오에게 가서 이스라엘 백성을 내보내 광야에서 주님을 위한 축제를 지낼 수 있도록 허락해달라는 말을 전했지만, 파라오는 오히려 이스라엘 백성에게 더 심한 노역을 부과해 모세는 같은 민족들로부터도 원성을 듣게 되었다. 모세는 파라오의 고집을 꺾기 위해 주 하느님의 말씀에 따라 이집트 땅에 열 가지 재앙을 선포하였다. 이집트 땅의 모든 맏아들과 짐승의 맏배까지 모조리 치는 열 번째 재앙에 굴복한 파라오는 결국 이스라엘 백성을 내보내 주었다. 모세는 백성을 이끌고 이집트를 탈출하지만, 곧 이집트 군대의 추격을 받았다. 이때 앞을 가로막던 갈대 바다가 갈라져 이스라엘 백성이 걸어서 바다를 건너고, 뒤쫓던 이집트 군대는 갈라진 바다 한가운데서 다시 합쳐지는 물에 휩쓸려 몰살하는 사건이 일어났다(탈출 5-14장 참조).

   구약성경에 따르면 이스라엘 백성은 이집트를 탈출한 지 석 달째 되는 바로 그날, 시나이 광야에 이르게 되었다(탈출 19,1). 주 하느님은 모세를 산 위로 부르시고 그를 중개자로 삼아 이스라엘 백성을 당신 백성으로 삼아 계약을 맺으셨는데, 여기에서 모세의 특별한 위치가 분명히 드러났다. 모세는 산을 오르내리며 하느님의 말씀을 백성에게 전해주었다. 모세가 백성 앞에 내놓은 하느님의 말씀은 곧 계약의 말씀으로서 주된 내용은 십계명이었다. 모세가 하느님의 이 모든 말씀과 법규들을 백성에게 전하자 이스라엘의 온 백성은 환호하며 주 하느님의 말씀을 충실히 따라 살 것을 서약하고, 모세는 하느님과 백성 사이에 맺는 계약을 위해 열두 개의 기둥을 세우고 제사를 지냈다(탈출 24장). 이로써 주 하느님은 이스라엘의 하느님이 되시고, 이스라엘은 주 하느님의 백성이 되었다.

   이집트를 탈출해 해방의 기쁨을 맛본 이스라엘 백성은 약속의 땅에 이르기까지 40년을 광야에서 보내야 했다. 이스라엘 백성이 가나안 땅을 향해 여행을 시작할 때, 광야에서 제일 먼저 부딪힌 문제는 먹을 것과 마실 것이 없다는 것이었다. 그들은 모세에게 자신들을 굶겨 죽이려고 이집트 땅에서 데려 내왔느냐는 식으로 대들었고, 모세는 백성의 불평을 주 하느님께 아뢰어 만나와 메추라기와 물을 얻었다(탈출 15,22-17,7). 모세는 이스라엘 백성을 이끌고 광야 생활을 하면서 단지 하느님의 말씀을 전하는 수동적인 위치에만 있지 않고, 하느님의 법이 곧 삶의 길임을 백성에게 가르쳤고, 백성들이 금송아지를 세우는 등 하느님의 길에서 벗어나면 그들을 맹렬히 비난하면서도 백성을 향한 하느님의 분노를 풀어드리기 위한 기도를 끊임없이 바쳤다(탈출 32장 참조).

   이렇게 모세는 주 하느님의 부르심을 받아 이스라엘 백성을 이집트의 노예 생활에서 해방해 젖과 꿀이 흐르는 약속의 땅 가나안으로 인도하면서 시나이산에서 계약을 통해 이스라엘 백성을 하느님의 백성으로 새로이 탄생하게 하는 중개자가 되었고, 40년의 광야 생활에서 한편으로는 하느님 백성의 종교적이며 정치적인 지도자로서 백성에게 하느님의 길을 가르치고 그들의 모함과 질시를 받으면서도 그들의 죄를 일깨우고 하느님께 중재의 기도를 드렸으며, 다른 한편으로 광야의 여정에서 만나는 이민족과의 전투에서는 군사 지도자로서 백성을 지휘하여 앞길을 터 나갔다.

   40년에 걸친 광야의 여정이 끝나고 예리고 맞은편 느보산의 피스가 꼭대기에서 주 하느님께서는 모세에게 요르단강 건너편에 자리한 약속의 땅을 보여주셨다. 이때 모세의 나이는 120세였다. 그러나 모세는 그 강을 건너가지는 못한다는 하느님의 말씀을 들었다(신명 3,27. 34,1-12). 성경은 모세가 약속의 땅에 들어가지 못한 이유를 두 가지로 설명한다. 첫째, 가나안 땅 정찰 후에 하느님의 약속을 불신하고 저버렸던 백성들을 올바로 인도하지 못한 탓(민수 14,28-35; 신명 1,37)과 둘째로 므리바에서 하느님의 말씀 그대로 실행하여 그분 영광을 드러내지 못한 탓(민수 20,12)이 그것이다. 이렇게 모세를 포함해서 이집트에서 해방을 직접 몸으로 경험한 세대는 모두 광야에서 생을 마감하고 그 이후에 태어난 사람들만 남게 되었는데, 모세와 이집트를 탈출한 세대에게 허락된 몫은 자신들이 아닌 그 후손들이 약속의 땅의 풍요함을 누리도록 길을 열어주는 것이었다.

   주님의 종 모세는 모압 땅에서 죽어 벳 프오르 맞은쪽 골짜기에 묻혔는데, 오늘날까지 그가 묻힌 곳을 아는 이는 아무도 없다(신명 34,6). 그로 인해 그의 무덤은 전례적인 장소가 되지 못하였다. 하지만 모세가 죽기 전에 고별사인 모세의 노래를 통해 이스라엘 민족을 가르치고(신명 32장), 이스라엘 자손을 축복하는(신명 33장) 부분은 모세에 관한 성경 내용 중 가장 아름다운 에필로그를 이루고 있다. 모세오경을 끝맺으며 모세에게 주어진 “이스라엘에는 모세와 같은 예언자가 다시는 일어나지 않았다. 그는 주님께서 얼굴을 마주 보고 사귀시던 사람이다.”(신명 34,10)라는 찬사는 모세가 온 이스라엘이 보는 앞에서 이룬 모든 위업과 놀라운 대업을 그 배경으로 하고 있다.

   교회 미술에서 성 모세는 하느님과 맺은 계약의 상징인 십계명 판을 들고 있거나 탄생과 소명, 이집트 탈출과 광야에서 있었던 여러 일화와 기적 이야기와 함께 표현되고 있다. 그리고 미켈란젤로(Michelangelo Buonarroti)의 모세 대리석 조각을 비롯해 많은 조각과 회화에서 모세는 머리에 두 개의 뿔이 난 모습으로 형상화되었다. 이는 그리스어로 번역된 구약성경을 라틴어로 번역하는 과정에서 생긴 오역의 결과이다. 모세가 시나이산에서 주님과 함께 말씀을 나눈 후 십계명 판을 받고 내려왔을 때 그의 ‘얼굴의 살갗이 빛나고’ 있었고, 백성들은 가까이 가기를 두려워했을 정도였다(탈출 34,29-30). 여기서 모세의 ‘얼굴의 살갗이 빛나고’ 있는 광채를 엉뚱하게 ‘모세의 뿔 달린 얼굴’(cornutam Moysi faciem)로 오역하면서, 후대의 많은 화가와 조각가들이 모세의 머리에 두 개의 뿔을 붙이는 전통으로 이어졌다. 그러면서 뿔을 그리는 대신 모세의 머리에서 마치 뿔처럼 생긴 광채가 빛나는 모습으로 표현하기도 한다.

   옛 “로마 순교록”은 9월 4일 목록에서 모압 땅 느보산에서 율법으로 백성을 이끈 모세가 숨을 거두었음을 짧게 전해주었다. 2001년 개정 발행되어 2004년 일부 수정 및 추가한 “로마 순교록”은 같은 날 목록에서 이집트에서 억압받는 이스라엘 백성을 해방해 약속의 땅으로 인도하기 위해 하느님께서 모세를 선택하셨고, 시나이산에서 당신 자신을 직접 나타내 보이시며 선택받은 백성의 삶을 인도할 율법을 주셨다고 했다. 그리고 하느님의 종인 모세는 약속의 땅을 눈앞에 두고 모압 땅 느보산에서 숨을 거두었다고 기록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