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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무 일도

~ 성 김대건 안드레아 사제와 성 정하상 바오로와 동료순교자들 대축일 성무일도 ~

9월 20일 성 김대건 안드레아 사제와 성 정하상 바오로와 동료 순교자들 대축일 아침기도

 

 

 

9월 20일 성 김대건 안드레아 사제와 성 정하상 바오로와 동료 순교자들 대축일 제2저녁기도

 

9월 20일 성 김대건 안드레아 사제와 성 정하상 바오로와 동료 순교자들 대축일 제2저녁기도 후 끝기도

 

 

 

 

 

 

 

 

 

 

 

 

 

 

 

성 정하상 바오로(1795-1839, 신학생, 기해박해 때 참수)

 

 

정하상(丁夏祥)은 한국 천주교회의 가장 훌륭한 순교자의 한 분인 정약종(丁若鐘)의 둘째 아들로, 외국 선교사의 영입을 위해 신명을 바쳐 일했고 유명한 "상재상서"(上宰相書)를 지어 천주교의 교리를 당당하게 변호했던 주님의 참된 용사이다. 그는 또 덕행과 지혜와 능력이 뛰어나 범(앵베르) 주교에 의해 이신규(李身逵)와 함께 신학생으로 뽑혀 라틴어와 신학 공부까지 했으나 박해로 인해서 신품을 받지는 못하였다.

 

정하상은 7세 때인 1801년 신유박해(申酉迫害)로 전 가족과 함께 체포되어 아버지와 이복형인 정철상(丁哲祥, 가롤로)이 순교하자 가산을 몰수당한 채 나머지 가족들과 함께 석방되었다. 몸붙일 곳이 없게 된 하상은 하는 수 없이 고향인 양근 땅 마재로 내려가 숙부인 정약용(丁若鏞)의 집에 의지하여 어린 시절을 보냈다.

 

1813년 홀로 상경하여 조증이(趙曾伊, 바르바라)의 집에서 기거하며 교리를 배우고 열심히 교회 일을 도왔고 그후 더욱 깊게 교리를 배우기 위해 함경도 무산(茂山)에 유배 중인 조동섬(趙東暹, 유스티노)을 찾아가 교리와 한문을 배우고 다시 상경, 성직자 영입운동을 전개하였다. 1816년 역관의 하인으로 들어가 동지사 일행과 함께 북경에 갔으며 그곳에서 북경 주교에게 신부 파견을 요청하였으나 실패하였고 그 후에도 조신철(趙信喆, 가롤로), 유진길(劉進吉, 아우구스티노) 등과 함께 9차례나 북경을 왕래하여 나(모방) 신부 등 네 분의 외국 신부들을 영입하는 데 성공하였다.

 

1839년 7월 모친 유소사(柳召史, 체칠리아), 동생 정정혜(丁情惠, 엘리사벳)와 함께 체포된 정하상은 곧 그가 쓴 "상재상서"를 대신에게 올렸는데 이 글은 한국 최초의 호교문일 뿐더러 그후 홍콩에서 책으로 발간되어 중국에서도 널리 읽혀졌다.

 

정하상은 포청에서의 6차례 신문과 형벌을 받고 의금부로 이송되어 또 3차의 형문을 당한 후 반역죄로 사형을 선고받았다. 9월 22일 그는 유진길과 함께 서소문 밖 형장에서 참수되어 순교하였다. 그 때 그의 나이는 45세였다.

 

- 성녀 유소사(柳召史) 체칠리아의 아들.- 성녀 정정혜(丁情惠) 엘리사벳의 오빠.- 성녀 유소사(柳召史) 체칠리아, 성녀 정정혜(丁情惠) 엘리사벳, 성녀 김 데레사와 함께 체포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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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천주교회사에 큰 획을 그었던 정하상 바오로(1795-1839, 신학생, 기해박해 때 참수). 그는 천주교가 이 땅에 깊숙이 뿌리내리게 하기 위해 일익을 담당했던 사람 가운데 하나다. 1795년 정하상은 정씨 집안에 대를 이어 살고 있는 양근 땅 마제에서 태어났다. 아버지 정약종(아우구스티노)은 한글 교리서 "주요교지" 두 권을 저술한, 최초의 평신도 회장이었다.

 

1801년 신유박해 때 정씨 일가에게 큰 회오리바람이 몰아쳤다. 아버지와 형 정철상(카롤로)이 순교했고, 백부와 숙부인 정약전, 약용은 천주교에 입교한 죄로 전라도로 귀양가게 된 것이다. 정하상은 아버지가 순교할 때 일곱 살로 어머니 유 체칠리아와 여동생 정정혜(엘리사벳)과 함께 풀려났다. 유 체칠리아는 가산이 몰수당해 갈 곳이 없어 가족들을 데리고 다시 마재로 내려갔으나 문중 사람들 모두가 천주교 때문에 집안이 망했다고 하면서 냉대하고 멸시했다.

 

곤궁과 천대 속에서도 정하상은 어머니에게 천주교의 교리를 들으면서 신앙을 키워갔다. 그의 마음에는 아버지의 아들답게 신앙의 일꾼이 되고자 하는 포부를 키워갔다. 그의 마음에는 아버지의 아들답게 신앙의 일꾼이 되고자 하는 포부를 키워갔다. 바오로가 총명하고 비상한 재주를 지닌 청년으로 자라자 친지들은 혼인해서 집안을 다시 일으키라고 권했다. 그러나 바오로는 어머니께 "나에게 앞으로 해야 할 커다란 일이 있습니다. 이밖에는 마음을 쓸 일들이 없습니다."고 말씀드리고 마재를 떠났다.

 

1813년 홀로 서울로 올라온 정하상은 조증이(바르바라) 집에서 머물면서 교리를 배우고 교회 일을 열심히 하였다. 그후 바오로는 더욱 깊이 교리를 공부하기 위해 함경도 무산에 귀양가 있던 한학자 조동섬(유스티노)을 찾아가 천주교 교리와 한문을 배우고 다시 상경하였다.

 

그는 성직자 영입을 위해 1816년 역관의 하인으로 들어가 동지사 일행과 함께 북경에 가서 성세와 견진을 받고 주교에게 성직자 한 분을 요청했으나 실패하였다. 비록 그는 뜻은 못 이루었지만 북경에 왕래하는 길을 튼 것으로 만족하였다. 정하상은 꿈을 포기하지 않고 조신철, 유진길과 함께 아홉 차례나 북경을 왕래하면서 북경에 있는 주교와 로마에 있는 교황에게 편지를 보내는 등 끊임없이 성직자 영입운동을 벌였다. 그들의 이러한 노력으로 마침내 1827년 조선교회가 파리 외방전교회에 위임되고 동시에 조선독립교구가 설정되었으며, 유방제, 나 모방, 정 샤스탕 신부와 범 앵베르 주교를 영입하는 데 성공하였다. 국내 학자들이 스스로 교회를 세운지 사십여 년이 지났고, 1794년 주문모 신부가 파견되어 순교한 뒤로 약 사십 년만의 일이었다.

 

앵배르 주교는 바오로가 사제가 되기에 적당하다고 여겨 이신규와 함께 신학생으로 뽑아 라틴어와 신학을 가르치는 등 열심히 사목하였다. 바야흐로 조선교회의 앞날이 밝게 내다보이는 듯했다. 그러나 안동 김씨와 풍양 조씨 사이에 세력다툼으로 또다시 박해가 시작되었다. 그는 주교를 피신시키고 순교의 때를 기다렸는데, 1839년 7월 어머니와 여동생과 함께 체포되었다. 그는 곧 그가 쓴 "상재상서(上宰相書)"를 대신에게 올려 천주교의 교리를 당당하게 변호했다. 이 문서는 박해의 부당성을 뛰어난 문장으로 논박했기에 조정에서도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고 한다. "상재상서"는 한국 최초의 호교문으로 그후 홍콩에서 책으로 발간되어 중국에서도 널리 읽혔다.

 

바오로는 포청에서 서양 신부들의 은신처를 대고 배교하라고 강요당하였으나 이를 거절하였다. 며칠 뒤 다시 끌려나와 톱질형을 받아 살이 떨어져나가고 골수와 피가 쏟아져나오는 무서운 형벌을 받으면서도 끝가지 입을 열지 않았다. 정하상 바오로는 포청에서 여섯 차례의 신문과 형벌을 받고 의금부로 이송되어 세 차례에 걸친 형문을 당한 후 반역죄로 사형선고를 받았다.

 

결국 1839년 9월 22일, 그의 마흔 다섯에 서소문밖 형장에서 참수되었다. 사십팔 년이라는 사이를 두고 아버지와 아들이 같은 자리에서 같은 죄목으로 순교하였던 것이다.

 

[경향잡지, 1996년 9월호]

 

[한국교회 선교의 뿌리를 찾아서] 평신도 - 성 정하상 바오로

 

민족 구원 위해 성직자 영입 주도

 

 

- 성 정하상 바오로

 

 

최양업 · 김대건 등 신학생 선발 앞장
사제 요청하기 위해 북경 9차례 왕래

 


“한국 천주교회는 평신도 사도직운동의 선구적 전개를 실천한 교회이며, 스스로의 학문 활동을 통해 천주 신앙에 도달했고, 교회를 창립했고, 신앙생활을 실천했다.”

 

1982년 제1회 ‘평신도 심포지엄’에서 이원순 교수(한국교회사연구소 고문)는 이같이 말했다. 평신도 사도직운동의 선구적 전개를 실천한 교회, 그 교회 안에 평신도 정하상이 있다.

 

한국교회 평신도의 대표격으로 불리는 정하상은 조선대목구 설정에 크게 기여한 인물이다. 정약종과 유소사의 아들로 1795년 출생, 1839년 서소문 밖 형장에서 순교하기까지 그는 쉼 없이 한국교회의 토대를 쌓았다.

 

윤민구 신부(수원교구 손골성지 전담)는 정하상 성인이 본격적으로 천주교 부흥운동에 뛰어든 것은 1816년의 일이라고 전한다. 신유박해와 을해박해가 일어난 직후 성직자 영입 운동에 적극 나선 것. 신유박해로 국내에서 활동하던 유일한 성직자 주문모 신부를 잃게 된 당시 조선 신자들은 가슴 아픈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정하상은 1816년 만 21세의 나이로 북경으로 떠나 조선의 소식을 전하고, 이후 조선교회 재건과 성직자 영입을 위해 무려 9차례나 북경을 왕래한다. 물론 유진길, 조신철 등 동료들과 함께 성직자 영입을 요청하는 서한을 교황에게 작성해 올렸지만, 이 가운데 정하상의 역할은 핵심적이었다. 결국 이들이 올린 서한은 1827년 교황청(재위 교황 레오 12세) 포교성성(현재 인류복음화성)에 전달됐다.

 

제2대 조선교구장 앵베르 주교는 정하상을 가리켜 “주께서는 우선 우리의 북경 보행군으로 나이 42세에 아직 독신이며 우리들을 모두 조선에 인도하여 들인 신자(정하상)를 찾아내는 은혜를 주셨습니다. 나는 3년 안으로 신품을 줄 희망을 품었습니다”라고 말할 정도였다.

 

그의 노력은 초대교구장 브뤼기에르 주교 파견으로 이어졌지만 입국 전 주교의 선종으로 뜻을 이루지는 못한다. 브뤼기에르 주교의 뒤를 이어 1836년 모방 신부가 서울에 도착했다. 이때 정하상의 노력은 또 한 번 빛을 발한다. 모방 신부는 최양업과 최방제, 김대건 등을 신학생으로 선발했는데, 이 과정에서 주도적 역할을 한 사람이 정하상이라는 것이다.

 

정하상은 또 서양 선교사들을 집에 모셨고, 비서로 활동하기도 했다. 선교사들의 지방출장에 동행했고, 신자들이 성사를 보게끔 도와줬다. 당시 문헌들은 그의 지도력이 전국에 미치고 있었음을 알게 한다.

 

윤민구 신부는 정하상이 천주교를 통한 민족의 구원을 위해 일했으며, 당시 사회제도의 한계를 초월한 삶을 살았다고 말한다. 또 정하상 성인의 모친과 여동생이 바느질과 옷감 짜는 일로 연명했다는 사실을 볼 때, 살림이 넉넉지 않았다는 것을 알 수 있지만, 그는 애긍의 삶을 살았다고 전한다.

 

정하상은 「상재상서」등 저술활동에도 열심이었다. 그는 이를 통해 성교의 도리를 밝힘으로써 당시 유학자들이 가졌던 천주교에 대한 그릇된 생각들을 지적하고자 했다. 오랜 시간이 지나 우리는 그가 남긴 「상재상서」를 보며 그가 생각하는 ‘신앙인으로서의 삶’을 추측해 볼 수 있다.

 

평신도를 넘어서 모든 신앙인의 귀감이 되고 있는 정하상 바오로. 그는 선종했지만 한국교회사 속에서 살아 숨 쉬며 오늘날 평신도가 걸어갈 길을 힘주어 외치고 있다.

 

[가톨릭신문, 2011년 4월 17일, 오혜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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