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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무 일도

~ 성 예로니모 사제 학자 기념일 성무일도 ~

9월 30일 성 예로니모 사제 학자 기념일 아침기도

 

9월 30일 성 예로니모 사제 학자 기념일 저녁기도

 

9월 30일 성 예로니모 사제 학자 기념일 저녁기도 후 끝기도

 

 

 

 

 

 

 

 

 

 

 

 

 

 

 

 

 

 

 

 

 

 

 

 

 

 

성 예로니모 사제 학자 기념

 

340년경 달마티아의 스트리돈에서 태어났다. 로마에서 수학하고 거기서 세례를 받았다. 수덕 생활을 시작하고 동방에 가 그 곳에서 사제품을 받았다. 로마에 돌아와 다마소 교황의 비서가 되고 구약 성서를 라틴어로 번역하기 시작했으며 수도 생활을 증진시켰다. 베들레헴에 정착하여 그 곳에서 교회가 필요로 하는 여러 일을 훌륭히 수행했다. 성서 주해서를 비롯하여 많은 저술을 남겼다. 420년 베들레헴에서 세상을 떠났다.

 

 

성 예로니모 사제의 '이사야서 주해 서문'에서
(Nn.1. 2: CCL 73,1-3)

 

성서를 모르는 것은 그리스도를 모르는 것입니다

 

유다인들처럼 "너희는 성서를 모르고 하느님의 권능도 모르니까 그런 잘못된 생각을 하는 것이다."는 성서 말씀을 듣지 않기 위해, "성서를 파고들어라." 그리고 "찾으라. 얻을 것이다."고 말씀하신 그리스도의 명에 순종할 때, 내가 해야 할 바를 다하는 것입니다. 바울로 사도의 말처럼 그리스도가 하느님의 권능이시고 하느님의 지혜이시라면 성서를 모르는 이는 하느님의 권능도, 그분의 지혜도 모르는 것입니다. 성서를 모르는 것은 그리스도를 모르는 것입니다.

 

그래서 나는 자기 창고에서 새 것과 옛것을 끄집어 내는 집 주인을 본받고 싶으며, 또 아가에게 "아, 임이여, 햇것도 해묵은 것도 임을 기다리며 마련해 두었답니다."고 말하는 그 신부를 본받고 싶습니다. 나는 이 책에서 예언자 이사야를 예언자로서뿐만 아니라 복음 전파자요 사도로서 제시하고자 합니다. 이사야는 다음 말씀을 자기 자신과 다른 복음 전파자에 대해서 하고 있습니다. "반가워라. 기쁜 소식을 안고 산등성이를 달려오는 저 발길이여, 평화가 왔다고 외치며, 희소식을 전하는구나." 그리고 하느님께서 흡사 사도에게 말씀하시듯 이사야에게 "내가 누구를 보낼 것인가? 누가 우리를 대신하여 갈 것인가?" 하고 물어보시자, 그는 이렇게 대답합니다. "제가 여기 있지 않습니까, 저를 보내십시오."

 

그러나 내가 몇 마디 말로 주님의 모든 신비를 포함하는 이 성경 책의 내용을 다 취급하려 한다고 생각해선 안됩니다. 사실 이사야서에서는 주님이 동정녀에서 탄생하신 임마누엘로, 여러 놀라운 일들과 기적들을 행하시고 죽으시고 묻히셨으며 부활하신 분으로, 그리고 만백성의 구세주로 예언되어 있습니다. 물리, 도덕, 논리에 대하여 내가 무슨 말을 하겠습니까? 성서 전체에 나오는 모든 것과 인간의 혀가 말할 수 있는 모든 것, 그리고 인간의 이해력이 받아들일 수 있는 모든 것이 이 책에 담겨 있습니다. 예언자 이사야는 다음 말씀에서 이 신비들의 깊이를 증언해 주고 있습니다. "이렇듯이 모든 것이 너희에게 계시되었지만, 그것은 밀봉된 책에 쓰여진 말씀과 같다. 글 아는 사람에게 이 책을 읽어 달라고 하면 '책이 밀봉되었는데 어떻게 읽겠느냐?'고 할 것이다. 글 모르는 사람에게 이 책을 읽어달라고 하면 '나는 글을 모른다.'고 할 것이다."

 

이 증명이 만일 어떤 이에게 너무 빈약하게 보인다면 사도 바울로의 다음 말씀을 들으십시오. "두세 명의 예언자들만 말하도록 하고 다른 이들은 그것을 잘 새겨들어야 합니다. 그러나 곁에 앉은 사람이 하느님의 계시를 받을 경우에는 먼저 말하던 사람은 중단해야 합니다." 그들이 침묵을 지키건 말을 하건 간에 예언자들을 통하여 말씀하시는 영께 의지하고 있는데, 어떻게 그들이 침묵을 지킬 수 있단 말입니까? 예언자들이 스스로 말하는 것의 뜻을 깨닫고 있다면, 만사는 지혜와 지식으로 가득 차게 될 것입니다. 그들의 귀에는 자신들이 하는 말소리의 진동만이 가 닿는 것이 아니라, 바로 예언자들은 다음 말씀으로 이것을 증명해 줍니다. "그 천사가 내 안에서 말했다." "하느님의 영은 우리 마음 속에서 '아빠, 아버지'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주 하느님, 당신의 말씀을 내 듣고 싶사옵니다."

 

성 예로니모 사제는 어떤 분인가?

 

예로니모(347-419년) 성인은 뛰어난 성서학자이며 수덕가로서 서방교회의 4대 공교부 가운데 한 분이다. 예로니모는 347년경에 지금의 북부 이탈리아 스트리도니아의 부유한 가정에서 태어났다. 12살 때 로마에 가서 엘리오 도나토라는 유명한 학자에게서 수사학과 고전문학, 특히 치체로와 비질리오의 라틴어 고전문학에 대해 공부하였다. 이때 그는 세속 학문에 전념하였지만, 주일에는 사도들과 여러 순교자들의 성지 특히 카타콤바를 방문하며 신앙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 19살 때 리베리오 교황에게서 세례성사를 받고 프랑스 지방을 여행하다가 트리어에 정착한 다음 정부 관리로 일하였다.

 

알렉산드리아의 총대주교 아타나시오는 아리우스 이단자들의 반대 때문에 3년간(335-337년) 트리어에서 귀양살이를 할 때 동방교회의 수도생활을 소개하였다. 그래서 예로니모는 트리어에 머무는 동안 수도생활에 관심을 갖고 하느님께 자신을 봉헌하였다.

 

그는 370년에 고향인 아퀼리아에 돌아와 발레리아노 주교의 지도 아래 같은 뜻을 갖고 있던 친구 루피노, 보노소 크로마치오, 엘리오도로 등과 함께 복음적 공동생활을 시작하였다. 이때 그는 테르툴리아노, 치프리아노, 힐라리오 등 위대한 라틴 교부들의 저서를 탐구하였다. 그러나 그들은 지역교회와 융합하지 못하고 흩어지게 되었다. 그래서 예로니모는 373년에 예루살렘을 순례한 다음 안티오키아에 머물면서 라오디게이아의 아폴리나리스 주교에게서 성서 주석 방법과 그리스어를 배웠다.

 

그후 그는 안티오키아 동편에 있는 칼치스 사막에서 2년간(375-377년) 은수자들과 살면서 그리스어를 익히고 히브리어를 공부하기 시작하였다. 그가 은수생활을 계속할 것인지 그만둘 것인지 망설이고 있을 때, 그리스도께서 꿈에 나타나셔서 "너는 치체로 추종자이지 그리스도인이 아니다. 네 보화가 있는 곳에 네 마음이 있기 때문이다."라고 꾸중하셨다고 한다. 그러나 은수자들 사이에 아리우스 이단 문제로 대립하는 상황이 벌어지자 그곳을 떠날 수밖에 없었다. 그는 379년에 안티오키아에 가서 일정한 사목직을 맡지 않는다는 조건으로 바올리노 주교에게서 사제품을 받았다. 이듬해에 콘스탄티노플에 가서 당시 콘스탄티노플의 총대주교이던 나지안조의 성 그레고리오 주교의 강의를 듣고 오리게네스의 성서 주석 방법에 매료되었으며, 니사의 성 그레고리오 주교와도 교류를 가졌다. 이때부터 그는 오리게네스의 수많은 저서들을 그리스어에서 라틴어로 번역하기 시작하였다.

 

예로니모는 382년에 로마로 오게 되는데, 다마소 교황은 그를 비서로 삼고 신.구약 성서를 라틴어로 새로 번역하는 대업을 맡겼다. 서방교회 안에는 이미 여러 개의 라틴어 성서 번역본이 있었지만, 교황은 예로니모에게 교회에서 공식적으로 인정할 수 있는 라틴어 성서본을 만들도록 위촉하였던 것이다. 한편 예로니모는 말첼라와 바올라 등을 주축으로 한 상류층의 여인들에게 성서를 가르치고 수도생활의 이상에 대한 열정을 고취시켰다. 그러자 그의 재능을 시기한 적대자들이 여자들 집에 들락거리는 예로니모를 의심하고 비난하기 시작하였다. 사실 예로니모는 80세 가까이 된 다마소 교황의 뒤를 이을 사람으로 물망에 올라있었다. 그러나 384년에 그를 지원하던 다마소 교황이 사망하고 예상과는 달리 시리치오 교황이 선출되자 상황이 돌변하였다. 적대자들이 그에 대한 비난을 강화하였기 때문에 그는 로마를 떠날 수밖에 없었다.

 

예로니모는 이집트의 니트리아 사막의 은수자들을 방문한 다음 386년 여름부터 베들레헴에서 본격적으로 수도생활을 시작하였다. 그러나 바올라가 따라와서 자기 돈으로 세 개의 남자 수도원과 한 개의 여자 수도원을 세웠다. 예로니모는 남자 수도 공동체를 지도하고, 바올라는 여자 공동체를 지도하였다. 또 그는 순례자들을 위한 숙소를 짓고 수도자들을 위한 학교를 세워 직접 강의하였다.

 

그후 그는 베들레헴 수도원에서 34년간 저술과 번역 활동에 몰입하였다. 그 사이에 그는 전교회를 떠들썩하게 했던 오리게네스주의 논쟁에 휘말리게 되었다. 오리게네스주의 논쟁이란 오리게네스의 많은 신학 학설들 가운데 몇 가지 문제에 대해 신학자들이 심각하게 대립한 것을 말한다. 예로니모는 오리게네스 신학의 열렬한 추종자였으나, 반대 입장에 서게 되었다. 또 394년부터 그는 히포의 성 아우구스티노와 서신 연락을 하면서 당시 교회의 큰 골칫거리였던 펠라지우스 이단을 몰아내는 데 공동 보조를 맞추었다. 아우구스티노는 예로니모의 라틴어 번역 사업을 높이 평가하면서 그를 칭송하였다. 예로니모는 419년 9월 30일에 베들레헴의 수도원에서 선종하였다.

 

교회는 9월 30일에 그의 축일을 지내고, 그를 '신학교의 주보' 또는 '수덕생활의 주보'로 모신다. 그는 아마 라틴 교부들 가운데 가장 박학한 분이었고, 동시대 사람들 가운데 라틴어와 그리스어와 히브리어를 자유자재로 구사할 수 있는 유일한 분이었다.

 

예로니모는 엄청난 양의 저서를 남겼으며, 밍네의 라틴 교부 총서(PL) 제22-30권에 그의 저서들이 수록되어 있다. 이 총서 한 권은 요즘의 400쪽으로 된 책 40-50권 분량이나 된다는 점을 고려하면 그의 방대한 저서를 짐작할 수 있다. 그의 저서들은 성서 주석서, 성서 번역서, 교의신학서, 이단 논쟁서, 수덕신학서, 역사서, 강론, 서간 등 다양하며, 저서 목록만 열거하더라도 엄청나게 많다. 그가 이처럼 많은 저서를 남길 수 있었던 것은 비교적 오래 살기도 했지만, 수도원 안에서 학문 연구에 열정적으로 몰입했기 때문이다. 그에 대한 성화들이 많은데, 상체를 벗은 은수자의 모습으로 펜을 들고 저술에 몰두하고 있는 것이 대부분이다.

 

그는 무엇보다 성서학자였다. 신.구약 성서를 라틴어로 번역한 '불가타'(Vulgata) 중, 구약성서의 경우에 처음에는 그리스어로 된 70인역에서 번역하였다가 후에 히브리 원문에서 직접 번역하였다. 예로니모가 번역한 라틴어 성서에 '불가타'라는 이름이 붙여진 것은 예로니모 당시가 아니라 훨씬 뒤인 13세기부터였다. 그 이유는 예로니모의 라틴어 성서본이 원문에 매우 충실하고 정확한 번역일 뿐만 아니라 대중이 쉽게 읽을 수 있는 라틴어로 되어있었으므로 로마 교회가 이를 공식적인 성서로 인정하였기 때문이다.

 

그는 유명한 그리스 교부들의 성서 주석서들, 특히 오리게네스의 주석서들을 라틴어로 번역하여 서방교회에 소개하였다. 게다가 예로니모는 자신이 직접 구약성서의 창세기, 시편, 전도서, 모든 예언서, 그리고 신약성서의 마태오 복음서, 사도 바오로의 필립비서, 갈라디아서, 에페소서, 디도서 등에 대한 주석서들을 저술하였다. 예로니모는 처음에는 은유적 주석방법을 선호하였지만 점차 성서의 본문과 역사를 중시하는 문자적 주석방법으로 바뀌어갔다. 그는 성서를 하느님의 말씀으로 받아들이고, 성서의 무류성을 역설하였다. 그가 성서 본문 연구와 주석에 이처럼 주력하였던 것도 이 때문이었다.

 

독서의 계절을 맞으며 위대한 성서학자인 성 예로니모를 주신 하느님께 감사드리고, 우리도 성인을 본받아 성서를 하느님의 말씀으로 듣고 되새기는 열성과 습관을 지니게 되도록 기도하고 노력해야 하겠다.

 

[이형우 시몬 베드로 신부, 성 베네딕도회 왜관 수도원, 경향잡지, 1999년 9월호]

 

교부들의 가르침: 히에로니무스

위대한 성서학자, 수덕생활의 수호자

 

 

광주가톨릭대 교수 노성기 신부

 

서방교회 4대 교부중 한 사람

 

오늘은 베들레헴으로 여행을 떠나자. 그곳에서 수도자, 사제, 불가타 성서를 번역한 가장 위대한 성서학자였던 히에로니무스를 만나보자. 고대 서방 교회가 배출한 가장 위대한 학자들 가운데 한 사람이었던 그는 서방 교회의 4대 교부(암브로시우스, 아우구스티누스, 대 그레고리우스) 중 한 사람으로 ’신학교의 수호 성인’, ’수덕생활의 수호 성인’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 그는 동시대인들 중에서 라틴어, 그리스어, 히브리어를 자유자재로 구사할 수 있었던 유일한 교부였다. 사제이면서도 생애 대부분을 수도자로 살았던 그는 베들레헴의 수도원에서 선종했다. 성인의 축일은 9월 30일이다.

 

342년경에 달마티아(오늘날 슬로베니아의 류블리아나)의 스트리도니아 지방에서 태어난 그는 12살 때 로마로 가서 문법과 수사학과 고전 라틴문학을 공부했다. 이 때 루피누스를 만나 후일 그와 함께 오리게네스의 작품을 라틴어로 번역했다.

 

370년경에 고향으로 돌아온 그는 발레리아누스 주교의 지도로 친구들과 함께 수도생활을 시작하면서 테르툴리아누스, 치프리아누스, 힐라리우스 등 라틴 교부들의 작품들을 읽었다.

 

더 엄격한 금욕생활을 하겠다고 결심한 그는 374년에 자신이 소장하고 있던 책을 갖고 안티오키아 동편에 있는 칼치스 사막으로 들어가 은수자들과 함께 생활했다. 그러나 은수자들이 아리우스 이단 문제로 서로 대립하자, 은수자로서의 삶을 접고 안티오키아로 갔다. 그곳에서 당대 최고의 주석가였던 라오디케아의 아폴리나리우스로부터 성서 강의를 들으면서 성서주석 방법을 배우고 그리스어를 공부했다.

 

은수생활을 계속할 것인지 말 것인가 망설이고 있을 때, 꿈에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셔서 ’너는 그리스도인이 아니라 키케로주의자이다. 너의 재물이 있는 곳에 너의 마음도 있다’라고 꾸중하셨다. 꿈의 영향을 받아, 히에로니무스는 수도생활을 계속해도 된다는 조건으로 379년에 안티오키아에 바올리누스 주교로부터 사제품을 받았다.

 

380년에는 콘스탄티노플의 총대주교 나지안즈의 그레고리우스로부터 성서강의를 듣고 오리게네스의 성서 주석방법에 매료되어 오리게네스의 작품들을 그리스어에서 라틴어로 번역하면서 니사의 그레고리우스 주교와 교류했다. 382년에 안티오키아의 바올리누스 주교와 함께 로마로 순례를 가서 다마소 교황을 만났다. 교황은 그를 비서로 삼고 히브리어와 그리스어로 되어 있는 신구약성서를 당시 사람들이 쉽게 알아들을 수 있는 라틴어로 번역하라고 명령했다. 왜냐하면 200년대부터 서방교회에는 여러 종류의 라틴어 성서 번역본이 있었으나 번역본들마다 내용이 서로 달라 어려움이 많았기 때문이다.

 

20년 이상 번역작업 몰두

 

그를 적극적으로 후원해주던 다마소 교황이 사망(384)후, 그의 재능을 시기한 자들이 비난하자 예루살렘으로 떠나갔다(385). 뛰어난 라틴어 문필가이면서 그리스어와 히브리어, 아라메아어 등 성서에 관련된 언어에 능통했던 히에로니무스는 그리스어 원문에서 직접 신약성서를 번역했다. 베들레헴 수도원에서 수도생활을 하면서 오리게네스의 ’헥사플라’에 나오는 70인역을 히브리어 원문과 직접 대조해가면서 구약성서를 라틴어로 번역했다.

 

20년 이상을 번역작업에 매달려 신약성서와 구약성서를 번역했다. 그가 번역한 라틴어 성서를 13세기 때부터 ’불가타 성서’라고 불렀다. 왜냐하면 모든 사람들이 쉽게 읽을 수 있는 쉬운 언어로 번역되었기 때문이다. 라틴어로 불가타(Vulgata)는 ’일상적’, ’대중적’이란 뜻이다. 불가타 성서는 히에로니무스의 가장 위대한 업적이었다.

 

히에로니무스는 성서의 중요성을 강조한다. "성서를 사랑하십시오. 그러면 성서가 여러분을 보호해 줄 것입니다. 성서를 흠모하십시오. 그러면 성서가 여러분을 감싸줄 것입니다"(히에로니무스, ’편지’, 130, 20). 그 외에도 최초로 ’성서의 무류성’을 주장했다. 또한 성모 마리아의 평생 동정성을 주장하면서, 남자들도 여자들처럼 순결은 지켜야 한다고 강조했다. 펠라지우스 논쟁이 발생하자, 인간이 스스로 죄를 짓지 않을 수 있다고 주장하는 펠라지우스주의자들은 자기 자신을 하느님으로 간주하는 것과 같다고 반박했다(히에로니무스 ’펠라지우스주의 논박’ 2, 4).

 

최초 수도 규칙서 작성

 

393년에 그는 콘스탄티아의 에피파니우스와 예루살렘의 요한 사이에 벌어진 오리게네스 신학 논쟁에 휘말렸다. 오리게네스 논쟁은 전 교회를 떠들썩하게 만들었다. 그는 오래 전부터 친분이 두터웠던 에피파니우스를 지지하고, 그의 친구 루피누스는 요한를 지지했다. 이로써 그는 옛 친구 루피누스와 영원히 등지고 말았다. 오리게네스 신학의 열렬한 추종자였던 히에로니무스는 오리게네스 논쟁이 발생하기 전까지는 오리게네스를 성서 주석의 위대한 스승으로 생각하고 그의 작품들을 그리스어에서 라틴어로 번역했다.

 

최초의 수도 규칙서인 ’파코미우스 규칙’과 서간 등 수도생활에 관련된 문헌들을 라틴어로 번역한 그는 베들레헴 수도원에서 전례시기에 맞추어 수도자들에게 정규적으로 강의도 하고 강론도 했다. 이처럼 그는 성서번역과 저술활동에 전념하면서도 남녀 수도자들을 지도하면서 수덕생활에 전념했다.

 

로마가 함락되었다(410)는 소식을 들은 히에로니무스는 베들레헴 수도원에서, ’전 세계를 사로잡았던 로마여, 이제는 사로잡힌 신세가 되었구나!’ 라고 탄식했다.

 

펠라지우스주의자들이 난동을 일으켜 베들레헴의 수도원에 불을 지르자(416), 간신히 몸을 피한 히에로니무스는 몇 년 후에 베들레헴의 수도원에서 선종했다(419).

 

끝으로 히에로니무스가 제자 네포티아누스를 칭찬하면서 했던 말을 마음에 새기고 음미해봤으면 좋겠다. "그는 열심히 성서를 읽고 이를 고이고이 되새김으로써 자기 마음을 고스란히 그리스도에 관한 도서관으로 만들었다"(히에로니무스 ’편지’ 60, 10).

 

[가톨릭신문, 2003년 8월 24일]

 

 

[역사속의 그리스도인] 33. 교부편 (14) 예로니모

 

 

예로니모는 히브리어로 된 구약과 그리스어로 된 신약성서를 대중이 쉽게 읽을 수 있는 라틴어로 번역했다.

 

라틴어로 성서번역 대중화 선도성서연구·저술작업에 몰두
자기 결점들 가슴깊이 반성

 

 

「불가타」(Vulgata:대중적)는 예로니모(347∼419) 성인이 번역한 라틴어 성서를 가르킨다. 이러한 이름이 붙여진 이유는 그의 라틴어 성서본이 원문에 매우 충실하고 정확한 번역이면서 대중이 쉽게 읽을 수 있는 라틴어로 되어 있어서 로마교회가 이를 공식적인 성서로 인정했기 때문이다.

 

엄청난 저술과 여러 뛰어난 학문적 업적 중에서도 무엇보다 히브리어로 된 구약과 그리스어로 된 신약을 라틴어로 번역한 성서학자로 이름을 각인시키고 있는 예로니모.

 

그런 만큼 그는 성서 번역 외에도 유명한 그리스 교부들의 성서주석서들 특히 오리게네스의 주석서들을 라틴어로 번역했고 자신이 직접 구약성서의 창세기 시편 전도서 예언서, 또한 마태오 복음서 사도 바오로의 필립비서 갈라디아서 에페소서 디도서 등에 대한 주석서들을 저술하는 등 성서연구에 몰두했던 인물이다.

 

암브로시오, 아우구스티노, 그레고리오와 더불어 서방교회 4대 교부로 꼽히는 예로니모는 성서 관련 저술 외에도 교의신학서, 이단논쟁서, 수덕신학서, 역사서, 강론, 서간 등 다양하고 목록만 열거해도 엄청난 양일 정도로 많은 저서를 남겼다. 그와 관련한 성화들 대부분이 펜을 들고 저술에 힘을 쏟고 있는 장면인 것도 그러한 방대한 저술 작업과 무관치 않다고 볼 수 있다.

 

예로니모는 347년경 북부 이탈리아 아퀼레이아 인근 스트리도니아 지역에서 태어났다. 비교적 부유한 가정 출신이었던 그는 12세 되던 해 로마에 가서 엘리오 도나토라는 학자에게 수사학, 라틴어 문학 등을 사사했다.

 

신앙에 대한 관심을 가지게 된 시기도 이때 로마에 체류하면서 였는데 사도들과 순교자들의 성지, 특히 카타콤바를 방문하면서 신앙을 키워가기 시작했던 것으로 알려진다.

 

19세때 리베리오 교황으로부터 세례를 받고 프랑스 트리어에 정착, 정부관리로 일하게 된 그는 이즈음 수도 생활을 접하게 됐고 결국 하느님께 자신을 봉헌하게 된다.

 

340년경 로마로 돌아온 후 복음적 공동생활을 시작했던 예로니모는 373년 안티오키아에 머물면서 아폴리나리우스 주교로부터 성서 주석 방법과 그리스어를 공부했다. 이후 칼치스 사막에서 은수 생활을 하는 동안 그리스어를 익히고 히브리어를 새로 공부했다.

 

379년 다시 안티오키아에 가게 된 예로니모는 바울리노 주교로부터 사제품을 받았다. 고정적인 사목직을 맡지 않는다는 조건이었다.

 

저술과 번역 작업에 관심을 갖게 된 계기는 380년경 콘스탄티노플에서 현지 총대주교 나치안츠 그레고리오의 강의를 듣고서였다. 예로니모는 이때 오리제네스 성서 주석 방법에 빠져들었고 오리제네스의 저서들을 라틴어로 번역하기 시작했다.

 

본격적인 성서 번역을 접하게 된 것은 382년 다마소 1세 교황 비서로 임명된 후 신 구약 성서의 라틴어 번역 임무를 맡게 되면서였다.

 

번역 작업과 병행해서 상류층 미망인들에게 성서를 가르치고 수도 생활에 대한 이상을 교육시켰던 그는 이에 대한 적대자들의 의심과 비난에 부닥쳐 본의 아니게 로마를 떠나 386년 베들레헴에 정착했고 이때부터 수도 생활에 전념했다.

 

예로니모는 이로부터 34년동안 수도원에 머무르며 막대한 양의 저술 번역 작업을 할 수 있었다. 그의 생애 후반기에 해당하는 이 시기는 예로니모에게 있어 가장 빛나는 업적을 남길 수 있었던 시간이었다. 4복음서와 바오로의 편지들, 시편의 라틴어본 사본 제작, 「헬비디우스를 반박하며」 등의 이단 반박서, 호교론 등의 저술들이 이뤄진 것도 이때였다.

 

예로니모는 한편 하느님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사랑이 너무도 열렬했었다. 이전의 어느 교부도 그만큼 교회에 대한 사랑을 명확하게 표현한 적이 없다고 전해질 정도인데, 그런 말처럼 그는 교회를 위해 싸웠고 교회에 적대적 입장을 보이는 자들은 원수처럼 여겼다. 일례로 오리제네스의 추종자였음에도 오리제네스 이단 논쟁이 일자 반대 입장에 서서 교회를 수호했고 히포의 아우구스티노 성인과 서신 연락을 통해 당시 교회의 큰 골치거리였던 펠라지우스 이단을 없애는데 힘을 모았다.

 

학자들은 그의 성서 번역 연구와 관련, 「성서를 하느님 말씀으로 받아들이고 성서의 무류성을 역설했다」고 밝히면서 성서 본문 연구와 주석에 예로니모가 그처럼 주력했던 것도 바로 그러한 이유 때문이었다고 풀이하고 있다.

 

예로니모는 격한 성격과 신랄한 비평, 빨리 화를 내는 한편 빨리 후회하는 성격이었고 다른 사람의 결점보다 자신의 결점에 더욱 더 가혹했다고 하는데, 한 교황은 돌로 가슴을 치는 예로니모의 초상화를 두고 「만일 그 돌을 가지고 있지 않았으면 교회는 결코 성인으로 추대하지 않았을 것」이라는 말을 남기기도 했다.

 

라틴 교부들 중 가장 박학했으며 동 시대인들 중에서 라틴어, 그리스어, 히브리어를 자유 자재로 구사할 수 있는 유일한 학자였던 것으로 평가되는 예로니모는 성 아우구스티누스로부터 『예로니모가 무엇을 모르는가를 일찍이 안 사람은 없었다』라는 평을 받았다. 또 현대의 한 신학자는 『예로니모는 이전이나 그와 동시대 사람 가운데는 아무도 그 일에 적격인 사람이 없었으며 예로니모 이후 몇세기 동안 아주 적은 수의 사람들이 그 일을 하는데 적격이었을 뿐이었다』고 칭송하기도 했다.

 

419년 9월 30일 베들레헴 수도원에서 72세 나이로 선종했으며 「신학교 수호성인」, 「수덕 생활의 수호 성인」으로 추앙되고 있다.

 

[가톨릭신문, 2004년 10월 10일, 이주연 기자]

 

[세계교회사 100대 사건] 예로니모와 불가따 성서

 

 

[베들레헴=김상재 기자] 얼마전 TV에서 고전강의로 선풍적 인기를 끌던 도올 김용옥은 예수님의 탄생지에 대한 의문을 제기해 물의를 빚은 적이 있다.


해산일이 임박한 임산부가 나자렛에서 300여리 떨어진 베들레헴으로 이동해 아이를 낳은 것이 의심된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같은 주장은 신약학계에서는 이미 친숙한 추론이다. 예수 부활이후 유다계 그리스도인들은 예수님을 메시아로 신봉했는데 베들레헴이 아닌 다른 곳에서 태어났다고 하면 예수님은 약속된 메시아가 아니란 반론이 제기 될 것이 분명하기에 복음사가들은 역사적 신빙성이 없는 호구조사까지 만들어 내면서 마리아와 요셉을 베들레헴으로 이동시켰다는 것이다.


결국 베들레헴은 예수님이 실제로 탄생한 곳이라기 보다는 예수님을 메시아로 섬긴 믿음에서 나온 신앙적 탄생지라는 것이 역사비평학적 성서학자들의 견해다. 물론 예수님의 역사적 탄생지로 베들레헴을 보는 설도 있지만 중요한 것은 예수님의 탄생지가 베들레헴이냐 나자렛이냐 하는 것은 그리스도교의 신앙 내용은 아니라는 것이다.


어쨌든 베들레헴이 예수님의 탄생지라는 것이 교회 내에서 오래된 전승인 것만은 틀림이 없는데 오늘날에도 성탄성당이 자리하고 있어 수많은 순례자들에게 사랑을 받고 있다.


베들레헴의 성탄성당은 콘스탄티누스 황제의 어머니 헬레나 성녀가 324년 베들레헴에 순례와서 예수님 탄생지로 전해오는 동굴을 참배하고 그 동굴 위에다 성당을 지었다고 한다. 그러나 이 성당은 언젠가 불타버리고 지금은 유스티아누스 황제때 완공된 것이다.


이 유스티아누스 성당 왼편에 1881년 프란치스코회 수도자들이 세운 가타리나 성당이 있다. 전세계에 방영되는 성탄자정미사는 여기서 이뤄지는 것이다. 가타리나 성당에서 지하계단으로 내려가면 예수탄생 동굴과 비슷한 동굴들이 많이 있는데 그중 하나가 예로니모 성인의 서재이다.


예로니모 성인은 이곳에서 34년간 집필하면서 수도생활을 했다. 예로니모는 420년에 선종했는데 생시에 서재 근처 동굴에 묻어달라고 유언하여 서재 옆 동굴에 묻혔으나 13세기에 이르러 성인의 시신은 로마 성모대성당으로 이장됐고 지금은 빈 석관만이 남아있다.

 


예로니모


뛰어난 성서학자이며 수덕가로서 서방교회의 4대 교부중 한 명인 예로니모 성인은 347년 현재의 유고슬라비아인 달마시아의 스티리도니아의 부유한 가정에서 태어났다. 12살 때 로마에 가서 수사학과 치체로 등의 라틴고전문학을 배웠고 19세때 리베리오 교황에게서 세례를 받았다.


이후 프랑스의 트리어 지방에서 관리로 일하다 아리우스 이단논쟁으로 트리어에서 귀양살이(335~337)하던 아타나시우스 성인에 의해 소개된 동방교회의 수도생활에 매료되어 일생을 하느님을 위해 봉헌하기로 결심했다.


373년 친구와 예루살렘 성지순례를 떠났다가 열병에 걸려 친구는 죽고 자신은 회복되어 안티오키아에 머물며 성서주석방법과 그리스어를 배운 예로니모는 이때의 체험으로 성서연구를 자신의 소명으로 받아들이게 된다.


과거에 예로니모는 성서를 로마제일의 변호사로서 뛰어난 문체를 자랑하던 치체로의 작품과 비교하여 조잡한 문장에 의한 보잘 것 없는 저서로 여기고 있었다.


그후 그는 안티오키아 동편에 있는 칼치스 사막에서 3년동안 은수자 생활을 하면서 그리스어와 히브리어를 완벽하게 습득한 후 성서주해 연구에 나섰다. 그러나 은수자들 사이에서 아리우스 이단으로 대립하는 상황이 오자 379년 안티오키아로 가서 사제품을 받고 이듬해 콘스탄티노플로 가 당시 콘스탄티노플 총대주교였던 나지안즈의 그레고리오의 강의를 듣고 오리제네스 성서주석에 심취해 이때부터 오리제네스 저서들을 그리스어에서 라틴어로 번역하기 시작했다.


예로니모는 382년 교황 다마소 1세의 초청으로 로마로와 3년간 교황비서로 봉직하면서 교황으로부터 라틴어성서번역을 의뢰받았다. 이에 수년간의 노력 끝에 유명한 불가따 성서번역본을 완성했다.


고령이던 교황의 뒤를 이어 후계자로 예정되었던 예로니모는 엄격한 수덕가로서 해이한 생활을 하던 성직자들을 비난하여 동료 성직자들로부터 신임을 얻지못하고 교황 서거후 적대자들의 비난이 심해지자 로마를 떠나 386년 여름부터 420년 선종할때까지 베들레헴에서 수도생활을 하며 저술과 번역활동에 몰두했다.


예로니모는 라틴교부들 가운데 가장 박학한 학자로 엄청난 분량의 저서를 남겼으며 동시대 사람들 가운데 라틴어와 그리스어 히브리어를 자유자재로 구사할 수 있었던 유일한 사람이었다.

 


불가따 성서


그러나 무엇보다 예로니모는 "성서를 모르는 것은 그리스도를 모르는 것과 같다"(이사야 주해서 서문)는 자신의 말에서 보듯 성서학자였고 그의 불가따본 성서번역본은 교회에 공헌한 자신의 가장 큰 업적이다.


2세기 중엽부터 라틴어로 번역되기 시작한 성서는 4세기 말경에 이르러 라틴어 필사본들이 양산되자 그 순수성의 훼손이 심각할 정도였다. 그러자 라틴 교회 안에서 사용되고있던 성서의 개정 필요성이 대두됐고 이를 맡은 것이 고대교회에서 가장 뛰어난 성서학자 예로니모 성인이었다.


구약성서의 경우 처음에는 그리스어로 된 70인역에서 번역하던 예로니모는 성서의 순수성을 되찾기 위해서는 원천으로 돌아가는 것이 중요하다고 보고 구약성서는 히브리어 원문에서, 신약성서는 그리스어에서 직접 번역하게 된다.


예로니모는 382년 교황 다마소 1세의 명을 받은 이후 복음서는 384년에, 신약 전체는 386년에, 구약은 404년에 완성했다.


예로니모가 번역한 라틴어 성서에 불가따(Vulgata)라는 이름이 붙여진 것은 13세기 경이었는데 원문에 충실하고 정확할 뿐 아니라 대중이 쉽게 읽을 수 있는 라틴어로 되었기 때문이다. 교회는 트리엔트공의회에서 인수페르(Insuper)라는 칙령을 통해 교회 공식성서로 선언했다.


신앙의 순수성을 위해 원천으로 돌아가야한다는 예로니모의 원칙은 오늘날 우리의 일상생활에도 요구되는 덕목일 것이다. 죄가 되는지 안 되는 지만을 따지기 보다 그리스도의 삶에 얼마나 합당한 것인지를 먼저 찾는 일이 더 중하고 그 잣대의 기준은 성서에 있다고 할 것이다.


예로니모가 '신학교의 주보' 또는 '수덕생활의 주보'로 모셔진 것은 교회 가르침과 교회생활의 기본은 성서라는 것을 표현해주고 있는 것이다.

 

[가톨릭신문, 2001년 7월 22일]

 

[성미술 이야기] 성 예로니모

 

노성두

 

 

<그림설명> 서재의 성 예로니모

안토넬로 다 메시나. 46×36.5cm. 1474년. 국립미술관. 런던.

 

 

학식과 체통 버리고 알몸의 영혼 드러내

 

 

유학 시절 이웃에 살던 독일 할아버지는 작은 목조 이층집을 지어서 비둘기를 키웠다. 2차 대전 때 발을 다치는 바람에 비둘기 사육을 생계수단으로 삼고 있었는데, 어느 날 흥미로운 이야기를 해주셨다. 똑같은 사료를 먹고 보살핌을 받는 비둘기인데, 어떤 놈은 한 마리 가격이 20마르크, 어떤 놈은 2000마르크나 나간다는 것이었다. 무슨 차이가 있어서 그런지 여쭈었더니, 비둘기 발에다 편지를 매달아서 프랑크푸르트에서 뮌헨까지 날려 보내면 비싼 놈은 한 눈을 파는 법 없이 온갖 장애를 무릅쓰고 죽기 살기로 최단 시간에 임무를 완수한다고 했다. 그런데 싸구려 비둘기는 중간에 마인츠에 들러서 이웃 안부도 물어보고 또 레겐스부르크에서는 어여쁜 비둘기와 소개팅을 하고 정분이 나서 살림을 차리는 등 언제쯤 뮌헨에 편지를 전달할지 그야말로 하세월이라는 것이다.


할아버지의 설명을 듣고 문득 구약성서 욥기가 떠올랐다. 야훼께서 사탄과 내기를 하시는데, 욥이라는 이름의 바른생활 사나이를 사탄이 의심과 유혹으로 실컷 흔들어본다는 내용이다. 욥기 첫머리에서 야훼께서는 사탄에게 『너는 어디 갔다 오느냐?』고 물으신다. 사탄의 대꾸가 인상적인데, 『땅위를 이리저리 돌아다니다가 왔습니다』라고 말한다(욥 1, 7 circuivi terram et perambulavi eam).


하느님께서 사탄 같은 말도 안 되는 악종과 친히 대화를 나누신다는 것은 좀 뜻밖이다. 속으로 무척 내키지 않으셨을 텐데, 아마 우리들에게 세상을 쓸데없이 나돌아 다니며 방황하는 행위가 못돼먹은 사탄의 속성이라는 사실을 가르쳐주시기 위해서 그러신 것 같다.


그런데 독일의 시인 괴테는 『방황하는 영혼이 아름답다』고 말한다. 욥기의 교훈과는 정반대이다. 이 말은 삶의 방황을 다 겪고 나서 시냇가 차돌맹이처럼 영혼이 말갛게 씻긴 다음에 털어놓는 파우스트적인 고백으로 들린다.


사실 교회의 웃어른으로 섬김을 받는 교부 가운데 아우구스티노도 얼마나 처절하게 방황을 겪었던가. 빈들에서 고행했던 안토니오에게는 사탄이 달콤한 처녀로 변신해서 알몸으로 유혹의 공세를 펼쳤다고 한다. 또 이탈리아의 플라젤란티라(flagellanti)고 불리는 수도자들은 영혼의 방황을 경계하려고 속에 엉큼한 생각이 떠오를 때마다 참회의 각오를 다지기 위해 채찍이나 회초리를 들고 제 몸을 사정없이 후려친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도 있다. 그러면 상처가 무척 심하게 날 텐데, 아마 품속에다 늘 빨간 약을 상비하고 다니지 않았을까, 쓸데없는 상상을 해 본다.


성 예로니모(347년~419년)도 시쳇말로 한 방황을 한 인물이다. 우리가 오늘날 즐겨 읽고 인용하는 라틴성서가 바로 이 분의 번역이라고 한다. 학창시절에 외국어 영역에서 내신 일등급을 항상 도맡았던 모양인데, 이처럼 빛나는 성서 번역을 완성하고도 번역저작권 개념이 없던 시절이라서 인세도 변변히 못 챙기셨을 게 분명하다.


이탈리아 화가 안토넬로 다 메시나의 그림에서 성 예로니모는 서재에 앉아 있다. 옷이 추기경 차림이지만, 이건 약간 오해가 있다. 화가들이 성 예로니모를 두고 그렇게 박식하신 분이니까 틀림없이 추기경의 지위에 오르셨을 거야, 하고 막연히 어림짐작으로 그리기 시작한 것이 그만 후대의 미술 전통으로 굳어져버린 것이다. 널찍한 실내에는 근사한 서가가 서 있고, 책도 많이 꽂혀 있다. 그림 앞쪽에 테두리 형식으로 문을 내고 관찰자의 시선을 바깥으로 밀어낸 것은, 집필에 집중하고 있는 성자를 방해하지 않으려는 화가의 조심스런 배려일 것이다. 덕분에 평면 그림 속에 그럴 듯한 원근법적 공간이 짜여졌다.


겉으로야 이렇게 착하고 똑똑한 모범생처럼 보이지만, 사실 성 예로니모도 젊은 시절에는 로마에서 못된 친구들과 사귀면서 인생을 탕진하기 바빴다고 한다. 그러나 많은 위인들이 그런 것처럼 성 예로니모는 곧 자신의 지난 과오를 깨닫고 뉘우친다. 고행의 좁은 오솔길을 선택한 것이다.


쓸쓸한 광야에서 홀로 전갈의 무리와 사귀고, 야생동물과 어울리던 성 예로니모는 때로는 지난 자책과 회한으로 몸부림친다. 해괴한 악몽에 시달리기도 했다. 한없이 이름다운 처녀들이 눈앞에 떼지어 나타나 맴돌이 춤을 출 때면, 꿈속에서 에로니모의 꺼진 욕망의 불길이 살아나곤 했다. 잠에서 깬 예로니모는 마음을 터놓는 옛 친구 에우스토키오에게 편지를 써서 영혼의 몹쓸 방황을 하고 말았노라고 털어놓는다. 남아 있는 편짓글을 읽으면 채찍과 단식으로 평화를 되찾은 수도자의 눈에 말라붙은 눈물자국을 확인할 수 있다.


『그럴 때면 나는 밤낮을 가리지 않고 눈물을 흘리면서 내 가슴을 사정없이 때리지. 그러고 나면 하느님의 평화가 다시 깃들곤 한다네』


위인전을 들추다가 이런 대목을 만나면 가슴이 뭉클해진다. 많은 사람들이 칭송해마지 않는 위대한 인물들의 삶이 다만 휘황한 금박으로 덧칠되어 있다면 오히려 몇 줄 읽다말고 코웃음을 날렸을 것이다. 그러나 잘난 학식이나 체통 따위 걸림 없이 벗어던지고 알몸의 영혼을 드러내 보이는 것, 성 예로니모에게서 배울만한 참된 교훈은 이런 것이 아닐까.

 

[가톨릭신문, 2004년 11월 7일]

 

 

[이달의 성인] 성 예로니모(340-420)

 

윤 클레멘트 신부

 

 

불가타(the Vulgate) 성서(히브리어에서 라틴어로 번역된 성서)의 번역가, 고전학자, 수도승, 여행가, 교사, 수덕신학자, 편지작가 등으로 불리어지는 그를 우리 교회에서는 불멸의 공헌자로 말한다. 그는 이탈리아의 베니스 북쪽 아퀼레이아 근방의 부유한 가톨릭 집안에서 태어났다. 그의 부친은 그를 로마로 보내어 공부하게 하는데, 그는 라틴어와 그리스어에 능통하고 고전작가들에게 심취한다. 그리고 그는 그의 마음을 넓히고자 친구 보노수스와 함께 3년간의 서유럽 여행을 떠난다.

 

그는 처음에는 보다 세상적인 화려함에 머무르기도 하였지만, 트리에(Treir)에서 회심의 체험을 한 후에는 수도승이 되려고 마음을 정한다. 그리고 아퀼레이아의 한 공동체에 들어가는데, 그곳에서 그는 가까운 많은 친구들을 만나기도 한다. 그러다가 그는 안티오키아에서 온 한 사제를 만나고, 동방으로 가고자 마음을 정한다. 거기에서 그는 심한 병에 걸리게 되는데, 그때에 ‘심판관석에 앉아 있는 그리스도’를 만난다. 그리스도께서 그에게 말했다고 한다. ‘너희의 재물 있는 곳에 너희의 마음도 있다.’

 

그는 안티오키아의 남부 챨시스의 사막지역으로 숨어들어가 그곳에서 히브리어를 공부한다. 그리고 성서번역가 겸 해설가가 되기로 마음을 정한다. 무엇보다도 그는 일생을 그리스도에의 봉사에 자신을 바치기로 한다. 사막에서의 몇 년이 지나고 그는 사제로 서품받는다. 곧 그는 교황 다마수스의 비서로 부름을 받는데, 그 직무는 또한 성서의 해설들을 쓰는 임무를 겸하기도 한다. 그는 그 무렵에 히브리어와 그리스 성서들을 라틴어로 다 번역하겠다는 마음을 정한다. 그리고 교황 다마수스가 세상을 떠나자 그는 곧 베들레헴 근처의 동굴로 돌아와 성서를 번역하기에 전념한다.

 

성서를 번역하는 위대한 일을 수행하던 그를 가까이에서 돕던 부유하고 신심 깊던 여인들이 있었다. 그 여인들은 사막의 은수자 안토니오의 생활을 본받아 은수자처럼 살고자 했었는데, 그들은 예로니모의 영적 지도를 받으며 몇 개의 공동체를 이루며 살았다. 그 여인들 중에서도 예로니모를 가까이에서 돕던 이들은 일찍이 그리스 주교들을 도우며 살아오던 바울라와 그녀의 딸 유스토치움이었다. 그 두 경건한 여인은 그가 키프로스와 안티오키아를 거쳐 예루살렘에 이르는 먼 길을 순례할 때에도 동행하였다.

 

예로니모의 가까이에서 그의 영적 지도를 받으며 은수자 공동체를 살던 여인들은 자신들도 히브리어를 공부하면서 많은 것들을 그에게 묻고 배웠으며, 또한 그녀들은 그가 오로지 성서번역 일에 전념하도록 채소, 과일, 빵, 우유 등을 제공하며 도왔다. 그는 40여 년의 보속과 열정의 피어린 작업 끝에 성서번역을 마무리하는데, 바로 오늘날 우리 가톨릭 교회의 공식적인 라틴어 번역본이다. 그는 평화로이 그의 영혼을 하느님께로 바치는데, 그의 시신은 그보다 먼저 평화롭게 떠난 경건한 두 여인 바울라와 유스토치움 가까이에 묻혔다가, 후에 로마의 성모설지전성당(상따 마리아 마죠레)으로 옮겨진다.

 

[2008년 9월 28일 연중 제26주일 전주주보 숲정이]

 

독서기도 : http://info.catholic.or.kr/divine_office/default.asp?sunseo=1&gomonth=2020-09-30&stype=re

삼시경 : http://info.catholic.or.kr/divine_office/default.asp?sunseo=1&gomonth=2020-09-30&stype=mi1

육시경 : http://info.catholic.or.kr/divine_office/default.asp?sunseo=1&gomonth=2020-09-30&stype=mi2

구시경 : http://info.catholic.or.kr/divine_office/default.asp?sunseo=1&gomonth=2020-09-30&stype=mi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