축일 2월7일(3월6일)
코르비의 성녀 콜레타 동정, Poor Clare
Santa Coletta Boylet Vergine
Corbie, presso Amiens (Francia), 13 gennaio 1381 - Gand, Fiandra (attuale Belgio), 6 marzo 1447
Etimologia: Coletta (accorc. di Nicoletta) come Nicola = vincidore del popolo, dal greco
Saint Colette
Also known as : Coleta, Colette Boylet, Collette of Corbie, Nicholette Boilet, Nicolette
Born : 13 January 1381 at Corbie, Picardy, France as Nicolette Boilet, named in honor of Saint Nicholas of Myra
Died : 6 March 1447 at Ghent, Belgium of natural causes
relics at Poligny, France
Beatified : 1604 by Pope Clement VIII
Canonized : 24 May 1807 by Pope Pius VII
Foundress of the Poor Clare Colettines
프랑스 건르비 태생인 꼴레따는 그녀의 어머니의 열렬한 기도에 대한 응답으로 태어났다.
어린 시절 그녀는 신심 활동에 커다란 기쁨을 느꼈으며 부모가 죽은 후에는 은둔소로 숨어들었다.
여기서 그녀는 많은 천상 위로를 받았으며
동시에 매우 엄격한 고행 시련들에 의하여 정화되고 신앙은 굳건해졌다.
꼴레따는 하느님의 감도하심을 받아 은둔 생활을 버리고
프랑스 전역에 엄격한 규율을 지키는 "가난 글라라" 수도원을 설립하기 시작했다.
생존 중에 17 개의 공동체가 형성되었다.
그녀는 사랑, 참회, 겸손, 온유의 모범을 보이며 살다가 1447년 하느님의 품으로 돌아갔다.
(작은형제회홈에서)
콜레타는 1381년 1월 13일 작은 마을 코르비에서 모범적인 노동자 집안에서 태어났다. 그녀는 어머니의 끊이지 않은 기도의 응답으로 은총을 받고 태어난 아이였다. 그녀의 어머니는 그녀를 낳을 때 이미 60살이었으며 그때까지 아이가 없었다.
기도로 태어난 탓인지 어린 소녀는 기도하는 것을 기뻐하였으며 가난한 사람들을 동정하며 엄격한 생활을 지키며, 자신의 영혼과 육신을 하느님께 희생 제물로 바쳤다. 14살이 될 때까지 그녀는 이상하리만큼 키가 작아서 이 때문에 그녀의 아버지는 크게 상심하였다. 콜레타는 하느님께 아버지를 위로해 주시길 간청하였다. 그 후 그녀는 매우 빨리 자라기 시작하여 정상적인 키가 되었다. 한 편 그녀는 하느님께 자신과 다른 사람들을 위험에 처하게 할지도 모를 자신의 빼어난 미모를 가져가시라고 기도하였다. 이 요구도 받아들여져서 매우 심한 외모로 자랐는데 많은 사람들이 이에 존경을 보여 주었다.
22세 때 부모가 죽자 교회의 허락을 얻어 교회 바로 옆에 조그만 곳에 혼자 갇혀 지냈다. 방의 조그만 창문을 통해 복된 성체를 볼 수 있었다. 그녀는 그곳에서 여생을 은수자로 살고 싶어 하였다. 그녀는 성 프란치스코 3회 회칙을 받아서 나날이 더욱 세라핌적 사부를 닮고자 회칙에 따른 완전한 가난, 극심한 극기와 끊임없는 기도 안에서 살려고 열망하였다.
18세가 되던 어느 날 기도에 열중하고 있을 때 사람들이 죄를 짓는 것을 무척 슬퍼하시는 것만 같은 형상으로 예수님과 성 프란치스코가 나타나셨다. 그때 프란치스코 성인은 주님을 향해 “콜레타에게 죄인을 위한 보속과 성녀 클라라 수도원의 개혁을 맡기면 어떻겠습니까?”하고 말씀드렸고 주님께서는 쾌히 승낙하셨다. 전능하신 하느님은 성녀 클라라의 회칙의 엄격한 준수를 재도입하고자 하는 열망을 그녀 마음 안에 불러일으키려 하셨던 것이다. 당시 많은 클라라 수도원들은 완화된 형식을 지키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녀는 이 개혁에 관한 생각이 악의 세력에서 나온 것이라고 생각하여 계속 거부하였다. 그러자 그녀는 벙어리와 장님이 되었고 다마스커스의 사울처럼 결국 하느님의 뜻에 순종하고는 “주님 제가 무엇을 하길 원하십니까? 당신이 원하시는 대로 무엇이나 하겠나이다.”라고 했다. 그러자 그녀는 즉시 말문이 열리고 눈도 볼 수 있게 되었다. 그 후 그녀는 가난한 클라라회를 하나씩 설립하여 생전에 17개나 세웠다. 그녀의 사후에 프랑스가 아닌 여러 나라에서도 비슷한 수도회가 설립되어 성 클라라의 초기 회칙이 새로이 번창하였다.
그녀의 기도의 응답으로 또 그녀의 사업을 확인해 주는 것으로서 죽은 사람들이 되살아나는 것을 포함하여 무수한 기적들이 일어났다. 40년 동안 열심히 일하다가 그녀는 1447년 3월 6일 겐트에 있는 수도원에서 숨을 거두었는데 그녀가 이 세상을 떠나는 순간 여러 수도원에 있는 여러 수녀들에게 동시에 나타났다. 우리바노 8세 교황에 의해 복자품에 올랐으며 1807년 비오 7세 교황에 의해 성인품에 올랐다.
(재속프란치스코 한국 국가형제회홈에서)
성녀 콜렛타의 개혁
성녀 콜렛타는 프랑스 Corbie에서 1381년 생겨났으며, 3회의 은수자 삶을 살았다.
1406년 그녀는 교회의 대분열 시기에 아비뇽의 교황이었던 베테딕도 13세를 만나기 위해 Nice 로 갔다.
그는 그녀에게 2회 수도복을 주었으며 2회를 개혁할 수 있는 권한을 주었다.
1447년 Ghent 에서 세상을 떠날 때까지 그녀는 프랑스와 벨기에, 네덜란드에 22개의 수도원을 세웠다.
그녀가 쓴 회헌은 1458년 비오2세에 의해 인준을 받았다.
이 개혁의 목적은 어떠한 소유도 없이 성 다미아노의 초기 가난한 자매들의 삶을 따르는 데 있었다.
성녀 콜렛타에 의해 개혁된 수도원들은 Colettine 개혁 수도원으로 알려지게 되었다.
(김창재다미아노ofm., 강의록 간추린프란치스칸 역사, 2006 프란치스칸영성학교 78쪽에서)
2. 콜렛타(Coleta)의 개혁
1381년에 코르비에(Corbie)에서 태어난 콜렛타는 처음에 재속3회복을 입고 은둔 생활을 하였다. 콜렛타는 성 프란치스코가 몇 차례에 걸쳐 발현하여 프란치스코와 글라라의 수도회를 개혁하라는 명령을 받고, 베네딕도 13세 교황을 뵈러 니자(Niza)로 갔다. 교황 앞에서 성녀 글라라의 수도규칙을 살기로 서약하고, 교황으로부터 원장의 직책과 더불어 성 프란치스코의 수도회를 개혁하라는 임무를 위임받았다
콜렛타는 하느님의 도우심과 교회와 나라의 뒷받침을 받고 프랑스, 벨기에, 네덜란드 지방을 다니면서 복음적 단순함과 가난의 씨앗을 뿌렸다. 그녀가 수도회 개혁을 마치고 세상을 떠난 것은 1447년(66세)이었다. 개혁을 이루기 위해 콜렛타는 성녀 글라라의 수도규칙을 기초로 하는 회헌을 썼다. ‘Coletinae’라고 하는 이 회헌은 1434년에 먼저 작은형제회 총봉사자가 인준했고, 1458년에 교황 비오 2세가 재확인하였다.
콜렛타의 회헌을 보면 성 다미아노 수도원의 생활로 돌아가서 가난과 복음의 자유를 강조하고 있다. ‘지원자들은 모든 것을 포기하고 지참물 없이 수녀원에 입회해야 한다. 사치스럽거나 불필요한 물건은 허용되지 않는다. 건물은 검소하고 단순해야 한다. 손수 일하는 것이 생계를 위한 유일한 방법이고 모든 자매들이 똑같이 일해야 한다. 자매들 간의 일치와 형제애를 돈독히 해야 한다. 그리고 봉쇄를 철저히 지켜야 한다.’ 등이다.
콜렛타는 글라라의 수도규칙을 거의 글자 그대로 받아들였고 그 정신도 잘 이해하였다. 그러나 그동안 전통적으로 내려왔던 규율적인 규정을 받아들였고 이 점에서 우르바노 4세의 수도규칙을 따랐다. 2회 자매들이 1회의 지도를 받아야 한다는 점은 성녀 글라라와 같았고, 형제 4명(사제 2명, 평수사 2명)이 수녀원의 일을 도와 줄 것을 원하였다. 성녀 콜렛타의 개혁은 1회 형제들에게도 쇄신의 계기가 되었다.
1431년에 에우제니오 4세 교황은 카살레의 굴리엘모 총봉사자에게 특별한 권한을 부여하면서 글라라의 수녀원을 다 개혁하라고 명령하였으나, 많은 수녀원의 반대 때문에 큰 성과를 거두지 못하였다.
참된 쇄신을 가져다주고 좋은 성과를 낸 것은 옵세르반트 운동이었다. 옵세르반트 형제들의 내적이고 영적인 열성은 2회에도 참된 쇄신을 가져 왔다. 쇄신의 목적은 항상 성녀 글라라의 수도규칙으로 돌아가는 것이었다. 이 쇄신운동으로 ‘우르바니테’(Urbanitae) 수녀들뿐만 아니라 율수3회나 원래 프란치스칸 가족에 속하지 않는 수녀회도 성녀 글라라의 수도규칙을 받아들이게 되었다. 이때의 개혁자들은 대부분 복녀들이고 볼로냐의 성녀 카타리나도 큰 역할을 하였다.
이렇게 15세기 말 성녀 콜렛타의 개혁과 옵세르반트 운동의 영향으로 글라라회의 수녀원 대부분은 성녀 글라라의 수도규칙대로 개혁되었고 그리고 많은 새로운 수녀원이 창립되었다.
(김창재다미아노ofm 이현주가타리나ofs,재속프란치스코회역사,한국재속프란치스코회출판부,2011,131-132쪽)
프랑스 피카르디의 코르비에 사는 목수의 딸인 그녀는 1381년 1월 13일에 태어나 니콜레뜨라 이름으로 세례를 받았으나, 흔히 콜레타로 불렀다.17세 때 천애 고아가 되어, 그녀는 자신의 유산을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 준 뒤에 프란치스꼬 3회원이 되었으며, 코르비에서 독수자로 생활하였다. 21세 때부터 콜레타는 코르비의 원장이 빌려 준 은둔소에서 홀로 살아왔는데, 이곳에서 이씨시의 성 프란치스꼬의 환시를 보았다.이때 성 프란치스꼬는 당신의 가난한 부인회(글라라회)가 엄격하던 그들의 원회칙에 따라 살도록 인도하라는 명을 내렸다고 한다. 이 당시에는 이미 그녀의 성덕과 영적 지혜가 널리 알려지고 있었다.
그녀는 글라라회의 개혁을 지시하는 환시에 응답하려고 자신의 은둔소를 떠나서, 앙리 드 바움 형제의 권고에 따라 교황청 책임자인 베드로 드 루나를 면담하기 위하여 1406년에 니스로 갔다. 드 루나 역시 깊은 감명을 받고, 그녀가 글라라회의 입회를 허락하고, 기존 수도원의 개혁과 새로운 수도원 설립을 위임하였다. 처음에 그녀는 피카르디와 사보이의 수녀들로부터 심한 반대를 받았으나, 1410년 부터 앙리드 바움의 지지를 얻어서 개혁 사업은 점차 성공하기 시작하였다. 그녀는 프랑스와 플랑데르 지역 내에 엄격한 규칙을 지키는 수도원을 17곳이나 세웠고, 러 퓌이-앙-블레의 한곳을 포함하여 기존의 다른 수도원을 개혁하였다.
콜레타는 무슨 일을 수행하도록 훈련받거나 준비한 일은 없었지만, 믿음의 힘과 성덕 그리고 아무도 거스르지 못하는 결정에 따라 일을 올바르게 성취하였던 것이다. 그녀는 다시 자주 탈혼에 빠졌고, 고난에 대한 환시를 보았으며, 겐트 수도원에서 자신이 죽으리라는 예언을 하였다. 콜레타의 개혁 글라라회는 프랑스뿐만 아니라 오늘날에는 세계 도처에 산재해 있다.그녀는 1807년에 시성되었다.
(성바오로수도회홈에서)
노인이 될 때까지 자녀를 얻지 못한 부부가 열심히 하느님께 기도하여 자녀를 보게 된 이야기는 성서에도 몇 군데 기록되어 있지만, 성녀 콜레타의 양친도 그와 같이 오랜 소원이 마침내 이루어져 한 여아를 낳게 된 것은 어머니가 60세 때의 일이다. 그 콜레타라는 이름은 니콜레타 즉 작은 니콜레아의 약칭으로, 늘 성 니콜라오를 특별히 공경하던 양친이 그 성인을 본받으라는 뜻으로 일부러 아이에게 지어준 것이다.
*성 니콜라오 주교 축일:12월6일
그녀의 아버지는 목수로 1831년 1월 13일에 프랑스 피카르디의 코르비에서 태어났다. 콜레타는 기도의 덕분으로 얻은 아이였음인지 어려서부터 기도하기를 좋아했다.그리고 기도를 잘하는 영혼에게는 반드시 순명, 정결, 겸손, 애인덕 등 모든 것이 구비되는 법인데, 콜레타에게도 그와 같았다. 더욱이 그는 꽃과 같은 아름다운 자태를 갖고 있었다. 그러나 그것이 종종 죄의 근원이 된다는 것을 알고 있던 그녀는 근심하며 하느님께 보호를 구했던 바 얼마 안 되어 전연 딴 사람처럼 창백해진 얼굴 모양을 갖게 되었다. 그 후부터 콜레타는 다른 이들과 잘 친해질 수는 없는 인상을 남에게 주었던 것이다. 그녀는 아직 어릴 때인 17세 때에 양친을 잃고, 후견인(後見人)도 있었지만 자신의 유산을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고 고요한 은수 생활을 시작하다가 마침내 프란치스코 제 3회에 입회했다.
18세 되던 해, 어느 날 그녀가 기도에 열중하고 있으려니까 사람들이 죄를 짓는 것을 무척 슬퍼하시는 것만 같은 형상으로 예수님과 성 프란치스코가 나타나셨다. 그때 프란치스코 성인은 주님을 향하여 “콜레타에게 죄인을 위한 보속과 성녀 클라라 수도원의 개혁을 시키면 어떻겠습니까?”하고 말씀 드렸고 주님께서는 그를 쾌히 승낙하는 것이었다.
콜레타는 이를 자기 망상이 아닌가 하고 의심하여 더욱 열심히 기도와 고행에 힘썼다.그런데 또다시 클라라회를 개혁하라는 묵시를 받았다. 그래도 아직 주저하고 있으니까 이번에는 눈이 보이지 않고, 입도 벌릴 수 없는 상황에서 “만일 이 명령에 순종하지 않으면 결코 너의 영혼도 구원을 못 받으리라”는 묵시를 받았다. 여기에서 콜레타는 클라라회의 혁신이 하느님의 뜻이란 것을 깨달았다. 그러나 그녀는 자기에게 그런 대임을 완수할 힘이 있는가를 생각해 보고는 두려워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자신의 사업을 성취하시기 위해 때때로 연약한 인간을 선택하시어 친히 이를 인도하시는 때가 있다. 지금의 콜레타의 경우도 마찬가지였다. 하느님께서는 열심하고 경험이 풍부한 한 사제를 그녀에게 보내주셨다. 이에 콜레타는 자신의 은수처를 떠나 로마에 가서 교황을 알현하고 클라라회 규율을 성 프란치스코가 서술한대로 엄격하게 지킨다는 서원을 첨가하고 이것으로 그 회를 개혁한다는 허가를 간청했다. 교황은 세밀한 조사를 한 후 그녀의 원의를 듣고 그녀를 기존 수도원의 개혁과 새로운 수도원의 설립을 위임하면서 앞으로 설립하려고 하는 모든 수도원의 원장으로 임명했다. 교황의 축복을 받은 콜레타는 프랑스에 돌아와서 각지를 여행하며 여러 곳에 수도원을 세웠다. 오래지 않아 경건한 소녀들은 이 지극히 엄격한 수도원에 들어오지 위해서 사방에서 모여 오게 되었다.
콜레타의 생애에는 종종 기적이 일어났다. 그 중에서도 가장 기이한 일은 아무 재산도 없는 그녀가 다수의 수도원을 세우고 또한 그 회의 수녀가 된 다수의 소녀들이 모두 그녀의 정신에 살고, 엄격한 고행의 생활을 보내며, 그래도 어떻게든지 생계를 유지할 수 있었던 사실이다. 물론 그녀와 그녀의 사업을 반대한 사람도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이런 박해는 어떠한 좋은 사업에도 따라오는 것이다. 하느님께서는 이를 시련으로 허락하심으로써 오히려 그녀의 사업은 그로 말미암아 점점 더 견고해지고 점점 더 발전했다.
콜레타는 모든 덕에 있어서 수녀들의 거울이었다. 그녀는 원장이었지만 자신은 다른 자매들의 아래 사람으로 생각하고 가장 천한 일도 기꺼이 하며 다른 사람이 부탁한 일은 얼마든지 해 주었지만, 자기 일은 절대로 남에게 시키려 하지 않았다. 또한 겸손했던 그녀는 다른 사람에게 좋은 것은 양보하고 자신은 나쁜 것을 취하는 습관이 있었다.
그는 제일 작은 방에 살며 제일 천한 도구를 사용하고 제일 검소한 의복을 착용했다. 얼마나 오랫동안 한 가지 옷을 입었던지 떨어지면 깁고 떨어지면 깁고 해서 나중에는 처음 기지가 온전히 없어졌다는 일화도 있다. 또한 그녀가 병자를 위로한 점은 친어머니가 자기 자녀에게 바치는 사랑보다도 더 뛰어났다고 한다.
수도 생활을 시작한 지 40년째 콜레타의 최후의 날이 다가왔다. 그녀는 그 날을 미리부터 알고 있었으므로 바로 전에 겐트에 있는 자신이 세운 수도원에 가서 1447년 2월 원내의 수녀들을 전부 모아 놓고 최후의 훈계를 남기고 3월 6일을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성녀 콜레타가 건설한 수도원은 프랑스와 플랑데르 지역 내에 17곳이나 세웠고, 러 퓌이-앙-블레의 한 곳을 포함하여 기존의 다른 수도원을 개혁했다. 성녀 콜레타는 무슨 일을 수행하도록 훈련받거나 준비한 일은 없었지만, 믿음의 힘과 성덕 그리고 아무도 거스르지 못하는 결정에 따라 일을 올바르게 성취했던 것이다. 콜레타의 개혁 클라라회는 프랑스뿐만 아니라 오늘날에는 세계 도처에 산재해 있다. 그녀는 1807년에 시성되었다.
(대구대교구홈에서)
프랑스 북부 피카르디(Picardie)의 코르비(Corbie)에 사는 목수의 딸인 성녀 콜레타는 1381년 1월 13일에 태어나 니콜레트(Nicolette)라는 이름으로 세례를 받았으나, 흔히 콜레트(Colette)로 불렀다. 17세 때 천애의 고아가 된 그녀는 자신의 유산을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 준 뒤에 작은 형제회 3회원이 되었으며, 코르비에서 독수자로 생활하였다.
21세 때부터 성녀 콜레타는 코르비의 원장이 빌려 준 은둔소에서 홀로 살았는데, 그곳에서 아시시(Assisi)의 성 프란치스코(Franciscus, 10월 4일)의 환시를 보았다. 이때 성 프란치스코는 '가난한 부인회'(클라라 수녀회)가 엄격하던 그들의 원 회칙에 따라 살도록 인도하라는 명을 내렸다고 한다. 그 당시에는 이미 그녀의 성덕과 영적 지혜가 널리 알려지고 있었다. 그녀는 클라라 수녀회의 개혁을 지시하는 환시에 응답하려고 자신의 은둔소를 떠나, 영적 지도자인 앙리 드 바움(Henry de Baume) 신부의 권고에 따라 교황청 책임자인 베드로 드 루나(Petrus de Luna)를 면담하기 위하여 1406년에 니스(Nice)로 갔다. 베드로 드 루나 역시 깊은 감명을 받고, 그녀가 클라라 수녀회에 입회하는 것을 허락하고 기존 수도원의 개혁과 새로운 수도원 설립을 위임하였다.
처음에 그녀는 피카르디와 사부아(Savoie)의 수녀들로부터 심한 반대를 받았으나, 1410년부터 앙리 드 바움 신부의 지지를 얻어서 개혁 사업은 점차 성공하기 시작하였다. 그녀는 프랑스와 플랑드르(Flandre) 지역 내에 엄격한 규칙을 지키는 수도원을 17개나 세웠고, 르 퓌 앙 블레(Le Puy en Velay)의 한 곳을 포함하여 기존의 다른 수도원을 개혁하였다. 성녀 콜레타는 무슨 일을 수행하도록 훈련받거나 준비한 일은 없었지만, 믿음의 힘과 성덕 그리고 아무도 거스르지 못하는 결정에 따라 일을 올바르게 성취하였다. 그녀는 자주 탈혼에 빠졌고 고난에 대한 환시를 보았으며, 벨기에의 겐트(Gent) 수도원에서 자신이 죽으리라는 예언을 하였다. 성녀 콜레타의 개혁 클라라 수녀회는 프랑스뿐만 아니라 오늘날에는 세계 도처에 산재해 있다. 그녀는 1740년 1월 23일 시복되었고, 1807년 5월 24일 교황 비오 7세(Pius VII)에 의해 시성되었다.
(가톨릭홈에서)
[이달의 성인] 성녀 콜레트(1381-1447)
윤 클레멘트 신부
성 프란치스코 수도회의 제3회원이었고, 아울러 개혁 글라라 수도회를 이끈 그녀는 프랑스 북부 코르비에서 가난한 목수의 딸로 태어났다. 본래 그녀의 세례 때의 이름은 니콜레트(Nicolette)였는데, 콜레트로 불리었다고 한다. 17세 때에 그녀는 부모가 세상을 떠나고 고아가 되자, 자신의 유산을 가난한 이들에게 모두 나눈 다음, 자신은 프란치스코 제3회원이 되어 고르비의 한 은둔소(隱遁所)에서 독수자(獨修者)로 살기 시작한다.
그녀의 명성은 곧 널리 퍼지게 되는데, 그녀는 거룩함과 영적인 지혜를 가진 사람으로 알려진다. 그녀가 어느 날 환시를 받고 1406년에 자신의 은둔소를 떠나게 되는데, 환시 중에 성 프란치스코가 그녀에게 말했다고 한다. “가난한 글라라 수도회가 본래의 가난 정신에 따라 살도록 엄격하게 개혁하고 인도해야 한다.”
그녀는 환시 중에 들은 성 프란치스코의 말씀을 따르려고 자신의 은둔소를 떠나게 되는데, 이 때 이미 그녀는 영적인 지혜와 성덕으로 상당히 이름이 알려진 상태였다. 그는 자신의 지도신부였던 헨리 드 바움(Henry de Baume)의 권고에 따라, 당 시 교황청 책임자인 피터 드 루나(Peter de Luna) 신부를 면담한다. 이 때의 면담에서 피터 드 루나 신부는 그녀에게 깊은 감동을 받는데, 그녀가 글라라 수도회로 들어가 글라라 수도복을 입도록 한다. 또한 피터 드 루나 신부는 그녀로 하여금 글라라 수녀회를 본래의 엄격한 수도회로 개혁하고, 새로운 수도원도 설립할 수 있도록 위임한다.
피터 드 루나 신부는 당시의 교황 베네딕토 8세로부터 수도원들을 개혁할 수 있는 권한을 위임받은 사람이었다. 하지만, 그녀의 수도원 개혁은 많은 반대와 어려움을 만나는데, 특히 피카르디와 사부아(Savoie)에서의 수도자들의 반대는 더욱 거세었다. 그러한 반대와 어려움들에도 불구하고, 그녀의 노력과 꾸준함은 열매를 맺어가기 시작했다. 특별히 그녀는 자신의 고해사제이자 영적 지도신부였던 앙리 드 바움 신부의 지지와 도움으로 수도원 개혁과 설립은 성공하기에 이른다.
마침내 그녀는 프랑스와 플랑드르(Flandre) 지역에 열일곱 개의 엄격한 규칙을 지키는 수도원을 설립하고, 르 퓌 앙 블레(Le Puy en Velay)에 한 곳과 다른 곳들의 여러 수도원을 개혁하기에 이른다. 그녀는 기도 중에 자주 탈혼(Ecstasies)에 들어갔고 고난(Passion)의 환시를 보았으며, 벨기에의 겐트(Gent) 수도원에서의 자신의 죽음도 예언했다.
그녀는 미리부터 수도원 개혁과 설립 등에 대하여 준비하거나 양성 등을 받았던 것은 아니었다. 다만 그녀의 신실한 믿음, 영적인 힘과 지혜, 놀랄만한 도덕적 힘, 성 덕 등이 그녀의 깊은 기도를 통해 흘러나왔다고 말할 수 있겠다. 특별히 그녀는 자신에게 엄격하고 고행을 실천하였는데, 하느님은 그러한 그녀에게 기도를 통한 환시, 비전, 기적 등의 선물을 주셨다고 본다.
그녀가 개혁한 엄격하고 가난한 글라라 수도회는 맨발로 다니고 단식과 금육 등을 철저히 실천하는데, 오늘날에도 프랑스, 벨기에, 독일, 스페인, 영국, 미국 등 세계에 퍼져 있다. 그녀는 1807년 교황 비오 7세에 의해 시성되었으며 축일은 3월 6일이다.
[2012년 3월 4일 사순 제2주일 전주주보 숲정이]
[금주의 성인] 성녀 콜레트(St. Colette, 3월 6일)
수도회 개혁 · 쇄신 앞장서, 세속화된 수도회 규칙 개정 등 운동 펼쳐
1381~1447. 프랑스 출생 및 벨기에 선종. 가난한 클라라회 수녀
성녀 부모는 결혼한 뒤 아이가 생기지 않자 아이들의 수호성인 니콜라스 성인께 아이를 갖게 해달라고 기도드렸고, 그렇게 얻은 딸이 성녀입니다. 부모는 니콜라스 성인 이름을 따서 딸에게 니콜레트라는 이름을 지어줬는데 주로 애칭인 콜레트로 불렀습니다.
성 베네딕도회 수도원 근처에서 살던 성녀는 수도자들을 보고 자라면서 자연스럽게 그들의 단순하고 거룩한 삶을 동경하게 됐습니다.
성녀는 17살 때 부모님이 모두 돌아가시자 부모님께서 남긴 재산을 모두 가난한 이들에게 나눠준 뒤, 수도원 성당 옆에 집을 얻어 그곳에서 수도자와 다름없는 생활을 했습니다. 성녀는 특히 프란치스코 성인을 공경해, 재속 프란치스코회 회원으로 활동했습니다.
기도와 묵상뿐인 생활로 성녀의 영성은 점점 깊어졌습니다. 성녀는 성당을 지키며 성당에 오는 이들을 늘 반갑게 맞이했는데, 사람들은 가끔씩 성녀에게 고민을 털어놓곤 했습니다. 그 때마다 성녀는 깊은 영성에서 우러나온 지혜로 사람들 고민에 진심어린 조언을 해줬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성녀를 통해 위로와 평화를 얻었습니다.
성녀는 프란치스코 성인 영성을 사는 가난한 클라라회에 입회했습니다. 성녀는 매일 기쁘게 생활하고 모든 것을 감사로 받아들였습니다. 성녀는 어느 날 프란치스코 성인 환시를 보게 되는데, 프란치스코 성인은 성녀에게 수도회가 초심으로 돌아가 좀 더 엄격한 수도생활을 하도록 개혁운동을 일으킬 것을 당부합니다.
환시 후 성녀는 일주일 간 앞을 보지 못하고 말도 할 수 없었습니다. 성녀는 프란치스코 성인 말씀을 소명으로 받아들여, 수도회 개혁운동에 앞장섭니다. 세속화된 수도회 규칙을 엄격히 개정하고, 새 규칙을 따르는 수도원을 설립했습니다.
처음엔 성녀의 개혁과 쇄신운동에 반발과 원성이 빗발쳤습니다. 그럴수록 성녀는 겸손하면서도 확고한 의지로 이 운동을 진행해 결국 결실을 거뒀습니다. 다른 수도원들도 성녀의 운동에 동참하며 쇄신과 개혁의 길을 걸었습니다. 성녀는 1807년 교황 비오 7세에 의해 시성됐습니다.
[평화신문, 2012년 3월 4일, 박수정 기자]
성 다미아노 십자가 상의 예수님
성녀 클라라는 프라하의 성녀 아녜스에게 보낸 편지들에서
그리스도를 온 마음으로 바라볼 것(관상)을 간곡히 부탁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할 때 우리는
그리스도인으로서, 프란치스칸으로서의 우리의 정체성을 온전하게 살아갈 수 있는 것입니다.
성 다미아노 십자가의 예수님은 이미 모든 것을 통합(회복)하신 부활의 예수님이십니다.
성 다미아노 십자가의 예수님께로부터 우리 사부 성 프란치스코는 “회복”의 소명을 들었습니다.
이 소명은 오늘을 사는 우리 프란치스칸들의 소명이기도 합니다.
(작은형제회홈에서www.ofm.or.kr)
성 프란치스코를 따르는 성녀 클라라 -그리스도를 관상하는 동정녀
성 프란치스코 축일:10월4일.게시판1403번.오상축일:9월17일
성녀 클라라 동정 축일:8월11일
제주 성 글라라 수도회
▒우리 수도회의 영성
성 클라라 수도회는 아시시 성 프란치스코의 정신을 따라 성교회 안에서 거룩한 복음을 그대로 본받음을 생활양식으로 하고,
산 위에서 기도하신 그리스도를 모방하는 기도생활로써 하느님의 영원한 계획인 그리스도 신비체의 완성을 위해 봉헌된 관상 수도회이다.
성 클라라 수도회, 또는 가난한 자매 수도회라고 불리며, 프란치스코회의 제2회를 이루고 있다.
본 수도회의 생활양식이란 교회생활, 형제애, 가난, 관상이다.
우리 수도회는 하느님의 부르심을 받고 성모 마리아의 발자취를 따라 성령의 정배가 되어
오직 하느님만을 소유하는 것으로 만족하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가난과 겸손, 삼위일체의 친교 안에 가족적 일치를 이루며,
“그리스도와 함께 하느님 안에 숨은 삶을 살아가는 봉쇄 안에서 말씀을 마음에 새기고 하느님께 그 마음을 두는 관상생활을 한다.
그러므로 “성자를 당신 마음에 꼭 들어하시는” 성부와 함께 산 위에서 관상 중에 계시는 그리스도(마태 17,5)를 본받아 증거하며 살아가는 관상 수도회이다.
침묵 안에 끊임없이 회개의 정신을 새롭게 하여 그리스도의 얼굴을 끊임없이 바라봄으로써
모든 사람과 사물과 모든 사건 속에 “거룩하시고 의로우신 아버지의 사랑과 자비를 발견하게 되어 찬미와 감사를 드린다.
이 찬미와 감사는 성체신비의 거행에서 절정을 이루며, 교회의 심장 역할을 다한다. 이로써 교회는 이 생명의 샘에서 한없이 새로워진다.
이렇게 자매들은 자신의 삶 전체로 온 누리의 찬미를 수행하며
다가오는 하느님 나라의 축제에 들어감으로써 하느님을 위해서 함께 일하는 일꾼이요, 그 영광스러운 몸의 연약한 지체들을 받치는 받침대가 된다.
▒ 복음적 교회생활
성녀 클라라는 그리스도의 신비체인 교회에 절대 순명하며 교회에 종속됨을 근본가치와 이 성소의 주춧돌로 삼았다.
교회의 머리이신 그리스도의 심장 안에 살면서 그리스도의 생명의 맥박이며 교회를 존재케 하고 유지시켜주는 전례, 특히 성체성사에 이 공동체생활의 중심을 두고 있다.
교회의 딸로서 자녀를 양육하는 어머니와 같이 성체성사를 통해 한 빵을 나누어 먹음으로써 그리스도와 결합되고
그리스도의 생명과 사랑으로 그의 신비체인 교회의 전 지체와 일치함으로써 교회를 지탱시켜 나아가고,
특히 나약하고, 버림받고, 고통받는 지체들의 보조자로서 영적 봉사를 하는 것이 본회의 주요 소명이다.
이에 교회에 충성함으로써 교회의 어느 지체에게도 해를 끼치지 않는 교회정신과 완전히 일치하여 복음을 생활함을 기본원칙으로 한다.
▒ 복음적 형제애
성녀 클라라는 공동체 안에서 그리스도의 사랑을 거울삼아 상호 형제적 일치를 깊이 보존하며 복음 이상의 완성을 향해 나아감을 핵심으로 삼았다.
또한 이 심오한 자매적 일치를 이루는 사랑의 생활을 통해 그리스도와 일치되고 전 공동체가 하나되어 전 지체,
교회에 형제애 일치의 표징이 되고 활력을 주며, 이로써 누리는 기쁨은 복음적 생활의 결실이며 참의미를 지닌다.
이와 같이 자매애 안에 복음 정신은 구체화되고, 그리스도의 지체인 교회는 그리스도 사랑 안에 모두 하나되는 구원의 신비를 실현하게 된다.
▒ 복음적 가난
성녀 클라라에게 복음적 생활은 성령 안에서 참된 자유를 누리는 절대적 가난의 생활이다.
가난은 그 자체에 목적을 두는 것이 아니라 사랑의 법에 의한 복음적 가난이다.
즉 구유에서 가난하게 나셨고, 십자가 위에서 맨 몸으로 달리신 가난한 주님께 대한 사랑 때문에
개인적으로만 아니라 공동체적으로 가난하신 그리스도의 발자취를 생활로써 따름이 본 회의 영성에 근본을 이룬다.
순례자로서 단순과 겸손으로 온전히 주님께 의존하며 기쁜 마음으로
만물의 주인이신 하느님께로부터 필요한 모든 것을 받아 살아가는 가난한 자, 작은 자의 생활이다.
즉 모든 것은 은총이며 하느님의 선물임을 의식하는 성 프란치스코의 청빈(가난. 겸손)은 그리스도를 본받아 자신을 철저히 비우고
성령의 자유 안에서 하느님의 자녀된 참된 자유인으로서 이 세상에 집착하지 않고 장차 도래할 하느님 나라에 마음을 두고
모든 것의 원천이신 하느님께 절대적 신뢰 안에서 늘 감사하는 참된 의미의 복음적 가난이다.
▒ 복음적 관상생활
성녀 클라라의 복음적 생활양식은 관상이다.
봉쇄된 수도원 안에서 깨끗한 마음과 주님의 정신으로
철저하게 성령의 지시를 따르는 고요와 침묵의 기도 생활에 있어 산 위에서 기도하신 그리스도는 이 고요와 관상적 고독의 모범이다.
관상 중에 끊임없이 그리스도를 뵈옵고 추구하는, 특히 그리스도의 탄생, 수난과 죽음, 성체성사의 신비를 묵상하며
이 안에 나타난 하느님의 무한한 사랑과 우리의 아버지되심을 모든 것 위에 감사하며 기쁨과 평화 중에 끊임없는 찬미의 제물을 바치는 것이 본 회의 사도직이며
이는 하느님의 영원한 만민 구원계획과 영광을 위한 것이다. 이러한 관상생활은 교회가 그 현존을 드러내기 위한 중요한 본질적 표징이 된다.
▒ 활동분야
우리의 사도직은 관상생활이며, 사도적 활동은 없다. 자급자족을 위한 한 수단으로 봉쇄 구역 안에서 소규모의 밭농사를 하고 있다.
이것은 우리의 생활 양식을 해치지 않는 범위 내에서 이루어지는 나눔의 실천이며,
인근 주민과 같은 형태의 육체적 노동을 성 프란치스코의 가난의 정신에 따라 택한 서민적 생활 수단이다.
주님께서 주시는 은총 안에서 이 육체 노동은 낮은 자들의 수고를 함께 하는 것이며 고통 당하고 굶주리며 억압 당하는 그리스도의 지체들과 함께 실생활로써
이 낮은 자되는 어리석음을 받아들여 창설자의 정신으로 복음적 가난과 단순의 길을 걷는 것이다.
이러한 복음지향적 삶은 육체적 노동에서뿐 아니라 각자의 소임과 고유한 분야 안에서도 한 맥이 되어 기도와 침묵으로 살아 움직인다.
(제주글라라수도회www.jejuclare.com)
축일 2월7일
성 요셉의 성 에지디오(질스) 마리아, Alcantarines(맨발의 작은형제들)
Sant' Egidio Maria di San Giuseppe (Francesco Pontillo) Professo Frate Minore
Taranto, 16 novembre 1729 - Napoli, 7 febbraio 1812
Saint Giles Mary-of-Saint-Joseph
Also known as : Aegidius Mary of Saint Joseph Pontillo, Egidio Maria de Saint Giuseppe, Francis Pontillo, Saint of the Little Way
Born : 16 November 1729 at Taranto, Apulia, Italy as Francis Pontillo
Died : 7 February 1812 at Naples, Italy of natural causes while at prayer
huge crowds turned out for his funeral
Beatified : 1888 by Pope Leo XIII
Canonized : 2 June 1996 by Pope John Paul II
이탈리아 남동부 풀리아(Puglia)의 타란토(Taranto) 출신인 성 요셉(Josephus)의 성 에지디우스 마리아(Aegidius Maria, 또는 에지디오 마리아)는 끈 장사로 생계를 이어가는 곤란한 처지에 있었다.
그러나 25세 때에 그는 성 베드로 알칸타라(Petrus Alcantara)의 작은 형제회에 들어가 수도자가 되었다. 거기서 그는 문지기로 일생을 보내면서도 병자들에게 깊은 사랑을 전하며 가난한 이들을 돕는 일에서 큰 성덕을 쌓았다. 그는 나폴리(Napoli) 시내를 돌며 탁발을 하였으며, 그의 손에는 항상 애긍으로 얻은 음식들이 들려 있었다. 그러면서도 그는 성 요셉에 대한 신심이 탁월하여 요셉 신심을 크게 전파하였다.
그는 사람의 눈에는 보잘 것 없는 사람으로 보였으나 하느님의 눈에는 위대한 사람으로 인정을 받았다. 그는 질(Giles)로도 불린다. 그는 1888년 교황 레오 12세(Leo XIII)에 의해 복자품에 올랐고, 1996년 6월 2일 성 베드로 광장에서 교황 요한 바오로 2세(Joannes Paulus II)에 의해 시성되었다.
(가톨릭홈에서)
*복되신 동정 마리아의 배필 성 요셉 대축일:3월19일
*노동자 성 요셉 축일:5월1일
*성 베드로 알칸타라 축일:10월19일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와 함께 읽는 성인전]
성 요셉의 에지디오 마리아 - 프란치스코 성인처럼 가난한 사람
번역 송영웅(바오로) · 봉명학원 재단이사
프란치스코 수도회의 평수사로 잘 알려져 있는 에지디오(Aegidius Mary of St. Joseph Francis Anthony Postillo, 1729-1812)는 이탈리아 아풀리아(Apulia) 지역의 타란토(Taranto)에서 태어났으며 프란치스코라는 이름으로 세례를 받았다. 그의 가족과 이웃들은 소박하면서도 신앙심이 깊은 그리스도교 신자였으며, 그는 고향에서 밧줄을 만드는 일을 하며 살았다. 1754년에 그는 나폴리(Napoli)에 있는 알칸타라(Alcantara)의 성 베드로 맨발의 작은 수도회(프란치스코회)에 수도자로 지원하였다. 그는 정식 학교 교육을 받지 못하였기 때문에 사제가 되기 위한 공부를 하기 어려워 수도회는 그를 평수사로 받아들이고 그에게 ‘에지디오’라는 새 이름을 주었다.
프란치스코 수도회 수사로 서원한 에지디오는 수도회에서 운영하는 그 지방의 신학교에서 일하는 짐꾼과 문지기 소임을 받았다. 에지디오는 자기가 맡은 소임을 충실히 수행하였다. 그러나 그의 내면에서 끓어오르는 연민의 정과 자비심은 그를 나폴리 시 변두리 지역과 나폴리 시 외곽에서 가난하고 비참하게 사는 사람들을 찾아가게 하였다. 신학교에 있는 프란치스코 수도회 수사들은 에지디오의 경건한 신앙심과 성실한 봉사활동을 알고 있었지만 그가 얼마나 광범위한 지역을 찾아다니면서 봉사활동을 하고 있는지 그리고 그가 살아가는 하루하루의 삶이 얼마나 값지고 고귀한 것인지에 대해서는 잘 몰랐다.
에지디오 수사는 환자들을 돌보고 간호하는 데 탁월한 솜씨가 있어서 많은 사람들이 그가 있는 수도원으로 찾아왔고 그는 그런 사람들을 따뜻하게 맞아주고 돌보아 주었다. 그는 다친 사람들과 병자들로 인해 매일 매일을 분주하게 보냈고 그런 중에라도 틈만 나면, 나폴리 시 경계선 주변의 아주 가난하고 고통 받는 사람들을 찾아가 그들을 위로하면서 조금이라도 도움을 주려고 노력하였다. 그는 자기 수도회가 소중히 간직하고 있는 성인의 정신적인 유산, 곧 프란치스코 성인이 나병환자를 만났을 때 행했던 그 사랑의 정신을 실천하기 위하여 자신의 도움을 청하는 나환자들을 찾아가 그들을 씻어 주고 정성껏 돌보아 주었다. 그는 어떤 사람이 도움을 청하여도 이를 거절한 적이 없었다.
에지디오는 80세가 넘도록 깊은 연민의 정에서 우러나오는 봉사와 어려운 사람들을 돌보는 일에 여념이 없었다. 1812년 2월 7일 나폴리에서 에지디오가 기도하는 중에 숨을 거두었을 때, 수많은 사람이 그의 죽음을 애도하였다. 에지디오의 장례식에는 어마어마한 군중이 몰려와 그의 마지막 길을 눈물로 배웅하였다. 에지디오가 죽은 다음 즉시 그의 행적과 그가 추구한 정신은 모든 사람들에게 공개되었다. 1888년 교황 레오 13세는 에지디오를 복자품에 올렸고 1996년 6월 2일,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는 그를 성인으로 시성하였다.
시성식에서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는 “에지디오는 프란치스코 수도회의 대표자로 대우받을 만한 영예를 지닌 분이며, 그리스도를 따르는 겸손한 사람으로 그의 뛰어난 사랑과 성덕은 나폴리와 현대 교회에 영원히 기억될 모델입니다. 에지디오 수사는 진정한 의미에서 프란치스코 성인처럼 가난한 사람이었습니다”라고 말하였다.
성 요셉의 에지디오 마리아의 축일은 2월 7일이다.
[교회와역사, 2012년 2월호]
프란치스칸 묵상 방법
기경호(프란치스꼬) ofm
개요
이 묵상 방법은 작은 형제회의 알깐따라의 성 베드로가 창안한 묵상법이다. 이 묵상의 특징은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한다는 것이다. 묵상의 주제는 항상 하느님과 연관되어야 한다. 이 묵상에서 자기 자신이나 이웃의 관계에만 국한된다면 묵상이 아니라 양심성찰에 그치고 말 것이다.
이 묵상은 보통 15-30분에 걸쳐 하게 되며, 6단계로 구성되어 있다. 제 1단계 준비, 제 2단계 독서, 제 3단계 고찰, 제 4단계 감사, 제 5단계 봉헌 및 결심, 제 6단계 청원. 이는 준비 단계, 묵상 부분, 감사 및 결심, 청원 부분으로 단순화시켜 볼 수 있다.
제 1 단계
묵상기도 바로 전의 준비
① 간접적인 준비(먼 준비)는 평소의 내적인 상태로서 평소에 하느님을 뵙고자 하는 마음 자세를 말한다. 이를 위하여 오관을 조절하고 절제함으로써 고요와 침묵의 마음 상태를 지니도록 한다.
② 직접적인 준비(가까운 준비)는 묵상의 주제를 정하고 독서를 선정하는 것이다.
③ 기도 바로 전의 준비: 다음 사항에 마음을 집중시키도록 한다.
- 하느님의 현존을 생각한다. 여기서 짧은 기도를 할 수도 있다.
- 분심을 버리도록 한다. 지나친 지성적인 걱정에서 벗어나 하느님과의 관계에 집중한다.
- 마음의 정리. 감정적인 마음의 움직임을 가라앉히고 마음의 평화를 되찾도록 한다.
제 2 단계
영적 독서 - 적어도 전날 밤에 준비한 읽을 거리(묵상 재료)를 천천히 읽는다. 초기의 묵상에서는 영적독서를 중심으로 하는 것이 좋다. 즉 독서 - 고찰 - 감사 - 봉헌 및 결심 - 독서 -고찰 - 감사 ...
여기서는 어떤 독서를 할 것인가 하는 것도 대단히 중요하다.
제 3 단계
고찰 - 여기서 고찰이란 협의로는 반성하고 생각하는 부분이다. 이 단계는 본질적인 묵상 단계로서 시간은 너무 길게 잡지 않도록 하여야 한다.
고찰을 하는 목적은 어떤 진리에 대해서 실천을 위한 지식을 얻기 위함이다. 상상력을 통하여 예수님의 수난의 현장에 뛰어들고, 기억력을 통하여 우리가 가지고 있는 여러 가지 기억을 되살리도록 한다(상상력과 기억력은 서로 연관되어 있다). 그리고 지력을 통하여 위의 두 가지를 일치시키도록 한다(분별 능력).
고찰의 주제는 그리스도의 강생, 수난, 부활, 교회 안에서의 신비, 인간의 가치와 지상적 산물, 죄에 대한 것, 나아가 프란치스칸으로서 그리스도와 관련된 모든 것들이다.
* 묵상시 주의점 *
① 이론적인 주제를 피해야 한다(주제는 항상 우리의 신앙과 연결되어야 한다.)
② 자기 자신의 말로 하도록 한다. 즉 자신에 알맞는 방법을 찾도록 한다.
제 4 단계
하느님께 감사와 찬미를 드리는 단계로서 마지막 단계의 구체적인 청원과 연관된다.
제 5 단계
봉헌 및 결심 - 묵상기도를 통하여 주신 선물과 자신의 삶을 하느님께 봉헌해 드리고, 구체적인 결심을 한다. 이는 다음 단계의 청원과 연관되어 있다.
제 6 단계
청원 - 이는 봉헌 및 결심과 관련된 것으로서, 구체적인 청원과 보편적인 기도를 바친다.
(재속프란치스코 한국국가형제회홈에서)
* 참고
3) 옵세르반트의 확장
요한 22세의 교황기가 끝나자 공동체 형제들의 대수도원주의(Con- ventualismo) 를 반대하여 회칙의 ‘총체적인 준수’를 열망하는 여러 그룹들이 이탈리아와 스페인과 프랑스에 나타났다. 영적 형제들과 그들의 ‘개혁’ 의지가 암암리에 각 지역공동체를 형성하고 있었던 것이다. 1334년 발레의 요한은 교황의 회칙을 준수하며 살 수 있는 허락을 총봉사자로부터 얻어냈다. 이것은 초기 단순성으로 돌아가려는 운동의 시발이었다. 1350년 스폴레토의 젠틸레는 회칙 준수 보장과 수련자들을 받을 수 있는 권한을 클레멘스 6세로부터 얻었다. 그러나 1354년 총회는 개혁운동과 반대노선을 지향했다. 젠틸레는 이단자로 고발되었고 쇄신의 첫 시도는 무산되었다. 젠틸레 그룹의 바올루쵸가 은둔소 생활을 하자 움브리아 지방의 버려진 은둔소에 형제들이 살기 시작했다. 1373년에 이 개혁운동은 12개의 집을 갖게 되었다. 이 운동은 1390년경 이탈리아 전역에 확산되어 있었다. 개혁운동의 초기형제들은 교육을 받지 못한 평형제들이었다. 그러나 우수한 개혁자들이 직접 회칙 준수파에 들어왔다.
이탈리아에서의 개혁 그룹인 리포르마티(Riformati)는 1402년에 시에나의 성 베르나르디노, 1414년에는 카페스트라노의 성 요한, 1415년에는 살테아노의 성 알베르토, 1416년에는 마르카 관구의 성 야고보가 입회를 했다. 이들은 모두 옵세르반트의 방향을 결정짓는 인물들이었다.
스페인에서의 옵세르반트(Alcantarini, Discalceati, Guadalupesi)는 통합성은 부족했지만, 아비뇽의 교황 보호 아래 이탈리아보다 더 열정적으로 일어났다. 이 개혁 그룹들은 제각기 독자적으로 움직였다. 이들은 은둔소 칩거의 형태로 살았다. 1415년에는 12개나 되는 은둔소가 설립되었다. 알칼라의 성 디에고(+1463)가 1441년 자신을 하느님께 봉헌한 것도 이 은둔소였다.
프랑스에서의 옵세르반트(Recollect) 개혁 운동은 은수적 생활이 아닌 학문과 사도적 활동에 큰 비중을 두었다. 또 교황은 회칙의 영적 준수를 위해 집짓는 일을 허락하였다. 15세기 초에 프랑스 관구의 여러 수도원은 개혁을 받아들였다.
그 후에 개혁 공동체들은 자신들의 관구봉사자들로부터 큰 고통을 당했다. 이들은 1415년에 자신들의 사정을 콘스탄츠공의회에 상정하여 교황들의 초기 해석을 가지고 회칙을 준수할 권리를 주장했다. 그리고 모든 관구의 옵세르반트 수도원들에게 개혁을 받아들이고자 하는 모든 수도자들을 받을 수 있는 자유와 독자적인 장상을 달라고 요청했다.
공의회는 1415년 9월 23일 칙서 <Supplicationibus personarum> 에서 옵세르반트에게 그들이 요청한 모든 것을 허락해 주었다. 더구나 관구 내 속관구들은 해당 관구봉사자들의 재치권 아래에 있지 않으며 나름의 총장 대리를 가지고 총봉사자는 시찰할 권한만 있다고 선언했다. 어떤 수도자라도 본인이 원하면 회칙 준수파 형제들에게 넘어갈 수 있게 되었다.
옵세르반트 조직 체계를 확장시켜나간 그룹들 외에도 많은 다른 개혁 그룹들이 거의 동시다발적으로 생겨났는데, 그들은 자치를 누리면서도 법적으로는 형제회에 속한 채 남아 있었다. 프랑스 북부와 독일의 콜레타니(Coletani), 이탈리아의 아매디테(Amaeditae), 클라레니(Clareni) 등이 있다.
(김창재다미아노ofm,이현주ofs 엮음,재속프란치스코회역사,한국재속프란치스코회출판부,2011,123-125쪽)
시에나의 성 베르나르디노(+1444, 입회 1402) 축일 5월20일
카페스트라노의 성 요한(+1456, 입회1414) 축일 10월23일
살테아노의 복자 알베르토(+1450, 입회1415) 축일 8월15일
마르카 관구의 성 야고보(+1476, 입회1416) 축일 11월28일
알칼라의 성 디에고(+1463) 축일11월13일(11월12일)
축일:2월7일
사라센의 사도 성 모세
Saint Moses
Also known as
Apostle of the Saracens
San Mosè I Eremita e vescovo dei Saraceni
Born : 3rd century Arabia
Died : c.372
Canonized : Pre-Congregation
''사라센의 사도''인 성 모세(Moyses)는 아랍 사람으로 오랫동안 시리아와 이집트 사이의 사막에서 은수자로서 살았다. 이 지방은 주로 사라센 유목민들이 거주하는 땅으로 별을 섬기는 자들이 주축을 이루었다. 알렉산드리아(Alexandria)의 주교 루키우스(Lucius)는 그를 주교로 축성하여 선교 사업을 주도하기를 희망하였으나 그가 아리우스파(Arianism)에 속한 주교였기 때문에 성 모세는 이를 거절하였다. 그 후 성 모세는 정통교리를 따르는 주교가 되었는데, 그의 주요 업적은 로마인과 사라센인 간의 평화를 유지시킨 것이다. 사라센이란 말은 그리스와 로마인들이 시로-아라비아(Syro-Arabia) 사막의 유목민에게 붙인 이름이다
(가톨릭홈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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