축일;2월 8일
성 예로니모 에밀리아노
ST. JEROME EMILIANI
San Girolamo Emiliani (Miani)
St. Hieronymus Aemilianus, C
1481 at Venice, Italy -
8 February 1537 in Italy of a disease caught when tending the sick
Beatified :29 September 1747 by Pope Benedict XIV
Canonized :16 July 1767
조심성도 없고 신앙심도 없던 예로니모는 베니스 공화국의 군인으로서
도시의 전초지에서 벌어진 작은 전투에서 포로가 되어 지하 감옥에 갇혔다.
감옥에서 그는 생각하는 시간을 많이 가졌고 점차로 기도하는 것도 배웠다.
그 후 감옥에서 탈출하여 베니스로 돌아와서는 자기 조카들의 교육을 맡았고
자신도 사제가 되기 위한 공부를 시작하였다.
사제 서품을 받고 난 후 몇 년 뒤에 상황은 또다시 예로니모에게 새로운 결정을 하게 했고
새로운 생활 양식을 받아들이게 했다.
전염병과 기근이 북부 이탈리아를 휩쓸자 예로니모는
자기의 돈을 써가면서 병자들을 돌보고 굶주린 사람들을 먹여 살리기 시작했다.
병든 사람과 가난한 사람들에 대한 그의 봉사는 그로 하여금 오직 다른 사람들,
특히 버림받은 어린이들에게 자기 자신과 재산을 온전히 바치기로 결심하게 했다.
그는 세 개의 고아원과 한개의 병원 그리고 회개한 창녀들을 위한 피난처를 하나 마련했다.
1532년경 예로니모와 두 명의 다른 사제는 고아를 돌보고 청소년 교육을 담당하게 될 수도회를 설립했다.
예로니모는 병자들을 돌보다가 전염병으로 1537년에 세상을 떠났고 1767년에 시성되었다.
1928년 교황 비오 11세는 그를 고아들과 버림받은 어린이들의 수호자로 공포했다.
우리의 생애는 흔히 ’자기 중심주의’의 속박에서 벗어나기 위하여
일종의 ’구속’을 스스로 당하는 경우가 가끔 있다.
우리가 빠져들어 가고 싶지 않은 어떤 상황에 사로잡혀 있을 때
우리는 우리를 해방시키는 그 어떤 분의 힘을 알게 된다.
그렇게 되고 난 뒤에야 비로소 우리는 우리 주위에 있는 모든’고아들’이나
’구속된 사람들’에게 또 다른 그 어떤 존재가 될수 있는 것이다.
’그 거룩한 처소에 계시는 하느님이 고아들의 아버지, 과부들의 보호자시로다.
하느님은 의로운 이에게 집을 마련하시고,사로집힌 몸들을 행복에로 이끄시나니
반역의 무리들만이 메마른땅에 버려지도다’(시편 67,6-7)
우리는 자기 가정과 공동체에서 버림받는 사람들의 수가 점점 더 증가하고 있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된다.
정의가 참으로 실현되려면 우리가 인간 활동의 모든 분야에서,
특히 세계적인 차원에서 새로운 임무와 새로운 역할을 담당할 준비를 해야 한다.
우리의 활동은 무엇보다도 먼저 불행한 사람들과 국가에 관심을 가지는 것이다.
바로 그들이 갖가지 형태의 억압을 당하고 또 오늘날 우리 사회의 현실적인 특징이
아무런 말을 못하고 침묵을 지키기 때문에
불의의 희생자가 생기게 되는것이다.’(’세상에서의 정의’1971년 세계 주교 대의원회의)
- 성바오로수도회홈에서
OUR LADY OF GOOD REMEDY
1486년 이탈리아의 베네치아에서 태어났다. 처음에는 군인이었으나
훗날 가난한 이들을 돕는 일에 생애를 바치고자 군인생활을 떠나
가난한 이들에게 자신의 모든 재산을 나누어 주었다.
고아들과 가난한 이들을 도우려는 목적으로 소마스카의 성직 수도회를 창립했다.
1537년 베르가모 근처의 소마스카에서 세상을 떠났다.
성 예로니모 에밀리아노가 동료 수도자에게 보낸 편지에서
(Venetiis, die 21 junii 1535)
우리는 주님만을 신뢰해야 합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사랑하는 형제들과 "가난한 이들의 시종회" 아들들에게
여러분의 부족한 아버지인 나는 인사를 보냅니다.
내가 여러분과 함께 있을 때 말과 행동으로 보여 준 바와 같이 여러분이
그리스도께 대한 사랑 안에 항구하고 그분의 법을 충실히 지키기를 권고합니다.
그러면 주께서는 나를 통하여 여러분들 안에서 영광을 받으실 것입니다.
우리의 목적은 만선의 근원이신 하느님이십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바치는 기도에 나오는 것과 같이 우리는 그분만을 신뢰해야 하며
다른 이를 신뢰해서는 안됩니다.
우리의 자비하신 주님은 여러분의 신앙을 향상시키시고
(복음 사가가 말하듯 신앙이 없는 곳에서는 그리스도께서도 많은 기적을 행하실 수 없었습니다)
또 여러분의 기도를 들어주고자 하시어, 여러분으로 하여금
궁핍과 고통,번민과 낙담 그리고 온갖 모멸을 겪게 하시며,
또 여러분에게서 지극히 사랑하는 이 부족한 아버지의 영은 아니더라도
나의 육신적인 현존을 빼앗아 가기를 원하셨습니다.
하느님께서 여러분을 왜 그렇게 대하시는지는 하느님만이 알고 계십니다.
그러나 여기에서 우리는 세 가지 이유를 생각할 수 있습니다.
첫째 이유로서는,우리의 복되신 주님은 이렇게 하심으로써 여러분을 당신의 사랑하는 자녀로 삼으시어,
여러분으로 하여금 당신의 길에 항구하도록 하시려는 것입니다.
주님은 당신 벗들을 항상 이렇게 대하셨고 또 이로써 그들을 거룩하게 하셨습니다.
둘째 이유는 이렇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여러분이 다른 이를 신뢰하지 않고 당신만을 더욱더 신뢰하기를 간절히 원하십니다.
내가 이미 말했듯이 하느님께서는 당신께 대한 전적인 신앙과 희망을 거부하는 이들 안에서
당신 업적을 드러내지 않으시고,
커다란 신앙과 희망을 지닌 이들에게만 항상 당신의 충만한 사랑을 아낌없이 주시고
그들 안에서 놀라운 업적을 행하십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이 앙과 희망을 제대로 지니고 있다면 비천한 이들을 들어 높이시는 그분은
여러분에게 위대한 업적을 이루어 주실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느님께서 여러분이 좋아하는 사람이나 나를 여러분에게서 빼앗아 가실 때,
그분은 두 가지 중에 하나를 선택하라고 하십니다.
즉 하느님에 대한 신앙을 포기하고 세속적인 것으로 돌아가든지 또는
신앙 안에 견고히 머물러 그 안에서 단련을 받든지 하라고 하십니다.
셋째 이유는 다음과 같습니다. 하느님은 여러분을 용광로속의 금처럼 단련시키고자 하십니다.
불순물은 불에 삼켜져 버리지만, 진짜 금은 그대로 남아 한층 더 보배롭게 됩니다.
하느님은 당신께 희망을 두고 환난의 날 당신 안에 항구히 남아 있는 충실한 종에게도
이와 똑같은 방법으로 대하십니다.
주님은 그를 일으키시고 하느님께 대한 사랑때문에 버린 것을 현세에서 백배로 갚아 주시고,
후세에서는 영원한 생명을 주실 것입니다.
하느님께서는 모든 성인들을 이렇게 대하여 오셨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도 이렇게 대하셨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에집트에서 많은 고통을 당한 후,
하느님께서는 수많은 기적으로 그들을 이끌어 내시어 사막에서 만나를 먹이시고 약속된 땅까지 주셨습니다.
여러분도 유혹을 당할 때 신앙에 항구한다면, 주님께서는 이 현세에서 잠시나마 평화와 안식을 주시고
후세에서는 영원토록 주실 것입니다.
(가톨릭홈에서)
성 예로니모 에밀리아니는 1481년 이탈리아의 베테치아의 귀족 에밀리아노 가문에서 태어나
당시 상류사회의 관습에 따라 어려서는 공부에 힘썼으나,
15세때 아버지를 여읜 후는 어머니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학업을 중지 하고 군대에 입대했다.
얼마 후 프랑스와 전쟁이 발발했고, 그도 북 이탈리아 부대의 일원으로 출정해
다행히 대승리를 거두어 위세 당당히 개선군인으로서 돌아왔다.
그런데 얼마 안되어 독일의 대군이 이탈리아를 침공해 왔다.
국경선에 위치한 카스텔노오보 성의 성주(城主)는 이 소식에 접하자 곧 도망하고 말았으므로
예로니모가 그 대신 성을 사수하라는 명을 받았다.
그러나 불리한 전세에 성은 함락되고 자신은 포로가 되어 음산한 지하 감옥에 유폐되고 말았다.
예로니모는 비로소 자신을 생각할 반성의 기회를 얻어 열심히 성모의 도움을 구했다.
그러자 2, 3일후 도저히 구원될 수 없었던 그의 몸이 카스텔누오보 성 근처에 있는
트레비지 시에 나타나 보는 사람마다 놀라게 했다.
그는 사람들에게 "성모님이 저를 구해 주신 것입니다"하며 그의 손발에 채워져있던 수갑과 쇠사슬을
성모 성상 앞에 가져다 바쳤다.
전쟁이 끝나자 그는 카스텔누오보 성의 성주가 되었다. 그
러나 아미 허무한 세상을 안 그에게는 하느님께만 종사할 기회를 얻자는 것 뿐이었다.
그러던 중 1528년 북 이탈리아 지방에 일대 재앙이 일어났다.
즉 대 흉년으로 인해 굶어죽는 자의 수는 셀 수 없었고,
부모를 잃은 어린이들의 부랑생활은 차마 볼 수가 없을 정도였다.
예로니모는 이 부랑 고아들을 묵과할 수 없는 사회 문제로 생각하는 동시에,
또 이것을 하느님께서 맡겨 주신 자신의 사명으로 생각하여,
47세의 몸이지만 성주라는 지위를 버리고 이 구제 사업을 위해 크게 분발하여 일에 착수했다.
그는 우선 자신의 소유물 전부를 처분해 이것을 구제 자금으로 충당하고,
밤낮을 가리지 않고 베네치아의 거리거리를 다니면서 어려운 자를 돕고,
혹은 병자를 간호하며, 임종자를 위로해 주고, 부랑아들을 모아 자기 집에 수용하고,
또 이들을 교육하며 신앙의 길로 선도하는 데 노력을 아끼지 않았다.
한때는 저 유명한 카스텔누오보 성의 성주였으나,
지금은 가나한 부랑아 들의 구제를 위해 열심히 일한다는 그의 소문은 순식간에 전국에 퍼졌고
많은 유지들의 호응을 얻었다.
그는 그들의 도움을 받아 파도바, 베로나, 브레쉬아, 베르가모 등지에 분원을 설치하게 되었다.
그 사업에 호의를 가진 여러 동료들이 사방에서 모여들었고, 그를 도와서 같이 그 운영에 노력했다.
이리하여 결성된 그들의 회는 그 본부의 지방 이름을 따서 소마스카 수도회라 칭했다.
그 후 이 수도회가 어느 정도 기반이 잡히자 예로니모는 자신의 선종 준비를 위해
깊은 산속에 들어가서 오로지 수덕에만 힘을 기울였다.
그런데 1537년 베르가모 시에 무서운 페스트 전염병이 발생해 많은 희생자를 냈으므로 이를 묵과할 수 없어
즉시 그 시에 가서 그야말로 침식을 헤아리지 않고 그들의 간호에 열중했다.
이런 착한 박애의 천사를 하느님께서 그저 버려 두시지 않으셨다.
마침내 그 풍부한 상급을 받을 날이 온 것이다.
예로니모는 그 병에 감염되어 4일간 신음하던 끝에 하늘나라로 향했다. 이는 2월 8일이었다.
그의 수도회는 1540년에 교황청의 승인을 받았고, 1767년에 그가 시성되었다.
그는 지금 고아들의 수호 성인이자 버려진 아이들이 수호 성인으로 높은 공경 받고 있다.
(대구대교구홈에서)
축일:2월8일
성녀 요세피나 바키타 동정
Santa Giuseppina Bakhita Vergine
Saint Josephine Bakhita
Born: 1868 at Oglassa, Darfur, Sudan
Died: 8 February 1947 of natural causes in Italy
Name Meaning: the lucky one; fortunate ( = bakhita); whom the Lord adds (Joseph)
Beatified: 17 May 1992 by Pope John Paul II
Canonized: 1 October 2000 by Pope John Paul II at Saint Peter's Basilica, Rome, Italy;
thought to be the only saint originally from Sudan
Patronage: Sudan
성녀 요세피나 바키타(Josephina Bakhita)는 1869년 아프리카 수단(Sudan)의 다르푸르(Darfur)에서 부유한 가정의 딸로 태어났다. 그녀는 9살쯤 아랍 노예상인에게 납치되어 고통스런 청소년기를 보냈다. ‘바키타’라는 이름도 노예상인들이 지어준 것으로 ‘행운’이란 뜻이다. 이름과는 달리 그녀는 수단 중부 엘오베이드(El Obeid)와 현 수도(首都)인 카르툼(Khartoum)의 노예시장에서 팔리고 또 팔리는 신세가 되어 모진 고생을 했다.
그러다가 1883년 이탈리아 공사(公使) 칼리스토 레냐니(Callisto Legnani)에게 팔리면서 그녀의 운명도 바뀌게 되었다. 처음으로 욕설이나 매질이 아닌 인간적인 대접을 받은 그녀는 그 후 공사의 친구인 아우구스토 미치엘리(Augusto Michieli) 가족에게 보내졌고, 1885년 미치엘리 가족과 함께 이탈리아로 가서 그 가족의 유모로서 일하게 되었다. 그녀는 이탈리아에서 좋은 대우를 받으며 그 나라를 사랑하게 되었다.
미치엘리가 근무지를 옮기면서 자신의 큰딸과 유모인 성녀 바키타를 베네치아(Venezia)에 있는 카노사의 성녀 막달레나 수녀원에 맡겼는데, 그곳에서 그녀는 세상의 참된 주인이신 하느님의 존재를 처음으로 알게 되었다. 그녀는 교리를 배워 그리스도교로 개종하고, 1890년 1월 9일 세례를 받으면서 자신의 새로운 인생의 상징으로 요세피나라는 세례명을 정했다. 그리고 1893년 카노사의 성녀 막달레나 수녀원에 입회하여 3년 뒤인 1896년 12월 8일 첫 서원을 했다. 그 후 남은 50년의 생애를 이탈리아 북부 비첸차(Vicenza)에 있는 시호(Schio)라는 곳에서 카노사(Canossa)의 수녀로서 또 하느님의 겸손한 딸로서 살았다.
그녀는 온화하고 따뜻한 성품을 지녔고, 어떠한 천한 일도 마다하지 않고 행하며, 가난하고 곤경에 처한 이들을 돕는데 온힘을 다 쏟았다. 그래서 사람들은 그녀를 ‘작은 흑인 어머니’라고 부르기 시작했다. 말년에 병고에 시달리면서도 온화한 미소를 잃지 않았던 그녀는 1947년 2월 8일 선종하였다. 그녀가 선종하자 그녀의 덕행을 기억하는 수많은 추모객들이 몰려왔다고 한다. 그녀의 겸손과 높은 덕행으로 인해 선종 12년 후부터 시복시성 절차가 시작되었고, 1978년 교황 요한 바오로 2세(Joannes Paulus II) 역시 그녀의 영웅적인 덕행을 인정했다. 그녀는 1992년 5월 17일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에 의해 시복되었고, 2000년 10월 1일 바티칸의 성 베드로 광장에서 같은 교황으로부터 성인품을 받았다. 그녀에 대한 아프리카 교회의 현양 열기와 사랑은 매우 특별하다. 그래서 그녀는 ‘아프리카의 꽃’으로 불리고 있으며 수단의 수호성녀로서 존경받고 있다.
(가톨릭홈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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