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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인, 성녀 축일 기념일등

+++ 쾰른의 성 헤리베르트 주교 / 아시시의 복녀 베네딕타 기념일 +++

 

Altarpiece of the Patron Saints of Cologne(URSULA, PETER the Apostle, GEREON)

-LOCHNER, Stefan 1440s. Mixed technique on wood, 260 x 185 cm (central),

261 x 142 cm (wings each) Cathedral, Cologne

 

축일:3월16일

쾰른의 성 헤리베르토 주교

St. Heribertus Archiep   

St. HERIBERT of Cologne archbishop

Sant’ Eriberto di Colonia Vescovo

c.970 at Worms, Germany -

16 March 1021 at Cologne, Germany; relics in the church at Deutz

Canonized:1075 by Pope Gregory VII

 Eriberto = guerriero illustre, dal tedesco

 

독일의 보름스 태생인 그는 로렌의 고르즈 수도원에서 공부한 뒤, 고향으로 돌아와서 사제로 서품되었다.

그는 오토 3세의 재상으로 있다가 쾰른의 대주교로 임명되었다.

그는 라인의 도우츠에 수도원을 세우는 한편 평화의 전달자로 크게 활약하였고,

성직자의 규율을 엄히 다스렸을 뿐만 아니라 빈민구제에 온힘을 기우렸다.

그는 이상적인 주교의 모델로서 공경받고 있다.

(성바오로수도회홈에서)

 

 

옛부터 정치가로서 성인이 된 사람은 비교적 적다.

그러나 이러한 사람은 위로는 군주에게 충성을 다하고, 아래로는 백성을 돌보며 국가를 안녕하게 인도했으니,

성 헤리베르토도 그런 위대한 인물 중의 한 사람이었다.

 

그는 790년경 독일의 보름스의 후작가(侯爵家)에서 태어나 그곳 주교좌 성당 부속학교에서 교육을 받고

그 뒤 로드 링겐 주 고르즈에 있는 베네딕토 수도원에서 연구를 계속하다가 귀향 후

히르데바르토 주교에게 서품을 받고

대성당의 주임사제가 되는 한편, 그 시의 이탈리아 정책국(政策局)에 근무하게 되었다.

 

그러던 중 독일 황제 오토 3세가 보름스에 행차했을 때

헤리베르토의 재능이 발견되어 시종(侍從)에 임명되고 그 뒤 늘 황제를 수행하며 봉사하게 되었다.

다른 시종들은 제 관직이나 지위를 이용해 자신의 사리사욕만을 채우고 있었지만

헤리베르토만은 오로지 봉사의 정신으로 황제의 신변을 염려하고 나라를 위하는 마음 외에는 아무것도 없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오토 황제는 깊이 그의 충성을 기특하게 생각하고 그를 유르드부르크의 주교로 임명하려 했으나

겸손한 그는 완강히 이를 사양했다.

그런데 999년 마침 게룬의 대주교 에베르게리오가 서거한 것을 기회로 또다시 그의 후계자로 지목을 받아,

쾰른의 성직자나 신자들은 합심해 드를 추대하고 황제도 그의 취임을 원했으며 교

황 실베스테르 2세도 그를 정식으로 퀼른의 대주교로 임명했으므로 비록 헤리베르토 일지라도

이번만은 거절할 길 없어 때마침 머물던 라벤나에서 퀼른으로 향했다.

 

 

그는 엄동설한에 누더기 옷을 걸치고 맨발로 그 시(市)로 들어갔던 것이다.

선임자 에베르게리오는 성직자로서 맞지 않은 사치를 즐기던 사람이었던만큼 대단히 호화스러운 생활을

했으므로 신자들은 신임 대주교의 이런 검소한 모습을 보고 매우 감동했다고도 하지만,

실제 헤리베르토의 일상 생활은 빈민의 아버지, 수도자의 보호자, 영혼의 착한 목자로서 손색이 없었던 것이다.

 

1002년 오토 황제가 이탈리아를 방문했을 때 헤리베르토도 그를 수행했지만 불행히 황제는 중병에 걸려

비테르보 지장에서 승하했다.

이때에 성사를 주고 황제의 마음을 편안하게 하며 임종에 대한 교회의 기도문을 외우며 그의 명복을 위해

기도하고 또한 온갖 장애를 무릅쓰고 유해를 독일에 운반해 아헨에 있는 가롤로 대제의 무덤 옆에

매장할 수 있도록 주선한 이는 실로 헤리베르토 바로 그분이었다.

 

그 뒤 곧 하인리히 2세가 제후들의 선거에 의해 당선되어 황제위에 올랐다.

그때 헤리베르토는 다른 이를 추천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쾌히 오토 황제에게 의탁받은 황제의 표시인 창을 하인리히에게 넘겨주었다.

그러한 일이 있은 후 그에 대해 모함하는 자가 있어서 황제는 그의 충성을 의심하고

그를 벌주기 위해 쾰른에 가게 되었다.

그러나 조사한 결과 그의 무죄함을 깨닫고 도리어 오랬동안 불의를 감수하여

온 그의 온순함에 감탄하고 그 후부터는 한층 더 그를 우대하게 되었다고 한다.

 

1021년 관할 내의 지방교회 시찰차 출발한 대주교 헤리베르토는

도중 중병을 얻어 쾰른에 돌아오지 않으면 안 되었다.

이로써 재기 불능을 각오한 그는 유산을 교회와 빈민 구제에 기부하도록 유언하고

“우리의 가난한 형제들이 곤궁을 당하지 말게 해 주소서”하고 기도하며 3월 16일에 세상을 떠났다.

그의 유해는 그가 친히 세운 독일의 수도원에 매장되었다.

로마 순교록에는 그를 완덕의 성인이라고 극구 찬양하고 있으며 이상적인 주교의 모델로서 공경받고 있다.

(대구대교구홈에서)

 

축일:3월16일

아시시의 복녀 베네딕타, Poor Clare

Beata Benedetta di Assisi
m. 1260
Etimologia: Benedetta = che augura il bene, dal latino
Saint Benedicta of Assisi
Died : 1260 of natural causes

 


... 몇 수녀들이 진실을 말할 것을 선서하고 작고한 성녀 글라라의 생활과 회개 및 생활 방식과 성녀의 공로를 통해 이루어졌다고 말 한 기적들에 대해 증언한 후에, 당시 원장이었던 베네딕타(Benedetta) 수녀는 다른 자매들과 더불어 공경하올 아버지 스폴레토 주교 전하 앞에서 동정녀 마리아를 제외하고 다른 어떤 거룩한 여인에게서 동정녀 마리아를 제외하고 다른 어떤 거룩한 여인에게서 발견된  모든 성성을 그들이 전 원장이며 지극히 거룩한 어미니였던 고 글라라자매에 대해서 참으로 말해줄 수 있고 또 입증될 수 있다고 한 목소리로 말하였다.
 

베네딕타 수녀는 성 다미아노에 들어오기 전에는
지네브라(Ginevra di Giorgio di Ugone di Tebladuccio)라 알려졌으며,
성녀 글라라를 뒤이어 원장이 되었고
아씨시의 가장 힘 있는 가문 중의 한 가문에 속했다.
그녀의 이름은 1238년의 성 다미아노 수녀들의 명단에 올라 있다.
(아씨시의 성녀 글라라 전기와 시성조사 증언록, 옮긴이 이재성 오상선, 재속프란치스코 국가형제회 출판부199쪽)


 

[세라핌적 가난의 특전]

 

교황 그레고리오 9세가 성녀 클라라에게 허가한(1228. 9. 17.) 세라핌적 가난의 특전

 

하느님의 종들의 종 그레고리오 주교는 아시시 교구의 산 다미아노 성당에서 수도적 공동생활을 하는, 그리스도 안에서 경애하는 딸들인 그리스도의 시녀들, 클라라와 그 자매들에게 인사하며 사도적 강복을 보내노라.

 

1. 널리 알려진 바와 같이 그대들은 오직 주님께만 자신을 봉헌하기 위하여 세속의 모든 부귀 영화를 포기하였소. 그리하여 그대들은 모든 소유를 팔아 가난한 이들에게 나누어 주고 우리를 위하여 가난하여지신 그분,“길이요 진리요 생명”(요한 14,6)이신 분의 발자취를 모든 점에서 따르며 어떠한 경우에도 그 길에서 떠나지 않기 위하여, 더 이상 어떠한 재산도 결코 소유하지 않기로 결심하였소.

 

2. 이러한 그대들의 결심은 어떠한 물질적 곤란을 당하더라도 흔들리지 않을 것이오. 왜냐하면 사랑의 마땅한 도리로 결심하고 스스로를 영의 법에 굴복시킨 그대들 육신의 허약함은 임의 왼손이 머리 받쳐 도와 주실 것이기(참조:아가2,6;8,3) 때문이오.

 

3. 뿐만 아니라 하늘의 새들을 먹이시고(참조: 마태 6,26) 들의 꽃들을 입히시는(참조: 마태 6,26) 그분께서는 그대들에게도 무엇이건 모자람이 없게 보살펴 주실 것이며, 그분을 마주뵈올 영원의 나라에서는 당신 바른손으로 그대들을 안아주시고(참조:아가2,6;8,3), 그분의 식탁에 자리한 그대들 사이를 오가며 손수 시중들어(참조: 루가 12,37) 주시리이다.

 

4. 이렇게 우리는 그대들의 간청을 받아들여 지극히 높은 가난에의 결심을 사도적 호의로 뒷받침하고 보증하며, 어느 누구도 그대들에게 재산 받아들이기를 강요할 수 없게 이 문서를 통하여 사도적 권위로 확인하는 바이오.

 

5. 어느 누구도 우리가 인준하고 확인하는 이 기록을 훼손하거나 이에 대해 무모한 반대를 하지 말 것입니다. 누가 무엄하게도 이런 행동을 하려고 하면 전능하신 하느님과 복되신 사도 베드로와 바오로의 진노를 부르게 되리라는 것을 명심해야 할 것입니다. 

-페루지아에서 교황 즉위 제2년 9월 17일-

 

 

▒우리 수도회의 영성

성 클라라 수도회는 아시시 성 프란치스코의 정신을 따라 성교회 안에서 거룩한 복음을 그대로 본받음을 생활양식으로 하고, 산 위에서 기도하신 그리스도를 모방하는 기도생활로써 하느님의 영원한 계획인 그리스도 신비체의 완성을 위해 봉헌된 관상 수도회이다.성 클라라 수도회, 또는 가난한 자매 수도회라고 불리며, 프란치스코회의 제2회를 이루고 있다.

 

본 수도회의 생활양식이란 교회생활, 형제애, 가난, 관상이다.우리 수도회는 하느님의 부르심을 받고 성모 마리아의 발자취를 따라 성령의 정배가 되어 오직 하느님만을 소유하는 것으로 만족하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가난과 겸손, 삼위일체의 친교 안에 가족적 일치를 이루며,  “그리스도와 함께 하느님 안에 숨은 삶을 살아가는 봉쇄 안에서 말씀을 마음에 새기고 하느님께 그 마음을 두는 관상생활을 한다. 그러므로 “성자를 당신 마음에 꼭 들어하시는” 성부와 함께 산 위에서 관상 중에 계시는 그리스도(마태 17,5)를 본받아 증거하며 살아가는 관상 수도회이다.

 

침묵 안에 끊임없이 회개의 정신을 새롭게 하여 그리스도의 얼굴을 끊임없이 바라봄으로써 모든 사람과 사물과 모든 사건 속에 “거룩하시고 의로우신 아버지의 사랑과 자비를 발견하게 되어 찬미와 감사를 드린다. 이 찬미와 감사는 성체신비의 거행에서 절정을 이루며, 교회의 심장 역할을 다한다. 이로써 교회는 이 생명의 샘에서 한없이 새로워진다. 이렇게 자매들은 자신의 삶 전체로 온 누리의 찬미를 수행하며 다가오는 하느님 나라의 축제에 들어감으로써 하느님을 위해서 함께 일하는 일꾼이요, 그 영광스러운 몸의 연약한 지체들을 받치는 받침대가 된다. 

(제주 성 글라라 수도회홈에서 www.jejuclare.com


 
 

가난한 클라라 수녀회 

── 修女會

Poor Clare

Clarissine, Clarisse라고도 함.
가난하게 살기로 서약하고 아시시의 성 프란키스쿠스를 따른 귀족 출신의 여인 아시시의 성 클라라(1194~1253)가 1212년에 프란체스코 수도회에서 갈라져 나와 이탈리아 아시시에 세운 수녀회.

그녀를 추종하는 수녀 집단을 흔히 제2의 프란체스코회라고 불렀는데, 이들은 수녀원에 은둔하며 기도와 고행에 자신을 바쳤다. 그러나 이 수녀회가 유럽의 다른 지역으로 퍼져감에 따라, 일부 수녀원에서는 재산 소유와 소득 수입을 인정하게 되었다. 이 수녀회의 규칙은 몇 차례 개정되다가 마침내 1263, 1264년 교황 우르바누스 4세가 클라라 수녀회에 대한 규칙을 발표함으로써 재산의 공동 소유와 자치 등 여러 가지 특권을 부여받았다. 이 규칙을 채택한 수녀원은 우르바누스 클라라 수녀회 또는 공식적으로 성 클라라 수녀회(Order of St. Clare)라고 부르게 되었고, 이보다 더 엄격한 성 클라라 규칙(1253 개정)을 계속 준수한 수녀원은 원시파 또는 가난한 클라라 수녀회(Poor Clares)라고 부르게 되었다.

15세기초 코르비의 성 콜레트(1381~1447)는 프랑스에서 클라라 수녀회 개혁에 앞장선 인물이다. 그는 죽을 때까지 17개 수녀원에 초기의 수녀원 규칙을 회복시켰고 엄격한 가난의 원칙을 거듭 주장했다. 콜레트의 추종자들을 성 콜레트의 가난한 클라라 수녀회(Poor Clares of St. Colette)라고 한다. 1538년 이탈리아 나폴리에서 조직된 카푸친 수녀회와 1631년에 조직된 알칸타린 수녀회도 엄격한 규칙을 준수하는 가난한 클라라 수녀회이다.

가난한 클라라 수녀회에 소속한 수녀원들은 거의 모든 일을 독자적으로 결정하기 때문에, 규칙을 실천하는 방식은 매우 다양하다. 이 수녀회는 기도와 고행, 명상 및 육체 노동에 헌신하고 지극히 엄격한 은둔생활과 금식 및 금욕 생활을 채택하고 있다는 점에서 로마 가톨릭 교회의 수녀회 가운데 가장 엄격하고 금욕적인 수녀회로 여겨지고 있다.

가난한 클라라 수녀회" 한국 브리태니커 온라인
<http://preview.britannica.co.kr/bol/topic.asp?article_id=b01g0077a>
[2012. 5. 17자 기사] 

 

 

 

 
◆ 수도원장 ◆        
한자  修道院長  라틴어  Superior religiosus 영어  religious Superior  출처 : [가톨릭대사전] 
 
   수도원에서, 순명의 서원을 한 자신의 아랫사람들을 다스릴 권한을 가진 자. 면속수도원의 원장은 그 지역 관할권자로부터 독립하여 내정(內廷)과 외정(外廷)에서 고유한 재치권을 갖는다. 베네딕토회에서는 특히 '아빠스'(abbas)라고 하는데 이에 해당하는 말로는 동방 바실리오회의 '헤구멘'([그] hegoumenos, [영] hegumen), 러시아나 다른 동방 수도원의 '아르키만드리토스'([그] archimandrites), 베네딕토회의 '프리오르'(prir), 프란치스코회의 '가르디안'(guardianus), 예수회의 '렉토르'(rector) 등이 있다. 수도원장의 임기는, 회헌(會憲)이 특별하게 반대규정을 제시하지 않는 한 일정한 것이 일반적이다.
 
 
◆ 대수도원장 ◆     
한자  大修道院長  라틴어  abbas, abbatissa  영어  abbot, abbess  [관련단어] 아빠스   출처 : [가톨릭대사전] 
 
남자 또는 여자 대수도원의 원장. (⇒) 아빠스
 

▶아빠스 ( 출처 : 천주교 용어자료집) 
라틴어 [abbas]    영어 [abbot]     

 대수도원장. 베네딕토 규칙서를 따르는 수도회들과 일부 특정 수도회, 대수도원 수장에 대한 칭호이자 직함이다.   동방 수도원에서 수도자들이 자신들의 지도자이자 영성적 스승을 ‘아빠’(abba)라고 부르던 데서 유래했다.   권한, 직책, 성별에 따라 일반 아빠스, 면속 아빠스, 총 아빠스, 수석 아빠스, 아빠티사(여성, [라] abbatissa, [영] abbess) 등 다르게 부른다.
 

◆ 아빠스(여) ◆        
영어  Abbess  출처 : [전례사전] 
 
   특정한 수도회, 특히 베네딕도회 전승에서 수녀 공동체의 최고 장상으로 선출되는 대수도원장이다. 아빠스의 권한은 수녀회의 회헌과 규칙에 따라 달라진다. 1970년 11월 9일 미사 중에 아빠스를 축복하는 새 형식문이 반포되었다(악따 아뽀스똘리채 세디스 63, 7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