축일 3월18일
오르타의 성 살바토르, Observants
San Salvatore da Horta Professo Francescano
Santa Coloma de Farnés, 1520 - Cagliari, 18 marzo 1567
Saint Salvator of Horta
Born : 1520 at Santa Columba, Gerona, Spain
Died : 1567 at friary at Cagliari, Sardinia, Italy of natural causes
Beatified : 5 February 1606 by Pope Paul V
Canonized : 17 April 1938 by Pope Pius XI
성 살바토르는 스페인의 제로나 교구의 산타 꼴룸바에서 태어났다.
그의 집은 매우 가난했는데, 설상가상으로 그가 아기 때에 부모를 잃고 고아가 되었다.
그는 이때부터 거리를 헤매다가 바르셀로나에서 신기료 장수가 되었다. 이때 그의 나이는 20세였다.
그러나 그의 마음 속에는 수도자가 되려는 열망으로 가득하여 프란치스칸이 되고자 하였다.
처음에는 수도원 부엌일에 고용되었는데, 그의 덕이 급속도로 성장하여 또르또사 예수 마리아 은둔소로 갔다.
여기서 그 누구보다도 엄격한 생활을 하였는데,
맹인과 벙어리 그리고 불구자들이 그에게 오면 항상 치유받는 기적이 일어나곤 하였다.
그는 항상 맨발로 다녔고, 매일 편태하였으며, 깊고 엄격한 단식을 끊임없이 계속했던 것이다.
그는 특히 성모 마리아와 성 바오로 신심이 투철했는데, 수차례에 걸쳐 성모님의 발현을 목격하였다.
그는 47세의 일기로 선종하였으나, 생전에 이미 성인으로 공경받고 있었다.
(성바오로수도회홈에서)
오르타의 성 살바토르는 에스파냐 헤로나(Gerona) 교구의 산타 콜룸바(Santa Columba)에서 태어났다. 그의 집은 매우 가난했는데, 설상가상으로 그는 아기 때에 부모를 잃고 고아가 되었다. 그는 이때부터 거리를 헤매다가 바르셀로나(Barcelona)에서 신기료장수가 되었다. 이때 그의 나이는 20세였다. 그러나 그의 마음속에는 수도자가 되려는 열망으로 가득하여 작은 형제회 회원이 되고자 하였다.
바르셀로나에서 작은 형제회에 입회한 그는 처음에는 수도원 부엌일을 담당하였는데, 그의 덕이 급속도로 성장하여 토르토사(Tortosa)의 예수 마리아 은둔소로 갔다. 여기서 그는 그 누구보다도 엄격한 생활을 하였는데, 맹인과 벙어리 그리고 불구자들이 그에게 오면 항상 치유를 받는 기적이 일어나곤 하였다. 그는 항상 맨발로 다녔고, 매일 편태를 했으며, 길고 엄격한 단식을 끊임없이 계속했다. 그는 특히 성모 마리아와 성 바오로(Paulus)에 대한 신심이 투철했으며, 수 차례에 걸쳐 성모님의 발현을 목격하였다. 그는 47세의 일기로 선종하였으나, 생전에 이미 성인으로 공경을 받고 있었다. 그는 1606년 2월 5일 교황 바오로 5세(Paulus V)에 의해 시복되었고, 1938년 교황 비오 11세(Pius XI)에 의해 시성되었다. 그는 살바도르(Salvador)로도 불린다.
(가톨릭홈에서)
■간추린 프란치스칸 영성
복음적 그리스도 중심적 영성 | 사도적 선교적 영성 | 작음과 형제애의 영성
복음적 그리스도 중심적 영성
1. 프란치스코의 성소의 기초로서의 복음
프란치스꼬는 당시의 기존 수도회들의 회칙을 받아들이기를 강력하게 반대했을 뿐만 아니라, 심지어 이야기도 못 꺼내게 하곤 하였다. 그 이유는 자신의 복음적 성소 때문이라고 단정지을 수 있다. 프란치스꼬는 긴 회개여정 끝에 복음의 메세지들을 통해 자신의 성소에 대한 확신을 갖게 되었다. 그는 처음에 은수자의 옷을 입고 은수자처럼 살고자 하였다. 그러던 어느날, 뽀르찌웅꿀라 성당에서 "사도들의 파견"(Missio Apostolorum)에 관한 설교(마태 10,7-13)를 들은 후 그의 성소는 보다 구체화되고 확고하게 된다. 여기서 프란치스꼬는 주님께서 그를 사도들처럼 하느님 나라와 회개와 평화를 설교하라고 파견하였음을 깨닫게 된다. 그는 이 말씀을 듣고 "이것이 바로 내가 찾던 것이다. 이것이 바로 내가 원하던 것이다. 이것이 바로 내 온 정성을 기울여 하고싶어 하던 바이다"(1첼라노 22; 대전기 3,1; 세동료 25)라고 외쳤다.
이 순간에 프란치스꼬가 즉시 새로운 수도회를 창설해야겠다고 생각한 것은 아니다. 그런데 그를 따르고자 하는 첫동료들이 생기자 그는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삶이 무엇인지를 복음서를 통해 찾고자 하였다. 그래서 첫 동료들과 함께 산 니꼴로 성당으로 가서 그 당시 만연했던 대중신심인 소위 "사도들의 제비뽑기"(Sortes Apostolorum)를 통해 복음서를 세번 펼쳐보았다. 이렇게 해서 뽑은 세 구절은
1) "완전하게 되려거든 가지고 있는 것을 모두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고나서 나를 따르라"(마태 19,21). 2) "여행중에 아무것도 지니고 다니지 말라"(루가 9,3). 3) "나를 따르려면 자기자신을 부정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라"(마태 16,24) 였다. 모두 그리스도를 따르라는 주제였고, 이에 프란치스꼬는 "이것이 우리의 생활이요, 우리와 앞으로 우리를 따르게 될 이들의 회칙입니다"(대전기 3,3; 세동료 29; AnP 11)고 하였다.
프란치스꼬는 이렇게 복음을 통해서 자신의 성소를 찾게 되었으며, 그리하여 그는 "거룩한 복음의 양식에 따라 살아야 할 것을 주님 친히 가르쳐 주셨다"(유언)고 말한다. 그래서 프란치스꼬는 당시의 수도생활이 초대교회 공동체의 삶을 이상으로 제시한 반면, 복음서에 나타난 예수 그리스도와 사도들의 삶을 이상으로 제시하고 있는 것이다.
2. 예수 그리스도와 사도들의 생활양식
프란치스꼬는 자신과 형제들의 삶을 "순종하며 소유없이 정결하게 살면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발자취를 따르는 것"(2회칙 1,1)으로 제시한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지상에서 사셨던 것처럼 산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는 당시 일반화 되어 있었던 정주적(定住的)인 수도승적인 양식을 거부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예수님과 사도들처럼 일정한 거주지 없이 순회설교적인 생활 양식을 기본 생활양식으로 삼게 된다. 프란치스꼬의 글 안에 "주님께서 말씀하십니다." 혹은 "사도가 말합니다."라는 표현들을 자주 발견하게 되고, 초대교회 공동체의 아름다운 모습을 기술하고 있는 사도행전의 내용을 발견할 수 없는 것이 그 증거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프란치스꼬가 발견한 예수 그리스도의 모습은 당시 교회가 갖고 있던 그리스도 상과는 거리가 먼 것이었다.
3. 가난하시고 겸손하시며 십자가에 못박히신 그리스도 중심주의
프란치스꼬의 시대는 교황권이 절대적인 경지에 오른 시기였고 따라서 교회의 입장에서는 황금기인 시대였다. 지상의 왕권은 교황권에 예속되어 있었다. 이 시대를 풍미한 그리스도관은 부활,승천하셔서 전능하신 하느님 오른 편에 앉아계시면서 지상의 대리자를 통해 통치하시고, 영광중에 재림하시어 심판하실 왕이라는 것이었다. 따라서 교회는 그리스도를 대신해서 세상을 통치하고, 세속의 권세는 영적인 권세인 교황권에 굴복해야만 한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프란치스꼬가 복음서를 통해서 발견한 그리스도는 그와 정반대되는 모습을 지니고 있었다. 그리스도는 "가난하시고 겸손하시며 십자가에 못박히신 분"이라는 것이다. 바로 그것을 통해 그리스도는 우리를 구원하셨다는 것이다. 따라서 프란치스꼬와 그의 제자들이 따르게 될 그리스도는 영광의 그리스도가 아니라 가난하게 사셨고 겸손하게 사셨으며 결국 우리의 구원을 위해 십자가에 벌거벗은 채로 못박히셨던 그 그리스도인 것이다. 이러한 그리스도관은 교회와 모든 크리스챤에게 회개를 거듭 요청하게 된다.
4. 회개생활
공생활을 시작하면서 예수께서 선포하신 첫 발설말씀은 "회개하라, 하느님 나라가 가까이 왔다"(마르 1,15)는 것이었다. 프란치스꼬는 자신과 초기동료들을 "아씨시의 회개자들"이라 불렀다. 프란치스꼬는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끊임없는 회개의 삶을 살아야 한다고 스스로 인식하였다. 그에게 있어 회개는 마음의 변화요, 의식의 변화, 시각의 변화였다(참조: 유언 1-3). 실제로 그와 초기동료들이 교황님으로부터 회칙을 구두로 인준받고 처음으로 받은 공식소명은 바로 하느님 나라와 회개와 평화를 설교하라는 것이었다. 따라서 프란치스칸들은 먼저 자신들이 회개하고 회개했다는 증거를 삶으로 보이고, 그리하여 다른 사람들을 회개에로 초대할 소명을 받았다고 할 수 있다.
사도적 선교적 영성
1. 모든 계층 안의 크리스챤에게 개방된 영성
교회 안에서의 수도생활의 역사를 보면, 어떤 수도생활 양식은 성직자 중심이고, 또 어떤 생활양식은 극히 수도승적(평수사 중심)이었다. 프란치스꼬는 성직계에 속하든 평신도계에 속하든, 또 출신 신분이 귀족이든 평민이든 모두에게 개방되어 있었고 모두를 받아들였다. 마치 예수의 제자들인 사도들이 계급과 신분의 지장없이 불리움을 받은 것과 같다고 할 수 있다. 또한 프란치스꼬는 여자들을 위한 프란치스칸적인 생활양식을 창설하였으며(제2회: 글라라회), 평신도들을 위해서도 프란치스칸적인 생활양식을 창설하였다(제3회: 재속 프란치스꼬회). 이리하여 신분, 계급 여하에 상관없이 모두가 가난하시고 겸손하시며 십자가에 못박히신 그리스도를 따를 수 있다는 자신의 확신을 실현에 옮긴 셈이다.
2. 교회 안에서의 영성
프란치스칸의 거룩한 복음을 따르는 생활은 교회 안에서 교회를 위한 생활이다. 프란치스꼬는 시초부터 자신의 성소가 올바른 것인지의 여부를 교회가 가려주기를 희망하였다. 그래서 그는 자신과 초기 형제들이 선택한 생활양식을 교황성하로부터 인준받으려고 노력하였다. 당시의 복음적 운동들은 프란치스꼬처럼 거룩한 복음에 따라 사는 삶을 주창하였지만, 교회에 반기를 들며 교회 없는 삶의 구조를 추구함으로써 이단에 빠지는 오류들을 범하기도 하였다. 프란치스꼬는 이러한 이단적인 오류들을 깊이 인식하고 있었으며 그 근본적인 이유를 교회 안에서의 삶을 택하지 않은데 있다고 보았다. 왜냐하면 교회는 그리스도 친히 사도들을 주추삼아 세운 것이기 때문에 교회를 통해서 확인되지 않는 삶이란 바로 그리스도로부터 확인되지 않은 삶이 되고 말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그는 자주 형제들이 교회와 교회의 성직자들에게 최대한의 존경과 사랑을 드리라고 명했으며, 입회의 조건에 있어서도 "가톨릭 신앙과 교회의 성사"에 대한 시험을 전제로 하기도 하였다. 어떤 속화되고 불쌍한 사제를 만난다해도 그들을 존경하고 사랑하라고도 가르쳤다. 이렇게 거룩한 복음을 따르는 생활과 거룩한 교회 안에서의 생활은 본질적으로 분리불가능한 요소였다. 그래서 그는 회칙의 마지막 부분에서 단호하게 선언하고 있다: "형제들은 거룩한 교회의 발 아래 항상 매여 순종함으로, 가톨릭 믿음의 기초 위에 굳건히 서서 우리가 굳게 서약한 가난과 겸손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거룩한 복음을 실행하도록 합시다"(2회칙 12,4).
3. 삶의 영성
거룩한 교회 안에서의 삶은 필연적으로 교회의 사명에 이바지하도록 이끌어준다. 이러한 교회의 사명에 이바지하는 프란치스칸적인 방법은 어떤 사업이나 거창한 활동을 통해서라기보다는 무엇보다도 삶으로써 자신들이 크리스챤이요 회개자임을 증거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프란치스칸 카리스마는 어떤 수도회들의 카리스마처럼 어떤 사업이나 고유 목적을 위해 생겨난 것이 아니라, 철저하고도 근본적으로 복음을 삶으로써 그 삶을 통해 형성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래서 프란치스꼬는 "생활 혹은 삶"이란 용어를 자주 사용하며 그 중요성을 이야기하고 있다. "작은 형제들의 회칙과 생활은..." "이 생활을 받아들이려는 이들은..." 그래서 프란치스칸 영성은 사업이나 활동보다는 형제적인 삶, 회개의 삶, 복음적 생활이 기초가 된다고 할 수 있다. 따라서 사업이나 활동은 삶의 결과로서 비롯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이렇게 삶을 통해 스스로 복음화 되고 또 복음화 시키는 것이 작은형제들의 제일차적인 과제일 것이다.
4. 선교적 영성
교회 안에서 교회의 사명에 이바지하도록 불리움받은 작은 형제들은 교회의 본질적인 사명인 선교에로 열려있기 마련이다. 프란치스꼬 역시 초기부터 이러한 선교적 열정에 북받쳐 수차례에 걸쳐 선교여행을 떠났으며, 순교의 열정에 사로잡혀 있었다. 특별히 당시 그리스도교와 가장 적대적이었던 이슬람교도들을 한 형제로 받아들이고 화해의 사신으로서의 역할을 수행코자 하였다. 그 결과 성지탈환의 이유로 십자군 전쟁이 수차례에 걸쳐 일어나고 있던 상황에 그는 동방으로 건너가 홀몸으로 이슬람의 술탄을 만나 평화와 화해의 정신으로 한 형제임을 느끼게 해주었다. 그 이후 지금까지 성지 이스라엘은 작은 형제들의 배타적인 선교지로 사도좌는 인정하고 있고, 회교도들도 작은 형제들만을 로마교회의 공식적인 대표자로 받아들이고 있다. 이러한 사부요 스승의 선교적 모범은 작은 형제들의 마음과 역사 안에서 늘 살아 숨쉬고 있다. 이러한 선교적 열정의 덕분으로 전 세계 거의 모든 나라에 그리스도교와 프란치스카니즘을 심어왔고 또 오늘날에도 아프리카, 러시아, 중국, 태국 등 선교 프로젝트들을 활성화시키고 있다. 프란치스칸 성소는 본질적으로 선교적이라고 할 수 있다.
작음과 형제애의 영성
프란치스꼬회의 공식명칭은 "작은 형제회"(Ordo Fratrum Minorum)이다.
이 명칭은 바로 프란치스칸 영성을 요약해 주고 있다. 작음(minoritas)과 형제애(fraternitas)를 바탕으로해서 복음적 삶을 영위한다는 것이다.
이 작음의 정신은 그 안에 가난과 겸손이라는 덕목을 포함하고 있다. 따라서 작은형제들은 가난하시고 겸손하신 그리스도의 제자들로서의 삶을 본질적인 것으로 여기고 있다. 그래서 실제로 가난한 자가 되고 가난하고 소외된 이들과 하나가 되며 그들로부터 복음화되고 복음화시키는 것을 자신들의 정체성으로 인식한다. 또한 가난한 자들처럼 일과 노동을 통해 땀흘려 일하고 소박하고 단순한 생활을 영위하며 모든 것을 가난한 이들처럼 하느님께 신뢰하며 복음적 불안정의 삶을 살아간다. 이렇게 일과 노동은 생계유지의 제일차적인 수단이며 나머지는 하느님의 자비하심에 의존하며 그분이 보내주시는 은인들의 애긍을 통해서 살아가게 된다.
형제애의 정신은 사랑과 순종을 전제로 한다. 프란치스꼬는 수도회 개념보다는 형제회 개념을 더 중시하였다. 우리 모두는 맏형이신 그리스도 안에서 모두가 한 형제들이라는 것이다.
이 형제애는 "어머니가 자식을 기르고 돌보는 이상으로 형제들 상호간에 기르고 돌보는 정신"이다. 이러한 형제애는 가난 안에서도 기쁨이 넘치는 공동체를 가능케 한다. 형제 상호간의 사랑과 애정어린 순종은 기쁨의 영성을 프란치스칸 영성의 특징적인 요소로 부각시켜 준다. 이렇게 공동체 안에서 체험되는 형제애는 신분계급 여하를 막론하고 모든 이에게로 확장된다. 선인이든 악인이든 크리스챤이든 이교도이든 원수이든 강도이든 성한 사람이든 병자들이든 모든 이가 한 아버지 하느님의 자녀로서 받아들이도록 해 준다. 더 나아가 프란치스꼬가 그랬듯이 이 형제애는 자연과 우주 만물에 대한 사랑으로 더욱더 확장된다. 바로 우주적인 형제애, 만인의 형제가 되는 것이 프란치스칸 형제애의 본질이다.
(작은형제회홈에서 www.ofm.or.kr)
축일:3월 18일
예루살렘의 성 치릴로 주교 학자
St. CYRIL of Jerusalem
St. Cyrillus ab Hierosolymit Patriarcha, D. E
San Cirillo di Gerusalemme Vescovo e dottore della Chiesa
Gerusalemme, ca. 315 - 387
예루살렘의∼(C. Hierosolymitanus, 315?∼397)성인. 주교(349∼387). 교회학자.
315년경 예루살렘에서 출생한 것으로 추정된다.
청소년기에 대한 자료는 남아 있지 않다.
다만 349년 막시모(Maximus)의 뒤를 이어 예루살렘의 주교가 되었다.
그런데 체사레아의 주교인 아리안파의 아카치오(Accacius)로부터 서품을 받았기 때문에
이것이 화근이 되어 오랫동안 아리안파 또는 반(半)아리안파로 낙인찍히게 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오해는 후기학자들의 증언과 치릴로 자신의 저술과 생활로 해명되고 풀리게 되었다.
사실 그는 오히려 아리안파인 아카치오와는 그리스도론에 있어서 반대 입장을 취했기 때문에
세 번씩이나(357년,360년,367∼378)유배를 당하기도 하였다.
387년 3월 18일이 사망일로 추정되어 이날을 축일로 정하고 있다.
그의 작품중에는 ≪예비자교리≫가 가장 유명하다.
이 작품은 예비자들과 새 영세자들을 위한 일종의 신앙과 생활의 지침서로 교의 및 전례적으로 중요한 문헌이다.
그는 또한 니체아 공의회의 신앙고백인 성부나 성자의 본체적 일치 또는
동체성(consubstantialtus)를 고백하여 아리안파의 양자설(養子說)을 배척했으며
성부와 성자와의 일치를 성신께 연결시켜 성삼교리의 설정에 큰 공헌을 하였다.
(가톨릭대사전에서)
*알렉산드리아의 성 치릴로(C. Alexandrinus,?∼444).교부(敎父).교회학자.축일: 6월27일
*데살로니카의 성 치릴로 수도자(C. Thessaloniae, 827∼869)축일: 2월14일
성 메토디오 주교(Methodius, 816?∼885)와 함께 슬라브족 포교의 사도.
315년 그리스도교 신자인 부모에게서 태어났다.
막시무스 주교를 이어 348년 예루살렘의주교가 되었다.
아리우스 논쟁에 가담하여 여러 번 유배형을 당했다.
성서와 성전을 기초로 하여 교우들에게 신앙의 참된 교리를 설명한 설교집은 그의 사목적 열성을 보여 준다.
386년에 세상을 떠났다.
예루살렘의 성 치릴로 주교의 [예비자 교리]에서
(Catech. 3,1-3: PG 33,426-430)
성령을 받을 수 있도록 마음을 깨끗이 준비하십시오.
수난당하실 때 히솝의 줄기에다 마실 것을 받으신 그리스도의 권능을 힘입어 히솝의 물뿌림을 입고
영적인 히솝으로 씻음 받을 이들 앞에서 "하늘은 기뻐하고 땅은 즐거워하라."
하늘의 권능들이여, 즐거워 하십시오. 영적 신랑과 결합하려고 하는 영혼들이여, 마음을 준비하십시오.
"광야에서 외치는 이의 소리가 들린다. `너희는 주의 길을 닦고 그의 길을 고르게 하여라.’’
정의의 자녀들이여, "주의 길을 고르게 하여라." 는 요한의 호소에 귀를 기울이고 그것을 실천에 옮기십시오.
영원한 생명에 곧바로 들어갈 수 있도록 여러분을 가로막는 모든 장애물을 제거하십시오.
성실한 신앙을 통해서 성령을 받을 수 있도록 마음의 준비를 깨끗이 하십시오.
신랑의 혼인 잔치에 부름받을 때 정결하게 참석할 수 있도록 참회를 통하여 여러분의 옷을 씻으십시오.
신랑이 주시는 은총은 풍부하고 또 그분은 그것을 아낌없이 주시므로,
그분은 모든 사람들을 차별 없이 부르시며 당신 사자들의 외치는 소리를 통해 모든 이들을 한데 모으십니다.
그 다음 주님은 그들 가운데서 세례의 상징인 결혼식에 참석할 자격이 있는 이들만을 친히 뽑으실 것입니다.
등록된 여러분들 중 누구도 "친구여, 결혼 예복도 입지 않고 어떻게 여기에 들어왔소?" 라는 말을 들어서는 안되겠습니다.
여러분은 모두가 오히려 "잘했다. 너는 착한 종이로구나. 네가 지극히 작은 일에 충성을 다하였으니 이제 내가 큰일을 맡기겠다.
자, 와서 네 주인과 함께 기쁨을 나누어라."는 말을 들었으면 합니다. 지금까지 여러분은 문밖에 서 있었습니다.
이제부터 다음과 같이 말할 수 있게 되기를 바랍니다.
"임금은 나를 당신 궁방에 들어가게 하셨다. 내 영혼아, 주님 안에 기뻐하라.
그는 구원의 빛나는 옷을 나에게 입혀 주셨고 신랑처럼 빛나는 관을 씌워 주셨으며 신부처럼 패물을 달아 주셨다."
여러분 각자의 영혼은 아무 티도 구김살도 없이 나타나야 합니다. 몰론 은총을 받기 전에 이렇게 되라는 말이 아닙니다.
여러분은 죄 사함 받기 위해 부르받았습니다. 그래서 죄 사함을 받기 전에 그것은 불가능합니다.
그러나 은총을 받은 후 여러분의 양심은 아무 흠도 없어야 하며 은총에 합당한 생활을 해야 합니다.
형제들이여, 이 세례는 매우 중요한 것이므로 세심하게 준비한 후 그것을 받으러 나가야 합니다.
여러분 각자는 헤아릴 수 없는 천사의 무리가 옹위한 가운데 하느님의 면전에 서있음을 깨달아야 합니다.
성령께서는 여러분의 영혼에다 인호를 박아 주시고 여러분을 위대한 임금의 군사로 선택하실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은 외적으로 정결한 흰옷을 입는 것만이 아니라 참으로 신심 깊은 마음으로 자신을 준비하십시오.
(가톨릭홈에서)
오늘날 교회내의 문제는 그리스도의 신성을 부정한 아리우스 이단의 반역과 비교할 때 사소한 것이다.
치릴로는 이러한 아리안파와 적대적 입장에 서 있었으나 성예로니모는 아리안파라고 고발되기도 하는 동 파란 만장한 생애를 산다.
결국 1822년 교회박사로 선언됨으로써 그 시대의 사람들과 후대 사람들에게 그의 정당성을 인정받았다.
예루살렘에서 태어나 훌륭한 교육을 받고, 특히 성서에 조예가 깊었던 그는
예루살렘의 주교로부터 사순절에 사제 서품을 받고, 부활 후 주간에는 예비자들에게 교리를 가르치는 일을 맡았다.
이 예지자 교리는 4세기 중엽의 교회 신학과 전례의 표본으로 가치 있는 것이다.
그가 예루살렘의 주교가 된 배경에 대해 논란의 여지가 많은 보고들이 있다.
그러나 그가 지역 주교들에 의해 타당한 주교품을 받았다는 것은 확실하다.
그들 가운데 한 사람이 아리안파인 아카치우스였기 때문에 그의 ’협력’을 기대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치릴로와 아카치우스 사이에는 곧 갈등이 생겼다. 아카치우스는 그이 이웃인 체사레아의 주교좌를 맡은 적대 관계의 주교였다.
치릴로는 공의회에 소환되어 빈민 구제를 위해 교회 재산을 팔고 불순명했다는 이유로 기소되었다.
그렇지만 신학적인 견해 차이도 내포되어 있었을 것이다.
그는 유죄 선고를 받고 예루살렘에서 추방되었다가 후에 복권되었지만 이는 반(半)아리안파의 도움이나 협력을 얻지 않고 된 것이었다.
그는 주교직을 맡은 기간중 반은 귀양살이로 보냈다.(처음 고발당한 일이 두 번이나 반복되었음)
그 후 예루살렘으로 되돌아온 치릴로는 그곳이 이단과 분열, 싸움으로 짓밟혀지고 범죄로 만신창이가 된 것을 알았다.
니사의 성그레고리오도 절망적으로 버림받은 그곳에 많은 도움을 베풀었다.
그들은 모두 제2차 콘스탄티노플 세계 공의회에 갔는데 그곳에서 니체아 신경 수정안의 선포를 도모한다.
치릴로는 ’일체’-즉 성자 그리스도와 성부가 같은 본성을 지녔다는-란 말을 받아들였다.
어떤 사람들은 그것을 참회의 행위라고 했지만 공의회의 주교들은 그를 아리아니즘에 대항한 정통파의투사라고 찬양했다.
치릴로는 아리아니즘에 대항한 위대한 정통파의 옹호자들과 친근하게 지내지는 않았지만,
아타나시오가 우리가 의미하는 바 그대로의 ’형제들’이라고 부른 사람들 가운데 한 사람이며, 다만’일체’라는 말에 대해서만 의견이 달랐던 것이다.
성인들의 생애는 단순하고 평온하며 속된 이단과는 접촉하지 않았을 것이라고 상상했던 사람들은
역사는 생각했던 것과는 다르다는 점을 발견하고 심한 충격을 받는다.
그러나 성인들뿐 아니라 사실상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그들의 스승과 같은 어려움을 체험하게 된다는 사실 앞에서 놀라지 말아야 한다.
진리에대한 정의는 무한하고 복잡한 추적이며, 남자이건 여자이거나 간에 선의의 사람들도 모두 이단과 오류의 고통 속에 시달리는 것이다.
지능적이고 감정적이며 정치적인 장애물들은 치릴로 같은 사람을 한순간이나마 뒤떨어지게 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전체적으로 보아 그들의 생애는 진실과 용기에 대해 기념비적인 것이다.
믿음의 존엄성이 크게 드러나는 것은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표시된 우리들 가운데서만이 아닙니다.
세상의 모든 일에 있어서 심지어는 교회 밖의 일도 믿음에 의해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믿음으로써 서로가 남남이던 사람들을 결합시키는 데 혼인법이 작용합니다. 농사를 짓는 것도 믿음으로 이루어집니다.
인간은 풍성한 수확을 거두어들일 수 있다고 믿지 않는 한 농사짓는 수고를 참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항해하는 사람들도 믿음이 있기에 조그마한 나룻배에 몸을 싣고 든든한 땅을 벗어나 요동하는 물결의 움직임에 자신을 맡기는 것입니다.
분명히 말하지만, 우리들 가운데서만 이것을 진리라고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교회 밖에 있는 사람들도 그것을 받아들입니다.
그들이 성서를 받아들이지 않고 그들 자신의 어떤 신조를 앞세우지만 이것 역시 그들이 믿음으로 받아들인 것입니다.(예비자 교리 5권)
(성바오로수도회홈에서)
같은 치릴로로 총주교이며 교회 학자로 부르는 성인이 두분이다.
이들은 같은 4세기에 태어나 아리우스파의 이단자들로 인해 고생을 하면서도 그들의 그릇된 설과 싸운 사람이지만
한 분은 앞에서 말한 알렉산드리아의 성 치릴로이고, 또 한 분은 지금 이야기할 예루살렘의 성 치릴로이다.
*알렉산드리아의 성 치릴로(C. Alexandrinus, ?∼444).교부(敎父).교회학자.축일: 6월27일
*데살로니카의 성 치릴로 수도자(C. Thessaloniae, 827∼869) 축일: 2월14일
성 메토디오 주교(Methodius, 816?∼885)와 함께 슬라브족 포교의 사도.
치릴로는 315년경에 그리스도교 신자인 부모에게서 태어났다.
20세까지는는 숨어서 종교연구에 전력을 다하고 성서는 물론 교부의 저서 등도 모조리 연구하는 한편,
이단설에 대해서도 계속 연구하여 점점 교회가 진리란 것을 깨달았다.
19세때에 예루살렘의 주교 막시무스에게 선택되어 부제가 되고 나서는 신자들에게 강론도 하고 구도자를 인도하기도 했지만,
그 가르치는 방법이 얼마나 깊이가 있었던가는 구도자를 위해 서술한 저서만 보더라도 알 수 있다.
치릴로는 부제로서 10년을 지낸후 비로소 사제가 되고,
다시 5년 뒤에는 막시무스의 후계자로 임명되어 전 그리스도교회의 모(母) 교회라고 인정되는 예루살렘 교회의 총주교가 되었다.
이것은 그에게 있어서 명예라기보다 오히려 고통의 원이 되었다.
왜냐 하면 그로 말미암아 그는 아리우스파의 이단자들의 박해의 목표가 되어 전후 3차례나 총주교좌로부터 추방당하고
35년간의 주교생활 중 16년은 유배지(流配地)에서 보내지 않으면 안 되었기 때문이다.
최초의 추방의 원인이 된 것은 "치릴로는 성당의 기구를 모조리 매각 처분했다"라는 반대자의 비난이었다.
치릴로는 언젠가 대 흉년 때 빈민들에게 식량을 사서 나누어 주기 위해 전례(典禮)에 필요치 않은 성구(聖具)를 매각해 돈으로 바꾼 일이 있었다.
이런 일은 빈민의 아버지라고 불리는 그에게는 별로 진기한 일이 아니겠지만,
사랑의 정신을 분별하지 못하는 이단자들은 이를 기회로 신성 모독적인 행위처럼 과장해 공격을 해 왔던 것이다.
그것은 마치 죄인을 불쌍히 여기며 죄인들과 식사를 함께 하신 주 예수를 비난한 바리사인들의 행동과 흡사했던 것이다.
치릴로는 귀양가서도 결코 무익하게 세월을 보낸 것은 아니었다. 자기 교구의 신자 일동을 위해 기도하고 덕행을 닦기에 여념이 없었던 것이다.
성서와 성전을 기초로 하여 교우들에게 신앙의 참된 교리를 설명하는 설교집도 이러한 때에 저술된 것이다.
그가 아직 예루살렘의 주교로서 있을 때의 일이다. 확실히 기적이라고 인정할만한 두 현상이 일어났다.
그 하나는 351년에 5월 7일 오전 9시경 갈바리아에서 올리브 산까지 약 10리 가량에 걸쳐 하늘에 커다란 십자가 모상이 나타나
태양광채보다 더 강한 빛을 발한 사건인데 그로 인해 신자들은 깊은 위안을 받고 미신자들을 감동하여 많은 사람들이 개종했다고 한다.
그 자세한 것은 치릴로가 콘스탄시오(Constantius)황제에게 보낸 서간 중에 기록되어 있는데, 그리스 정교회는 지금도 5월 7일에 그 기적을 기념한다고 한다.
다른 또 하나의 기적은 더 위대한 것으로서, 배교자 율리아노(Julianus)황제가 그리스도교는 진리가 아니란 것을 입증하려고
예루살렘 성전에 관한 그리스도의 예언, 즉 "저 돌들이 어느 하나도 제자리에 그대로 얹혀 있지 못하고 다 무너지고 말 것이다"(마르 13, 2) 하신 말씀이
성취되지 않기 위해 69년 디도(Titus) 장군의 지휘하에 그의 군대로 하여금 완전히 파괴된 궁전을 재건하려고 결심했던 때의 일이다.
황제의 원조를 몹시 기뻐한 유다인들은 폐허로 변한 자리를 차차 정리하며 막상 재건에 착수하려고 했다.
그리스도교 신자들은 모두 주 예수의 예언이 헛되게 되지난 않을까 하고 매우 염려했다.
이때에 치릴로 주교는 "천지는 변할지라도 내 말은 변치 않으리라"하신 주님의 말씀을 인용하며 열심히 그들을 위로하고 있었다.
그런데 유다인들이 기초 돌을 놓기 위해 땅을 파노라니 별안간 땅속에서 굉장한 화염이 솟아올라
어떤 사람은 타죽고 어떤 사람은 큰 화상을 입은 후에도 몇번이나 이 같은 재앙을 당한 나머지 끝내 공사를 계속할 수가 없게 되었다.
그리스도교 신자들의 기쁨은 중천에 달했다. 교회가 진리를 내포하고 있다는 것을 증명하고도 남음이 있었기 때문이다.
치릴로를 위시하여 예루살렘의 신자들은 목전의 사실에 점차 신앙을 견고히 하며 충심으로 하느님께 감사했다.
이것은 당시 이교의 역사가까지도 자기네 저서에 기록한 유명한 기적이다.
그 뒤 치릴로는 67세 때 381년 콘스탄티노플(Aecumenicum Constinopolitanum)에서 열린 콘스탄티노폴리스 공의회에 참석하고
마케도니우스(Macedonius)의 이단에 대해 성령께서도 성부, 성자와 같이 하느님이시란 것을 의결(議決)했다.
사실 치릴로는 성서 학자이자 뛰어난 설교가였다.
347년의 사순절 동안 실시한 그의 ’교리서"는 세례 준비자에게 명쾌한 교리 해설이 되었으며, 4세기의 팔레스티나 전례를 자세히 보여주는 유명한 교리서이다.
그는 386년 72세를 일기로 편안히 세상을 떠났다. 1882년, 레오 13세에 의해 교회 박사로 선언되었다.
(대구대교구홈에서)
아리우스주의(主義)
라틴어 Arianismus .영어 Arianism
그리스도의 신성을 부인한 4세기경의 이단사상.
알렉산드리아의 사제 아리우스로부터 발단하였는데
그에 의하면 신 안에 있는 세 개의 위격은 모든 면에서 대등하고 영원한 것이 아니라 오직 성부만이 그러하다.
성자는 모든 피조물들과 같이 무에서 유로 창조되었을 뿐이며, 신으로 불려질 수는 있지만
그것은 단지 피조물과 신의 중계역할을 하고 세상을 구원하도록 신에 의해 선택받았기 때문이 아니라 신의 은총과 선택에 의해 하느님의 양자가 되었으며
그가 죄를 지을 수도 있었으나 짓지 않는 것을 보시자 신은 그의 덕을 예견하고 선택하였다.
즉 그는 신이 아니라 덕을 갖춘 뛰어난 반신이며 이점에서 성부와 닮았다.
이러한 반 삼위일체주의적 아리아니즘이 강생의 신비를 단지 수사학적인 문제로 돌림으로써 그리스도교의 근본교리가 해체될 위험에 처하자,
교회는 325년 니체아 공의회를 소집, 아리아니즘을 단죄하였다.
또한 니체아 신경을 발표, 삼위가 모두 성부로부터 났으며 각기 그 자체로서 완전한 신이라는 삼위일체설을 고백하였다.
381년의 제1차 콘스탄티노플 공의회는 다시금 고개를 든 아리아니즘을 단죄하고 니체아 신경을 재확인하였다.
그러나 아리우스의 후계자들에 의해 북부 게르만 민족들에게 전파되었던 아리아니즘은 게르만족의 로마 진입과 더불어 로마제국 전역에 퍼졌다.
교회는 7세기에 이르러서야 아리아니즘을 몰아내고 정동 교리를 회복시킬 수 있었다.
[이콘] 구약성서의 삼위일체. 안드레이 루블레프.
111.76 x 140.97cm. 1411년경. 모스크바 트레챠코프미술관
전체적으로 볼때 성부의 무릎과 성령의 무릎이 마주 보고 있는데
이는 커다란 잔의 형상을 취하고 있다.
그러므로 희생의 잔을 중심으로 삼위가 둘러 있으며,
비가시적인 틀을 이루고 있는데 그틀은 하느님의 신성이 내재한 단일성을 표시하며,
천상의 만돌라(님부스,신성한 빛과 영광,하늘을 의미)를 암시한다.
성자는 잔의 한가운데에 있다.
성자는 두 손가락으로 강생을 통한 신성과, 인성을 겸비한
희생양이 되시는 당신의 사명을 암시하고 계시며,
왼쪽의 성부는 축복하시는 손짓으로 성자를 격려하고 계신다.
그 반대편의 성령은 식탁 아래의 열린 사각형을 가리키며
이 거룩한 희생은 세상을 구원하기 위한 희생임을 말씀하고 계신다.
이 사각형은 동서남북의 모든 창조된 세상을 상징하고 있으며,
하느님의 집으로 가는 좁은 길, 즉 고통의 길을 나타내고 있다.
그리고 삼위는 똑같은 권위를 지녔음을 나타내는 권위의 지팡이를 들고 계시며,
모두 천주성을 뜻하는 푸른빛의 옷을 입고 계신다.
★삼위일체는 모든 종교적 체험.모든 신학. 모든 사회적 행위의 원천이다.
우리가 존재의 충만함,
모든 현존하는 것의 목적과 그 의미를 탐구할 때 발전하게 되는 것은 바로 하느님 즉 삼위일체이다.
그자체의 충만함에서 삼위일체의 신비를 안다는 것은
하느님과의 완전한 합일에로 들어가는 것이며,피조물인 인간의 신화를 선취하는 것이다.
다른 말로 말하면 신적인 생명,삼위일체의 지고한 생명에로 참여하는 것이고,
베드로 성인의 말처럼 "신적인 본성에 참여하는자"가 되는 것이다.★
이 화면의 그림은 우리에게 가장 널리 알려진 이콘으로 러시아의 안드레이 루블레프의 1425년 작이다.
1551년 스토슬라브 교회회의에서는 삼위일체을 그릴때는 이 루블레프의 유형을 따르도록 규정하였다.
*만돌라: 그리스도의 성변화와 지옥의 정복-지옥의 영혼을 구하는 일과 같은 신적인 계시의 원천을 표현하고자 사용되는 하나의 방법이다.
*이콘.신비의 미(편저 장긍선신부)에서
*삼위일체대축일:성령강림대축일 다음주일(이동축일):
2004년6월6일.2003년6월15일
삼위일체 三位一體
라틴어 Trinitas. 영어 Trinity
삼위일체는 하나의 실체(實體) 안에 세 위격(位格)으로서 존재하는 하느님적 신비를 지칭한다.
하느님의 육화(肉化)와 은총(恩寵)과 함께 그리스도의 3대 신비를 형성하는 이 삼위일체 신비는
내재적 삼위일체(內在的 三位一體, Trinitas immanens)와 구세경륜적 삼위일체(救世徑輪的 三位一體, Trinitas oeconomica)로 구별되어 파악된다.
내재적 삼위일체는 구체적 인간 역사와의 관계를 고려치 않고 영원으로부터 내재하는 하느님의 실재를 지칭하고,
구세경륜적 삼위일체는 인간 역사 안에서 자신을 계시하는 하느님의 실재를 지칭한다.
삼위일체론은 하느님이 삼위일체임을 제시하기 위해서 성서로부터 출발한다.
성서는 개인적이거나 집단적인 계시사(啓示史) 안에서 증언되는 하느님 성부와 성자와 성령에 대해 논하고 있다.
이러한 구세경륜적 삼위일체는 내재적 삼위일체와 별개의 실재가 아니라, 바로 이 내재적 삼위일체의 계시이다.
(가톨릭대사전에서)
[이콘]신약성서의 삼위일체.그리스 이콘. 50 x 41cm. 19세기초
여기에 제시된 이콘은 독생자 그리스도가 구름 위에 앉아서 그의 오른손으로 축복을 내리고 있다.
그의 왼손은 그와 성부 사이에 떠있는 지구의 위에 얹혀 있다
그 오른편에 흰 옷을 입고 앉아 있는 성부는 그의 왼손으로 홀을 들고 계신다
그리고 중앙 상단에는 육각의 별 안에 성령의 상징인 비둘기가 보인다.
러시아의 모스크바 교회 회의에서는 서방에서 묘사하는 것 처럼 성부를 노인의 모습으로 묘사하는 것을 금했다.
따라서 화면의 것과 같은 그림은 상당히 후대에, 그리고 숱한 진통 끝에 나타나기 시작했다.
*이콘.신비의 미(편저 장긍선신부)에서
양심
“그 일을 하면 한다고 비판받을 것이고, 안 하면 또 안 한다고 비판받을 것이다.”
성 치릴로에게 딱 맞는 표현이다.
예루살렘의 주교였던 그는 교리에 관한 뜨거운 논쟁에 휘말렸을 뿐만 아니라, 교회의 재산을 팔아서 가난한 사람을 구제했다는 것 때문에 비난받았다.
그는 교회 물건을 내다 판 사실을 부인하지 않았다.
다른 성인들도 가난한 사람들을 돕기 위하여 어쩔 수 없이 교회의 재산을 내다 팔았던 것이다.
치릴로는 가난한 이들을 도와야 할 의무와 교회의 재산을 관리해야 하는 책임 사이에서 갈등을 겪을 수밖에 없었다.
그는 양심을 따라 행동했지만 비난을 면할 수는 없었다. 그러나 그가 어떤 선택을 하든 비판하는 사람이 있었을 것이다.
성 치릴로를 포함한 많은 성인들은 우리가 양심에 따라 살 때 다른 사람의 반발과 비난에 부딪힐 수 있음을 보여 준다.
아무도 모든 상황마다 이것은 이렇게 하고 저것은 저렇게 하라고 말해 줄 수 없다.
그러나 지켜야 할 원칙은 있다. 그것은 “의심스러울 때는 잘못하더라도 사람의 편에 서는 것이 낫다.”라는 것이다.
우리가 바른 양심에 따라 행동할 때, 성인들은 기꺼이 우리의 갈등을 이해하고 기도와 격려로 도와 줄 것임을 확신하자.
나는 군중을 따르는가? 아니면, 나의 양심을 따르는가? 양심에 따라 소신껏 살겠다.
(까리따스수녀회홈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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