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unette and Popes-MICHELANGELO di Lodovico Buonarroti Simoni
1475-83, 1508-12. Fresco. Cappella Sistina, Vatican
축일:3월28일
성 식스토 3세 교황
ST. Pope SIXTUS III
San Sisto III Papa
Born:at Rome, Italy
Papal Ascension 31 July 432
Died:18 August 440 of natural causes
Canonized:Pre-Congregation
44th pope (Papa dal 31/07/432 al 19/08/440)
Sisto = variante di Sesto=varying of Sixth
에페소공의회의 결과를 찬성하였으며
아프리카에서 뺄라 기우스가 주창한 이단설(Pelagianism)를 부정했고
사람이 자신의 능력으로 구원을 받을 수 있다는 이단에 맞서 싸웠다.
로마의 수많은 대성전을 건립한 교황이시기도 하다.
(성바오로딸수도회홈에서)
에페소공의회 (公議會)
라틴어 Concilium Ephesinum
영어 Council of Ephesus
Council of Ephesus(431년) 네스토리우스파와의 논쟁을 해결하기 위해
테오도시우스 2세에 의해 소집된 제3차 공의회.
네스토리우스에 동조하는 안티오키아의 요한이 인솔하는 시리아의 주교들과
교황 성 첼레스티노 1세의 대표들이 참석하기로 되어 있었으나
에페소의 주교 멤논의 지지를 받는, 네스토리우스의 주된 적수 인 알렉산드리아의 치릴로는
그들이 도착하는 것을 기다리지 않은채 회의를 개막하여 버렸다.
거기서 네스토리우스는 그의 교구 콘스탄티노플에서 해임되었으며 그 자신은 파문당하였고
그의 교리는 단죄되었다.
또한 니체아 신경이 재확인되었다.
도착 하여 그사실을 들은 시리아의 주교들은 치릴로의 처사에 항의하는 테오도레트 및 다수와 규합하여
그들에 대항하는 회의를 열고 거기서 치릴로와 멤논을 파문하였다.
에페소 공의회는 8개의 교회법을 제정하였는데, 첫 7개는 교리적 의문점들로부터 야기된 문제들을 다루었고, 나머지 하나는 치프로스의 행정적 권리를 다루었다.
433년 요한과 치릴로는 마침내 화해하였다.
(가톨릭대사전에서)
*알렉산드리아의 성 치릴로 주교 학자 축일:6월27일
신학과 교회 역사에서 치릴로의 중요한 점은 네스토리우스의 이단(Nestorianism)을 거슬러
정통 교리를 옹화하기 위해 투쟁한 데 있다.
네스토리우스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두 가지 본성에 중점을 두었다.
그 중 하나는 마리아가 ’하느님을 잉태한 자’라는 말에 동의하지 않는 것이다.
그는 신성과 인성이 피상적으로만 결합된 그리스도 안에는 별개의 위격이 둘이 있다면서
’하느님을 잉태한 자’란 말보다는 ’그리스도를 잉태한 자’라는 말을 주장하였다.
그는 마리아가 하느님의 어머니가 아니라 그저 인간 그리스도의 어머니일 뿐이며
그리스도의 인간성은 하느님께서 머무시는 신전 일 뿐이라고 했다.
네스토리아니즘은 그리스도의 인간성이 단순한 가면이라는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에페소 공의회(431년)에서 교황을 대리하여 회의를 주재한 치릴로는 네스토리아니즘을 단죄하고
마리아가 참으로 ’하느님을 잉태한 자’-참으로 하느님이고 참으로 인간이신 한 위격의 어머니-임을 선포했다.
그러자 혼란이 생기게 되었고 이로 인해 치릴로는 파면되어 세 달 동안 감옥에 갇혀 있었으나
나중에는 제2의 아타나시오-아리아니즘을 반박한 투사-로 환영을 받으며 알렉산드리아로 돌아오게 되었다.
치릴로의 논지는 이러하다.
"하느님 아버지와 인간의 본체이신 그리스도만이 우리를 구원하실 수 있다.
하느님과 인간이 만나는 자리는 그리스도의 몸이기 때문이다.
이것이 하느님 자신의 몸이어야만 인간이 그리스도의 인간성을 통하여
그리스도의 신성에 접촉할 수 있는 것이다.
육이 되신 말씀과 우리의 혈연 때문에 우리는 하느님의 자녀가 된다.
성체 성사는 말씀과 우리의 혈연을 완성시키며 하느님 아버지와 우리를 일치시키고 상통하게 하며
하느님의 본성에 우리를 참여시키는 것이다.
바로 여기에 우리의 몸과 말씀의 몸이 갖는 참되고 실제적인 접촉이 있는 것이다."(New Catholic Encylopedia)
(성바오로수도회홈에서)
[교황의 명칭]
오늘날 교황을 뜻하는 ’파파(papa)’란 호칭은 라틴어에서 유래한 것으로 그 본뜻은 ’아버지’이다.
이 호칭이 로마주교 즉 교황에게 국한되기 시작한 것은 5세기 중엽부터이고,
그 전에는 일반주교들과 대수도원의 원장들도 이 호칭으로 불렸다.
그러나 11세기부터는 완전히 교황에게 국한된 호칭이 되었다.
교황의 호칭중에도 이 밖에도 ’성부(聖父) ’성하(聖下)’등이 있다.
그러나 이러한 호칭들은 아직 교회 안에서의 교황의 위치나 교회밖에서의 교황의 정치적 지위를 나타내지는 못한다.
그러므로 그런 명칭은 다른 명칭에서 찾아야 한다.
1983년 ’교황청 연감’에 보면 현 교황 요한 바오로 2세 밑에 무려 9개의 명칭이 나열되어 있다.
즉 로마주교, 예수 그리스도의 대리자, 으뜸 사도의 후계자, 전교회의 대사제, 서구의 총대주교,
이탈리아의 수석주교, 로마 관구의 수석 대주교,
바티칸 시국의 원수, 하느님의 종 중의 종 등인데 이 중에서 그리스도의 대리자를 제일 큰 활자로,
로마 주교를 다음으로 큰 활자로 표시함으로써
기타 명칭들에 비해 이 두 명칭이 가장 중요함을 나타내고 있다.
이상 9개의 명칭 중에서 ’바티칸 시국의 원수’는 가장 늦게 생긴 것이고,
또 유일하게 교황의 정치적 지위를 나타내는 명칭이다.
이 명칭은 1929년 교황청과 이탈리아 국가와의 정교조약을 통해 바티칸 국가가 창설됨으로써 비로소 교황에게 주어지게 되었다.
’바티칸 시국의 원수’란 명칭을 제외하면 다른 모든 명칭은 교회 개념과 관련되는 것들이다.
교회제도면에서 교황은 첫째로 로마주교이고 동시에 유럽교회의 총대주교, 이탈리아의 수석주교, 로마관구의 수석 대주교이다.
제도면에서 볼 때 교황은 다른 주교들과 마찬가지로 단순한 주교에 불과하고, 비록 로마주교일지라도 로마 교구를 책임진 주교에 불과하다.
그러나 최초의 로마주교가 베드로 사도였다는 점에서 로마주교의 위치는 전혀 다른 의미와 위치를 차지하게 되었다.
즉 로마주교는 다른 아닌 베드로의 후계자이기 때문이다.
이 로마주교의 후계자, 즉 베드로의 후계자란 명칭에서 미구에 가장 중요한 명칭이 파생하게 되었으니,
그것이 곧 ’그리스도의 대리자’란 명칭이다.
이 명칭은 교황 인노첸시오 3세(1198-1216)에서 비롯되었는데,
그는 그때까지 교황에게 적용되어온 ’성베드로의 대리자’란 명칭을 ’그리스도의 대리자’란 명칭으로 바꾸어 놓았다.
이로써 교황은 베드로와 같이 그리스도의 대리역을 맡은 사람이 되었고, 베드로처럼 그리스도에 대한 직접적인 중재자 구실을 하게 되었다.
’하느님의 종중의 종’이란 명칭은 교황 그레고리오 1세(190-605)때부터 사용되어온 것으로,
교황 자신에 대한 겸칭(謙稱)에 불과하고 다른 뜻을 별로 없다.
교황직의 근본적이고 유일한 특성은 그 신적 기원, 다시 말해서 그리스도가 직접 이 직책을 베드로와 그 후계자들에게 위임했다는 사실에 있다.
그리스도는 "너는 베드로이다.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울터인 즉 죽음의 힘도 감히 그것을 누르지 못할 것이다.
또 나는 너에게 하늘나라의 열쇠를 주겠다.
네가 무엇이든지 땅에서 매면 하늘에서도 매여 있을 것이며, 땅에서 풀면 하늘에서도 풀려 있을 것이다"
(마태16;18-19)고 하며 교회에 대한 최초의 사목직책을 베드로와 그 후계자에게 위촉했던 것이다.
이 성경구절은 간략한 것이지만 교황직의 신적 기원에 대한 결정적이고 중심적인 증명이 되었다.
그러나 그후 교황직의 신적기원에 대한 반대가 교회 내외에서 끊이지 않았고,
그래서 교황직은 그의 수위권에 대해 교회 내외로부터 계속 도전을 받아야 했다.
교회 밖에서는 일찍부터 이 성경구절이 마태오 복음 외에 다른 복음에는 없고,
따라서 후기에 삽입된 것이라고 하며, 교황직의 신적기원을 반대하는 사람이 나타났다.
교회 내외서도 이 성경구절을 베드로에서만 국한시키려 하지 않는 사람이 나타났다.
한 유명한 교우는 그 구절을 베드로에게 국한시키지 않고 베드로를 통해 모든 사도들을 포함한 것으로 해석하려 했다.
그러므로 베드로는 ’동등자 중의 첫째(Primus inter pares)’ 불과하다는 것이다.
이런 주장이 곧 ’주교 지상주의(Episcpoalism)’로 불리는 것이다.
이것은 주교들이 그들의 교구에 대해 교황의 지나친 간섭을 의식한 데서 발생한 것으로,
로마의 중앙집권에 대한 주교직의 자립을 의미한다.
이런 주장은 교황직이 위기를 맞을 때마다 나타났고, 비단 교황의 수위권을 반대하는 사람들에게서 뿐만 아니라,
그것을 지지하는 사람들에게서도 나타났다는 점에서 문제와 심각한 일면을 드러내고 있다.
그러나 교황직은 그때마다 자신의 수위권을 강력히 주장하였다.
특히 레오 1세 교황은 이미 5세기 중엽에 그것을 이론화였고,
그것은 마침내 1870년 제1차 바티칸 공의회에서 신조로 발표되기에 이르렀다.
그후 제2차 바티칸 공의회는 주교들에게 보다 큰 권한을 부여하였다.
교황의 수위권은 주교 지상주의자들로부터보다, 공의회 지상주의자들로부터 더욱 강한 도전을 받게 되었다.
이들은 교황을 공의회에 예속시킬뿐더러 경우에 따라서는 공의회가 교황을 폐위시킬 권한까지 갖는다고 주장하였다.
불행히도 이런 주장은 콘스탄츠 공의회(1414-1418)에서 교황을 폐위시키고 새 교황을 선출함으로써 한때 크게 득세하였으나,
점차 쇠퇴하여 1870년 제1차 바티칸 공의회까지에는 자취를 감추게 되었다.
1917년의 교회법은 물론이요, 최근에 반포된 교회법에서도 교황은 공의회의 주장임을 명문화하였다.
즉 교황만이 공의회를 소집하고 폐회할 수 있고, 교황만이 직접 또는 사절을 통해 공의회를 주재하고 의제도 결정한다.
무엇보다도 공의회의 결의는 모두 교황의 인준을 받아야 하고, 교황의 이름으로 공포될 때 비로소 법적 효력을 갖게 된다고 명문화하였다.
그러므로 교황직은 전교회의 모임인 공의회를 통솔할 수 있는 권한까지도 겸한 최고의 주교직이다.
우리는 역사 안에서 교황들 다시 말해서 세계사와의 관계에서 교황의 역사를 일별하였다.
교황들 중에는 훌륭한 교황도 많았으나, 기대에 어긋난, 좋지 못한 교황도 적지 않았다.
하느님과 인간이 함께 전개하는 교회의 역사가 하느님의 위촉과 인간의 허약 사이의 긴장과 모순에도 불구하고 인류의 종말 완성을 향해 전진하고 있듯이
교황사에 있어서도 하느님의 은총과 인간의 나약 사이에서 긴장과 충돌이 끊이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교회를 세우고,
그것을 지속시킬 사명을 인간에게 위촉한 분이 바로 그리스도 주님이기 때문에 교회는 교황의 지도하에 존속할 수 있었다.
인간적인 배반은 이미 베드로 사도에게서 시작된 것이지만, 그후 많은 교황들의 배신은 또한 남은 뛰어난 교황들의 성성에 의해 극복될 수 있었다.
그러므로 교황의 역사는 베드로로부터 요한 바오로 2세에 이르는 2천년간 여러번 위기를 극복하면서 오늘에 이르고 있다는 가장 객관적이고 가장 정확한 증명이다.
(성바오로수도회홈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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