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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인, 성녀 축일 기념일등

+++ 성녀 젬마 갈가니 동정 / 성 스타슬라오 주교 순교자 기념일 +++

 

축일:4월11일

성녀 젬마 갈가니 동정

St. Gemma Galgani

Santa Gemma Galgani Vergine

Born:12 March 1878 at Borgo Nuovo di Camigliano, Lucca, Tuscany, Italy

Died:11 April 1903 (Holy Saturday) of tuberculosis

Beatified:1933 by Pope Pius XI

Canonized:2 May 1940 by Pope Pius XII

Gemma=dal nome generico delle pietre preziose=from the generic name of precious stones

 

 

 

젬마란 라틴어로 ’보석’이라는 뜻이다.

투스카니의 카미글리아노에서 태어난 그녀의 집안은 매우 가난하였다.

그녀는 19세 때에 루가의 어느 집안 가정부로 들어갔으나, 고난회 수녀되기를 늘 희망하였다.

그러나 척추 결핵으로 인하여 뜻을 이루지 못하였는데,

후일 그녀는 성 가브리엘 뽀센띠의 전구로 치유되었다고 굳게 믿었다고 한다.

 

젬마 갈가니는 수많은 영적 체험을 하기 시작하였는데,

1899년부터 그리스도의 환시, 악마의 습격, 오상 등등 그녀의 짧은 생애에 무수한 초자연적 현상이 일어났다.

이 모든 사실은 그녀의 고해신부이던 제르마노에 의하여 자세하게 조사되었다

 

특히 그녀의 오상 성흔은 손과 발에서 뚜렷하게 보였다. 또 그녀는 자주 탈혼과 환시를 보았다.

이러한 탈혼과 환시에서 나눈 대화들이 기록되어 있다.

1903년 4월 11일에 운명하자 그녀를 공경하는 운동이 대중화 되었고, 1940년에 시성되었다.

(성바오로수도회홈에서)

 

 

 

Her Patron Saint Gabriel of the Sorrowful Mother

 

*성 가브리엘 뽀센띠(통고의 모후의 가브리엘 수사)축일:2월27일

*고통의 성모 마리아 기념일:9월15일

*십자가의 성바오로 사제(예수고난회창설자)축일:10월19일

 

*아시시의 성프란치스코 축일:10월4일.게시판1403번.오상축일:9월17일

*오상의 성 비오 사제(피에트렐치나의 성 비오)축일:9월23일

 

 

 

 

St. Gemma Galgani. photo.

 

젬마 성녀는 인내하는 생활을 통하여 죄악을 극복할 수 있음을 실천으로 가르치며 살아간 분이다.

l878년 3월 2l일 이탈리아 가밀리아노에서 2남 3녀의 넷째로 태어난 그녀는 인근 루카 시에서 일생을 보냈다.

 

늘 평화스럽고 명랑한 얼굴을 한 그녀는 책망하는 이가 있어도 항상 밝은 표정을 잃지 않았다.

평생 얼굴을 다듬거나 몸을 가꾸는 일이 없었고 옷도 지극히 검소한 검은 무명옷 밖에는 입지 않았다.

하지만 그 천사 같은 용모와 우아한 행동은 보는 사람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세 살때 학교에 다닐 정도로 총명했던 그녀는

여덟 살 때 견진 성사를 받고 당시 8-9 세의 아이들에게는 허락되지 않았던 영성체를 모실 수 있게 되었다.

그녀는 본당 신부의 허락을 받기 위해 열흘 동안의 피정 기간을 갖고 영성체를 준비하였다.

당시 영적 지도신부에게 보낸 편지를 보면 이렇게 고백하고 있다.

 

"처음으로 성체를 영한 그날, ’누구든지 나를 먹는 자는 내 생명으로 살리라’ 하신 주의 말씀을

더욱 잘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 후 그녀는 죽는 날까지 부득이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매일 영성체를 했다.

 

 

 

St. Gemma age7

 

한편 그녀의 가정 형편은 갈수록 어려워졌고, 가족들도 하나 둘씩 하느님 곁으로 떠나갔다.

여덟 살 때 어머니의 죽음, 그리고 열 여섯 살 때는 폐병으로 시달리던 오빠의 죽음을 감당해야 했다.

열 아홉 살 때 어린 동생들과 함께 생활할 양식이 부족하여 가족이 떨어져 살게 되었는데,

젬마는 고모 집에서 생활하게 되었다.

온전히 주님께 자신을 맡기기로 한 그녀는 어느 날 고모가 데려온 점잖은 청년의 청혼을 받았으나

거절하고 다시는 그와 같은 일을 당하지 않기 위해 고모 집을 떠나 집으로 돌아왔다.

 

부족한 양식으로 인해 거의 굶다시피 생활하던 젬마는 어느 날 등줄기가 굽어오는 뇌척수막염이라는 병에

걸려서 점점 척수가 굽어지고 귀는 어두워졌으며, 머리는 군데군데 부어올라 곪기 시작하였다.

중증의 척수염이란 진단과 함께 죽음을 준비해야만 했던 그녀는 l899년 2월 2일 병자 성사를 받았다.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젬마를 불러가지 않으시고 당신의 큰 영광으로 그 영혼을 구해내시고자 가브리엘 천사를 보내셨다.

 

 

 

volto santo (holy face)

Cathedral of St. Martin.Lucca’s greatest treasures

 

그녀는 그 때의 일을 이렇게 고백하고 있다.

"어느날 가브리엘 천사가 찾아와 ’네가 낫기를 원하느냐? 그렇다면 매일 예수 성심께 기도하여라.

9일 기도가 끝날 때까지 나도 매일 와서 너와 함께 기도하겠다’고 말했습니다.

9일 기도가 끝날 무렵에는 주님께서 나타나셔서 ’젬마야, 진정 네가 낫기를 원하느냐?’ 고 물으셨지만

저는 무서워서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속으로 ’주여, 당신 뜻대로 이루어지소서’ 하였습니다.

그런 후 곧 병이 나았습니다."

 

그녀는 항상 십자가에 못박히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가시관과 십자가로만

자신의 몸을 꾸미심을 생각하고 검소한 생활을 지켜나갔다.

가진 것이라고는 홑이불과 수건 몇 장, 십자고상, 묵주기도서를 넣어둔 조그만 상자 밖에는 아무 것도 없었다.

 

그녀는 이미 태어날 날부터 주님의 은혜를 예고한 사람이었다.

이와 같은 확신은 탈혼 중에 오상을 체험하면서 서서히 나타나기 시작했다.

탈혼이란 사람의 영혼이 하늘의 힘에 끌려서

 온전히 영혼의 일상적 기능과 육신의 움직임이 멈추는 상태를 말한다.

그녀는 탈혼 상태에 이르기 몇 분전부터 느낌이 왔으며,

그의 마음과 영혼의 모든 기능이 온전히 하느님께 닿아, 육체의 모든 움직임을 잃어버리곤 했다.

그녀와 함께 살았던 지아니니 부인은 그것을 일일이 기록하였는데

모두 151 회의 탈혼상태 기록이 아직까지 남아 있다.

 

그녀가 탈혼 중에 주님과 더불어 가장 많이 나눈 대화는 주의 고난에 대한 것이었다.

고통 받으셨던 비수의 아픔을 함께 하고자 여러 날을 기도한 끝에 `거룩한 오상’을 받게 되었다.

l899년 5월8일 젬마는 이렇게 설명한다.

"갑자기 온몸에 피가 흐르다가 멈추더니 불꽃이 활활 타올랐습니다.

그 불꽃이 별안간 제 손과 발과 심장을 뚫고 들어 왔습니다.

너무 아파서 살펴보니, 손과 발과 심장에서 피가 흘러내리고 있었습니다"

그후 그녀의 상처는 차츰 아물기 시작하더니

매주 목요일 오전 8시쯤에 다시 나타나서 다음 날 오후 3 시까지 계속되었다고 한다.

 

 

 

이같은 성스러운 생활과 체험이 부근에 퍼져 나갔다.

예수 고난회의 젤마노 신부가 루가시에 내려와 이 사실을 눈으로 확인하였다.

젤마노 신부는 그녀의 고해신부가 되어 탈혼상태에서 주님과 대화했던 내용을 함께 의논하였다.

 

자신을 온전히 바치기 위해 예수 고난회에 입회하기로 마음먹은 그녀는

입회 허락이 떨어지기 전 장옹병이라는 불치의 병에 걸리게 되었다.

아랫배가 붓고 열과 오한이 나며, 피고름이 나는 장옹병은 그녀의 몸을 일순간에 죽음으로 몰고 갔다.

 

1903년 4월 11일 25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난 젬마 성녀의 시복을 위한 절차는

임종 4년 후인 l907년부터 시작되었고 l933년 5월 l4일 교황 비오 11 세에 의해 시복되었다.

그 후 l940년 5월 2일 예수 승천 대축일에 로마 성 베드로 성당에서 시성식이 거행되었는데,

l300여 명의 루가시 신자 순례단을 비롯한 수만 명의 신자들이 참석하여 감격의 눈물을 흘렸다.

 

젬마 갈가니 성녀의 일생은 한마디로 예수 그리스도의 삶을 느끼며 그 삶을 사랑의 힘으로 극복한 삶이었다.

젬마란 보석이란 뜻이다, 젬마 성녀가 짧은 삶 속에서도 찬란히 빛날 수 있었던 것은

보석을 어둠 속에 두지 않으신 하느님의 뜻이었다.

 

 

 

젬마라고 불리는 성스러운 부인이 두 분 계시다.두 분 다 이탈리아 인이지만,

한 분은 처음에는 양을 지키는 목동으로 있었으나 후에 은수 생활을 하다가 1

249년 5월 12일 승천한 그르모나의 성녀이고,

또 한 분은 젬마 갈가니로서 1933년 5월 15일 비오 11세 교황에 의해 복녀위에 오르고,

1940년 5월 2일 교황 비오 12세에게 성인품에 오른 20세기의 새성녀이다.

 

이 젬마 갈가니는 1978년 3월 18일 이탈리아의 카미글리아노에서 태어나

거의 모든 생애를 인근에 있는 루가 시에서 보냈다.

아버지는 매우 바쁜 약제사로서 자녀의 교육을 돌볼 짬도 없었으므로

어린 젬마는 허약해 늘 병상에 누워있던 어머니의 밑에서 여러 가지 일을 배우지 않으면 안 되었다.

그 당시의 젬마에게 있어서 가장 즐거웠던 것은 앓고 계신 어머니에게 배워가며

함께 하느님의 기도를 바치는 것이었다고 한다.

 

어머니가 돌아가신 뒤 그녀는 수녀들이 경영하는 학교에 들어가서 일반적인 학문이나 종교 교육을 받았지만,

그녀가 얼마나 탁월하고 경건한 덕을 지니고 있었던가는 당시 어린아이에게는 허락되지 않았던 영성체를

겨우 9세로서 모시게 되었다는 사실을 보더라도 알 수 있을 것이다.

 

 

 

Sacred Image of Our Lady at the Giannini Home.

 

젬마가 16세가 되었을 때 그녀의 일신상에는 커다란 변동이 일어났다.

그것은 오빠 지오가 죽고 또 이어서 아버지가 실직하면서 곧 세상을 떠났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젬마는 어려서부터 집안 살림을 도맡아보고 있었으나 자신도 후에 허리에 병이 생겨 앓아 누워

신체의 자유를 잃고, 1년간이나 병석에 눕게 되었다. 그간 가끔 수술도 받았다.

 

그때마다 그녀는 진통제를 거절하고 예수의 수난을 묵상하며 모든 고통을 성부께 바쳤다고 한다.

원래 난치병이었으므로 갖은 치료로도 차도를 못 보았지만 독실한 젬마는 당시엔 복자였지만

지금은 성인 품에 오른 가브리엘 포센티와 마르가리타 마리아 알라코크의 전구를 구하며

열심히 기도해 기이하게도 완전히 병이 낫게 되었다.

간신히 병고에서 일어난 젬마는 주 예수의 고난을 묵상하고는 형언키 어려운 동정을 느끼게 되어

주님을 위로해 드리기 위해 매일 영성체를 하고 또한 남몰래 나날의 책임을 완수하려고 노력했다.

 

그 뒤 그녀는 수도원에 들어가기를 열렬히 원했지만,

중병을 치르고 난 뒤였으므로 건강이 몹시 좋지 않아 즉시 입회할 수 없게 되어

자니니 가족의 양녀로 들어갔다.

그러나 이름만 양녀이지 실제로는 무보수의 여종과 같이 일을 하게 되었다.

 

 

 

Miraculous Crucifix-In the dining room of the Giannini home

 

그러던 중 1899년을 맞이하자 그 해의 성주간에

젬마가 성체 대전에서 기도를 하고 있으니까 주님께서 피를 흥건히 흘리시는 모습으로 그녀에게 발현하셨다.

또 예수 성심 축일에는 성모 마리아께서 발현하시어 통회의 기도문을 외우라고 명하시므로 그대로 하니까

젬마는 갑자기 탈혼 상태에 빠져 오상이 뚜렸한 예수을 뵈었지만,

곧 자신의 몸에서도 피가 흘러내리는 것을 느끼고 주님과 동일한 오상을 받았다.

 

그 후 그녀는 고해 신부의 명령에 의해 하느님께 그 오상이 없어지게 해 주시도록 간청했더니,

그녀의 기도는 즉시 허락되었지만 다만 아픔만은 언제든지 남아있었다고 한다.

하느님께서는 이와 같은 오상을 주심으로써 그녀가 예수를 따르는 영혼이란 것을 증명해 주셨던 것이다.

 

 

 

St. Gemma Galgani’s Tomb.

 

더욱 젬마는 자신의 수호 천사를 눈으로 보며 그의 기도를 받은 적도 종종 있었다.

그리고 그녀는 가련한 죄인의 회개를 위해 기도했고, 가끔 특정한 죄인을 지목하고

기도와 고행을 바치며 또한 그의 영혼 구원을 위해 악마와 싸우며 커다란 성과를 올렸다.

 

이와 같은 성스러운 생활이 언제까지나 세상에 알려지지 않을 수가 없었다.

어느것 그녀에 대한 소문은 그 부근에 퍼져 나갔다.

겸손한 그녀는 그것을 귀찮게 생각하고 될 수만 있으면 수도원에 들어가서 몸을 숨기려고

재차 입회할 것을 간청했다.

그러나 아직 그 회답을 받기 전에 그녀는 장염병에 걸려 1903년 4월 11일 25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대구대교구홈에서)

 

 

 

 

St. Gemma. clothing. hat


 

 

축일:4월 11일

성 스타니슬라오 주교 순교자

St. STANISLAUS of Cracow

Saint Stanislaus, Bishop and Martyr

Santo Stanislao Vescovo e martire

Born :1030 as Stanislaus Szczepanowsky at Cracow, Poland

Died :murdered in 1079

Canonized :1253.Innocenzo IV.

Stanislao=la gloria dello stato, dal polacco=the Gloria of the state, from the Pole

 

 

 

1036년 폴란드의 슈체파누프에서 태어났고 파리에서 공부했다.

사제가 되어 1072년 람베르트 주교에 이어 크라쿠프의 주교가 되었다.

착한 목자로서 자기 교구를 다스렸고 가난한 이들을 도와주었으며 매년 자기 교구의 사제들을 방문 했다.

두려움 없이 볼레슬라프왕을 힐책하다가, 1079년 왕에 의해 암살당했다.

 

 

 

성 치쁘리아노 주교 순교자의 편지에서

(Ep. 58, 8-9.11: CSEL 3,663-666)

 

믿음의 투쟁

 

우리가 믿음의 투쟁을 하고 있는 동안 하느님께서 지켜 보시고

천사들도 지켜 보며 그리스도께서도 지켜 보십니다.

하느님께서는 보시는 데에서 투쟁하고 심판자이신 그리스도에게서

승리의 월계관을 받는 것은 얼마나 큰 영예이며 기쁨이겠습니까!

사랑하는 형제들이여,

온갖 힘의 방패를 두르고 순수한 정신과 완전한 믿음과 넘치는 열성으로 투쟁에 대비합시다.

하느님의 군대가 우리가 나아가는 전쟁터로 나아가기를!

 

복된 사도 바울로는 우리에게 대비하고 무장을 갖추라고 가르칩니다.

"여러분은 진리로 허리를 동이고 정의로 가슴에 무장을 하고 발에는 평화의 복음을 갖추어 신고

손에는 믿음의 방패를 잡고 있어야 합니다.

그 방패로 여러분은 악마가 쏘는 불 화살을 막아 꺼버릴 수 있을 것입니다.

구원의 투구를 받아 쓰고 성령의 칼을 받아 쥐십시오. 성령의 칼은 하느님의 말씀입니다."

이 무기들을 잡고 이 영적이고 천상적인 보호로써 우리 자신을 견고히 합시다.

그러면 악한 날이 올 때 악마의 위협에 저항하여 그를 격퇴시킬 수 있을 것입니다.

 

정의로 가슴을 무장합시다. 그러면 우리 마음은 견고하게 되어 원수의 공격을 막아낼 것입니다.

우리의 발에는 복음에 대한 열성을 갖추어 무장합시다.

그러면 우리가 사탄의 머리를 짓밟고 부수기 시작할 때 사탄은 우리를 물어 쓰러뜨리지 못할 것입니다.

용감하게 믿음의 방패를 두릅시다. 그러면 그것을 방패로 삼아 원수의 모든 공격을 피할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 머리를 감싸 줄 영적 투구를 받아 씁시다. 그러면 우리 귀가 영혼을 살해하는 말을 듣지 않을 것이며,

눈은 더러운 공상들을 보지 않게 될 것이고, 이마는 보호되어 하느님의 표지가 보존될 것이요,

입은 보호되어 그 입술은 승리할 때 그리스도를 주님으로 고백하게 될 것입니다.

 

또 우리의 오른팔로 영적인 칼을 잡아 무장합시다.

그러면 헛된 제사를 용감히 거절할 것이며 주님의 몸을 영하는 감사제를 기억하여 그분을 포옹하고

훗날 주님으로부터 천상 월계관의 상급을 받을 것입니다.

사랑하는 형제 여러분, 이것을 마음에 간직하기 바랍니다.

이것을 새기며 묵상하고 있는 우리에게 박해의 날이 밀어닥치더라도,

그리스도의 분부와 권고로써 잘 훈련된 그리스도의 군사는

투쟁에서 물러서지 않고 승리의 월계관을 받을 준비가 되어 있을 것입니다.

(가톨릭홈에서)

 

 

 

교회는 어떤 시대를 막론하고 복음의 메시지를 왜곡없이 선포해야 한다.

이것은 크라코비아의 대주교였던 폴랜드인 스타니슬라오가

세례자 요한이 처해졌던 것과 똑같은 상황에서 영웅적으로 보여준 것이기도 하다.

제파노프스키에서 태어나 파리에서 공부한 그는 주교가 되자 그의 교구를 조직하였다.

그는 주교직을 수행하는데 있어서 특히 가난한 사람들과 사제들에게 큰 관심을 보여

매년 최소한 한번씩은 그들을 방문하였다.

 

그는 타락한 생활로 좋지 않은 예를 보여주던 폴랜드 왕 볼레슬라오 2세를 파문하기를 주저하지 않았으며,

이에 대해 왕은 그에게 반역죄를 씌워 1079년 4월 11일 미사를 거행하고 있던 그를 살해하고 말았다.

인노첸시오 4세 교황은 1253년 아시시에서 그를 순교성인들의 반열에 올렸다.

폴랜드의 주보성인인 이 분의 축일을 지내면서,

전세계의 모든 신자들은 이 나라의 신자들이 보여준 수많은 증거를 기리며,

세계의 모든 신자들이 꿋꿋하게 그들의 신앙을 지켜나갈 수 있도록 기도해야 할 것이다.

하느님은 어느 시대를 막론하고 교회를 이끌어 나갈 목자를 보내시어,

자신의 몸과 피를 바친 그리스도를 본 받아,

늑대 앞에서 뒷걸음질 치는 것이 아니라 양떼를 위하여 목숨을 바치도록 해주셨다.

(성바오로딸수도회홈에서)

 

 

 

스타니슬라오는 ’국가와 영광(榮光)’이란 뜻이다.

동부 유럽의 역사를 읽는 사람은 누구나 폴란드의 수호 성인이며

비극적인 크라코프의 주교인 스타니슬라오라는 이름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그는 성토마스 모어와 성토마스 베케트와 함께 불의한 정부의 죄악에 강경하게 맞선 인물로 기억되고 있다.

 

1030년 7월 26일 크라크프 근처 슈체파노우에서 태어난 그는 당시 폴란드의 수도인

그니에즈노의 주교좌 성당의 부속 신학교와 파리에서 공부한 뒤에 사제로 서품되었다.

그는 크라코프 주교의 수석부제와 설교자로 임명되었으며

그곳에서 그의 놀라운 웅변과 표양으로 성직자와 수도자 등 많은 사람들이 진정으로 회개하게 되었다.

그는 1072년에 크라코프의 주교가 되었다.

키에프 대공국에 대한 원정중에 스타니슬라오는 폴란드의 정치적 상황에 휩쓸리게 되었다.

뛰어난 언변으로 유명한 그는 왕과 농민들의 죄악 특히 왕인 불레슬라우스 2세의

부도덕한 행동과 불의한 전쟁에 대적하기도 하였다.

왕은 처음에 스스로 사과하고 참회의 모습을 보였으나 나중에는 다시 과거와 같은 행동을 하였다.

스타니슬라오는 반역죄로 몰려 사형이라는 위협을 받으면서도

그들에 대한 공개적인 반대를 계속했으며 결국은 왕을 파문시켰다.

왕은 분노하여 스타니슬라오를 죽이라고 군인들에게 명령하였으나 군인들이 이에 불복하자

자신이 직접 그를 살해했다.

헝가리로 도망가야 했던 불레슬라우스 2세는

아마도 헝가리의 오시아크에 있는 성베네딕토 수도원에서 참회하며 남은 일생을 보내던 것 같다.

그는 1253년에 교황 인노첸시우스 4세로부터 시성되었다.

 

 

 

요한 세례자 , 토마스 베케트, 토마스 모어, 스타니슬라오는

높은 지위에 있는 사람들의 부패를 감히 고발한 몇 안되는 예언자들이다.

그들은 당시의 종교 지도자들의 윤리적 타락상을 지적한 예수님 자신의 발자취를 따른 것이다.

"죄없는 자가 먼저 돌을 던져라."이것은 정말 위험한 일인 것이다.

 

"인간은 다른 사람들을 지배하고 명령하고 통제하기 위한  목적에서 자신의 권리를 바라고 있으며,

자기 자신은 아무런 명령이나 통제 없이 살고자 한다."(성토마스 모어,’안락한 대화’)

(성바오로수도회홈에서)

 

*성 토마스 모어 순교자 축일: 6월22일

*성 요한 세례자 탄생 대축일: 6월24일

*성 요한 세례자 수난 기념일: 8월29일

*켄터베리의 성 토마스 베케트 주교 순교자 축일:12월29일

***성 스타니슬라오 코스트카 축일:11월13일**

 

 

 

 

 

 

폴란드의 서남부에 있는 크라코우 시의 주교좌는 옛날부터 특히 유명한데,

그것은 주로 그 좌에 있었던 성 스타니슬라오가 탄복할만한 덕행의 길을 걸었고,

또한 훌륭한 순교의 팔마를 얻었기 때문이다.

 

그의 양친은 크라코우 시에서도 상당한 재산가로서 아무 부족된 것이 없는 부유한 가정이었으나.

다만 애석한 일은 결혼 후 30년이 지나도록 자녀가 없었던 점이다.

그러나 그들은 조금도 낙담하지 않고 더욱 더 열심한 기도를 계속한 결과 마침내

1030년 7월 26일 원하고 바라던 옥과 같은 한 남아를 낳게 되었다.

이 아이가 바로 후에 성인품에 오른 스타니슬라오이다. 부모의 기쁨은 이루 말할 수가 없었다.

감사의 마음으로 충만된 그들은 사례하는 뜻으로 아들을 장차 성직자로서 하느님께 봉헌할 것을 결심하고,

금이야 옥이야 하면서 기르고 학문도 그 나라 최고학부 그네젠 대학을 졸업하도록 하고 나서

프랑스의 수도 파리에 유학을 시키는 등 여러 가지의 교육을 받게 했으며

스타니슬라오도 덕을 잘 닦으며 학업에 충실했으므로 파리에 머물기 7년이 되자마자

교회법 박사의 학위까지 취득했던 것이다.

 

금의환향한 스타니슬라오는 오래지 않아 양친을 여의고 수도원에 들어갈 생각으로 전 재산을

빈민에게 베풀어주었으나, 크라코우의 주교 람베르토는 그가 비상한 인물이란 것을 알고 그를 주교 고문으로

채용하고 다음 사제 위에 오르게 하고 다시 그 학덕을 칭찬하면서 부주교로 승격시켰다.

람베르토 주교가 서거하자 국왕, 성직자, 평시도들은 그를 그의 후계자로 모시려고 했으나

겸손한 스타니슬라오는 그 주교직에 부적당하다는 이유로 완강히 사양했다.

그러던 중 교황 알렉산데르 2세로부터 명령도 받고, 마땅하게 더 이상 거절할 이유도 없어

마침내 주교 취임을 승낙하기에 이르렀던 것이다.

 

주교가 된 스타니슬라오는 잘못됨이 있으면 아무리 권세가 높아도 두려움 없이 이를 책망하고,

일반 신자들의 종교적 생활을 열심케 하는데 즐겨했다.

그러나 이것에는, 먼저 자신이 솔선 실천해 좋은 모범을 주는 것이 필요했다.

그래서 그는 열심히 기도하며 빈번히 재를 지키며 엄한 고행을 행하고

자선 사업에 힘쓰며 성스러운 생활을 보냈으므로

사람들은 진심으로 그의 덕에 감복해 감히 그의 말에 거역하는 이가 없었다.

 

당시의 국왕 볼레슬라오는 역사상 폭군으로 유명한 왕으로, 그는 자신의 권력을 믿고 신하의 아내나

딸에 대해 가끔 못할 짓을 했으나, 한 나라의 왕이 한 짓이므로 후환을 두려워해 누구 하난 나서서

그 못된 행동을 충고하는 이가 없었다.

다만 주교에게 그의 비행을 호소하여 그의 입을 통해 왕으로 하여금 자숙하도록 원할 뿐이었다.

그러므로 스타니슬라오는 국왕에게 충고했는데 왕도 자신의 비행을 깨달았음인지 회개를 결심했으나

그것도 일시적이었고 얼마 안 되어 전보다 더 방종한 생활을 하게 되었다.

 

스타니슬라오는 재차 왕앞에 나아가서 그의 생활의 비그리스도교적인 것을 설명하고 만일

이 같은 소행을 계속한다면 유감이지만 그리스도교에서 파문을 내리지 않을 수 없다고 간(諫)했다.

이와 같은 그의 직언이 매우 비위에 거슬린 왕은 심중에 혹독한 복수심을 픔고 우선 사람들에게

이처럼 존경을 받고 있는 그의 명예를 훼손시키고자 한 꾀를 짜냈다.

 

그것은 다음과 같은 것이었다. 그때 스타니슬라오는 베드로라는 어느 농부에게 교회를 위해 토지를 구입하고

이미 대금도 지불했던 것인데,왕은 베드로가 영수증을 주지 않고 죽은 것을 기회로 비밀리에 그의 유가족에게

베드로가 명령해 스타니슬라오 주교가 불법으로 우리의 토지를 탈취했다고 고소하도록 하게 하여

결국 주교를 법정에 호출시켰던 것이다.

스타니슬라오는 그 토지 매매를 잘 알고 있는 증인도 있으므로 곧 의심이 풀리리라 생각하고 안심하며

법정에 나갔으나,그 중인도 왕의 비위를 맞추고자 도리어 불리한 증언을 했으므로 그는 곤경에 빠지게 되었다.

그러나 그는 판사에게 "이곳에는 없는 확실한 증인을 데리고 오겠으니 3일간만 기다려 주시오"하고 간청했다.

별다른 중인이 없는 것을 알고 있는 판사는 주교의 말씀을 곤경을 일시 벗어나려는 궁여지책이라 비웃으며

하여튼 그의 소망대로 여유를 주었다.

 

전하는 말에 의하면, 스타니슬라오는 그때부터 3일간 단식하며 열심히 기도하고 3일째 되는 날 아침 미사

성제 후 주교의 성장을 갖추고 베드로의 묘지에 가서 무덤을 열게 하고 "살아나라!"고 한마디로 명령을 내렸다.

그러니까 죽었던 베드로가 즉각 다시 살아나 주교와 동행해 판사 앞에 서서 명백히 토지 매도의 전말을

설명하여 스타니슬라오의 무죄함을 드러내주고 그는 다시 묘지로 돌아가서 무덤 속으로 들어가 죽었다 한다.

 

이와 같이 주교께서 왕의 함정에서 벗어나 죄가 없는 깨끗한 몸이 되고 그를 함락시키려고 하던 자의 간계가

폭로된 후부터는 뭇사람들의 스타니슬라오에 대한 존경은 한층 더 증가될 뿐이었다.

그런데 왕은 그 또한 좋지 않게 생각하고 이번에는 그를 없애 버리려고 했다.

그의 친구들은 그에게 망명할 것을 종용했으나, 주교는 일신의 안전을 도모하기위해

위임받은 신자의 무리를 버리고 주교좌를 떠난다는 것은

목자로서의 도리에 맞지 않는다고 생각하며 끝까지 머물기를 결심했다.

 

1079년 5월 8일 미카엘 대천사의 발현 축일이 다가왔다.

스타니슬라오 주교가 마을 밖에 있는 성 미카엘 소성당에서 미사를 봉헌하고 있을 때

볼레슬라오 왕이 부하 병졸을 인솔하고 아무도 모르게 침입하여 친히 창검을 휘두르며 주교를 직접 살해했다.

그 뒤 왕은 백성들에게 그를 악인으로 간주하도록 했으나,

백성들은 도리어 그의 용감한 순교의 태도를 보고 성인으로 공경하고 왕을 부당한 자로 낙인찍어

폐위시키고 국외로 추방했다.

 

성 스타니슬라오는 폴란드 국민의 상징이다.

그는 1253년에 교황 인토첸시오 4세로부터 시성되었고, 크라코우의 주요 수호 성인으로 공경받고 있다.

(대구대교구홈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