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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인, 성녀 축일 기념일등

+++ 성녀 베르나데타 동정 / 성 베네딕토 요셉 라브레 기념일 +++

 

The Stupid One

A Biography of St. Bernadette - by Dan Paulos

 

축일:4월16일

성녀 베르나데타 동정

St. BERNADETTE of Lourdes

Sta. Bernadetta (Bernarda), Virg

Saint Bernadette Soubirous

Santa Bernardetta Soubirous Vergine

Born: 7 January 1844 at Lourdes, France

Die: 16 April 1879, Nevers, France of natural causes; body incorrupt

Beatified :1925

Canonized :1933 by Pope Pius XI

Bernardetta = ardita come orso, dal tedesco = dared like bear, from the German

 

 

 

성모님은 1858년 2월 11일부터 7월 16일(가르멜산의 복되신 동정마리아 축일)까지

18회에 걸쳐 루르드의 동굴에서 14세의 소녀 베르나데트(시성1933.12.8.)에게 발현하셔서

성모님은 자신을 ’원죄 없는 잉태된 자’("I am the +Immaculate Conception")라고 밝히셨습니다.

 

이때는 교황 비오 9세가 ‘복되신 동정 마리아의 원죄 없으신 잉태’ 교리를 반포한 지 4년째 되는 해였는데,

19세기에 들어서면서 자유주의 사상의 팽배로 지식층이 교회의 가르침을 불신하고 속속 교회를 떠나는 경향이 늘고 있었습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성모 마리아는 흰옷에 푸른색 허리띠를 두르고 오른팔에 묵주를 늘어뜨리고

양손을 가슴에 모은 모습으로 발현하셨는데 성모님은 자신을 ’원죄 없는 잉태된 자’(Immaculata Conceptio)라고 밝히면서

기도와 보속, 회개를 촉구하셨으며 특히 묵주 기도를 권하셨습니다.

그 후 매년 수백만 명의 순례자가 루르드를 방문하였고 기적도 자주 일어났습니다.

 

그런데 루르드 발현에 앞서 1830년 11월 27일,성녀 가타리나라브레(축일:11월28일)에게 발현하실 당시

성모님은 지구 위에 서서 두 팔을 활짝 펼친 모습으로 나타났는데,

그 주위에는 “원죄 없이 잉태되신 마리아여. 당신께 의탁하는 우리를 위하여 빌으소서”라는 글자가 새겨져 있었습니다.  

 

성모님은 이 모습대로 메달을 만들어 지니는 사람은 큰 은총을 받을 것이라고 하셨고,

그 후 메달 착용이 늘어나면서 수많은 기적이 일어나 ’기적의 메달(Medaille miraculeuse)’ 이라고 불리게 되었습니다.

 

이 발현으로 ’마리아의 원죄 없는 잉태’에 대한 신심이 고조되었으며,

마침내 교황 비오 9세는 1854년 12월 8일에 ’복되신 동정 마리아의 원죄 없으신 잉태’를 믿을 교리로 선포하였습니다.

 

*한국교회의 수호자

 원죄 없이 잉태되신 복되신 동정마리아 대축일:12월8일

*가르멜 산의 복되신 동정 마리아의 축일:7월16일

*루르드의 복되신 동정마리아 축일:2월11일

*성녀 가타리나 라브레 축일:11월28일

*성모 발현과 교회의 가르침

*과달루페의 성모마리아 축일:12월12일

*파티마의 복되신 동정마리아 축일:5월13일

 

 

 

 

성 마리 베르나데트 수비루 동정의 편지에서

(Ep. ad P. Gondrand, a 1861: cf. A.Ravier, Les  ecrits de sainte Bernadette,Paris 1961, pp. 53-59)

 

 

 

여인이 저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어느 날 두 여자 아이들과 함께 가브 강변에 땔나무를 주으러 갔을 때 한 소리를 들었습니다.

그때 목장 쪽을  바라보았더니 나무들이 전혀 흔들리고 있지 않았습니다.

동굴 쪽을 바라보니까 파란 띠에 흰옷을 입고 있는 한 부인이 서 있었습니다.

그 부인의 양쪽 발등에는 노란 장미꽃이 꽂혀 있었고 그의 묵주도 같은 노란 색이었습니다.

저는 그 부인을 바라보았을 때 착각에 사로잡혀 있다는 생각이 들어 제 눈을 부볐습니다.

그리고는 묵주가 든 제 호주머니에 손을 넣었습니다.

십자성호를 긋고 싶었으나 이마에다 손을 올릴 수가 없었고 손은 이내 아래로 뚝 떨어지고 말았습니다.

 

그때 부인은 자신이 성호를 그었습니다.

저는 다시 한 번 하려고 했습니다. 제 손은 부들부들 떨리고 있었으나 마침내 십자 성호를 그을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묵주의 기도를 시작했습니다. 그 동안 부인은 손가락 사이로 묵주 알을 굴렸지만 입술은 움직이지 않았습니다.

제가 묵주의 기도를 끝마치자 환시는 사라졌습니다.

 

환시가 사라지자 두 여자 아이들에게 무얼 보았냐고 물었습니다.

자기들은 아무것도 못 보았다고 하면서 자기들에게 말해줄 게 있느냐고 나에게 물었습니다.

저는 그 아이들에게 흰옷을 입은 한 부인을 보았는데 누군지 모르겠다고 대답했고 그 일을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라고 당부했습니다.

그때 아이들은 나보고 거기에 되돌아가지 말라고 간청했으나 저는 거절했습니다.

어떤 내적인 힘에 이끌리는 것을 느끼면서 일요일 날 거기에 다시 갔습니다.

 

그 부인은 제가 세 번째 갈 때까지는 아무것도 말하지 않았습니다.

세 번째 가던 날 나를 보고 보름 동안 자기에게 오지 않겠느냐고 물었습니다.

그렇게 하겠다고 대답하니까 사제들에게 가서 거기에다 소성당을 짓도록 청하라고 덧붙여 말했습니다.

 

그리고 나서 그 부인은 제게 샘에서 물을 마시라고 했습니다. 둘러 보아도 샘이 없기에 저는 가브 강물을 마시려 했습니다.

그러자 그 부인은 그게 아니라면서 손가락으로 샘을 가리켰습니다. 제가 가서 보니 약간의 더러운 물밖에 없었습니다.

손을 넣었지만 손으로 담을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손으로 땅을 후비었더니 마침내 마실 수 있는 물이 조금 나왔습니다.

세 번은 버리고 네 번째 마셨습니다. 바로 그때 환시가 사라지고 저는 거기를 떠나 왔습니다.

 

그 다음 보름 동안 거기에 찾아갔었습니다.

그 부인은 월요일과 금요일을 제외하고는 매일 제게 나타나 사제들에게 소성당을 짓도록 청해 달라고 다시 부탁했고

저더러 그 샘에서 몸을 씻고 죄인들의 회개를 위해 기도하라고 당부했습니다.

저는 몇번이나 당신이 누구냐고 물었지만 그 부인은 제게 부드러운 미소를 보낼 뿐이었습니다.

 

마지막으로 부인은 팔을 펼치고 시선을 하늘로 향하고는 자기는 "원죄 없이 잉태된성모"라고 말해 주었습니다.

그 보름 동안 부인은 제게 또한 세 가지 비밀을 계시하셨고 절대로 누설하지 말라고 명했습니다.

저는 오늘까지 그 비밀을 충실히 간직해 왔습니다.(가톨릭홈에서)

 

 

 

 

 

마리 베르나르드(베르나데타) 수비루스로 1844년 프랑스의 루르드에서 가난한 물방앗간 주인의 맏딸로 태어났다.

어려서는 건강한 아이였으나, 7세부터 병으로 쇠약해져 2, 3년후에는 큰병에 걸려

임종 때까지 천식(喘息)의 고질(痼疾)로 인해 고생하지 않으면 안되었다.

거기에다가 그의 가정은 큰 시련을 겪게 되었다. 그것은 예기치 않던 불행으로 말미암아 극도로 가난해져서,

정든 집을 떠나 보잘 것 없는 초막과 같은 거처에 살지 않으면 안 되었던 것이다.

그리고 그 뒤부터는 베르나데타의 몸도 점점 약화될 뿐이었다.

 

베르나데타의 정신적 번민은 육체적 고통보다 훨씬 더많았다.

부모와 동생들을 극히 사랑하고 있던 그녀는 맏딸이면서도 병 때문에 가사를 돕지 못하는 것에 마음이 아팠기 때문이다.

그녀가 할 수 있었던 일은 어머니가 생활비를 조달하기 위해 외출할 동안 집에서 어린 동생들을 보살펴 주는 정도 였다.

그녀의 가정은 빈궁 중에서도 부끄러워 하지 않고, 묵묵히 그의 부자유를 감수 인내했다.

이 같은 탄복할 만한 태도는 견고한 신앙과 하느님께 대한 굳은 신뢰의 발로이기도 했다.

 

 

 

베르나데타는 13세가 되어도 학교에 가지 못했고 따라서 글을 읽을 줄도 쓸 줄도 몰랐다.

학교에 가고 싶은 마음은 태산 같았으나, 당시 그녀는 양을 지키고 있었으므로 도저히 통학할 여가가 없었다.

그러나 그 대신 그녀는 광막하고도 고요한 들에서 많은 기도를 바쳤다. 또한 뜨개질과 바느질도 했다.

그리고 저녁때가 되면 자기 집에 돌아오던가 아니면 아는 집에 들르던가 했었다.

남과 이야기할 때나 말을 들을 때는 항상 공부하는 마음으로 듣고 말했다.

 

14세가 되었을 때 그녀는 번민하는 듯한 일상에다가 보통보다 작은 소녀로서 민감하나 쾌활한 기질이 있었으며, 다소 발육이 늦은 듯 했다고 한다.

그녀는 이때 그리워하던 학교를 처음 가게 되었다. 그런데 그때 마침 유명한 성모 발현이란 일대 사건이 돌발했던 것이다.

이 성스러운 부인의 발현은 베르나데타에게 커다란 위로와 풍부한 은총을 베풀어주었지만 그것은 한편으로 많은 슬픔과 시련의 원인이기도 했다.

 

 

 

1858년 2월 11일과 7월 16일 사이, 가브 강변의 얕은 굴속에서 그녀는 놀라운 체험을 했다.

18차례에 걸쳐 그녀는 매우 젊고 아름다운 부인을 보았는데, 그 부인이 자신에게 여러 가지 요구를 했다.

이 부인이 나중에 "원죄 없이 잉태되신 성모"로 호칭하게 되는 동정 마리아로 인정받게 되었다.

 

성모 마리아의 발현도 그녀에게 있어서는 일종의 학교-최고의 영혼의 학교였다.

그녀의 영혼은 정결하고 죄의 물듦이 없었지만, 이 학교에서 성모의 슬하에서 확고한 신앙과 덕행의 기반을 형성했다.

그가 성모께 듣고 나서 전한 말씀을 사람들이 믿게 된 것은 주로 그녀의 이런 신앙과 덕행의 힘에 의한 것이라 할 수 있다.

 

 

 

이러한 기적이 일어나는 곳에는 소문을 듣고 몰려든 수많은 사람들이 있었지만,

베르나데타를 제외하고는 어느 누구도 "부인"을 보지 못하고 그 말씀도 듣지 못했으나, 무슨 혼란이나 정신적인 이상은 전혀 없었다.

그러나 그 발현이 있고 난 다음부터 거짓 환시가 유행병처럼 번졌으나, 교회 당국은 그녀의 체험에 대해 올바른 자세를 견지했다.

몇 년후 그녀는 의심 많은 불신자들로부터 심한 고통을 받았으나 이 모든 것을 영웅적인 용기와 품위로써 물리쳤다.

 

성모의 발현은 끝났으나 그녀에 대해서의 엄격한 조사는 그후에도 오랫동안 계속 되었다.

베르나데타는 언제든지 자기가 알고 있는 것을 정직하게 말했다.

이리하여 결국 성모 발현의 장소는 성지가 되어 방방곡곡에서 수많은 순례자들이 매일같이 쇄도하게 되었다.

이러한 사람들은 인간의 보통 심리로서 특별한 은혜를 받은 베르나데타에게 호기심을 품고 한 번이라도 그녀의 얼굴을 보려고 했다.

겸손한 그녀에게는 그것이 얼마나 고통이 되었는지 모른다.

 

 

 

평범한 사람 같았으면 자기가 그처럼 평판이 대단하다면 의기 양양하여 교만의 죄에 떨어졌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베르나데타는 여전히 순박하고 가난하고 겸손한 소녀였다. 그녀는 전과 다름없이 집안 일을 돌보며 양치기일을 했다.

그녀의 양친도 베르나데타와 같이 종종 방문객에게 금품을 받는 때도 있었으나 호의만을 감사하면서 절대로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러므로 여전히 가난하게 살지 않으면 안 되었다. 그들은 성모님의 은혜로 세상 재물을 모았다는 소문을 듣기 싫어했기 때문이다.

 

베르나데타는 그러던 중 한 가지 희망을 품게 되었다. 그것은 인간 세계를 떠나 수도원에 숨어 고요한 마음으로 하느님을 섬기고자 하는 것이었다.

그녀는 곧 어느 수도원의 분원에서 안내직을 맡게되어

그대로 그곳에 머물고자 했으나 하느님께서는 서서히 그녀를 위해 네베르에 있는 애덕회에 입회의 길을 열어주셨던 것이다.

 

이미 입회를 결심한 베르나데타에게 있어서 한가지 뼈아픈 것은 그리운 성모님을 뵈옵던 루르드의 동굴을 하직해야 될 일이었다.

그러나 그녀는 참기 어려운 모든 것을 희생하고 혼연히 네베르를 향해 출발했다. 때는 1866년 7월 4일이었다.

 

 

 

수녀원에 도착한 베르나데타는 삼 일째 되는 날 모든 수녀들이 모인 가운데서 성모님의 발현의 내막을 말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그녀는 순명지덕으로 겸손하고도 정직하게 말함으로써 사람들에게 많은 감동을 주었지만 그후는 다시 그 이야기 하는 것을 엄금 당했다.

그녀는 도리어 그것을 기뻐했다.

그는 어떤 중대한 이유가 없이는 그 일을 입밖에 내지 않고 다만 마음에 만 새겨두어 종종 성모님의 은혜를 깊이 감사드렸다.

 

수련기 중에 그녀는 중병에 걸렸었다. 모두들 그녀가 나으리라고는 생각지 않았다.

그래서 서둘러 서원을 허락받아 기쁨에 넘쳐 서원식을 다 마치고 나자 기적처럼 다시 완쾌되었다.

그러나 교회 규정상 같은 동료들과 함께 수련기를 마쳐야 했다.

 

베르나데타가 병중에 취한 태도는 실로 인내의 모범이었다.

그녀는 고요한 수도원에서 병약한 몸으로 일생을 보내 세인이 놀랄만한 대사업은 할 수 없었지만,

그래도 매일의 숨은 희생이나 순명, 극기, 겸손, 인내, 타인대 등의 여러 덕행에 있어서는 출중한 바가 많았다.

이는 하느님 대전에는 하나 하나의 찬란한 보석처럼 보였을 것이고, 쌓이고 쌓인 그의 공덕은 얼마나 많았는지 알 길이 없었다.

 

 

 

그 후 베르나데타는 여러 번 병상에 누웠다.

그러다 마침내 재기불능이 되어 1879년 4월 16일 루르드에서 성모를 뵌지 21년째 되는 해까지 표면에 드러나지 않는 삶을 살면서 임종을 맞았다.

 

루르드에서 일어난 수많은 기적은 성모 마리아의 발현이 터무니없는 일이 아니란 것을 입증해 주었으며,

베르나데타가 운명한 지방인 네베르에서는 그녀의 기도로 생존시와 사후에 많은 기적들이 생겼다.

하느님께서는 이처럼 그녀의 성스러운 생애를 증명해 주셨다."

 

 

 

St. Bernadette Soubirous

Shown many years after her death, her body uncorrupted.

 

겸손하고도 가난한 동정녀의 덕은 장례 때부터 이미 빛나는 영예를 획득했으나,

성인품에 오른 다음은 한층 더 찬란한 광채를 발하게 되었다.

자신을 스스로 낮춘 베르나데타는 지금에 와서는 전 세계의 존경을 받게 되었던 것이다.

(대구대교구홈에서)

 

 

 

 

이용당하는 것    

 

루르드의 성모 마리아가 베르나데트에게 발현했을 때 그의 나이는 겨우 14살이었다.

그는 평범한 시골 소녀였기에, 사람들은 왜 하필이면 성모 마리아가 그에게 나타났느냐는 질문을 하곤 했다.

베르나데트는 그 사실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제가 백치처럼 아주 무지하기 때문에 저를 선택하신 것이 아닐까요?

 

만약 성모님이 저보다 더 무지한 사람을 발견하셨다면 아마도 그 사람을 선택하셨을 거예요.

성모님은 저를 빗자루처럼 이용하신 것 같아요. 빗자루로 마당을 다 쓸면 그 다음에는 빗자루를 어떻게 하나요?

원래 있던 자리, 바로 문 뒤에 갖다 두겠죠.” 우리는 일반적으로 누구에 의해서 ‘이용당한다’라는 개념을 좋아하지 않는다.

 

오랜 세월 동안 그 말은 ‘속임을 당한다’든지, ‘버림을 받는다’는 의미로 사용되어 왔기 때문이다.

그러나 하느님의 계획 안에서 이용당하는 것은 창조적인 행동을 하는 것과 같다.

선반 위에 놓인 유리잔은 보기에는 좋을지 몰라도 원래 만들어진 목적은 실현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유리잔은 우리가 그 안에 물이나 포도주를 따라서 나누어 마실 때 비로소 만들어진 의도, 즉 존재의 목적을 실현한다.

마찬가지로 우리 인간은 사랑으로 가득 채워질 때 하느님이 창조하신 원래의 인간, 하느님의 사람이 될 수 있다.

내가 유리잔이라면 나는 지금 어디에 있는가?

선반 위에 올려져 있는가? 아니면 테이블 위에 놓여 있는가?

하느님이 나를 원래 만드신 의도대로 쓰시게 하겠다.  

(까리따스수녀회홈에서)


축일: 4월 16일
성 베네딕토 요셉 라브레, OFS
San Benedetto Giuseppe Labre Pellegrino
Amettes, Francia, 26 marzo 1748 - Roma, 16 aprile 1783
Etimologia: Benedetto = che augura il bene, dal latino, blessed ( = Benedict)
Saint Benedict Joseph Labre
Also known as : Beggar of Perpetual Adoration, Benedetto Giuseppe Labre
Born : 25 March 1748 at Amettes, Boulogne, France
Died : 17 April 1783 at Rome, Italy
Beatified : 20 May 1860 by Pope Pius IX
Canonized : 8 December 1881 by Pope Leo XIII

 

 

 

   성 베네딕투스 요셉 라브르(Benedictus Josephus Labre, 또는 베네딕토)는 부유한 상인의 15자녀 가운데 맏이로 불로네 근교에서 태어났다. 1770-1776년 사이에 그는 수차에 걸쳐 수도회에 입회하려고 노력하였으나, 너무도 신중하다는 이유로 번번이 거절당하였다. 그런 뒤에 그는 로마(Rome)의 순례 길에 나섰는데 맨발로 구걸하면서 기도 중에 걸어갔다. 그로부터 3-4년 동안 그는 서유럽의 성지 이곳저곳을 순례했는데, 이탈리아의 로레토(Loreto), 아시시(Assisi) 그리고 바리(Bari), 스위스의 아인지델른(Einsiedeln), 프랑스의 파레이르모니알(Paray-le-Monial), 에스파냐의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Santiago de Compostela) 등지에서 많은 감명을 받았다.
 

   그는 어디를 가나 항상 맨발로 여행하였고, 노천이나 추녀 밑에서 밤을 새웠으며 옷은 누더기였고, 몸은 더러웠으며 음식은 문전걸식하였고, 돈을 얻게 되면 다른 사람에게 나누어 주었다. 그의 말 수는 적었으나 기도는 많았으며, 다른 사람들의 냉대를 기쁜 마음으로 받아들였다. 1774년부터 그는 로마에 머물렀는데, 낮에는 성당에서 기도로 지냈고, 밤에는 콜로세움에서 새우잠을 자면서 건강을 해쳤기 때문에 걸인 수용소를 찾을 형편이 되었다. 마침내 그는 성당에서 허물어지듯 쓰러진 후 어느 푸주한의 집에서 임종을 맞았다.
 

   로마의 사람들은 이 새로운 프란치스코 성인의 높은 성덕을 전혀 모르지는 않았다. 1881년 그는 그들의 성인으로 높이 받들어졌다. 성 베네딕투스 라브르는 서방 교회보다 동방 교회에 더 많이 알려진 수덕적인 성소를 받은 분이다. 그는 항상 ‘그리스도를 위하여 바보’가 된 그리스의 살로이와 러시아의 유로디비에 견줄만한 위대한 성덕을 쌓았다. 그는 또한 40시간 성체조배 신심의 전파자였다. 그는 1860년에 복자품에 올랐고, 1881년 교황 레오 13세(Leo XIII)에 의해 시성되었다.
 

 참고자료
  김정진 편역, 가톨릭 성인전(상) - '성 베네딕토 요셉 라브르 증거자', 서울(가톨릭출판사), 2004년, 350-353쪽. 
  페르디난트 홀뵉 저, 이숙희 역, 성체의 삶을 위한 성체와 성인들 - '베네딕토 요셉 라브레 성인', 서울(성요셉출판사), 2000년, 323-327쪽. 
  한국가톨릭대사전편찬위원회 편, 한국가톨릭대사전 제3권 - '라브르, 베네딕도 요셉', 서울(한국교회사연구소), 1996년, 2025쪽. 
(가톨릭홈에서)

 

 

 

4월 16일 성 베네딕토 요셉 라브레 (3회)  
 거룩한 방랑 생활을 한 성 베네딕토 요셉 라브레는 1748년 프랑스 불로뉴 관구에 속한 아메뜨에서 태어났다. 그는 여러 번 수도생활을 시작하려고 시도하였지만 성공하지 못하였다. 마침내 22살 때 하느님의 특별한 부르심을 듣고, 그는 부모의 집과 조국을 버리고 친척들과 모든 교류도 끊고, 나머지 삶을 가난한 거지로 이태리와 스페인의 순례지를 돌아다니거나, 로마의 성지에서 오랜 시간동안 기도하며 지냈다. 그는 사람들이 버린 옷을 입었으며, 자주 맨땅을 침대삼아 잤으며, 사람들이 건네주는 부스러기로 요기를 채웠다. 그는 계속적인 극기로 자신의 감각을 못박았다. 도시의 사치스러움과 오락은 그의 마음을 끌지 못했다. 그는 말을 삼갔으며 사랑이 요구할 때만 말했다. 칭찬의 말 한마디만 들어도 그는 몸을 떨었으며 비난과 모욕을 받을 때 기뻐하였다. 외면적인 삶의 모습은 부랑자 같았으나 그 동기는 가능한 한 완전하게 하느님께서 자신에게 주신 매우 특별한 소명을 따르기 위한 것이었다.
 그의 기도는 그칠 줄 몰랐으며 마리아께 대한 사랑은 너무나 커서 “오 마리아, 오 나의 어머니시여!”라는 인사말이 저절로 나오곤 했다. 복되신 성체께 대한 헌신도 너무나 깊어서 사람들은 그를 “40시간의 헌신을 드리는 빈자(貧者)”라고 불렀다. 감실 앞에서 그는 움직이지 않고 마치 고정된 것처럼 머물렀다. 그를 지켜본 사람들은 그가 조각상 같았다고, 아니 찬미 드리는 천사나 탈혼에 빠진 성인과 같았다고 말했다. 하느님은 그에게 예언과 기적의 선물을 주셨다. 성 프란치스코의 높은 성덕을 그대로 닮은 그는 1783년 성주간 수요일에  로마의 성모 성당에서 성체조배를 하던 중에 하느님께 돌아갔다. 1881년 성인품에 올랐다. 

 

 

 

기도
오 하느님, 당신의 증거자 성 베네딕토 요셉에게
겸손에 대한 열정과 가난에 대한 사랑을 통해 당신만을 의지하게 하셨으니
그의 공로의 중재로 저희로 하여금
온갖 세상 것을 경멸하고 언제나 천상 것을 추구하게 하소서.
우리 주 그리스도를 통하여 비나이다.   아멘.

 

 

 

묵상
천박하고 무식하며 멸시받을 자로 사람들로부터 간주될 때와 마찬가지로,
칭찬과 높임을 받을 때도 자기 자신을 더 나은 사람으로 생각하지 않는 종은 복됩니다.
사실 인간은 하느님 앞에서 있는 그대로이지 그 이상이 아닙니다.
                    -영적인 권고 19-
(재속프란치스코한국국가형제회홈에서)

 

* 참고
◆ 성체조배 ◆       
 
한자  聖體朝拜  라틴어  Visitatio SSmi Sacramenti  영어  Visit to the Blessed Sacrament  출처 : [가톨릭대사전] 
 
   성체 앞에서 특별한 존경을 바치는 신심행위. 가톨릭 교회는 신자들이 가끔 성당에 와서 감실에 모셔진 성체 앞에 무릎을 꿇고 성체조배를 함으로써 성체에 현존하는 그리스도께 흠숭(欽崇)과 사랑을 표현하고 성체의 신비를 더욱 깊이 깨달을 수 있기를 권장하고 있다.
 

◆ 성체강복 ◆        
한자  聖體降福  라틴어  Benedictio Sanctissimi Sacramenti  영어  Benediction of the Blessed Sacrament 
출처 : [가톨릭대사전] 
 
   라틴전례의 가톨릭 교회에 있어서 성체에 대한 신심의 표현으로, 성체를 현시(顯示)하여 신자들이 조배(朝拜)하게 하고 사제가 성체로써 강복해 주는 것을 말한다. 전통적으로 사제는 중백의(中白衣)를 입고 영대(領帶)를 두르고 깝바를 어깨에 걸친다. 성체를 성광(聖光)에 모셔 제대 위에 놓고 향을 피운다. 이 때 찬미가가 불려지고 조배와 묵상이 뒤따른다. 두 번째로 향을 피우면서 사제는 어깨보(humerale)로 두 손을 감싸고 성체 현시대를 높이 받들고 십자(十字)의 형태로 신자들에게 강복한다. 이 때 신자들의 주의를 환기시키기 위해 작은 종을 울린다.
  사제와 신자들에 의해 성체 찬미가가 불려지면서 성체는 다시 강보에 모셔지고 이로써 의식은 끝이 난다. 성체강복은 주요 축일(祝日)과 일요일, 사순절, 피정(避靜), 40시간의 성체조배 중에 행해지며, 각 주교들이 지정하는 다른 날에도 행해진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이후에 전통적 의식이 단순화되었고 신자들이 좀 더 주의깊게 성체를 조배할 수 일도록 기도와 성가, 낭독 등의 다양한 방법 등이 허용되었다. 또한 사제가 없는 가운데서도 수도자나 평신도들에 의해 성체가 현시되는 것이 허용되었다. 단 강복은 사제만이 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