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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인, 성녀 축일 기념일등

+++ (이콘) 성 제오르지오 / 아시시의 복자 에지다오 기념일 +++

 

 

[이콘]성 제오르지오(George).노프고로드(Novgorod)화파.16세기.80x58cm.

 

용을 죽인 성 게오르그는 서양과 모든 정통파 지역(희랍교회)에서 일반 대중에게

가장 인기가 있는 성인들 중의 하나로 가난한 사람들, 군인들, 무기제조자들, 양치는 목자들과

일반 대중의 수호자로서 일반 가정에서나 궁정에서 존경을 받았다.

 

전설에 의하면 성 게오르그는 카파도키엔 (Kappadokien)에서 태어나

로마 군대의 장교로 지낼때 디오클레티안(Diokletian)휘하에서 용맹을 떨쳐 명성이 높았다고 한다.

그가 황제의 기독교인 박해에 대한 명령에 불복종하고 자기 자신이 기독교 신자임을 밝혔을 때에(303년)

그는 고문을 당하였고 드디어는 목베임을 당함으로써 순교했다.

 

이 성화는 백마를 타고 있는 성 게오르그가 어떻게 창으로 날개달린 용을 내려 찍는가를 묘사하고 있는데

화면의 오른쪽에 위치한 성문 앞에는 게오르그 성인이 소아시아에 사는 도시인들을 괴롭히던

용으로부터 구출한 공주가 서있다.

성탑(城塔)과 창문에서는 왕과 왕비 그리고 다른 궁인(官人)들이

성 게오르그가 용과 싸우고 있는 광경을 지켜보고 있다.

 

게오르그 성인의 머리위에는 비천(飛天)하는 한 천사가 그의 머리에 금관을 씌우고 있다.

화면의 왼쪽 윗 모서리에는 그를 축복하는 그리스도의 모습이 보인다.

이 성화의 회화적인 수법에서 노프고로드 지방 화가들의 영향을 확실하게 엿볼 수 있다.

 

장식적인 색의 처리와 훤히 트인 배경과 화면의 가장자리를 여유있게 비워놓은 공간의 처리 등

높은 수준을 보이고 있다.

이 작품 역시 보존상태가 매우 양호하다.

The George R. Hann Collection, April 1980,   

*유럽 聖畵(ICON)集 에서

 

포로의 해방이시며,가난한 자의 보호자시고

병자의 의사이시며,

그리스도인들의 무적자로서 승리의 방법을 제공하는 이여.

그리스도께 간구하시어 우리영혼을 구원하소서.

(성 제오르기오 대순교자 아뽀리띠끼온 중)

 

 

 

 

 

 

 

[ICON de Tver] Saint Georges terrassant le dragon. 16c

 

제오르지오   

라틴어 Georgius

성인. 순교자. 축일 4월 23일.

 

교황 젤라시오(재위:492∼496)의 미사전문에 나오는 "이름은 공경해 마땅하지만

그 행동은 하느님만이 알고 계신 사람들"의 한 목록에서 성 제오르지오가 언급되어 있다.

 

역사적으로 유일하게 믿을 수 있는 기록에 그의 순교사실이 나타나 있다.

그러나 그가 군인으로서의 고위 지휘관으로 특진했다는 사실,

우르미아(Urmiah,현 이란령)에 그가 그리스도교 단체를 조직했다는 사실,

한 로마황제의 원정 때 그가 그레이트 브리튼섬에 갔었다는 사실 등에 대해서는 미심쩍은 데가 있다.

 

그와 용(龍)에 관한 전설은 그 기원을 6세기말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또한 6세기의 지방전설에 의하면 성 제오르지오의 고향이

팔레스티나의 리다(Lydda, 예루살렘 부근의 도시)이며,

그의 유해는 니코메디아(Nicomedia, 현 터기의 도시 Izmit)에서 리다로 운반되어 갔다고 한다.

 

그런데 카에사레아의 에우세비오(Eusebius, 263 ?∼339)는,

로마황제 디오클레티아누스(재위: 284∼ 305)의 박해 때

니코메디아에서 황제 앞에 그리스도 교도임을 고백한 어떤 점잖은 병사(兵士)의 순교에 관해

언급된 바 있으나, 그 성인의 이름, 고국, 묘소는 밝히지 않고 있다.

 

부제(副祭) 테오도시오(Theodosius)가 530년경에

처음으로 리다에 있는 성 제오르지오의 무덤에 관해 언급하였다.

동방에서는 성 제오르지오가 널리 알려져 있었으며, 십자군 병사들이 그 순교담을 유럽에 부활시켰다.

1222년의 영국 옥스퍼드 교회회의는 그의 축일을 국경일로 할 것을 결정하였고,

에드워드 3세(재위:1327∼1377)때 그는 영국의 보호성인으로 결정되었다.

그밖에도 그는 포르투갈, 아라곤, 카탈로니아, 구르지아, 리투아니아 등의 수호성인이다.

(가톨릭대사전에서)

 

 

 

 

 

 

축일:4월23일

성 제오르지오 순교자

ST. GEORGE

St. Georgius,Martyr

San Giorgio Martire di Lydda

Died:tortured and beheaded c.304 at Lydda, Palestine

Giorgio = che lavora la terra, dal greco = that the earth works, from the Greek

 

 

 

성 제오르지오는 4세기부터 팔레스티나의 디오스폴리스에서

공경을 받아 왔고 그 곳에 기념 성당이 건립되었다.

그의 축일을 초세기부터 동방과 서방에서 두루 지내게 되었다.

 

 

 

성 게오르기우스(Georgius, 또는 제오르지오)는 영국, 포르투갈, 독일, 이탈리아의 여러 도시

특히 베네치아(Venezia)와 페라라(Ferrara)의 수호성인으로 공경을 받으며,

군인과 보이 스카우트의 수호자이고  동방 교회에서 ‘위대한 순교자’로 공경을 받는 성인이다.

 

그러나 성인의 생애에 대해서는 아는 바가 거의 없다.
다만 그가 콘스탄틴 대제 이전에 팔레스티나(Palestina)의 디오스폴리스(Diospolis)라고도 불리던
리다(Lydda)에서 순교하였다는 것과 황제 근위대의 군인이었다는 것뿐이다.

그 외에는 6세기경부터 널리 퍼지기 시작한 신화와 전설들이 전해지고 있다.
성인에 관한 이야기로 유명한 것이 “황금 성인전”(Legenda Aurea)에 언급된 용에 관한 이야기이다.
성인이 어느 나라를 지나다가 어떤 여인을 만났는데, 그 여인은 용의 제물이 되기 위해 기다리는 중이었다.
그 나라는 계속 어린 양을 용에게 제물로 바쳤는데 양들이 다 바닥나자 사람을 제물로 바쳤다.
돌아가면서 딸들을 바치다가 공주의 순서가 되자 그 하녀가 대신 제물이 되기로 한 것이었다.

그 이야기를 들은 성인은 하녀와 함께 기다리다가 용이 나타나자 십자가 모양을 만들어 보이며 용을 붙잡았다.
이때 성인이 만일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세례를 받는다면 용을 죽이겠다고 하자

왕과 백성들이 동의하였다고 한다.
그래서 창으로 용을 찔러 죽였고 왕을 비롯한 15,000명이 세례를 받았다.


성인은 왕국의 반을 주겠다는 왕의 제안을 거절하고, 하느님의 교회들을 잘 돌보고 성직자들을 존경하며
가난한 사람들을 잘 돌보아 달라는 부탁을 남기고 그 나라를 떠났다고 한다.

7-8세기에 영국에 알려진 성인은 어떤 이유인지는 모르지만 영국의 수호성인이 되었고,
중세 이후에는 기사도와 군인들의 수호성인으로 널리 알려졌다.
성인의 문장은 흰 바탕의 붉은 십자가인데, 현재 영국 해군에서 사용하는 기장이 바로 하얀 바탕에 붉은 색으로
커다란 성 게오르기우스의 십자가가 그려진 모양이며, 이는 영국 국기(유니언 잭) 도안의 일부이기도 하다.

 

 

성 베드로 다미아노 주교의 강론에서

(Sermo 3, De Sancto Georgio: PL 567-571)

 

그는 십자가의 깃발로 완전히 방비되었습니다.

 

지극히 사랑하는 형제들, 오늘 이 축일은 파스카 영광의 기쁨을 반영해 주고

금에 박혀 있는 귀한 보석이 그 아름다운 광채로 금을 빛나게 하듯 해줍니다.

성 제오르지오는 확실히 한 군직에서 다른 군직으로 옮겨 가서,

세속의 군직을 내던지고 그리스도 군대의 반열에 가담했습니다.

그리고 이 새로운 군직에서 영민한 군사처럼 살았습니다.

우선 자신이 가진 모든 것을 가난한 이들에게 주어 버림으로써 세속 재물의 부담에서 해방되어

자유롭고 아무런 장애도 받음이 없이 믿음의 갑옷을 입은 그리스도의 용감한 군사로서

치열한 투쟁 속으로 전진해 들어갔습니다.

 

이 사실에서 우리는 한 가지 명백한 교훈을 얻게 됩니다.

즉 누구든지 세속 재물에서 벗어나는 것을 두려워한다면 신앙을 위해서

용감하게 또 합당히 싸울 수 없다는 점입니다.

성 제오르지오는 성령의 불로 타오르고 십자가의 깃발로 완전히 방비되어 사악한 왕과 싸웠고,

마귀의 사자인 이 왕을 패배시킴으로써 바로 죄의 원흉을 패배시켜

그리스도의 군사들이 용감히 싸우도록 고취시켰습니다.

 

확실히 그 전투 가운데 지극히 높으시고 눈으로 볼 수 없는 심판관께서 그의 곁에 계셨습니다.

그분은 당신의 자유의지로써 악인의 손이 그 포악성을 성 제오르지오에게마저 뻗치는 것을 허락하셨습니다.

하느님께서는 당신 순교자의 육신을 살인자들에게 넘겨주셨지만 패배될 수 없는 신앙의 보루로 방어된

그 영혼을 당신의 중단 없는 보호로써 지켜 주셨습니다.

 

 

 

지극히 사랑하는 형제들, 천상 군대에 속한 이 군사를 보고 경탄하는 데 그치면 안됩니다.

그를 또한 본받아야 합니다.

우리 정신을 천상 영광의 상급에까지 들어 높이고 우리 마음을 거기에다 고정시킨다면

세속이 우리에게 유혹의 미소를 던지든 불행으로 우리를 위협하든 간에

세속은 거기에서 우리를 빼앗지 못할 것입니다.

 

때가 될 때 우리의 정신이 향해 있는 축복의 그 성전으로 들어갈 수 있도록

성 바울로의 권고에 따라 육신과 영혼의 온갖 불결에서 우리 자신을 정화합시다.

그리스도의 성전인 교회에서 자신을 희생으로 바치고자 하는 사람은 거룩한 샘에서 씻음 받은 후

"너의 사제들은 정의를 입어라."는 시편의 말씀처럼 여러 가지 덕을 입어야 합니다.

 

즉 세례로써 그리스도 안에서 새사람으로 태어나는 사람은 부패의 낡은 옷을 입어서는 안되며,

옛사람을 벗어 버리고 순수하고 거룩한 새로운 형태의 삶으로써 새사람의 옷을 입어야 합니다.

그럼으로써 옛 죄악의 오점을 씻어버리고 새로운 삶이 지니는 광채로 빛나게 되며

파스카 신비를 합당히 경축하고 복된 순교자들의 모범을 실제로 본받게 될 것입니다.

(가톨릭홈에서)

 

*성 베드로 다미아노 주교 학자 축일:2월21일

 

 

 

마리아 막달레나가 오해의 희생자라고 한다면 제오르지오는 엄청난 양의 상상력을 일으키는 대상이다.

그가 아마도 콘스탄틴 황제 시대 전에 팔레스티나의 리다에서 죽은 실제 순교자라는 것은

충분히 믿을 만한 근거가 있다.

교회는 그의 전기를 전해 주고 있지만 그의 생애를 둘러싼 전설에 대해서는 말하지 않는다.

그가 그리스도를 따르기 위하여 최고의 가치를 치르고자 했다는 것은 교회가 믿는 바이다.

그리고 그것으로 충분한 것이다.

 

제오르지오가 용과 싸워서 왕의 딸을 구하고 리비아를 회개시켰다는 것은 12세기 이탈리아의 우화이다.

제오르지오는 일찍이 동방의 군인들만큼이나 십자군들이 존경하던 수호 성인이다.

그는 영국, 포루투칼, 독일, 아라곤, 제노바, 베니스의 수호 성인이다.

 

 

 

인간 본성은 단순하고 냉정한 역사의 자료만으로는 만족 할 수 없는 것 같다.

미국인들에게는 위싱턴과 링컨이 있지만 여하튼 폴 번양

(Paul Bunyan: 미국 서북부의 산림 벌채 지방에 전해 오는 전설 속의 목재 벌채인도 필요로 한다.

 

아시시의 성프란치스코의 생애는 감동을 주기에 충분한 것이지만

수세기 동안 이탈리아인들은 ’피오레티’에서도 그의 정신을 찾았다.

산타클로스는 성니콜라오의 정신이 대중화된 것이다.

사실과 전설이 모두 거룩하신 분에 대한 신비스런 진리를 밝혀 주는 인간적인 방법들이다.

 

 

 

"그리스도를 충실히 따른 분들의 생활을 바라봄으로써

우리는 미래의 국가를 찾으려는 충격의 새로운 동기를 발견하게 된다."

(교회에 관한 교의 헌장 50항)

*성바오로수도회홈에서

 

*성녀 마리아 막달레나 축일:7월22일

*성 니콜라오 주교 축일:12월6일

*성 프란치스코 축일:10월4일,오상축일:9월17일

*성 안토니오 아빠스 축일:1월17일

 

 

 

 

초대 교회에는 로마의 군인 중에 많은 그리스도교 신자가 생겨 순교한 이도 적지 않았다.

이와 같이 군인이 입교하기 쉬웠던 것은

아마 엄격한 군기에 익숙된 몸으로서는 그리스도교를 신봉하는 것도 어렵지 않았고,

또한 언제 어느 때 조국을 위해 생명을 바칠지 모르는 처지로서는

천국에 대한 관념이 커다란 위안이 되었을 것이다.

여하튼 성 제오르지오도 역시 그러한 로마 제국의 용감한 군인 중의 한 사람이었다.

 

그는 옛적부터 교회의 영광스러운 순교자 중에 끼어 있어

동방 정교회에 있어서는 더욱 더 존경을 받으며 대 순교자라고까지 부름을 받고 있다.

 

그에게 봉헌된 성당은 이미 5,6세기경부터 건립되어 십자군 시대에는

영국의 사자왕(獅子王) 리챠드 1세가

그를 휘하 군대의 보호자로 삼은 이해 일반 군인의 수호 성인으로 공경을 받게 되었다.

 

 

 

전승에 의하면, 이 성인은 280년경에 소아시아의 가파도니아에서 태어나

소년 시절에 군대에 들어가서 디오클레시아노 황제의 총애를 얻어 장교에까지 승진했으나,

그리스도교의 박해가 일어났을 때 황제 앞에 대령해 주저함이 없이 신앙의 귀중함을 논하고

천지만물의 창조주이신 참된 하느님을 신봉하며 자신의 영혼 구원을 도모할 것을 권유했으므로

대노를 사게 되었고 배교의 엄명을 받고도 용감히 이를 거절했다.

 

황제는 이 청년 장교의 무용(武勇)과 씩씩함을 아껴 여러 방법으로 설득했으므로

 “이제는 그만이다”하고 참수형에 처할 것을 명했다.

이처럼 제오르지오가 용감한 순교의 화관을 얻은 것은 303년의 일이었다.

로마 순교록에는 그를 순교자의 화관이라고 칭찬하고 있다.

 

제오르지오의 상본은 보통 몸에 갑주를 두르고 말을 타고 있는 맵시 있는 한 기사(騎士)가

한 마리의 용(龍)을 창으로 찔러 눕히고 있고, 곁에 한 소녀가 서있는 모양으로 그려져 있다.

이는 용에게 막 희생되려는 소녀를 제오르지오가 구출했다는 전설에서 생기게 되었다.

 

그러나 이것은 그리스도의 용맹한 군사인 그의 힘으로 말미암아

용과 같은 마귀의 독아(毒牙)에서 소녀로 상징된 세상 모든 사람이 구원된다는 의미로 해석해야 한다.

(대구대교구홈에서)




 

 

축일:4월23일

아시시의 복자 에지디오(질스)

Beato Egidio d’Assisi
m. Monteripido, Assisi, 23 aprile 1262
Blessed Giles of Assisi
Also known as : Aegidius of Assisi
Died : 1262 at Perugia, Italy of natural causes


 

 

 

BROTHER EGIDIO FROM ASSISI

 

아씨시는 에지디오의 고향마을이라고 기록되어 있다(세 동료들의 전기 32).

그가 태어났음직한 연대는 대략 1190년이라고 되어 있다. 그는 본래 하층민 출신이었고, 농민 가정 출신이었다.

 

첼라노 1생애 25항은 에지디오 형제가

 “단순하고 올곧은 사람이었고, 하느님을 두려워하는 사람”이라고 말하고 있다.

24명의 총봉사자들에 대한 연대기는 에지디오가 손노동을 하였었고,

땀흘려 땅을 일궈 매일 매일 양식을 구할 만한 기술이 있었던 사람이라고 전하고 있다.

 

에지디오는 1208년 4월 23일 프란치스코가 이끄는 새로운 형제 공동체에 들어갔다.

그는 성 프란치스코의 세 번째 동료였다. 프란치스칸 사료들은 그가 수도회에 들어간 것에 대해서 말하고 있다:

1첼라노 25항; 세 동료들의 전기 32항; 페루지아 전기 55항; 완덕의 거울 36항).

1208년 봄, 프란치스코는 Ancona의 Marches에서의 첫 번째 설교 여정에 에지디오를 데리고 갔다

(세 동료들의 전기 33-34항).
 

그후, 에지디오는 스페인의 Santiago de Compostela로 순례를 떠났다

(1첼라노 30항; 익명의 페루지아 전기 18항).

 

 

 

Legend of St Francis: 7. Confirmation of the Rule-GIOTTO di Bondone

1297-99. Fresco, 270 x 230 cm. Upper Church, San Francesco, Assisi

 

에지디오는 1209/1210년에 프란치스코가

인노첸시오 3세를 만나러 갈 때 동행했던 동료들의 중의 한 사람이었다.

인노첸시오 3세는 이 때 작은 형제들의 생활양식 “Propositum vitae”를 구두로 인준해 준 사람이다.

그들은 로마에서 돌아오면서 Orte를 거쳐서 왔고,

포르치운쿨라에 정착할 때까지 리보토르토에서 몇 달간 머물렀다(1첼라노 32-42).

 

24명의 총봉사자들에 관한 연대기는 에지디오를 순회 설교가로 소개하고 있다.

그는 Mantova와 Ferrara 사이에 있는 Ficarolum이라는 곳에 갔으며, 성지와, Ancona, Gargano 산,

대천사 성 미카엘 성지, 성 니콜라오의 성지인 Bari에도 갔다.

 

1219년의 총회는 에지디오를 북아프리카의 Tunis로 파견하였다. 그는 선교를 너무나 열심히 하였기에

그곳의 그리스도교인들은 이슬람인들과 상업 거래에 피해를 줄 것을 두려워하여 그를 이태리로 돌려보냈다.

 

1225년에 에지디오는 리에티로 가서 Clairvaux의 니콜라오 추기경 관저에서 살았는데,

그곳에서 그는 매일의 양식을 구걸하면서 살 허락을 받았다.

1226년 가을, 에지디오는 아씨시로 돌아와서 임종을 앞두고 있던 프란치스코와 함께 살게 되었다.

프란치스코가 죽자 에지디오는 페루지아 근처에 있는 Monteripido 은둔소에서 그의 여생을 보냈다.

그는 1262년 4월 23일 세상을 떠났다. 교황 비오 6세가 그를 시복하였다.

 

 

I Compagni di San Francesco.

 

첫동료들

프란치스꼬는 이제 하느님의 부르심을 확실히 인식하기 시작했다.
다시 말해 물질적인 성당 수리가 아닌 영적 차원의 교회의 쇄신이라는 사실을 깨닫고
그는 활기차게 설교를 시작했다.

바로 이 무렵에 프란치스꼬와 같은 생활을 하고자 하는 첫 동료들이 그에게 합세했으니,
이들은 뀐따발레의 베르나르도, 까따니아의 베드로, 아씨시의 에지디오 등이다.

곧이어 그와 동료들은 12명이나 되어 리보또르또(Rivotorto)에서 거친 움막 생활을 하였다.
성 프란치스꼬는 그의 동료 두 명과 함께 그들이 하고 있는 일이
 하느님의 뜻인지 알기 위해서 성 니꼴라오 성당의 미사에 갔다.
영성체 후 그들은 성서를 3번 펼쳤는데 그 내용들은 예수께서 제자들을 파견하시면서 주신 말씀이었다.

(네가) 완전한 사람이 되려거든 가서 너의 재산을 다 팔아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주어라"(마태 19,21),
길을 떠날 때 아무것도 지니지 말라(루가 9,3),
나를 따르려는 사람은 누구든지 자기를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따라야 한다(마태 16,24).
이러한 말씀을 듣고
그는 우리가 해야 될 일과 미래의 우리 형제들이 해야 될 일을 보십시오. 나의 형제여!하고 외쳤다.

 

프란치스칸 사료들은 에지디오를 열정적이고 심오한 기도를 하는 사람으로 소개하고 있다.

그는 위대한 신비주의자로 여겨지고 있다.

완덕의 거울 85항에 의하면 프란치스코는 작은 형제들의 자질에 대해서 말하면서 이들은

"하느님께 마음을 들어 높이는 것과

에지디오 형제가 가졌던 것과 같은 최상의 덕을 겸비할 것”을 언급하고 있다.

 

1첼라노 25항은 이렇게 말하고 있다:

“얼마 안 있어 에지디오 형제가 그를 따랐다.

그는 단순하였고, 곧은 사람이었으며 하느님을 두려워할 줄 알았다.

그는 아주 오래 살았는데, 거룩하고 의롭고 경건한 생활을 하였으며,

우리에게 완전한 순명과 육신노동과 고적한 생활과 그리고 거룩한 관상의 모범을 남겨 놓았다.”

 

성 보나벤투라는 이렇게 전하고 있다:

“그와 결합한 사람들 중 세 번째 사람은 에지디오 형제였는데, 그는 하느님으로 가득 차 있었으며

모든 점에 있어서 그가 남긴 훌륭한 이름에 합당한 사람이었다. 그는 매우 평범했고 배우지 못했으나

프란치스코가 예언한 대로 영웅적인 덕을 실천함으로써 유명하게 되었고,

천상저 관상의 경지로 들어 높임을 받았다.

그는 계속해서 하느님께 자신의 마음을 들어 올렸으며 내 눈으로 직접 보았듯이

그는 너무도 자주 탈혼에 빠져 마치 그는 지상에서 살고 있을 때 천사들과 맞먹는 생활을 하느 것 같았다”

(대전기 3장, 4항).

 

에지디오는 “dicta beati Aegidii” (복된 에지디오의 금언록)에서 자신의 영적인 체험에 대해 기록하였다.

(R.Brown,"Franciscan mystic.The life of blessed brother Giles of Assisi companion of St.Francis".Hanover House,New York,1962).

*작은형제회홈에서(www.ofm.or.kr)

 

 

 

*아시시의 성 프란치스코 축일:10월4일

*성 프란치스코의 거룩한 상흔 축일:9월17일
*바뇨레지오의 성 보나벤투라 주교 학자 축일 :7월15일

*아시시의 복자 에지디오 증거자 축일: 4월23일

*파르마의 복자 요한 증거자 축일 : 3월20일(3월29일)

*리에티의 복자 안젤로 탄크레디 축일 : 2월13일

 

 

 

이탈리아의 아씨시 태생인 그는 성 프란치스꼬의 초기 동료 가운데 한 분으로 1208년에 수도복을 받았다.

그는 성 프란치스꼬를 수행하여 아씨시 지방의 여러 곳에 복음을을 전하였고,

꼼보스뗄라 순례를 비롯하여, 로마와 성지를 방문하였으나,

사라센인들을 회개시킬 목적으로 갔던 투니스 여행은 실패로 끝났다.

투니스의 신자들은 그의 뛰어난 신앙심이 오히려 역효과를 낼까봐

그를 억지로 배에 태워서 돌려보냈다고 전해온다.

 

그 후 그는 주로 이탈리아에서 살았는데, 1243년경부터는 몬떼 라피드 은수소에서 생활하였다.

그는 자주 탈혼하였고, 체토나에서는 그리스도의 환시를 보았다.

그는 초기 프란치스칸들의 모델로 존경받는다.

 

성 프란치스꼬의 잔꽃송이에는 그에 대한 행적이 나오는데, 성 프란치스꼬는 그를 "원탁의 기사"로 불렀다.

"질스 수사의 금언"이란 책에는 인간성에 대한 깊은 이해와 낙천주의 그리고 뜻깊은 유모어가 빛을 발한다.

(성바오로수도회홈에서)
  
 

 



프란치스코의 3번째 동료인 그는 전형적인 초기 프란치스칸 정신의 소유자였다.
아씨시의 가난한 사람들에게 자신의 재산을 모두 나누어주고 뽀르찌웅꼴라에서 형제회에 입회하였다.
프란치스코는 에지디오를 신앙의 순례자 성자의 설교 여행 중 파견함으로써 그의 소원을 채워주었다.
이태리로 돌아와 페루지아 근방에서 30여년 동안 관상 생활을 하였다.
교황과 고위 성직자들이 영적 지도를 받기 위해 그를 찾아 오곤 하였다.
성 보나벤투라는 에지디오를 만나보고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시대에 사는 것을 자신의 커다란 행운이라고 여기고 있었다.
에지디오는 자신이 회개 생활을 시작한 날과 같은 날에 영원한 천상 생활을 시작하였다
(꼰벤뚜알프란치스코수도회홈에서)



   이탈리아의 아시시 태생인 에지디우스(또는 에지디오)는 성 프란치스코의 초기 동료 가운데 한 명으로 1208년에 수도복을 받았다. 그는 성 프란치스코를 수행하여 아시시 지방의 여러 곳에 복음을 전하였고, 에스파냐의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Santiago de Compostela) 순례를 비롯하여 로마(Roma)와 예루살렘(Jerusalem) 성지를 방문하였으나, 사라센인들을 회개시킬 목적으로 갔던 튀니스(Tunis) 여행은 실패로 끝났다. 튀니스의 신자들은 그의 뛰어난 신앙심이 오히려 역효과를 낼까봐 그를 억지로 배에 태워서 돌려보냈다고 전해온다.

   그 후 그는 주로 이탈리아에서 살았는데, 1243년경부터는 몬테 라피드(Monte Rapido)의 은둔소에서 생활하였다. 그는 자주 탈혼하였고 체토나(Cetona)에서는 그리스도의 환시를 보았다. 그는 초기 프란치스코 회원들의 모델로서 존경받는다. 성 프란치스코의 잔꽃송이에 그에 대한 행적이 나오는데, 성 프란치스코는 그를 ‘원탁의 기사’로 불렀다. “에지디우스 수사의 금언”이란 책에서는 그의 인간성에 대한 깊은 이해와 낙천주의 그리고 뜻 깊은 유머가 빛을 발한다. 그는 질(Giles)로도 불린다.
(가톨릭홈에서) 

 

 

 

■성 프란치스코의 잔꽃송이 (1980, 분도출판사)

이 책은 성 프란치스꼬와 그의 동료들에 관한 일화와 여러 이야기들을 엮은 것으로 두 부분으로 되어 있다.

제1부는 총 53장으로 되어 있으며, 

성 프란치스꼬와 그의 몇몇 동료에 관해 수집된 여러 가지 이야기들이 들어 있다.

제2부는 "성 프란치스꼬의 오상에 관한 몇 가지 고찰"이라는 다른 제목을 갖고 있다.

이 부분은 단지 5장으로 되어 있으나,

성 프란치스꼬의 생애에 가장 빼어난 사실 중의 하나인 오상에 관해 아주 상세히 말해주고 있다.

 

’잔 꽃송이’는 성 프란치스코에 관한 전기 가운데 특별한 가치를 지니고 있다.

성인은 단순하고 순박한 분이었다. 그는 어느 누구보다 인간의 단순함과 소박함에 더 많은 가치를 두었다.

그는 모든 것을 하느님이 창조하신 그대로 보기를 좋아했다.

성프란치스코는 복은성서의 한 구절에서 "어린아이 같은 자라야 하느님의 나라에 들어갈 것이다"

(마르10.5)라는 구절을 특히 좋아했다......

  

 

■아씨시 성 프란치스코의 생애(토마스 첼라노 저, 1986, 분도출판사)

제1생애(Vita Prima).제2생애(Vita Secunda).제3생애(Vita Tertia)

 

아씨시 성 프란치스코의 최초의 전기작가인 토마스 형제는

중부 이태리의 조그마한 도시 첼라노(Celano)에서 태어났다.

그래서 그를 언제나 토마스 첼라노라고 부른다. 그의 출생 년도는 확실치가 않다.

바티칸에서 발간되고 있는 월간지 「교회」(Eccelesia,1960년)에서 한 작가는

토마스 첼라노의 출생년도를 1185년으로 잡고 있다.

이것이 비록 확실한 것은 될 수 없지만 그래도 비교적 근사한 것이라 볼 수 있는데,

그 이유는 그의 생애를 여러 면으로 고려해 볼 때 12세기 말경에 출생했음이 확실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의 가족 관계에 대해서는 알려진 바 없다......【책 머리에 中】  

 

■성 프란치스꼬의 대전기 (성 보나벤뚜라 저, 1976, 분도출판사)

성 보나벤뚜라(Bonaventura: 1221~1274.7.15) 본명은 요하네스 피단짜(Johannes Fidanza).

위대한 스콜라 신학자이며 뛰어난 성인으로 로마 교황령에 있는 바그노레아에서 출생.

17세에 프란치스꼬 수도회에 들어갔고, 후에 파리대학에서 할레시우스에게 사사하였으며,

27세 때 이미 파리대학 교수로서 신학을 강의하였다. ......【작가의 소개 중에서】 

*작은형제회(프란치스코회), 꼰벤뚜알프란치스코수도회홈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