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중 제17주일: 나해
오늘은 지난 주일에 이어 예수님을 따라다니던 군중들에 대한 예수님의 목자다운 배려인 빵을 많게 하신 기적을 전하고 있다. 이것을 마르코 복음에서 취하지 않고 요한복음에서 취하는 것은 이 기적에 이어 성체성사에 관한 이야기가 계속되고 있고, 그리스도인들의 삶의 정점이며 원천인 성체성사에 대한 교의적 근거를 제시해 주고 있기 때문이다. 앞으로 21주일까지 요한복음에서 언급되는 성체성사에 관한 것이 중심 주제가 될 것이다.
예언자 엘리사는 적은 음식으로 많은 사람을 배불리 먹였고 그 음식이 남기까지 하였다(2열왕 4,44 참조). 또 엘리사가 빵을 사람들에게 나누어주라고 하자 제자가 놀랐던 것과(2열왕 4,43) 필립보의 경우와 비슷하다(요한 6,7). 복음사가들은 구약의 여러 가지 기적들의 문학형식을 모방하고 있는 것으로도 볼 수 있다.
복음: 요한 6,1-15: 오천 명을 먹이신 빵의 기적
예를 들면, 만나에 관해 이야기하면서 모세에 대해 언급하며(요한 6,31-33.49 참조), 장소에서도 따로 떨어진 산에서 기적을 행하시고(3절), 그때는 “유다인들의 축제인 파스카가 가까운 때였다.”(4절) 전하면서 구약의 이야기들을 모방하고 있다. 이것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구약성경의 구원적 메시지의 “완성”이라는 사실을 강조하기 위한 것이며, 과거 구원의 예표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이루어진다는 것을 말하려는 것이다.
그러기 때문에 빵의 기적을 본 군중들은 모세가 백성들에게 약속하여 오랫동안 기다리게 한(신명 18,15) 그 예언자로 생각을 하고 있다. “사람들은 예수님께서 일으키신 표징을 보고 ‘이분은 정말 세상에 오시기로 되어 있는 그 예언자이시다.’하고 말하였다.”(14절). 그리고 모세의 경우와 같이 예수께서도 산에서 기적을 행하셨고, 이 빵의 기적은(10절) 그러기에 새로운 그리스도교적 파스카를 상징하고 있다. 즉 옛것의 “완성”이면서 그것을 무한히 초월하는 “새로움” 자체임을 의미한다. 이 빵의 기적은 바로 이 ‘새로움’을 이해하게 해 주고 있다. “그래서 그들이 모았더니, 사람들이 보리 빵 다섯 개를 먹고 남긴 조각으로 열두 광주리가 가득 찼다.”(13절).
빵을 나누어 받은 군중이 제1독서의 백 명이 아니라 “장정만도 그 수가 오천 명쯤”(10절)이라는 사실, 그리고 만나는 지나치게 거두어들일 수 없었으나(탈출 16,20) 예수께서는 “버려지는 것이 없도록 남은 조각을”(12절) 모으라고 한 것도 이 기적의 특수성을 말해 준다. ‘열둘’이라는 숫자는 이스라엘의 열두 지파 외에 완전한 숫자를 의미한다. 이 ‘메시아적 빵’은 이제 오천 명에게만이 아니라 모든 사람에게 나누어짐을 의미한다. 즉 예수님의 행동과 ‘감사드린다, eucharistéo’(11절) 라는 뜻의 성체성사의 특성이 예수께서 행하신 기적의 새로움을 말해 준다. 요한복음에는 최후만찬을 기술하고 있지 않지만 여기서 그것을 암시하고 있다.
그런데 문제는 예수께서 “그들이 와서 당신을 억지로 모셔다가 임금으로 삼으려 한다는 것을 아시고, 혼자서 다시 산으로 물러가셨다.”(15절) 한다. 군중들은 기적을 보고 감동하여 열광은 하지만 본래의 의미는 파악하지 못하였다. 그래서 그 후에도 예수님을 찾은 것은 빵과 물질적 이익 때문에 모여들었다(요한 6,26절 참조). 그들이 생각하고 찾고 있던 메시아는 권능을 가지고 무엇이나 거저 베풀어주시고 물질적인 것까지도 해결해주는 메시아였다. 즉 편의주의적 메시아이다. 그러니 그리스도를 찾는 것 같지만, 자기 자신만을 찾고 있다. 자기 자신만을 찾을 때, 그리스도를 계시해주는 표지로서의 기적을 이해하지 못하고, ‘신앙’에 자기 자신을 여는 것을 방해한다. 그래서 그 잘못된 이해를 잠재우기 위해 예수께서는 산으로 피하시는 것이다. 그래서 당신의 생각과 군중들의 생각이 다르다는 것을 확실히 하신다.
“저 사람들이 먹을 빵을 우리가 어디에서 살 수 있겠느냐?”(5절) 하신 것은 제자들이 가난과 고통에 있는 사람들에 관한 관심과 책임감을 느끼도록 촉구하시는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예수께서 베푸신 빵의 기적을 깨닫고, 당신 자신을 내어주시는 무한한 사랑인 성체성사에 암시된 표지의 깊이를 깨닫는 정도에 따라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에게 진정한 나눔을 가질 수 있다는 것을 명심하여야 한다. 현세적이고 편의주의적인 신앙은 진정한 빵의 의미를 왜곡하여 이기적인 신앙으로 흐르기 쉬운 것이며, 하느님을 자칫 기계적인 하느님으로 만들기 쉽다.
바오로 사도께서는 사랑에 기인한 ‘단일성’을 말한다. 오늘 에페소서의 내용이 사랑으로 서로 너그럽게 대하라고 하면서 교회 공동체가 하나가 되어야 함을 말하고 있다. 그리스도교 신자를 신앙의 단일성에로 이끄는 요소들은 많다. 하나이시며 같은 성령, 한 분이신 하느님 아버지, 주님의 성체로 이루어지는 교회의 몸도 하나이다. “빵이 하나이므로 우리는 여럿일지라도 한 몸입니다. 우리 모두 한 빵을 함께 나누기 때문입니다.”(1코린 10,17).
성체성사는 단일성과 사랑의 원동력이다. 이것을 깨달을 때, 우리는 보리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가지고 있던 소년이 그것을 군중 앞에 내어놓을 수 있었듯이 우리도 우리의 사랑을 주님 앞에 드릴 수 있으며, 이것을 가지고 기적을 이루실 수 있을 것이며, 또한 다른 사람들과 함께 나누기 위해 그들을 찾아가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성체성사의 의미를 즉 당신 자신을 무한히 내어주시는 그분의 사랑을 우리가 깨닫고 그 사랑 안에 우리도 하나가 될 수 있도록 기도하여야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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