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중 제19주일: 나해
성체성사의 신비는 오직 신앙을 통해서만이 접근할 수 있다. 그런데 이 신앙은 항상 도전을 받는다. 오늘 복음 내용이 이 점에 대해 말해주고 있다. 주님의 제자들까지도 믿기를 거부한다는 것은 신앙의 파탄을 의미한다. “이 말씀은 듣기가 너무 거북하다. 누가 듣고 있을 수 있겠는가?”(요한 6,60). 엘리야는 일어나서 먹고 마시고는 “힘을 얻은 그는 밤낮으로 사십일을 걸어, 하느님의 산 호렙에 이르렀다.”(1열왕 19,8). 엘리야의 여정은 모세가 이스라엘 백성을 이끌고 40년 동안 광야를 헤맬 때 일어났던 빵과 물의 기적들이 새롭게 이루어지는 것을 볼 수 있다. 엘리야는 그렇게 음식을 통하여 힘을 얻고, 당신 백성과 계약을 맺으신 시나이산으로 간다. 우리도 마찬가지이다. 하느님을 향한 우리의 여정에도 하느님께서 주시는 생명의 음식 즉 주님의 몸과 피로써 양육될 때 하느님께 이르게 된다.
복음: 요한 6,41-51: 나는 하늘에서 내려온 살아있는 빵이다
“나는 하늘에서 내려온 빵이다.”(41절). 이 말씀 때문에 유다인들이 웅성거리고 있다. 믿지 못하는 것이다. 그것은 예수님에 대한 모든 것, 즉 부모, 생활환경을 다 알고 있다고 착각하는 데 있다. 자신들의 체험을 절대적으로 생각하는 한 그 이상의 것은 사실일 수가 없다. “저 사람이 어떻게 ‘나는 하늘에서 내려왔다.’고 말할 수 있는가?”(42절). 이런 마음 때문에 빵의 기적도 기억하지 못하고 그런 일을 할 수 있는 신적인 면도 잊어버리고, “세상에 오시기로 되어있는 그 예언자”(6,14)도 까맣게 잊고 있다.
우리는 언제나 받아들이기에 힘든 하느님의 행위와 말씀의 신비를 대하고 있다. 여기서 우리의 자세는 하느님의 말씀을 겸손되이 순종하는 자세로 듣는 것이다. 하느님은 사람을 차별하시는 분이 아니며, 어떤 사람은 그 신비에 초대하고 어떤 사람은 거절하는 분이 아니시며, 신앙은 하느님께서 변덕스럽게 주시는 선물이 아니다. 하느님께서는 모든 사람에게 신앙을 베풀어 주시는 분이시다. “그들은 모두 하느님의 가르침을 받을 것이다.”(45절). 그러나 모두가 다 그 가르침을 받아들이는 것은 아니다. 이것을 그 군중들에게서 볼 수 있다. 그들은 기적을 체험하고 직접 그분을 만났지만, 하느님 사랑의 신비에 대한 그분의 가르침을 받아들이지 않는다.
이제 그 신비를 체험한다는 것은 인간에게 달려 있다는 것이다. 즉 “듣고” “배운다.”라면 그리스도를 하느님의 아들로서 받아들일 수 있고, 듣기만 하고 배우려 하지 않고 논쟁만 하려고 한다면 예수님은 단순히 “요셉의 아들”(42절)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이렇게 믿음이 변변치 않은 지성이나 닫힌 마음 때문에 믿음을 갖지 못한다면 그것이 죄가 되는 것이다. 이 수군거린다는 말은 구약의 이스라엘 백성들을 위해 많은 기적을 보여주셨음에도 불구하고 광야에서 식량과 물이 부족하다고 투덜거렸던 것을 표현하는 것과 같이 사용되었다(참조: 탈출 16,2-3; 17,3; 민수 11,1; 14,27; 1코린 10,10). 즉 굳어진 마음 때문에 예수를 믿지 못하고 파멸의 길로 나가는 것이다. 이렇게 하느님께서 베푸시는 선물을 받지 않음으로써 그들 스스로 구원계획 밖에 있게 된다. 그러므로 신앙은 하나의 커다란 모험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커다란 유익에 도달하는 길이다.
“나는 생명의 빵이다.”(48절). 이 말씀은 인간들에게 당신 자신을 끊임없이 내어주시는 성체성사의 신비에 대한 말씀이다. 참으로 유다인들에게는 알아듣고 받아들이기 힘든 지나치게 감상적인 말씀이라고 할 수 있다. 이것은 우리의 지성으로는 해결될 수 없는 것이다. 이것은 우리의 마음과 믿음으로 받아들여 우리 자신을 변모시킬 수 있도록 하지 않는다면 그 신비를 거부하는 것보다 더 나쁜 것이다. 예수님의 말씀은 상징적인 의미에서가 아니라 실질적인 것으로 표현되고 있다. “내가 줄 빵은 세상에 생명을 주는 나의 살이다.”(51절). 이 말씀을 듣고 유다인들은 드러나게 거부반응을 일으킨다. “저 사람이 어떻게 자기 살을 우리에게 먹으라고 줄 수 있단 말인가?”(52절) 하며, 유다인들 사이에 말다툼이 벌어졌다.
예수님의 살은 연약한 존재이지만, 신적 존재에 결합한 이 살을 인간이 먹고살 수 있도록 주셨다. 그러기에 성체성사를 통해서 강생의 신비가 계속된다. 이 얼마나 귀중한 성사인가! “세상에 생명을 주는 나의 살이다.”(51절) 라는 것은 세상의 생명을 위해 그 살이 바쳐진다는 것이다. “이것은 너희를 위해 바칠 내 몸이다”(1코린 11,24; 루카 22,19)라는 성체 축성의 형식과 같음을 알 수 있다. 즉 많은 사람의 구원을 위해 즉 세상의 생명을 자기 자신을 봉헌할 십자가의 죽음에 대해 언급하고 있다. 그러므로 성체성사의 신비는 또한 수난 신비의 계속이기도 하다.
예수께서 죽음에 처한 것은 사람들에게 생명을 주기 위한 것임을 강조하고자 한다. 그러므로 성체성사는 생명의 신비이다. “나는 하늘에서 내려온 살아있는 빵이다. 누구든지 이 빵을 먹으면 영원히 살 것이다.”(51절) 그리스도께서는 성체를 통해 우리를 오늘 지금 여기서부터 영원한 생명으로 이끌어 주신다. 그 생명은 주님의 몸을 계속 먹음으로써 양육할 수 있다. 주님께서는 이 성체성사를 통하여 강생의 신비와 수난의 신비를 지금, 이 순간도 계속하고 계시기 때문에 여기서 생명을 얻을 수 있는 것이다.
이렇게 바오로 사도는 그리스도의 몸을 이루는 일원으로서의 우리가 살아가야 할 새로운 생활에 대해 말하고 있다. 우선은 성령께 대한 충실성이다. 그분은 일치의 영이시기 때문에 교회 안에 분열이 있으면 슬퍼하신다(에페 4,30). 그리고 그리스도께서 보여주신 모범대로 서로 나누며 또한 용서하는 사랑을 살아야 한다고 하셨다(에페 4,32). 성체성사는 그리스도께서 돌아가시기까지 우리를 사랑하신 그 사랑의 거대한 불꽃을 상기시켜줄 뿐 아니라 항상 처음부터 새롭게 해주는 성사이다. 우리는 이 성사로 참 생명을 얻게 된다. 당신 자신을 끊임없이 내어주시는 그 사랑의 성사의 삶을 우리도 실천하며 살아가도록 주님의 도우심을 청하여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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