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오상선(바오로) 신부님

~ 주님 탄생 예고 대축일 / 오상선 신부님 ~

 

주님 탄생 예고 대축일은 주님의 대축일이기도 하고 성모님의 대축일입니다. 그리고 인류 구원의 수혜자인 우리 모두의 대축일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벗님 여러분 모두에게 축하의 인사를 보냅니다.

어제 우리는 하느님 친히 당신의 이름, '야훼'(나는 있는 나다)를 모세에게 가르쳐 주신 것에 대해 묵상하였습니다. 구약의 하느님 야훼라는 이름이 이제 신약으로 넘어오면서 좀더 구체화됩니다. 그냥 계시는 하느님이 아니라 "우리(나)와 함께" 계시는 하느님, '임마누엘'이 되십니다. 그 예고를 오늘 듣습니다.

예고편을 보고나면, 본 영화나 드라마를 보고싶게 하지요. 때론 예고편만 보아도 재미있지요. 오늘 우리는 인류역사상 가장 드라마틱하고 감동적이고 충격적인 영화의 예고편을 봅니다. 제목을 어떻게 달면 될까요? <임마누엘>. 예고편의 내용은 다음과 같습니다.

약혼한 어느 시골 처녀가 어느날 갑자기 천사로부터 아기를 잉태하리라는 청천벽력과도 같은 소식을 접하지요. 그것도 정상적인 남녀의 관계를 통하지도 않고 성령의 힘으로 아기를 갖게 되리라는 말도 안 되는 설정입니다. 이것을 받아들일 것인가 말 것인가가 절망에 빠져 멸망의 위기에 처해 있는 인류를 구원할 수 있는가의 핵심 포인트지요. 결론은 그 처녀가 이를 받아들임으로써  인류 구원의 역사가 시작된다는 이야기입니다. 

터미네이터의 원작(?)이 이 이야기일지도 모릅니다. 어때요? 같이 이 영화 보시지 않을래요? 사실 전 영화보러 잘 안 갑니다. 원작소설을 더 즐기는 편입니다. 성경의 이야기들이 그 어떤 영화보다 흥미진진하고, 세상 사람들 살아가는 현장 삶이 한편의 영화와 다름없고, 자연의 변화들이 그 어떤 영화 장면보다 더 아름다우니 말이예요. 그러나 이 영화만은 꼭 벗님에게 보여드리고 싶어요. 사랑하는 벗님과 함께 감상하싶어요. 함께 보실래요!?

"하느님께는 불가능한 일이 없다."(루카 1,37)

인간은 생물학적·물리적·논리적 질서에서 살짝 벗어나기만 해도 긴장합니다. 살다보니 세상을 다 가질 것 같았던 어린시절 꿈이 점점 쪼그라들면서 인간에게는 가능한 것보다 불가능한 것이 더 많다는 걸 알아가기 때문이겠지요. 그렇지만 하느님께는 불가능한 일이 없습니다. 아니 불가능한 일이 없어서 하느님이십니다. 그분은 당신의 완전함, 온전함, 전체성에 모두, 전부를 담고 계시기에 예외의 시·공간이 없습니다. 그처럼 불가능을 모르시는 완전하신 분께서 작고 여린 소녀 마리아에게 미리 당신의 뜻을 알리시고 동의를 구하시는 모습이 참으로 인상적입니다.

마리아는 이렇게 응답합니다. "보십시오, 저는 주님의 종입니다. 말씀하신 대로 저에게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루카 1,38) 이 응답의 순간에 마리아는 앞으로 자신에게 어떤 일이 펼쳐질지 조금이라도 상상할 수 있었을까요?

"보십시오, 젊은 여인이 잉태하여 아들을 낳고 그 이름을 임마누엘이라 할 것입니다."(이사 7,14)

구원자 메시아를 기다리는 역사적 시점에서, 이스라엘의 딸이라면 율법과 예언서를 통해 이사야 예언자의 이 선포를 어느 정도 마음에 담고 있었을 것 같습니다. 물론 구체적 실현 과정에 대해서야 소상히 알 수는 없었겠지만, 뭔가 평범치 않은 길임은 마리아도 감지하지 않았을까 싶습니다. 엄청난 영광과 축복으로 보이는 운명의 당사자가 본인일 수 있는 이 알림의 순간에 마리아는 알면서도, 또 모르면서도 하느님께 온전한 신뢰를 실어 응답한 것입니다. 표현만 좀 다를 뿐, 히브리서 저자가 밝히는 예수 그리스도의 응답, "보십시오, 저는 당신 뜻을 이루려 왔습니다."(히브 10,9)와 같은 마음, 같은 내용일 겁니다.

사랑하는 벗님 여러분, 어떻습니까? 정말 벗님들의 생각에 하느님께는 불가능이 없다고 보십니까? 그렇다면 혹, 여러분 스스로 하느님의 가능성을 불가능하게 만들어 버린 적은 없습니까? "말씀하신 대로 제게 이루어지소서."라고 믿음과 겸손을 다해 용기 있게 응답해 놓고서는, 무지와 욕망, 잘못된 식별로 하느님께서 열어주신 길을 망쳐버린 뒤, 두고두고 후회하며 아파한 적은 없습니까?

단 한 번의 믿음의 고백을 그 이후로도 쭈욱 영원까지 유효하게 살 수 있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만, 나약한 우리에게는 참 힘든 일이지요. 어쩌면 원죄에 물들지 않으신 것을 빼고는 우리와 같은 인간이셨던 마리아도 저 응답을 평생 되풀이하며 갱신하시지 않았을까 감히 생각해 봅니다. 특히 이해할 수 없는 상황과 아드님의 수난, 죽음을 맞닥뜨리셨을 때는, 하느님께 "당신이 뜻하신 대로 이루시라"고 말씀드리기까지 아득해지는 머리와 무너지는 억장을 부여잡고 온 힘을 다해 피 토하듯 믿음을 고백하시지 않으셨을까 싶습니다.

그렇습니다. 하느님께는 불가능한 일이 없습니다. 우리가 불가능하게 망쳐버린 순간과 지점은 있을 수 있을 수 있습니다만 하느님께는 불가능한 일이 없습니다. 그러니 그 지점 그 순간에 주저앉아 울고 있다면, 거기서부터 다시 가능함을 열어주시는 하느님을 향해야 합니다. 그분의 "불가능 없음" 역시 한 번으로 끝나지 않고, 우리의 무지와 욕망과 잘못된 식별이 낳은 실패의 순간, 그 지점에서마다 새롭게 갱신되기 때문입니다.

안타깝지만 나약한 우리는 또 넘어질 수 있고 그분께 불가능의 흠집을 낼 수 있습니다. 그래도 그때마다 마리아의 저 고백을 다시 외치며 무너진 자리에서 스스로를 일으켜 세워야 합니다. 우리의 이 처절한 믿음을 보신 하느님께서 그때마다 우리를 일으키시며 당신의 "불가능 없음"을 드러내실 것입니다. 죄인인 우리는 그렇게 앞을 향해 나아갑니다.

천사가 오늘 벗님 여러분에게 나타나서 이렇게 말할 겁니다. “은총이 가득한 이여, 기뻐하여라. 주님께서 너와 함께 계시다.”(루카 1,28) 여러분은 어떻게 반응하실까요? "무슨 좋은 일이 있을려나?" "이게 무슨 말일까?" "에이, 개꿈이겠지, 뭐?" 2천년 전 나자렛의 처녀 마리아에게 일어났던 일입니다. 나에게 일어난다면 어떨까요?

천사는 나에게 기뻐하라고 하네요. 왜 기뻐해야 하느냐구요? 하느님께서 나와 함께 계시기 때문이라네요. 여러분은 기쁘게 살고 계시나요? 기쁘다면 왜 기쁘고, 기쁘지 않다면 왜 그런가요? 사실 우리 삶이 늘 좋은 일만 있을 수는 없기 때문에 좋을 때 기쁘고 안 좋을 때 슬프고 괴로울 테지요. 그러나 이런 기쁨은 조건에서 비롯되는 것이기에 우리가 조절하고 획득하기는 참으로 어렵습니다.

이런 우리에게 천사는 우리가 늘 어떠한 상황에도 기쁠 수 있는 이유를 말해주네요. "하느님께서 우리와 함께 계신다"(임마누엘)는 것만 확실히 알고 그렇게 믿기만하면 가능한 일이라는 겁니다. 하느님께서 나와 함께 계시는데 무슨 걱정이 있고 무엇이 두렵겠습니까?

부활의 증인으로 살아가야 하는 우리는 성모님처럼 기쁨의 사람이 됩시다. 어떤 상황에도 기쁨을 잃지 않는 부활의 증인이 됩시다. 어렵다구요? 아닙니다. 주님께서 여러분과 함께 계십니다. 제가 천사로서 오늘 여러분에게 이 메시지를 전합니다. 축하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