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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상선(바오로) 신부님

~ 사순 제 4주일 / 오상선 신부님 ~

 

사순절 미사 독서에서 "되찾은 아들" 비유를 종종 만나는 이유를 우리 각자는 잘 압니다. 저마다에게 뿐만 아니라 또 공동체적으로도 특별한 의미가 있는 부르심이 되기에 그렇지요.

오늘은 이 비유 말씀에 담긴 방향성과 운동성이 각별하게 다가왔습니다.

"그때에 세리들과 죄인들이 모두 예수님의 말씀을 들으려고 모여들고 있었다."(루카 15,1)

먼저 이처럼 세리와 죄인들이 예수님을 향해 다가오고 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싶어합니다. 그동안 종교지도자들에게서 들어온 질책이나 비난, 무시의 말과는 달리, 자기들을 사람 대접하고 진정 염려해 주시는 예수님의 말씀으로 갈증과 허기를 채우고 싶어서 모여듭니다.

이를 못마땅해하는 바리사이와 율법 학자들에게 예수님께서 들려주시는 비유 안에서도 매우 다양하고 역동적인 방향성과 운동성을 만날 수 있습니다.

먼저 작은 아들이 유산을 요구해 "먼 고장으로 떠났다."(루카 15,13)고 합니다. 그는 제 욕망과 호기심을 채우기 위해 아버지와 집과 가족의 품에서 멀리 떨어져 나갑니다. 물리적 거리는 물론 심적 · 정서적으로도 분리를 의미합니다. 그곳에서 그는 마음껏 방종하게 지내면서 아버지 품 안에서 익힌 삶과 정반대의 길을 걷습니다. 결과는 재산 허비 · 탕진, 굶주림, 구걸, 거부 체험입니다. 굶주림에 지친 그에게 품팔이꾼들도 배불리 먹던 아버지 집의 기억이 떠오릅니다. 지금 그에게 가장 절실한 것을 통해 돌아갈 의향이 싹트게 됩니다.

"그리하여 그는 일어나 아버지에게로 갔다."(루카 15,20) 복음사가는 집이라 하지 않고, "아버지에게로"라고 표현합니다. 우리가 하느님과 하느님 나라를 굳이 분리하지 않듯이 아버지와 아버지 집 역시 같은 의미, 곧 "제자리"를 의미합니다. 작은 아들은 욕망의 탐닉과 자기파괴적 삶을 멈추고 "제자리"를 향해 나아갑니다.

한편, 멀리서 그를 발견한 아버지가 그를 향해 달립니다. 이미 한 번 시작된 사랑은 멈출 수 없습니다. 끊어낼 수도, 없었던 일처럼 무효화시킬 수도 없기에, 아들의 부재 동안 내면으로 더 절절히 동동거리면서도 외적으로 잠시 멈추어 있던 아버지의 사랑에 발동이 걸립니다. 그동안에도 마음은 늘 그를 향해 달렸기에 발걸음을 다시 시작하는 건 문제도 안 됩니다. 아들의 돌아오는 발걸음은 굶주림과 불안에 지쳐 무겁지만 그를 향해 달리는 아버지의 발걸음은 노구임에도 재빠릅니다. 행여 괜한 자존심으로 작은아들 맘이 변할까 조급하기까지 하지요.

"달려가 아들의 목을 껴안고 입을 맞추었다."(루카 15,20) 마침내 서로를 향한 방향성과 운동성이 접점을 찾습니다. 목을 껴안는 것은 반가움과 친밀감의 표현인 동시에 다시는 서로를 잃고 싶지 않다는 결속의 욕구입니다. 입맞춤은... 아, 이 아름다운 입맞춤은 우리를 창세기의 한 대목으로 이끌어 갑니다. "주 하느님께서 먼지로 사람을 빚으시고 그 코에 생명의 숨을 불어넣으시니 사람이 생명체가 되었다."(창세 2,7)

하느님께서 입맞추심으로 사람이 생명을 얻었듯이, 죄로 죽었던 작은아들이 아버지의 입맞춤으로 새 생명을 얻습니다. 이 입맞춤으로 방종과 굶주림, 구걸과 거부당함로 무너졌던 그의 자존감이 되살아나고, 떠나기 전에 자신이 누구였는지를 기억해 낼 수 있게 됩니다. 아버지의 입맞춤은 흡사 마술과 같습니다. 사랑의 마술입니다. 이를 사도 바오로는 다음의 말씀으로 군더더기 없이 정리합니다.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그는 새로운 피조물입니다. 옛것은 지나갔습니다. 보십시오, 새것이 되었습니다."(2코린 5,17)

서로를 향해 나아간 두 존재의 만남에서 사랑의 절정이 "화해"라는 이름으로 이루어집니다. 그런데 한 쪽이 일방적으로 잘못을 저지르고 다른 한 쪽이 일방적으로 당했다면 "화해"라는 과정보다 "회개와 용서"의 과정이 필요하다고 생각하지요. "화해"라면 자기 허물에 대해 쌍방이 인정을 하고, 각자의 과실에 대해 상대방에게 동시에 사과하고 또 서로를 용서해 주면서 이루어지는 과정이라 볼 수 있고요.

그런데 사도 바오로는 제2독서에 짧게 인용된 본문에서 "화해"(2코린 5,18.19.20)라는 말씀을 다섯 차례나 반복하다가 급기야는 "하느님과 화해하십시오!"라고 직설을 날립니다. 감히 하느님과 화해라뇨? 하느님께서 뭘 잘못하셨다고? "그분이야 그저 잘못한 사람이 엎드려 빌면 용서해 주시는 입장이지 화해는 무슨..." 이라는 생각이 들 수도 있습니다. 엄밀히 말해 허물은 아버지 품을 떠나고 곁길에서 방종하고 죄지은 사람 편의 문제이고, 하느님은 아무 잘못이 없으시니 말입니다.

이렇게 생각해 보면 어떨까요? "회개와 용서"의 관계일 때는, 한쪽이 다가가 빌면 다른 쪽이 받아들이고 풀어주는, 일방적인 방향성과 운동성을 지녔고, "화해"일 경우는 서로가 서로를 향해 동시에 나아가는 방향성과 운동성을 지녔다고요.

복음의 아버지처럼 하느님도 달리십니다. 돌아오는, 아니 돌아갈까 마음 먹기도 전에 우리를 향해 달리기 시작하는 분이십니다. 그분이 먼저 화해하고 싶어하십니다. 아무 잘못도 없이, 아니 굳이 잘못이라면 잘못하는 우리의 자유의지를 허용한 잘못 밖에 없으면서, 우리와 화해하고 싶어하십니다. 용서를 빌기도 전에 목을 껴안고 입맞추며 새로운 피조물로 재창조해 주시려 늘 만반의 준비가 되어 계십니다. 영화 촬영 때 고Go 사인이나 큐Q 사인 직전에 외치는 "레디~~"나 "스텐바이~~" 상태로 항상 우리를 기다리고 계십니다.

잠시 큰아들과 아버지의 방향성, 운동성도 봅니다. 큰 아들은 "화가 나서 들어가려고도 하지 않습니다."(루카 15,28) 사랑을 향하다 말고 "멈춤"입니다. 정체되고 고착됩니다. 사랑은 특성상 흘러야 하는데 이처럼 멈추어 고이기 시작하면 탁해지고 썩게 됩니다. 그러니 아버지는 또 달릴 수 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아버지가 나와 그를 타이르지요". 상대방이 어떻건 간에 아버지는 여전히 사랑의 방향성과 운동성을 지니고 급박하게 움직입니다. 어디로 튈지 모르는 잠재적 죄인 또는 활성화된 죄인인 우리에 대해 하느님께서도 그러고 계십니다.

제1독서는 모세 사후에 이스라엘이 여호수아의 인도로 요르단 강을 건너 약속의 땅에 들어간 이야기를 전합니다. 거기서 하느님께서는 그들이 할례를 받게 하시어 "이집트의 수치를 치워"(여호 5,9) 버리시고 이스라엘 자손들은 예리고 벌판에서 하느님의 업적과 그 완성을 기리며 파스카 축제를 지내지요. 이집트 탈출 후 여기에 이르기까지 사십 년 동안 광야에서 그들은 하느님과 함께 끊임없이 움직여 왔습니다. 구름기둥, 불기둥, 장막이 하느님 현존의 표징입니다. 오로지 한 방향성, 한 운동성을 지니고 배신과 징벌 간청과 용서 등 우여곡절 끝에 하느님께서 이스라엘을 약속의 땅으로 들어오게 하신 겁니다. 그리고 여기서 척박한 광야살이 중 하느님 사랑의 또 다른 징표였던 "만나가 멎습니다."(여호 5,12)

함께 한 방향으로 움직이건, 서로를 향해 움직여서 만남을 이루건, 하느님과 우리는 끊임없이 함께 움직입니다. 모든 살아있는 존재는 움직이기 마련인데다, 특히 사랑이 본성상 그렇게 움직이기 때문입니다.

하느님과 함께 약속의 땅에 들어선 이들은 축제를 벌입니다. 또 아버지와 아들의 감동적인 만남 이후에도 잔치가 벌어지지요. 큰아들과 아버지의 만남은 어떻게 귀결될지 모르겠습니다만, 그건 이스라엘이 약속의 땅 정착 후 어떻게 살아갔는지, 작은아들이 귀향 후 어떻게 변화되었는지의 문제처럼 열려 있습니다. 하느님과 우리의 역사는 일회적 회개와 용서, 화해를 이룬 뒤 동화 속 이야기처럼 "그들은 오래오래 행복하게 잘 살았습니다."로 끝나지 않는 것처럼 말입니다.

범죄도 실수도 용서도 화해도 우리가 살아있는 동안 끊임없이 반복될 것입니다. 어디서 누구와 어떤 상태가 되더라도 아버지, 아버지 집, 아버지 품, 즉 제자리를 향한 방향성과 운동성만은 잊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그분은 이미, 여전히 우리를 향해 움직이고, 또 움직이실 것시니 우리만 그 자리의 기억을 놓치지 않으면 됩니다. 아멘.

3월 한달도 말씀 안에서 수고많으셨습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