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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상선(바오로) 신부님

~ 사순 제 4주간 목요일 / 오상선 신부님 ~

벗님 여러분, 꼭지가 돌아버릴 정도로 화가 치밀어 사고를 치를 것만 같은 순간이 살아오면서 한두 번은 있었겠지요? 어떻게 참아 견딜 수 있었나요? 옆에 친구나 지인이 있어 나를 붙들고 막아주진 않았나요? 말리는 사람이 없었더라면 어떻게 되었을까요?

오늘 하느님께서도 그렇게 열받으셨다네요. 이집트 땅에서 고생하던 유다인들을 그렇게 애써서 탈출하게 만들었고 이제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으로 데려가려 애쓰고 있는데, 모세와 계약판을 마무리하고 있는데, 그 사이를 못참고 황금 송아지를 만들어 그걸 하느님이라고 숭배하고 있으니 참으로 기가차고 말이 나오지 않았지요. 도무지 이러한 백성과는 같이 일할 수 없다는 생각에 싹 다 쓸어버리고 다시 시작하고 싶었습니다. 그러자 모세가 뜯어 말립니다. 하느님, 당신이 구원하시고 내치시면 말이 안 된다고. 제발 참으시라고. 그제야 하느님은 못이긴 채 하시며 분노를 거두십니다.

복음에서는 당신께 의혹의 눈초리를 보내는 유다인들에게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이 이어집니다. 예수님은 이미 그들의 마음을 잘 알고 계시기에 직설적으로 말씀하십니다. "그분께서 보내신 이를 너희가 믿지 않기 때문이다. ... 너희는 나에게 와서 생명을 얻으려고 하지 않는다. ... 너희에게 하느님 사랑하는 마음이 없다. ... 너희는 나를 받아들이지 않는다. ..."(요한 5,38.40.41.43) 이런 유다인들의 태도를 하느님께서 광야의 이스라엘 백성을 묘사하신 탈출기의 한 문장이 요약합니다. "내가 이 백성을 보니 참으로 목이 뻣뻣한 백성이다."(탈출 32,9)

예수님께서 당신이 하느님의 아들 메시아라는 사실을 증명하는 것이 세 가지 있다고 하시는데, 바로 세례자 요한, 예수님께서 하시는 일들, 그리고 성경입니다. 온 백성이 참된 예언자로 믿는 요한이 직접 증언했고, 하느님 백성을 죄와 어둠에서 구해주시는 예수님의 업적들이 증언하며, 무엇보다 성경의 율법과 예언서가 증언하는데도, 소위 하느님 백성인 유다인들은 꿈쩍도 하지 않을 뿐더러 오히려 마음은 더 굳어지고 목덜미는 더 뻣뻣해져갑니다.

유다인들의 굳은 마음을 낱낱이 드러내시는 예수님의 말씀은 흡사 탈출기에서 백성에 대해 분노를 모세에게 표현하시는 하느님의 심정과 닿아 있습니다. "네가 이집트에서 데리고 올라온 너의 백성이 타락하였다."(탈출 32,7) 그런데, 아, 너의 백성이라니요... 이집트에서 데리고 올라온 이가 모세라니요... 하느님 입에서 나온 이 표현들이 참 아픕니다. 분명 내 것인데 내 것 아닌 듯이 구는 이에게 드는 분노, 배신감, 실망, 슬픔까지, 하느님은 지금 참 많이 참고 계십니다. 그 말씀들 뒤에 드리워진 안타까움과 서운함 역시 두 분이 함께 겪고 계십니다.

"나는 사람의 증언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요한 5,34) "나는 사람들에게 영광을 받지 않는다."(요한 5,41) 스스로 충만하신 하느님, 예수님은 누구의 증언이나 추켜세우고 거드는 말이 필요 없으십니다. 그것 없이도 충분히 하느님이시고 또 영광 자체이시니까요. 당신께 이로울 일 없이 사랑 때문에 그저 내주고 베풀고 행복하게 하시려 인간과 계약을 맺고 구원 사업을 펼치시는 하느님, 예수님께서 바라시는 건 증언이나 영광이 아닌 믿음과 사랑인데 인간은 어찌 그리도 야박하고 비정한지요.

그런 이스라엘 백성에게 진노를 터뜨리시려는 하느님을 모세가 가까스로 진정시켜 드립니다. 모세는 하느님과 백성 사이에 서서 하느님의 진노를 막아 불충한 이스라엘 백성을 재앙에서 구해낸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고집불통 유다인들에게 더이상 모세의 개입을 기대하지 말라고 하십니다. "너희를 고소하는 이는 너희가 희망을 걸어 온 모세다."(요한 5,45) 그렇다면 이제 진정 이스라엘에는 희망이 없는 걸까요? 그들이 믿던 모세마저 등을 돌린다면...

하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독서 마지막의 말씀인, "그러자 주님께서는 당신 백성에게 내리겠다고 하신 재앙을 거두셨다."(탈출 32,11.14)는 독서 뿐 아니라 복음을 마무리하는 말씀이 되기도 할 것이니까요.

예수님께서 말씀은 그렇게 하셨지만 결국 모세가 행했던 중개 역할을 넘어서, 당신 자신의 희생으로 하느님과 인류의 화해를 이루십니다. 그분은 십자가에서 활짝 벌린 두 팔로 하느님의 진노를 막으시고, 친히 흘리신 물과 피로 온 인류를 하느님께 맞갖는 자녀가 되게 정화하셨습니다. "그러자 주님께서는 당신 백성에게 내리겠다고 하신 재앙을 거두셨다."(탈출 32,11.14) 다행히도, 또 감사하게도 이 말씀은 복음의 말미를 맺기에 손색이 없습니다.

유다인들은 모세 시대 정도의 가르침과 중개 역할로는 꿈쩍도 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당신 스스로를 희생제물로 바치신 새로운 계약을 세우셨고요. 그렇다면 이천 년도 넘게 지난 지금 우리 시대는 어떨까요? 날마다 도를 넘어서는 죄악으로 아드님의 십자가 죽음보다 더한 중개안이 나와야 하는 걸까요? 감사하게도 수난, 죽음, 부활의 파스카를 통한 예수님의 구원 사업은 단 한 번의 제사로 완성되었고 그 효력은 영원합니다. "한 번의 예물로, 거룩해지는 이들을 영구히 완전하게 해 주신 것입니다."(히브 10,14)

 

그러니 우리는 또 다른 중개자를 찾아 기웃거릴 필요가 없습니다. 이미 이루어 주신 구원의 발판을 딛고 서서 "언제나 그 얼굴을 찾아라."(입당송) 하시는 말씀을 따라 그리스도의 해바라기로 살아가면 됩니다. 해바라기가 하늘에 떠오른 해를 향해 얼굴의 방향을 움직일 수 있는 건 목덜미가 뻣뻣하지 않고 유연한 덕분이지요. 하느님 향한 믿음과 사랑은 유연하고 유순한 영혼의 정수입니다.

사랑하는 벗님 여러분, 우리는 가끔 정말 화가 나면, "참는 것도 한도가 있다."는 표현을 쓰지요. 그렇습니다. 하느님께서는 끊임없이 우리를 참아주십니다. 우리가 하느님의 사랑과 자비를 알아차리고 그분이 보내신 분을 믿고 받아들이기를 기다리고 또 기다리십니다. 그러나 이제 더이상 기회가 없을 수도 있습니다. 우리가 믿고 의지했던 모든 것이 허수아비처럼 힘없이 무너지고 우리를 막아주고 변호해주었던 사람들마저도 우리를 떠나고 비난하고 고소할 때가 올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위기는 또한 최고의 기회이기도 합니다. 우리가 마음만 고쳐먹고 돌아서기만 하면 놀라운 은총의 선물이 기다리고 있으니까요. 부활을 준비하는 이 시기가 그래서 구원의 때요 은총의 시기입니다. 아멘.